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4:50:58

아키텐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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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00><colcolor=#000,#FFF> ~ 843년 갈리아 켈트족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서로마 제국
수아송 왕국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서고트 왕국
843년 ~ 1940년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아키텐 공국 · 노르망디 공국 · 브르타뉴 공국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1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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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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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자유 프랑스 비시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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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 공국
Ducat d'Aquitània
Duché d'Aquitaine
파일:아키텐 공국 깃발.png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아키텐 공국 지도.png
앙주 제국의 구성국으로서의 아키텐 공국[1]
602년 ~ 1453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서고트 왕국
우마이야 왕조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2]
프랑스 왕국
위치 <colbgcolor=#fff,#191919> 프랑스 누벨아키텐, 오베르뉴론알프(오베르뉴)
수도 툴루즈[3]
푸아티에
리모주
부르주[4]
보르도[5]
정치체제 봉건군주제 (공국)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엘레오노르 다키텐(1137~1204)
리처드 1세(1172~1199)
언어 고대 오크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종족 옥시타니아인
언어별 명칭
중세 프랑스어 Acquitaine
라틴어 Ducatus Aquitaniae
오크어 Ducat d'Aquitània
프랑스어 Duché d'Aquitaine
영어 Duchy of Aquitaine

1. 개요2. 역사
2.1. 초기 역사2.2. 카롤루스 아키텐2.3. 앙주 제국2.4. 백년전쟁
3. 역대 군주4. 여담

[clearfix]

1. 개요

유럽의 옛 국가.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의 누벨아키텐오베르뉴론알프 일대에 존재하였던 공국이다.

고대에는 로마 제국속주 갈리아 아퀴타니아 프리마/세쿤다가 있었고, 고대 말~중세서고트 왕국프랑크 왕국을 거치면서 독립 혹은 자치세력으로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가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1153년, 정략결혼에 의해 아키텐은 잉글랜드 왕국 앙주 제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는 프랑스잉글랜드, 카페-발루아앙주-플랜태저넷기나긴 갈등을 예고하는 시발점이었다. 일련의 충돌 끝에 13세기 중반이 되자 가스코뉴만이 앙주의 지배하에 남았으며, 마침내 1450년대에 이르러 백년전쟁을 통해 프랑스 왕국이 아키텐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고, 공국 영지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 왕실의 영토에 직접적으로 통합되면서 1453년 아키텐 공국은 소멸하였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고대 로마 시대에는 갈리아 아퀴타니아 속주가 존재했었다가 5세기에 서고트 왕국(툴루즈 왕국)령이 되었다. 그러나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이 승리하면서 툴루즈 일대와 함께 아키텐도 프랑크인들이 정복하였고, 메로베우스 왕조 동안 국왕의 직할령이나 분할상속에 의한 하부왕국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토착 아퀴타니아인과 바스크인의 땅으로서 수 차례 반란이 일어나는 곳이었고,[6] 프랑크 왕국 내에서도 내분과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보르도 백작령이나 가스코뉴 공작령, 아키텐 공작령 등으로 분할되었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하였고,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 세력이 되었다. 특히 8세기 경에는 아키텐 공작 위대한 오도(Odo the great)가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툴루즈에서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지속적으로 프랑크 왕국과 우마이야 사이에서 압박을 받으며 세력이 위축되어갔다. 특히 프랑크 군대에 크게 패한 후 우마이야 군대에도 패하면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었고, 오도의 자손들과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의 후손들 간에 수 차례 전쟁이 벌어진 끝에 그의 손자 와이오파르(Waiofar) 및 증손자 후날드 2세(Hunald II) 시대에는 완전히 멸문하여 공국은 프랑크 왕국령으로 편입되었다.

2.2. 카롤루스 아키텐

이후 한동안 공국은 존속하지 않았으나 곧 카롤루스 제국 내의 하위 왕국으로 부활하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옛 아키텐 공국을 재편하면서 가스코뉴나 히스파니아 변경주 등 주변부를 합쳐 아키텐 왕국을 만들었고, 이를 루도비쿠스 1세에게 수여하였다. 루도비쿠스 1세는 일종의 부왕으로서 카롤루스 대제가 프랑크 제국의 본토인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 왕국에서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아키텐과 스페인의 통치를 맡았는데, 공동황제로 즉위하게 된 이후에도 연고지인 아키텐에서 거처하다가 카롤루스 대제 사후 단독 황제가 되면서 자신의 아들 피핀에게 분봉하였다.[7]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의 치세 동안 수 차례 내전이 벌어졌는데, 아키텐 국왕 피핀 1세의 사망에 따른 아키텐 왕위 계승 문제 또한 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가 840년 사망하고 843년 베르됭 조약이 맺어지면서 아키텐은 그 이후로 서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분할 직후에는 피핀 2세가 통치하는 하위왕국으로서 서프랑크 왕국의 봉신국이었는데, 봉신들을 제압하려는 샤를 2세에 대항하여 다른 제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아키텐인들의 봉기로 축출되었고 샤를 2세에게 패하여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루이 2세 시대에는 아키텐이 서프랑크로 흡수되어 독립적인 왕국에서 봉신 공국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키텐의 변경 지방들이 푸아투 백작령이나 오베르뉴 백작령, 가스코뉴 공작령 등으로 분리되어 공국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공작위 또한 푸아투 백작가문과 오베르뉴 백작가문, 카페 왕조 등 여러 가문으로 소유권이 옮겨다녔는데,[8]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 동안 안정적으로 공작위를 차지한 것은 푸아투 백작가였다.

2.3. 앙주 제국

잉글랜드 왕국의 마틸다 공주가 앙주 백작인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며 탄생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프랑스 중부북부에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9]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틸다의 아들이던 헨리 2세아키텐 공국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하면서 아키텐도 앙주 제국의 영역 일부를 구성하였다.

헨리 2세의 아내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원래 프랑스의 루이 7세의 아내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부부 관계는 점점 소원해져갔는데,[10] 결국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이혼을 합의했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혼인 무효가 결정되자마자 잉글랜드의 왕이자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던 헨리 2세와 재혼하였다. 이 결혼으로 플랜태저넷 왕조는 무려 프랑스 땅의 30% 정도를 손에 넣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아키텐 공작위를 아들 리처드 1세에게 넘겼다. 헨리 2세와 아들들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아키텐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이는 내전이 일단락되자 곧 진압되었고, 존 왕 시대에도 노르망디와 앙주를 상실하는 동안 그 작위와 영지 일부나마 계속 잉글랜드 국왕령으로 남아있었다.

2.4. 백년전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 문서
번 문단을
가스코뉴의 주권 (1259~1327)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역대 군주

4. 여담

공국 내의 영토 중에서도 기엔 지방은 앙주 제국의 황금오리였다. 이는 아키텐 지역 자체가 유럽 내에서도 유명한 와인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존 왕 시대의 상실 이전까지 이곳의 세입이 잉글랜드 왕국 전역의 세입과 맞먹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몹시 부유한 지방이었다.


[1] 지도 좌하단에 있다. 북쪽으로는 푸아투 백국(County of Poitou), 동쪽으로는 리모주 부백국(Viscounty of Limoges)과 페리고르 백국(County of Périgord), 툴루즈 백국(County of Toulouse), 남쪽으로는 가스코뉴 공국(Duchy of Gascony)을 접하고 있다. 공국 본령에 이들 모두를 묶어서 아키텐이라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영역을 형성하였는데, 고대 로마 시대의 속주 갈리아 아퀴타니아와 그 경계가 거의 일치한다.[2] 간헐적인 멸망 혹은 흡수 후 재창설 및 분할이 일어났다.[3]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시대의 중심지. 그 이전 서고트 왕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Odo 대공의 독립시기에도 수도였었다.[4] 이상 세 도시는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왕령지일 때는 직할령으로서 종속되어 하부왕국으로서 아키텐 왕국의 일부였고, 프랑스 왕국하에서는 유력 영역제후로서 인근의 푸아투 백국이나 리모주 부백국, 가스코뉴 공국 등과 동군연합 상태였는데, 공작의 연고지에 따라 중심지가 이동하였다. 예컨대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푸아투 백작가 출신이었기에 그 시절의 영역 중심지도 푸아티에였다. #1 #2 #3[5] 로마 속주 시절부터 중심지로서 항구와 요새가 발달하였고, Odo 대공의 손자인 Waiofar의 시대에 수도로 기능하였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는 아키텐과 분리된 가스코뉴에 속할 때도 있었다. 이들 공국과는 별개로 보르도 백작령이 존재했었는데, 나중에 아키텐 및 가스코뉴에 합쳐졌다.[6] 옛 아퀴타니아 속주 중 남부의 일부가 바스크인들의 땅이었다. 바스크(Basque)와 가스코뉴(Gascogne)는 동원어로, 어원은 라틴어 바스코니아(Vasconia 혹은 Wasconia)인데, 로망스어 내에서 계통별로 다르게 음운변동이 벌어진 결과물이다.[7] 아키텐은 루도비쿠스 1세의 출생지로서 그가 자라난 곳일 뿐만 아니라 스페인 원정으로 바르셀로나를 정복하는 등 왕위를 받기 전까지 그가 전공을 세운 곳이기도 하였다.[8] 그래서 이들 지역은 별개의 작위와 영역으로 분리된 이후에도 실질적으로는 공국과 합쳐진 하나의 영역(realm)을 구성하고 있었다.[9] 앙주 백작령은 앙주 가문(잉젤거~샤토됭)의 발상지인데, 원래 앙주 가문이라고 불리던 조프루아 5세는 마틸다와의 혼인을 통해 새 분가인 플랜태저넷의 개창자가 된 것이다. 참고로 앙주 가문은 카페 왕조하고도 혈연이었기에 아르투르 플랜태저넷의 사망으로 샤토됭계가 단절된 이후로는 이쪽 계통이 상속을 하게 되었고, 이를 앙주-카페 가문이라고 부른다. 이 가문도 명문이어서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의 왕실이 되기도 했다.[10] 제2차 십자군 원정이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