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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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리아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1세기 (갈리아), 기원전 52년 - 486년 (로마 정복 이후)오늘날의 프랑스 땅에서 살아가던 켈트계 민족인 골족은 독자적인 문화 체계 기반 하에 아르베르니, 아이두이 등의 여러 부족들로 분화되어있었다. 갈리아의 골족과 그들과 근연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 이탈리아의 켈트계 세력은 오랜기간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하였는데 로마 공화국은 이들과의 대립을 오랜 세월 반복적으로 이어갔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지휘관이자 역사적인 명장 중 한 사람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전쟁을 주도하여 골족에 속하는 제부족 집단들 중 우호적인 부족들을 포섭하고 반항적인 부족들을 전쟁을 통해 제압하여 단기간에 갈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아르베르니 부족의 수장이 골족을 규합하여 부족연합군을 결성하고 갈리아에 주둔하게된 로마군을 연파하며 갈리아 전역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한 때 패배 직전의 위기에 몰리고 갈리아를 포기할 상황에 처했지만 근성으로 버텨내었고 아바리쿰을 함락시킨 뒤, 알레시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항복시키고 갈리아 전역을 재평정하였는데 이후로 갈리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화하였다. 골족과 같은 갈리아 토착민들과 이탈리아 출신 이주자들이 수백년에 걸쳐 섞여 융화하면서 일명 '갈로-로만'으로 일컬어지는 갈리아계 로마인들이 갈리아의 주류 구성원이 되었다.
갈리아는 이러한 형태로 라틴화되었으며 이것이 현대 프랑스인 민족의 라틴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대 프랑스인들은 고대 골족을 프랑스의 선주민들이자 자신들의 가장 오래된 조상들로 기리긴 하지만 그것은 19세기의 근대 민족주의 정서가 구축되면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의 오랜 기원 조상들을 파헤쳐가면서 형성된 개념이었으며 그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프랑크나 하다못해 로마에서 찾았지 골족과 같은 켈트의 개념에서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켈트족와 라틴의 융합으로인해 언어나 여러 문화적인 면에서 미묘하게 켈트의 영향이 프랑스의 민족성 구축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며 이는 프랑스 민족을 규정하는 라틴계+게르만계(프랑크)+켈트계의 융합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로마에서 기원하는 라틴적 정체성과 그들에게 정복된 골족의 켈트적 정체성 모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써 긍정하며 중요하게 다룬다.
오랜기간 단일문화민족체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연속성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잘 이해가 안갈지도 모르지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영국 등 비슷하게 켈트 또는 이베리아 선주민들이 살던 땅에 로마인들이 유입되고 이후 게르만계 민족들[1]이 유입되어 이들 모두가 융합되어 새로운 카스티야, 포르투갈, 잉글리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이는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유럽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기보다는 비유럽권 전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요컨대 현대 이란 민족의 민족 개념 기반에는 이란(아리안)계인 고대 페르시아인은 물론 튀르크의 영향도 적지 않으며 북부 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의 국가들도 아랍 계열 이주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과 정복당한 토착 아마지그(베르베르) 계열의 융합이 그들 민족성의 주요한 기반으로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이 고대 시대의 골족과 그들을 정복한 로마인들 모두가 후대에 형성되는 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주요한 기원 조상들의 양 축임은 부정할 수 없다.
2. 프랑크 왕국
481년 (왕국 성립)/486년 (갈리아 지방 정복) - 987년 (위그 카페 대관)투르-푸아티에 전투 |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로 분화되고 서로마의 세력이 차츰 약해지면서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갈리아 지역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이 무수히 거쳐가게 되었다. 게르만족이라는 것은 현대 독일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켈트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게르만 계열 제어를 사용하는 온갖 민족 집단체들 전체를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는 프랑크, 수에비, 비시고트(서고트), 오스트로고트(동고트), 롬바르드, 색슨, 앵글로색슨족, 반달, 프리스, 튀링겐, 알레마니 등 다양한 민족 집단체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수에비나 비시고트, 반달 등의 족속들은 갈리아에 정착하지 않고 지나쳐 수에비의 경우 오늘날의 포르투갈 방면에 정착하여 포르투갈인의 민족적 기원 중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비시고트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과 남프랑스 일부를 장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의 스페인인의 민족적 기원 중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반달족의 경우에는 북부 아프리카로 나아가 오늘날의 튀니지에 해당하는 일대를 정복하고 국가를 건설하였다.
갈리아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크인들이 진입하여 정착하였다. 프랑크인들은 기원적으로 네덜란드의 조상 중 하나인 프리스족과 근연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지는 민족 집단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로렌, 라인란트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인들을 이끌던 시기에 서로마가 완전히 붕괴하는 틈을 타 갈리아로 진입하여 갈리아의 서로마 주둔군 장군이던 시아그리우스를 수아송 전투(486년)에서 격파하고 시아그리우스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북부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시작이며 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여 남부 갈리아 상당부분을 지배하던 비시고트 왕국을 공격하여 부이예 전투에서 비시고트 군세를 대파하고 승리를 거두며 남부 갈리아에서 비시고트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며 남프랑스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메로빙거 왕조는 수도를 오늘날의 파리에 두고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네우스트리아 지역을 자신들의 주요한 통치 권역이자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오늘날의 동남부 프랑스에 해당하는 프로방스, 부르고뉴 일대에서 국가를 세우고 살아가던 부르군트족을 공격하여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부르군트인들은 이후 프랑크에 편입되어 장기간 프랑크인의 통치를 받으며 프랑크에 조금씩 동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메로빙거 왕조는 장자상속제와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지만 초기 게르만계 민족 집단들이 유럽 사방에 퍼져 구 서로마령 각지를 점거하고 정복하여 국가를 세우면서 형성된 봉건적 질서에 기반하는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어려웠으며 결국 그러한 장벽에 가로막혀 궁중 암투 등의 문제를 빚고 장자상속제나 중앙집권화에는 실패하였다. 왕위 계승을 위한 내전과 궁중 암투 등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은 차츰 약화되고 지방 세력이 강화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팽창 정책은 지속되어 그들은 오늘날의 프랑켄과 같은 중부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알레마니인들 등이 잔존해있는 남서독일 지역을 경략하는 등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이 봉신인 카롤링거 가문에게 차츰 무력화되어가던 시기, 카롤링거 가문을 이끌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2]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한 우마이야 왕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군세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부 프랑스을 공격하자 이에 대응하여 프랑크 왕국 군세를 규합하여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기독교 세계를 이교도들로부터 구원하였다'라는 강력한 명분을 기반으로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피누스 3세는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하고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찬탈하며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피피누스는 이탈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그들을 일시 무력화시키고 교황청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로마냐, 안코나에 해당하는 영토를 기증하면서 교황령의 역사적인 시작을 선사하였으며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피핀은 독일 방면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 특히 색슨과의 전쟁 등 다른 전장이 많았기에 이탈리아에 장기 주둔할 수 없었기에 철수하였으며 이후 롬바르드 세력은 교황청의 교황령 영지를 빼앗고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재확립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최전성기를 개막시킨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피피누스 3세의 아들로써 단순히 프랑스나 독일의 위인이 아닌 유럽의 위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공격하여 후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통일-팽창 정책을 방해하였고 수십년에 걸친 세월 동안 작센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오늘날의 독일 땅 전역에 해당하는 게르마니아 전역을 정복하여 손에 쥘 수 있었으며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롬바르드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오늘날의 헝가리 영역에 해당하는 판노니아 평야에 잔존하던 아바르를 공격하여 그들을 사실상 멸족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와 폴란드 방면 부근까지 진출하여 그 일대의 토착 슬라브계 민족들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들의 가톨릭 기독교로의 개종에 영향을 끼쳤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기술할 경우 문서가 너무 늘어나게 되므로 자세한 항목은 카롤루스 마그누스 항목을 참조할 것.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이와 같은 위업을 기반으로 서로마 제국 황제위를 참칭할 수 있었으나 동로마 제국의 항의로 인해 서로마라는 부분을 빼고 그저 프랑크의 왕이자 황제로써 위치하였다.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막내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를 제외한 아들들이 전부 죽었다는 점으로 인해 운 좋게 루도비쿠스에게 장자상속을 시켜 제국을 한 사람에게 몰아 계승시킬 수 있었지만 메로빙거 왕조가 실패했듯이 여전히 카롤링거 왕조 역시 장자상속제를 체계화하기에는 체제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결국 루도비쿠스 1세 사후, 프랑크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서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후처 소생인 샤를 2세가, 오늘날의 남프랑스에 해당하는 아키텐을 루도비쿠스의 차남인 피핀이,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삼남인 루트비히 2세가, 오늘날의 네덜란드, 로렌, 라인란트,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로타링기아(중프랑크)를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분할하여 나눠가지면서 분열되었다.
이 중 서프랑크를 지배하는 샤를 2세가 피핀을 암투 끝에 무너뜨리고 아키텐을 차지하면서 서프랑크의 영역은 아키텐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로타링기아(중프랑크) 역시 훗날 붕괴되어 이탈리아는 새로이 이탈리아 왕국으로 독자적으로 분화되었으며 로타링기아(중프랑크)가 지배하던 네덜란드 등의 저지대와 라인란트 등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분할하여 차지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제국의 역사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의 공통 역사로 간주되지만[3] 이 분열 시기 이후부터는 서프랑크만이 프랑스의 역사로 간주되며 마찬가지로 동프랑크만이 독일의 역사로 간주된다. 북게르만계 민족 집단인 노르드인들의 약탈 무장 집단인 바이킹의 해상 침공, 피노-우그릭 계열의 민족 집단인 마자르족 등의 침공, 아바스 왕조 아랍 이슬람 제국의 산하 세력인 북부 아프리카 군벌 집단의 해상 침공 등으로 말미암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모두 제각기의 방위를 위해 쌍무적 계약관계에 기반한 봉건지주기사 체계를 강화하고 농노제에 기반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지중해 중심 교역 형태도 변화되어 서유럽은 새로운 경제, 사회적 체계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서프랑크의 프랑크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갈리아의 토착민들인 갈로-로만, 브리튼 제도 출신의 켈트계 민족인 브르타뉴인, 남프랑스에 잔존한 서고트인등과 융합되면서 오늘날의 프랑스어로 이어지는 오일어(북프랑스 중심), 오크어(남프랑스 중심)를 사용하게 되고 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역사적 진행 방향을 잡게 되었다.[4]
3. 프랑스 왕국의 성립
987년 (위그 카페 대관) - 1453년 (백년전쟁 종결)잔 다르크 |
서프랑크의 샤를 2세 치세에 서프랑크군은 동프랑크군을 격파하고 중프랑크의 영역이던 로렌, 라인란트 등지를 점령하였지만 샤를 2세가 급사하고 중세 유럽 게르만계 지배층들이 지배하던 국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속권의 문제와 지방 세력들을 억제하기 힘든 중앙정부권력에의 문제로 말미암아 패권을 장기 지속하기 어려웠다.
7세기 중엽부터 북게르만계 민족 계통인 노르드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 유럽 전역에 약탈전쟁을 벌이면서 노르드의 약탈전쟁단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 집단의 공세는 서프랑크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루이 3세가 한차례 바이킹들을 크게 대파하였지만 루이 3세는 다소 어이없는 사고사로 급사하였으며 이후 지속되는 바이킹들의 침공과 함께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서프랑크에서 갈수록 약화되었다.[5]
루이 3세가 급사하고 루이 3세의 동생인 샤를로망 2세 역시 급사해버리면서 공석이 된 서프랑크 왕위를 동프랑크 군주인 카를 3세가 잠시 차지하였을 때에는 프랑크가 다시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카를 3세가 서프랑크 방면을 침공하는 노르드 바이킹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돌려보내자 싸우지도 않고 외적에게 돈을 바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서프랑크 제후들의 전면적인 반란과 봉기에 직면하였으며 마침 동프랑크 왕위를 노리던 조카 아르눌프 역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를 3세는 퇴위당하였으며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분열은 이 시점에서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카를 3세가 퇴위당한 상태에서 서프랑크 제후들을 규합하여 파리 공방전에서 노르드 바이킹 대군세를 수적 열세에도 격파하는데 성공한 카페 가문의 외드가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이 역사적인 카페 왕조의 첫 시작이었다. 외드의 모친은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였기에 모계로 카롤링거 혈통을 계승했다는 점 역시 주요하였다.
그러나 외드에게는 친자가 없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서프랑크의 2대 국왕이던 루이 2세의 아들인 샤를 3세가 카롤링거 직계 혈통의 명분으로 서프랑크 왕위 계승을 주장할 때 외드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6] 결국 외드는 사망할 때에 카페 가문의 친척이 아니라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위에 즉위하며 카롤링거 왕조가 복권되었을 시기, 샤를 3세는 서프랑크를 침략하는 노르드 바이킹 무리의 한 일파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그들을 서프랑크 땅에 정착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아 다른 바이킹 무리들과 싸우게끔 이이제이를 유도하였는데 이것이 서프랑크-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노르드 출신들을 의미하는 노르만족의 역사적인 첫 시작이다. 노르만족이 정착한 장소가 바로 노르망디이며 이후 노르만족은 서프랑크-프랑스 귀족 사회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노르만족 항목을 참조.
그러나 샤를 3세가 카롤링거 가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프랑크 내에서 카페 가문의 인기는 여전히 드높은 상태였다. 이미 카페 가문의 외드가 한 차례 왕좌를 거머쥐었다는 점에서 카페 가문은 멸문당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카롤링거에게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외드의 동생으로써 마찬가지로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며 따라서 카롤링거의 혈통을 모계로 이어받은 로베르 1세는 노르드 바이킹들의 침공을 누차 격파하면서 서프랑크 제후들 사이에서 더욱 큰 명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샤를 3세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로베르 1세는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샤를 3세를 밀어내고 왕좌에 올랐지만 샤를 3세 역시 자체 세력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수아송 전투(923년)에서 로베르 1세가 승리하면서 로베르가 서프랑크 왕위를 거의 거머쥐는 듯 했으나 급사하면서[7] 로베르의 사위인 라울(서프랑크)이 왕위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 라울 역시 급사하면서 샤를 3세의 아들인 루이 4세가 서프랑크 왕좌를 되찾으며 카롤링거 왕조가 다시금 복권되었다.
그러나 카페 가문의 서프랑크 내 위세는 여전히 거대했으므로 루이 4세는 치세 내내 카페 가문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했는데 루이 4세와 그의 아들인 로테르, 로테르의 아들인 루이 5세가 줄줄이 요절하면서 최후까지 잔존한 서프랑크 카롤링거 왕조도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위그 르 그랑의 아들인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좌에 앉으면서 본격적으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클로비스 1세의 메로빙거 왕조가 프랑스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이라면 카페 왕조의 시작은 프랑스 중세 역사의 실질적 개막이라고 볼 수 있으며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은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도를레앙 왕조는 물론 부르고뉴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의 방계 가문들, 당주 왕조 등으로도 이어지는데다 그러한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이 향후 프랑스를 천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므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카페 왕조는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이 카롤루스 대제의 후예임을 어필하며 정통성을 굳힐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중세 초기의 지방 제후 세력들을 억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기에는 여전히 힘이 미력하였다. 따라서 위그 카페의 치세에부터 카페 왕조 프랑스의 7대 국왕인 필리프 2세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200여년 이상 카페 왕조는 자국 내의 제후 세력들과의 권력 분쟁과 왕권 강화에 집중해야했다.
중세 초 봉건 체제에서 기인하는 제후들의 독자적 행보와 분리독립 현상의 대표적인 예시가 필리프 1세 치세에 프랑스 왕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고드윈슨 왕조를 무너뜨리며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여 노르만 왕조를 건설하고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독립해버린 경우이다. 노르망디 공작이 노르망디 영토를 그대로 들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으므로 노르망디 역시 잉글랜드 왕이 다스리는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외에도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는 노르만족 계열의 제후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독자적으로 나아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십자군 전쟁의 1차 십자군 역시 프랑스 왕의 의사와는 별개로 프랑스 제후들이 주축이 되어[8]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로도 프랑스 서북 지역인 앙주의 프랑스인 제후 앙리가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가 단절되자 모계 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 잉글랜드가 시작되었는데 이로인해 앙주 지역 역시 잉글랜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루이 7세가 아키텐의 제후이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9]하자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와 재혼하고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등의 아들들을 보면서 아키텐마저 잉글랜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권역의 절반 이상이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가문의 영역이 되었으며 카페 가문의 위상은 더할 나위없이 약화되었으므로 만약 카페 가문에 걸출한 군주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카롤링거 가문이 카페 가문에게 프랑스 왕위를 찬탈당하였듯이 플랜태저넷 가문이 프랑스 왕위를 카페 가문으로부터 빼앗아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루이 7세의 아들인 필리프 2세라는 뛰어난 명군이 즉위하였고 그는 탁월한 내정 개혁과 법제 구축, 권모술수를 통한 제후 세력 억제와 왕실 직할지 증대를 통한 세수 증대, 군사력 확충 등을 이룩하여 힘을 끌어모았으며 리처드 1세와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도 그와의 직접적인 결전은 최대한 회피하며 파비우스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화살에 맞아 급사하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여 존 왕의 잉글랜드 대군을 각지에서 격파하고 아키텐과 노르망디 일부를 제외한 플랜태저넷 잉글랜드령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필리프 2세 시기에 여러 법제가 개편되면서 왕호 역시 '프랑크인의 왕'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바뀌었는데 프랑크인, 갈로-로만인이 융합되면서 형성된 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의 실질 태동기가 이 시기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이후 존 왕과 오토 4세, 페르디낭 부르고뉴 등이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 신성 로마 제국, 플랑드르 연합군이 결성되어 프랑스에 도전하였으나 필리프 2세는 이를 부빈 전투에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카페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필리프 2세 치세 이후 루이 8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노리고 잉글랜드를 침공하기도 하였으며 루이 9세 때에는 7차 십자군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필리프 4세 치세의 카페 왕조 프랑스의 국력은 절정에 달하여 플랑드르를 격파하여 사실상 속령화하고 혼란한 상태이던 신성 로마 제국을 압박하여 동부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으며 아비뇽 유수를 일으켜 교황청을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이후 프랑스 내에서 고리대금업 등으로 악명 높던 성전 기사단에 여러 죄목을 씌워 숙청하면서 성전 기사단이 축재한 재산을 국고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서 필리프 4세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남프랑스의 카타리파 이단 기독교 교세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일으켜 남프랑스 제후들을 재복속시키면서 남프랑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굳혔다.
그러나 필리프 4세 급사 이후 카페 왕조 국왕들이 줄줄이 요절하면서 카페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으며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의 발루아 가문이 왕위를 이으면서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10] 그러나 이로인해 카페 왕조가 닦은 왕권은 다시 급속도로 추락하였으며 발루아 왕조는 귀족들의 도전에 직면하여야 했다.
필리프 6세는 즉위하자마자 플랑드르의 도전에 맞서 승리를 거두면서 국가를 안정화시키는 듯하였지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모계 상속을 통한 프랑스 왕위의 권리를 주장하며 도전하면서 백년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크레시 전투에서 크게 참패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장 2세의 치세에는 잉글랜드군을 이끄는 명장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푸아티에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프랑스와 발루아 왕조는 큰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왕좌에 등극하고 준동하는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군제를 재편하며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같은 명장을 기용하여 반격에 나서면서 백년전쟁은 다시 프랑스의 우위로 넘어갔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게클랭과 치열한 공방을 펼쳤으나 과로(추정) 및 질병으로 급사하였으며 프랑스군은 코르슈렐 전투, 퐁발랭 전투, 시세 전투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잉글랜드군을 대파하고 백년전쟁을 거의 승전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시점으로부터 1380년에 이르면 잉글랜드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방면 영토는 크게 줄었다.
그러나 게클랭이 1380년에 전사하고 동년 샤를 5세 역시 급사하였으며 샤를 5세의 아들인 샤를 6세는 정신병을 앓고 있어 정무 집행이 불가능한 금치산자였고 이를 방아쇠로 하여 귀족들 간의 대대적인 내전이 벌어지자[11] 전세는 다시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갔다. 당시 잉글랜드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가인 랭커스터 가문이 플랜태저넷 가문을 축출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상태였는데 이 랭커스터 왕조의 2대 국왕인 헨리 5세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었던데다 당시 프랑스 귀족 내전 상황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던 부르고뉴파에게 외교 공작을 시도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는 것에 성공하면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파 군세는 연합하여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었다.
결국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프랑스 아르마냑파 귀족 연합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파리와 랭스가 함락당하자 백년전쟁은 거의 잉글랜드 측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얼마안가 금치산자이던 샤를 6세 역시 사망하면서 전황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으며 샤를 6세의 아들인 샤를 7세는 그 시간을 빌어 귀족들 간의 내전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병력을 추스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시기 잔 다르크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발루아 왕조의 권위를 드높이고 병력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이 잔 다르크의 활약을 본 프랑스 내 제후들이 그간 랭커스터 가문과 발루아 가문 사이에서 간을 보던 태도를 버리고 발루아 가문에 충성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다시 프랑스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파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랭스와 오를레앙을 수복하였으며 이후 잔 다르크 본인은 파리 공성전에서 샤를 7세의 미비한 지원 등의 이유로 패하고 잉글랜드군,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였지만 이미 전세는 발루아 왕조 측에 매우 유리해졌으며 아르튀르 드 리슈몽 등이 이끄는 발루아 왕조 프랑스군은 파리를 탈환하고 이후 노르망디, 아키텐 전역으로 공세를 펼쳐 셸부르 전투, 루앙 전투, 포미니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군을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만들었으며 장 뷔로의 군세가 존 탈보트의 잉글랜드군을 보르도에서 완전히 격멸하면서 아키텐과 가스코뉴 전체가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령으로 넘어갔다. 이후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칼레만이 잉글랜드령으로 남게 되었다.[12]
백년전쟁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백년전쟁이 귀족들끼리 이합집산하는 전형적인 왕위계승전쟁의 성격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에 가까운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프랑스 방면에서 보급을 확충하기 위한 약탈을 자주 행하면서 프랑스 농민들이 발루아 가문에 친화적인 정서를 가지게 되었고 잔 다르크는 그러한 프랑스 평민들이 가지게 된 친발루아, 프랑스 국가주의 정서의 결정체라고 보는 학설도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횡행하던 시기였으며 이런 판국에서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다보니 자크리의 난과 같은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그만큼 프랑스 국내는 크게 황폐화되어 과거 필리프 2세에서 필리프 4세로 이어지던 카페 왕조의 황금기 시절에 비하면 프랑스의 힘이 많이 쇠약해진 시기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발루아 왕조는 백년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왕실의 권위 및 프랑스인 민족 관념과 프랑스 국가주의에 힘입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억제하면서 중앙집권화로의 길을 걷고 병력과 경제력을 재확충하면서 근대 프랑스로의 길을 밟아나가게 되었다.
4. 근세 프랑스 왕국의 발전
1453년 (백년 전쟁 종결) - 1789년 (프랑스 혁명)
1500년에 이르면 인구 15,000,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지역의 거의 대부분의 토지가 프랑스 왕령이 되고, 국가 안에서 권력이 막강해졌다.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투쟁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카를 5세가 있던 합스부르크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이 와중에 종교 개혁으로 왕실에 위기가 닥친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칼뱅 개혁 교회 신자들은 위그노라고 불리었는데 16세기 중반에 이들의 수는 약 5%로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아주 적었으나 왕실에 대항하는 대귀족들이 주로 신봉하였다. 그래서 당시 왕조였던 발루아 왕조, 위그노 측의 부르봉 가문, 가톨릭 측의 기즈 가문은 수십 년간의 위그노 전쟁을 일으켰다. 위그노 전쟁의 결과로 발루아 왕조가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내전을 종결하였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도 종교 개혁으로 많은 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전이 종결하고 난 후 안정이 되자 프랑스는 외부에 다시 집중한다. 독일 지역에 비해 일찍 내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프랑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낭트 칙령으로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리슐리외와 같은 관료의 주도 아래에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도입한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1600년에는 220,0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면서도 30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동맹하였고,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이 끝났을 무렵부터 유럽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 낭트 칙령이 폐지된 1685년 프랑스의 인구는 21,500,000명이나 되었고 여전히 프랑스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파리도 인구가 510,000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해 런던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의 이탈로 재정에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루이 15세 시대에도 재정 확대는 잘 되지 않았고 7년 전쟁 등 큰 전쟁에서 계속 패배했다.
5. 근대 프랑스의 변화
1789년 (프랑스 혁명) -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폐위)1789년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 왕실은 부르주아지(제3신분)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스 왕은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채용하고, 자본을 이용하였다.[13] 당시 프랑스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대다수였던 제3신분이 다른 두 신분의 세금을 모두 부담해야하는 부당한 결정이 가결되자 당시 유행을 하였던 계몽사상과 맞물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장기간의 관습법과 귀족, 부르주아지의 견제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앙시앵 레짐(프랑스의 기존 체제)은 변화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공화국은 나폴레옹이 득세하기 전까지 단지 공화국이란 이유로 주변 국가와 적대적이었다. 이 시기가 프랑스가 가장 위세가 있던 시절로, 1799년 나폴레옹이 제1통령에 취임했다. 이때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전부 승리했으나 영국에게 해전에서 패배하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프랑스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그래도 서로를 견제하던 국가들의 이권 다툼을 잘 활용하여 프랑스는 빈 회의에서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왕정이 돌아온 프랑스는 1815년 31,200,000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고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580,000명으로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사상은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계속 나타났고, 몇 차례의 체제 변화 끝에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이것을 잘 이용하여 다시 황제를 칭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시대상을 따라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유럽 본토에서는 각종 실수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프로이센에게 패배해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스당(Sedan)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고, 파리가 포위되어서 파리 시민들이 작은 야생 동물들을 잡아먹는 처절한 상황이 일어났다. 전쟁 패배의 결과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내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다. 프랑스는 1870년 38,400,000명이나 되는 인구를 보유했지만 제대로 전쟁을 하지 못했고 이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파리 코뮌이 성립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수만 명이 희생당하는 피의 1주일 사건으로 코뮌은 무너졌다.
6.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1870년 (제3공화국 성립)이후 프랑스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좋은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거쳤다. 산업의 발전으로 공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풍족해지고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국가의 번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주로 자본가, 지주 등만 이런 혜택을 누렸고 노동자들과 식민지 국민들은 계속 착취를 당해서 여전히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 동북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군을 마른 전투로 막아세우는 데 성공하지만, 그 자리에서 참호선을 파고 주둔하다 보니 그 일대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는 20대 남성 인구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과 실종을 당했다. 부상으로 불구가 된 남성들이 많아서 노동력 부족이 극심해졌고 사회적으로도 한 세대가 거의 없어지는 일을 겪어야 했다.
7.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1940년 (비시 프랑스 성립) - 1944년 (프랑스 임시정부의 성립)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마지노선을 파고 방어하는 전략을 썼지만 독일은 또 벨기에와 아르덴 숲을 건너 우회[14]해서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했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나서는 비시 프랑스가 세워졌다. 남아서 국가를 보존한 자유 프랑스는 빠르게 군사력을 회복해 본토를 되찾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얻은 피해와 전쟁으로 인해 강대국이 된 미국, 소련의 영향력 때문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키고 사실상 본토만 남게 된다.
8. 현대 프랑스의 성립
8.1. 냉전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 - 1991년 (소련 붕괴)이후 알제리, 베트남 등의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전쟁까지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났다. 알제리, 베트남 등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프랑스 제4공화국 정권은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의 지도자로 명망을 얻은 샤를 드골이 정권을 장악하여 없어지고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했다.
냉전 기간에 프랑스는 NATO를 탈퇴하고 독자 노선을 선언해서 미국과 영국 중심의 유럽 질서에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국민 감정도 꽤나 소원해졌던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가 NATO에서 탈퇴한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미국과 영국이 저지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핵무기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강대국의 상징이었고, 미국의 관점에서는 프랑스 같은 나라까지 핵무기를 가지게 하여 핵을 확산시킬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1956년 일어났던 제2차 중동전쟁에서 영국-프랑스 동맹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지만, 소련은 철수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노골적인 핵공격 위협을 했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을 지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들이 받게 된 취급을 굴욕으로 느꼈다. 프랑스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영국이 미국과 함께 프랑스의 핵개발에 반대한 것이었다. 영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자금, 기술, 인력을 지원한데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미국과 비밀 협정을 통해 전후 핵기술을 공유하기로 합의까지 해 놓은 상태에서 미국에게 배신당해놓고도, 자체적으로 1957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곧바로 미국 편을 들면서 프랑스를 방해했다. 수에즈 운하 사건에서 함께 소련의 핵공격 위협과 미국의 냉대를 받았던 영국이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을 받게 했다. 프랑스는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핵개발에 쓰는 강경한 정책을 펼쳐 핵을 얻는다. 그러나 핵개발 성공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를 냉대했고, 결국 프랑스는 NATO를 탈퇴하고 독자 노선을 강행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것들은 프랑스에 유래없던 경제 호황기인 영광의 30년와 사회적 변혁인 68 혁명이 있겠다. 전자는 오늘날 프랑스 경제의 기반을 다지고 두 사건/시기 모두 오늘날 프랑스 문화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8.2. 현대사
1991년 (소련 붕괴) - 현재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서, 미국에서는 'Cheese-eating surrender monkeys'라고 프랑스를 비꼬아 부르곤 했는데 절대로 우방국으로 신용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대중을 넘어서 뉴욕 포스트 같은 미디어조차도 surrender monkey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고 대놓고 까댄 바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틀어진 양국 관계가 버락 오바마 집권으로 프랑스 측에서는 개선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양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건 단순하게 정권교체로 해결될 만한 사안이 아니다. 한마디로 관계 개선은 순전히 프랑스의 기대일 뿐이라는 게 미국 쪽 시각이다. 물론 이라크 전쟁은 결국 미국과 영국이 손잡고 전 세계를 상대로 친 구라였음이 밝혀졌고, 전쟁을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일부 계층에서 여전히 프랑스를 배신자라며 나쁘게 보는 건 사실이나, 이미 미국 내에서도, 조지 W. 부시의 퇴임 이전부터 이라크 전쟁이 잘못이었음을 공화당 정치인들조차 인정한 지 오래이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던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매케인마저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련된 조크를 하며 부시 행정부를 비판했던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 이후 양국 정상은 이미 수차례 회동하였고, 중동 문제 등에서 뜻을 같이 하는 공동발표 또는 회견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바, 이미 현재의 미-불 관계는 조지 워커 부시 시대의 대립에서 벗어나 다시 화합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어찌되든 아들 부시가 망쳐놓았던 것보단 낫다. 참고로, 비슷한 이유로 망가진 미-독 관계도 메르켈 집권 이후에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증가하던 부의 불평등과 청년실업 등의 문제에 유류세 인상으로 68혁명 이후 가장 큰 시위라 평가되는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났다.
2019년 11월 7일에 프랑스 정부는 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SNS를 관리감독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인권단체들은 반발했다.# 11월 9일에 리옹2대학교에 다니던 대학생이 불평등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되었다.#
2020년 6월 15일에 파리 법원은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총리의 보좌관, 프랑수아 레오타르 전 국방부 장관의 보좌관에게 각각 징역 3년형을 판결했다.#
2020년 10월 16일에 프랑스에서 체첸인에 의한 교사 참수 사건이 발생되면서 참수를 저지른 18세 체첸인이 체포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에 극단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1] 스페인의 경우 서고트, 포르투갈의 경우 수에비, 영국의 경우 앵글로색슨족.[2] 삼국지식으로 비유하자면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은 후한의 승상 조조와도 비슷한 위치였다 하겠다.[3] 메로빙거 왕조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역사로써만 간주되는 편이다.[4] 동프랑크의 프랑크인들의 경우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게르마니아의 토착민들인 알레마니, 튀링겐, 작센 등의 게르만계 민족들과 서슬라브 계열 민족 집단들로 추정되는 포메른인 및 소수의 폴란드인, 보헤미아인 등과 융합하면서 오늘날의 독일어 형태를 구축하고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역사적 진행 방향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의 프랑크인들은 네덜란드 토착민들인 프리스인 등과 융합되면서 네덜란드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분화하게 되었다.[5] 그나마 서프랑크에서는 양반인 것이 중프랑크는 애진작에 멸망했고 독립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이미 카롤링거가 아닌 다른 가문이 왕가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동프랑크 역시 카롤링거 직계 혈통이 일찍 끊겨 제후들의 선거 상속 체제로 변화하고 있었다. 서프랑크는 최후까지 카롤링거가 잔존했으므로 이것은 프랑스가 자신들이 프랑크와 카롤루스의 정통성을 가장 크게 이어받았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6] 샤를 3세는 본래는 자신의 형들인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에게 밀려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7] 샤를 3세에 의한 암살설 존재.[8] 일부는 노르만, 네덜란드, 독일 출신이다.[9] 정확히는 혼인 무효이다. 가톨릭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10] 사실 동아시아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발루아, 부르봉 등의 카페 계열 분가들은 모계도 아니고 부계로 카페 가문의 후예들인 관계로 굳이 분가를 할 이유도 없는 집안들이라 사실상 한 가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분할 봉건 상속의 전통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비단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들이 최상위 작위를 상속한 형제와 차상위 작위를 상속받은 자신의 위치를 분리시키고자 본가에서 가문을 따로 분리시키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를 Cadet Bran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유럽 각 지역이 중앙집권화되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된 이후에조차도 이미 관습화되어 지속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부계 분가 가문들은 자신들과 본가들을 분리시키기는 했어도 본가와 자신들이 사실상 동일한 집안임을 인지하였다. 발루아 가문이나 부르봉 가문, 도를레앙 가문 등 모두가 자신들을 공식적으로 카페 가문이라고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모두 자신들과 카페 본가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계열임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11]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12] 100여년 뒤에 칼레 역시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어 프랑스령이 되었다.[13] 부르주아지라고 해서 반드시 상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의 90%는 토지 소유자였으며, 10%만이 상업 종사자였다.[14]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같은 방식을 썼지만 당시에는 기술력의 한계와 독일군의 무리한 작전이 겹쳐서 파리 함락에 실패한 반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차의 등장으로 기동력이 올라간 데다 주변 환경이 양호했기 때문에(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공격받을 걱정도 없었고 이때 프랑스는 전차에 무전기를 하나도 달지 않은 반면 독일군은 무전기를 대부분 달고 있을 정도로 준비가 차이가 났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방어할 틈도 없이 바로 공격을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