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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0년 7월 26일 오드프랑스 지역의 생오메르에서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고 슬로이스 항구에 무사히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이 기세를 이어가 육지에서도 프랑스군을 무찌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난날 아르투아 백작위를 놓고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와 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 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에드워드 본인은 플란데런에서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한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이 투르네를 공략하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프랑스 북부 전역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 해 7월 25,000명 가량의 병력이 투르네 인근에 집결했다. 이렇듯 프랑스 측이 투르네 쪽에 시선을 집중했기 때문에, 로베르가 신속하게 움직였다면 프랑스군이 미처 대처하기 전에 생오메르를 공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와 에드워드가 병력을 규합하는데 시일을 지체하면서 중간에 정보가 샜고, 필리프 6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 휘하 1,000명을 생오메르로 파견하고 7일 후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휘하의 또다른 병력을 생오메르에 파견했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생오메르에 로베르보다 먼저 도착한 뒤 대부분의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도시 외곽 건물들을 파괴하고 성벽을 강화하는 등 방위 준비를 신속하게 수행했다. 한편 로베르는 주민들이 자신과 에드워드 3세의 대의에 호응해 대거 가담할 거라 여기고 천천히 진군했지만, 그가 생오메르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는 뜻밖의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행군을 이어가 1330년 7월 25일 생오메르의 인근 마을인 아르케스를 철저히 파괴한 뒤 셍 오메르 동쪽 외곽 평원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얼마 후, 필리프 6세가 이끄는 본군이 자신들의 후미를 쫓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로베르와 플란데런 장군들은 공성전을 벌이려 했다가는 성안의 수비대와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에 협공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적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섬멸해 승부를 빨리 내기로 했다. 그들은 생오메르 성 앞에 군대를 배치했다. 잉글랜드 장궁병과 브뤼헤, 이프르 출신 플란데런인들을 중앙에 배치했고, 페르네스 등지의 병사들을 좌익에 배치했으며, 베르겐 등지에서 온 병사들을 우익에 배치했다. 그 외의 플란데런 지역에서 온 민병대는 예비군으로서 숙영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며칠만 기다리면 왕이 온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성밖으로 나가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전의가 끓어오른 나머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도시 밖으로 나와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 좌익을 공격했다. 이들은 곧 격퇴되었지만, 연합군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도시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이에 후퇴하던 기사들이 반전하여 맞서 싸웠고, 오후 내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외드 4세와 장 1세는 성벽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합군이 아군 기사들을 추격하느라 군대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보고, 각각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던 연합군 좌익을 공격해 적 대열에 구멍을 뚫었다. 플란데런인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패주하자, 아르마냐크의 부하들은 적 숙영지까지 추격했다. 그들은 무질서한 예비군을 공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반면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의 기병대는 연합군에게 신속하게 반격을 가하고 화살비를 퍼붓자 곧 압도당했다. 연합군 중앙과 우익 부대는 본진이 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적 기병들을 물리쳐서 도시 방향으로 패주시킨 뒤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생오메르 북부 교외 지역을 침공했다.
생오메르 주민들은 적이 밀려오자 민병대를 결성하여 항전했고, 로베르는 이들을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전열을 가다듬은 수비대가 반격했고, 양자는 성문 바로 앞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자 로베르는 숙영지로 철수했고, 장 1세 역시 철수했다. 그들은 도중에 조우하여 몇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지만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베르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8,000명에 달하는 플란데런인들이 죽거나 도주했고 숙영지가 초토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신속하게 운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남겨둔 채 퇴각하여 에드워드3세와 합류했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쫓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은 플란데런 도시인 이프르, 브뤼헤, 헨트는 전의를 상실하고 필리프 6세에게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제의했고, 에드워드 3세의 모집령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전을 거둔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여기고 투르네 원정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