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 공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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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tammesherzogtum (Stem duchy)프랑크 왕국 때 형성되었으며,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개의 주요 공국으로, 작센 공국(Sachsen), 프랑켄 공국(Franken), 슈바벤 공국(Schwaben), 바이에른 공국(Bayern), 로트링겐 공국(Lothringen)이다. 이들 5대 공국 체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제국의 하위 행정 단위 역할을 했다. 이후 황권 강화를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에 의해 작센 공국(1180년)과 하 로트링겐 공국(1190년)이 해체되면서 5대 부족 공국 체제는 해체되었다.
5대 부족 공국의 공작들은 차기 국왕 또는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원래는 단순히 공국이라고 불렸으나, 19세기 이후 후대 독일 사학자들이 고대 게르만 부족에서 중세 제후국 사이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 시대 공국들을 특정하기 위해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 상세
독일 왕국과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은 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로트링겐 등 5개의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으로 구성되었다.동프랑크 왕국 시절 왕권이 계속 약해지면서 각 부족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이 강화되었다. 899년 카롤루스 왕조 출신 마지막 국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때 마자르족과 데인족이 잇달아 쳐들어왔고, 어린 왕이 국사를 주관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대 부족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서 외침을 물리쳐야 했다. 이런 상황을 거치며 5대 부족 공국들의 자치권이 대폭 확대되었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으면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게르만족의 전통에 영향을 받아 5대 부족 대표들이 모였고, 특히 5대 부족의 대표인 공작들의 의중이 크게 작용하여 독일 국왕을 뽑았으며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 5대 부족 공국은 동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왕국을 거쳐 962년 개국한 신성 로마 제국 시대로 이어지면서 제국의 하위 행정 단위 역할을 했다.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5대 공국 이외에 튀링겐 변경백국이 존재했다. 튀링겐 변경백은 다른 백작들보다 위상이 높았고, 때때로 공작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5대 공작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1]. 튀링겐 변경백국은 독일 왕국에서 5대 공작령과 더불어 독립적인 행정 단위로 인정받았으나 튀링겐 변경백에게는 국왕 선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2]
이후 1180년, 강력한 제국과 황권을 추구했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자신의 오랜 강력한 라이벌인 작센 및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을 제압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 제후들에게 쪼개어 재분배하면서 5대 공국 체제가 해체되었고, 독일에는 영방제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2.1. 작센 공국
부족 공국으로서 작센 공국은 현재 독일의 작센 주와는 다른 지역이었으며,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 주와 홀슈타인, 그리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북부에 해당했다. 즉 1180년 이전의 작센은 독일 왕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던 지역이었다. 독일의 5대 부족 중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고 있었고, 때문에 발트해나 북해로의 진출과 무역이 활발했다.참고로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그 색슨족이 바로 이 작센족이다. 5세기경 작센족(색슨족)이 브리타니아[3]를 침공한 것도 바로 북해 연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작센족은 작센 왕국을 세웠고, 다른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다.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는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772년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이단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작센 왕국을 침공하여 근 40년간 지속된 작센과 프랑크의 처절하고 잔혹했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롤루스는 이단을 처단한다면서 점령한 작센 지역에서 학살을 일삼았고, 작센인들은 카롤루스의 군대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전쟁으로 작센의 인구가 크게 감소할 정도였는데, 결국 810년 마지막 항쟁이 실패하면서 작센은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프랑크 왕국에 합병된 후, 슬라브족과 노르드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작센 백작 리우돌프가 850년 작센 공작이 되어 훗날 오토 왕조로 이어지는 리우돌핑 가문의 시조가 된다.
900년 동프랑크 왕국이 사실상 5개의 부족 공국들의 연합 왕국 체제로 전환된 시점에서 작센 공국의 리우돌핑 가문이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지지고 있었다. 911년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사망하여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5대 부족 대표들이 모여 차기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는데,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가장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으나 하인리히 1세는 연장자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후 하인리히 1세는 마침 아들이 없었던 콘라트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919년에 독일 국왕에 올라 오토 왕조(작센 왕조)를 개창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 1세는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이후 작센 공국을 빌룽 가문에 하사했으나, 오토 왕조는 여전히 작센 공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작센 공작은 주플린부르크 가문, 벨프 가문, 아스카니아 가문[4] 등을 거쳤다.
작센 공국의 전성기는 12세기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 시절이었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엘베강 동쪽으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여 동방의 슬라브 영토로 진출, 메클렌부르크과 포메른 공국을 정벌하고, 속국화시켜 그곳에 여러 도시를 건설했으며 독일 식민 정책을 추진했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1154년 남부의 바이에른 공국까지 지배하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보다도 훨씬 넓은 영지를 보유하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황제와 사자공은 거의 일평생에 걸친 권력 싸움을 이어갔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사자공의 반대 세력을 결집한 끝에 1180년 사자공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재분배하였다. 이로써 부족 공국으로서의 작센 공국은 해체되었다(1180년).
이 조치로 인하여 벨프 가문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브라운슈바이크 일대의 사유지만을 간신히 보전했으나, 1235년 제국의회에서 바르바로사 황제의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해주면서 돌려받은 일부 영지를 벨프 가문의 사유지와 합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으로 재편하는 방식으로 복귀했다. 이 지역은 하노버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을 거쳐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가 되었다.
한편 작센이라는 명칭이 워낙 유서 깊은 이름인지라 한때 작센 공국을 지배해봤던 안할트의 아스카니아 가문이 13세기에 작센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작센계 아스카니아 가문이 단절된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을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수여하여 베틴 가문이 작센 선제후가 되었고 마이센 변경백국이 작센 선제후국이 되어 작센 왕국을 거쳐 오늘날 독일 작센 주로 이어지고 있으나, 이 당시 아스카니아 가문의 영지는 1180년 이전 구(舊) 작센 공국(~1180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비텐베르크 일대였고, 현재 작센 주 홈페이지도 비텐베르크 시절을 작센주 1,000년 역사의 시작으로 표기하여 부족 공국 시절까지 역사가 이어진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2.2. 바이에른 공국
바이에른 공국은 현재 독일 바이에른 주의 중남부, 현재 오스트리아의 전 지역과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슬로베니아 등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던 부족 공국이었다. 바이에른의 공작들은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 제위를 차지한 작센 공국 출신의 오토 왕조의 황제들과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황제와의 경쟁에서 대체로 패배하고 말았고, 때문에 오토 왕조 출신 황제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 티롤 백국 등이 차례로 분리당하면서 바이에른은 남쪽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오토 왕조는 바이에른 공국 자체를 접수했다.바이에른 공작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오토 왕조는 단절되었고, 바이에른도 다른 가문에게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벨프 가문이 이 바이에른 공국을 차지하였다.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은 남부의 바이에른과 북부의 작센을 동시에 차지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보다도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나 황제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인 끝에 1180년 최종적으로 황제에게 패하면서 작센의 조그마한 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사자공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자신의 측근들에게 재분배했는데, 바이에른 공국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 1세에게 떨어졌고, 이때부터 유서 깊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180년 바르바로사 황제가 사자공의 영지를 조각내어 재분배한 것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부족 공국 체제 자체가 해체되고 말았다. 이때 작센 공국, 프랑켄 공국 등은 아예 공중 분해되었지만 그래도 바이에른 공국은 비교적 온전히 비텔스바흐 가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2.3. 슈바벤 공국
슈바벤은 로마 제국이 '알레마니아'라 불렀던 지역으로, 현재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는 독일어권 스위스, 알자스, 바이에른의 서부 지역(아우크스부르크 이서 지역), 오스트리아 티롤의 서부 지역 등을 포함한 영역이었다. 슈바벤은 최소한 3세기 이전에 마인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슈바벤족(알레마니족)이 처음 역사에 기록된 것은 213년 카라칼라 황제 시절 세베루스 왕조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부터였다. 이후 4~5세기에는 독립된 왕국을 이루다가 5세기 말에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국왕 클로비스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크 왕국에 귀속되면서 슈바벤 공국이 되었다. 하지만 클로비스 1세 사후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으로 쪼개어지고 약화되면서, 슈바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반독립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되었고, 독립을 위한 반란도 여러차례 일으켰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이 카롤루스 왕조로 교체되고 카롤루스 대제가 등장하면서 다시 프랑크 왕국으로의 예속이 강화되었다.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슈바벤 공국은 동프랑크 왕국을 거쳐 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슈바벤 공국은 이웃한 프랑켄 공국과 비슷하게 여러 가문들이 영지를 나눠 차지하게 되면서 슈바벤 공작의 지위는 점차 약해졌다. 11세기 경 슈바벤 공국 내에서 강력했던 세력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체링겐 가문 등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가문 중 상당수는 나중에 제위에 오르면서 황실이 되었지만 11세기 당시에는 다들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한편 체링겐 가문이 다스리던 바덴 지역이 1112년 바덴 변경백국으로 분리되어 나가면서 슈바벤 공국의 범위는 더욱 줄어들었다.
1079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슈바벤 공국을 차지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12세기 콘라트 3세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였지만, 이 가문 출신 황제들은 이탈리아 경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장기간 독일을 비웠고, 이로 인해 슈바벤 지역에서는 황제에 대항하는 유달리 자주 일어났다. 이후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시칠리아 왕위까지 차지하자 황제들이 아예 기후도 좋고, 이탈리아를 도모하기에 좋은 시칠리아에 눌러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슈바벤 지역에서는 더욱 반황제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결국 이러한 반란들과 교황의 견제, 그리고 가문의 내분 등이 겹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급속히 몰락했으며, 제국은 대공위시대에 접어들었다. 대공위시대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 당주였던 소년왕 콘라딘이 카페 왕조의 방계인 앙주의 샤를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1266년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콘라딘이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앙주의 샤를에게 패배해 참수당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단절되었고, 저당잡혀 있었던 슈바벤 공국이 여러 제후들에게 분할되면서 슈바벤 공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헤체된 슈바벤 공국은 여러 제후 가문이 접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 뷔르템베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이 두드러졌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슈바벤 남부의 스위스 지역을 비롯하여 슈바벤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하는데 성공했다. 때마침 대공위 시대가 끝나면서 독일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백작 출신 루돌프 1세는 슈바벤 공작 작위를 차지하여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슈바벤이 여러 가문에 의해 쪼개져 있는지라 슈바벤 공작 작위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게다가 슈바벤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스위스가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은 결정타였다.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약 25년간에 걸친 항쟁 끝에 1315년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였다. 스위스가 독립하자 슈바벤에서 합스부르크의 영지는 크게 줄어들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1313년 슈바벤 공작 작위를 스스로 폐지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많은 월경지로 쪼개진 슈바벤 영지에 관심을 잃고, 대신 새로 획득한 동부의 오스트리아 공국을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
1315년 스위스가 독립해 나간 이후 남은 슈바벤 영토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하게 된 가문은 뷔르템베르크 가문이었다. 1083년 슈바벤의 중심지역인 슈투트가르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뷔르템베르크 백국은 1495년 뷔르템베르크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500년~1512년의 제국 개혁으로 제국 관구가 생길 때 슈바벤 지역은 '슈바벤 관구'로 지정되었다.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힘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 지역은 슈바벤 대신 뷔르템베르크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독일에서 프랑스 제1제국과 인접해 있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굴복한 후 그에게 협력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폴레옹에 의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구(舊) 슈바벤 지역에 잔존해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 대부분이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빈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월경지 반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관리가 어렵다면서 쿨하게 포기해버리고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옛 영토를 가져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창설하면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합스부르크 월경지의 점유를 인정받아 구(舊) 슈바벤 지역의 영토를 거의 통일하였지만 동쪽의 일부 영토는 바이에른 왕국에게 할양했다.
2.4. 로트링겐 공국
'로타링기아'는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과 로렌, 라인란트의 라인강 이서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프랑크족의 원거주지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프랑크 왕국 시절 왕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다. 특히 카롤루스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 시조인 피핀 3세가 아헨에 궁전을 건설하고, 카롤루스 대제가 이곳에서 통치하면서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3분할되었고,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중프랑크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하자 중프랑크는 그의 세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는데, 각각 루도비쿠스 2세의 '이탈리아 왕국',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 그리고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이었다. 이 중 '로타링기아'는 '로타르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 지명은 이후 로트링겐(로렌)의 어원이 된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로타링기아는 일시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어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다가 876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샤를 2세가 동(東)로타링기아까지 차지할 야욕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안더나흐(Andernach)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3세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여 패퇴하면서 서로타링기아마저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다(880년). 이로서 중세 시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로타링기아(로트링겐)는 동프랑크 왕국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900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의 섭정)이 로트링겐 공작을 임명하면서 로트링겐은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독일의 5대 부족 공국의 일원이 되었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이에 5대 부족 공작들이 모여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서프랑크 국왕 단순왕 샤를 3세가 자신이 카롤루스 왕조의 적통임을 내세워 동프랑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로타링기아를 침공했다. 이에 콘라트 1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로타링기아(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카롤루스 왕조에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서프랑크 왕국으로의 병합을 결의했다.
그러나 922년 서프랑크에서 로베르 1세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단순왕 샤를 3세가 프랑크 왕에서 폐위되었다. 이에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는 로트링겐을 탈환하기 위해 923년 로트링겐을 침공하여 924년 10월경 로트링겐을 완전히 재병합했다. 하인리히 1세는 로트링겐 수복 전쟁에서 공을 세운 슈바벤 공작에게 로트링겐에서 알자스를 떼내어 증여했다(925년). 이때부터 알자스는 로트링겐에서 분리되어 슈바벤에 병합되어 별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한편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패배한 단순왕 샤를 3세가 포로로 감금되고,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라울이 새 국왕으로 옹립되었는데, 실권은 쿠데타 세력들이 가지고 있었고, 국왕 라울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로트링겐 공작 길베르트가 더많은 자치권을 누리기 위해 왕권이 허약한 서프랑크 왕국으로 재병합되길 원했다. 936년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마침내 길베르트는 서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새로 독일 국왕에 즉위한 오토 1세가 이를 진압했다.
953년 로트링겐 공작 콘라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로트링겐 공국과 슈바벤 공국에 마자르족까지 연합한 엄청난 대규모 반란이었다. 하지만 오토 1세는 중과부적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놀라운 승리를 일궈냈다. 이 승리로 그동안 유럽을 유린하던 마자르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이 승리는 중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업적은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란을 평정한 오토 1세는 959년 로트링겐 공국을 두 개로 분할했는데 오늘날의 로렌 지역은 상(上) 로트링겐 공국(Duchy of Upper Lorraine), 저지대 지역은 하(下) 로트링겐 공국(Duchy of Lower Lorraine)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하 로트링겐 공국은 브라반트 공국, 림뷔르흐 공국 등 여러 개의 개별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로 분할되어 갔고, 느슨한 연맹체로 존재하다가, 황권 강화를 위해 부족 공국을 해체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1190년 사실상 해체되었다.
1190년 하 로트링겐 공국이 소멸하면서 로렌 지방에 위치한 상 로트링겐 공국은 자연스레 로트링겐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트링겐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로 남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 왕국과도 통혼하면서 점차 프랑스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로트링겐의 공작들은 프랑스 또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통혼을 하였는데, 각 공작들은 자신의 외가가 프랑스냐 독일이냐에 따라 가각 친프랑스, 친신성로마제국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프랑스 왕국은 역사적으로 항상 국경 바깥에 있는 플렌더런, 로트링겐, 알자스, 부르군트에 영향력을 뻗치며 병합의 야욕을 보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야욕이 노골화될수록 로트링겐 공작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더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루이 14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로트링겐을 병합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로트링겐을 침공한자 로트링겐 공작들은 아예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피신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투르크와 양면전을 불사하며 로트링겐에서 프랑스를 물리쳐주었고, 이후 로트링겐 공작들은 빈에 장기거주하며 황제군 장성으로 복무하는 등 신성 로마 제국의 충실한 제후가 되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과 여러 차례 통혼도 하는 등 합스부르크 가문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되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가 끊기게 생기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가 데릴 사위로 삼을 집안으로 로트링겐 가문을 1순위에 놓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혈연적으로 폐쇄적인 가문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1736년 로트링겐 가문의 후계자인 프랑수아[5]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극렬히 반발하는 프랑스를 달리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로트링겐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이후 로트링겐(로렌)은 오랜 기간 독일과 프랑스 간 분쟁지대로 남아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완전히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한편 하 로트링겐 공국에서 이어진 브라반트 공국을 비롯한 저지대 지역은 여러 영방 제후 가문들이 들어섰다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 의해 대부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영토로 통합되었다. 필리프의 아들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 중 무남독녀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만 남기고 전사하면서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에 의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령이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손자 카를 5세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이 지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되었다. 이후 북부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거쳐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한편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했고, 남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6]로 남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로 이관되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가 차지한 후 빈 회의때는 네덜란드에 합쳐졌다가 결국 1830년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로 독립했다.
카롤루스 왕조 시절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로타링기아 왕국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고, 로트링겐 공국의 분할 이후에는 하 로트링겐 공국에 속했다. 936년 독일 왕국의 국왕이 된 오토 1세는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가 주관하는 독일왕 대관식을 가졌다. 이 전통은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고 나서도 이어져 1531년 페르디난트 1세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독일왕들이 아헨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하지만 카를 5세를 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교황 대관식 전통이 사라지고, 페르디난트 1세 때부터는 본격적인 선출 황제로 전환되었다.[7] 페르디난트 1세는 아헨에서 독일왕 대관식을 가진 후 로마가 아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고, 페르디난트 1세의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아헨에서의 독일왕 즉위식은 폐지되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마인츠 대주교가 주관하는 황제 대관식만 가지게 되었다.
2.5. 프랑켄 공국
프랑켄 공국은 독일의 중부에 있었던 공국으로 대체로 오늘날의 헤센 전 지역을 중심으로 바이에른의 북부, 그리고 튀링겐,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일부 등을 포함한 지역이었다.프랑켄 공국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지리적 특성상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때문에 5대 부족 공국 중 가장 빠르게 해체되어 갔다. 잘리어 왕조 출신 황제인 콘라트 2세가 지배하기도 했으나 1039년 콘라트 2세 사후 영지가 분할되면서 프랑켄 공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2세기에 이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슈파이어 등의 도시가 자유도시로 독립해 나갔다. 이후 이 일대의 안스바흐, 바이로이트 등지에 영지를 가졌던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된 이후 멀리 떨어진 고향땅을 관리하기 위해 프랑켄 공작을 칭하기도 했으나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가 뉘른베르크와의 전투에서 패하며 유명무실한 작위가 되었다.
[1] 그 이유는 본 문서 첫머리의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로트링겐의 5개 부족 공국 영역을 합치면 그게 동프랑크 왕국의 영역이고, 이 동프랑크 왕국의 영역이 바로 중세 초중기 게르만족의 영역이다. 저보다 더 동쪽에 있는 영역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지역이라고 해도 동방식민운동 등으로 나중에 게르만족이 진출한 영역이거나, 아니면 아예 게르만족이 아닌 서슬라브인이 주류인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프랑크 왕국 시절 기준으로는 튀링겐이 게르만족 영역의 동쪽 경계에 있었으니 일찍부터 변경백령국의 지위를 얻었던 것이고, 이후 새로 성립된 변경백국들은 튀링겐보다 더 동쪽에 위치했다. 영토 크기만 봐도 5대 부족공국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 다섯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행정 단위인데다 군사적 요충지인 변경백령으로써 '선거후인 공작들보다는 낮지만 다른 백작들보다는 높은' 특별한 위상을 인정받은 것이다.[2] 이후 마이센 변경백이었던 베틴 가문이 튀링겐 계승 전쟁을 거쳐 튀링겐 변경백국을 상속받은 후, 작센-비텐베르크 공국까지 받아 작센 선제후가 되면서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계가 튀링겐 방백을 겸하며 작센 선제후로서 선출권을 행사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군연합 개념으로 튀링겐을 통치한 것이지 튀링겐 방백에게 선출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슈말칼덴 전쟁으로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작센 선제후직을 박탈당하면서 이조차도 사라졌다.[3] 이 무렵에는 잉글랜드 왕국은 물론 앵글로색슨 7왕국도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4] 안할트의 통치 가문으로 호엔촐레른 가문 이전 브란덴부르크를 통치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이 가문 출신.[5] 로트링겐 가문은 특히 17~18세기 무렵 신성 로마 제국 쪽과 많이 통혼하였으며 그 결과 여러 공작들이 모국어로 독일어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프랑수아는 어머니가 프랑스 왕가 쪽이라 모국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개인적으로도 프랑스 문화를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7] 엄밀히 말하면 선출 황제 전환은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선언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갈등으로 로마에 가지 못해 트리엔트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