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6 13:43:56

알자스-로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lsace_Lorraine_departments_evolution_map-en.svg.png

프랑스어: Alsace-Lorraine (알자스-로렌)[1]
독일어: Elsaß-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1. 개요2. 왜 알자스-로렌이 중요한가?
2.1. 자원2.2. 군사적 중요성
3. 역사
3.1. 동프랑크 왕국3.2.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3.3. 프랑스의 점진적인 병합3.4. 독일 제국3.5. 제1차 세계대전 이후3.6. 종합
4. 주요 산업
4.1. 알자스(Alsace) 와인
4.1.1. 알자스 와인의 특징4.1.2. 알자스의 와인사4.1.3. 알자스 와인 AOC등급4.1.4. 알자스의 주요 와인
5. 출신 인물6. 여담

1. 개요

프랑스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의 행정 구역들.[2] 현재는 그랑테스트 레지옹에 속해 있다. 중심 도시는 스트라스부르.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한 분쟁 지역이었다. 주의할 점은 우선 알자스와 로렌은 955년 이래 분리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로렌 지방 역시 3개 가톨릭 주교령 지역과 로트링겐 공국 지역의 역사가 다르다. 때문에 밖에서는 알자스-로렌으로 통칭하고 있지만, 실제로 알자스-로렌 지역은 자세히 따지고 들면 훨씬 복잡하지만 크게 알자스, 남서부 로렌, 북서부 로렌 3개 지방으로 나뉜다. 19세기 기준으로 남서부 로렌은 사실상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었지만 알자스 지역과 북동부 로렌은 독일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20세기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직접적인 분쟁이 되고 있는 지역은 1871년 독일 제국이 병합했다가 1918년 프랑스가 다시 차지한 '독일제국령 알자스 로렌'(Imperial Territory of Alsace-Lorraine)으로, 이 지역은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93%)과 북동부 로렌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서부 로렌 지역은 제외되어 있다. 즉 1871년 독일이 가져간 알자스 로렌(독일제국령 알자스 로렌)은 알자스 로렌 전체가 아니라 전체 알자스 로렌 중에서 독일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이는 전체 알자스 로렌의 절반을 좀 넘는 크기다. 당시 독일에 합병되지 않고 프랑스에 잔류한 로렌 남서부 지역(74%)은 독일에 병합된 북동부 로렌 지역(26%)보다 훨씬 크다. '독일제국령 알자스 로렌'이라는 표현 자체가 친독일적 서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용어는 역사학계에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분쟁이 되는 알자스 로렌 지역을 지칭하는 공식적이며 중립적인 명칭이다.[3]

문제는 본 문서를 포함해서 알자스 로렌 관련 상당수 문서에 이미 프랑스화되어 독일과 프랑스의 분쟁과는 무관하게 된 남서 로렌 지방의 내용을 가져와서 내용을 혼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독일 제국 시절과 세계대전 전간기 알자스 로렌의 여론을 가져온답시고 분쟁과 무관한 이미 완전한 프랑스 국민이 된 남서 로렌 지역의 내용을 끌어와서 이것봐라 알자스 로렌 사람들이 프랑스에 우호적이고 독일에 적대적이지 않았느냐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내용이며, 사실을 완전히 곡해하는 것이다.

2. 왜 알자스-로렌이 중요한가?

2.1. 자원

라인 강과 보주 산맥 사이에 있는 알자스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주를 비롯한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고, 알자스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은 평야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 출처
간단하게 말하면 꿀땅.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의 90%가 알자스에서 채굴된다고 하니 말 다했다. 아래의 역주에서도 나오는데, 1913년 독일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독일이든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독일은 35%였지만 프랑스에는 90%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보다 프랑스의 천연자원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더더욱 절실한 땅이다. 덤으로 이곳은 이미 관련 산업시설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즉, 땅만 얻으면 저 풍부한 자원을 바로 개발된 상태로 사용 가능.

2.2. 군사적 중요성

알자스와 로렌은 유럽의 젖줄인 라인 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 라인 강과 아르덴 고원이 프랑스 동쪽을 방어하는 천혜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라인 강을 관통하는 독일의 교통로를 단절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면 라인 강을 통해 직접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링크)

즉, 독일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건너는 수고로움 없이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하고,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방어선 삼아 프랑스 지역을 방어할 수 있다.

3. 역사

알자스-로렌이 비교적 동질한 한 지역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지역이다. 고대 시대부터 약간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가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프랑크 왕국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855년 중프랑크 왕국이 3분할될 때 함께 '로타링기아 왕국'에 속했다. 그러다가 925년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알자스가 로트링겐(로렌)에서 분리되어 슈바벤 공국에 병합되었다.

오늘날 로렌(독일명 로트링겐)은 구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로렌영역의 75%)과 3개의 주교령(로렌영역의 25%)으로 구성된다.

3.1. 동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프랑크 왕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나, 그의 사후 베르됭 조약(843년)과 메르센 조약(870년)을 거치면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메르센 조약 이후 알자스-로렌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아들인 루트비히 경건왕을 거쳐 루트비히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장남인 로타리우스(로타르 1세)에게 이탈리아 를, 대머리왕 샤를에게는 서부 영지들과 아키텐을, 독일인 루도비코에게는 동부 영지를 물려주었다. 843년 프랑크 왕국 분열 당시 로타르 1세의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그의 사후 세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는데, 각각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 왕국',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 그리고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Lotharingia)'이다. 이 '로타링기아', 또는 '로트링기아'는 로타르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 지명은 중세 이후 로트링겐(로렌)의 어원이 된다. 현재의 로렌 지역은 당시 '로타링기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 '로타링기아'는 대략적으로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과 알자스-로렌, 스위스 서부, 남프랑스 그리고 북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자스-로렌는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고 이후 알자스-로렌의 역사는 동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프스 이북의 로타링기아는 동서로 분리되어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병합된다. 서로타링기아는 오늘날의 벨기에, 그리고 스위스의 서부 지역,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고, 동로타링기아는 네덜란드,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스위스를 포함한다. 룩셈부르크 및 로렌 지방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로망스어권과 게르만어권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876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동(東)로타링기아를 병합할 야욕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안더나흐(Andernach)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3세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여 패퇴하고 말았고, 서로타링기아와 동로타링기아가 재통합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게 되었으며(877년), 880년 리베몽 조약에서 이것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중세 시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로트링겐(로렌)은 독일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3.2.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

서기 899년 나이어린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동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때마침 마자르족의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동프랑크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지역 방어를 위해 독일 5대 부족 공국(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프랑켄 공국, 그리고 로트링겐 공국)의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서기 900년 로트링겐 공작이 신설되면서 로타링기아는 사실상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4]되면서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독일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독일 5대 공작들이 모여 콘라트 1세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선제후 제도의 직접적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타링기아(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 카롤링거 왕조가 다스리던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에게 충성하기 결의했다.

918년 유약했던 콘라트 1세가 사망하고 독일 제후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왕을 선출하기 위한 공작들의 회의에서 하인리히 1세는 작센 공작(하인리히 1세 본인)과 프랑켄 공작의 지지를 받았지만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지지를 받는데는 실패했다.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을 무력과 유인책을 함께 사용하여 굴복시킨 후 919년 마침내 독일의 왕을 칭했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끝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국왕 편에 붙은 로타링기아를 다시 되찾기 위해 나섰다. 결국 922년 로타링기아는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독일 왕국에 재병합되었다.

로타링기아를 재병합한 하인리히 1세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로타링기아 왕국을 925년 공식 소멸시켰다. 이전까지 중프랑크 왕국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의 지위를 칭할 수 있었던 로트링겐의 군주는 이로써 왕이라는 타이틀을 잃고 로트링겐 공작으로 격하되었다. 또 하인리히 1세는 로타링기아 왕국 폐지와 함께 로타링기아 지역의 가장 동쪽 지역(알자스)을 떼내어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켰다. 이로써 로렌(로트링겐)과 알자스가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의 역사는 따로 흘러가게 된다.

959년 로트링겐 공국이 남쪽의 상(上)로트링겐 공국(현 로렌 지역)과 북쪽의 하(下)로트링겐 공국(베네룩스 저지대)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써 로렌과 베네룩스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베네룩스 지역인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1183년 브라반트 공국이 하로트링겐 공국에서 갈려져 나왔고, 1190년 브라반트 공작[5]이 나머지 하로트링겐 영토도 모두 다스리게 되면서 하로트링겐은 브라반트 공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하로트링겐이 소멸하면서 자연스레 상로트링겐 공국이 그냥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로렌으로 이어진다.

참고로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로트링기아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다시 왕국으로 승격할 뻔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었다.[6]

3.3. 프랑스의 점진적인 병합

로트링겐(로렌) 3 주교령 획득 (1552년)
그동안 쭉 독일의 땅이었던 알자스-로렌 땅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디디게 된 것은 1552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종교 전쟁에 휩싸여 있던 와중인 1552년,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독일 신교파 제후들과 동맹(샹보르 조약)을 맺고 구교파인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여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로트링겐(로렌)에 존재하는 메츠, 베르됭, 툴 3개의 주교령을 획득했다. 이 3 주교령(전체 로렌 지역의 약 25%)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200여년 후에 병합된 나머지 로렌 지역(즉 로트링겐 공국)에 비해 빠르게 프랑스화되어 갔다. 이 3 주교령 지역은 1870년 보불전쟁 후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재합병할 때 이미 거의 완전히 프랑스어 사용지역이었고, 이때문에 당시 독일의 알자스-로렌의 완전 병합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알자스 중남부 획득 (1648년)
1648년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알자스의 중부 이하(준트가우(Sundgau) 지방. 현 프랑스 오랭(Haut-Rhin) 주)를 병합했다.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북부 알자스는 계속 신성 로마 제국에 남았다.

알자스 완전 병합 (1697년)
1683년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침공하여 제2차 빈 공방전가 일어났다. 빈 방어에 성공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주변 기독교 국가들을 포섭하여 신성 동맹을 맺고 패퇴하는 오스만을 뒤쫒으면서 대투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1683년~1698년)이 일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프랑스 루이 14세는 신성 동맹의 뒷통수를 때리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 즉 알자스 지역을 침공하여 9년 전쟁(1688~1697)을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손쉽게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했다(1697년). 로렌 동쪽의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프랑스의 영토는 로트링겐 공국을 완전히 둘러싸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 병합된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와 그 인근의 북알자스 지역은 알자스-로렌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트라스부르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근세 독일 출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알자스 지역은 라인강을 따라 상류의 스위스와 하류의 라인란트를 연결하면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어 있어 독일 경제권에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슈바벤[7]라인란트 지역과 연계성이 강했다. 때문에 알자스 지역은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독일계 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8]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을 가져간데 이어 알자스 북쪽으로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는 라인란트까지 차지해보려 했지만 다른 연합국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로트링겐 공국 병합 (1766년)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어 왕조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게르만 국가들은 살리카법의 전통에 의해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발표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비롯하여 헝가리 왕위, 보헤미아 왕위, 크로아티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순조롭게 물려받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누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전유럽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한 신랑은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이었다.

로트링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랑스는, 로트링겐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트링겐 공작 슈테판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인 로트링겐 공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요구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것이었지만, 카를 6세는 어떻게 해서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안정적으로 물려주려고 했다. 결국 카를 6세와 루이 15세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로트링겐 공국은 1736년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옛 폴란드 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9]에게 주어진 후 그의 사망 후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10] 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사가 끊긴 이탈리아토스카나 대공국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는 것을 프랑스가 용인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빼앗기게 된 프란츠 슈테판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결국 자신의 영지를 포기해야 했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하면서 로트링겐 공국은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병합된 지역은 프랑스화가 이루어졌다. 강제적인 프랑스화 정책[11]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이 되어 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까지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의 동부 지역은 여전히 독일어 방언을 모어로 사용했으며, 독일 라인강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

3.4. 독일 제국

{{{#!wiki style="color:#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북독일 연방 |} 호엔촐레른 왕가
왕국 프로이센 | 바이에른 | 작센 | 뷔르템베르크
대공국 바덴 | 헤센 | 올덴부르크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안할트 | 브라운슈바이크 | 작센코부르크고타 | 작센마이닝엔 | 작센알텐부르크
후국 리페 | 샤움부르크리페 |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 로이스게라 | 로이스그라이츠 | 발데크피르몬트
기타 함부르크 | 브레멘 | 뤼베크 | 엘자스로트링겐
}}}}}}}}} ||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두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어 사용 지역인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12]과 로렌의 일부 지역[13]이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마지막 수업의 왜곡된 현실은 해당 문서 참조.[14]

보불전쟁 직후 알자스 로렌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1870∼1880년대에는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배출한 제국의회 의원의 대부분이 독일 제국과 거리감이 있는 가톨릭계의 항의파였고, 제국 내 지위를 요구하는 자치파는 소수였다.

당시 알자스 로렌에서 이와 같은 여론 결과가 나온 것은 군국주의의 대명사였던 프로이센과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당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은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때문에 1948년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강성 이미지가 강한 프로이센 왕국 주도하의 통일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진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남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때문에 보오전쟁 이후 프로이센 주도하에 북독일연맹이 창설되었을 때 남부 독일 지역은 모두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연맹에 불참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의해 강제로 배제된 것이지만,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프로이센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에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뷔르템베르크 및 바덴과 함께 남서독일권 즉 슈바벤 지역을 구성하고 있던 알자스[15]의 여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불전쟁으로 갑작스럽게 독일 제국이 선포되면서, 갑작스레 성립된 통일 독일에 대해서 독일인들의 내부 의견은 엇갈렸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의에 대해서는 모두 찬성하지만 상술되어 있듯이 남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 못지 않은 강국인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채 이루어진 불완전한 통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알자스에 대해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는 등 알자스를 관대하게 통치하여 이들이 프랑스를 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컸기에 결국 알자스 로렌 지역은 결국 라이히슬란트(제국령)로 지정되어 1902년까지 프로이센 관료들의 통치를 받으며 효율적인 자치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에 일부 주민들은 알자스-로렌이 실질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독일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보불전쟁 패배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 프랑스에 호감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은 군복무 기간이 훨씬 짧았던 프랑스쪽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이 기간에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일령이 된 알자스 로렌에서 이주해 나간 경우도 있다.

당시 독일 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따라 알자스 로렌의 상황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알자스 로렌 지역에도 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독일 제국은 알자스의 수도 슈트라스부르크(현 스트라스부르)에 황제의 이름을 딴 카이저 빌헬름 대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독일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가 되었다. 또 독일 정부는 박물관과 도서관을 짓고 알자스와 슈트라스부르크의 문화 유산을 수집, 복원, 전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기차역 중 하나였던 슈트라스부르크 중앙역도 건설되었다. 역사 건설은 철도 수송을 중시했던 독일 참모부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1905년 알자스-로렌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스 공화정부의 교권반대 정책에 등을 돌리고 독일 제국 내에서 알자스-로렌의 자치를 얻는 것에 눈을 돌렸다. 이후 특히 1911년 헌법이 승인됨으로써 독일화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주민과 군대 간의 충돌 사건(차베른 사건[16])이 일어나고 정부에서 선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의 내정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자스 로렌에서 친프랑스적 정당과 자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지지율을 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치뤄진 마지막 선거에서 이들 정당은 매우 적은 득표를 얻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상점 약탈이나 폭행 등의 린치를 당했는데, 알자스 출신 주민들도 당연히 독일어를 모어로 쓰고 독일 국적을 가진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린치를 많이 당했다.

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내에서는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다. 알자스 로렌에서도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에서 수천명의 자유주의자와 귀환 군인들이 1918년 11월 10일 혁명을 일으켜서 슈트라스부르크의 혁명 위원회가 일시적으로 정권을 성립했다. 이들은 로렌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일도 프랑스도 아니다."는 모토를 내세웠지만, 11일 뒤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3.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일방적으로 강제 합병했다.[17] 그러나 프랑스의 합병은 주민투표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친독일계 정당이 훨씬 우세했던 알자스 로렌의 선거 결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면 알자스 로렌이 프랑스로의 합병을 찬성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특히 독일어 화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자스에서는 독일 잔류로 투표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독일계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자스 지역과 동부 로렌 지역은 실제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군에 입대하여 조국의 적인 프랑스와 싸웠던 처지였다.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반(反)하여 주민선거 없이 일방적으로 알자스 로렌을 강제 병합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대다수의 주민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던 알자스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다. 알자스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성급한 동화정책, 특히 지역의 전통적인 교회학교를 국립학교로 대체시키려는 계획과 독일어 신문을 폐간하려는 시도는 반발에 부딪쳤다. 독일어로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 사제까지 쫓아내자 또 반발이 터져 나왔다.

결국 알자스-로렌은 1920년대에 자치 운동을 전개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일에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이 책정되었고, 그 결과 독일 경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는 유사 이래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파탄 수준으로 붕괴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당시 알자스 로렌 주민들이 적극적인 독일 재합병론을 펼치는 대신 일단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주장하는 선에서 그쳤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알자스 로렌의 자치 요구가 결국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재병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 로렌의 자치권 요구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라인란트까지 합병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의 자치권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알자스 로렌의 자치권 획득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주하자, 나치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북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알자스-로렌의 젊은이들의 충성심이 약하다는 이유로 징집은 실시하지 않고 자원 입대만 받았다. 그러나 정황이 악화되자 나중에는 징집을 실시했다. 알자스-로렌에서는 징집이 아니라 자진해서 독일군에 입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래도 나오지만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로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도했던 많은 프랑스화 정책을 포기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트리는데 일조했다. 결국은 주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에선 독일군 부대에 자원 입대한 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자스-로렌 출신이 적지 않았다. 기 사예르의 경험에 따르면 부모 중 한쪽이 독일계인 사람은 처형을 당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3.6. 종합

역사적으로 주변 세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점에서 이 지역을 프랑스가 차지해 온 역사와 한국의 식민시절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이라는 형태의 국가로 각기 수백년간 서로의 영역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아왔다가 20세기 초에 겪은 식민화 경험을, 수백년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와 대립을 겪었고 여러번 영토의 주인이 바뀌기도 한 알자스-로렌에 그대로 대입시키기는 무리가 있다.[18]

외부에서는 알자스-로렌이라는 같은 지역으로 묶어서보고 있지만 두 지역은 차이가 있다. 로렌의 경우 일찍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때문에 17세기 이후 로렌은 대체로 독일보다 프랑스에 대한 동질감이 더 강한 편이었다. 반면 알자스의 경우 라인강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일권에 예속되었다. 그결과 알자스 주민들의 대다수는 20세기초까지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했고, 지금도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는 독일어에 매우 능통한 경우가 많다. 물론 로렌 지방 안에서도 달라서 메스, 베르됭 등 프랑스 본토에 가깝고 16세기에 프랑스에 병합된 지역은 매우 프랑스화의 정도가 높지만 룩셈부르크나 자를란트와 인접한 변경의 로렌 지역에서는 독일어 화자가 많은 경우도 있었다. 또 알자스에서도 남부 지역은 북부에 비해 비교적 프랑스화가 더 진전되었다.

로렌의 경우 역사적으로 친프랑스적인 경우가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유명한 잔 다르크 또한 로렌 출신으로,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근본적으로 알자스-로렌이란 행정구역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별개로 이어져 오던 몇 개의 지역을 후대에 재결합하여 탄생된 것이다.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은 둘다 동프랑크 제국와 독일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왔지만, 서로 별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로렌 지역은 로트링겐 공국과 메스, 툴, 베르됭 주교령 등을 후대에 결합하여 생성된 것인데 이들은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알자스의 경우 거의 독일어 방언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알자스 로렌에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병합된 메스 등을 비롯한 로렌 지역의 상당수는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알자스-로렌이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로렌 지역의 프랑스인들은 독일 국경 내에 묶이게 되었고 탄압으로 독일통치에 대한 반감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수백년간 프랑스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 프랑스의 역사적, 고유적, 그리고 문화적 영토의 일부였다. 이를 간파한 비스마르크는 보불전쟁 후 알자스-로렌의 병합으로 프랑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영구적인 적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고, 또 프랑스 정부도 알자스-로렌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할양을 제안하며 어떻게든 병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여기서 인도차이나는 전혀 다른 인종의 땅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몰트케와 군부의 반발로 끝내 독일로 병합되었다.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는 애초에 명분은 방어 전쟁이었는데[19] 영토합병을 하면 침략전쟁으로 변질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려했고 빌헬름 1세는 당시 영국대사에게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그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서 거리를 버는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을 정도 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까지 프랑스가 알자스-로렌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독일은 전쟁에 두 번 연달아 지면서 데꿀멍해버려 양국 학계에서 연구된바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20]

이렇듯이 역사란 보는 관점과 후대의 평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4. 주요 산업

4.1. 알자스(Alsace) 와인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이 문서는 나무위키:프로젝트/주류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와인
{{{#!folding 관련 문서 ▼ 종류 색상 화이트 와인 · 레드 와인 · 로제 와인
용도 식전주 · 테이블 와인 · 디저트 와인
발효방식 스파클링 와인(샴페인) · 귀부 와인(토카이) · 아이스 와인 · 강화 와인(마데이라 · 말라가 · 베르무트 · 셰리 · 포트)
생산지 프랑스 · 이탈리아 · 독일 · 스페인 · 포르투갈 · 칠레 · 미국 · 호주 ·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의 와인 보르도 · 부르고뉴 · 샹파뉴 · · 알자스 · 프로방스 · 랑그도크
}}} ||

파일:external/thevinofiles.typepad.com/Alsace.jpg
파일:external/insidersabroad.s3.amazonaws.com/Alsace-winery.jpg
프랑스 화이트와인의 대명사.

4.1.1. 알자스 와인의 특징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어권 문화의 접점지대였으며 본래 독일어권이었던 지역인 만큼, 타 프랑스 지역처럼 다양한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양조하며 라벨에 그 품종을 명시하는 점에서 독일/오스트리아 와인 양조 문화와 유사점이 나타난다.[21]

이 것 말고도 플뤼테(Flûte,플루트)라고 불리는 날씬한 긴 전통 와인 병과 전통 와인잔이 있는데, Vin du Rhin(라인강 와인)이라는 플뤼테의 이명처럼 독일의 라인 강 일대 와인산지에서도 같은 모양의 전통 병과 잔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라인강 건너 독일 등지에서는 통에서 갓 꺼낸 와인(Fasswein)을 판매할 수 있지만 알자스에선 법적으로 병에 담겨진 와인만을 판매할 수 있는 등의 차이가 있다. 화이트와인을 주로 생산하며 품종 또한 유사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스위트 와인 계열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에 반해 알자스의 화이트 와인은 거의 드라이 계열이란 점에서 당연히 구분점이 있다. 물론 알자스 산 스위트 와인이 없는 건 아니고 불어로 방당주 타르디브(Vendanges Tardives, VT)라고 불리는 늦은 수확 와인이나 셀렉시옹 드 그랭 노블(Selection de Grains Nobles, SGN)라고 불리는 귀부 와인이 작황에 따라 전통적으로 극소량 생산되기도 한다. 소량 생산에 생산방식이 복잡한 거라서 비싸다.

알자스가 내륙지역이라 막상 와인과 어울리는 토속 요리가 없을 것 같지만, 강을 끼고 있으므로 잉어나 송어같은 민물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있으며, 화이트 와인답지 않게 슈크루트 가르니에같은 육류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4.1.2. 알자스의 와인사

알자스의 와인 양조는 로마 이전의 시대에 켈트족에 의해서 시작된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활황기를 맞이하나 5세기의 게르만족 대이동에 의해 로마가 멸망하는 것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하여 알자스의 와인 문화는 무너진다.

그 뒤 다시금 알자스에서 와인 양조 문화가 성행하게 된 것은 수도회에 의한 것이었다. 9세기 경 그들이 기록한 문서에 따르면 160개 이상의 마을에서 와인 양조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니 이를 통해 재건 되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이것이 16세기에 이르러선 절정에 이른다.

오늘날 와인용 포도 재배 면적의 약 2배 가량의 면적에서 와인용 포도가 재배되었으며 지금도 남아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와인 관련 당시 건축물에서도 그 영광을 확인할수 있을 정도로 번영했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리크위르(Riquewihr / 독:Reichenweier)의 와인 양조자 연합회에서 자발적으로 수확시기와 사용된 품종을 명시한 라벨을 붙이는 것을 관행화하는 등 현 AOC 제도와 거의 비슷한 문화가 정교하게 자리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기는 17세기 30년 전쟁을 거치며 알자스에 기아와 페스트가 발생하고 지역이 황폐화되며 끝이 나게 된다. 사실상 모든 포도밭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40여년에 걸쳐 알자스는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되며, 혼란이 종식된 후 재차 산업 중흥에 박차가 가해진다. 19세기 초 3만 헥타르 가량의 면적에서 와인용 포도 재배가 이뤄지며 부활하였으나, 필록세라가 찾아오고 노균병이 횡행하는 시기를 거쳤고 철도의 발달로 저렴한 맥주의 소비가 대량으로 는 것에도 영향을 받았는지, 19세기 후반 알자스가 독일 제국에 강제 병합될 때에는 이것이 약 9,500 헥타르 수준으로 줄게 된다.

장기간 동안 알자스의 와인은 정립되어 있는 독일 와인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으며, 다시 프랑스로 알자스가 넘어왔음에도 그것은 현대 프랑스 와인 문화와의 결합된 모습으로서 알자스 와인 고유의 특징으로서 생산과 포도 품종 등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4.1.3. 알자스 와인 AOC등급

  • AOC Alsace / AOC Vin d’Alsace
  • AOC Alsace Grand Cru
  • AOC Crémant d’Alsace
  • AOC Klevener de Heiligenstein

4.1.4. 알자스의 주요 와인

  • Schlumberger
  • Zind-Humbrecht
  • Marcel Deiss
  • Weinbach, Hugel
  • Trimbach
  • Leon Beyer
  • Rolly Gassmann
    추가 예정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와인/프랑스 문서의 r287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5. 출신 인물

6. 여담

주민들의 성씨는 다수가 독일계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의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과 TGV 고속철이 부설된 것을 핑계로 삼아서 그랑제콜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가 파리에서 이전해 왔다. 주민들은 프랑스보다는 독일 쪽에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쪽으로 인적, 물적자원 교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교통로도 독일과 가까운 편.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자전거로 20분 밟으면 독일이다. 또한 이 지역의 철도는 일반적인 프랑스식의 좌측통행이 아닌 독일식의 우측통행이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루프트한자 리무진 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로렌 북부(모젤 데파르트망), 특히 메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룩셈부르크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룩셈부르크 국경 쪽 벨기에, 독일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의 초월적인 임금수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벨기에에 직장을 가진 경우도 꽤 있다. 이 모젤 데파르트망 지역은 대우그룹이 망하기 전까지는 대우그룹의 공장들이 원활하게 돌아갔던 지역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지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특히 벨기에 국경의 롱위 시는 이 때 당시 노동자들이 갈 곳을 잃어서 실업난이 꽤 극심했던 편이다. 이후 프랑스 물류기업들이 대거 들어오고 룩셈부르크란 대안을 찾으면서 상황은 나아진 편.

Strasbourg는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로 표기하고 있지만, 프랑스 관광청 공식 한국어 페이지에는 '스트라스부르그'라 표기되어 있다.

Metz는 프랑스어로는 '메스'이고 물론 우리나라의 프랑스어 표기법으로도 동일하지만 간혹 해외기사에 등장할 때 독일어식 발음인 '메츠'로 표기될 때가 많다.[23] 현지에서 '메츠'라고 발음하면 현지인들과 갈등 빚을 소지가 많다. 2016년 4월 7일 프랑스-독일 정상회담 기사 참고로 독일과 프랑스 두 정상 양쪽에게 있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도시가 메스이다. 파리에서 TGV로 1시간 반도 안걸리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면으로도 TGV노선이 연결되어있다. 파리에서 룩셈부르크를 갈 때도 메스를 거친 뒤 룩셈부르크로 넘어간다. 스트라스부르의 경우 독일 입장에서는 상당히 남쪽에 치우친 도시라 수도나 중심도시들과는 거리거 있는 편이며(다만, 슈투트가르트와는 가까운 편) 파리에서도 TGV 기준 2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애초에 프랑스 동부방면 TGV 노선은 파리 동역-메스-스트라스부르 순으로 지나간다.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하여 브뤼셀까지 가는 노선도 스트라스부르-메스-룩셈부르크-브뤼셀 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노선에 유럽연합 본부가 세워져있는 도시들이 무려 3곳이나 된다.[24]

알자스 사투리프랑스어의 영향인지 발음체계가 매우 독특하게 변한 것이 특징이다. 본디 독일 남부 사투리는 무성음-유성음 대립보다는 유기음-무기음 대립에 가까운데 무기음만 존재하는 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k, g구별을 제외하고 파열음 음운이 애매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p-b, t-d 구별이 안된다)[25]

알자스 지방의 알자스어뿐만 아니라 로렌 지방에도 '로렌 프랑크어'(francique lorrain)라는 사투리적인 언어가 존재한다. 다만 알자스어만큼 사용인구가 많지는 않은 편. 이외에도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한 사투리가 존재한다.

2011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지역에서 농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불공정한 거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독일 영토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해 파문이 일고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백두산을 중국 땅이라고 발언한 격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사르코지 대통령도 이민자 출신이라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프랑스의 정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계맥주 점 같은데 가면 볼 수 있는 파란색 병의 프랑스 맥주 크로넨부르크(Kronenburg, 프랑스어로는 Cronenbourg(크로넝부르))는 스트라스부르가 원산지이다. 정확히는 주변의 작은 위성도시에 양조장이 존재한다.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의 주인공이 통치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의 이름을 땄다. 다만 현실의 알자스와 달리 자원이 많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작은 변두리 지역이다.

미야자키 하야오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알자스의 소도시인 콜마르를 모티브로 하였다. 콜마르의 작은 시내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순간 바로 "아 여기가 모티브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콜마르는 지금은 독일과 프랑스 전국에서 유명해진 '크리스마스 마켓(Marché de Noël)'의 원조인 도시이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 시절 알자스에서 시작된 이 크리스마스 관련 행사가 신성로마제국의 후신인 독일과 알자스를 획득한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지금은 겨울철 독일과 프랑스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주요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위에도 언급 된 내용이지만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 Koi의 만화 주문은 토끼입니까?도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있다.

저먼 셰퍼드의 원산지이다. 다들 독일 개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원산은 여기. 심지어 영연방권에선 알자티안(Alsatian)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1]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Alsace-Moselle (알자스-모젤)로 불렀고 현재는 알자스 레지옹과 로렌 레지옹의 모젤 데파르트망이 되어있다. 로렌 레지옹은 모젤 데파르트망 이외에도 3개의 데파르트망이 더 있다.[2] 독일 제국의 일부였을 때에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여러 개의 주로 나뉘어져 있는 지역일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을 묶어서 알자스-로렌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안 부른다.[3] 당장 구글에 'Alsace-Lorraine'을 쳐보면 위키피디아에서 'The Imperial Territory of Alsace-Lorraine'이라고 나타내주고 있다.[4]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로트링겐 공작과 별도로 로타링기아 국왕 직책도 925년까지는 존재했다.[5] 현재의 벨기에 지역으로 벨기에 왕세자는 브라반트 공작이라고 불린다.[6] 이것은 발루아 왕가의 왕자로서 부르고뉴 공작(왕자령으로서 받았다)이었던 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 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작령(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프랑쉬-콩테 지역)을 정복하면서 로타링기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부르고뉴)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로타링기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 황제가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고 점령하려던 로트링겐에서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샤를이 후사 없이 전사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다. 세력을 키우던 부르고뉴와 샤를을 아니꼽게 보던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살리카 법에 따라 남자 계승자가 없으니 종속국의 영지를 회수한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 부르고뉴를 합병하면서[26]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로트링겐을 합병하려던 부르고뉴가 사라지면서 이후 로트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독립된 공국으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었다.[7] 알자스는 슈바벤 공국의 일부였다.[8] 스포츠계에서 아르센 벵거, 앙투안 그리즈만 등이 있다. 음악계에서는 에밀 발퇴펠. 샤를 뮌슈 등이 있다.[9] 루이 15세의 장인. 이 양반은 일생이 참 기구한데 대북방전쟁 당시 폴란드를 탈탈 털어버린 스웨덴 왕 칼 12세가 휴전 조건으로 왕을 갈아치우라고 요구하면서 친 스웨덴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황이 북방동맹 쪽으로 기우면서 원래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왕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알자스에 머물던 중 프랑스 왕 루이 15세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프랑스라는 강력한 지원 세력을 얻은 그는 폴란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 폴란드로 돌아와 2번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아우그스트 2세의 아들이던 아우구스트 3세가 폴란드 왕위를 주장하며 오스트리아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폴란드를 침공,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 결과 아우구스트 3세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2번째로 폴란드 왕위를 잃은 장인어른에게 사위가 "위로 겸 남은 여생을 보내시라"고 로렌을 영지로 주었다.[10] 스타니스와프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을 뿐 아들이 없었다.[11] 프랑스의 이런 정책은 지배자가 바뀌고 19세기가 될 때까지 이곳 뿐 아니라 다른 땅(프랑스가 땅을 잃은 적은 거의 없이 계속 늘려갔다)에서도 이어졌는데, 어떻게 보면 시대에 걸맞지 않은 현대 민족국가적인 면모이고, 어떻게 보면 이러면서 마지막 수업(소설) 같은 걸 퍼뜨리는 뻔뻔함이다.[12] 바랭 주 전체와 벨포르 지역을 제외한 오랭 주 전체. 벨포르는 알자스 지역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 화자가 다수인 지역었다. 또한 보불전쟁 당시 벨포르의 프랑스군은 가장 격렬한 저항을 보여주면서 영웅적인 장소로 인식되었고 군사적 요충지 대부분을 잃은 프랑스가 벨포르를 신설된 동부 국경 상의 요충지로 인식하였기에 여기는 절대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프로이센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 테리투아르 드 벨포르 주를 신설하였다.[13] 최서단 브리에 지역을 제외한 모젤 주 전역과 뫼르트 주 북쪽 3분의 1 지역, 보주 주 동북쪽 끝 지역. 여기는 로렌에서도 독일어 화자가 다수인 지역이었으며 프랑스의 주요 철산지 중 하나였기에 프로이센이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는 모젤 주와 뫼르트 주를 폐지한 후 두 지역을 통합해 뫼르트에모젤 주를 신설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에 잔류한 브리에 지역에서 거대한 철광이 발견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가 모젤 주 전체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은 것을 엄청 후회했다고.[14] 알자스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했던 정황은 마지막 수업의 내용에도 여실히 드러나긴 한다.[15] 알자스는 독일 왕국 시절부터 슈바벤 공국에 속해 있었다.[16] 1913년 11월 알자스의 주민과 특히 이 지방 출신 징집병에 대한 장교의 모욕적인 언동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도시의 연대사령관은 계엄령을 실시하고 많은 주민을 병영에 감금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국내외에서는 정부 및 군당국이 조처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크게 항의하였다. 제국의회에서는 보수당을 제외한 여러 정당이 일치하여 사상 최초로 제국의 재상 불신임을 압도적 찬성으로 결의(293 대 54, 기권 4)하였으나, 황제는 재상의 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17] 독일로 넘어간 모젤 주와 뫼르트 주 일부 지역이 반환되었음에도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 주를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다. 대신 프랑스는 그 지역을 통합하여 새로운 모젤 주를 신설하였다. 독일로 넘어갔던 옛 보주 주 일부 지역은 바랭 주에 통합시켰고 테리투아르 드 벨포르 주는 원래 소속이던 오랭 주에 합병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18] 애시당초 저 지역의 역사가 한국-일본의 역사와 매치되질 않는다. 당장 알자스 지역에서 많이 쓰였던 알자스어는 독일어의 한 사투리이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역사적으로도 독일 국가의 기초가 19세기의 독일 제정 성립과 함께 확립된 것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배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19] 독일 통일을 반대하던 프랑스를 데꿀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무너져서 독일군과 독일내 여론이 이런 대가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게 되었다.[20] 독일-프랑스 공동교과서[21] 이는 비슷한 처지의 룩셈부르크 와인 역시 같다[22] 엄밀히 말하면 알자스 - 로렌 지방의 동레미 라 퓌셀이란 마을이지만, 그렇게 나열하면 아래의 인물들도 전부 출신 마을을 기록해야 하므로.[23] 프랑스어에 /ts/ 음운이 없기 때문에 그냥 /s/로 읽은게 맞다. 한국인들이 일본어 'つ'를 '쓰'로 알아듣는 거랑 비슷하다.[24] 소위 '유럽연합 3대 수도(Capitals of European Union)'로, 유럽의회의 스트라스부르, 유럽연합사법재판소의 룩셈부르크, 유럽집행위원회의 브뤼셀.[25] 출처(프랑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