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샤를 2세 달랑송 Charles II d'Alençon | |
생몰년도 | 1297년 ~ 1346년 8월 26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알랑송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크레시 | |
배우자 | 잔 드 조이니 (1314년 결혼/1336년 사망) | |
마리 드 라 세르다 (1336년 결혼) | ||
자녀 | 샤를 3세 달랑송, 필리프 달랑송, 피에르 2세 달랑송, 이자벨, 로베르 달랑송 | |
아버지 | 발루아 백작 샤를 | |
어머니 | 앙주의 마르게리타 | |
형제 | 이자벨, 필리프 6세, 잔, 마르그리트, 카트린 | |
직위 | 알랑송, 샤르트르, 페르셰 백작, 왕실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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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왕실 중장.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297년경 알랑송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발루아 백작 샤를은 발루아 왕조의 창립자다. 샤를은 발루아, 알랑송, 페르세, 샤르트르, 메인, 앙주 등지를 장악하고 아라곤 왕국의 명목상 국왕이자 두번째 아내 카트린 1세와 함께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이기도 해서 프랑스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최강의 위세를 떨쳤다. 어머니 앙주의 마르게리타는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인 카를로 2세의 딸이다. 형제자매로 필리프 6세, 이자벨[1], 잔[2], 마르그리트[3], 카트린[4]이 있었다.1324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반란이 일어난 기옌을 안정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시기에 한 요새를 상대로 공방전을 벌일 때 최전선에 나아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등 용맹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1325년 12월 16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알랑송 백국, 샹프롱, 샤토뇌프, 페르셰 등지를 상속받았다. 1326년 형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서 프랑스 국왕에 즉위한 뒤 정식으로 알랑송 백작에 선임되었고, 왕실 중장으로도 선임되었다. 1328년 프랑스 북부 카셀에서 플란데런 시민들이 일으킨 반란 진압에 참여했으며, 1330년 생트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도 투입되어 조기에 진압했다.
백년전쟁 발발 후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를 상대하기 위해 원정을 벌일 때 언제나 동행했다. 1339년 캉브레 공방전과 1340년 투르네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이 두 곳을 공략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한 몫 했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한 후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와 손잡고 반기를 든 장 드 몽포르를 토벌한 뒤 그에게서 빼앗은 라 글레 시를 그에게 수여했다.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 때 선봉대를 이끌었으나 전사했다.
3. 가족
- 잔 드 조이니(1300 ~ 1336): 샹파뉴의 조이니 백작 장 2세의 딸. 1314년 샤를 2세와 결혼했지만 자손을 낳지 못했다.
- 마리 드 라 세르다(1319 ~ 1375):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영주 페르난도 2세 데 라 세르다의 막내 딸. 1334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둘째 아들인 엘섬의 존과 약혼했으나 나중에 파기되었고, 1335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필리페 3세의 남동생인 샤를과 결혼하여 쌍둥이 형제 루이 데브뢰와 장을 낳았지만, 샤를이 1336년 9월 5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미망인이 되었다. 그러다 3개월 후인 1336년 12월 샤를 2세 달랑송과 재혼했다.
- 샤를 3세 달랑송(1337 ~ 1375): 알랑송 및 페르셰 백작, 리옹 대주교.
- 필리프 달랑송(1338 ~ 1397): 루앙 대주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오스티아와 사비나 주교를 역임했다.
- 피에르 2세 달랑송(1340 ~ 1404): 알랑송 및 폐르셰 백작.
- 이자벨(1342 ~ 1379): 수녀.
- 로베르 달랑송(1344 ~ 1377): 페르셰 백작.
[1] 1292 ~ 1309,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드 브르타뉴의 부인[2] 1294 ~ 1342,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부인[3] 블루아 백작 기 1세 드 샤티옹의 부인[4] 1299 ~ 1300,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