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앙세 공방전 프랑스어: Siège de Pouancé 영어: Siege of Pouancé | ||
시기 | 1432년 1월 6일 ~ 2월 22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푸앙세[1] | |
원인 | 브르타뉴 공국과 알랑송 공국의 갈등 | |
교전국 | 브르타뉴 공국 | 알랑송 공국 |
지휘관 | 장 5세 드 브르타뉴 기 14세 드 라발 존 파스톨프 | 장 2세 달랑송 앙브루아즈 드 로레 |
병력 | 6,000명, 포병 7문 | 2,000명 |
피해 | 미상 | 미상 |
결과 | 브르타뉴 공작과 알랑송 공작의 화해 | |
영향 | 푸앙세 평화 협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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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2년 1월 6일 ~ 2월 22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이 푸앙세 요새를 놓고 벌인 공방전.2. 상세
1396년, 알랑송 공작 장 1세 달랑송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딸 마리 드 브르타뉴가 결혼했다. 이때 마리는 30,000 크라운 리브르를 지불하기로 했지만 1431년까지 15,000 리브르가 미지급되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장 1세 달랑송이 전사한 뒤 알랑송 공작에 선임된 장 2세 달랑송은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했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뒤 200,000 크라운 리브르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영지 상당수가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정복으로 인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는 막대한 빚에 시달려서 몸값을 좀처럼 지불하지 못했다.이후 잔 다르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해 프랑스군의 승승장구에 기여하면서 잉글랜드에 내야 할 몸값 마련에 골머리를 앓던 장 2세 달랑송은 외삼촌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에게 푸제르 요새를 매각하는 대가로 12만 크라운을 챙겼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던 그는 1431년 크리스마스 때 낭트를 방문해 장 5세에게 어머니의 지참금 중 아직 미지급된 15,000 크라운을 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시원한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외삼촌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사촌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2]를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신 낭트의 주교이자 장 5세의 총리였던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그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사위인 기 14세 드 라발에게 지휘권을 맡겨 푸앙세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메인과 하부 노르망디에 주둔한 잉글랜드 중대가 존 파스톨프의 지휘하에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브르타뉴군은 1432년 1월 6일부터 푸앙세를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장 2세 달랑송에 의해 푸앙세 수비대장에 선임된 앙브루아즈 드 로레에게 번번이 격퇴되었다.
장 2세 달랑송은 푸앙세를 구원하기 위해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및 여러 영주들로부터 무장병 2,000명을 지원받았다. 프랑스군은 도시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는 브르타뉴군을 습격하려 했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브르타뉴군에게 요격당해 패퇴했다. 이후 브르타뉴군이 포병을 앞세워 성벽을 계속 공격해 여러 곳이 허물어지면서 함락이 가시화될 무렵, 프랑스 무관장이자 장 5세 드 브르타뉴의 형제였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중재에 나섰다. 장 2세 달랑송과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리슈몽의 중재에 따라 2월 22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랑송 공작은 일전에 납치했던 장 드 말레트르와와 모든 잉글랜드인 및 브르타뉴인 포로를 석방하고, 플라스 드 라 게르슈를 담보로 제공하고 50,000 크라운의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장 5세는 1년 후 플라스 드 게르슈를 돌려주며, 마리 드 브르타뉴의 지참금 중 나머지 금액, 즉 15,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1] 현재 프랑스 페이 드라 루아르 지역 푸앙세[2]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