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21:01:06

윌리엄 더글러스(리데스데일 기사)

성명 윌리엄 더글러스
William Douglas
생몰년도 1300년 ~ 1353년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로디언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애트릭 포레스트
아버지 로디언의 제임스 더글러스
어머니 조앤 더글러스
아내 엘리자베스 더글러스
자녀 메리 더글러스
직위 리데스데일 기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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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1300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로디언의 작은 지주인 제임스 더글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로버트 1세의 심복으로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맹활약한 제임스 더글러스의 두번째 사촌이었다. 그는 1323년경에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물려받았고, 1327년 더글러스 영주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들인 윌리엄 더글러스대부가 되었다. 이후 1332년 이전까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고,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는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쳐들어왔고,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이를 막으려 했다가 할리돈 힐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헀다. 이후 데이비드 2세와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들 윌리엄 더글러스 등이 프랑스로 망명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은 이에 불복해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끌어모아 유격전을 벌였다.

1332년 12월 16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아난 전투에서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때 에드워드 발리올의 형제 헨리가 전사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잉글랜드 북부로 도주했다. 1333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발리올의 복위를 노리고 스코틀랜드의 벡익어폰트위드 성을 공격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1333년 초 도녹 전투에서 생포된 뒤 옥고를 치르다가 1334년 풀려났다. 그 후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렌돌프의 지휘 아래 갤로웨이를 습격해 나무르 백작 기 2세를 보로우뮤어 전투에서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후 머레이 백작이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자, 그는 로디언으로 가서 알락산더르 램지 등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잉글랜드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다. 램지는 미들로디언의 호손딘에 있는 동굴에서 병력을 양성했고, 윌리엄은 에트릭 포레스트와 팬트랜드 둔덕을 근거지로 삼고 램지가 양성한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여러 차례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훗날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윌리엄의 유격대를 "기사도 학교"로 칭송했고, 윌리엄에게 "기사도의 꽃"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335년 9월, 덤바턴 성에서 추종자들을 집결시킨 그는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윌리엄 월레스의 전우인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 앤드류 머레이를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으로 추대했다. 1335년 11월 30일, 머레이의 군대는 에버딘셔의 컬블린에서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조우했다. 머레이는 병력을 둘로 나눴고, 윌리엄이 선봉을 맡았다. 스트라스보기가 전투 준비를 하자, 윌리엄은 마치 적의 방어 태세에 직면하여 망설이는 듯 멈춰 섰다. 이에 스트라스보기는 적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여기고 진영에서 출진해 단숨에 끝장내려 했다. 이에 윌리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면에서 항전했고, 그 사이에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후위대가 적의 노출된 측면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트라스보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토머스 코민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전사했다.

윌리엄은 이후에도 에트릭 포레스트에서 은거하면서 스코틀랜드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강화했다. 1337년 잉글랜드로부터 리데스데일을 탈환했고, 이듬해에는 허미티지 성을 공략했다. 여기에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앵거스와 파이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세인트 앤드류스, 보스웰, 루카르 성을 탈환했다. 1337년과 1338년 잉글랜드군이 던바 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1338년 8월, 발리올은 스코틀랜드인들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 북부로 물려났다. 이후 스코틀랜드에 잔존한 잉글랜드 수비대는 하나둘씩 데이비드 2세를 따르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제압되었다.

1341년, 윌리엄은 스코틀랜드의 수도였지만 현재 잉글랜드군의 수중에 있는 에딘버러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성 수비대는 동물과 말을 위한 공급과 사료가 끊임없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다양한 지역 상인이 이용되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부하들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하고 전사들을 숨길 수 있는 건초 마차를 구입했다. 그들이 성에 들어서자, 마지막 수레가 문이 닫히는 것을 막기 위해 멈춰 섰다. 그 직후, 윌리엄의 병사들이 마차에서 쏟아져 나와 수비대를 공격했다. 잉글랜드의 압제에 시달렸던 에딘버러 시민들은 이에 호응했고, 많은 수비대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성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얼마 안 남은 장병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도주했다. 이리하여 에딘버러는 윌리엄의 수중에 넘어갔고, 덤프리스에서 뫼르스까지 남부 스코틀랜드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확보했다.

1341년 6월,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스코틀랜드 왕국에 귀환했다. 윌리엄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1342년 7월 아톨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몇 달 만에 데이비드 2세의 삼촌이자 스코틀랜드의 고위 관리인 로버트 스튜어트에게 넘겨줘야 했다. 데이비드 2세는 이를 보상하기 위해 제임스 로벨이 압수한 에스크데일과 이브스데일을 윌리엄에게 넘겼다. 1342년, 더글러스의 영주인 '둔한 휴(Hugh the Dull)'는 윌리엄의 압력에 굴복해 자기가 가진 영지 대부분을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들 윌리엄 더글러스에게 넘겼다. 윌리엄은 윌리엄 더글러스의 대부 자격으로 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상당 부분 횡령했고, 더글러스 영지의 소유권 일부를 빼돌렸다.

이 무렵, 윌리엄은 전우였던 알락산더르 램지와 갈등을 벌였다. 이보다 앞선 1341년 12월, 윌리엄은 록스버그에서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로부터 결투 제안을 받았다. 이때 윌리엄은 첫번째 공격에서 창이 부러지고 팔이 부상을 입어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 이후 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 양국 기사 사이에 토너먼트가 조직되었다. 윌리엄은 여전히 팔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알락산더르 램지가 대신 출진해 잉글랜드인들을 물리쳤다. 이에 질투심을 느낀 데다, 데이비드 2세가 윌리엄이 가지고 있던 록스버그 성주와 테비엇데일 보안관의 직위를 램지에게 넘기자, 그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1342년, 윌리엄은 램지가 법정을 주재하고 있던 하윅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부하들은 램지를 체포한 뒤 노새에 묶어 허미티지 성으로 끌고 갔다. 램지는 지하 감옥에 던져진 뒤 17일간 음식과 물을 공급받지 못하다가 굶어죽었다. 이후 데이비드 2세가 이에 분개해 그를 규탄하면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양자는 잉글랜드의 재침을 우려해 1342년 말에 화해했다.

1346년,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연이은 요청에 응해 12,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제2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제2대 네빌 남작 랄프 네빌이 이끄는 6,000 잉글랜드군의 기습으로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이때 윌리엄 역시 사로잡혔고, 두 사람은 런던 탑에서 오랜 기간 옥고를 치렀다. 1351년,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왕을 풀어주기로 했다. 그는 왕의 몸값을 40,000 파운드로 정했고,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요구를 따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윌리엄도 이때 석방되었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 경비병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부 갈등으로 인해 데이비드 2세와 윌리엄은 몸값을 받지 못하고 다시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왕과 리데스데일의 기사가 자신이 스코틀랜드 왕국의 주권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석방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를 쉽사리 응하지 않았지만, 6년째 수감 생활을 하던 1352년 7월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래의 조건에 동의하기로 했다.
1. 리데스데일 성을 잉글랜드에 넘긴다.
2.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모든 적에 대항하여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한다.
3. 그의 딸과 가장 가까운 남성 상속인(조카 제임스 더글러스)를 잉글랜드에 2년간 인질로 보낸다.
4. 그는 자유를 얻고 리데스데일, 허미티지 성 및 애넌데일의 일부 영지를 받는다.

이리하여 6년만에 석방된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조약을 이행하는 것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대자였던 윌리엄 더글러스는 그가 조약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1353년 어느 날, 대자 윌리엄 더글러스는 대부 윌리엄 더글러스를 애트릭 포레스트에서 결투를 벌여 살해했다. 그는 리데스데일 기사가 잉글랜드 국왕과 협력하고 스코틀랜드의 이익을 배신했기에 이같은 일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가 자신의 재산을 갈취한 리데스데일에게 원한을 품었기에 이같은 일을 벌였다고 여겼다.

리데스데일 기사의 유해는 먼저 에트릭의 예배당인 린든 커크로 옮겨진 뒤 멜로즈 수도원에 이전되었고, 다시 세인트 브리짓 수도원에 이장되었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나중에 자신이 죽인 리데스데일 기사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거행했하고 교회에 고행을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리데스데일이 죽은 장소로 알려진 갈스우드는 '윌리엄스 호프(William's Hope)'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윌리엄스 크로스(William's Cross)'라는 이름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1354년 10월 8일, 에드워드 3세는 허미티지 성을 점령했다. 이후 리데스데일 기사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더글러스가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잉글랜드 수비대를 그곳에 남기기로 동의하자 성을 돌려줬다. 에드워드 3세는 여기에 더해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인과 결혼하면 재산을 늘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 기사 휴 데이커와 결혼한 후 약속이 이행되었고, 휴 데이커는 허미티지 수비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1355년 공식적으로 허미티지 성 관리인이자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당시 런던에서 억류 생활을 하던 리데스데일 기사의 딸이자 상속인인 메리 더글러스는 이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풀려났다. 이후 메리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