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쿠르 전투 영어: Battle of Agincourt[1] 프랑스어: Bataille d'Azincourt | ||
시기 | 1415년 10월 25일(성 크리스핀의 날) | |
장소 | 프랑스 북부 아쟁쿠르 | |
원인 | 프랑스의 내분과 잉글랜드의 백년전쟁 재개.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헨리 5세 노리치의 에드워드† 랭커스터의 험프리 토머스 카모이스 토머스 아핑햄 | 샤를 1세 달브레† 장 2세 르 맹그르 샤를 1세 도를레앙 장 1세 달랑송† 장 1세 드 부르봉 |
병력 | 6,000 ~ 8,100명 | 14,000 ~ 25,000명 |
피해 | 전사: 112 ~ 600명 | 전사: 6,000명 포로: 700 ~ 2,200명 |
결과 | 잉글랜드 대승. | |
영향 | 1420년 트루아 조약 체결.[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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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쟁쿠르 전투의 1분 전개 |
1415년, 백년전쟁 중반에 일어난 전투로, 불리한 전력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잉글랜드 왕국 국왕 헨리 5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국 왕위 계승권 인정이 아니면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의 미납된 몸값과 프랑스 내 잉글랜드령의 영구적인 인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프랑스 발루아 왕조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이 친정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당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샤를 1세 달브레가 대신 지휘했다.
2. 배경
헨리 5세는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8월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3]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고 했다.프랑스는 연락을 받는 대로 병력을 모집했으나 이들의 지원이 오기도 전에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그들이 칼레에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섬멸시키고자 했다.
헨리는 처음에는 증조부인 에드워드 3세가 한 것처럼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통해 솜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목을 미리 선점했다. 잉글랜드군은 청야전술로 황폐화된 강변의 마을들을 따라 4일을 더 행군했지만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고, 남쪽으로 행군 방향을 틀어서 프랑스 수비군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다음 그 짧은 틈을 노려 도하 지점을 찾는다는 도박 같은 작전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수비군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0월 24일, 강을 건너느라 낭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4일간의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이 마주한 것은 칼레로 향하는 좁은 계곡 너머의 도로와 평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뚜기 무리 같은'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군이 칼레로 향하는 길목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잉글랜드군에는 전투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잉글랜드 진영에 머무르고 있던 부르고뉴인 르 페브르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헨리는 침착하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죽음을 예감하고 군종사제들을 찾아가 고해를 시작했다고 한다.
경험 많은 군인이었던 프랑스군의 지휘관인 '부시코' 장 2세 르 맹그르와 샤를 달브레는 잉글랜드군이 며칠 전에 있었던 기습 도하 작전을 통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보여준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여 계곡 너머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전투 대열을 유지한 채 대치하는 동안 밤이 찾아왔고, 잉글랜드군은 잠도 자지 못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추격군이 늘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안그래도 많은 프랑스군이 더 많아지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샤를 달브레의 시간벌이용 수작도 무시하며 다음날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3. 전개
사료 대부분이 그렇듯 정확한 내역을 알 수는 없으나 현대 역사가들의 의견으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보다 최소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4]좁은 전장을 완전히 틀어막기 위해 잉글랜드군의 맨앳암즈들이 일렬에 가까운 얇은 선형진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 모두의 기록에 언급된다. 이는 나중에 언급되듯이 백병전이 시작된 순간 잉글랜드군의 전열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병력의 질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비교될 부분이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군은 공성전으로 인한 병력 감소 및 사기 저하, 퇴각경로 및 전투 장소의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창궐[5] 등으로 상황이 나빴던 것에 비해 막 모집해 달려왔던 프랑스군은 이런 문제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자기 부대를 선봉에 보내달라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전장은 주변에 숲이 빽빽한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는데, 프랑스군은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대로 선발대를 제외하고선 기사들 포함 전군이 말에서 내린 채 걸어서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이 전술은 제대로 효과를 봐서 말을 타고 갔던 선발대가 아닌, 본대의 기사들은 큰 피해없이 잉글랜드군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프랑스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계획 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편견과 달리 달브레와 부시코는 전투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기동부대들을 하마 맨앳암즈 중심의 야전군으로 재편한 채 잉글랜드군을 맞이했다.
후위에 배치된 800~1200기의 정예 기병들이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기습적으로 돌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하고, 약 4천명의 쇠뇌수들이 제압 사격을 퍼붓는 동안 주력인 중보병대가 잉글랜드군 대열에 안전하게 접근하며, 그 사이에 소수의 분견대가 진영을 우회해서 포위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을 한 번의 전투로 섬멸하는 것이 당초에 입안된 작전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잉글랜드군이 먼저 방어 진영을 해체하고 장궁의 사거리 안으로 진격해서 프랑스군 진영에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기병 말뚝을 뽑아내고 다시 설치하는 사이 잉글랜드 궁수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지만 정작 그 궁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된 프랑스 기병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브르타뉴의 기욤의 연대기는 롬바르디아와 가스코뉴 출신 기병들이 궁수들의 위협 사격에 겁을 먹고 돌격을 거부했다고 비난한다. 반면에 질 르 부비에의 연대기는 기병대의 지휘관인 클리네 드 브라방과 루이 드 부르봉이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가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기병들이 대부분 불가에 앉아있거나 말을 돌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밤에 내린 폭우가 겨울 파종을 위해 경작된 밭을 드넓은 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헨리 5세는 이를 믿고 언뜻 무리해보이는 공세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 기병대가 뒤늦게나마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지만, 진창 위에서 1천 기에 달하는 기병들이 대열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절반 가량인 400기만이 출격했다. 결국 기병들은 장궁병들이 정면에서 퍼붓는 사격과 대기병 말뚝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주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기사들의 비겁함과 파벌 간의 질투심, 그리고 부족한 규율을 비난하지만 그전에 지형부터가 기병 돌격에 매우 불리했다. 게다가 기병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대열의 두께는 기병 부대의 사기와 돌파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기마돌격에 참가하는 인원이 줄어든 것 역시 기병들 입장에서는 심각한 손해였다.
이어서 프랑스 보병대가 진격했지만, 당초에 계획된 쇠뇌수들의 지원사격은 없었다. 와브랭에 따르면 전장이 좁아서 맨앳암즈와 궁수들을 동시에 투입할 공간이 없었고, 생 드니 대성당 연대기에 따르면 하마 맨앳암즈 대열의 선두에 선 귀족들이 궁수들의 지원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은 정면 사격에 취약한 급소인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면갑을 내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얇은 면갑이 화살에 관통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화살비와 아군 방향으로 패주하는 기병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등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잉글랜드군 대열에 이르러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의 얇은 선형진을 6피트에서 12피트 정도 밀어붙였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잉글랜드 군종사제들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울부짖듯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맨앳암즈들의 얇은 대열은 기적적으로 공격을 버텨냈고, 양익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2배 이상 두꺼운 프랑스군 대열을 역으로 밀어내거나 돌파해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헨리 5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타구니를 검으로 찔리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정도로 치열한 백병전이었다.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 단검, 도끼, 말뚝 고정용 나무망치 등을 들고 백병전에 참가했고, 유일한 이점이었던 숫자에서 비롯된 응집력을 잃은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패주하는 맨앳암즈들을 추격해서 많은 포로를 붙잡았을 때, 헨리 5세는 프랑스군 후위의 예비대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포로들은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잉글랜드군에는 이들을 포박할 시간과 감시할 인원이 부족했고, 전장 곳곳에 도망자들과 전사자들의 무기가 널려있었기 때문에 포로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전투를 시작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헨리 5세는 향사 한 명과 궁수 200명에게 중요하지 않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부르고뉴의 기사 길베르 드 라누아는 잉글랜드군이 포로들을 근처의 농가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고 회상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를 근거로 프랑스군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 자체가 헛소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되는 증언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어느쪽이 진실이든 잉글랜드군이 빠르게 전열을 갖추고 진격해오자 프랑스군의 후위는 반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전투 도중 소수의 프랑스 맨앳암즈들과 현지 농민 징집병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분견대가 잉글랜드군 후방에 남겨진 짐마차들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투 이전에 작성된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에 언급된,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소규모 분견대와의 유사점 때문에 흔히 오해받지만 이들은 공격이 아니라 순수한 약탈이 목적인 부대였으며 이 습격에 의해 발생한 인명 피해를 언급하는 연대기는 하나도 없다. 페닌과 몽스트렐레의 연대기에서는 포로들을 죽이라는 헨리의 명령이 이 습격 때문에 내려졌다고 주장하지만 잉글랜드군 후방에서 전투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익명의 군종사제의 연대기에는 정작 그러한 인과관계가 암시되지도 않는다.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의 신하였던 티토 리비오의 연대기에서는 심지어 헨리가 전투가 끝난 뒤 저녁에 메종셀르에 도착할 때까지 짐마차가 약탈당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습격은 당대의 잉글랜드인들에게 분노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도둑맞아 파리로 전달된 헨리 5세의 왕관을 본 프랑스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줄 알고 환호하다가 패잔병들이 뒤늦게 도착하면서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민담까지 만들어졌다.
딘터의 연대기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선봉 기병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클리네 드 브라방이 잉글랜드 궁수들을 제압하는 임무에 실패한 뒤 전장을 벗어나서 잉글랜드군 후방에 숨어들어 귀중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주장한다. 딘터는 부르고뉴 공작 장의 신하였고 클리네 드 브라방은 아르마냑파였으므로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는 알기 쉽다.
4. 결과 및 영향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다. 알랑송 공작,[6] 바르 공작 에두아르,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 등 공작 3명, 드뢰 백작[7], 그랑프르 백작, 느베르 백작, 루시 백작, 바르 백작, 보데몽 백작, 블라몽 백작, 포켐베르 백작 등 백작 8명, 남작 1명이 전사했다. 당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 직전인 1413년 아르마냑파가 수도 파리에서 정변을 일으켜 부르고뉴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상황이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귀족이 죽어버린 까닭에 아르마냑파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이에 반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이었으며,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다.[8]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에 수비대를 남기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군비를 재정비했으며, 1417년 8월 노르망디 서부에 상륙하여 캉을 확보하고 점령지를 늘려갔다. 이때 프랑스는 내전 중으로, 부르고뉴파가 수도 파리 주변의 위성도시를 하나 둘 무력으로 점거하며 파리를 에워싸기 시작하여 아르마냑파가 궁지에 몰려 있었고, 잉글랜드군의 진출에 대응할 수 없었다. 1418년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점령하여 아르마냑파를 도살하면서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부르고뉴파도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별 도리가 없었던 관계로 1419년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던 루앙이 함락되어 노르망디 전역이 잉글랜드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부르고뉴파는 구적과 화해하고, 거국일치를 시도코자, 도주한 왕세자(도팽) 샤를이 이끄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왕세자가 협상장에서 거하게 뒤통수를 치고, 부르고뉴파의 우두머리인 부르고뉴 공작을 참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9] 발루아 왕조와 철천지 원수가 된 부르고뉴파는 아예 헨리 5세와 손을 잡아버렸다. 부르고뉴파가 여전히 파리 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결국 부르고뉴파가 이끄는 프랑스 정권은 왕세자 샤를을 호적에서 파버렸으며, 헨리 5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의 결혼,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나오는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트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파리에서의 얘기였고, 부르주에 있던 왕세자 샤를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 휘하 7,000명의 스코틀랜드병을 기반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다. 잉글랜드로 돌아갔던 헨리 5세는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북프랑스를 정리한 뒤 남진하던 도중 병을 얻어[10] 아들인 헨리 6세를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헨리 5세는 죽기 전 자신의 큰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을 섭정으로 임명했는데,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휘하느라 잉글랜드에는 잘 들르지 못하고, 작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잉글랜드 내의 권력을 잡으면서 갈라졌다. 베드퍼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은 형제간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다투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글로스터 공작이 자고 일어나면 사고를 치면서,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까지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부르고뉴 공작의 영역권이었던 에노와 홀란트를 침공하여 부르고뉴파의 뒤통수를 치면서 팀킬을 하기까지 했다. 왕세자 샤를을 잡고 전쟁을 끝내려면 본격적으로 남침을 해야 했으나, 이렇게 수뇌부에 문제가 컸던 탓에 베드퍼드 공작은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없었다.
1428년, 결국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대대적인 교통정리를 하고 돌아온 베드퍼드 공작은 본격적으로 프랑스 왕세자 샤를을 토벌하고자 전열을 정비하고 남침했다. 원래는 아키텐과 북프랑스를 연결코자 앙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왕세자 샤를이 있는 부르주를 노리고 오를레앙과 루아르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한 처녀가 나타나고...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잉글랜드군이 노궁을 사용했고, 이것이 판금 갑옷을 관통할 만큼 강력한 투사무기였다는 고증 오류, 혹은 왜곡된 내용이 알려져왔다. 실제 잉글랜드군의 주력은 장궁이었고, 서양식 쇠뇌인 노궁은 오히려 프랑스와 제노바 공화국의 용병들이 애용했기에 실제 전투 양상은 프랑스 / 제노바 노궁병 vs 잉글랜드의 장궁병이었다. 게다가 노궁도 갑옷을 그리 쉽게 뚫는 무기가 아니었다.
영국에서 널리 쓰이는 손가락 욕인 '손등이 상대 쪽으로 향하게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행위'는 이 전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카더라가 유명한데, 딱히 증거가 없어 요즈음에는 현대에 만들어진 속설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영문위키
5. 창작매체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세에서[11]에서 이 전투를 앞두고 헨리 5세가 하는 대사가 매우 유명하다. 창작물에 나오는 대사인데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을 정도. 아쟁쿠르와 백년전쟁을 논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다.번역본 | 영문 |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12]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니라.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
다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전과가 상당히 과장되어 나온다. 프랑스가 1만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그중 8,400명은 귀족인데 비해 잉글랜드는 고작 25명의 전사자를 낼 뿐이며 귀족 전사자는 겨우 4명이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역사적 전투로 나온다. 우선 프랑스군의 진격에 장애물은 말뚝 말고는 없으며, 프랑스 병력이 1, 2, 3차 축차투입으로 돌격을 감행해온다. 기병돌격을 막을 병사라곤 하마 잉글랜드 기사대뿐이고, 거기에 후방의 기습이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얘네를 막으려면 유일한 기병전력인 하마기사대를 후방으로 빼기까지 해야 한다.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지만, 프랑스군의 불리함이 하나도 재현되어 있지 않아서 처음 한다면 난이도가 제법 높다.
사실 전열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기사들은 후방에 배치된 미늘창병대로 어느 정도 저지가 가능하며[13] 좌측에 위치한 장궁병대로 그들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할 때에 사격하여 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제1파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은 양쪽 장궁병대의 화살 세례로 아군 전위에 도달할 때쯤이면 이미 절반쯤은 줄어 있다. 그러므로 전열만 유지하고, 헨리 5세만 전사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잘만 빼돌린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사단은 AI의 한계로 인해 어지간해서 장궁병대가 쳐놓은 말뚝을 못 넘고 알아서 들이박아 박살나준다. 어찌보면 재현에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히려 프랑스의 전 병력이 일거에 들어왔다면 더 어려운 난이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장 전력이 분산되어 축차투입되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여담으로 헨리 5세의 근위대는 기병돌격을 맞고도 역으로 기병을 쓸어버리는 위력을 보인다. 뒤쪽에 있는 빌 보병대와 하마기사대까지 합치면 후방 기습도 걱정 없을 정도. 무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점심먹으러 간 후 와보니 이겨있을 정도로 알고보면 역대 토탈 워 역사적 전투 사상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쉬운 전투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도 재현된다. 단 아쟁쿠르 전투 직전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지역으로 퇴각하는 부분과, 아쟁쿠르 전투 직후 잉글랜드로 귀국하는 부분까지 모두 한 미션으로 압축된 스케일로 등장하며 정작 메인인 아쟁쿠르는 맵 한 귀퉁이[14]에 접근하면 대기 중이던 대량의 프랑크 기사들이 달려드는 방식으로 간소하게 재현시켜만 놓았다. 미션 자체는 부대를 충원할 수 없고 적지를 주어진 병력만으로 어찌어찌 돌파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지만, 위와 달리 장궁병으로 쏙쏙 적병을 점사하면 어이없이 쉽게 이길 수 있다. 기사도 점사 앞엔 장사 없다. 아니면 헨리 5세만 목표지점까지 찍으면 혼자서 적들을 요리조리 쏙쏙 잘 피해서 배까지 간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아류작 엠파이어 어스에서도 이 전투를 볼 수 있는데 잉글랜드에서 롤라드파를 박해한 후 프랑스를 침공하는 내용과 함께 붙어있다. 다행히 유닛 충원은 가능하다. 대사에 따르면 아르플뢰르를 함락시키느라 지친 잉글랜드군과 달리 프랑스군은 규모도 잉글랜드군의 5배는 되고 기운 넘치는 상태라고 한다. 단 각 군의 유닛 스펙은 거의 동일하다. 프랑스군이 분지에서 대군을 전개중인데 양쪽 언덕에는 구포가 대기중이라 그냥 들어가면 보병은 포격 세례에 전멸하고 기병은 더 많은 프랑스 기사들과 궁수의 협공에 전멸한다. 난이도에 상관없이 구포부터 제거해야 전투 난이도가 낮아지거나 클리어가 가능해져서 난이도가 좀 있다. 어려움 난이도는 구포를 먼저 제거해도 그 후에 그냥 어택땅하면 전멸 확정이니 적 유닛을 조금씩 끌어와서 섬멸하는 방식을 반복해야 승리할 수 있다.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아르슬란 전기에 나오는 자카리야 전투에서 이 전투의 요소들 여러 가지를 차용한 듯한 장면이 나온다. 장 보댕이 이끄는 4만 병력에 맞서싸운 기스카르가 이끄는 1만 8천 병력이 중무장을 벗고 가벼운 무장을 한 채로 전투에 임하는데 이를 본 보댕군은 적은 돈이 없어 갑옷도 없다고 비웃었으나 진흙탕이 가득한 곳에서 벌어진 전투라 오래가지 않아 중무장한 보댕군이 처발린다.
영화 더 킹: 헨리 5세의 주요 사건이자 클라이맥스로 등장한다. 헨리 5세의 친구 존 경이 장궁과 소수의 중보병들을 미끼로 프랑스 기사들을 끌어들이고 기사들이 진창에 빠지자 헨리 5세가 매복해 있던 경보병들을 이끌고 공격해 승리하는 것으로 나온다. 진흙탕 속에서 명예와 영광 따위 없이 악착같이 살기 위해 죽이는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15]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스 왕자 루이가 헨리 5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헨리 5세는 이를 받아주려 했으나 끝까지 갑옷을 벗지 않고 있던 루이는 진창에 넘어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등 도저히 결투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16] 결국 병사들이 넘어진 루이를 단체로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17][18] 이후 전리품 수거 및 재정비 과정에서 존 경의 시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해하던 헨리 5세는 포로가 너무 많아서 관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장교의 보고에 그럼 다 죽이라고 덤덤하게 말하고 전장을 떠난다.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아쟁쿠르 전투를 재현한 사람이 있다.
6. 관련 문서
[1] 영어로는 '애진코트'라고 읽는다. 영국 군함 이름으로도 쓰였다.[2] 샤를 6세의 사망 시, 프랑스 왕위는 헨리 5세가 계승한다는 내용의 조약.[3] 또한 이후 기록을 보면 무리한 공성전 속행으로 인해 최소 20% 최대 40%가량의 병력 사망 및 군내 전염병 창궐, 물자 부족 등 여러 난점에 맞닥뜨린 상황이었다.[4] 사료에서는 당연히 자기들이 유리하게 서술하려는 구석이 있다보니 영국측 자료에서는 사료에 따라 '프랑스군이 10배가량 많았다.'라는 언급도 있었으며 반대로 프랑스 사료에서는 '아일랜드군의 군세보다 아무리 많아도 4배가량이었다 정도의 언급만 나온다.[5] 설사가 잦다는 식의 언급을 보면 정황상 이질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추측된다.[6] 알랑송 공작은 전투 도중 헨리 5세에게 돌진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글로스터 공작을 쓰러트린 뒤 헨리 5세와 결투를 벌였다. 헨리 5세의 왕관에 달린 작은 꽃무늬 장식을 쳐내는 등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제압당했는데, 그는 포로로 사로잡힌 뒤 면갑을 열자마자 한 광포한 잉글랜드군 기사 한 명이 휘두른 도끼에 맞고 사망했다.[7]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8] 전사자 중 이름 있는 인물로는 헨리 5세의 당숙인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와 서퍽 백작 정도였다. 요크 공작은 뚱뚱해서 전투 도중 넘어졌다가 또다른 시체에 깔려 질식사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보통 먼 미래의 튜더 왕조 사가들이 왜곡한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는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헨리 5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또한 헨리 5세를 죽이려 달려든 알랑송 공작을 막다가 허벅지 뒷쪽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9] 내전의 원인이 부르고뉴 공작 장이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자신의 행동을 그대로 돌려받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10] 병명은 이질.[11]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헨리 5세>를 포함해 여러 잉글랜드 국왕들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바로 BBC에서 방영했고,지금도 방영 중인 유명한 드라마인 텅 빈 왕관(영어 제목은 할로우 크라운)이다.[12] 전투 당일.[13] 미늘창병대는 써있기는 중보병이지만 취급이 창병과 비슷해서 기병에 상성이 좋다.[14] 맵 가장 오른쪽에 진창 비슷한 매우 더러운(?) 지형이 등장하며, 이 부분에 접근하면 헨리 5세가 상기한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대사의 일부를 읊는다.[15] 당장 왕인 헨리 5세도 처음에 들고 있던 워픽도 잃어버린 채 단검과 죽은 자의 무기, 심지어 맨손으로 진창을 뒹굴면서 처절하게 싸워나간다.[16] 이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는 잉글랜드군과 헨리 5세의 표정이 일품이다.[17] 왕족 대 왕족의 1:1 결투였는데 헨리 5세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도 아닌 평민 병사들한테 죽이라고 시킨다. 정황상 자신이 죽일 가치도 없다고 여긴 듯.[18] 실제 샤를 6세의 아들 루이는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그해 12월 파리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루이뿐만 아니라 전투 전개 및 배경도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헨리 5세가 실제 역사와 다르게 시초에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에 관심이 없고, 프랑스의 도발에 못 이겨 전쟁한 것으로 묘사되고, 잉글랜드군의 장궁병을 경계해 하마해서 전진했던 프랑스군이 그냥 단순한 기병돌격으로 바뀌는 등. 그래서인지 주인공인 티모시 샬라메가 혈통이 프랑스계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프리미어 행사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