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12:18:30

라 로슈데리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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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pture_Charles_de_Blois.jpg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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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7년 6월 20일, 브르타뉴 공국의 블루아 가문 지휘관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토머스 대그워스가 이끄는 몽포르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46년 6월 9일 생폴드레옹 전투에서 패배한 샤를 드 블루아는 군대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고, 장 드 몽포르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몽포르 파벌의 지도자는 그의 다섯살 아들 장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잉글랜드군과 은밀히 접촉했다.

1347년 5월, 중장병 1,800명, 궁수 600명, 석궁병 2,000명, 다수의 농민병을 모은 샤를은 브르타뉴의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브르타뉴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라 로슈데리앙이었다. 그는 이곳을 포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면 즉시 요격해 궤멸시키기로 했다. 5월 20일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마을을 에워싸고 북쪽, 동쪽, 남쪽에 3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한 뒤 다양한 크기의 투석기 9개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큰 투석기는 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하는 돌을 던졌고, 이로 인해 마을 주지사의 집이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라 로슈 데리앙의 잉글랜드 주지사 리처드 토스햄은 그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인사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을 거부했다.

라 로슈데리앙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 다그워스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카하익스에서 기마병 300명, 궁수 400명을 모은 뒤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행진했고, 6월 중순에 마을에서 9마일 떨어진 베강의 대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야밤에 조우디(Jaudi)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접근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조우디 강 서쪽 기슭의 도로를 따라 행군하며 소음을 일으켜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게 했다.

6월 20일 새벽에 도로변에서 소음이 일자, 샤를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군에 가만히 서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은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뒤 마을 동쪽에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했고, 잉글랜드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지휘관 다그워스는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테지만, 날이 밝을 무렵 아군이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토스햄은 성벽을 지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출격해 샤를의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예상치 못했고, 많은 병사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진영을 떠나지 않은 다른 두 진영의 브르타뉴-프랑스군은 차례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무너졌다. 다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17개의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이의 사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었지만, 상당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생포된 후 치료를 받은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한편 다그워스 역시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그의 부재를 이용해 라 로슈 데리앙 마을을 기습해 3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그곳을 함락하고 샤를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150명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항복한 뒤 비무장 상태로 샤토네프로 끌려간 후 그곳 마을의 목수들과 정육점 주인들에게 학살되었다.

이렇듯 몽포르 파벌과 블루아 파벌 모두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지리멸렬해졌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노르망디-플란데런-가스코뉴 등 다른 전선에 전념했지만 이곳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