최근 수정 시각 : 2019-07-22 16:46:30

나폴레옹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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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Louis-Napoléon Bonaparte)
출생 1808년 4월 20일
프랑스 제국 파리
사망 1873년 1월 9일 (64세)
영국 잉글랜드 켄트 치슬허스트
재위 프랑스 제국의 황제
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재임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1848년 12월 20일 ~ 1852년 12월 2일
배우자 외제니 드 몽티조 (1853년 결혼)
자녀 루이 나폴레옹
아버지 루이 1세
어머니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1. 개요2. 가족3. 정계진출4. 프랑스 황제5. 평가6. 출생의 비밀7. 가족과 후손들
7.1.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7.2. 외제니 황후

1. 개요


본명은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Louis-Napoléon Bonaparte). 프랑스 역사상 첫 대통령[2]이자 마지막 황제(이자 군주)이다. 그리고 보나파르티즘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실상의 창시자. 그의 치세는 근대적 독재자의 선례를 만들었다.

대통령 취임 당시 40세로,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39세의 나이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2. 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알려져 있었다. 알려져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아래 항목 참조.

루이 보나파르트는 아내인 오르탕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오르탕스가 남편과 별거하게 된 후 애인이던 플라오 백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모르니 백작으로, 이부형의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다.

3. 정계진출

루이 필리프 1세 치하에서 몇 차례 반란을 기도했다가 실패하여 수감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해외를 떠돌면서 잉여로운 인생을 살았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자 갑툭튀하여 '나폴레옹주의의 계승자', '프랑스의 영광의 재현'을 내걸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보통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다[3]. 그의 득표 가운데 3분의 2 가량은 보수세력의 텃밭이었던 소농들에게서 나왔으며, 2월 혁명 당시 사민주의 이념에 기반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창하였다가 부르주아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한 노동자들 역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에게 몰표를 던져주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그의 정적들 대부분은 그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의지할 뿐인 얼간이 정도로 생각했기에 갈수록 황제같아지는 그의 언행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한 중임을 시도했으나 의원의 3/4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병크를 일으켜 지지가 떨어지자 이들로부터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임기 마지막 해인 1851년 삼촌처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민투표로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다. 그의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전형이 된다.

4. 프랑스 황제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펴 베트남 침공, 제2차 아편전쟁, 병인양요,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을 치뤘고, 1864년에는 멕시코에도 개입하여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친프랑스 멕시코 제국을 세우려 책동했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적극 진출하고 남미에서는 안데스 산맥 일대를 통괄하는 친프랑스 국가를 세우려 하는 등의 확장책을 펼쳤으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열강들과의 갈등이나 황제 개인의 허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해외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선전했음에도 결국 실리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는 사르데냐를 지원해 안시니스 등의 사보이 지방의 영토를 획득했고[4]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는데 이게 그나마 제대로 된 대외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5] 남북전쟁 때 목화 때문에 잠시 남부를 승인하는 듯이 행동했지만, 공식적으로 승인한 적은 없었다.

외교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원인이 영국을 적대한 것에 있다고 보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질 수는 없었지만, 아편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에서 그런대로 협조가 가능했고,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프랑스가 베트남 등으로의 확장을 시도할 때도,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강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확장이 영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에도 집적거렸다는 말이 있는데 1846년의 개항요구는 루이 필리프 1세 시절이다. 하지만 1866년의 병인양요는 그의 치세에 벌어진 일이 맞으니 조선을 집적거린 것은 맞다.

오히려 그의 치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내치에 있는데, 값을 안정시켰고, 극빈층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정비하여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 등Shift을 실시했으며, 경제 진행 및 "파리 개조 사업"(파리 시가지의 가도망 정비) 등의 치적을 세웠다. 사실 이런 복지정책이 이르게 도입된 이유에는 프랑스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낮은 인구 성장률과 고령화 국가의 특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훗날의 보불전쟁 이후의 프랑스군 안습 전설은 이런 인구 구조에서도 비롯되었던 것.

파리는 그의 치세에서 화려하게 탈바꿈되어 현재의 파리의 모습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고, 벨 에포크 시대에 온갖 예술가들이 몰려들던 '빛의 도시'의 명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파리 개조 사업은 단순하게 수도로서의 위엄을 높위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시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한다는 측면도 강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파리의 도로망은 상당히 좁아서 바리케이트가 일단 형성되면 해방구처럼 되어 진압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좋은 예가 레 미제라블의 후반부에 마리우스 일행이 당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실제로 훗날 파리 코뮌이 진압당할 때, 너무 넓은 주요 도로의 폭으로 인해 바리케이트의 방어력이 저하된 것이 큰 원인이라고.

비록 정적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고, 언론의 자유 또한 억압되었지만 제정 중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내치 정책은 비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극빈층은 복지 때문에, 중산층은 그가 부풀린 사회주의의 위협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파시즘이 이렇게 등장했지 후반에는 야당이 정치적 우위를 보이자 입헌군주적 요소를 헌법에 도입해 이들을 달래기도 했다. 이런 입헌군주적 요소에는 1864년 결사의 자유 승인, 1868년 집회의 자유 인정, 의회의원 권리확대, 언론 자유화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단서가 너무 많았다. 이러한 모습은 훗날 파시즘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독재자의 전형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귀스타브 르 봉은 이러한 모습들을 바탕으로 군중심리를 출판하기도 했고.

해군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고 체계적인 해군증강계획을 세워 세계 최초의 철갑함과 증기추진 전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건조 중인 것을 포함하여 전열함 51척(그 중 범주함 37척, 스크류함 14척), 프리깃함 82척(범주함 40척, 스크류함 23, 외륜함 19척), 코베트함 38척(범주함 18척, 증기함 20척)을 주력으로 하는 336척까지 도달했고, 이러한 막강한 함대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영국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부르봉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6]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에서 노련한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끌려다니는 외교로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기에 멕시코 원정의 실패와 병환의 악화로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후반부터 입헌 군주로의 변혁을 꾀하고 권력을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보불전쟁 직전 즈음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황제의 손을 떠난 상태였고, 실권은 의회가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강 소(小)라인란트, 자를란트, 팔츠 지방 란다우 및 룩셈부르크[7], 벨기에를 집어삼키려 집적 거렸으나 이는 영국을 자극해서 영국이 프로이센 기울어 프로이센에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삽질이었으며 결정적인 패착으로 꼽힌다. 프랑스 여론이 비스마르크에게 거하게 낚여 1870년에 보불전쟁을 개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으며 이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8] 백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직접 전선으로 출전했으나 그의 군사적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으니 군데군데 들리는 포성과 함성 소리,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보다 못한 측근들이 얼굴에 혈색이 돌게 보이게끔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여러 차례의 삽질 끝에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는데,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장교 하나는 포탄에 맞아 죽었고 옆에 있던 군의관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1870년 9월 1일 오후 항복하여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에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황제는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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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작품,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독일 카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권좌 복귀를 꿈꾸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총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가 완전히 몰락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1871년 3월 영국으로 망명, 시덥잖은 글을 쓰면서 소일하다가 1873년 1월 방광 결석[9]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유해는 햄프셔 북동쪽 판버러(Farnborough)에 있는 세인트 미카엘 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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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주치의와의 대화가 스당 전투에서 자신은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내용일 정도로 사람들에게 겁쟁이로 매도당하는 걸 마음에 두고 죽었다.

집권 기간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1세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떨어진다. 그가 죽자 공화국으로 돌아온 프랑스는 그에게 아첨하던 무수한 인물들을 숙청하거나 매장했는데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쏴죽인 조르주 당테스였다.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폐위와 몰락 이후 숨어서 살며 20년 넘게 비참하게 살다가 83세인 1895년에 쓸쓸하게 죽었다.

5. 평가

나폴레옹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
빅토르 위고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무리의 병정들에 둘러싸여 있던 1804년의 꼬마 하사관 다음에는 한 무리의 부르주아지에게 둘러싸인 1851년의 콧수염쟁이.
카를 마르크스

지식은 많았으나 그리 지혜롭진 않았다. "독일어 같은 프랑스어, 프랑스어 같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같은 영어, 영어 같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는 괴상한 말이 있다.[10]

인간적인 매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인간 아편"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데 능란했고, 호기심 또한 왕성해서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워 제정을 다시 세운 주제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자신의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은 곧 지도자의 사생활(…)로 연결되는 것인지, 색욕이 매우 왕성하여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유럽을 전전하던 중에도 각지에 자신의 정부를 두고, 감옥에 유폐되었던 당시에도 리 백작 부인과 그 하녀에게 아이를 갖게 했으며 탈옥하여 런던으로 망명 중일 때에도 헨리에타 하워드라고 하는 여배우를 정부로 삼았었다. 그 결과 매독 크리…반대로 아내는 이집트 총독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정 운영 능력은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순수한 정치적 능력, 즉 인기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며, 대중정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가 정적으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때 이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가장 애용한 것은 국민투표였다. 그래서인지 에릭 홉스봄은 저서 <자본의 시대>에서 이 사람을 샤를 드골의 선배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비꼬는 사람 중에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자의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가난뱅이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또한 최근 들어와서는 수정주의 계열 역사학자들로부터 추후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는 민주주의를 견습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가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왕당파에게는 자신 역시 군주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하면서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즉, 다양한 욕망을 가진 집단들에게 (실제로는 그 모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믿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 강렬한 카리스마와 대중적 호소력을 통해 실체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이로써 현실성 없는 기대와 추상적인 국가적 영광의 이미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휩쓴 파시즘적 광풍의 효시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히틀러의 선배격.

위에서 정적들이 그를 나폴레옹의 후광에 의존한 광대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즉, 대중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던 데 비해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에게는 평가가 극히 나빴던 것. 그의 정치 스타일을 파시즘의 효시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보인 이와 같은 태도는 선동가를 지나치게 경멸하고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다가 근현대사 최대의 참극을 불러온 파시즘에 대한 경멸적이지만 미온적인 대처의 효시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내치에서는 제법 업적을 남겼는데, 물가를 안정시켰고 극빈층 복지 정책을 정비하여 위생 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 등의 정책을 실시했으며, 벨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주요 유럽 국가와 자유 무역을 위한 관세 협정을 맺어 무역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또한 "파리 개조 사업"(시가지 가도망 정비) 등의 치적을 세워 훗날 벨 에포크 시대에 세계인이 선망하는 '빛의 도시'로서의 파리의 기초를 닦았다. 거기에 식민지 정책에서도 꽤 성과를 거두어 이때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가 식민지가 되었다.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큰아버지처럼 대제국을 건설해보겠다는, 능력 밖의 허영심만 안부리고 조용히 내치에만 주력했으면 적어도 큰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평가는 안받았을 지도 모르지만 허영심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할 수 있다.

보통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키가 작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의 키는 당대 평균보다 오히려 약간 컸고, 진짜로 키가 작은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 당시로서도 작은 키여서 160cm도 안 되었다고 한다.

6. 출생의 비밀

최근 유전자 검사 결과 나폴레옹과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오르탕스가 바람피운 애인의 자식인 것이 확실해졌다.[11][12] 나폴레옹과 그 후손들의 하플로그룹검사는 하플로그룹 E1b1b였는데 나폴레옹 3세의 머리카락과 후손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검사는 I2a2가 나왔다고 한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의 아들이니까 하플로그룹이 동일하게 E1b1b가 나와야 한다. 어쩐지 안 닮았더라

당시에도 나폴레옹 3세가 혼외자식이란 소문이 돌았다. 누가 진짜 생부인지는 알 수 없다.[13]

그러나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이라고 굳게 믿었고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도 없었으며 또한 보나파르트 가문의 구성원으로써 평생을 바쳤다. 게다가 그 아들인 나폴레옹 황태자도 살아서 후사를 남겼으면 훗날에라도 이 문제가 거론됐겠지만, 그가 독신인 채로 자식도 없이 아프리카의 전쟁터에서 전사했으니, 논란의 여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보나파르트 가문 측도 나폴레옹 3세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기사를 보고도 그냥 그랬구나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저 루이 보나파르트만 안습

7. 가족과 후손들

7.1.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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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Napoléon Eugène Louis Jean Joseph Bonaparte
(1856년 3월 16일 ~ 1879년 6월 1일)
나폴레옹 3세의 유일하게 공인된 아들[14]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는 황태자였으나, 보불전쟁으로 부친이 폐위당해 영국으로 망명하자 따라갔다가 영국군에 자원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외제니 황후를 설득하여 안전할 것임을 보장한 다음에야 그는 줄루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참관인 자격으로 정찰하던 도중 40명이나 되는 줄루족 전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맹렬하게 맞서싸웠지만 결국 다리와 어깨에 창을 맞고 쓰러져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줄루족은 자신들의 전쟁 예법에 따라 죽은 자가 이승에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창으로 열여덟 군데나 찔러 시신을 크게 훼손했는데, 이게 본의 아니게 전 유럽의 분노를 사버렸다. 그의 호위병들도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고, 그의 시신은 아버지가 묻힌 세인트 미카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루이는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보나파르티스트들이 그를 황제로 예우하여 나폴레옹 4세라고 호칭된다. 그런데 불과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 클레이 중위와 그의 병사들은 황태자가 죽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고 후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여왕과 황후의 중재로 풀려나지만 온 유럽 대중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그는 불명예제대를 당한 후 인도로 떠나서 7년 후에 봄베이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줄루족은 자신들이 죽인 백인 장교가 보나파르트 황가의 후계자이자 명목상 프랑스의 황태자임을 알고 경악하여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줄루족의 왕 랑갈레발레레가 불과 한달 후인 7월에 영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영국은 명목상이지만 백인 황태자가 유색인종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줄루 전쟁에 박차를 가해 결국 줄루랜드 전체를 식민지화했다.그냥 줄루랜드 식민화를 위한 포석이자 버리는 돌이었다
여담으로 부르봉왕가의 앙리5세의 양자가 될뻔 했다. 하지만 앙리5세 복위 과정에서 왕당파가 요구한것은 오를레앙파인 파리백작 필리프를 양자로 삼으라는 요구를 받았고 보나파르트보다 오를레앙을 더 증오하던 앙리5세는 그냥 왕위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7.2. 외제니 황후

파일:463px-Empress_Eugenie_1856.jpg
외제니 드 몽티조 Eugénie de Montijo,
(1826년 5월 5일~ 1920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의 황후는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로 외제니 황후라 불렸는데 에스파냐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15] 그녀가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된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본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유럽의 왕가의 여성들에게 혼담을 넣었다. 처음에는 스웨덴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손녀인 카롤라에게 혼담을 넣었지만 카롤라의 아버지인 바사공 구스타프는 바사 왕조와 보나파르트 왕조 간의 껄끄러운 역사, 불안정한 나폴레옹 3세의 지위를 생각해 거절했다. 뒷날의 일을 생각하면 선견지명인 듯.[16] 두 번째로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인 아델라이드에게 혼담을 넣었는데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왜 이리 까이기만 할까. 어쨌든 나폴레옹 3세가 후계자를 자처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의 적이었던 점도 있을 것이고 빅토리아 여왕이 보기에도 그리 안정적인 혼처로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외제니와 결혼을 했는데 정작 외제니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만 잠자리를 했다고 한다.[17] 남편이 보불전쟁 패배로 제위에서 밀려나면서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남편과 외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이후 영국에서 줄곧 체류하며 영국, 러시아 왕실 인사들과 교류했고,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 지원을 위한 모금 및 기부활동을 펼쳐 그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결국 90세를 넘기며 장수한 끝에 1차대전이 끝난지 2년만인 1920년에 타계했다. 남편과 일가를 몰락시킨 독일 제국의 패망을 보고 죽었으니 나름 복수를 한 셈이지만, 그로 인해 가까이 지냈던 유럽 왕실들의 몰락도 함께 목격했으니 복잡한 심정이었을 듯. 유해는 앞서 죽은 남편, 외아들이 묻힌 영국 판보로의 수도원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후의 황실 수장은 왕위 요구자/유럽/프랑스 문서를 참고.
[1] http://dicocitations.lemonde.fr/citations/citation-105257.php[2]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는 '대통령'직이 없었다.[3] 2002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장 마리 르펜을 상대로 82%로 압승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 득표율로 남아있었다.[4] 그 전까진 사르데냐의 영토였다.[5]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이때 내준 영토 때문에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을 하게 만들기는 했다.[6] 이사벨 2세가 쫓겨났다.[7] 국내 서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라인란트 전체를 요구했다는 서술이 많은데 요구한건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팔츠지방 바이에른 왕국령 란다우와, 중립국 룩셈부르크였다. 이는 빈 회의 때 초반 프랑스 국경을 1792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축소시키려 했을때 프랑스령으로 남았으나 백일천하로 취급이 더 가혹해져서 1790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수정되어 독일연방에 할양된 영토로 소(小)라인란트라고 칭한다. 출처는 세계외교사(김용구)[8]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하면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미 프랑스 여론은 들끓었고 나폴레옹 3세조차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9] 비둘기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10] 실제로 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일에 장기간 체류했었던 탓에 독일어 억양이 배인 프랑스어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다고. 그리고 독일어는 프랑스어 억양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뭐 모든 분야에 대해서 대충 알고있긴 한데 전부 어색했다란 냉소적 해석이 있긴하다.[11] 출처: http://www.eupedia.com/europe/Haplogroup_I2_Y-DNA.shtml[12] 사실 이런 일은 유럽 귀족계에서 흔했다. 유전자검사를 하고 족보를 대조해보면 모계는 확실한데 부계는 안 맞는 일이 많다. 헤르만 괴링의 동생인 알베르트 괴링도 생부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이 아니라 헤르만 에펜슈타인 백작이라고 한다.[13] 그나마 생부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오르탕스가 남편과 별거하게 된 후의 애인인 플라오 백작이다. 오르탕스가 플라오 백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모르니 백작의 얼굴을 보면, 이부형제 사이라고 하기에는 둘의 얼굴이 상당히 닮았다.[14] 나폴레옹 3세는 황제에 오르기 이전부터 많은 정부(情婦)가 있었고 따라서 사생아도 많았지만, 당연히 사생아를 정식 후계자로 삼기는 곤란하다.[15] 그녀의 아버지는 보나파르트 지지자였다.[16] 바사공은 1877년까지 살아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소식을 들은 그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7] 외제니 황후는 유산을 겪은 후로 몹시 괴로워했는데,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의 잠자리 역시 기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