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Empire français | ||
국기 | ||
<rowcolor=#fff> 황제기 | 국장 | |
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 ||
성립 이전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이후 | |
프랑스 제2공화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
파리 코뮌 | ||
국가 | 시리아로 출발하라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와 알제리 및 전세계 일부 식민지 | |
수도 | 파리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나폴레옹 3세) | |
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프랑스인 | |
주요사건 | (1851년 프랑스 쿠데타) 1852년 건국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및 패배→멸망 | |
통화 | 프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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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3세가 1852년 건국한 제국이다.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멸망했다.프랑스 역사의 마지막 제국이자 군주국이다. 프랑스 제2제국 멸망 이후 프랑스는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2. 역사
1848년 2월, 2월 혁명으로 새로 정착한 임시정부는 1848년 12월부터 첫 대통령을 뽑았다.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안정과 가족, 가톨릭 보호 등을 내세우며 이 선거에서 74.2%라는 압도적인 우위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초기에는 공화정에 여러번 충성을 맹세하는 등 공화정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1851년 12월 2일 자신만의 정치를 도입하고자 친위 쿠데타(1851년 프랑스 쿠데타)로 프랑스 제2공화국의 공화정과 민주주의 제도를 껍데기만 남긴 채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늘리고 연임 제한[1]을 없애버렸으며, 의회를 반신불수로 만드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자신이 구축한 독재체제가 안정되었음을 파악한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12월 2일에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정치에 있어서는 철권 통치로 일관하였지만,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약속하면서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 이에 발맞춰서 식민지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기존 정부와 달리 나폴레옹 3세는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나간다. 여기에 전부터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세력이 추진하던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파리를 재개발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것 자체는 보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전반적인 경제 상황에서 그런 기조를 드러내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1855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
하지만 멕시코에 친프랑스적인 정부를 내세우려다 막시밀리아노 1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부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어설프게 간을 보다가 프로이센 왕국의 부상을 방관하는 것과 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외교정책도 연달아 실패로 끝나면서 황제에 대한 지지는 날이 갈수록 무섭게 떨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외교정책이 제국과 황제 자신의 파멸을 불렀다. 1870년 스페인에서 보르본 왕조가 축출되자 스페인은 프로이센 왕국의 통치 가문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슈바벤계에 왕위를 제의했다. 이에 발끈한 나폴레옹 3세는 빌헬름 1세에게 항의했고 이것이 노련한 비스마르크의 손을 거치면서 엠스 전보 사건으로 조작되어 양국 사이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기존에 나폴레옹 3세 본인이 하도 온 유럽에서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나댔던 탓에 모든 유럽이 프로이센을 지지하거나 프로이센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유지했다.[2] 프랑스군은 시종일관 프로이센 왕국군에게 끌려다녔고 나폴레옹 3세 본인은 프랑스군이 참패한 스당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이렇게 제2제정은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정치
전기에는 전제군주제, 후기에는 입헌군주제라고 정리할 수 있다.보통 선거를 존속시킴으로써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제2제정의 초기 정치체제는 제1제국 시절과 매우 비슷해 실질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행정권과 사법권은 황제의 손안에 놓여있었으며, 헌법상 독립된 입법권 역시 정부가 추천한 사람들만이 의원 선거에 나설 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모든 남성에 대한 보편적인 참정권이 보장되기는 했지만 의회는 황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물을 권리도 없었으며 심지어 법률을 발의하거나 감사할 권리도 없었다. 모든 법률과 정책은 정부가 주도해 발의하고 처리했으며, 1857년까지는 공식적으로 야당도 금지되었었다. 직전 제2공화국 시절 다수당을 점유했던 왕당파 질서당은 금지되었고, 왕당파들은 1863년이 되어서야 선거에 나갈 수 있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나 공화주의자들의 선거 당선을 방해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선거구 게리맨더링이 자행되었다. 덕분에 1852년과 57년 선거에서 당선된 공화주의자는 불과 7명 뿐이었고, 1863년에는 17명으로, 69년에는 30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 억압받았다.
당연히 집회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언론에게 검열 및 폐간과 같은 탄압은 기본이였고, 빅토르 위고와 같은 체제 반대파들은 추방 및 투옥된다. 한편 정권 내내 강한 탄압을 받은 법통주의자들과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갔고, 이는 1871년의 융합주의 운동으로 연결된다.
1850년대까지는 이러한 철권통치가 지속되었지만, 1860년대 이후 외교 정책에서의 실책으로 황제의 권위가 손상되자 나폴레옹 역시 의회와 대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조금씩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기 시작했고, 1861년 의회에 부처별 예산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등 의회도 입법부로서의 독립성을 되찾기 시작해 제2제정 말기에는 황제보다도 더 실권을 많이 쥐고 있었다. 또한 노동운동도 제정 후반기에 들어가면 활발해지기 시작해서 1864년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났고, 정부가 이에 굴복해 노동조합의 결성 및 파업을 실시할 권리를 인정해준다. 한편 이 시기 영국에서 인터내셔널이 설립되면서 프랑스에도 공산주의 운동이 거세졌고, 이는 파리 코뮌으로 연결된다.
1860년대 이후부터 황제의 총체적인 외교 실패나 대응 미비로 인한 독일의 성장 등이 이어지자 공화주의, 자유주의, 왕당파(오를레앙주의, 법통주의)의 야당들이 연합에 자유주의 연합(The Union libérale)를 결성한다. 이들은 1863년 선거에서 총 40석이라는 다소 미진한 성과를 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늘어난 것이었다. 아돌프 티에르를 위시한 자유주의 연합은 정부를 점점 압박하며 언론과 의회의 자유를 요구했다. 결국 황제는 한발 물러서 내무부 장관 페르시니 공작을 물러나게 한뒤 황제의 측근 중 하나였던 외젠 루어를 국회의장으로 임명하게 해서 대신 그가 역임하던 장관직 하나를 교체하는 등 개각을 단행했다. 또 공화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자 교육부 장관에 반교권주의자를 임명했다. 반면 빅토르 위고와 같은 강경 부르주아들이나 강경 법통주의자들이 정부 전복을 노리는 것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폄으로서 무마했으며, 미국 남북전쟁 종전으로 인한 경제 사정 개선과 이탈리아 위기[3]의 종식, 독일의 성장을 너무 용인하는것 아니냐는 불만을 만들어낸 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종전 등으로 외교 위기가 해결되어 반체제 운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1869년 총선거에서는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자유 보나파르트파가 제1당이 되며 정치적으로 더더욱 궁지에 몰렸었다. 선거 이후 공화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파리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금지되었던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봉기를 일으켰으나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시간만에 해산되는 일도 있었다.
4. 성과
나폴레옹 3세의 성격상 좌충우돌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모습이 크기는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업적들도 남겼다.- 외젠 오스만(Eugéne Haussmann) 남작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파리 개조 사업을 통해 파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근대적이면서도 도회적이고 세련된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오늘날 파리의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13개의 도로에 따라 파리의 행정 구역이 보기 좋게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관뿐만 아니라 도로폭이 좁아서 한 번 바리케이드가 설치되면 난공불락이었던 대중들의 시위를 막으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돈없는 세입자들이 쫓겨나서 빈민촌을 파리 외곽에 형성한 게 사회문제로 부상하기도 했다.
- 극빈층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펼쳤다. 가령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 주택 건설과 같이 사회 복지 정책의 시초를 보여주었다.
- 베트남을 식민지화하였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이탈리아 통일을 도와 니스와 사부아를 획득했다.[4]
[1]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연임은 불가능하고 중임은 가능하였다. 임기(4년)가 끝나면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다시 출마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대통령 임기 중 의회 의원 대다수와 척을 지는 바람에 대통령에서 물러나는 즉시 아예 정계에서 배제될 수도 있었다.[2] 나폴레옹 3세는 독일 내에서 바이에른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민족주의에 편승한 바이에른이 프로이센 편을 들었으며, 헝가리에서의 봉기 우려 등으로 제 코가 석자가 된 오스트리아도 중립으로 남아주면서 산통이 다 깨졌다.[3] 나폴레옹 3세는 교황령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으나 이탈리아 통일 전쟁 과정에서 이탈리아가 교황령을 합병하려 시도해 균열이 생겼다.[4] 더 정확히는 나폴레옹 3세가 카밀로 카보우르 몰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빌라프랑카 강화를 체결하여 플롱비에르 조약을 위반하였으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중앙이탈리아 연합주 합병을 묵인하는 대가로 1860년 토리노 조약을 통해 니스와 사부아를 할양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