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9:51:17

루나롱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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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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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9년 5월 말 또는 6월 초, 루나롱주(Lunalonge, 현재 프랑스 되세브르 지방 리마롱주)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47년 9월 28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한 '칼레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로 인해 전쟁을 벌일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양국은 휴전 기간을 잇따라 갱신했다. 그러나 휴전은 그저 이름뿐이었고, 가스코뉴와 브르타뉴 방면에서는 소규모 전투와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1349년 여름, 푸아투의 세네샬인 장 드 릴이 이끄는 1,500명 가량의 기병대가 뤼지냥 시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인 토머스 코크는 5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 기병대를 이끌고 보르도에서 뤼지냥을 구하러 진격했다.

1349년 5월 말 또는 6월 초, 뤼지냥으로 진군하던 토머스 코크의 잉글랜드군은 루나롱주에서 장 드 릴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급습을 받았다. 잉글랜드군이 급히 진지를 세우고 말을 수하물 마차 뒤편으로 보낸 뒤 방어 태세를 갖추자, 장 드 릴은 이들을 정면에서 공격하면 큰 손실을 볼 게 자명하다고 보고, 적 주위를 돌면서 수하물 마차를 탈취하고 말을 포획했다. 이후 3개 부대로 나뉜 프랑스 기병대가 2개 부대를 동원해 적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원형 방진을 세우고 랜스를 즉석 파이크로 사용하며 버텨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3번째 프랑스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공격 기회를 기다리며 위치를 유지했다.

해질녘까지 잉글랜드군 전열을 뚫는 데 실패하고 지휘관 장 드 릴이 전투 도중 사로잡히자, 프랑스 병사들은 포획한 말들을 데리고 뤼지냥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300명의 프랑스 병사가 전사했고 릴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으나, 말을 모두 잃었기에 걸어서 인근 요새로 철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그들은 보르도로 돌아가는 길에 샤랑트 강의 가장 중요한 교차점을 통제하는 타이르부르 요새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한편 프랑스군은 뤼지냥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귀환했지만, 1350년 여름 새로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이 버리고 떠난 뤼지냥을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