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8:35:43

네빌스 크로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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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스 크로스 전투
영어: Battle of Neville's Cross
파일:FroissartFol97vBatNevilleCross.jpg
시기 1346년 10월 17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더럼 서쪽의 네빌스 크로스 고지
원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따른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잉글랜드 침공과 잉글랜드군의 반격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네빌 남작 랄프 네빌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퍼시 남작 헨리 퍼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2세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로버트 2세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리데스데일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
병력 6,000 ~ 7,000명 12,000명
피해 미미함 1,000 ~ 3,000명 전사
데이비드 2세를 포함한 많은 귀족이 생포됨.
결과 잉글랜드의 대승.
영향 스코틀랜드 왕국의 무력화.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5. 여담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10월 17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호소에 응한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 잉글랜드 왕국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스코틀랜드를 무력화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2. 배경

스코틀랜드 왕국은 남쪽의 강대국인 잉글랜드 왕국과 오랜 세월 전쟁을 치렀다. 특히 에드워드 1세가 1296년 스코틀랜드를 공격해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 하면서 벌어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수십년째 이어지면서 양자간의 감정 대립이 격화되었다. 1329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일궈낸 로버트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데이비드 2세는 1332년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한 에드워드 발리올[1]을 앞세운 에드워드 3세의 침공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발리올을 축출한 뒤 에드워드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갔다.

134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자기들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잉글랜드군이 점령했던 자국의 영역을 전부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343년 1월 19일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체결해 3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을 때, 스코틀랜드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 후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재개하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1329년에 양국이 맺은 방위 협약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346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본대가 포츠머스에 집결하자, 필리프 6세는 재차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침공을 호소했다.
"부탁하오, 간청하오. (중략)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나를 위해 해주고, 가능한 한 빨리 해주길 바라오."

그해 7월 에드워드 3세가 15,000명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1차 캉 공방전에서 을 파괴하자, 필리프 6세는 스코틀랜드에 재차 호소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브르타뉴, 플란데런에도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는 "사제, 수도자, 서기, 장인, 상인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2세는 강성한 잉글랜드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파국을 맞을 것을 우려해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지만, 필리프 6세의 이번 설득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1346년 9월 퍼스에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소집령을 내리고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들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1346년 10월 7일, 데이비드 2세는 일부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먼저 '리델의 껍질(Peel of Liddell)'로 불리는 자연 요새를 포위해 3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자신의 장교였다가 잉글랜드에 귀순한 뒤 총독 노릇하고 있던 월터 셀비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인근의 칼라일 시민들로부터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남동쪽의 부유한 도시 더럼으로 향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러다 헥샴에서 3일간 머물면서 그곳의 대수도원을 약탈했다. 10월 16일, 데이비드 2세의 군대는 더럼에 도착한 뒤 도시 서쪽에 있는 보레페어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의 수도자들은 마을과 수도원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00파운드의 몸값을 10월 18일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이비드 2세는 이에 동의하고 지급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수뇌부는 잉글랜드군이 대거 프랑스로 가버렸으니 현지 민병대 외에는 자신들을 막을 병력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부 요크셔의 리치몬드에서 병력을 신속하게 모집했다. 이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랭커셔 등지에서 3,000~4,000명이 모였고, 또다른 3,000명의 요크셔 병사들이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험버 강 북쪽 지역에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같은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군 상당수는 장궁병이었는데, 그중 1,200명은 랭커셔 출신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요크셔 병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리치먼드에서 바너드 성까지 진군했고, 대주교는 그곳에서 군대를 3개 편대로 재구성한 뒤 진군을 이어갔다. 10월 17일 아침,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은 더럼 남쪽 지역을 약탈하던 중 페리힐에서 잉글랜드군 2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곧 교전했고, 스코틀랜드군이 3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다. 더글러스는 보레페어에 있는 아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국왕에게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렸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군이 이렇게나 빨리 대응한 것에 깜짝 놀랐다. 때마침 2명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더럼에서 찾아왔지만, 데이비드 2세는 이들이 스파이라고 생각해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군영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이 '네빌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돌 기념물이 서 있는 고지로 이동하고 잉글랜드군이 그곳에 도착하면서, 네빌스 크로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파일:네빌스 크로스 전투.jpg

1346년 10월 17일, 양군은 네빌스 크로스 황야에서 대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고지에 3개 대열을 편성했다. 최선두에는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지휘하는 부대가 배치되었고, 2번째 대열은 데이비드 2세가 지휘했으며, 3번째 대열은 머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지휘했다. 이들은 고지에 세워진 제방과 성벽 사이에 자리를 잡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고지 아래 황무지에 3개 대열을 편성했다. 네빌 남작 랄프 네빌은 좌익 부대를 지휘했고, 퍼시 남작 헨리 퍼시는 우익을 지휘했으며, 요크 대주교 윌리엄 드 라 주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양측은 아침 내내 전투 대형을 편성하는 데 공을 들였고, 전투는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잉글랜드군 좌측면의 궁수대가 사거리로 이동하여 스코틀랜드 우측 전열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자, 이를 견대지 못한 머레이 백작 휘하 부대가 고지에서 내려와 궁수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궁수대를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잉글랜드 기병 및 기사들과 보병대의 협공을 받자 곧 압도되었다. 아군이 위기에 빠지자 데이비드 2세가 이끄는 더 큰 부대가 언덕 아래로 이동하여 점점 줄어가는 머레이 부대와 합류하려 했지만, 군데군데 흩어진 제방과 벽 때문에 이동에 장애가 많았다.

잉글랜드군은 무질서하게 밀려드는 적을 향해 화살비를 가차없이 퍼붓고 기병을 꾸준히 투입해 적의 전열을 흐트러놓았다. 게다가 잉글래드 중장병들은 수적으로 우월하지만 전열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은 스코틀랜드 장창병들을 압도했으며, 랭커셔 장궁병들은 다른 장궁병들이 전투에서 이탈한 것과는 달리 아군 후미에 서서 적을 향해 화살을 계속 쏘며 아군을 엄호했다.[2] 여기에 머치 백작 패트릭 드 던바가 이끄는 3번째 부대는 아군이 불리해지자 전장에서 몸을 돌려 퇴각했다. 이 모습을 본 스코틀랜드군은 전의를 급격히 잃고 패주했고, 잉글랜드인들은 밤새 20마일 거리를 쫓아가며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4. 결과

스코틀랜드군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3,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전사했으며, 데이비드 2세와 리더스데일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등 여러 귀족, 경호원, 시종, 순경 등이 사로잡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데이비드 2세는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얼굴에 화살을 두 번 맞고 브라우니 강의 다리 밑에 숨어 있었는데, 잉글랜드 병사들이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을 목격하고 달려들었다. 종자 존 코플랜드는 저항하는 왕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이빨 2개가 부러졌다. 결국 체포된 데이비드 2세는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얼굴 깊숙이 박힌 화살촉을 빼내지 못해 수십년 동안 지독한 통증에 시달렸다. 에드워드 3세는 그를 잡은 코플랜드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연간 500파운드(2023년 기준 49만 파운드)를 보상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2세의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는 전장에서 빠져나온 뒤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이끌 호국경으로 선임되었지만, 1347년 초 잉글랜드군이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 남부 대부분을 황폐화시켰을 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보급품이 바닥나자, 잉글랜드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다지지 못한 채 철수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는 일은 에드워드 3세 통치 기간 동안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계기로 프랑스를 향한 공세에 전념할 수 있었다.

5. 여담

파일:네빌스 크로스 전투의 필리파 왕비.jpg
벤저민 웨스트, <네빌스 크로스 전투의 필리파 왕비>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전해 병사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관한 판화 또는 그림 작품 상당수에는 이를 반영해 필리파 왕비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필리파 왕비는 당시 런던에서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고 있었고 전투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본다.
[1] 에드워드 1세가 옹립한 허수아비 국왕 존 발리올의 아들이다.[2] 이들은 이 공로로 전투 후 각각 10파운드(2023년 기준 9,900 파운드)의 보너스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