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6:55:11

포미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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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미니 전투
영어: Battle of Formigny
프랑스어: Bataille de Formigny
파일:포미니 전투.jpg
시기 1450년 4월 15일
장소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포미니
원인 프랑스군의 노르망디 공략과 잉글랜드군의 반격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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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매튜 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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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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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드 리슈몽|
아르튀르 드 리슈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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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피에르 드 브레제
병력 4,000명 클레르몽 백작의 병력 3,000명
리슈몽의 병력 2,000명
피해 전멸 500~1,000명 사상
결과 프랑스군의 승리.
영향 노르망디의 프랑스 귀속.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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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50년 4월 15일,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의 포미니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노르망디 전역 재정복을 달성했다.

2. 배경

1444년 5월 28일,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은 투르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중단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양국은 21개월간 휴전을 맺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조카이며 앙주 공작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며,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프랑스 북부의 메인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기로 했다. 이후 조약이 만료될 예정이던 1446년 4월 이전에 잉글랜드 정부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한 협상을 위해 휴전을 연장하자고 제안했고, 샤를 7세가 이에 동의하면서 5년 더 연장되었다. 메인의 잉글랜드 영주들은 프랑스에 영지를 내놓기를 거부했지만, 1448년 샤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프랑스군이 메인으로 쳐들어가고 헨리 6세가 개입을 거부하자 프랑스에 굴복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피해가 누적된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을 맺었을 뿐이었지, 이대로 전쟁을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전투력이 떨어지거나 충성심이 의심되는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무능한 장군들을 해임한 뒤 공적을 세운 하급 장교들을 승진시키고 신병들을 모집해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1445년 프랑스 각지를 돌며 약탈을 일삼는 도적 용병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창설했다. 9,000명 가량의 무장병들이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여러 도시에 주둔한 채 영구적으로 유지되었고, 왕이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어줬다. 무장병들을 맡은 도시들이 유지 비용을 대신 지불했기에, 왕은 이 군대를 유지할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할 필요가 없었다.

1448년, 샤를 7세는 프랑스 백성을 50가구씩 묶고 잘 장비되고 훈련이 잘 된 궁수를 각자 편성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대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이 무장병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대신 세금을 감면해줬다. 그 결과 8,000명 가량의 궁수병이 양성되면서, 잉글랜드군의 장기인 장궁병에 필적할 원거리 부대가 갖춰졌다. 여기에 기마병의 양과 질을 대폭 개선했고, 기술자들을 동원해 공방전에서만 사용하던 대포가 야전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재정비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공작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스위스 칸톤을 지원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군대 개편을 완료한 샤를 7세는 휴전을 깰 명분을 모색했다. 그러던 1449년 3월 24일,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의 아라곤 용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은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 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프랑수아 1세가 브르타뉴에서 노르망디로 동진했고, 장 드 뒤누아피에르 드 브레제일드프랑스에서 북상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피카르디에서 노르망디로 서진했다. 그들은 각각 코탕탱 반도, 하류 노르망디, 상류 노르망디로 진격해 강력한 대포를 활용하여 요새들을 빠른 속도로 공략했다. 당시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은 1444년 투르 조약 체결 후에도 심각한 정쟁에 휘말린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거나 탈영하는 등 군기가 지극히 문란해졌기에, 프랑스군의 합동 공세에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역할을 맡았던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머스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리하여 포미니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포미니 마을은 바이외로 향하는 도로 인근 얕은 계곡에 자리잡았으며, 개울이 마을 서쪽에서 흘러내렸고 그 위에 돌다리가 세워져서 도로와 연결되었다. 키리엘은 다리를 앞에 둔 채 군대를 편성했다. 900명의 하마 기사들은 일부 장궁병들과 함께 최선두에서 대열을 형성했고, 두번째 대열엔 다수의 장궁병들이 배치되었으며, 세번째 대열엔 창병대가 편성되었다. 최전선의 궁수들은 날카로운 말뚝을 박고 앞쪽에 얕은 참호를 팠다. 키리엘은 적이 다리를 건너오는 걸 일부러 내버려뒀다가 다리를 막 건너온 적에게 일제 공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려 했다. 그러는 한편, 남쪽에서 또다른 적군이 나타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부 기병을 그쪽으로 보내서 새로운 적의 출현 여부를 감시하게 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장 2세는 적을 포착하자 3개의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그는 적의 위치를 볼 때 다리를 무작정 건넜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고 여기고, 리슈몽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젊은 귀족들이 어서 저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도보로 도로를 따라 전진했고, 기마병들은 다리를 신속하게 건넌 뒤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했지만 적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격퇴되었다.

이때 장 뷔로가 포병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다. 포병들은 최선두로 가서 2개의 중포를 설치한 뒤 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이전의 부정확하고 연사 속도가 매우 느렸던 대포들과는 달리, 이번 대포는 상당히 정확했고 연사 속도도 빨라서 잉글랜드군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숙련된 잉글랜드 궁수들은 곧 냉정을 되찾았고, 일부 궁수들은 대열을 이탈하여 적 포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빠르게 제압한 뒤 대포 2문을 탈취해 잉글랜드 전선으로 가져갔다. 이에 프랑스 맨앳암스와 궁수대는 물러났고, 장 2세는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리슈몽에게 가서 어서 빨리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얼마 후,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남서쪽 방향에서 포미니 마을로 행군했다. 키리엘이 적이 오는 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잉글랜드 기병들은 리슈몽의 군대를 발견하고 본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장 2세가 보낸 주민들 역시 리슈몽과 만나서 서둘러 구원하러 와달라는 장 2세의 뜻을 전했다. 리슈몽은 부관들에게 행군을 계속 이끌게 한 뒤 본인은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 장 2세의 군대로 달려갔다. 두 장군은 곧 조우한 뒤 적을 어찌 상대할 지 논의한 끝에 장 2세가 공격을 재개하고 리슈몽은 남서쪽 방향에서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키리엘은 새로운 적이 나타나자 새로운 전선을 편성하기로 하고 전군에 이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탈취한 대포 2문을 끌고 가느라 행군이 지체되었고, 이동이 완료되기도 전인 오후 7시경에 리슈몽의 군대에 속한 기병 1,200명이 여전히 이동중이던 일부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가공할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피에르 드 브레제는 잉글랜드군 후방의 소규모 요새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 기병을 이끌고 그쪽으로 달려가 접수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아군이 적 기병대에게 궤멸되는 모습을 본 잉글랜드군의 전의는 급격히 떨어졌고, 많은 이들이 전투 대열을 이탈하고 달아나다가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키리엘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어떻게든 항전하려 했지만, 장 2세와 리슈몽의 합동 공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다만 매튜 고프를 비롯한 일부 기병은 전장을 탈출하여 바이외로 달아났다. 500명의 잉글랜즈 장궁병들은 개울 옆 정원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4. 결과

프랑스 측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군 사망자는 3,774명에 달했으며, 14개의 구덩이에 파묻혔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양측 모두의 사망자가 이 구덩이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잉글랜드군의 실제 사망자는 2,500명이고 900명이 생포되었다고 추산한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1,000명으로 추정된다.

키리엘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은 노르망디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수많은 도시들이 잇따라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3,0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잔여 병력은 서머셋 공작의 지휘하에 캉에 들어가서 농성했지만 6월 12일 샤를 7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1450년 8월 12일 노르망디 내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인 셰르부르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제 샤를 7세의 시선은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내에 소유한 최후의 영지인 가스코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