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8 20:34:17

데이비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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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브루스 왕조 제2대 국왕
데이비드 2세
David II
파일:David II.jpg
왕호 데이비드 2세 (David II)
이름 데이비드 브루스 (David Bruce)
출생 1324년 3월 5일
사망 1371년 2월 22일 (향년 46세)
재위기간 스코틀랜드 왕국 국왕
1329년 6월 7일 ~ 1371년 2월 22일
배우자 잉글랜드의 조앤[1](1328년 결혼 / 1362년 사망)
마거릿 드루몬드(1364년 결혼 / 1370년 이혼)
자녀 마조리[2], 마거릿, 마틸다, 존, 엘리자베스
아버지 로버트 1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드 버러

1. 개요2. 생애
2.1. 어린 왕의 등극과 에드워드 발리올의 침략2.2. 에드워드 3세의 침공과 프랑스 망명2.3. 왕의 귀환2.4. 네빌스 크로스 전투2.5. 포로 생활2.6. 1355~1356년 전역과 해방2.7. 해방 이후의 치세

1. 개요

중세 게일어: Daibhidh a Briuis
스코틀랜드 게일어: Dàibhidh Bruis
노르만어: Dauid de Brus
초기 스코트어: Dauid Brus
영어: David II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브루스 왕조의 제2대 국왕이다. 왕조를 개창한 로버트 1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드 버러의 아들로 로버트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다.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휘말려 많은 고초를 겪은 군주이다.

2. 생애

2.1. 어린 왕의 등극과 에드워드 발리올의 침략

1324년 3월 5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엘리자베스 드 버러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이때 쌍둥이 형제 존도 태어났지만 1327년에 요절했다.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와 5월 4일 노샘프턴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3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종결할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결혼식은 1328년 7월 베릭에서 거행되었다.

5살 때인 1329년 6월 7일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선포되었고, 로버트 1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으로 발탁되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에게 축출된 스코틀랜드 귀족과 영지를 잃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어린 왕이 등극한 틈을 타 스코틀랜드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면서, 데이비드 2세의 입지는 무척 위태로웠다.

1332년 여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아일랜드 영지가 현지 게일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를 항구에 집결하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헨리 드 보몽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 거물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 이후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고 싶어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의 아들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옛 영지를 되찾으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하는 건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총사령관은 아내 앨리스 코민이 부컨 백작령 계승권이 있다는 걸 빌미로 삼아 부컨 백작 칭호를 주장한 헨리 드 보몽이었다. 당시 이들이 보유한 군대는 기사 500명, 보병(주로 궁수) 1,000명이었다. 토머스 랜돌프는 침략자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남하했지만 도중에 급사했고, 마르 백작 돔날 2세가 새 호국경에 선임되었다.

돔날 2세는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인은 포스만 북쪽 부분을 경비했고, 포스만 남쪽 부분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맡았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전에 마르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 되기를 바라며 8월 6일 포스만 북부의 웨스터 킹혼(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이 한창 상륙하고 있을 때, 로버트 1세의 사생아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와 파이프 백작 던컨 4세 맥더프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잉글랜드 연대기는 최소 4,000명, 최대 24,000명으로 기술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4,000명이 가장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선 중이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와 지원 보병을의 공격을 받은 후 격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상륙에 성공했다.

킹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잉글랜드 원정군은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 덤펌린으로 이동해 식량을 확보하고 무기고를 접수한 뒤 퍼스로 진군했다. 마르 백작 돔날 2세는 적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퍼스로 철수한 뒤 킹혼 전투의 생존자들과 합류했다. 이후 전국에 파발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으며, 퍼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에르네 강 북쪽 기슭에 군대를 배치하고 다리를 파괴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군대는 연대기 상에서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기술되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군의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8월 10일, 잉글랜드군은 에르네 강 남쪽 강둑에 도착했다. 당시 그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의 10배 이상이었고, 강 건너편에 유리한 방어 위치에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지원군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잉글랜드군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군은 해질 무렵까지 에르네 강 반대편에 나란히 주둔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이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배넉번 전투에서의 승리를 회상하고 잉글랜드인에 대한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파괴된 다리 인근에 경비원이 배치되었지만 다른 예방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해가 뜰 때 강 건너편으로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의 측면을 요격하여 혼란을 일으킨 뒤, 적이 패주할 때 추격하여 섬멸해버리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계속 대치하고만 있으면 승리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날 밤, 잉글랜드군 전체가 몰래 강을 건넌 뒤 자정 무렵에 스코틀랜드 숙영지에 도착해 공격을 퍼부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스코트랜드인들은 급히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주력군을 패주했다고 믿었지만, 새벽에 스코틀랜드군이 자기들을 향해 2개 대열을 결성한 채 접근하는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한 장성이 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연설했다. 이 장수의 이름은 연대기마다 다르게 기술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잉글랜드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40명의 용병 기사를 제외하고 전원이 도보로 대열을 결성했다. 이후 벌어진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장궁병들의 압도적인 살상력과 스코틀랜드군의 지휘 통제 붕괴 등에 힘입어,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1332년 9월 24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고, 데이비드 2세는 추종자들과 함께 하이랜드로 피신했다. 이후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코틀랜드인들의 반격을 우려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과 가까운 록스버러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에드워드 3세를 자신의 대군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연간 총수입이 20,000파운드인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와 주요 국경 요새인 베릭 성을 넘기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호국경을 맡은 리데스데일의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데이비드 2세와 발리올 중 누구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간주할 지를 논의하게 할 테니 1332년 2월 2일까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잉글랜드 추종자들을 돌려보내고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아난으로 이동한 뒤, 캐릭 백작 알락산더르 브루스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고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야간 행군을 통해 아난으로 이동했다.

1332년 12월 17일 새벽, 스코틀랜드인들이 발리올이 머물고 있던 아난을 급습했다.(아난 전투) 잉글랜드인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완패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의 형제 헨리, 월터 코민, 존 모브레이를 포함한 여러 귀족이 피살당했다. 에드워드 발리올 본인은 간신히 탈출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거의 벌거벗은 채 칼라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데이비드 2세 추종자들의 역습을 받고 잉글랜드로 도주했고, 데이비드 2세는 수도로 돌아왔다.

2.2. 에드워드 3세의 침공과 프랑스 망명

1333년 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3월 에드워드 발리올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칼라일에서 출진해 스코틀랜드로 진입했고, 그해 4월엔 에드워드 3세가 뉴캐슬에서 본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국경의 요충지인 베릭 성 앞에 집결한 뒤 그곳을 포위했다. 에드워드 3세는 투석기 수십 대를 제작한 뒤 거대한 바위를 여러 차례 퍼부어 베릭 마을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 파이프 4개를 끊고 베릭 인근의 모든 촌락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약탈해 수비대가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한 잉글랜드 해군은 트위드머스라는 작은 항구를 통해 군수 물자를 원정군에 공급했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대거 동원했다. 당시의 연대기에는 그 수가 14,629명, 30,000명, 40,000명, 80,000명, 90,000명, 100,000명 이상이거나 잉글랜드인보다 5대 1로 많았다고 다양하게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약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에 소규모 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더글러스는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잉글랜드군에 바로 도전하기 보다는 좀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베릭 성은 육지와 바다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수비대는 지쳐갔다.

베릭 성 수비대장 알렉산더 세튼은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33년 7월 11일까지 스코틀랜드군이 구호하지 않으면 도시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합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질을 잉글랜드 측에 넘겨줬는데, 인질 중에는 알렉산더 서튼의 아들인 토머스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베릭 성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때 윌리엄 키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트위드 강의 북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다리의 불에 탄 폐허를 가까스로 건넌 뒤 베릭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다른 분견대는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있는 벰버그 성을 공격했지만, 공성 장비가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33년 7월 11일,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 수비대에게 약속했던 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수비대는 윌리엄 키스가 분견대를 이끌고 베릭 마을에 들어서면서 자기들이 구호받았으므로, 그 계약은 더이상 수비대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알렉산더 세튼의 아들 토머스를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이후로 하루에 두 명씩 스코틀랜드 인질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추가 항복 조건이 합의되었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 외곽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거나, 1333년 7월 20일까지 200명의 병력을 마을에 투입함으로써 구호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경우, 베릭은 항복하고 주민과 수비대는 베릭 성을 떠나기로 했다. 윌리엄 키스는 이 항복 조건을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전달했고, 더글러스는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트랜드군은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에드워드 3세와 강력한 살상력을 갖춘 잉글랜드 장궁병, 그리고 본인들의 지리멸렬한 지휘 통제로 인해 완패했다. 스코틀랜드군 총사령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로스 백작 휴 드 로스는 전사했고, 그 외의 여러 스코틀랜드 기사들도 전사했다.

할리돈 힐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베릭 성의 항복을 받아낸 뒤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의 복종 서약을 받아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남쪽으로 떠났고, 에드워드 발리올과 그의 추종자들은 북쪽으로 나아가 1333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서 의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왔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스코틀랜드 내 재산을 돌려줬다. 1334년 6월 19일, 발리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8개 카운티를 잉글랜드에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하기로 했다.

한편, 데이비드 2세는 할리돈 힐 전투 패배 직후 추종자 및 조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가이야르 성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함께 망명한 스코틀랜드 귀족 및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탈하게 성장했고, 성인이 된 뒤에는 프랑스 왕실에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좀더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2.3. 왕의 귀환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에드워드 3세에 끈질기게 맞서 싸웠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백년전쟁을 단행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스코틀랜드 방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갈수록 쇠락했다.

1337년, 앤드류 머레이,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등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은 파이프 주를 통과하여 포클랜드 마을을 파괴했으며, 루카르 성을 점령한 뒤 3주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뒤이어 그해 3월에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보스웰 성을 탈환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초여름에 북부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요새 대부분을 공략했으며, 발리올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갤로웨이를 파괴했다. 1337년 11월 잉글랜드 영토인 칼라일을 습격해 컴벌랜드를 황페화했으며, 애든버러 성을 포위했다.

1338년 1월, 잉글랜드 정부는 갈수록 악화되는 스코틀랜드 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터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에 맞서는 스코틀랜드 거물인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다른 곳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사이에 그의 본거지인 던바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아내인 아그네스 랜돌프의 맹활약으로, 윌리엄 몬터규는 7월 10일까지 던바 성을 공략하지 못하다가 결국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던바 공방전이 실패하면서 6,000 파운드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후 잉글랜드 측은 프랑스와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느라 스코틀랜드 전선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고, 스코틀랜드군은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339년 퍼스를 탈환하고 1340년 에딘버러를 탈환했으며, 잉글랜드 북부 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1341년 6월,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퍼스로 귀환했다. 데이비드 2세는 즉각 행정부를 재조직하고 의회를 소집해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특별세를 거두었다. 1342년 3월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군 최후의 거점이었던 스털링 성이 함락되면서,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세력은 허물어졌다.

2.4.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자기들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잉글랜드군이 점령했던 자국의 영역을 전부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343년 1월 19일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체결해 3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을 때, 스코틀랜드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 후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재개하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1329년에 양국이 맺은 방위 협약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34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본대가 포츠머스에 집결하자, 필리프 6세는 재차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침공을 호소했다.
"부탁하오, 간청하오. (중략)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나를 위해 해주고, 가능한 한 빨리 해주길 바라오."

그해 7월 에드워드 3세가 15,000명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1차 캉 공방전에서 을 파괴하자,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재차 호소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브르타뉴, 플란데런에도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는 "사제, 수도자, 서기, 장인, 상인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2세는 강성한 잉글랜드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파국을 맞을 것을 우려해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지만, 필리프 6세의 이번 설득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1346년 9월 퍼스에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소집령을 내리고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들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1346년 10월 7일, 데이비드 2세는 일부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먼저 '리델의 껍질(Peel of Liddell)'로 불리는 자연 요새를 포위해 3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자신의 장교였다가 잉글랜드에 귀순한 뒤 총독 노릇하고 있던 월터 셀비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인근의 칼라일 시민들로부터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남동쪽의 부유한 도시 더럼으로 향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러다 헥샴에서 3일간 머물면서 그곳의 대수도원을 약탈했다. 10월 16일, 데이비드 2세의 군대는 더럼에 도착한 뒤 도시 서쪽에 있는 보레페어 마을에 도착했다. 이 곳의 수도자들은 마을과 수도원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00파운드의 몸값을 10월 18일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이비드 2세는 이에 동의하고 지급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수뇌부는 잉글랜드군이 대거 프랑스로 가버렸으니 현지 민병대 외에는 자신들을 막을 병력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부 요크셔의 리치몬드에서 병력을 신속하게 모집했다. 이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랭커셔 등지에서 3,000~4,000명이 모였고, 또다른 3,000명의 요크셔 병사들이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험버 강 북쪽 지역에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같은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군 상당수는 장궁병이었는데, 그중 1,200명은 랭커셔 출신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요크셔 병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리치먼드에서 바너드 성까지 진군했고, 대주교는 그곳에서 군대를 3개 편대로 재구성한 뒤 진군을 이어갔다. 10월 17일 아침,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은 더럼 남쪽 지역을 약탈하던 중 페리힐에서 잉글랜드군 2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곧 교전했고, 스코틀랜드군이 3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다. 더글러스는 보레페어에 있는 아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국왕에게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렸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군이 이렇게나 빨리 대응한 것에 깜짝 놀랐다. 때마침 2명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더럼에서 찾아왔지만, 데이비드 2세는 이들이 스파이라고 생각해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군영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이 '네빌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돌 기념물이 서 있는 고지로 이동하고 잉글랜드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후 벌어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3,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전사했으며, 데이비드 2세와 리더스데일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 경호원, 시종, 순경 등이 사로잡혔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47년 초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로우랜드 대부분을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보급품이 바닥나자, 잉글랜드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채 철수했다.

2.5. 포로 생활

데이비드 2세는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얼굴에 화살 두 발을 맞고 존 드 쿠플랜드 경에게 생포된 뒤, 베릭으로 끌려간 후 뱀버러 성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요크에서 온 이발사 및 외과 의사들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치료받았다. 이후 런던으로 이송된 그는 1347년 1월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에드워드 3세가 1차 칼레 공방전을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에는 버크셔의 윈저 성으로 이송되었으며, 나중에는 햄프셔의 오디햄 성으로 옮겨졌다. 그렇지만 억류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조건하에 상당히 자유롭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한편,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스튜어트를 호국경으로 선임해 군주 대신 통치를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2세가 억류지에서 측근들을 종종 스코틀랜드로 보내 상황을 통제하려 했고, 네빌스 크로스 전투 도중에 전장을 이탈한 로버트 스튜어트를 불신해 그의 정적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자기 입지를 다지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고, 자연히 갤로웨이에서 버티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 원정은 오랫동안 감행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협상 상대로 삼아 스코틀랜드 왕국과 타협을 시도했다. 협상의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1348년에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으로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고, 그에게 자녀가 없으면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고했다. 1350년,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4만 파운드로 지불하고, 에드워드 발리올의 추종자들을 복직시키고, 데이비드 2세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자기 아들인 곤트의 존을 후계자로 자명하라고 제안했다. 대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봉토로 삼는 안건은 제외하기로 했다.

데이비드 2세는 1352년 초에 스코틀랜드로 잠시 돌아가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의 조카인 로버트 스튜어트는 왕위 계승에서 자신을 제외하는 어떤 조건도 지지하기를 꺼렸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352년 3월 에드워드 3세가 제시한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데이비드 2세는 빈손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와 투옥되었다. 여전히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던 에드워드 3세는 1354년 몸값을 지불하면 데이비드 2세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를 거부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에드워드 3세의 추가 시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55년부터 데이비드 2세를 감옥에 수감하고 신하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2.6. 1355~1356년 전역과 해방

1355년, 에드워드 발리올이 갤러웨이에서 스코틀랜드군에게 축출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55년 초,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치 백작은 복수를 결심하고,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각자 사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기사 60명의 지원을 받으며 1355년 8월에 잉글랜드 국경으로 진군했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부관인 댈하우지의 윌리엄 램지에게 노럼 성 수비대를 유인하기 위해 노럼 주변의 땅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램지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했고, 노럼 성주인 히턴의 토머스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윌리엄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는 던스에서 남쪽으로 7마일 떨어진 네스빗 무어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군을 추격하던 잉글랜드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토머스 그레이, 제2대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가 생포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글랜드의 고급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일반 장병들은 프랑스 기사단에 맡겨졌다. 프랑스 기사단 사령관은 당시 잉글랜드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 사건은 현지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언덕에 '살육의 언덕'이란 이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 왕국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잉글랜드를 공격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외젠 드 가랑시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사 60명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한다면 큰 현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프랑스 측에서 약속한 현금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스코틀랜드 측은 그해 9월 말에 잉글랜드 측과 9개월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북부에서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잉글랜드 국경 요새 수비대 상당수가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합류하기 위해 허가 없이 자리를 떠났는데, 그 중에는 베릭 요새 사령관인 제2대 그레이스토크 남작 윌리엄 드 그레이스토크도 있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며칠 후, 프랑스에서 40,000 에쿠스에 달하는 현금이 도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장성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등은 프랑스 인사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휴전을 깨고 잉글랜드 북부의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노햄 성 순경이 수비대 일부와 민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격파되었다. 11월 6일, 스코틀랜드 귀족 제2대 앵거스 백작 토머스 스튜어트와 패트릭 5세가 프랑스군의 협조를 받으며 베릭 성을 기습 공격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수비대를 무찌르고 성벽을 넘은 뒤 마을에 진입했다. 마을 수비대와 주민들은 베릭 성으로 피신했고, 스콭르랜드인들은 마을을 약탈했다.

하지만 얼마 후 존 코플랜드가 록스버러의 잉글랜드 수비대 일부와 함께 베릭 성에 도착하면서, 베릭 성의 수비는 강화되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하여 스콭르랜드를 이끌던 스코틀랜드 호국경 로버트 스튜어트가 현장에 도착한 뒤 성을 포위하는 걸 직접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마을에서 성까지 이어지는 요새화된 다리를 공략한 뒤 성벽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성벽을 넘으려고 공세를 벌였지만, 수비대의 항전에 부딪혀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피카르디에서 약탈 행진을 벌였지만 프랑스군이 좀처럼 전투에 응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칼레로 돌아간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을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55년 12월 24일 뉴캐슬에서 대규모 병력을 결집한 에드워드 3세는 1356년 1월 6일 뉴캐슬에서 출발해 베릭으로 향했다. 그는 곧 베릭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베릭 마을은 공략된 뒤 스코틀랜드 수비대 130명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그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찌감치 물러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1월 13일, 에드워드 3세는 베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광부들을 동원해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뚫었고,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협상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약탈물을 가져가는 걸 허용했다.(베릭 공방전)

1356년 1월 20일, 그동안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워진 후 20여년간 스코틀랜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에드워드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를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줬다.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딘버러로 출진했다. 병력 규모는 연대기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호스트"로 묘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13,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잉글랜드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행진하면서, 80~100km에 달하는 인근 지역을 파괴했다. 특히 그들은 휴전을 무시하고 베릭을 침공한 스코틀랜드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치 백작 패트릭 5세의 영지를 철저히 짓밟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군과의 대결을 거부하고, 주민들을 잉글랜드군이 오기 전에 대피시키고 영토를 파괴하는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에 진입한 잉글랜드군은 식수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월 초 에든버러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에든버러 대부분을 불태우고 동쪽 해딩턴에 숙영지를 세운 뒤, 잉글랜드 함대로부터 재보급을 받았다. 뒤이어 스털링을 거쳐 스콭를내드의 수도 퍼스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했기에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길이 막막했기에, 에드워드 3세는 함대가 계속 따라오면서 보급하기를 희망했다. 북풍이 부는 바람에 함대가 움직일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해딩턴에서 열흘간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로디언 일대가 너무나 황폐해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침략을 "번트 캔들마스(Burnt Candlemas)"라고 불렀다. 이는 캔들마스로 알려진 의식에서 매년 2월 2일에 양초를 지역 교회로 가져가는 관습을 빗댄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이 로디언 전역을 불태운 것을 풍자했다.

1356년 2월 중순에 바람이 바뀌었지만, 심한 강풍으로 인해 함대가 완전히 흩어졌고 배 여러 척이 침몰되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진군했던 길 대신 남서쪽으로 철수하면서 멜로즈까지 이어지는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불태우고 황폐화했다. 이에 윌리엄 더글러스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잉글랜드 약탈자 및 낙오자들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그 외에도 강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멜로즈 외곽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의 부하들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호위병들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2월 말 칼라일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공세를 재개했고, 캐러버록, 달스윈턴 성을 공략한 뒤 에드워드 발리올을 추종했던 갤로웨이를 복종시켰다.

1356년 4월 18일, 윌리엄 더글러스와 잉글랜드 장성 윌리엄 드 보훈의 합의하에 새로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357년 10월 3일 베릭에서 최종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 이래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하고, 잉글랜드 측은 몸값으로 67,000 파운드를 10년에 걸쳐 매년 6월 24일에 분할 납부하기로 했다. 또한 이 10년 동안 스코틀랜드 시민이 에드워드 3세나 그의 부하들에 대해 무기를 드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합의는 1357년 11월 6일 스콘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2.7. 해방 이후의 치세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 귀족과 성직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수행원을 대동하고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스코틀랜드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366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관세 수입을 모두 국왕의 처분에 넘겼고, 관세 수입을 4배로 늘렸으며, 귀족에게 넘어간 왕실 직할지를 반환하도록 했다. 이러한 특별세금은 데이비드 2세 치세 말기에 사실상 영구화되어 연간 소득세로 자리잡았다. . 스코틀랜드의 왕립 도시들은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국가 정치 체제에서 그들의 중요성이 커지고 도시 부르주아지가 의회의 "제3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잉그랜드와의 무역을 지속적으로 늘려서 국가 수입을 증진했다. 그 결과, 데이비드 2세는 중세 스코틀랜드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재정 자원을 손에 넣게 되었고, 국왕의 연간 수입은 15,000~20,000파운드에 달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대귀족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하급 귀족과 도시에 의지하여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귀족의 권리와 특권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는 1362년 던바, 던글러스, 앵거스 백작이 로버트 스튜어트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로버트 스튜어트는 투옥되었다가 왕에게 사죄하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더욱 심각한 반란은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일어났다. 군도의 왕을 칭한 존 맥도날드는 아가일과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사실상 독립 군주로 군림했으며, 군도의 게일 왕권에 대한 고대 전통을 되살렸다. 데이비드 2세는 수년간 그를 내버려뒀지만, 1369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존 맥도날드의 영지로 진군해 그를 복종시키고 군도의 왕과 그의 추종자들의 영지에 대한 왕실의 통제를 확립했다. 이외에도 여러 귀족이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했다가 체포되고 몸값을 지불한 뒤 풀려났다.

1363년, 중세 흑사병 창궐로 스코틀랜드가 궁핍해지면서 자기에게 걸린 몸값을 지불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데이비드 2세는 런던으로 직접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 스코틀랜드를 에드워드 3세 또는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물려주는 조건으로 몸값 지불을 중단하겠다고 제안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제안에 따르기로 하고, 세번째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을 스코틀랜드 국왕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136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국왕의 후계자가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 걸 단호히 거부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는 수년간 에드워드 3세와 비밀 협상을 벌였지만, 이 이상의 합의를 거두지 못했다.

1371년 2월 22일, 데이비드 2세가 에든버러 성에서 4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이전에 계획했던 대로 던펌린 수도원에 있는 부모님 옆에 묻히지 않고 홀리루드 수도원의 높은 제단 앞에 묻혔다. 이는 홀리루드가 에든버러 성에서 불과 1마일 떨어진 가장 가까운 교회였고, 데이비드 2세의 후계자가 이전 통치와 빠르게 경계를 긋고 싶어했기 때문일 수 있다.

데이비드 2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인 조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딸이자 에드워드 3세의 누이로, 1328년 데이비드 2세와 결혼한 뒤 34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1362년 9월 7일에 사망했다. 두 번째 아내 마거릿 드러먼드는 맬컴 드러먼드 경의 딸이자 존 로지 경의 미망인으로, 데이비드 2세의 정부였다가 조앤이 죽은 2년 뒤인 1364년 2월 20일에 결혼했다. 그러나 역시 자녀를 낳지 못하자, 데이비드 2세는 마거릿이 불임이라는 이유로 1370년 3월 20일에 이혼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또다른 정부인 아그네스 던바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마거릿의 호소를 받아들여 이혼을 무효로 선언하면서 무산되었다. 데이비드 2세는 끝내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외조카인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
[1] 에드워드 2세프랑스의 이자벨의 차녀.[2] 로버트 2세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