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의 영국 해군 군함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건보트 | <colbgcolor=#fefefe,#191919>어피스급 | |||
구축함 | A급, B급, C급, D급, 크리켓급, E급, F급, G급, H급, I급, K급, L급, M급, 메데아급, 탈리스만급, R급, S급, V급, W급 | ||||
선도구축함 | 폴크너급, 마크스먼급, 파커급, 스위프트급, 스콧급A, 셰익스피어급A | ||||
잠수함 | A급, B급, C급, D급, E급, F급, H급, J급, K급, L급, M급, N급, R급, S급, T급, V급, W급, X1급, 노틸러스급, 오딘급, 파르티안급, 레인보우급, 템스급, 그램푸스급 | ||||
모니터함 | 마샬 네이급, 애버크롬비급, 로드 클라이브급, 험버급, 고르곤급, M15급, M29급 | ||||
정찰순양함 | 어드벤처급, 포워드급, 패스파인더급, 센티넬급, 부디카급, 블론드급, 액티브급 | ||||
장갑순양함 | 크레시급, 드래이크급, 몬머스급, 데본셔급, 듀크 오브 에든버러급, 워리어급, 미노토어급 | ||||
방호순양함 | 아폴로급, 아스트라에아급, 이클립스급, 블래이크급, 펄급, 에드거급, 파워풀급, 다이아뎀급, 애로간트급, 펠로루스급, 하이플라이어급, 챌린저급, 토파즈급, 타운급 | ||||
중순양함 | 호킨스급A | ||||
경순양함 | 아레투사급(1913), C급(캐롤라인급, 칼리오페급, 캠브리안급, 센타우르급, 칼레돈급, 세레스급, 칼라일급A), 다나에급, 에메랄드급A | ||||
순양전함 | 인빈시블급, 인디패티거블급, 라이온급, 퀸 메리급, 타이거급, 리나운급, 어드미럴급A, | ||||
전함 | 전드레드노트급 | 로열 소버린급, 센추리온급B, 마제스틱급, 카노푸스급, 포미더블급, 런던급, 던컨급, 킹 에드워드 7세급, 스윕셔급, 로드 넬슨급 | |||
드레드노트급 | 드레드노트급, 벨레로폰급, 세인트 빈센트급, 넵튠급, 콜로서스급, 오라이언급, 킹 조지 5세급, 에린급, 애진코트급, 아이언 듀크급, 캐나다급, 퀸 엘리자베스급, 리벤지급 | ||||
항공모함 | 아크로열급 수상기모함, 아거스급, 허미즈급A, 빈딕티브, 커레이저스급 | ||||
※ | }}} {{{#!wiki style="margin-top: -30px; margin-bottom: -10px; letter-spacing: -0.9px; font-size: 0.82em;" | ※둘러보기 : 영국군의 운용장비 | 해상병기 | }}} }}}}}} |
영국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계보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전함 |
→ → → → → → → → → → → → → → | |
순양전함 | |
기타 | |
}}}}}}}}} |
HMS Agincourt |
1. 개요
함명인 애진코트(Agincourt)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대승리 중 하나였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기원한 것이다. 아쟁쿠르는 프랑스 지명이고 이걸 영어로 읽은 게 애진코트. 이 함명이 붙은 영국 해군 함선은 역사상 총 5척(건조 취소된 경우까지 6척)이며,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것은 그중 가장 유명한 1914년에 취역한 전함이다. 현재는 건조 중인 아스튜트급 공격원잠 7번함의 함명으로 예정되어 있다.2. 제원
애진코트급 전함 Agincourt-class battleship | ||
기준배수량 | 27,850톤 | |
만재배수량 | 30,860톤 | |
전장 | 204.7m | |
전폭 | 27.1m | |
흘수 | 9.1m | |
승조원 | 1,268명 | |
출력 | 34,000마력 (25,000kW) | |
최고 속력 | 22노트 (41km/h) | |
항속거리 | 10노트 (19km/h) 로 7,000해리 (13,000km) | |
동력 | 기관 | 밥콕 앤드 윌콕스 증기보일러 22기 |
파슨스 직결식 증기터빈 4기 | ||
추진 | 4축 프로펠러 | |
무장 | 주포 | BL Mk.XIII 12인치 2연장 주포탑 7기 (총 14문) |
부포 | BL Mk.XIII 6인치 단장포곽 20문 | |
3인치 대공포 10문 | ||
어뢰[1] | 21인치 어뢰 발사관 3문 | |
장갑 | 현측 | 229mm |
갑판 | 25~64mm | |
주포탑 | 203 ~ 305mm | |
장갑함교 | 305mm |
3. 배경
1905년 그때까지의 모든 기술을 총집합시켜 만든 새로운 형태의 전함 드레드노트의 등장은 기존 유럽 열강국가 간의 건함 경쟁만 부추긴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세기 초 남미는 전통의 3대 강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가 각각 지역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펼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유럽 수준의 미칠 듯한 경쟁은 아니었지만 매우 치열한 건함 경쟁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ABC(Argentia, Brazil, Chile) 건함 경쟁이라 불렀다. 그리고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비싸지만 제값 하는 이 결전병기의 확보는 건함 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선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에 삼국 모두 드레드노트급 신형 전함을 확보하길 희망했다.브라질은 1910년에 12인치 (305mm) 주포 12문을 장비한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 3척을 영국에게 발주하여 그중 2척('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es)', '상파울루(São Paulo)')을 도입하여 건함 건쟁의 스타트를 끊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아르헨티나는 1914 ~ 1915년에 걸쳐 리바다비아급 전함 2척('리바다비아(ARA Rivadavia)', '모레노(ARA Moreno)')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했으며 해당 전함은 12인치 주포 12문으로 미나스제라이스급과 대등하지만 장갑과 속도가 더 우수했다.
칠레는 1911년에 영국에다 14인치 (356mm) 주포 10문을 장비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알미란테라토레(Almirante Latorre)', '알미란테코크라네(Almirante Cochrane)')을 주문했지만 1차대전 발발로 영국이 매수하여 알미란테라토레는 '캐나다(HMS Canada)', 알미란테코크라네는 '이글(HMS Eagle)'로 개칭한 후 영국이 전쟁에 사용했다. 그 후 1차대전이 끝난 1920년에서야 알미란테라토레 1척만을 인수해 1척을 보유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미란테코크라네는 전쟁 당시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시험하던 영국 해군이 이글급 항공모함으로 개장했기 때문에 인수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1910년대 초 커피와 목재, 고무의 수출로 경제적 호황을 맞고 있던 브라질은 라이벌 아르헨티나가 미국에 리바다비아급 전함 2척을 발주하자, 해군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나스 제라이스급 3번함의 건조를 맡은 암스트롱 사에게 아직 건조되지 않은 3번함의 건조 계약를 취소하고 당시 막 등장한 전함이자 기존의 드레드노트급보다 더욱 강력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를 의뢰했다. 이에 암스트롱 사는 브라질의 의뢰를 받아들여 1911년 9월 14일 새로운 전함의 건조에 들어갔다.
4. 특징
애초에 수출용 전함이었고 브라질의 상황이 얽혀서 원래 계획보다 대폭으로 다운그레이드되었다. 대표적으로 주무장이 크게 하락하였는데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이 15인치 2연장 주포탑 4기를 탑재하며 탑재방식도 선수방향에 2기, 선미방향에 2기를 탑재하고 적층식으로 주포탑을 탑재하여 균형있고 화력을 100% 투사가능한 방식을 사용했다.하지만 리우데자네이루는 12인치 2연장 주포탑 7기를 장착하여 중앙부 주포탑이 3기나 발생하고 그 중 2기는 역방향으로 탑재되는 등 함체의 상당부분을 주포탑과 관련시설이 점유하는 퇴보된 설계의 군함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군함 건조 실적이 많은 영국답게 중앙부 주포탑을 정리해서 중앙부에 서로 뒤를 마주보는 형태로 2기를 집중시키고 나머지 1기는 후방부 주포탑들과 인접해서 역방향으로 장착하는 식으로 최대한 공간을 절약하면서 설치했지만 워낙 주포탑이 많다보니 답이 없었다.
주포인 BL Mk.XIII 12인치 (305mm) 2연장 주포탑은 애진코트 전용 함포로 45구경장의 포신을 가지며 포신각도는 -3°에서 +13.5°까지 조절이 가능하며 포탑은 기본적으로는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386kg의 철갑탄을 831m/s의 포구초속으로 +13.5°의 포신각도로 발사하면 최대사거리가 18,000m를 조금 넘는 수준까지 포탄이 도달할 수 있었다. 1차대전중에 포신각도를 +13.5°에서 +16°로 증가하도록 주포탑을 수정했지만 최대사거리는 18,686m까지로 매우 적게 늘어났다. 장전각도는 +5°이고 연사속도는 분당 1.5발이다.
수출용 신형 함포인 관계로 유압식 장전 기어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장전후 격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던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포탄의 경우에도 수출용으로 배정된 1890년대에 제조된 구식 포탄때문에 장전불량이나 격발불량이 발생하기도 했다. 포신 내부 구조도 오류가 조금 있어서 종종 포탄이 포신을 통과하는 것이 방해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나마 화력은 12인치 14문을 보유해서 초당 포탄 투사량은 좋은 편이지만 그게 끝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만이 보유했던 사격 제원 산출 및 사격 통제 시스템인 Dreyer Fire Control Table이 장비되어 있지 않았다. 비록 일본이 얻어간 것보다 더 개선된 레인지 파인더가 있었고 군함에 레이더가 달리기 전이므로 상당히 유용했지만 그걸로는 기존의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에 비해 특별하게 낫다고 보긴 어렵다.
여기에 더해서 주포 문수가 너무 많아서 일제 사격시 발생하는 반동과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측면 방향으로 주포를 일제 사격하자 발사 화염과 연기로 선체가 뒤덮히고 군함에 장비된 식기와 유리제품이 모조리 박살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부포인 BL Mk.XIII 6인치 (152mm) 단장포곽도 애진코트 전용 함포로 50구경장의 포신을 가지며 포신각도는 -7°에서 +13°까지 조절이 가능하며 나중의 개선으로 +15°까지 각도를 올릴수 있었다. 포곽의 특성상 포신 좌우각도는 -80°에서 +80°까지 가능하다. 포신각도조절과 포신선회는 수동으로 움직인다. 45kg의 철갑탄을 포구 속도 840m/s로 +15°각도로 사격하면 최대사거리가 12,322m까지 도달한다. 연사 속도는 분당 약 5 ~ 7발이었지만, 탄약 호이스트가 너무 느리게 작동하거나 수량이 적기 때문에 부포 옆에 준비된 탄약인 즉응탄을 모두 사용한 후에는 분당 약 3발로 떨어졌습니다. 1문당 약 150발의 탄약이 배당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근거리 방어용으로 3인치(76mm) 45구경장 단장 포대 속사포 10문을 포대 형식으로 전함의 상부 구조물 위에 장착했다. 속사포는 포방패로 조작원을 보호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어뢰도 탑재하였는데 21인치(533mm) 수중 어뢰 발사관 3기를 도입하여 2기는 선수부의 양 측면에 설치하고 나머지 1기는 선미부에 장착했다. 어뢰를 발사할 경우 어뢰 발사관 내부에 들어간 물은 발사관 재장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어뢰발사실로 배출된 다음 펌프를 통해 군함 밖으로 뽑아내는 구조를 가진다. 덕분에 어뢰 발사관을 다루는 수병은 전투시에 어뢰발사실 내부에 바닷물이 들어차서 최대 수심 0.9m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전투를 해야 했다. 어뢰발사관에 장전가능한 어뢰는 총 10발이다.
그리고 장갑이 전함치고는 매우 얇았다. 현측장갑이 229mm인데 이건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시초인 드레드노트(전함)의 279mm보다 한참 얇다. 드레드노트가 만재배수량이 21,060톤인 것을 생각하면 리우데자네이루는 배수량이 1만톤이나 늘었는데 방어력이 형편없다는 게 바로 드러난다. 심지어 장갑 얇기로 소문난 라이온급 순양전함과 동등한 현측장갑 두께를 가지고 있는 수준인데 속도는 라이온급 순양전함이 27.5노트 (약 50.9km/h)인데 반해 고작 22노트 (41km/h)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서 주장갑이 주포탑 하부를 모두 덮는 형상도 아니었고 보호되는 면적도 좁았다. 주장갑으로 보호되지 않는 측면은 가장 두꺼운 곳이 152mm (6인치) 수준이고 102mm (4인치)까지 하락하기도 한다. 주포탑 바벳은 더 심각해서 상갑판 위는 9인치 (229mm) 두께지만 상갑판에서 주갑판 사이는 3인치 (76mm) 로 감소하였고 주갑판 아래는 일요일 포탑이라고 불리는 1번 주포탑의 3인치 (76mm), 목요일 포탑이라고 불리는 5번 주포탑과 토요일 포탑이라고 불리는 7번 주포탑의 2인치 (51mm)를 제외하면 장갑이 없다. 주포탑 바벳 하부의 장갑이 아예 없거나 매우 얇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포탄이 주장갑을 관통하는 순간 주포탑 바벳 내부까지 들어와서 대참사가 나기 쉽다.
그나마 주포탑은 기존 제품을 썼는지 전면이 12인치 (305mm), 측면이 8인치(203mm), 후면이 10인치(254mm)이며 주포탑 천정은 전면이 3인치 (76mm), 후면이 2인치 (51mm)고 장갑함교는 측면이 12인치 (305mm), 천정이 4인치 (102mm) 이며 갑판장갑은 총합해서 1인치에서 2.5인치(25mm ~ 64mm)라서 당대의 일반적인 12인치 주포 탑재 전함과 비슷하므로 그럭저럭 체면은 차렸다.
내부 구조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브라질의 희망으로 격벽이 설치되지 않고 넓은 선실을 여러곳에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포탄이 관통하고 들어오면 내부피해가 매우 커지게 되며 어뢰가 명중한다면 침수를 통제할 방법이 크게 부족해서 배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다가 전복된 후 침몰하기 딱 좋다.
따라서 종합적으로는 순양전함의 방어력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속도를 겸비한 망작이었다. 심지어 신형함이면서 기존의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보다 개선된 점이 별로 없는 것도 특징이다. 이래서는 칠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1대 1 승부는 곤란하며 칠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에 대해 브라질의 전함 3척이 도전해야 승산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망작이 탄생한 것에 대해 영국의 책임은 없다시피하다. 일단 계약을 깨려고 했다가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변경했다가 저렇게 된 이유는 브라질의 내부 상황 때문이지 영국의 잘못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에도 계속 변경되는 주문에 대해서 호텔에서 나무를 깎아서 군함 모형을 만들어서 보여줘가며 설득하는 세일즈맨 정신을 보였다. 심지어 16인치 (406mm) 주포를 장비하는 시안도 있었다고 하니 영국 정부의 1급 비밀 준수 압력같은 당연한 조치를 뺀다면 영국 군수기업의 성실성은 인정해줘야 한다.
따라서 그냥 원래 주문대로 14인치 주포를 장착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만들어졌으면 칠레의 동급 전함과 동등한 성능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5.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당시 브라질 정부가 의뢰한 새 전함은 영국 해군이 건조하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설계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주포는 12인치로 다운그레이드되었고 주포탑재량은 2연장 주포탑 7기를 사용해서 14문이라는 전무후무한 수량을 탑재하는 독특한 전함으로 완성되었다.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의 브라질 정계와 군부에서 벌어진 권력다툼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원래 리우데자네이루를 계획하고 주문할 당시의 해군장관은 알렉산드리노 파리아 데 알렌카르 (Alexandrino Faria de Alencar)였으며 브라질이 보유한 기존 전함의 주포 구경을 확대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할 것을 결정했고 사양도 14인치 주포를 탑재한 32,000톤급 전함이었다.
하지만 후임자로 해군장관에 임명된 호아킴 마르케스 바티스타 데 레앙 (Joaquim Marques Batista de Leão)는 1911년 5월에 전임자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주문을 대규모로 수정해서 12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으로 다시 변경했기 때문에 애진코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칠레가 14인치 주포를 탑재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주문하고 영국에서 건조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정면승부로는 전혀 상대가 안되는 12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을 쓸데없이 추가 주문하는 브라질의 상황은 현대에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행위지만 당대에는 나름대로 변명의 여지가 있긴 했다.
- 브라질의 경제 호황이 서서히 사그라들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예산이 적자라서 빚이 늘어나는데 이미 빚을 얻어서 건조해놓은 드레드노트급 전함들 때문에 상환금을 계속 납부하는 상황이었으며 1910년 11월에 발생한 브라질 해군 반란사건인 채찍 반란 (Revolt of the Lash) 같은 사건이 벌어지므로 돈이 더 많이 들어가는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는 것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외교 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굳이 건함 경쟁을 지속할 이유가 사라졌다. 칠레는 전통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연합한다면 칠레를 어떻게든 숫자로 압도해서 우세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 3번함의 건조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암스트롱사가 이미 3번함이 될 용골을 1910년 3월에 도크에 깔아놓고 작업을 개시할 준비를 하는 등 계약 축소를 거부하는 상황이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차라리 좀 더 나은 전함을 건조하는 방향으로 뱡향을 전환했던 것이니 돈을 좀 더 절약하는 방법으로 전환할 요인이 있다.
- 시대의 한계로 인해 정보전달의 불균등성이 있었으며 당시 상황이 신기술에 대한 완전한 입증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인터넷 같은 것은 없고 당대의 전함과 관련 기술은 1급 비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해군 1등국인 영국에서도 확립이 간신히 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브라질이 심층적으로 깊게 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2]
그리고 아직 1차대전이 터지기 전이므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성능을 잘 보여주는 실전사례도 없다시피하므로 영국의 군수기업의 광고 멘트 따위나 보고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브라질이 판단할 수는 없었다.
- 당대의 군함은 제 값주고도 제조국 정부의 숨겨진 압박으로 인해 구매국에게는 몰래 다운그레이드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협차사격에 필수적인 요소인 사격통제장치, 그 중에서도 사격 제원 산출 및 사격 통제 시스템인 Dreyer Fire Control Table 같은 것은 1급 비밀로 영국도 자국 군함에나 사용하고 외국에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영일동맹으로 우호국이던 일본 제국에도 존재 여부 자체를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력으로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한 노력이 미국, 독일, 일본의 건함사를 보면 엄청나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관측 및 사격통제장치의 제약 때문에 14인치 주포를 장착해봤자 유효사정거리가 12인치와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구경의 이점을 반쯤 상실한 채로 싸우게 되므로 불리해진다.
- 과거의 실패 사례가 영향을 주었다.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도 12인치 주포를 구경 확대를 통해서 위력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주포와 포탄의 중량 증대로 인해 연사속도가 급하락하고 포탑선회속도와 포신상하가동속도가 모두 바닥을 기어서 광속으로 다시 12인치로 돌아간 사례가 존재했다. 그러니 브라질 입장에서는 영국이 검증되지도 않은 신기술을 실험하다가 실패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었다.
- 호환성과 보급 문제가 있었다. 영국이 자국 해군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주포 구경으로 선택한 것은 13.5인치 (343mm)와 15인치 (381mm) 이므로 14인치 (356mm)는 수출용 군함에나 적용되는 구경이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특정 군수기업만이 생산가능한 독특한 구경의 주포탄을 유사시에 만족스럽게 수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칠레와 싸움이 붙을 경우 영국이 칠레 편으로 들어가거나 중립을 지키는 순간 후속지원은 물건너가는 것이다.
나중에서나 미국이 뉴욕급 전함을 건조하고 일본이 공고급 순양전함을 건조하면서 14인치가 대중화가 되긴 했지만 리우데자네이루를 건조결정할 당시에는 뉴욕급 전함이 간신히 건조개시되는 상황이라서 앞 일을 예측할 수 없으며 미국이나 일본이 포탄이나 부품을 수출해줄지 여부도 알 수 없었고 양국에서 만든 포탄이나 부품이 영국제 14인치와 호환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14인치가 이런 문제가 있는 반면에 12인치 (305mm) 주포는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이 모두 생산하는 함포였고 부품도 충분하였으며 기존의 브라질 전함과 주포탄과 부품도 호환가능했고 설령 영국에서 지원을 못받아도 타국에 어느 정도의 상세 제원과 설계도를 보여주면 주문제작해서 납품이 가능할 정도의 보편성까지 있어서 경제적이었다.
- 독일 제국이라는 방해꾼이 있었다. 당시에는 열강의 무관이 각국의 대사관에 파견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브라질처럼 외국에서 군함을 수입할 수 있는 국가의 경우에는 자국 조선소의 일감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해군 무관같은 전문가가 파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브라질에도 독일 제국의 해군 무관이 파견된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의 독일 제국은 빌헬름 2세가 주도하여 영국의 본토함대를 정면에서 상대할 대양함대를 건설중이었으며 규모도 세계 제2위를 자랑하였으나 급속한 해군증강으로 인해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기술 개념같은 일부 분야에서 지체 현상이 나타난 상태였다.
대표적인 것이 11인치급 (280mm) 함포를 만들어놓고 성능이 당대의 전함 주포인 12인치와 비슷한 성능을 보이자 11인치급 주포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전함 주포의 대구경화에 한발짝 늦었다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15인치급 (380mm) 주포를 급하게 개발하여 바이에른급 전함에 탑재하였지만 이미 전쟁이 코 앞이고 대구경 주포 생산시점도 늦어서 대량양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에 파견된 독일 제국의 해군 무관들이 호아킴 마르케스 바티스타 데 레앙을 설득하는데 쓴 이론은 주포는 11인치급이나 12인치면 충분하며 해전도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처럼 10km 근방이나 그 안에서 벌어질 것인데 해당 거리 안에서는 충분하게 칠레가 보유한 14인치 주포를 탑재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주장갑을 12인치 주포가 관통할 수 있으므로 상대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칠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14인치라는 대구경 주포를 사용하므로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려서 연사속도가 딸리므로 몇 발 쏘기도 전에 브라질의 전함이 충분히 근접해서 난사해버리면 끝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이렇게 독일 제국의 해군 무관들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대다수가 위에 언급한 11인치급 주포 만능론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대구경 주포가 더 좋다고 보는 소수의 사람들도 당장 독일 제국이 즉시 건조해서 빠르게 수출할 수 있는 전함은 12인치 주포를 갖춘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에는 상당히 적절하다고 보는 이유들이 있었으므로 후임 해군장관인 호아킴 마르케스 바티스타 데 레앙은 근거자료까지 손쉽게 넣은 후 브라질 정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민여론 같은 것도 있으니 기존에 보유한 브라질의 전함보다는 외형적으로라도 신형전함이 더 나아야 하므로 12인치 2연장 주포탑을 1기 더 늘리는 식으로 주문을 수정한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는 1911년 6월 3일에 건조계약을 최종적으로 체결하고 1911년 9월 14일에 용골이 제작되면서 건조가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지는 새 전함은 이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취소한 미나스제라이스급 3번함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6. 주인이 바뀌었어요
건조가 착실히 진행되던 1913년, 영국과 암스트롱 사로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신규 전함을 발주한 고객인 브라질 정부가 디폴트를 해버린 것이다! 브라질은 무리한 군사경쟁과 함께,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의 한계에 봉착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상태로, 결정적으로 1913년, 발칸 전쟁 이후 불어닥친 불황으로 인해 브라질의 주요 수출 품목이던 커피와 고무, 특히 고무의 국제가격이 폭락하여 그야말로 망한 상태였다. 여기에는 말레이반도에서 영국이 경영하는 고무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브라질의 고무 독점이 깨져버린 것도 한몫했다영국 정부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고객이 돈이 없다고 배째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영국의 유력한 군수기업인 암스트롱 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를 인수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브라질에 맞춰서 다운그레이드된 것들이 전부 문제가 된 것. 보통 12인치 주포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제일 심각하게 여긴 것은 격벽이었다. 주포탑은 기존의 것을 철거하고 신형 주포탑을 바벳과 같이 이식하는 대공사를 하면 가능하지만 격벽은 갑판을 뜯어내고 내부구조를 모두 변경하면서 격벽을 처음부터 붙여야 하는데 여기까지 가면 그냥 재건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안하자니 함선의 방어력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설령 이걸 다 해서 스펙을 맞춰놔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보다 비쌀 것이 뻔했다. 전함의 건조 비용을 통째로 떼이느냐 아니면 더 비싸게 전함을 사서 수습하느냐의 답없는 선택지에 처한 것. 물론 당시의 영국 국력으로는 안 될 것도 없었지만, 영국은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군의 문민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였다. 당연히도 돈을 쥐고 있는 의회에서 돈이 많이 든다면서 딴지를 걸 것이 뻔하고, 이 돈이면 신형함 만드는 게 더 이득이니 해군 입장에선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암스트롱 사에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예산 확보 미비, 기존 군함의 관리 미비, 근대식 수병의 양성 미비 등으로 인해 187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그야말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야 해군 전력의 약화 문제를 인식한 오스만 제국은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서 1897년 그리스와 벌인 크레타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해상에서는 그리스 해군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10년 독일로부터 퇴역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브란덴부르크급 2척을 구매하였으며[3] 1911년 영국 비커스 사에게 레샤디에급 전함 2척을 발주하였다. 해당 전함은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여러가지 개수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은 '레샤디예급'이라고 불렀으며 함명은 각각 '레샤디예(Reşadiye: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5세의 별칭)'와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Fatih Sultan Mehmed)'였다.
그러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확보하였음에도 오스만 해군은 곧바로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피사급 장갑순양함 '요르요스 아베로프(Θ/Κ Γεώργιος Αβέρωφ)'를 앞세운 그리스 해군에게 또다시 털렸다. 그리고 털린 정도도 심각하여 엘리 해전과 렘노스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요르요스 아베로프 단 한 척에게 T자 전법을 허용해 큰 맘 먹고 산 브란덴부르크급 2척이 큰 피해를 입는 등 제대로 굴욕을 찍었으며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의 제해권을 내주면서 패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패전의 원인 중 하나로는 요르요스 아베로프가 후대의 중순양함과도 비교가 가능할 정도로 훌륭한 신형 장갑순양함인데 반해 브란덴부르크급 전함은 독일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중에서도 극초기형이라 주포탑은 겉보기에만 완전밀폐형이지 실제로는 얇은 후드가 붙은 포좌형 주포탑이고 후드가 너무 얇아서 소구경 속사포 따위에게 관통당할 지경이었으며 부포가 고작 88mm 급이라서 구축함 잡기에도 버거운 관계로 요르요스 아베로프의 9.2인치 (234mm) 주포와 190mm 부포의 연사를 두들겨맞고 주포와 부포가 손상당해서 전투력을 초기부터 상실한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는 그리스 해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독일이 주도한 건함 경쟁으로 인해 중고함 매물이 없었고, 시간과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대형 전함, 특히 시간과 예산을 더 많이 잡아먹는 드레드노트급을 발주하고 설계하고 건조에 들어간 뒤 진수하고 취역시키고 인도받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느닷없이 주인을 잃고 방치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알라가 내려준 축복이었다.
이에 오스만 정부는 바로 브라질 정부 및 암스트롱 사와 협상을 개시, 차관을 빌리고 성금까지 모아가며 전함 구매 예산 275만 파운드를 확보하고 이를 지불, 1914년 1월 리우데자네이루 구매 계약을 완료하였다. 구매 계약 과정도 순탄치 않았는데 해당 구매 계약이 영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국도 못 가진 최신식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러시아의 적성국인 오스만에게 판 것 자체가 영국이 같은 삼국 협상의 일원인 러시아를 엿먹이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 때문에 영국 정부가 러시아를 달래느라 상당히 애먹었다. 영국 입장에서도 애진코트를 오스만에 파는 결정이 마냥 땡잡은 상황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함명은 브라질이 명명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스만 제국이 명명한 '술탄 오스만 1세(Sultan Osman-ı Evvel)'로 바뀌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를 팔아치운 브라질은 또 다른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암스트롱 사에게 의뢰했고 암스트롱 사는 '히아셸루(Riachuelo)'라는 이름의 새 전함의 건조를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결국 계약이 취소되었다.
건조는 착실히 진행되었고, 해가 바뀌어 1914년 여름 오스만 제국은 엄선한 정예 해군요원들을 영국에 파견했다. 술탄 오스만 1세와 기존에 주문한 레샤디예급 1번함 레샤디예, 2척을 인도받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근대적인 신형 전함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스만 제국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반면 주변국, 특히 그리스는 오스만이 자신들보다 먼저 드레드노트급 전함, 그것도 초드레드노트급과 거의 동급의 전함을 확보했다는 사실에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리스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그리스는 독일에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살라미스(Θ/Κ Σαλαμίς)'를 발주하였으며(다만 건조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결국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으로부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며 12인치 2연장 주포탑 2기를 장비한 미시시피급 전함 2척인 '미시시피(USS Mississippi (BB-23))', '아이다호(USS Idaho (BB-24))'를 도입했다. 그리고 이들 2척은 각각 '킬키스(Θ/Κ Κιλκίς)'와 '림노스(Θ/Κ Λήμνος)'로 개명했으며 미국은 2척의 매각 대금으로 뉴멕시코급 전함 3번함 '아이다호(USS Idaho (BB-42))'를 건조했다.
그런데...
7. 주인이 또 바뀌었어요
그런데 오스만 제국 해군 장교들이 배를 인수받을 준비를 다 해놨던 1914년 여름, 유럽 정세는 어느 때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시발점으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8월 1일에는 독일이 러시아에, 그리고 8월 3일에는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전 유럽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이때 술탄 오스만 전함이 정박 중이던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맺은 삼국협상과 동시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상태였는데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동시에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독일은 건함 경쟁을 표방하며 영국 해군과 비등한 해군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었다.[4] 이런 상황을 두고 영국의 해군성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급격히 성장한 독일 해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단 1척의 전함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술탄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에게 인수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영국이 1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것이 8월 3일인데[5], 처칠은 7월 28일 당일에 보고를 듣고 이미 전쟁이 날 것을 예견하고, 즉시 해군 병력을 보내어 술탄 오스만 1세에 이미 배에 올라탄 상태였던 오스만 해군 인수요원들을 강제로 내보내고 배를 점거, 영국 해군기를 게양하더니 해군 선적에 편입시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뱃삯을 전부 다 지불한 상태였다. 당연히 오스만 해군은 이에 격분하면서 강력히 반발하여 항의했으나, 처칠은 쿨하게 "그까이거 돈 주면 될 거 아님?" 하면서 대여비로 하루당 1000 파운드를 제안했다.
하지만 오스만이 지불한 전함 구매 비용만 해도 275만 파운드였다. 당장 단순계산상으로 따져보자면 일당 1천파운드로 275만 파운드를 뽑으려면 약 7.5년이 걸리는데, 단순한 대금 문제를 떠나서 전함 두 척의 인도 지연으로 인한 전력 공백을 생각하면 오스만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원금을 일시불로 반납했어도 문제가 될 상황인데, 성금까지 모아서 간신히 산 전함 값의 0.3%를 대여료랍시고 주면서 날먹하려 한 것이니 달리 말하면 이거나 먹고 꺼지라고 완곡하게 말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고, 후술할 상황까지 보면 그냥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처칠은 단순히 배가 필요해서 뺏은 것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세계 대전이 터진 상황에서 잠재적 적국인 오스만에 전함을 넘길 수 없다." 라는 의지로 배를 압류한 거라서 오스만의 항의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영국은 사양에 맞춘 전함을 이미 롤 아웃한 데다가, 과거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각각 오스만을 지원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얻은 것은 거의 없었고 독일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요새화한 뒤 실질적으로 강점한 상태였고, 파디샤의 황궁에 당장 군사 고문단을 집어넣어서 총부리를 들이밀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처칠의 생각에는 오스만은 받아먹은 만큼 뱉어낸 적이 없는 상대인데, 동맹국은 어림도 없으며, 독일의 군사력이 뻗치고 있으니 전쟁 동안 중립국이 될 상대도 절대 아니라고 보았던 것.
그러나 당시의 오스만은 친독파와 친영파가 갈라져서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으로, 완전히 독일의 잠재적인 동맹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오스만 여론이 급격히 친독으로 기운 것은 전적으로 처칠의 전함 강탈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오스만 제국은 파디샤가 지배하는 나라였으므로 파디샤가 중립을 강력히 표방하면서 찍어누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상황을 보고 있던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마침 영국 해군에게 추적당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숨어있던 독일 제국 해군의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SMS Goeben)',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 '브레슬라우(SMS Breslau)' 함과 그 승조원들을 오스만 제국에 선물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괴벤 함은 '야부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 브레슬라우는 '미딜리(Midilli)[6]'라는 함명으로 정식 오스만 해군 전함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인들이 군함을 다뤘고, 이들의 함포는 코스탄티니예 황궁을 겨누는 상황인지라 오스만은 그저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처칠의 행동으로 인해 여론이 반영친독 쪽으로 기울었음에도 메흐메트 5세는 여전히 중립을 지키려고 시도하였다. 애초에 크림 전쟁 이후부터 대규모 전쟁을 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 오스만 제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술탄의 저항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독일이 나섰다.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이 일방적으로 공여한 2척은 선적만 오스만으로 옮겼을 뿐 함장도 독일인, 승조원도 독일인. 지휘도 독일 해군의 지휘를 받은 사실상 독일 전함 그대로였다. 이 2척이 나머지 오스만 함대를 멋대로 이끌고 세바스토폴과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등 흑해의 러시아 항구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분노한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 이에 친독파였던 오스만의 실권자 이스마일 엔베르를 주축으로 파디샤가 지하드와 참전 선언을 하게 만들면서 오스만은 반강제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야부즈는 1971년까지 튀르키예 공화국 해군이 쓰다 퇴역시켜 최장수 순양전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1차대전 중 영국은 독일의 편으로 돌아선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자그마치 26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야 했으며 주요 전장인 서부전선에 동원한 영국군이 약 540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출용 다운그레이드 전함 2척을 얻은 대가치고는 상당히 수지타산이 안맞았다.
그리고 영국은 어떻게든 오스만을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놔둬야 했다. 오스만이 지정학적으로 미영프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만큼 만일 오스만이 아군이 된다면 오스만을 경유하여 미영프와 러시아가 연결될 수 있다. 허나 처칠의 삽질로 오스만은 적국이 되어버렸고 결국 독일 - 오헝제국 - 오스만으로 이어지는 동맹국 라인이 탄생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군전력으로는 영국 본토에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지만 흑해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잠가버려 러시아에 오는 보급들을 원천 차단했다. 독일의 양면전선의 동쪽을 담당하는 러시아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전쟁수행 능력이 떨어져 갔고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라고 요청한다. 참고로 발트해는 덴마크가 중립을 선언한 뒤 기뢰를 뿌려버려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또한 그걸 감안해도 원래 러시아의 안정적인 보급 루트는 지중해 - 흑해 루트였다.
결국 스스로 불러온 재앙으로 인해 영국은 갈리폴리 전투라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삽질을 벌여야만 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튀르키예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승전이자 영국의 굴욕이며 처칠의 감출수 없는 약점이 되었다.
사실 처칠의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아주 약간 논란이 있는 주제다.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건 처칠의 애진코트 강탈이 불법적인 외교행위였다는 것 하나다.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오스만이 자체적으로 중립 혹은 참전을 결의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었냐 여부라는 점을 알아두는 게 좋다.
그리고 갈리폴리 전투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영국은 현지 아랍인들을 포섭해서 게릴라전으로 선회했고,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에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만다. 이로 인해 '외교 말아먹었어도 그만큼 삥뜯으면 그만 아냐?' 하는 생각도 확산되어 버렸다. 1차 대전으로 알자스-로렌 + 시리아-레바논 정도나 얻은 프랑스와 달리 영국이 얻은 중동 영토는 실로 엄청난 면적이었다. 물론 그 땅 얻는다고 산화한 수십만의 장병들 목숨이나 소련의 탄생으로 영국이 위협받는 것 따위는 생각도 안하는 근시안적인 제국주의적 발상이었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큰 이득은 못보고 2차 대전 후에 도로 독립시켜야 했다.
어쨌든 1914년 8월 20일, 우여곡절 끝에 '리우데자네이루'는 '술탄 오스만 1세'를 거쳐 다시 'HMS 애진코트'로 이름을 바뀌어 정식으로 취역한다. 또한 '술탄 오스만 1세'와 같이 인수할 예정이던 레샤디예급 전함 1번함 '레샤디예' 역시 '술탄 오스만 1세'와 마찬가지로 영국한테 강탈당해 'HMS 에린'이라는 이름으로 취역한다. 그리고 2번함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는 막 건조에 들어간 상태였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건조가 취소되었고 나머지 잔해는 스크랩 처리된다.
그리고 영국은 이런 함선 매입을 칠레에게도 또 행한다. 칠레는 영국에게 알미란테 라토레급 전함(알미란테 라토레, 알미란테 코치라네)을 2척 주문했는데, 이중 1번함 알미란테 라토레는 1차대전 발발 당시 거의 완성이 다 된 상태였다. 이걸 영국이 가져간 것이다. 다만 이 때는 함선을 재매입하는 형태로 구입금을 모두 환불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함선이 캐나다급 전함이다. 2번함은 전쟁으로 인해 건조를 중단했다가 1918년에 마찬가지로 영국이 구입해서 이글급 항공모함으로 바뀌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함선 매입을 칠레의 경우처럼 제대로 돈 주는 식으로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위에 언급한 우여곡절 및 갈리폴리 전투라는 생고생을 안해도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처칠이 외교적 대응을 폭망급으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다.
8. 퇴역까지
영국 해군은 애진코트를 사용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함장과 장교 및 기간요원들은 왕실 요트인 HMY Victoria and Albert에서 차출되었으며 승조원의 상당수는 경범죄등으로 해군 영창에 가두어진 죄수들 중에서 선발되었다.운용할 인원도 모자란데 어느 정도 숙련도가 있어야 했다. 주인이 3번이나 바뀌면서 함 내부에 붙은 각종 표지와 라벨이 포르투갈어와 튀르키예어가 뒤섞인 혼란상황이었고 그걸 다시 영어로 고치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오스만 제국 승조원들을 위한 시설들을 개조했다. 대표적인 것이 오스만식 화변기를 양변기로 교체한 것이다. 그 외에도 중앙부 주포탑 2개 위를 지나가는 과선교를 철거하는 등 세세한 수정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여유가 없어서 영국만이 보유했던 사격 제원 산출 및 사격 통제 시스템인 Dreyer Fire Control Table은 설치하지 못했다.
이후 스캐퍼플로에 배치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섰으나 독일 해군이 함대결전을 회피한 관계로 실전은 딱 1번뿐인데 그 1번은 바로 세계 최대의 해전이라는 유틀란트 해전. 여기서 애진코트는 독일군 순양함들과 교전하며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 탄약고 보호를 위해 약 71톤의 고장력 강철 장갑이 탄약고 부위에 추가되었다. 1917년에서 1918년에는 76mm 대공포 2문이 갑판에 추가되고 전방 마스트에 2.7m 거리측정기가 추가되었다. 1918년에는 고각 거리계가 전방 마스트에 추가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1919년 3월에 브라질 정부에 애진코트를 다시 되팔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으며 1921년 4월에 퇴역목록에 올라갔지만 영국 해군이 애진코트를 일종의 이동식 해군기지로 만들려는 실험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1921년 11월 21일에 재취역했다.
실험 계획은 2번과 5번 주포탑은 남겨놓고 나머지 주포탑을 모조리 철거한 후 주포 바벳을 창고와 작업장으로 개조하는 것이며 추가 계획도 있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전함들을 대거 폐기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폐함 처분되었다. 15인치급 주포를 가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을 지키기 위해 12인치급이었던 애진코트는 최우선적으로 희생된 셈이다.
폐함과정도 순탄치는 않아서 1923년 1월 22일에 25000파운드의 가격으로 스크랩 업자에게 넘어갔으나 군축조약이 제시하는 폐함 이행일인 1925년 1월 17일이 다가오는데도 그냥 드라이도크에 남아있었다. 1924년 말의 시점에서 애진코트의 폐함 계획은 도크에서 꺼내서 해변으로 이동한 후 해체하는 것인데 악천후로 인해 애진코트를 이동시키는 것에 실패한 후 영국 해군성은 선체를 두조각으로 자르고 이동을 시행하며 유사시에는 도크 중 하나를 해체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였고 2일 후에 선체를 절단한 후 이동 가능한 조각은 해변으로 이동해서 해체하였으며 나머지는 도크에서 해체되었다.
9. 미디어에서
월드 오브 워쉽, 월드 오브 워쉽 블리츠등 에서 영국 5티어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한다. 월드 오브 워쉽 블리츠에서 12인치 14문의 화력은 근접전 위주의 블리츠 환경에서 꽤나 유용하다.
전함소녀에서도 등장한다.
대체역사 소설에서는 배의 기구한 운명 탓인지 주인공 세력이 영국에 말만 잘하면 쉽게 구입할수 있는 함선으로 자주 나온다. 대표적으로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작중 대한제국 해군 최초의 전함인 충무공 이순신이 된다.
판타지 대체역사소설 테메레르에서는 이 사건을 패러디한 사건이 있는데, 주인공의 전함대신 공군들이 쓰는 용알을 훔쳐간다. 다만 이때는 오스만이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용알값을 빼돌린 상황이었고 갈리폴리도 어렴풋이 암시된다.
10. 모형화
- 1/350
- Iron Shipwrights
- 1/700
- 콤브릭
- 플라이호크 모델
2019년 발매된 제품이다. 플라이호크다운 인젝션의 끝을 달리는 디테일과 적당한 가격을 보여준다. 조립성은 부품 간의 정합성 자체는 좋지만 가뜩이나 자잘한 디테일이 많은 1차 대전기 전함인데 스케일까지 작아 조립이 마냥 쉽지는 않다. 가격은 품질을 감안하면 적당한 수준이다. 전용 디테일 업 세트를 포함한 디럭스 버전과 전용 마스킹 시트, 목갑판 등도 판매한다.
[1] 주력함은 어뢰로 대잠공격을 하지 않음[2] 요즘은 osprey 사의 anatomy of ship 시리즈를 접하기 쉬워서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3] 이것도 처칠이 오스만을 불편하게 보는 데 일조했다.[4]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 해군의 규모는 당시 영국해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고, 때문에 건함경쟁은 외교적 허세라는 해석이 강하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빌헬름 2세 문서 참조. 허나 세계 2위의 대함대라는 건 사실이고, 오대양 육대주에 분산된 영국 해군과 달리 독일 해군은 모조리 북해에 몰려있으니 영국도 긴장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5] 물론 영국이 침공한 것이 아니라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인 만큼 전쟁 참전은 그 전부터 내정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6]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튀르키예어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