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0 23:36:48

콘라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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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rad II
가문 잘리어 왕조
생몰년도 990년 ~ 1039년 6월 4일 (49세)
출생지 로트링겐 공국 슈파이어
사망지 로트링겐 공국 위트레흐트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027년 3월 26일 ~ 1039년 6월 4일
독일 국왕 1024년 9월 8일 ~ 1039년 6월 4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026년 3월 31일 ~ 1039년 6월 4일
부르군트 국왕 1032년 9월 6일 ~ 1039년 6월 4일

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1. 개요

독일어: Konrad II. (콘라트 2세)
이탈리아어: Corrado II (코라도 2세)
라틴어: Conradus II (콘라두스 2세)

잘리어 왕조 출신의 첫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아버지의 몰락과 이른 죽음으로 귀족이라 하기도 힘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결단력과 탁월한 대인 관계를 바탕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잘리어 왕조를 개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콘라트 2세는 재위 동안에 신성 로마 제국이 독자 생존이 가능한 국가임을 입증했다. 제국의 생존은 더이상 귀족들과 군주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2. 즉위 전

콘라트 2세는 잘리어 가문의 슈파이어 백작 하인리히의 아들이었으며, 오토 1세의 딸 리우르가르트와 프랑켄 가문 출신 콘라트 적왕의 증손이었다. 잘리어 가문은 케른텐 공작과 슈파이어 백작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콘라트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동생에게 케른텐 공국의 계승권을 빼앗기고 슈파이어 백작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콘라트의 유년기는 불우하여 귀족이라 말하기 힘든 환경에서 자랐다. 케른텐 공작 계승권을 박탈당한 데다가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모친이 재혼을 하여 숙부인 교황 그레고리오 5세 또는 보름스의 주교인 부트하르트에 의해 양육되면서 정식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자라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일찍 성숙했고, 자신과 아버지가 당한 박탈을 뼈저리게 의식했다. 그는 신중하다고 평판이 났고, 동시에 대인 관계에 능했다.

1016년에 그는 미망인이 된 슈바벤 공작부인인 기셀라와 결혼했는데, 양쪽 다 카를 대제로부터 내려온 혈통이었다. 이에 엄격한 교회의 법학자들과 교황청은 이 결혼을 반대했고, 이 결혼으로 콘라트의 세력이 확장될 것을 경계하고 있던 황제 하인리히 2세가 교회의 반대를 구실고 콘라트에게 잠시 망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딸 마틸다는 나중에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첫 부인이 된다.

3. 즉위 후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라인 강 주변과 오펜하임 마을 맞은편에 있는 캄바에서 왕위 선출 회의가 소집되었다. 하인리히 2세의 친척들도 있었지만 세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선거에 출마하는 이가 없었다. 콘라트는 후보자 자격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콘라트 2세의 작위와 영지는 대단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제후들을 매료시켜 유력한 경쟁자인 잘리어 가문의 또다른 콘라트를 누르고 왕으로 선출되어 1024년 9월 마인츠에서 왕관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오토 왕조가 단절되고 잘리어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모든 유럽하인리히 2세의 시대에 부적절한 결례를 범했던 선제후들이 책략을 꾸밀 것이라고 추측했다. 같은 해에 콘라트 2세는 슈파이어 대성당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주교들은 1025년 6월 콘스탄츠에 있는 콘라트 2세의 궁정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속세 제후들은 대신 아키텐의 빌헬름 5세를 왕으로 내세웠다. 1026년 콘라트는 아리베르토 대주교가 있는 밀라노를 방문하여 그에게 이탈리아의 왕관을 받았다. 그리고 콘라트 2세가 로마에 도착해 도시들의 반발을 극복한 다음에 1027년에는 교황 요한 19세가 그를 예수부활대축일황제로 선출했다.

그는 작센에서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법령을 정식으로 확정했으며 롬바르디아를 위한 새로운 헌법을 발행했다. 1028년에 아헨에서 그는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고 성유를 발라주었다. 하인리히는 군힐다와 결혼했고 콘라트 2세는 크누트에게 북독일 일부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폴란드와의 전쟁(1028~1030)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031년에 키예프 대공국과 연합하여 폴란드 왕 미에슈코 2세와 아들 볼레슬라우스를 압박했다. 그의 목적은 평화를 이루고 하인리히 2세 때 볼레슬라우스가 정복했던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미에슈코 2세는 결국 그의 왕 직함을 포기하고 나머지 치세를 폴란드 공작, 콘라트 2세의 봉신이 되어 보내야 했다.

1029년에 바이에른의 국경에서 헝가리의 왕 슈테판 1세와의 좋은 관계를 해치는 충돌이 일어났다. 1년 뒤 콘라트 2세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게 된다. 헝가리인들은 초토화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콘라트는 어떻게든 비기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빈에서 결국 헝가리 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콘라트 2세는 국경의 일부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해야 했다.

1032년에 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3세가 죽었다. 콘라트 2세는 하인리히 2세가 전에 유산을 강탈했던 것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