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9:54:11

필리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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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초대 국왕
필리프 6세
Philippe VI
파일:Philippe_VI_de_Valois.jpg
출생 1293년
프랑스 왕국 파리 퐁텐블로
사망 1350년 8월 22일 (향년 56~57세)
프랑스 왕국 외르에루아르 노장르후와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28년 4월 1일 ~ 1350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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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발루아 가문
아버지 발루아 백작 샤를
어머니 앙주 여백작 마르그리트
형제자매 이자벨, 잔, 마르그리트, 샤를 2세
배우자 부르고뉴의 잔 (1313년 결혼 / 1349년 사망)
나바라의 블랑슈 (1350년 결혼)
자녀 장 2세, 필리프, 잔, 잔(사생아), 토마(사생아)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프랑스 왕위 계승2.3. 초기 통치
2.3.1. 카셀 전투2.3.2. 에드워드 3세의 경의2.3.3. 로베르 다르투아 사건2.3.4. 외교 정책
2.4. 백년전쟁을 향한 길
2.4.1. 스코틀랜드 분쟁2.4.2. 플란데런 반란
2.5. 백년전쟁
2.5.1. 전쟁 초기(1338 ~ 1340)2.5.2.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2.5.3. 가스코뉴 전선의 붕괴2.5.4. 크레시 전투2.5.5. 1차 칼레 공방전
2.6. 말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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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초대 국왕. 백년전쟁을 이끈 첫번째 프랑스 국왕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293년경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 퐁텐블로 궁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발루아의 샤를은 발루아 왕조의 창립자이며, 발루아, 알랑송, 페르세, 샤르트르, 메인, 앙주 등지를 장악하고 아라곤 왕국의 명목상 국왕이자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이기도 했고, 프랑스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최강의 위세를 떨쳤다. 어머니 앙주의 마르그리트는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인 카를로 2세의 딸이다. 형제자매로 샤를 2세 달랑송, 이자벨[1], 잔[2], 마르그리트[3], 카트린[4]이 있었다.

필리프의 초년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313년 7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딸인 아그녜스의 여식인 부르고뉴의 잔과 결혼했으며, 132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발루아 백국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 앙주 및 메인 백국을 물려받았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2.2. 프랑스 왕위 계승

1328년 2월 1일, 필리프의 사촌인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샤를 4세에게는 왕비 에브뢰의 잔과의 사이에서 두 딸 잔, 마리가 있었지만, 이들 모두 살리카 법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다만 에브뢰의 잔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경우 그 갓난아기가 프랑스의 국왕이 될 수도 있었다. 모두가 왕비의 출산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2월 8일, 필리프는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귀족들을 포섭해 자신이 임시로 국왕의 섭정을 맡는 데 동의하도록 했다.

1328년 4월 1일, 에브뢰의 잔은 딸 블랑슈를 낳았다. 이리하여 위그 카페 이래 340여 년간 프랑스 왕위를 이어가던 카페 직계가 단절되었다. 필리프는 즉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선포되었고, 그해 5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도유식대관식을 거행했다. 샹파뉴 여백작이자 전임 국왕 루이 10세의 외동딸이었던 잔은 남편이자 에브뢰 백작인 필리프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이 프랑스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필리프가 이미 도유식과 대관식을 거행한 데다 프랑스 대귀족들이 살리카 법을 내세우며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망은 별로 없었다.[5]

이에 잔과 필리프 부부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나바라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필리프 6세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에브뢰 백국이 통합된다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필리프 6세는 샹파뉴 백국과 브리 백국을 잔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코탕탱 반도의 일부인 모르탱, 벡생, 퐁투아즈, 보몽 쉬르 우아즈, 아스니에르 쉬르 우아즈를 넘겨주기로 했다. 이때 앙굴렘 역시 양도하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합의를 내린 뒤, 잔은 나바라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했고, 남편 필리프는 필리페 3세로 즉위했다.

한편, 프랑스 전임 국왕 필리프 4세의 딸이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며,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로서, 당시 애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어린 에드워드 3세의 섭정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던 프랑스의 이자벨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필리프 6세가 부당하게 가로챘다고 여겼다. 그녀는 우스터, 코벤트리, 린치필드 주교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내 프랑스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이 잘못 처리되었으니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물러가야 했다. 게다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에드워드 3세와 이자벨 왕비는 필리프 6세가 프랑스 국왕에 오르는 걸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2.3. 초기 통치

2.3.1. 카셀 전투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리프 6세가 맨처음 맞닥뜨린 문제는 플란데런 백국에서 발발한 반 프랑스 봉기였다. 1322년 플란데런 백작에 취임한 루이 1세 드 느베르는 사치에 몰두하면서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물 상인과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브뤼헤 시민들이 1323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프르, 푸르네스, 딕스무이데, 포페린게 시가 브뤼헤와 동맹을 맺었다. 반란군은 5년간 시골 지역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세금 징수원과 플란데런 백작의 측근들은 모조리 살해되거나 도망쳤으며, 귀족들의 집은 파괴되었다. 결국 반란을 자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루이 1세는 1328년 새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 6세는 주군으로서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면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랭스에 모였던 귀족들에게 플란데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 후 아라스에서 병력을 집결한 필리프 6세는 1328년 7월 플란데런으로 출진했다. 때마침 브뤼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겐트가 브뤼헤를 공격하면서, 반란군은 이를 막느라 프랑스군의 공세에 제때 대응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분견대를 파견해 플란데런 서부를 휩쓸고 브뤼헤 성을 압박하게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카셀로 진군했다.

1328년 8월 23일, 높이 157m의 카셀 산에 자리잡은 반란군과 대면한 필리프 6세는 작전 회의를 열었다. 그는 1302년 플란데런 장창병들이 프랑스 기사들을 격파한 쿠르트레 전투의 선례를 인식하고 섣불리 기병대를 투입하지 않으려 했다. 반란군 지도자 니콜라스 잔네킨이 사절을 보내 싸움의 날을 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필리프 6세는 생각해 본 뒤에 알리겠다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기사들은 반란군이 섣불리 산 아래로 내려오지 못할 거라 여기고 갑옷을 벗고 진영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그러나 잔네킨은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군이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 공격해 가능한 한 큰 피해를 입히기로 마음먹었다.

반란군은 산 아래로 은밀히 이동한 뒤 낮잠을 자고 있던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 보병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경악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일부 병사만이 다음날 생오메르에서 재집결했다. 반면에 필리프 6세와 기사들은 급히 말에 올라탔다. 필리프 6세는 금색 백합으로 수놓은 푸른 옷에 가죽 모자를 쓴 채 기사들을 재편성한 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선두에서 반란군을 향해 돌격했다. 반란군은 기사들이 몰려들자 어깨를 맞대고 원형 진형을 결성했지만, 짧은 시간에 진형을 펼치느라 비어있는 공간이 많았다. 기사들은 그 공간으로 침투해 반란군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날 잔네킨을 비롯한 반란군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그 후 프랑스군은 카셀 시를 공략하고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이프르, 브뤼헤 등 반란에 가담한 도시들이 대거 항복하면서 반란이 종결되었다. 필리프 6세는 바이을 출신의 장을 이프르 시의 총독으로 세우고 도시를 철저히 통제하게 했으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는 반란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플란데런의 통제력을 회복했다. 또한 필리프 6세는 반란군을 상대로 앞장서서 돌격한 용감한 군주로서 명성을 드높였고, 프랑스 왕좌에 대한 권위를 완전히 확립했다.

2.3.2. 에드워드 3세의 경의

파일:Edward_III_Plantagenet_of_England_pays_homage.jpg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에드워드 3세.

필리프 6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국에 속한 영지의 영주로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헀다. 잉글랜드 왕실은 국왕의 위신을 손상시킬 이 일을 가능한 미루려 했지만, 카셀 전투 이후 위세가 드높아진 필리프 6세가 속히 따르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잉글랜드의 권신 로저 모티머와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이자 로저 모티머를 애인으로 둔 이자벨 왕비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다. 1329년 5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도버에서 출발했고 6월 6일 아미앵 대성당에서 필리프 6세에게 아키텐과 퐁티외의 주군으로서 필리프에게 선서를 했다. 그러나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필리프 6세는 이렇게 어물쩡하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윽고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그는 군대를 소집해 가스코뉴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여러 영지를 탈취했다. 1330년 10월 정변을 일으켜 로저 모티머를 살해하고 모후 이자벨을 유폐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그의 뜻대로 할 테니 침공을 멈춰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1331년 4월, 에드워드 3세는 상인으로 위장해 프랑스로 비밀 여행을 떠났고, 필리프 6세와 파리에서 접견한 뒤 필리프 6세 앞에서 선서를 다시 했다. 이리하여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가진 영지를 비롯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 에드워드 2세는 과거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를 상대로 명백한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자신이 원정을 감행하여 탈취한 영지를 전부 돌려주고 피해를 보상해주기로 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는 듯 했으나, 곧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양자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2.3.3. 로베르 다르투아 사건

프랑스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르투아 백국은 1302년부터 심각한 계승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가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에게 전사했을 때, 로베르 2세의 외아들인 필리프 다르투아는 4년 전인 1298년에 사망했고, 손자 로베르 다르투아가 살아 있었다. 본래라면 그가 로베르 3세로서 아르투아 백작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로베르 2세의 딸이자 필리프의 누이이며, 그의 고모인 마호트 다르투아가 아르투아 백국의 계승에 관한 관습법을 제시하며 이를 막았다.

아르투아 관습법에 따르면, 직함은 살아남은 자녀, 소년, 또는 소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그러나 영주가 죽기 전에 그의 아들이 이미 죽었다면, 손자가 이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명시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국왕 루이 8세는 로베르의 증조부인 로베르 1세 다르투아에게 아르투아를 영지로 주었을 때 가문의 계승이 남성을 통해서만 이뤄질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마호트는 이 점을 근거로 내세우며, 자신이 로베르 2세의 딸로서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투아 귀족들 역시 15살 소년보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부르고뉴 공작 오톤 4세의 부인인 마호트 쪽을 선호했다. 결국 마호트가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고, 로베르는 보몽 르 로제라는 작은 영지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로베르는 이 상황에 격분했고, 고모를 축출하고 자신이 아르투아 백작이 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1309년과 1318년에 열린 법원 모두 마호트가 옳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이에 로베르는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이며 필리프 6세의 누이인 잔 드 발루아와 결혼해 입지를 강화했으며, 필리프 6세가 왕위에 등극할 때 적극적으로 도왔다. 필리프 6세는 그의 헌신에 고마움을 느껴 수많은 연금을 제공했고, 자신의 친구이자 조언자로 삼았다. 1년 후인 1329년 마호트가 사망하고 마호트의 장녀 잔이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잔 역시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로베르는 지금이야말로 아르투아 백작위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파리 법원에 계승 문제를 3번째로 제기했다.

하지만 로베르는 상황이 불확실하다고 여겼다. 현재 아르투아 여백작인 잔은 부르고뉴 여백작이기도 했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미망인이기도 했다. 또한 잔이 사망한 후 그 뒤를 이어 아르투아 여백작이 될 것으로 예정된 장녀 잔은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의 부인이기도 했다. 그는 재판에서 승리하려면 확실한 물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아르투아 백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문서를 비밀리에 위조했다. 재판에 참석한 필리프 6세는 그를 소중한 동료로 여겼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척지기도 싫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르투아 백국을 분할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아르투아 백국 전체가 자신의 관할에 들어가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 재판에 참석한 법률가들이 면밀히 조사한 끝에, 1330년 12월 14일에 로베르가 제시한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위조 문서를 제작한 이는 베쑨 성의 영주 하벳 드 디비옹의 딸 잔 드 디비옹으로, 부친이 아르투아 여백작 마호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전 재산을 상실한 뒤 로베르 3세가 아르투아 백작이 되게 해준 후 재산을 돌려받고자 문서를 위조했다. 세간에서는 1329년 마호트의 사망과 1330년 1월 마호트의 장녀 잔이 사망한 것 역시 로베르 3세와 잔 드 디비옹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이것의 진의는 알 수 없다.

필리프 6세는 문서를 위조해 자신을 기만한 것에 분노했다. 잔 드 디비옹은 화형에 처해졌고, 로베르는 왕실 행정의 신뢰성을 훼손해 국왕의 권위에 모독을 가한 혐의로 형사 재판에 회부된 뒤 1332년 4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모든 소유물을 영구히 박탈당한 뒤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로베르는 플란데런으로 망명했다가 아비뇽으로 이동했고, 1334년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당대 프랑스 연대기들은 로베르가 당시 22살이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꼬드겨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고 기술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2.3.4. 외교 정책

루이 9세가 프랑스 법률 시스템을 구축한 이래, 많은 주변 지역이 프랑스 문화권으로 유입되었다. 도피녜 일대와 부르고뉴 일대에서는 자기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파리 법원에 재소했다. 프랑스 국왕 역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집행관을 자주 보내곤 했다. 여기에 프랑스의 많은 귀족들은 유럽의 여러 왕국에 걸쳐 영지를 소유했다. 프랑스의 왕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주변 지역의 귀족들을 궁정으로 끌어들이면서 프랑스 왕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사보이 백작들은 연금을 받는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될 아들 바츨라프도 프랑스 궁정에 자주 찾아갔다.

1329년, 교황 요한 2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갈등이 몹시 심해졌다. 급기야 루트비히 4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니콜라오 5세를 대립교황으로 세웠지만, 독일의 정세가 급박해지자 독일로 철수해야 했고, 니콜라오 5세는 요한 22세를 지지하는 피렌체군의 위협에 못 이겨 요한 22세가 있던 아비뇽으로 찾아가 교황 직위를 포기하고 요한 22세에게 복종했다. 필리프 6세는 이 상황을 동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론강 유역의 영주들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재침을 막아줄 테니 자신의 편에 서라고 꼬드겼다.

1332년, 나바라 공동 국왕 필리페 3새와 호아나 2세가 카를로스 왕자를 낳았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6세는 카를로스 왕자가 장성하면 프랑스 왕위에 재차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 전에 당시 13세였던 장남 장 왕자의 결혼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는 한동안 에드워드 3세의 누이인 엘레노어와 장 왕자를 결혼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보헤미아 국왕이며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프랑스에 지극히 우호적인 얀 루쳄부르스키를 동맹으로 삼으면 든든할 거라고 판단했다. 얀 루쳄부르스키 역시 롬바르디아를 확고히 장악하려면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여기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양자는 퐁텐블로에서 전쟁 발생 시 서로를 도우며, 보헤미아 국왕이 롬바르디아를 정복하면 프랑스는 이에 간섭하지 않고, 보헤미아 국왕은 롬바르디아를 장악한 뒤 아를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겠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보나가 장 왕자의 아내가 되었고, 지참금은 120,000 플로린으로 설정되었고, 루카 시가 프랑스 왕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얀 루쳄부르스키의 롬바르디아 석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 정적 관계였던 구엘프기벨린 파벌은 동맹을 맺고 페라라에 본부를 세운 뒤 얀 루쳄부르스키를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한 얀 루쳄부르스키는 1333년에 보헤미아로 돌아가야 했다.

2.4. 백년전쟁을 향한 길

2.4.1. 스코틀랜드 분쟁

1332년 9월 24일,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데이비드 2세를 몰아내고 친 잉글랜드파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다. 발리올은 얼마 안가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재차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고,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프랑스의 오랜 동맹이었기에, 이 사건은 프랑스를 심히 자극했다. 당시 필리프 6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지만, 주요 동맹국이 무너진 채로 원정을 떠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항의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가 에드워드 2세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으며, 스코틀랜드 문제는 잊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6세는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던 스코틀랜드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여겨 거부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꼭 가고 싶었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 저항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이 영국해협에서 잉글랜드 선박들을 약탈하도록 했다. 1334년 8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 저항군이 대대적으로 봉기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은 또다시 축출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격분해 1334년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겨울 추위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고, 1335년 7월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서 로우랜드를 휩쓸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산악 지대에 숨어서 농성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장병 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1335년 8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오랜 앙숙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격분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분쟁 조정을 위해 자신과 함께 중재를 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그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은 양자간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실패했고, 베네딕토 12세는 필리프 6세에게 십자군을 취소하라고 권고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재차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에버딘을 파괴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분노해 8월 20일 파리에 찾아온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함대를 규합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해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후 프랑스 전함들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파리 법원은 1336년 12월에 로베르 다르투아를 양도할 것을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맞서 프랑스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항전할 것을 호소해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했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이 프랑스 왕국 전역에 선포되었고, 프랑스 국왕에게 반기를 든 '아키텐 공작 에드워드'의 영지를 몰수한다는 결의안이 뒤이어 선포되었다. 그해 7월, 1만여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 가스코뉴 국경지대의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리하여 양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착수했다.

2.4.2. 플란데런 반란

1337년 2월, 필리프 6세는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했다. 에노 백국, 브라반트 공국 등을 비롯한 저지대 국가들은 위협을 느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 역시 명목상 봉국인 캉브레가 프랑스에 넘어간 것에 분노해 캉브레 주교 기욤 도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저지대 국가들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사절단을 파견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가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지만, 의회는 잉글랜드 본토가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을 수 있는데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그렇게 멀리 가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는 이에 승복했고, 저지대 국가들과 손잡고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비 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에드워드 3세는 저지대로 쉽사리 진군하지 못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첩자들을 통해 저지대 국가들이 잉글랜드와 모종의 거래를 했으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적의 저항을 뚫고 보르도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지만,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와 저지대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면 골치 아파진다고 여기고 이를 막기 위해 회군령을 내렸다. 이렇듯 양자가 전쟁에 착수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고 있을 때, 플란데런 백국에서 또다시 반란이 발발했다.

당시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 도시들은 막대한 양모를 생산하는 잉글랜드와의 무역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던 1336년 8월 12일에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에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의 속국들에 양모와 가죽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자, 그들은 경악했다. 잉글랜드가 더 이상 양모를 팔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을 게 자명했다. 더욱이 당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느베르는 지난날 반란을 초래했던 걸 반성하지 않고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프랑스 국왕에 충성을 바치는 반면에 플란데런을 거의 들리지 않으면서 플란데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강해졌다.

플란데런 내 친 잉글랜드 파벌의 지도자는 헨트의 부유한 방직업자인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acob Van Artevelde, 1290 ~ 1345)였다. 그는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해 동료들이 부재중인 압제자에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의 친구가 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떠받들었고, 그는 헨트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을 반역자로 선고하고 가스코뉴를 공격한 필리프 6세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에서 반 프랑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텅 비어버렸고, 왕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 물자 수급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의 여러 대급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막대한 빚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재원 마련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부유하기로 유명한 플란데런을 자기 편으로 확고히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은 사절들은 플란데런 각지를 돌며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그 결과 헨트, 브뤼헤, 이프르 등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무역을 정상화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 특히 야코브는 헨트에서 사절단을 만나 잉글랜드군이 플랑드르에 상륙하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프랑스를 합동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잉글랜드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로 해주겠다고 밝혔다. 사절단은 잉글랜드로 곧장 돌아가서 야코브의 제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모든 플란데런 일대가 잉글랜드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프랑스군 수비대 및 해군이 주둔한 항구 도시 슬로이스와 스헬트 강 입구에 위치한 카잔트 섬은 야코브의 대의에 따르길 거부하고 필리프 6세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두 도시에 주둔한 수비대는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오가는 잉글랜드 상선을 종종 위협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에 상륙한 뒤 프랑스로 진군할 때 보급로를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빠르고 쉬운 승리를 한시바삐 거둬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우려를 표하고 있는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에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프랑스 수비대를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337년 11월,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 백국으로 파견되어 카잔트 전투에서 프랑스를 지지하는 플란데런 민병대를 격파했다. 예정대로라면 슬로이스 시를 공격해야 했지만, 월터 매니는 카잔트와 며칠 거리에 있는 볼로뉴 쉬르 메르에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요새화된 슬로이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거기에 묶여있는 사이에 프랑스군의 요격으로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포로와 약탈품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카잔트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에드워드 3세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이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고, 플란데런의 친 프랑스 인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먹었다. 이에 고무된 플란데런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필리프 6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대응해 막대한 돈을 분배해 보데몽 백국, 제네바 백국, 사보이 백국을 자국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보헤미아 왕국의 지원도 확보했다. 여기에 제노바 공화국에게 거액의 돈을 지급하고 함선과 숙련된 석궁병들을 고용했다. 가장 큰 성과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의 동맹이었다. 1336년 12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는 프랑스 왕에게 대서양 에서 매우 유용한 해상 지원을 약속했다. 이리하여 백년전쟁이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2.5. 백년전쟁

2.5.1. 전쟁 초기(1338 ~ 1340)

2.5.1.1. 영국 해협 전역
1338년 2월, 필리프 6세는 카잔트 전투에 보복하기 위해 전임 재무부 관료이자 해군 장성인 니콜라 바후셰를 프랑스 제독으로 선임하고 잉글랜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38년 3월 24일, 바후셰는 소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 포츠머스에 접근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기를 걸어서 잉글랜드인들을 속여 포츠머스에 상륙한 뒤 배에서 내려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후 채널 제도에 상륙하여 건지 마을에서도 약탈을 자행했다. 미처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잉글랜드 당국과 국민들은 포츠머스 습격 사건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선을 따라 방어 요새를 설치하고 군대 및 함대를 배치하는 조치가 잇따라 내려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상륙할 병력 모집은 차질을 빛었다. 심지어 영국 남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데본과 콘월 영주들도 프랑스군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수 있으니 수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프랑스로 원정갈 병사들을 지원할 물자와 자금을 달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노르망디, 피카디, 브류타뉴의 영주 및 상인들이 각자 전함을 사들여서 잉글랜드 해안을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포로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몸값을 뜯어내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338년 5월, 필리프 6세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칼레에 이르렀다. 바후셰는 이들을 이끌고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잉글랜드 상선들을 탈취했다. 그 해 9월,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이끄는 프랑스-제노바 연합 함대는 먼저 채널 제도를 공격했다. 사크 섬은 전투 없이 함락되었고, 건지 섬은 제노바 선박 2척이 침몰한 짧은 전투 끝에 함락된 뒤 수비대 전원이 처형되었다.

1338년 9월 23일, 니콜라 바후셰와 위그 키에레 제독이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 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위그 카이레와 함께 습격했다.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으로 해전에서 사용하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아르네뮤이덴 해전에서 900명 이상 잃은 것에 화가 단단히 난 그는 존 킹스턴 선장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했다.

1338년 10월 5일, 프랑스 함대는 수천 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사우스햄튼 항구 인근에 상륙시킨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사우샘프턴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사우샘프턴 전역이 파괴되고 수천 파운드 상당의 물품과 선박, 포로들이 프랑스로 끌려갔다. 다음날 뒤늦게 조직된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프랑스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1년간 마비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백작들에게 민병대를 대폭 강화해 프랑스 함대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백작들은 최선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프랑스 함대의 사우샘프턴과 플리머스, 저지 섬에 대한 재침은 격퇴되었다. 다만 헤이스팅스가 급습당해 파괴되고 그곳에 살던 어선 몇 척이 나포되고 살해당한 어민들의 시신이 칼레 거리에서 전시되었다.

1339년 여름, 몰리 남작 로버트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내륙으로 좀더 들어가면서 여러 마을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볼로뉴 항구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다. 한편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디에프 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2.5.1.2. 프랑스군의 가스코뉴 원정
한편,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를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1338년 봄 프랑스 무관장 라울 1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헀다. 그러나 라울 1세는 병력을 여러 분대로 분할해 각 요새들을 공략하게 했다가 끊임없는 공방전으로 인해 병력이 대거 소모되는 실책을 범했고, 가스코뉴 원정은 수렁에 빠졌다. 이에 필리프 6세는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의존하기로 했다. 얀은 민병대와 기사 및 용병대로 구성된 12,000명을 이끌고 필리프 6세로부터 45,000 에퀴를 매달 제공받으며 가스코뉴로 진군했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라울 1세 드 브리엔과는 달리 독일 공병과 광부들을 고용해 요새 하나하나의 성벽을 허무는 전략을 구사했고, 그 결과 펜다제네, 카스텔가이야르, 푸이길헴, 블라예, 브롱이 공략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함대가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가스코뉴 주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1339년 7월,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를 포위했고, 거센 공성전 끝에 성문을 점령했다. 그러나 수비대와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격해 성문을 도로 내주고 퇴각해야 했다. 이후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곤경을 겪던 프랑스군은 7월 19일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2.5.1.3. 캉브레 전역
1338년 7월 22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향한 원정을 감행하기 위해 자신과 손잡기로 한 플란데런의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부의 자금난으로 인해 프랑스를 향할 원정을 감행할 자금과 물자 마련이 잘 되지 않아 원정을 좀처럼 감행하지 못하다가, 총신인 윌리엄 드 라 폴이 용케도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구해서 왕에게 빌려주면서 자금난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자 1339년 9월 20일 12,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가 첫 목표로 삼은 곳은 프랑스 오드프랑스 지역의 노르주에 위치한 캉브레였다. 캉브레에는 3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캉브레 주교 기욤 도손이 수장으로 군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곳을 공략해 루트비히 4세에게 넘김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지를 보다 확실히 얻어내고,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러 달려온다면 즉시 요격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9월 26일 캉브레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기욤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기욤은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하며 거부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공성전을 벌였지만, 프랑스 수비대가 대포 10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포위를 풀고 캉브레에서 물러났다. 그는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 즉시 요격하여 끝장내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열악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이 캉브레에 대한 이권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루트비히 4세 역시 에드워드를 더는 지원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콩피에뉴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떻게든 필리프 6세와 승부를 빨리 보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 영내로 진입했다. 이에 필리프 6세가 군대를 이동시켰고, 양군은 페론 시 인근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곳은 필리프 6세의 확고한 영토라서 전장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령과의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당초 기스 시의 다리를 통해 우아즈 강을 건너려 했지만, 기스 수비대가 다리 통과를 거부하자 인근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우아즈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0월 21일 에노 백령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10월 22일 프랑스군이 라 카펠에 도착했고, 양군은 곧바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장군들이 "우회할 공간은 없으니 정면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고, 정면 공격 시 적 경보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잉글랜드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양쪽에서 받아서 궤멸될 공산이 크니 전투를 미뤄야 한다"라고 진언하자, 필리프 6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라 카펠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필리프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스의 많은 기사는 라 카펠에서 한판 붙어서 적을 물리치고 고위 장성들을 잡아서 몸값을 두둑이 챙기길 바랐는데, 필리프 6세가 그냥 철수해버린 것에 분노해 필리프 6세를 'renardie(여우)'라고 야유했다고 한다.

1339년 말, 보르도의 세네샬 올리버 잉헴에게 회유된 알브레 영주 베르나르 에르지 5세가 잉글랜드의 편에 돌아선 뒤 가스코뉴 군대의 수장으로서 공세를 개시해 가론 강 유역의 생트바제유를 점령하고 콩동을 포위했다. 하지만 툴루즈의 세네샬 피에르 드 라 팔루가 반격을 가해 포위를 풀었고, 가스코뉴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
2.5.1.4. 슬로이스 해전투르네 공방전
1340년 1월 26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프랑스 국왕을 옹립하려는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를 비롯한 플란데런인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헨트 시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플란데런 도시 행정관들과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으로서 플란데런인들이 선왕들과 맺었던 조약의 의무를 면제하겠다고 선포해 민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 2월에 프랑스 왕국 전역에 자신이 루이 9세의 선한 법과 관습을 복구할 것이며, 필리프 4세 이후 왕실이 신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온 화폐 가치 절하를 중단할 것이고, 프랑스 왕들은 앞으로 언제나 왕국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조언을 듣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반포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맞서 에드워드의 포고문의 사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나 반역죄로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플란데런 도시들을 대상으로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1340년 4월, 에드워드 3세가 의회와 협상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간 사이, 플란데런에 잔존한 잉글랜드군과 신성 로마 제국군, 플란데런군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투르네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행군 도중에 지휘관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가 프랑스 기병의 기습 공격에 생포된 뒤 파리의 샤를레 감옥에 수감되자 안트베르펜으로 퇴각했고, 신성 로마 제국군은 티에라슈에 새로운 프랑스군이 집결 중이라는 잘못된 첩보를 믿고 그들을 기습하려고 그곳에 갔다가 허탕만 치고 인근 마을 수십 곳을 약탈하다가 다른 곳에서 집결을 마친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유일하게 투르네 시에 도착한 플란데런군은 다른 군대가 오지 않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순식간에 에노 백령의 수도인 발랑시엔을 포위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근처 마을들을 약탈하러 흩어진 사이 23일 새벽 성문 밖으로 나온 주둔군과 민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주했다. 캉브레지 북부로 후퇴해서 재정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이제 보급로를 위협하는 국경 지역의 요새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고, 플랑데런 시민 정부와 저지대 군주들이 보낸 지원군을 각각 투르네 근처의 스카르프 강과 툰 레베크 근처의 스헬더 강에서 격퇴한 뒤 6월 23일 툰 레베크를 점령하고 부샹으로 향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육지에서 밀어붙이는 사이, 프랑스 해군은 플란데런의 주요 항구인 슬로이스에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한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오려는 에드워드 3세의 군대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궤멸시키고 잉글랜드로 상륙해 끝장을 내려 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프랑스 대함대가 조국을 침공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함을 모집하니 조속히 모일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필리프와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에 대한 오랜 적개심과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심, 에드워드 왕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에 휩싸인 상인들이 앞다퉈 응하면서, 오웰호에 120~150척 가량의 함대와 선원 및 전투병 12,0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1340년 6월 24일, 에드워드 3세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고 슬로이스에 상륙했다. 그는 이 기세를 이어가 육지에서도 프랑스군을 무찌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난날 아르투아 백작위를 놓고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와 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는 생오메르로 진군했지만 생오메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퇴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 본대가 생오메르로 긴군하는 로베르를 요격하기 위해 그 쪽으로 이동한 사이, 에드워드 3세는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란데런군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가 이끄는 브라반트군, 에노 백작 기욤 2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함께 투르네로 진격했다. 당대의 프랑스 연대기는 연합군 규모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고 최대 23,000명, 최소 16,000명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에 맞서는 투르네에는 주민들 외에도 5,8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있었다. 이 수비대는 프랑스 국경 수비대장 라울 1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현지 주둔군과 필리프 6세가 파견한 푸아 백작 가스통 2세 드 푸아가 지휘하는 2,500~3,000명의 기병 및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연합군은 1340년 7월 23일 투르네에 도착한 뒤 공방전을 개시했지만, 투르네 성벽이 매우 탄탄해 쉽게 뚫리지 않는데다 연합군 내부의 불협화음이 심했고, 잉글랜드 의회가 국왕을 위해 보내기로 한 5만 파운드 가량의 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에 장병들의 전의가 갈수록 떨어졌다. 그러다가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투르네 인근에 이르자, 브라반트 공작과 에노 백작이 이끄는 장병들이 급여를 주지 않는다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필리프 6세와 평화 협상을 가질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프랑스 진영에서는 에노 백작부인이자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며 에드워드 3세의 시어머니이기도 한 발루아의 잔이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요청에 따라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필리프 6세는 전쟁이 발발한 1337년부터 1340년까지 화폐 가치를 5번이나 떨어뜨려야 할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마을이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에 부담을 느꼈다. 그리고 연합군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잔은 9월 22일 연합군 진영에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도 같은 호소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는 양국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했다. 이후 연합군은 즉시 해산되었고, 필리프 6세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던 투르네 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헨트에 도착한 뒤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10월 28일 자신이 더 이상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면서 사과하는 글을 남겨둔 채 잉글랜드로 몰래 도주했다. 한편, 1340년 스코틀랜드에서 데이비드 2세 지지자들이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여 잉글랜드 북부를 습격했고, 리데슬레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는 에딘버러를 탈환헀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는 1341년 6월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2.5.2.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딸인 팡티에브르의 잔이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그러나 장 3세의 배다른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 그러나 뒤이은 샹토소 전투에서 참패했고, 낭트로 도주한 장 드 몽포르는 시민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 달 안에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테니 그 때까지 항전하자"라고 설득해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샤를의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서 공세를 퍼붓자, 낭트 시내에서 장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장은 10월 말에 용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은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하기로 마음먹고, 1342년 5~6월 샤를 드 블루아의 공세에 맞서 엔봉 공방전을 치렀다. 얼마 후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 구원군이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엔봉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또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브레스트 항구에 상륙한 뒤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신속하게 공략했다. 그 해 10월, 아르투아 백작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으로서 활동하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반으로 진군했다. 플란데런의 잔과 월터 매니도 엔봉에서 100명의 기병과 100명의 궁수와 함께 로베르에 합류했다. 이들은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본군을 이끌고 브레스트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으로 진격했다. 1342년 12월 5일 반을 포위한 에드워드 3세는 주변 마을을 모조리 약탈했고 성을 수시로 공격했다. 올리비에 4세는 이에 맞서 종종 출격해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생포되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지휘관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스태퍼드 백작 랄프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수만 병력을 규합하여 브르타뉴로 진군해 플로에르멜 마을 인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좋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터라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고, 갈수록 쌓여가는 재정 적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안토니오 도리아가 이끄는 프랑스-카스티야 함대가 무기와 보급품을 수송하는 모든 잉글랜드 선박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사절을 보내 휴전을 맺으라고 촉구하자, 양자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1343년 1월 19일, 양국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전임 공작 장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딸 잔이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반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던 올리비에 4세는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얼마 안가서 반 수비대가 사로잡았던 스태퍼드 백작 랄프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처형.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올리비에 4세의 아내 잔 드 벨빌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올리비에 4세의 미망인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거느리고 2척의 배에 탑승한 뒤 프랑스 선박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전 재산을 털어 군대를 양성하면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몇 달 후 프랑스 국왕의 일부 군함이 이들의 배를 나포해버렸고, 잔 드 벨빌은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지만 5일간 표류하면서 아들 기욤을 잃었다. 이후 잔과 남은 아들 올리비에는 몽포르 가문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루아는 반 주민들이 추기경을 몰아내고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삼아 평화 협약이 깨졌다고 주장하며 공새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는 듯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생폴드레옹 전투에서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를 드 블루아를 격파했다. 이후 샤를은 군대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고, 장 드 몽포르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몽포르 파벌의 지도자는 그의 다섯살 아들 장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2.5.3. 가스코뉴 전선의 붕괴

1345년 6월,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345년 3월,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2,000명의 병력을 모집한 뒤 가스코뉴로 가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기로 했다. 그의 부대는 5월 말 사우샘프턴에서 151척의 함대에 몸을 싣고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몇 주 동안 플리머스 항에 대피했고, 5월 23일에 날이 개자 다시 출발해 7월 9일 보르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프랑스군을 상대할 예정이었던 가스코뉴인들은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지휘하에 먼저 행동을 개시해 6월 초 도르도뉴에 있는 몽트라발과 몽브레톤을 손쉽게 공략하고 보르도 남쪽의 랑곤을 포위 공격했다. 여기에 가스코뉴 귀족들이 조직한 소규모 민병대가 가스코뉴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의 주력군은 6월 29일 출항했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에 정박하다가 재차 바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여러 항구로 흩어졌다. 그 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데다 왕과 의회가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재출항이 힘들어졌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년에야 프랑스에 올 거라는 정보를 파악하자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병력을 파견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이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헨리는 중장병 500명, 기병 500명, 잉글랜드 및 웨일스 출신 장궁병 1,000명과 함께 랑곤으로 진군하여 스태퍼드 백작과 합류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규모 요새에 대한 포위 공격에 치중했던 스태퍼드와는 달리 적군이 집결을 완료하기 전에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정찰병이 프랑스군이 베르주라크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곳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분쇄하고 도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보르도와 가론 강으로 연결된 베르주라크를 장악한다면, 보르도의 안전이 확보되고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작전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중순, 헨리는 1,200명의 중장병, 1,500명의 장궁병, 2,800명의 가스코뉴 보병대를 이끌고 베르쥬라크로 진군했다. 뒤이은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프랑스군을 궤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페리괴를 포위했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 전선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장남 장 왕자에게 병력을 규합하여 가스코뉴로 향햐게 했다. 여기에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남부 프랑스군이 페리괴로 진군하자,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페리괴를 구조하는 데 성공한 뒤,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수비대가 주둔한 페리괴 인근의 요새들을 탈환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1345년 10월 초,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페리괴 남동쪽 요새인 오베르슈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400명의 중장병과 8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오베르슈 구원 작전에 착수했고, 1345년 10월 21일 오베르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습격해 궤멸시키고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드 푸아티에를 전사시켰다. 이때 오베르슈 인근으로 진군했던 장 왕자는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의 군대는 적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지만, 적군을 이길 거라는 희망을 접고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그 바람에 헨리를 저지할 남부 프랑스군은 6개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헨리는 이 때를 틈타 몽셰귀르, 라 레올, 에귀옹 등 남부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해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렇듯 연승을 이어가자, 프랑스 남부의 민심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듀퐁 가문, 두라스 가문 등 여러 아키텐 영주들이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섰고, 잉글랜드군에게 패하기만 하는 프랑스군을 불신한 여러 도시와 마을들은 자체 방어를 조직하면서 왕실에 세금을 납부하길 거부했다.

1345년 말,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 사령관인 스태퍼드 백작 랄프 드 스태퍼드가론 강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을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6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남부에서 활개치는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랑그독에서 막대한 전쟁세를 거둬들였고, 파리에 주재한 이탈리아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렸으며, 교회 수입의 10%를 가져가는 것을 교황으로부터 용인받았다. 여기에 아라곤 왕국과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로부터 용병들을 대거 모집해 군대에 배속시켰다.

1346년 초, 장 왕자는 필리프 6세로부터 잉글랜드군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스태퍼드 백작은 이에 맞서 300명의 중장병과 600명의 장궁병을 통해 요새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장은 에기용을 완전히 고립시키기엔 지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론 강과 론 강이 서로 합류하면서 3개의 서로 다른 구역을 형성했기에, 도시를 포위하려면 이 3개 구역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각개 격파될 우려가 있었기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지만,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가론 강과 론 강 위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론 강을 잇는 다리 공사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훼방을 놓는 통에 지연되었지만, 5월 말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가론 강을 잇는 다리는 적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장악되지 않았다. 더욱이 워낙 많은 병사들이 몰려든 터라 프랑스군이 가지고 온 보급품은 금새 바닥났고, 주변 지역 역시 황폐화되었기에 병참을 전적으로 강에 의존해야했다.

라 라울에 기반을 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프랑스 식량 운송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그들의 보급품을 가로챘다. 여기에 프랑스 숙영지 내부에서 이질이 발생해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6월 중순 프랑스군이 2척의 대형 보급 바지선에 보급품을 채워서 가론 강 서쪽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가론 강 다리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강행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바지선들은 파괴되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군이 달려들자 수비대는 후퇴했지만, 많은 병사가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못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은 이후에도 공성전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소량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야간에 강을 통해 수비대에 전달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에기용 남쪽 방어선에 최소 12개의 투석기를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에는 3개의 공성탑을 바지선에 태워서 에기용 북쪽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공성탑들이 적 투석기가 날린 바위에 맞아 모조리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7월 초 프랑스군 보급로를 경비하던 바하몽 성이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7월 말 아쟁의 세네샬인 로베르 드 우데토가 2,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수비대가 이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생포했다.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겨버리자,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수많은 말이 사료 부족으로 죽었으며, 이질은 갈수록 널리 퍼졌다. 이에 절망한 많은 장병들은 끊임없이 탈영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1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약탈 행진을 이어가자, 필리프 6세는 아들 장에게 당장 에기용 공방전을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은 에기용을 공략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8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32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8월 14일, 장은 지난날 아버지 랭커스터 공작이 사망하면서 랭거스터 공작위를 상속받은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지역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곤경을 사전에 파악한 헨리는 거부했다. 8월 20일, 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에기용 수비대를 비롯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들을 추격해 수많은 보급품과 공성 무기 및 말 등을 포획하고 장의 개인 수하물 일부를 입수했다. 프랑스군이 론 강 상류에 설치했던 소규모 요새들은 잉글랜드군에 공략되었다.

2.5.4. 크레시 전투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남부 프랑스에서 맹활약하며 프랑스군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을 무렵인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 상륙을 준비했다. 그는 정보가 새지 않기 위해 출항 직전 8일 동안 어느 누구도 잉글랜드를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는 등 보안에 신경썼다. 필리프 6세와 프랑스 수뇌부는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나 가스코뉴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했지만, 혹여 문제가 생길 것을 막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대거 배치하고 함대를 동원해 영국 해협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상륙하기 3일 전에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 체불에 불만을 터트리며 탈영해버렸고, 상륙 당일엔 용병대를 대체하기 위해 민병대 소집령이 막 내려진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1346년 7월 11일 라 우그 인근 해변에 무사히 상륙했다.

12,000~15,000명으로 추산되는 잉글랜드군은 필리프 6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노르망디 귀족들과 합세한 뒤 약탈 행진을 감행했다. 이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민중들은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700척에 달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해상에서 군대의 경로와 평행하게 이동하면서 해안에서 최대 8km 지점까지의 범위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모았으며, 100척이 넘는 적선들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 급기야 7월 26일,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 북서부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인 시를 공략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주민 5,000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수많은 여성이 강간당했다. 잉글랜드군은 닷새간 약탈을 벌인 뒤 캉 성채를 마저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조상인 윌리엄 1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한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7월 29일 프랑스 북부에 대한 신민 소집령을 선포하고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루앙에 집결하라고 명령한 뒤 31일 루앙에 이르렀다. 그는 즉시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잘 갖추지 못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닷새 후 루앙으로 돌아와서 센 강의 다리를 파괴했다.

8월 7일, 잉글랜드군은 센 강에 도달하여 루앙 교외를 약탈했다. 필리프 6세는 당장 잉글랜드 왕과 화해하라는 교황 사절들의 압력을 받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쓸데없는 토론에 행군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답하고 쫓아낸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에 있는 푸아시까지 진군하자, 필리프 6세는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을 동원해 푸아시로 이동한 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하루만에 임시 교량을 설치하여 센강을 건너 푸아에 이르러 약탈을 자행했다.

필리프 6세는 센 강 북쪽으로 후퇴한 뒤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친 뒤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과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고,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필리프는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란데런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청야 전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미리 밭을 갈아엎고 식량을 없애고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더 먼 곳에 식량 수집 부대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력이 갈수록 소모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행진이 느려지는 사이, 필리프는 적보다 하루 먼저 솜 강에 도착한 뒤 적이 플란데런이나 노르망디로 이동할 길목을 틀어막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솜 봉쇄를 뚫기 위해 행게스트, 퐁레미를 찔러봤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그 와중에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제 프랑스군이 곧 들이닥치면 영락없이 무너질 판이었지만, 에드워드는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여울목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극적으로 솜 봉쇄를 돌파했다. 몇 시간 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이 추격해와서 여러 잉글랜드 낙오병들과 마차 몇 대를 포획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8월 24일의 남은 시간 동안 강 건너편에 있는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저녁 썰물 때 도강을 시도할 지를 논의한 끝에 그러지 않기로 하고 8월 25일 아침에 아브빌로 돌아갔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크레시앙퐁티유까지 14km를 행진하여 방어 진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솜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에 그 지역을 황폐화하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재보급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필리프 6세는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으니, 두 군대가 합류해서 남쪽으로 역습할 것이라 여기고 추격을 중단하고 방어전을 준비했다. 그 때 프랑스-플란데런 국경 지대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이 결사항전해 플란데런군을 저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이 적지에 고립되자, 필리프 6세는 하느님이 절호의 기회를 줬다고 판단해 8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해 크레시 마을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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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8월 26일, 필리프 6세는 30,000 ~ 40,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10,000 ~ 1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크레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인근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한 채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강행군한 여파로 지쳐 있었고, 전장에 도착한 직후 폭풍우가 몰아쳤기에 전투가 지연되었다. 이에 고문들은 해가 질 때까지 4시간 밖에 안 남았으며 장병들이 지친 점을 들어 군대를 재정비한 뒤 다음 날 전투를 개시하자고 주장했다. 여러 기사들은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잉글랜드군에게 강한 적의를 품고 있었기에 당장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필리프 6세는 고문들의 의견을 따라 전방의 부대들에게 멈춰서 전열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후방에서 몰려오던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을 보고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멈춰선 아군 부대를 무시하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군했다. 이 바람에 부대끼리 뒤섞이면서 진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들이 계속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자, 가뜩이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던 필리프 6세는 그들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이후 제노바 쇠뇌병이 전방에 투입되어 쇠뇌를 쏘기로 했지만, 비가 와서 땅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한 발로 균형을 잡아서 당겨야 하는 쇠뇌를 제대로 장전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속절없이 공격당하다가 퇴각했다.

이 모습을 본 프랑스 기병들은 제노바 용병들이 이전에도 그랬듯이 급료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투를 거부하고 도주하고 있다고 여기고 격분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필리프 6세도 그들이 배신했다고 여기고 "제노바인들을 죽여라! 그들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외쳤다. 결국 제노바 석궁병 2,000~ 3,000 가량이 프랑스군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 후 프랑스 기사들이 적진을 향해 돌격했지만, 폭풍우가 내린 뒤였던 터라 땅이 진창으로 변했고, 장궁병들이 말을 노려 화살을 퍼부었기에 수많은 말이 죽어나가면서 기사들이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양익 장궁병들의 화살을 피해 중앙으로 몰리다가 무기를 휘두를 공간도 확보 못하고 자기들끼리 버둥거리며 밀치다가 밟혀 죽는 등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그래도 잉글랜드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프랑스 기사들은 여러 차례 돌격했지만, 진창과 장애물 때문에 제 속력을 내지 못하다가 잉글랜드군 보병대와 하마 기사들에게 공격당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궤멸되었고,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달랑송,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등 수많은 고위급 장성들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필리프 6세 역시 목덜미에 화살을 맞았지만, 일부 기사들의 호위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한편,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는 1346년 6월 필리프 6세로부터 잉글랜드를 침공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브르타뉴, 플란데런에도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는 "사제, 수도자, 서기, 장인, 상인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2세는 강성한 잉글랜드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파국을 맞을 것을우려해 필리프 6세의 요청에 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프랑스 덕분에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위했던 만큼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346년 10월 7일 12,000명 가량의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지만,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네빌 남작 랄프 네빌, 퍼시 남작 헨리 퍼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한 뒤 생포되어 런던 탑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2.5.5. 1차 칼레 공방전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한 뒤 파리로 귀환한 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으로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잉글랜드로 돌아갈 거라 여겼다. 그러다 칼레가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9월 9일 콩피에뉴에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야전군을 소집했지만 10월까지 모인 병력은 맨앳암즈 3,000명과 보병 5,000명에 불과했다. 이걸로는 도시를 에워싼 수만에 달하는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슈보시를 벌이던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앙주, 푸아투를 거쳐 북쪽으로 160마일 이동해 푸아티에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러다가 헨리의 군대가 파리까지 쳐들어올 가능성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헨리를 격퇴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나마도 콩피에뉴에 모인 소규모 병력에게 지급할 자금마저 없었기에, 필리프 6세는 10월 27일 모든 공격 준비를 취소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렇듯 일이 자꾸만 틀어지자 프랑스 정부 인사들간의 비난이 만연했다. 프랑스 원수 샤를 1세 드 몽모랑시는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 크레시의 파국을 야기한 혐의로 해임되었고, 프랑스 재무부의 모든 관료들은 군대에게 지급할 급료를 제때 마련하지 않고 국고를 횡령한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모든 재정 문제는 3명의 고위 수도원장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담당했다. 필리프 6세의 장남 장 왕자는 에기용 공방전을 억지로 끝내고 철수하게 만든 것에 불만을 품고 몇 달 동안 왕실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했고, 삼부회는 왕의 측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 2세는 필리프 6세의 군대가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46년 11월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이렇듯 프랑스 수뇌부가 자중지란에 시달리면서, 가까운 시일에 칼레를 구원할 프랑스군이 올 가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도시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의 상태 역시 좋지 많았다. 많은 군인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이질이 군영 내에 돌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탈영자도 속출했다. 1346년 말과 1347년 초 사이의 어떤 기간에는 가용 가능한 잉글랜드군의 수가 5,00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투석기와 대포를 동원해 성벽을 뚫으려 시도했고, 육지나 바다 쪽에서 칼레를 공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이 이끄는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해 잉글랜드의 모든 공세를 격퇴했다. 여기에 프랑스 함대가 그들에게 물자를 지원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47년 3월과 4월 동안 1,000톤 이상의 보급품이 잉글랜드 해군의 봉쇄를 뚫고 칼레로 들어왔다.

필리프 6세는 칼레가 잘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1347년 4월 말에 군대 소집령을 재차 발동했다. 그러나 그가 콩피에뉴에 이르렀을 때 도착한 군인이 거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에도 병력 소집에 응한 이가 매우 적어서 6월이 다가도록 충분한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 많은 도시가 잉글랜드군의 슈보시에 맞서기 위해 성벽을 보강하거나 민병대를 결성하고자 모든 가용 자금을 사용했고, 대부분의 귀족은 지난 9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지불한 빚이 너무 많이 쌓여서 파산의 위협에 시달렸다.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섬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이렇듯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 규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칼레의 입지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1347년 4월, 잉글랜드군은 칼레의 바다쪽 항구 입구에 있는 리스방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포병을 배치해, 칼레에 프랑스 수송선들이 진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여기에 80척 가량의 잉글랜드 전함이 도착해 항구 입구를 차단했다. 이제 칼레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칼레 주변 프랑스 민병대가 도시를 구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도우러 오는 것을 막고자 플란데런을 공격한 프랑스군 마저 격퇴되었다.

1347년 6월 말, 필리프 6세는 일단 모인 병력이라도 이끌고 칼레로 접근하여 칼레 남쪽으로 50마일 떨어진 헤스딩 마을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후 브르타뉴의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필리프 6세의 조카이자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샤를 드 블루아가 잉글랜드군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프 6세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브르타뉴 전선으로 파견하고 브르타뉴 방면 전선군 수뇌부를 재구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렇듯 구원군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칼레에 있던 식량이 바닥났다. 주민들은 개, 고양이, 말을 잡아먹었고, 심지어 안장의 가죽을 갉아먹어야 했다. 또한 식수 공급이 매우 부족해 갈증에 시달려야 했고, 전염병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347년 6월 25일, 약 4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가 보급품을 가지고 센 강 어귀를 지나 칼레로 항해하다가 더 많은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선박이 나포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날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은 필리프 6세에게 서신을 보내 칼레에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를 위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을 지닌 제노바 장교가 도시 밖으로 나갔지만 도중에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에드워드 3세는 서신을 읽어본 뒤 필리프 6세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했다.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필리프 6세가 칼레를 구원하기 위해 무리하게 달려오도록 유도한 후 무찌르려는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구호 함대를 칼레로 진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노인, 허약자, 부상자, 여인과 어린이들을 도시에서 추방해 입을 줄이려 했지만, 포위군이 이 난민들이 포위망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을 때까지 성벽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이윽고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5,300명의 중장병, 6,600명의 보병, 20,000명의 궁수로 구성된 대군을 갖추었다. 여기에 함대에는 15,000명의 선원이 있었고, 인근 국경에는 20,000명의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지원하기 위해 주둔했다.

1347년 7월 14일, 20,000명 가량의 병력[6]이 헤스뎅에 집결했다. 필리프 6세는 이들을 이끌고 칼레 구원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프랑스 영토를 통해 남쪽에서 포위군 주둔지를 공격한다면 플란데런군이 비어있는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플란데런 영토를 기습해서 베뒨과 카셀을 점령하고 칼레 포위군 진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포위군 진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다. 결국 7월 27일 칼레 인근 상가테 고지에 도착한 필리프는 포위군 진영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를 점령한 뒤 정찰병들을 보내 적진을 정탐했다. 함 강과 해안 지역의 장애물로 인해,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수 있는 경로는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는 나울레 다리를 건너는 것뿐이었다.

크레시 전투 때보다 훨씬 안 좋은 조건에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필리프 6세는 무력으로 도시를 구할 방도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아키텐 공국 전체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프랑스 왕실이 아키텐 공국의 명목상 주군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칼레를 얌전히 내놓는 것이 협상에 응할 최소한의 조건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협상에 임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필리프는 마지막 시도로 2명의 교황 사절에게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가 중재를 제의하게 했으나, 에드워드는 이번에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1347년 8월 1일, 칼레 수비대는 상가테 고지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항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프랑스군은 그날 밤 숙영지를 불태우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칼레는 8월 3일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했고, 칼레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전체가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에서 주민들을 불러들여서 칼레에 정착하게 했다. 장 드 비엔을 비롯한 고위급 장교 및 상인들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몸값을 마련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칼레에서 추방된 주민들은 인근의 프랑스 마을에 기거했다. 필리프 6세는 그들의 운명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이 선택한 프랑스 어느 도시에든 정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으며, 공석이 된 국가 관직에 칼레 출신 인사가 앉히는 것을 허용했다. 여기에 그들을 단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공방전을 마무리한 뒤 플란데런군을 돌려보낸 후 파리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생 오마르 요새를 공략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칼레로 향하던 보급 호송대가 볼로뉴에서 파견된 유격대에게 포획되는 악재가 터진 데다 자금 조달에 또다시 문제를 겪자, 그는 비로소 교황 사절단의 요청에 응해 평화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9월 4일부터 협상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에 휴전이 합의되었다. 이른바 '칼레 휴전'으로 명명된 이 휴전은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지속되기로 합의되었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 등 여러 악재로 인해 1355년 공식적으로 취소될 때까지 수년간 반복적으로 연장되었다.

2.6. 말년

필리프 6세는 연이은 패배로 인해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54세의 고령과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정치와 군사 문제에 흥미를 잃고 장남 장 왕자에게 실권을 맡겼다. 이에 따라 장 왕자의 측근들이 국왕의 평의회에 들어갔고 행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장 왕자는 아버지를 대신해 몇가지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1349년 4월 18일, 마요르카 국왕이었던 하이메 3세가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공세에 밀려 마요르카를 상실한 뒤 프랑스로 망명한 후 몽펠리에 시를 프랑스에게 120,000 골드 크라운에 파는 대가로 군대와 함대를 제공받았다.

1349년 7월 16일, 비에누아의 도팽이었던 움베르 2세 드라투르뒤팽이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데다 외아들이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프랑스왕국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영토였던 도피네를 양도했다. 이때 체결된 로망스 조약에 따르면, 도피네는 미래에 프랑스 국왕이 될 장 왕자의 아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도팽이 될 인물은 장 왕자의 장남인 샤를 왕자였다. 도피네의 지배는 고대부터 지중해와 북유럽 사이의 주요 상업 축인 론 강 계곡을 점유하고 교황청이 위치한 아비뇽과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에 매우 귀중했다.

1349년 9월 11일, 필리프 6세의 며느리이자 장 왕자의 아내였던 보헤미아의 보나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필리프 6세는 즉시 아들의 혼처를 주선했다. 1350년 1월, 나바라 왕국의 공동 국왕 필리페 3세호아나 2세의 딸 블랑슈가 프랑스 궁정에 소개되었다. 블랑슈는 이보다 앞선 1345년 7월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로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었지만, 카스티야 궁정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조앤과 페드로를 결혼시키기로 하면서 깨졌다.

필리프 6세는 그녀를 장 왕자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총명함에 홀딱 반해 마음을 바꿨다.[7] 마침 1349년 12월 12일 왕비였던 부르고뉴의 잔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홀아버였던 그는 블랑슈와 결혼하기로 했다. 1350년 1월 29일, 필리프 6세는 브리콩트로베르에서 40세 어린 블랑슈와 결혼했다.

1350년 2월 19일 오베르뉴와 불로뉴 백작 기욤 12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오베르뉴의 잔과 장 왕자의 결혼이 낭테르에서 거행되었다. 그 결과, 필리프 6세는 말년에 몽펠리에, 도피네, 오베르뉴, 불로뉴를 획득하면서, 전쟁으로 잃은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외교 및 결혼 정책을 통해 획득했다.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외르에루아르 노장르후와에서 사망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필리프는 새 왕비와 성관계를 너무 자주 하다가 몸에 무리가 와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첫번째 왕비 부르고뉴의 잔이 안장되었던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내장은 쿠방 성당에 별도로 묻혔다. 사후 장 왕자가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장 2세로 즉위했다.

3. 가족

  • 부르고뉴의 잔(1293 ~ 1349):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딸인 아그녜스의 딸.
    • 장 2세(1319 ~ 1364): 프랑스 국왕.
    • 마리(1326 ~ 1333): 1332년 브라반트 공작 장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 드 브라반트와 결혼했으나 1년 후 사망했다.
    • 필리프 도를레앙(1336 ~ 1375): 오를레앙 공작.
  • 나바라의 블랑슈(1331 ~ 1398): 나바라 공동 국왕 필리페 3세호아나 2세의 딸.
    • 잔(1351 ~ 1371):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여행 중에 사망했다.
  • 사생아
    • 장 다르마냐크(? ~ 1350년 이후): 기사.
    • 토마 드 라 마셰(1318 ~ 1361): 필리프 6세의 정부인 베아트리스 드 라 베뤼에르의 아들.


[1] 1292 ~ 1309,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부인[2] 1294 ~ 1342,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부인[3] 블루아 백작 기 1세 드 샤티옹의 부인[4] 1299 ~ 1300, 요절[5] 잔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는 필리프 드 오네이와 간통했다가 발각당해 가이야르 성에 감금되었다가그곳에서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이 때문에 잔의 친아버지가 필리프 드 오네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 점도 프랑스 대귀족들이 잔에게 호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다.[6] 이중 11,000명은 기마병이었다.[7]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블랑슈는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공주였다고 하며, '아름다운 지혜( Belle Sagess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