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6:50:18

흑태자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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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
흑태자 에드워드
Edward the Black Prince
파일:Edward_the_Black_Prince.jpg
별칭 흑태자 (The Black Prince)
출생 1330년 6월 15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사망 1376년 6월 8일 (4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장례식 1376년 9월 29일
켄트 캔터베리 대성당
배우자 켄트의 조앤 (1361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리처드 2세
아버지 에드워드 3세
어머니 에노의 필리파
형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 에드먼드, 메리, 마거릿, 토머스
문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England_Arms_1340-white_label.svg.png
종교 가톨릭 (세례명:에두아르도)
1. 개요2. 칭호3. 흑태자라는 별칭4. 생애
4.1. 초년기4.2. 백년전쟁 초기의 행적4.3. 흑태자의 슈보시4.4. 푸아티에 전투4.5. 랭스 원정4.6.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왕자4.7. 이베리아 원정4.8. 몰락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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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초기의 인물. 잉글랜드 왕국왕족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2세의 아버지다.

최초의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다. 백년전쟁 초창기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프랑스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명장으로, 심지어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왕국이었던 장 2세를 사로잡기까지 하였다. 그 공으로 아키텐 공작에 선임되어 8년 동안 통치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카스티야 왕국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이베리아 원정 도중 걸린 이질로 인해 생애 후반기 내내 병마에 시달렸고, 정치적으로 무능한 행보를 보이다 아키텐 대부분이 프랑스에 도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잉글랜드로 귀환한 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2. 칭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이자 콘월 공작(Duke of Cornwall)[1], 체스터 백작, 아키텐 공(Prince of Aquitaine)이신[2]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3]

3. 흑태자라는 별칭

늘 검은 갑옷을 입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영문 위키에 따르면 다른 설도 있다고 하는데, 동시대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드 메지에르(Philippe de Mézières, 1327?~1405)가 에드워드를 '검은 수퇘지(Verrat noir)'[4] 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기독교 국가끼리의 관계를 망치는 침략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시되면서 검은 갑옷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정작 그의 생전에는 그렇게 불린 적이 없다고 한다. 16세기부터 여러 작가들이 그를 흑태자라고 불렀는데, 그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잔혹함이 악마같다고 하여 흑태자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4. 생애

4.1. 초년기

1330년 6월 15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132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와 플란데런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군 아벤 가문 출신으로,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였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에드워드는 장남으로서 출생 직후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333년 3월 18일 체스터 백작에 선임되었고, 1337년 2월 9일 의회에서 콘월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이것은 잉글랜드 역사에서 공작이 창설된 최초의 사례였다.[5] 이후 콘월 공작은 잉글랜드 국왕의 장남이 대대로 소유하는 칭호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의 교수로 스콜라주의 철학자이자 문학석사였던 월터 벌리의 가르침을 받는 등 잉글랜드 최고의 학식을 갖춘 교수 및 성직자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며, 저명한 기사들로부터 무예를 익혔다. 1338년 7월 잉글랜드를 떠나 플란데런 백국으로 원정을 떠나기로 한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아들 에드워드가 왕국의 호국경으로서 나라를 대리 통치하게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1340년 5월 27일과 1342년 10월 6일에 같은 직책에 임명되었다. 물론 1388년에 8살, 1340년에 10살, 1342년에 12살이었던 에드워드가 실제로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으므로, 실질적인 통치는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총리였던 존 드 스트랫퍼드 등 에드워드 3세의 측근들과 의회가 이끌었다.

1339년, 에드워드 3세는 브라반트 공작 장 3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딸 마르그리트를 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키려 했다. 에드워드와 마르그리트는 1339년 6월에 약혼했지만, 교황청은 장 3세의 어머니의 어머니 마가렛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이므로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리트는 결혼하기엔 너무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로 불허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45년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결혼을 허가해달라는 서신을 보내는 등 교황청의 허가를 받으려 애썼지만, 장 3세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면서 동맹이 깨지자 결국 약혼을 취소했다.

1343년 5월 12일, 에드워드 3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웨일스 공작을 창설하고 에드워드를 그 자리에 앉혔으며, 왕관, 금반지, 은막대를 수여했다. 1345년 7월 3일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슬로이스에 방문한 에드워드 3세는 겐트, 브뤼헤, 이프르 시장들을 설득해 아들 에드워드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지만, 플란데런 백국 내 대표적인 친 잉글랜드파 지도자였던 야콥 반 아르테벨데가 폭도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에드워드 왕자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울 계획은 중단되었다.

4.2. 백년전쟁 초기의 행적

1346년 7월 11일,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고, 라 후그 항에 상륙한 직후 케테호우 마을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분견대를 이끌고 코탕탱 반도를 통과하며 진군로 주변의 마을을 파괴하고 불태웠으며, 1차 캉 공방전블랑슈타크 전투에 참여해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크레시 전투가 벌어진 1346년 8월 26일, 에드워드 왕자는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조프루아 다르쿠르, 존 챈더스, 제임스 오들리 등 영주 및 기사들과 맨앳암즈 800명, 장궁병 2,000명, 웨일스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된 우익 부대를 지휘했다.

전투 초반, 프랑스군 선두 부대가 언덕 위에 포진한 잉글랜드군을 무리하게 돌격했다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퍼부은 화살비로 인해 궤멸되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적군이 무너지는 모습에 흥분해 두번째로 다가오는 샤를 2세 달랑송 휘하 프랑스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그와 호위 기사들은 곧 프랑스군에 에워싸였다. 존 드 베레는 급히 에드워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군을 보내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 이렇게 답하며 거부했다.
"그에게 박차를 가할 기회를 줘라."

에드워드 왕자가 격투를 벌이던 중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의 기수인 리처드 피츠사이먼이 깃발을 던지고 에드워드 왕자 앞에 서서 왕자가 일어나는 동안 적병들을 물리쳤다. 이후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후위대를 이끌고 최전선으로 달려와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면서 전투가 끝난 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혀 경의를 표하면서 전투의 열기에 취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위험을 자초한 자신을 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을 포옹하면서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에드워드 왕자는 프랑스의 동맹으로서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전승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여기 기사도의 왕이 누워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라며 동맹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헌신한 그에게 감탄했으며, 그의 투구 보석을 챙겨 간직했다고 한다. 이후 왕자는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칼레가 항복한 후 칼레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1347년 10월 12일 아버지와 함게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마상창시합 등 여러 축제에 참여했으며, 1348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 훈장을 받았다.

1349년 말, 에드워드 왕자는 프랑스 장군 조프루아 드 샤르니가 칼레를 기습 공략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칼레로 건너갔고, 1350년 1월 1일 칼레 전투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요격해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해안을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카스티야 해군을 격멸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잉글랜드 함대에 승선했고, 1350년 8월 29일 윈첼시 해전에 참전했다. 해전이 한창일 때, 에드워드 왕자가 탄 배가 카스티야 전함과 충돌해 서서히 침몰했다. 에드워드와 장병들은 적선을 공략하고 그 배에 옮겨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끈 함선에 탑승한 전사들이 반대편에서 적선에 올라타자, 에드워드는 병사들을 독려해 적선에 뛰어들게 했다. 결국 에드워드와 장병들은 자기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적선을 공략할 수 있었고, 카스티야 선원들은 모조리 사살되거나 바다에 던져졌다.

4.3. 흑태자의 슈보시

1355년 7월 10일 프랑스와 전쟁을 재개하기로 한 에드워드 3세는 아들 에드워드를 가스코뉴 보안관으로 선임해 자신을 대신해 독자적으로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에드워드는 플리머스에서 군대를 규합해 가스코뉴로 항해하려 했지만, 수송 함대 모집이 늦어지고 역풍이 불어서 항해가 불가능해지는 등 각종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9월 9일에야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 등 거물급 영주들과 함께 맨앳암즈 1,000명, 궁수 2,000명, 웨일스 출신 대규모 보병대를 수송선 300척에 싣고 출항했다.

1355년 9월 20일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가스코뉴 귀족들을 소집해 병력을 5,000~6,000명으로 늘리고 상당한 보급품 및 수송 마차를 제공받았다. 1355년 10월 5일, 보르도를 출발한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생마께흐에서 보급품을 추가로 확보하고 바자스를 통과해 10월 12일 아르마냐크 국경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일간의 항해에 이어 일주일간 강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 말들이 대거 죽거나 부상을 입자, 현지의 말들로 교체했다.

프랑스 왕국의 영역인 아르마냐크에 들어서자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대대적인 약탈에 착수했다. 그들은 약탈과 파괴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평행하게 진군하는 3개의 종대로 나뉘었고, 11일 동안 아르마냐크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명목상으로만 요새화되었기에 쉽게 습격당하고 파괴되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야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무관장인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프랑스 원수 장 드 클레르몽의 지원을 받으며 툴루즈에 웅크렸다. 그러면서 툴루즈로 접근할 때 건너야 하는 가론 강과 아리에주 강의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넜고, 그 과정에 말 몇 마리와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툴루즈에서 농성하는 프랑스군을 내버려둔 채 툴루즈 동쪽의 곡창지대로 향했다. 동시대 역사가는 툴루즈 동쪽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 풍요로운 곳을 계속해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강력한 요새를 제외한 모든 곳이 습격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본군에서 최소 39km 떨어진 범위 내에 흩어져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군이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카르카손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인근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에 공성을 개시해 한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사흘간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1월 8일, 잉글랜드군은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나르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근 요새를 무시하고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약탈했다.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나르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프랑스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에드워드는 "우리 왕에게 가서 얘기해라"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렇듯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약탈 행렬이 갈수록 심각한 파괴를 일삼자, 장 1세 다르마냐크, 자크 드 부르봉, 장 드 클레르몽은 군대의 일부를 나르본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홈프스로 이동시켰다. 이 곳은 오데 강을 건너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오데 강을 무리하게 건너 이들과 싸우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10일, 15,000마리의 말에게 먹일 사료와 곡물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돌아가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의 후위대와 낙오병들은 마을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적군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홈프스를 회피하고자 북동쪽의 베지에로 향했지만, 정찰병들이 그곳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쟁 회의를 열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들은 뒤 홈프스를 무력으로 뚫기로 결의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해지면서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포도주를 줘야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이 이러한 역경을 무릅쓰고 홈프스에 접근하자, 프랑스군은 막상 적과 대결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게 싫었는지 툴루즈로 후퇴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카르카손까지 추격한 뒤 자신이 파괴해서 황량해진 진군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11월 15일,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를 비롯한 수뇌부가 프루유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평신도 형제로 추대되는 동안 4개의 큰 마을들을 파괴하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푸아 백작령을 가로지르러 했다. 11월 17일 푸아 백작 가스통이 찾아와서 잉글랜드인들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고 식량을 제공하며, 부하들을 에드워드의 군대에 배속시키는 대가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푸아 백작령을 통과하는 내내 비가 내려서 행군에 차질이 벌어지자, 병사들은 화풀이로 가스통에 속하지 않는 수많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한편, 자크 드 부르봉과 장 드 아르마냐크는 에드워드를 쫓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했다. 장 드 아르마냐크는 툴루즈에서 계속 버티고 싶었지만, 자크 드 부르봉은 적을 추격해서 행군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장은 자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을 아르마냐크 동부에 있는 세바 강에서 차단해 적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려 했다.

11월 20일, 자크와 장이 파견한 선봉대가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에드워드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11월 22일에 프랑스군 가까이에 진을 쳤지만, 자크와 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회전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계속 행군하여 11월 28일 가스코뉴에 도착했다. 많은 가스코뉴인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고, 나머지는 행군을 이어가서 12월 2일 겨울 숙영지가 있는 라 로셸에 도착했다. 에드워드와 수행원들은 12월 9일 보르도로 이동해 작전을 마무리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슈보시는 잉글랜드 왕국에 막대한 전리품을 안겼다. 한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은 가능한 많은 금과 보석을 휴대하기 위해 약탈했던 은을 버렸고,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1,000대의 수레를 동원했다고 한다. 5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장 2세에 의해 세금 면제를 받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여기에 약탈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 전역의 도시들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데 수년에 걸쳐 많은 돈을 지출했다. 또한 에드워드의 슈보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프랑스 군부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장 2세는 친정을 단행해 잉글랜드군과 한 판 붙어서 쫓아내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4.4. 푸아티에 전투

1356년 봄, 에드워드는 그의 성공에 열광한 본국 의회가 보낸 군대와 말, 그리고 식량 및 물자를 수령했다. 그 후 8월 초에 6,0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군대와 함께 또다시 슈보시를 단행했다. 이들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베르주라크, 오베르뉴, 리무쟁, 베리, 부르주를 거치며 시골 지역을 심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8월 25~27일에 이수둔 공방전을 벌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브르타뉴에서 남하하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투르 인근에서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헨리는 루아르 강변에 이르렀을 때 강의 수위가 높은 데다 프랑스군이 강에 있는 다리를 파괴하거나 요새화했기 때문에 좀처럼 건너지 못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그 사이, 에드워드 왕자는 투르에 도착한 뒤 헨리가 오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그러나 헨리가 좀처럼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푸아티에를 거쳐 보르도로 귀환하기로 하고 남하했다. 8월 29일 로모랑탱 인근에서 일부 프랑스군 기사들이 잉글랜드 전위대와 접전을 벌인뒤 로모랑탱 성채로 후퇴했다. 그는 전우 존 챈더스를 로모랑탱 성채로 보내 항복을 권고했지만, 수비대가 이를 거부하자 8월 31일 공성전을 개시했다. 사흘간 지속된 공성전 도중에 친구 한 명이 전사하자, 에드워드는 분노해 성을 함락하고 수비대를 살육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로모랑탱 요새는 9월 3일에 함락되었고, 에드워드는 수비대 전원을 처형했다.

이후 푸아티에로의 여정을 이어가던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에 거의 따라잡혔다. 그는 이대로 진군했다간 진군 도중에 프랑스 기병대의 급습을 받고 전군이 궤멸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푸아티에 인근의 모페르튀스 언덕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9월 18일, 추기경 엘리 드 탈레랑 페리고르가 장 2세의 군영에 찾아가 평화 협상을 제의하겠다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에드워드는 협상에 기꺼이 응하기로 하고, 자신이 정복한 모든 도시와 성을 포기하고 포로를 모두 석방하며, 십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7년 동안 프랑스 왕을 대적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장 2세는 에드워드와 그의 기사 100명이 항복하고 자신의 포로가 되라고 답했고, 에드워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협상은 평화 협약 대신 에드워드의 군대에게 하루 간의 휴식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존 챈더스와 가스코뉴 출신 영주이자 심복인 장 3세 드 그레일리의 조언에 따라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의 군대는 3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사단은 워릭 백작과 서퍽 백작이 지휘했고, 두번째 사단은 에드워드 본인이 지휘했으며, 3번째 사단은 솔즈베리 백작과 옥스퍼드 백작이 지휘했다. 에드워드는 첫 번째 열 앞과 자신의 위치로 이어지는 좁은 길의 양쪽에 울타리로 잘 보호되는 궁수들을 배치하고 300명의 무장병과 300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매복 부대를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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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파란색이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9월 19일 새벽, 프랑스군이 언덕을 향해 접근했고, 에드워드는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짧게 연설했다. 프랑스군 선봉에 선 기병 300명이 좁은 길을 통과하여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궁수들에게 궤멸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독일 용병대와 샤를 도팽의 중보병대가 진격했지만, 전신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느라 지칠대로 지쳤고, 말을 탄 궁수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맨앳암즈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프랑스군 측면에 자리를 잡고 화살을 퍼부었다. 프랑스군 제2 부대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인근에 뒀던 말을 타고 언덕 아래로 돌격했다. 전승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존 챈더스와 함께 돌격을 준비하면서 챈더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존, 앞으로 나아가라! 너는 오늘 내가 등을 돌리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을 것이다."

샤를 도팽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적 기병대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와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모든 화살을 소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만약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도를레앙이 3번째 부대를 이끌고 곧바로 진격했다면, 잉글랜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프는 제1선과 제2선 부대가 잇따라 와해되는 걸 보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퇴각했다. 최후방에 있는 제4선에 있던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오를레앙 공작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걸 보자 바로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화살이 다 떨어진 장궁병대의 견제 없이 잉글랜드의 전열에 도달했다. 이에 에드워드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돌격하게 했지만, 왕과 함께 진군한 프랑스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때, 가스코뉴 기마병 60명과 궁수병 100명을 이끌고 잉글랜드군 후방에 있던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모페르튀스 언덕 뒷편을 지나서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군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고지대에 자리잡은 그는 성 조지의 깃발을 펼친 뒤 적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어서 피해를 누적시킨 뒤 친히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했다.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중기병의 후방 습격에 와해되었다. 이날 프랑스군 11,000명이 전사했으며, 장 2세와 막내아들 필리프를 비롯한 100명 가량의 백작, 남작, 기사 그리고 무장병 2,000명이 생포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는 자신 앞으로 끌려온 장 2세를 정중하게 영접하고 그가 갑옷을 벗는 것을 도왔으며, 장 2세와 포로로 잡힌 귀족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장 2세보다 아랫반열에 두고 옆에서 시종들었으며, 장 2세에게 위로하는 말을 많이 했다. 다음날 에드워드는 보르도로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행진했고, 주변의 프랑스군은 감히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10월 2일 보르도에 도착한 뒤 가스코뉴 귀족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와 부하들은 겨울 내내 그곳에 머물면서 그동안 모은 막대한 전리품을 축제로 낭비했다. 1357년 3월 23일, 에드워드는 프랑스 측과 2년간의 휴전을 체결하고 장 2세 등 프랑스 고위급 포로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떠나 5월 4일 플리머스에 상륙했다. 5월 24일 런던에 입성했을 때, 장 2세는 수려한 흰색 군마를 탔고, 그는 작은 검은색 말을 탔다.

4.5. 랭스 원정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아버지의 궁정에서 열린 많은 축제와 토너먼트에 참가했고, 1359년 5월 런던에서 시장과 보안관이 주관한 마상창시합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축제에 연이어 참가하면서 친구들에게 수많은 선물을 내렸기 때문에, 그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1359년 8월 27일 프랑스로의 새로운 원정이 준비되었을 때, 에드워드 3세는 아들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이 돌려받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자, "에드워드가 쓰러지면 돈을 빌려준 이들이 그의 재산 전체를 가져가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1359년 10월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 이후 그해 말부터 1360년 초까지 이어진 랭스 원정 동안 부대를 독자적으로 이끌었으나, 구체적인 활약상은 전해지지 않는다. 에드워드 3세는 랭스로 진격해 5주 동안 랭스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워낙 굳건해서 함락이 어려워지자 1360년 봄 포위를 해제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교외는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샤를 왕자와 수비대는 파리 성에서 끝까지 버텼다. 천혜의 요새인 파리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었고, 프랑스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고 곳곳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급기야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들이 죽자,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1360년 4월 13일,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대성당이 있는 도시인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클리니 수도원장 앙드루앵 드 라 로슈가 이끄는 수비대는 요새 뒤에 숨어서 농성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맹렬한 폭풍우가 잉글랜드 진영을 강타했다. 우박이 사람과 짐승을 죽일 만큼 컸고 수없이 떨어졌기에 가장 용감한 자도 겁을 먹었다.

조슈아 반스의 <가장 성공한 군주 에드워드 3세>에 따르면, 이날 6000마리의 말과 거의 1000명의 병사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는 수치가 확인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고위급 기사인 기 드 뷰챔프 2세가 우박에 맞아 3주간 고통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볼 때 피해가 심히 큰 건 사실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하느님이 프랑스 왕국과 완전한 화해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징벌을 내렸다고 여기고, 샤르트르에 있는 성모 교회 쪽으로 몸을 돌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양국이 평화 협상을 벌였을 때,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측 협상 대표를 맡았다. 1360년 5월 7일 샤르트르에서 예비 휴전이 체결되었을 때, 그의 이름과 노르망디 공작 샤를의 이름이 조약문의 선두에 적혔다. 7월 9일, 에드워드 왕자와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장 2세를 모시고 칼레로 이동했다. 그러나 규정된 왕의 몸값 분할금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 왕자는 월터 매니 및 다른 3명의 기사에게 장 2세를 칼레에서 계속 모시게 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0월 9일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칼레로 돌아와서 장 2세의 해방 조건을 설정하고 브레티니 협약을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하는 대신 기옌과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하고 풀려났고,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 여러 명 등이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왕자는 장 2세와 함께 불로뉴로 가서 성모 교회에서 헌금한 뒤, 11월 초에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장 2세의 보석금 마련은 그의 국내 입지약화와 자금부족으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마침 잉글랜드에 볼모로 남아있던 둘째 아들 루이 1세가 도망쳐 버리면서 조약을 위반하게 되어버렸다. 이에 장 2세는 심한 수치심을 느낀 끝에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잉글랜드에 다시 가기로 했다. 그 후 장 2세는 런던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가 1364년에 사망했다.

4.6.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왕자

1362년 7월 19일, 에드워드 3세는 아들 에드워드에게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모든 통치권을 부여하면서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왕자 칭호를 내렸다. 에드워드 왕자는 지난해에 결혼한 아내 켄트의 조앤과 수행원들을 대동해 1363년 2월 가스코뉴로 떠나 라 로슈 항에 도착해 존 챈더스를 만났고, 그와 함께 푸아티에로 가서 푸아투와 생통주 영주들의 경의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이 다스리게 된 여러 도시를 여행했고,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에 도착한 뒤 7월 9일부터 30일까지 가스코뉴 영주들의 경의를 받았다. 이후 그는 때로는 보르도에, 때로는 앙굴렘에 거주하면서 화려한 궁정을 유지하고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자신과 함께 해온 측근 및 잉글랜드 기사들을 요직에 앉히고 드넓은 영지를 하사했다. 이후 에드워드와 잉글랜드 가신들은 향락에 빠졌고, 이 때문에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던 백성들은 차츰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그동안 에드워드가 자행한 슈보시에 시달리다가 브레티니 협약 이후 아키텐 왕자의 지배에 새로 편입된 프랑스인들의 불만이 상당했다. 또한 많은 가스코뉴 영주들은 잉글랜드 왕자가 보르도에 자리를 잡고 직접 통치를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잉글랜드 기사들이 위세를 떨치면서 아키텐에 막대한 사유지를 가지는 것에도 반감을 품었다.

1363년 4월, 에드워드는 오랫동안 서로 전쟁을 벌였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와 장 1세 다르마냐크 사이를 중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해 5월엔 앙굴렘에서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피에르 1세를 영접했고, 그곳에서 토너먼트를 열었다. 1364년, 에드워드는 존 챈더스가 장 4세 드 몽포르를 지원하기 위해 아키텐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브르타뉴로 가는 걸 허용했다. 첸더스는 장 드 블루아를 지지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오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장 4세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에 등극했다. 이리하여 23년간 이어졌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막을 내렸다.

한편, 프랑스 각지에 자유 용병대가 출몰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 용병대 지도자들은 대부분 잉글랜드인이거나 가스코뉴인이었기에 아키텐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이에 수많은 프랑스인은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를 괴롭게 만들기 위해 용병대가 이런 짓을 벌이도록 사주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인들의 악감정을 부추겨서 전쟁이 재개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아들에게 용병대를 억제하라고 권고했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딱히 이렇다할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용병대를 토벌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전투력과 단합력이 강해졌다.

4.7. 이베리아 원정

1366년, 프랑스 장군 베르트랑 뒤 게클랭휴 칼블리 및 다른 용병대장들이 이끄는 자유 용병대를 고용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를 몰아내고 전임 국왕 알폰소 11세사생아엔리케 2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페드로는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만났다. 페드로로부터 자신을 복위시켜달라는 요청을 받은 에드워드 왕자는 존 챈더스와 아키텐 세네샬(senechal: 남부 프랑스의 지방관) 토머스 펠튼에게 문의했다. 챈더스는 반대했지만, 펠튼은 아키텐 남작과 기사들을 소집한 뒤 그들과 논의할 것을 권고했다. 에드워드는 펠튼의 주장에 따라 아키텐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에 출석한 많은 잉글랜드 및 가스코뉴 영주들은 형제, 친족 및 귀족들에게 잔학행위를 벌였고, 심지어 왕비였던 부르봉의 블랑슈를 핍박한 끝에 죽여버리기까지 했던 페드로를 굳이 도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사생아가 왕국을 물려받거나 합법적으로 태어난 형제를 몰아내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며, 이것이 허용된다면 왕이나 왕의 아들이 사생아 출신 왕족에게 그런 봉변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르니, 자신은 이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페드로를 복위하겠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페드로가 에드워드 왕자의 아들을 갈리시아의 왕으로 삼고,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겠다고 선언하자, 영주들은 급여가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 그의 복위를 도와주기로 결의헀다.

이후 에드워드와 페드로는 바욘에서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와 회담을 갖고 그들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대가로 56,000플로린을 지불하며,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기겠다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했다. 여기에 페드로는 250,000플로린의 에드워드 왕자의 임금으로, 800,000플로린을 영주들의 임금으로 지불하기로 했으며, 세 딸을 왕자의 손에 인질로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왕, 왕자 또는 그들의 상속인인 잉글랜드 국왕이 직접 무어인과 전쟁을 벌일 때, 카스티야 왕국은 다른 모든 기독교 왕들보다 먼저 선봉대의 지휘권을 갖고, 만일 잉글랜드 국왕이 참석하지 않을 경우 잉글랜드 국왕의 깃발은 카스티야의 깃발과 나란히 선봉대에서 운반되어야 했다.

그렇게 원정을 준비하던 1366년 12월,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2월, 에드워드 왕자는 심복들과 함께 6,000가량의 아키텐 병사, 2,000 가량의 잉글랜드군, 잉글랜드 병사 1,000명, 나바라 군인 300명 등 1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이때 선봉대를 이끌고 앞서간 토머스 펠튼이 나바레테 인군의 아리녜스에서 카스티야군의 급습을 받고 여러 부하와 함께 생포되었다. 이후 엔리케 2세가 무고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한 폭군 페드로를 돕는 것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자, 에드워드는 "페드로는 자신이 죽이 죽인 사람은 모두 반역자였다고 밝혔다"라며, 엔리케 역시 반역자이며 사생아로서 노려서는 안될 것을 노려 사회 윤리를 무너뜨렸다고 비방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엔리케 2세는 에드워드에 맞서고자 병력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를 위해 푸아티에 전투의 영웅인 에드워드와 싸우려는 카스티야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4월까지 모인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고, 프랑스 용병 1,000명과 아라곤 출신 귀족들이 제공한 1,2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전력상 절대 불리했기에, 게클랭 등 많은 장교들은 엔리케 2세에게 전투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 역시 압도적으로 유리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과 회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신하들은 그가 침략자와 싸우지 않는다면 카스티야에 남아있는 지지자들이 뿔뿔이 사라질 거라고 충고했다. 결국 엔리케 2세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1367년 4월 3일, 엔리케 2세와 페드로는 나헤라 마을을 옆에 끼고 나헤릴라 강을 앞에 둔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군대를 재편성했다. 잉글랜드군과 브르타뉴 출신 맨앳암즈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곤트의 존, 존 챈더스 등 여러 원수가 이들을 지휘했다. 두번째 대열에서는 에드워드가 가스코뉴인과 함께 본군을 이끌었고, 우익에는 알브레 영주와 아르마냐크 백작, 좌익에는 장 3세 드 그레일리이 지휘했다. 에드워드는 4월 3일 새벽이 되기 훨씬 전에 적지에 접근했고, 적에 충분히 접근하자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적진에 침투하라고 명령했다.

카스티야-프랑스 연합군은 소음을 듣고 적이 근처에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그러나 적의 압도적인 규모를 목도한 많은 카스티야인들이 겁에 질러 달아나거나 아예 적에게 귀순했다. 이에 게클랭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최전선에 배치된 프랑스군과 카스티야 기마병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곤트의 존과 존 챈더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을 패퇴시켰으나, 에드워드가 신속히 원군을 보내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한편, 엔리케 2세의 형제인 알폰소 텔로는 좌익에서 카스티야 경기병대와 함께 돌격했으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화살비를 퍼붓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윽고 잉글랜드군이 적의 저항을 뚫고 게클랭의 중앙 부대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엔리케는 카스티야 중 기병들을 이끌고 게클랭의 측면을 공격하는 황태자 에드워드의 부대를 급습했다. 그러자 궁수들은 카스티야 군마들에게 화살을 퍼부었고, 많은 기사가 말을 잃고 낙마하거나 말을 잃을 것을 우려해 전장을 이탈했다. 에드워드는 적 중기병들을 흩어지게 만든 여세를 이어가 프랑스군을 포위 섬멸했고, 뒤이어 전장에 여전히 남아있는 카스티야인들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 패주시켰다.

에드워드는 마요르카의 하이메 4세가 이끄는 예비 아라곤 기병들에게 패잔병들을 가능한 한 계속 추격해 섬멸하고 귀족들을 생포하게 했다. 엔리케 2세는 자신의 종자 중 한 명의 말을 타고 전장을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했고, 게클랭은 사로잡혔다가 그를 소중한 인재로 여긴 샤를 5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드로는 전투가 끝난 뒤 자신에게 반역한 카스티야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지만, 페드로가 이미 죽여버린 자들 외에 많은 이가 에드워드의 제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에드워드는 포로 중 한 명이었던 아르눌 도드랭을 별도로 불렀다. 도드랭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뒤 몸값이 전부 지불될 때까지 에드워드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위반한 거짓말쟁이이자 기사도를 어긴 반역자라고 욕했다. 이에 아르눌은 자신이 약속을 위반하지 않았으며 기사도를 어기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는 12명의 기사, 4명의 잉글랜드인, 4명의 가스코뉴인, 4명의 브르타뉴인을 배심원으로 세우고 재판을 열었다. 아르눌은 이 재판에서 자신이 잉글랜드와 싸운 것이 아니라 페드로와 싸운 것이라며, 이를 약속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은 아르눌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보고 그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이후 아르눌은 일전에 카스티야군에게 사로잡혔던 토머스 펠튼과 교환하고 몸값을 잉글랜드에 마저 지불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페드로는 나헤라 전투 승리 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한 뒤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하지만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이질에 걸려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잉글랜드간의 연합이 끊어지자, 엔리케 2세는 1368년 9월 게클랭과 함께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왔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군대를 집결시킨 뒤 1369년 3월 14일 몬티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곧 피살되었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한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어 잉글랜드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4.8. 몰락

카스티야에서 병을 얻은 채 귀환한 에드워드는 보르도에 몸져누웠고,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한 조치는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에드워드의 심복인 존 헤어웰 주교는 니오르에서 회의를 열어 푸아투, 생통주, 리모주, 루에르그 남작들을 설득해 이 세금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코밍즈, 알브레 영주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여기에 에드워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존 챈더스는 난로세를 부과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르망디 영지로 은퇴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1369년 1월 25일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가 파리에 직접 와서 명목상 주군인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프랑스 백성들에게 불법적인 세금을 매긴 것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는 "기꺼이 파리로 가겠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투구를 쓰고 6만 병사들과 함께 갈 것이다."라고 응수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의 건강이 너무 약해져서 말을 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전쟁을 대신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를 대체하지 못했고, 여기에 에드워드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아키텐 영주들이 프랑스군에 대거 귀순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사전에 샤를 5세에게 프랑스 대의에 대한 지지를 나타낸 마을과 성채들이 900개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해지자, 에드워드 왕자는 노르망디 영지에 은퇴했던 존 챈더스를 급히 소환했다. 챈더스는 푸아투의 세네샬을 맡아서 푸아티에로 진군한 뒤 그곳을 되찾으려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역공을 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369년 12월 말 비엔 강변의 루삭레샤토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치명상을 입고 12월 31일 이른 밤에 사망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오른팔이었던 존 챈더스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급락했다. 에드워드는 뒤늦게 가스코뉴 영주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0년 봄, 2개의 프랑스 군대가 아키텐을 전격 침공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라 레울과 베르주라크를 거쳐 기옌으로 진격했고, 베리 공작 이 이끄는 군대는 리모주를 향해 진격했다. 두 군대는 앙굴렘에서 합류한 뒤 에드워드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맞서기 위해 병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마차에 의지한 채 코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푸아투 남작, 생통주 남자, 케임브리지 백작, 랭커스터 백작, 펨브로크 백작과 합류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리모주 주교이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였고, 에드워드의 장남인 앙굴렘의 에드워드의 대부이기도 했던 장 드 무라 드 크로스가 프랑스군이 리모주를 포위한 지 사흘만에 항복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이에 격분해 자신과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그곳을 탈환한 뒤 주민들에게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코냑에서 리모주로 출진했다. 프랑스군은 일찌감치 리모주를 떠난 뒤였고, 리모주에 남겨진 수비대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잉글랜드군은 9월 14일 리모주에 당도하여 포위 공격을 개시했고 9월 19일 잉글랜드 광부들이 도시 외벽을 철거하는 데 성공하자 도시 안으로 쏟아져들어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3,000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모조리 학살하고 리모주를 초토화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하고, 실제로는 300명 가량의 민간인과 수비대가 피살되었다고 추정한다. 에드워드는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2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밝히면서도 민간인 사망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리모주가 에드워드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만은 분명하며, 이곳이 재건되려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에드워드는 리모주 주교 장 드 무라 드 크로스를 처형하려 했지만, 동생인 곤트의 존이 뜯어말리자 그만뒀다.

에드워드는 리모주 공방전을 통해 리모주를 초토화한 뒤 보르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부재 중에 큰아들인 앙굴렘의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비탄에 잠겼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주치의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요양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곤트의 존에게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수비를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72년 8월, 건강이 어느정도 회복된 에드워드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위기에 빠진 가스코뉴를 구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는 역풍을 만나는 바람에 바다로 나가지 못했다. 1372년 10월 6일, 에드워드 왕자는 아키텐과 가스코뉴 공국의 수입이 더 이상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키텐과 가스코뉴 왕자의 직임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1374년 5월 20일, 에드워드는 피렌체 공화국에 맞서 싸우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로부터 보조금을 보내달라는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고위 성직자 및 귀족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이질이 재발해 은거하던 그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빚을 자신 대신 갚아줄 것이며, 남은 아들 리처드를 지켜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1376년 6월 8일, 임종을 눈앞에 둔 에드워드 왕자는 뱅고르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하면서, 자신이 생전에 상처를 입힌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밝히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형제이자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곤트의 존으로부터 아들 리처드를 주권자로서 충실히 섬기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눈을 감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1376년 9월 29일 켄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377년 6월 21일에 사망했고, 에드워드의 어린 아들 리처드가 새 국왕에 등극했다. 이후 어린 왕을 둘러싸고 에드워드 왕세자의 동생들이자 왕의 숙부들이 권력다툼을 벌였고, 리처드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각종 실책을 저질러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미움받아 폐위되며 플랜태저넷 왕조의 몰락을 불러왔으며 장미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초래했다.

5. 대중매체에서

  • 징기스칸 4에서는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 4에 등장하는데 정치 42, 전투 95, 지모 83에 특기로 건설, 문화, 기동, 돌격, 연사, 화공, 공성, 병과 적성에 보병 A, 궁병 S, 기병 S, 수군 B라는 준수한 능력치를 가졌다. 이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수유닛인 가터 기사단을 이끌면 공격력이 증가하며, 장궁병이나 수렵기병, 몽골기병, 공성탑(투석기, 화포병이 없을 때)처럼 흑태자에게 잘 맞는 병과[6]도 플레이하면서 갖추면 된다. 시나리오 4 잉글랜드는 흑태자와 에드워드 3세가 자연사하기 전에 최대한 공격적으로 플레이해서 경쟁국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남은 수명이 짧은 것이 단점이며, 시나리오 4는 1370년 시작인데 에드워드의 사실 몰년은 1376년이다. 재수 없으면 게임 진행 10년 이내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이 활약시켜 주려면 빠른 확장이 필수다. 부왕 에드워드 3세가 죽을 때쯤 사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흑태자를 국왕으로 쓰려면 가터 기사 이벤트를 보고 양위한 뒤 자식농사에 신경써야 한다.[7] 덧붙이면 가터기사단 이벤트에서 실제 역사에서의 부인인 조앤이 등장하지만, 흑태자가 즉위해도 그녀가 왕비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 영화 <기사 윌리엄>에서의 역할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자체. 정체를 숨기고 마상 시험에 참여하며, 정체가 드러났을 때 다른 기사들은 전부 기권하는 와중에 윌리엄이 봐주지 않고 덤비면서 후회없는 대결을 펼친다. 멋진 대결이었다고 자평한 뒤 패배를 시인한다. 대회가 끝난 후 당시 마상시합 최강자인 아드해머의 용병단을 긴급소환해 푸아티에 전투에 돌입한다. 이후 등장이 없다가 윌리엄이 위장 신분이 탄로나서 위기에 빠졌을 때 재회한다. 그는 윌리엄에게 "자네와 난 닮았군. 우리 둘 다 신분을 속이려했고, 실패했지. 그리고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는 말을 하며 즉석에서 윌리엄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덕분에 윌리엄은 기사로써 정식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고 숙적 아드해머에게 승리를 거둔다. 에드워드를 맡은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James Purefoy)는 이후 ROME에서 안토니우스 역을 맡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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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1337년 시나리오에서 등장한다. 역사대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콘월과 귀네드의 공작(프린스 오브 웨일스)이지만[8] 6살밖에 안 되어서, 만약 역사적 설정에서 흑사병 발발 연도를 역사적 연도로 맞췄다면 흑사병을 조심해서 잘 키워줘야한다.

[1] 여담으로 최초의 콘월 공작이며 동시에 콘월 공작위(Dukedom)는 영국 최초의 공작위다. 콘월 공작은 왕의 장남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보통 웨일스 공이 겸임한다.[2] 기존에 프랑스에선 아키텐 공작을 Duc(Duke)로 표기했지만 에드워드 흑태자는 Prince로 표기했다.[3] 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기에 그렇다.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해당 지역의 누구 누구로 표기했다.[4] 발음은 '베하누아' 정도.[5] 노르만 출신의 초기 잉글랜드 국왕들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했지만, 이는 프랑스 국왕에게 수여받았기에 프랑스 내에서나 통용되는 칭호였다.[6] 기동+연사+화공에 최적화된 장수가 흑태자, 티무르, 얀 지슈카, 바얀, 바이바르스 등으로 얼마 없다.[7] 적어도 아들이 8세 이상일 때 흑태자가 죽어야 게임오버 당하지 않는다.[8] 두 작위 모두 영국 왕세자가 전통적으로 받는 작위이다. 정확히는 콘월 공작은 '영국 왕의 장남'에게, 웨일스 공작은 '영국 왕의 후계자'에게 주는 것인데 많은 경우 장남=왕세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