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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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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리어 왕조 주플린부르크 왕조
콘라트 2세 하인리히 3세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5세 로타르 3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벨프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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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스바흐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루트비히 4세 카를 4세 지기스문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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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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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스바흐 왕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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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슬라우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대립왕] 막시밀리안 1세 카를 1세
합스부르크 왕조
프리드리히 5세
알브레히트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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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5세 알브레히트 7세
페르디난트 2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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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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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2세 }}}
[대립왕]: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대공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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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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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2세 페리 1세 페리 2세 티에보 1세 마티외 2세
페리 3세 티에보 2세 페리 4세 라울 장 1세
메츠 왕조 앙주 발루아 왕조 로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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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 발루아 왕조
르네 1세
로렌 왕조
앙투안 프랑수아 1세 샤를 3세 앙리 2세 니콜
프랑수아 2세 샤를 4세 니콜라 2세 샤를 4세 샤를 5세
로렌 왕조 레슈친스키 왕조
레오폴드 프랑수아 3세 스타니슬라스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초대 황제
프란츠 1세
Franz I
파일:Martin_van_Meytens_006.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프랑수아 에티엔
François Étienne
출생 1708년 12월 8일
로렌 공국 낭시
사망 1765년 8월 18일 (향년 56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 궁전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1745년 9월 13일 ~ 1765년 8월 18일
오스트리아 대공
1740년 11월 21일 ~ 1765년 8월 18일
토스카나 대공
1740년 11월 21일 ~ 1765년 8월 18일
로렌 공작
1729년 3월 27일 ~ 1737년 7월 9일
서명 파일:프란츠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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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마리아 테레지아 (1736년 결혼)
자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1], 막시밀리안 프란츠[2]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
형제 레오폴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루이즈 크리스틴, 마리 가브리엘 샤를로트, 루이, 조제핀 가브리엘, 가브리엘 루이즈, 레오폴드 클레망, 엘레오노르, 엘리자베트 테레즈, 샤를 알렉상드르, 안 샤를로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기 (로렌 공국)
2.1.1. 로렌의 프랑수아 에티엔2.1.2.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2.1.3. 로렌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할양하다2.1.4. 토스카나 대공이 되다2.1.5. 남동생과 처제의 결혼
2.2. 중기 ~ 후기 (합스부르크 제국)
2.2.1. 이름뿐인 황제 프란츠 1세2.2.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시조2.2.3. 죽음
3. 남편, 아버지로서4. 능력5. 취미6. 가족
6.1. 조상6.2. 자녀

1. 개요

로렌 공국 공작[3]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합스부르크 제국데릴사위. 합스부르크 가문과 본토 오스트리아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남편으로 가장 유명하다.

아내와 공동 대공으로 즉위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지만 황권 행사가 극도로 제한된 제국에서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불가능했고, 합스부르크 세습령 통치에 필요한 작위와 영토는 모두 아내가 가지고 있었으며 실권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과 로렌 공국을 포기하는 대가로 장인 카를 6세에게 선물받은 토스카나 대공국도 대리인만 보내놓고 방치했다. 초창기 몇 차례를 제외하면 국사에 개입하지 않고 실질적 통치자인 아내를 보좌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왕 메리 1세의 남편이었지만 본국 스페인 국왕이면서 잉글랜드의 공동 왕으로 즉위하여 양국 모두에 실권도 행사한 펠리페 2세와 대비된다. 한 마디로 그는 '이름뿐인' 황제였고 실제 역할은 사실상 여왕을 내조하는 부군이자 국서였다.

이 외에도 테셴 공작[4], 토스카나 대공[5], 오스트리아 대공[6], 기타 칼라브리아 백작, 팔켄슈타인 백작[7] 등의 작위도 있으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작위가 적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인 아내의 부군 자격으로 얻어서 아내와 공동 재위였다.

결혼 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서쪽 끝 프랑스와의 경계에 위치한 오랜 부족 공국의 후예 로트링겐/로렌과 바(Bar)의 공작 프랑수아/프란츠 3세(François III Étienne de Lorraine / Franz III. Herzog von Lothringen und Bar)였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딸이자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담이 오가면서 단숨에 신분 상승하고 인생을 역전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로트링겐/로렌 공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며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어떻게 해서든 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고 싶었던 카를 6세는 로렌 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획득하는 조건으로 동의를 얻어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을 거쳐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고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황제로 즉위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8], 테셴 여공작 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제36대 총독 마리아 크리스티나,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아말리아나폴리-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프랑스 왕국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버지다.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2세의 할아버지/처조부이며 그의 후처이자 사촌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외할아버지/시할아버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장 카를 루트비히의 할아버지. 프랑스 제1제국 제2대 황후 마리 루이즈의 증조부이며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처증조부이자 로마왕 나폴레옹 2세의 증조부이며 프란츠 1세의 후임을 이은 페르디난트 1세프란츠 카를 대공의 증조부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고조부이자 루돌프 황태자의 현조부. 그리고 오스트리아 역사상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직계 6대조이자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직계 7대조.

2. 생애

2.1. 초기 (로렌 공국)

2.1.1. 로렌의 프랑수아 에티엔

1708년 12월 8일프랑스의 동부에 위치한 로렌 공국 낭시에서 로렌과 바의 공작 레오폴드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프랑스어 이름인 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렌(François Étienne de Lorraine)이었다.

로렌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이면서 프랑스 왕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바 공국은 프랑스 왕국의 권역이었다. 로렌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동프랑크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부족 공국이었기 때문에 로렌 가문은 타국의 왕족과 동등결혼이 가능했다. 프랑스 궁정에서도 발루아 왕조 시절부터 로렌 가문 분가인 기즈 가문,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가문들,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공작가와 더불어 준왕족 대우를 받은 통치 가문이었다.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으로 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되기 전의 로렌 공작 가문은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공국을 보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30년 전쟁 때 프랑스가 로렌 공국을 일시 점령했을 때 당시 로렌 공작 샤를 4세[9]는 오스트리아 으로 피신하여 일종의 임시 정부를 구성했고 30년 전쟁 이후에도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공국을 보호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더욱 친밀하게 지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했다. 프랑수아 에티엔의 친할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부터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로렌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조카였다. 외가가 프랑스의 제2왕족이자 방계 왕족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지닌 오를레앙 공작가였기 때문에 혈연상으로는 유럽 양대 강국인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칠촌 형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육촌 오빠이다. 더 멀리 가면 발루아 왕조프랑수아 1세의 직계 6대손이었다.

파일:external/6298528134a584e2720848f83c3544682405a6b6aac2bfa2627808bb6a0bf033.jpg
15살 때 모습.

프랑수아는 파리 출신이자 모국 프랑스 왕족으로서의 자긍심이 강한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공작부인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고도의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다. 훗날 오스트리아로 장가를 간 뒤에도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토록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삼을 만큼 프랑스어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강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두뇌 덕분에 공부에 두각을 드러낸 프랑수아는 학자 기질이 다분하여 취미 생활로 자연과학에 집념과 열정을 보였으며 독학으로 전문가와 맞먹을 만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프랑스어에 국한되지 않고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비롯해 다양한 언어 교육도 받았다. 다만 독해나 작문, 라틴어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아버지 레오폴드 공작에게 타박을 받기도 했다.

2.1.2.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

일반적으로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정략결혼이 아닌 순수하게 연애결혼으로만 맺어진 세기의 커플로 잘 알려져 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프랑수아의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침공으로 인해 부모가 오스트리아에서 망명 정부를 구성하던 시절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고, 빈에서 요제프 1세, 카를 6세 형제와 자랐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어머니 로렌 공작부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가 직접 제국의회에서 로렌 공국의 반환을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모습을 보며 약소국의 한계를 절감했고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공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럽 역사상 최고의 왕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강한 영토와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던 카를 6세는 만일에 대비해 국사조칙을 만들면서까지 두 딸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려고 했는데 기회를 엿본 레오폴드는 아들 중 한 명을 카를 6세의 딸에게 장가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로렌과 합스부르크의 결혼동맹을 성사시켜 강력한 뒷배경을 얻기 위한 빌드업이었던 것이다. 레오폴드 공작은 꾸준히 카를 6세에게 어필하는 정성과 노고를 기울였으며, 장남이자 프랑수아의 맏형 레오폴드 클레망(1707-1723)을 마리아 테레지아의 신랑감으로 밀었다.

카를 6세 역시 로렌 공국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오랜 친분을 살려 레오폴드 공작과 긴밀한 접촉을 취했다. 레오폴드의 장남이자 로렌 소공작 레오폴드 클레망에게 정식으로 신랑 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1723년 레오폴드 클레망이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로렌 공작위와 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 자격마저 자연스레 4남이자 실질적 차남인 프랑수아가 이어받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학구열과 지식욕이 풍부했던 넷째 아들 프랑수아는 오스트리아 왕궁에 훌륭하게 적응했고 카를 6세는 미래의 사위인 프랑수아 공자의 인품과 능력에 호감을 느끼며 빈과 호프부르크 정궁에서 신랑 수업을 시켰다. 이때 프랑수아는 카를 6세의 장녀이자 미래의 아내, 그리고 주군이 될 어린 소녀이자 육촌 여동생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첫 인연을 쌓게 된다.

1729년 아버지 레오폴드 공작이 사망하자 서둘러 귀국한 프랑수아는 정식으로 로렌 공국과 공작위를 물려받은 후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또 아버지가 카를 6세에게 받았던 테셴 공국[10]의 계승을 승인받았다. 프랑수아가 갓 로렌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을 무렵 빈에서 9살 연하인 카를 6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수아에게 푹 빠져버린 덕분에 합스부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정치적 이득과 진실된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낚을 수 있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결혼이 성립될 수 있었다.

로렌 공작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조상의 대부터 끈끈한 사이로 프랑수아의 할아버지 샤를 5세는 에서 태어나, 호프부르크 궁정에서 활동했고 17세기 후반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장군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이런 인연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에게 시집갔다가 나이 스물에 청상과부가 된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 엘레오노레[11]와 결혼했다. 로렌 가문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으로, 중세 전기 독일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로 무척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이후 로렌 공국을 7~800년 동안 지배하며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인데다 모계로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을 통해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피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적당히 능력과 인품이 좋고 고귀하면서도 너무 세력이 강하지도 않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데릴사위감으로는 그야말로 합격점이었다.

카를 6세는 당시까지도 아직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12] 가문의 상황이 합이 맞고 프랑수아의 인성이나 지성이 쓸 만하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의 계승자가 될지도 모를 맏딸의 배우자로 최종 승인했다. 결국 이런저런 혈연과 국제정세와 동맹 등의 사정으로 양가의 승인과 주변 열강의 양해를 얻어[13] 1736년 2월 결혼에 골인했고 이름도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Franz Stefan von Lothringen)으로 개명한다.

2.1.3. 로렌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할양하다

처가인 오를레앙 가문의 본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루이 15세는 이전부터 로렌 공국을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키고 싶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랑수아의 결혼에 결사반대를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과 연합해 스페인-프랑스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로렌 공국은 당연히 전통적인 동맹에다 친인척인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그런데 전쟁 중 오스트리아는 라인란트, 로렌 지역 일대 및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었던 카를로 1세(나중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에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넘겨주었다.[14] 한편 그 와중에 스페인-프랑스가 밀고 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그단스크에서 포위되어 러시아의 공세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프랑스가 해상에서 그를 구원하는 데 실패하면서 결국 프로이센 왕국으로 탈출했다.

결국 전쟁의 향방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에 치닫기 시작했다. 영국네덜란드가 상대편인 오스트리아 편에 붙을 것을 우려한 프랑스가 결국 수세에 몰려있던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기로 타협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 선출을 승인하고, 오스트리아는 각국이 승인한 1713년 국사조칙을 재확인받아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승인받았으며, 미래의 사위 프랑수아가 로렌과 바 공국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을 얻으면서 영토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밀라노 공국과 연속된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스페인은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사르데냐 왕국롬바르디아의 일부인 노바라와 토르토나를 얻었다.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프랑수아에 이은 로렌 공작이 되는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를 인정했으며 대신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의 칭호를 유지하는 걸 허용했다. 현재의 라트비아 라트갈레 지역인 폴란드령 리보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직접적 지배권이 인정되었으며, 쿠를란트-젬갈렌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으로 남았으나 이 지역들은 이후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였다.[15]

그렇게 800여년 간 내려온 로렌과 바 공국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16]에게 반납하고[17] 대신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어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대공으로 영지를 이전하는 빈 협약에 서명했다.[18] 이 협약에 프랑스의 방계 왕족 오를레앙 가문 출신인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19], 프랑수아 본인도 해당 문서를 앞에 두고 결단을 내리지 못해 여러 차례(3차례란 얘기가 있다) 펜을 내던진 것을 약혼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매번 주워다 주어 결국 마지못해 서명을 넣어 로렌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할양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어받게 된다.

2.1.4. 토스카나 대공이 되다

그렇게 자신이 태어나 자라 애착이 강했던 고향 로렌 공국이랑 맞바꿔 꿩 대신 닭으로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조상의 영지였을 뿐, 추억이나 유대도 없는 토스카나 대공에 고향만큼의 애착이 없었던 프랑수아는 1739년 딱 한 번만 빼면 피렌체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대리인을 보내 대신 다스렸다. 때문에 그는 토스카나의 수도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5대손이라는 것만 빼면 피렌체와 인연이 없는 철저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인기도 없었다. 토스카나를 장악한 오스트리아군이 피렌체 내의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상징들까지 떼어놓는 바람에 한때나마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이끈 메디치 가문를 그리워하던 피렌체 시민들의 민심은 더욱 떠나갔다.

2.1.5. 남동생과 처제의 결혼

한편 프란츠의 남동생 샤를 알렉상드르 드 로렌 공자는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째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샤를은 로렌 공국 할양과 결혼에 결사반대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와 달리 아버지 레오폴드처럼 형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본인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둘째 황녀와 사랑에 빠져버려서 형에게 사돈 남말할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카를 6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로렌 가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경계해 차녀 마리아 안나와 샤를 알렉상드르의 결혼을 반대했다. 때문에 그들은 카를 6세 사후에야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랑하는 하나뿐인 혈육인 여동생과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해준 시동생을 위해 결혼식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샤를 알렉상드르는 형에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데릴사위 반열에 합류하고 독일식인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으로 개명한다. 그렇게 샤를 알렉상드르는 프란츠 1세의 친동생이면서 손아랫동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시동생이면서 제부가 되었다. 아내인 마리아 안나도 마찬가지로 언니의 친동생이자 손아랫동서, 프란츠 1세에게는 처제인 동시에 제수씨가 되었다.

로렌 가문의 두 형제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두 자매는 겹사돈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째 여동생 마리아 안나는 20대 때 출산 중 산욕열로 사망하였고 아이도 사망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직계 후손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후손 사이에서만 이어지고 있다.[20]

2.2. 중기 ~ 후기 (합스부르크 제국)

2.2.1. 이름뿐인 황제 프란츠 1세[21]

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을 한 28세의 프란츠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녀이자 차기 황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이 되었다. 그러나 서열이 아내보다 아래였기 때문에 극장에 들어갈 때 궁중법도에 따라 서열 2위의 대우를 받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도가 심해 하인 취급까지 받고 '전하' 호칭으로도 불리지 못했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아 엘리자베트부터 시작해서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22]까지 전부 딸만 내리 셋을 낳자 빈 궁정의 사람들은 프란츠 1세 탓을 돌렸다. 태아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여성의 XX 염색체가 아닌 남성의 XY 염색체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남녀 구별을 떠나서 염색체의 생물학적인 역할일 뿐이고 신도 아닌 인간에 불과한 프란츠가 그걸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억울한 건 맞다.

프란츠가 궁정 신하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로 무시당하고 허수아비 왕 신세로 전락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노력 부재 탓도 있다. 프란츠 슈테판은 10대 중반부터 고향을 떠나 빈으로 유학갔지만, 끝내 프랑스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내세워 아내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고 평생 프랑스어만을 사용했다. 그는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은 역사상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23] 이렇게 프랑스어 사용을 고집하는 프란츠에 대해 빈의 시민들은 그를 외국인이라며 비난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반(反) 프랑스 정서가 심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양국 간의 증오심과 적대감은 단순히 유럽의 패권을 다투고 경쟁하는 라이벌의 의미 이상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적은 발칸반도를 점유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한 후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이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차지가 된 이래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을 지키는 최전방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가 국왕으로 있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수호하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과 오랜 적대 관계를 이어오며 국운을 건 전쟁도 여러차례 했고, 그 와중에 빈 포위라는 절체정명의 위기도 두 차례나 겪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같은 기독교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기독교 유럽의 최전선에서 직접 이슬람의 맹주 오스만을 막아내며 기독교 세계를 지켜내는 수호자의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차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전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오스만과 그 동맹국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기독교 세계의 배신자 프랑스는 번번히 오스만과 협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을 공격하였다. 프랑스와 오스만의 양면 공격으로 오스트리아는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프랑스 하면 치를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데릴사위라는 대외적인 입장과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고집한 프란츠 1세의 행동은 개인의 자존심과 별개의 문제이며, 오스만 제국과 맞잡아 기독교 세계를 배신한 천하의 역적인 프랑스에 이를 갈고 있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프란츠 1세 개인뿐만 아니라 동서고금과 남녀노소 막론하고 모든 왕세자비/왕비황태자비/황후, 왕세녀/황태녀의 남편, 부군들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그들은 맨처음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한 지위와 혈통을 가진 왕족, 왕의 배우자로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기 전에 외교적 볼모, 후사를 낳기 위한 씨받이/씨내리로 이용당하되 사방으로부터 본인의 모국을 향한 원한과 증오를 풀어버리기 위한 욕받이 수준으로 박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현대 인권이 많이 향상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갈지는 개인의 뒷배, 책임, 처신, 능력, 특히 운빨 여하에 달려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프란츠 1세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도 독일어가 아닌 시집간 나라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썼음에도 오스트리아 황녀라는 이유로 프랑스 국민과 귀족들에게 '오스트리아 암캐년'(L'Autrichienne, 로트리시엔)이라는 모욕적인 멸칭까지 달라붙은 채 온갖 수위 높고 노골적인 악성 루머와 비난, 뒷담화에 시달려야 했다. 본인도 개인적으로는 선량하고 상냥한 성품을 지녔고 프랑스 왕실에 적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데다 프랑스 민중의 고달픈 애환과 암울한 현실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실정을 연발하고 다닌 탓에 악녀의 누명까지 씌우고 남편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도 믿을 수 없는 독일인에 여왕을 뒤에서 조종하고 가스라이팅하는 흑막 후보로 노골적인 경계와 견제를 받았지만, 멍청하고 어리석은 처신으로 본인의 입지를 좁히지 않았고 뛰어난 지성과 가족애, 아내사랑으로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대영제국 부군으로서의 입지와 지위를 확고히 해나갔다.[24]

카를 6세가 죽은 1740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명목상으로 공동통치했으나, 이것은 남편의 체면을 고려한 의전상의 명목이고 사실은 실권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전형적인 허수아비였다. 정치적인 최종 결정과 국정 및 외교 운영은 전부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부 수행하고 결정했다. 사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도 아닌 외지인을 공동 통치자라고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통치 권한은 아내에게 맡겼다.[25] 프란츠는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군주였을 뿐 '실질적인'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였지만, 두 부부는 의무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최선의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면서 결혼 생활 내내 금슬 좋은 모범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고 상속령을 승계했지만 아내의 일생일대의 숙적이자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를 필두로 이웃나라들이 여성 승계를 트집잡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오스트리아와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기를 겪었다. 카를 6세가 살아있을 적엔 국사조칙을 승인했던 나라들이 그가 죽자 일제히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먼저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는 국사조칙 승인과 프란츠의 황제 선출을 대가로 슐레지엔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여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로렌이라는 소국의 군주로 처신하면서 국제 정세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던 프란츠 1세는 카를 6세가 물려준 허약한 오스트리아군으로는 강력한 프로이센 왕국군을 상대로 전쟁을 이기기 어려우므로 일단 강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반대했다.[26] 그 후로도 막후에서 꾸준히 교섭을 시도해보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꾸준히 프란츠를 압박했다. 방문이나 커튼 뒤에서 회담을 엿듣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프란츠가 양보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강아지 부르듯이 남편에게 신호[27]를 보냈다. 이 사건 이후 프란츠는 두 번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국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해 슐레지엔을 뜯긴 걸 보면 프란츠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런 데서 보이듯 프란츠도 국사에 재능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왕학 교육을 못 받은 상태임에도 두 차례에 걸친 혹독한 실전을 연달아 겪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당대에나 후대에나 오스트리아 역사상 위대한 명군주이자 통치자로 칭송 받을 만큼 능력이 일취월장하며 훌륭한 수완을 쌓았다. 프란츠는 국정에 참여할 여지가 없었다. 일단, 마리아 테레지아부터가 프리드리히 2세와 이웃 국가들로부터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상속권과 계승권을 증명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을 겪으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옆에서 지켜본 인물이라 누구보다 아내의 고통을 이해했고, 권력을 노리고 간섭을 시도했다가 주변으로부터 감히 배은망덕하게 선황 카를 6세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비방과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프란츠 1세 본인도 부군으로서는 바람기와 불륜 문제[28]만 빼면 인품과 능력 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대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독자 연구나 자연과학, 동식물 연구 등의 개인적 취미 생활에 편안히 전념했다. 심지어 7년 전쟁 당시에는 재정이 바닥난 오스트리아의 경제를 천재적인 상재를 살려 다시 먹여살리기 위해 프로이센을 상대로 엄청난 양의 폭리를 취하며 부국강병시키는 업적도 남겼으며 오스트리아의 건축, 예술,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약소국의 공자 신분으로 태어나 유럽 역사상 최강의 왕조로 장가를 간 남자 신데렐라가 명목상으로나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봤지, 자기가 하고 싶은 자연과학 연구와 광물과 동식물, 곤충 분류집도 남기고, 아내는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군주이자 알파걸순애보마리아 테레지아, 종마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5남 11녀를 낳아주었다. 프란츠 본인도 딱히 미련이나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깔끔하게 인정하고 만족했기 때문에 비운의 희생양이나 부군이 절대 아니며 오히려 알파걸인 아내를 잘 둬서 부담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친 자유로운 지성인이었다. 프란츠 1세 정도면 충분히 누리고 싶은 건 실컷 누리고 간 편이었다. 거기다 16명의 자식들 중 두 아들은 부모의 작위를 물려받아 왕이 되기까지 했다.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는 체계적인 제왕학 교육과 부모의 총명함과 유능함을 그대로 물려받아 유연하고 냉철한 판단과 뛰어난 통치력을 겸비한 우수한 군주였으며 요제프 2세는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도 손꼽히는 급진적인 개혁군주였다.[29][30]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1년 6월부터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헝가리인 귀족들이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설에 감동한 것과 별개로 남편과의 공동 왕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프란츠는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아내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마차 안에서 아내의 대관식을 지켜보았다.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외국 군주의 자격으로 참석하면 여왕의 부군 정도는 아니어도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쿨하게 넘긴 걸 보면 애초에 오스트리아고 토스카나고 별 관심도 없는 터에 헝가리크로아티아에는 더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프란츠 1세는 이후 헝가리 의회에도 당연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31]

한편 당시 돌아가는 상황은 오스트리아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승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제국에서 이탈하려 했다. 보헤미아 왕국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보헤미아 왕위[32]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독일인 귀족들도 대거 이탈해 바이에른에 붙어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랑스의 자금을 바탕으로 황제선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대관식까지 치렀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단 남편이 원래 하자고 했던 대로 일단 프로이센과 타협해 한숨 돌리는 동시에 바이에른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뮌헨을 포함한 바이에른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3년 후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알브레히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와의 타협을 통해 황제선거에서 남편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33]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 아닌 남편이 황제로 선출된 이유는 살리카법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여성으로서는 전혀 비벼볼 방법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란츠 1세 생전인 1764년,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맏아들 요제프를 독일왕으로 선출[34]시켜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까지 치르게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 프란츠 1세가 사망하자 요제프는 황제 요제프 2세로 즉위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다시 되찾은 것은 이 자리가 동남쪽에 치우친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필수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같은 영방내 강대국도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고, 다른 선제후들은 권력이 강하니 내버려두더라도 제국내 수많은 주교령과 기사령, 제국도시에 대해 황제로서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다. 나머지 소국들도 마찬가지였고. 아울러 가톨릭 교회와 교황에 대한 영향력에서 '황제'로서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수장'으로서 발휘하는 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744년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란츠도 전쟁에 참전하려 했지만 다른 분야면 몰라도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것을 우려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만류와 제지로 그냥 돌아왔다. 대신 동생이자 동서지간이 되는 카를 알렉산더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믿었던 동생은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숙적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연신 털렸다. 하지만 이건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 역사상 최고의 전쟁 지휘관으로 불릴 만큼 군사와 정치 양면으로 출중했기 때문이지 카를 알렉산더가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탓이 아니었다.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랑하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에 맞서 자신과의 결혼과 로렌 공국 할양에 기어이 찬성표를 던져준 시동생이자 제부,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 안나의 체통을 고려해 꾸준히 기용을 해주는 의리를 보였고 전쟁이 끝나자 시동생/제부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시켰다. 카를 알렉산더는 형수이자 처형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은혜와 형의 체면을 생각해 어떻게든 절치부심해서 뒤이은 1756년 7년 전쟁에서는 몇 번 정도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지만, 또 결정적일 때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한 대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공동 총독으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풀었다. 애초부터 카를 알렉산더는 군사가 아니라 정치와 행정에 더 적성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2.2.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시조

데릴사위라는 지위와 별개로 프란츠 1세는 자기 가문과 성씨도 물려줄 수 있었다. 결혼하면서 자신의 가문 로렌의 독일식 변형인 로트링겐과 부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합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개창된 것이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마리아 테레지아에서 끝났으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부터는 일반적으로 로트링겐 가문[35]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가 워낙 대단한지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되었다.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인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모데나 공국 에스테 가문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여 성립된 분가 역시 유사한 이유로 로트링겐에스테 가문이 아니라 합스부르크에스테 가문[36]이 되었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로트링겐 가문이 모두 에티호넨 가문[37]을 뿌리로 둔 가문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은 에티호넨 가문끼리의 결합이라고 인식되었다. 실제로 로트링겐 가문이 에티호넨 가문의 분파인지는 논란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가설도 존재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인식 상으로는 어쨌든 에티호넨 가문의 범주 내에 들어갔다.

현대에 와서는 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로트링겐 가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통이지만, 유럽 최고 가문 중 하나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로트링겐 가문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후계자들이 로트링겐 가문의 영지와 작위보다는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작위에 기반을 두기도 한 탓에[38] 일반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프레더릭 모턴이 쓴 글을 봐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을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칭한다.

어쨌든 양자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친가와 처가나 입적 가문의 성을 같이 붙여 쓰는 게 유럽의 전통이라[39] 정식으로 칭하자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으로 부르는 게 맞다. 페드루 5세부터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이 되었던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가문이나 표트르 3세부터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이 된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가문이 비슷한 사례인데, 이 가문들 역시 부계 가문인 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이나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보다는 주요 영지 및 작위와 연관된 모계 가문인 브라간사 가문[40], 로마노프 가문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모계로나마 섞여 있게 만든 인물이다. 몬페라토 후국의 혈통을 계승했기 때문.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버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는데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남계 후손이 끊겨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여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역사의 로마 최후의 황제가 혈통은 다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엄청난 유산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왕가들은 통혼이 잦은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혈통상으로 연관이 있는 경우가 흔한데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동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2.2.3. 죽음

1765년 8월 18일에 3남 레오폴트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이를 축하하러 갔다가 인스브루크에서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궁전에 남편을 위한 방을 만들었고, 이후로는 내내 1세기 뒤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검은 상복만 입으며 남은 평생동안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냈다. 사후 토스카나 대공국은 3남 레오폴트가 물려받았고, 1764년 황제선거에서 이미 독일왕으로 선출된 맏아들 요제프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습령 통치에 필요한 네 개의 핵심 작위들인 헝가리 국왕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위와 통치에 대한 실권은 전부 마리아 테레지아가 쥐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아들에게 양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만큼 권력욕과 통치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기에 결국 25년에 걸친 두 모자 군주의 공동 통치기가 시작되었다.

15년 동안 자신을 옆에서 든든히 지탱해준 정치적 동반자인 남편에 대한 사랑이 매우 깊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누구보다도 프란츠의 죽음에 탄식했다. 프란츠 1세의 사후 더욱 심해진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폭식과식으로 풀면서 급속도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성격도 염세적이고 우울하게 바뀌었어도, 공사 구분이 확고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2세기 전의 먼 조상인 후아나 1세처럼 지나친 집착으로 정신병에 걸려 국정을 때려치우고 칩거할 정도는 아니었고[41], 장남과 분담하여 25년간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군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끝까지 수행하며 나라를 통치했다.

3. 남편, 아버지로서

가정에서는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금슬이 좋아[42] 슬하에 자식이 무려 16명이나 되었다. 자식들에 대한 내용은 마리아 테레지아/가족 관계 항목 참조. 엄격하고 깐깐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으나 아이들의 어리광만 받아주고 교육이나 장래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와 다른 남매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장녀 마리아 안나[43] 총명함과 성실함을 거의 유일하게 알아주며 무척이나 아꼈다.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까지 큰딸이 궁전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으며 보호해 주었다.[44]

4. 능력

상재(商才)가 매우 뛰어났으며 거상의 소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경제감각도 좋아 7년 전쟁 이후 피폐해진 오스트리아의 재정[45]을 부유하게 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장사 수완을 발휘했는데, 전쟁 상황에서도 프란츠의 상재는 커다란 빛을 발하여 오스트리아의 국익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경제 정책에 기여하였다.

7년 전쟁 당시에는 적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에게 말사료, 식량 등의 보급물자를 엄청난 가격에 팔아 막대한 폭리를 취했고,[46]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고[47] 환전과 송금, 융자, 예금 등의 업무를 맡는 기관을 설립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도 했다. 이 당시 그가 벌어놓은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냐면, 다른 나라들은 국가 예산 중 왕실 예산을 편성했으나[48] 오스트리아 황실은 별도의 왕실 예산이 없었는데도 후대의 자손들이 그가 쌓아놓은 재산의 이자만으로 지내고도 돈이 남았다고. 7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을 때 프란츠 슈테판이 보증을 서서 국채 발행에 성공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재정적자로 파산상태라지만 유럽 대륙의 양대 강국 오스트리아 국가 신인도보다 프란츠의 개인 신용도가 높았다는 말.

자연과학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어 쇤브룬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49]하고 곤충과 광석 컬렉션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당시 자연과학과 식물, 동물 연구를 하는 것은 학자나 지성인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5. 취미

메달&동전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쟁 자금으로 남편의 재산을 가져 갈때 동전 만큼은 안된다고 반항하여 동전 상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6. 가족

친동생으로는 아버지 레오폴드의 4남 샤를 알렉상드르, 장녀 엘리자베트 테레즈(1711 ~ 1741), 차녀 안 샤를로트(1714 ~ 1773)가 있으며, 이중 엘리자베트 테레즈는 사르데냐 왕국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결혼하여 사르데냐 왕비가 되었다.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fan)
<colbgcolor=#fff3e4,#331c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c de Lorraine)
로렌 공작 니콜라 프랑수아
(Nicolas François, duc de Lorraine)
로렌의 클로드 프랑수아즈
(Claude-Françoise de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von Österreich)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s III.)
엘레오노라 곤차가
(Eleonora Gonzaga)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duc d'Orléans)
루이 13세
(Louis XIII)
오스트리아의 안나
(Ana de Austria)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von der Pfalz)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Karl I. Ludwig, Kurfürst von der Pfalz)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Charlotte von Hessen-Kassel)

6.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1737년 2월 5일 1740년 6월 7일
2녀 마리아 안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na)
1738년 10월 6일 1789년 11월 19일
3녀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Karolina)
1740년 1월 12일 1741년 1월 25일
1남 요제프 2세
(Joseph II.)
1741년 3월 13일 1790년 2월 20일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
슬하 2녀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50]
4녀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Herzogin von Teschen)
1742년 5월 13일 1798년 6월 24일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슬하 1녀
5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Erzherzogin Maria Elisabeth)
1743년 8월 13일 1808년 9월 22일
2남 카를 요제프 대공
(Erzherzog Karl Joseph)
1745년 2월 1일 1761년 1월 18일
5녀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Duchessa di Parma)
1746년 2월 26일 1804년 6월 18일 페르디난도 1세
슬하 1남 3녀[51]
3남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1747년 5월 5일 1792년 3월 1일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슬하 10남 4녀[52]
6녀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arolina)
1748년 9월 17일 1748년 9월 17일
7녀 마리아 요하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hanna)
1750년 2월 4일 1762년 12월 23일
8녀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
(Erzherzogin Maria Josepha)
1751년 3월 19일 1767년 10월 15일
9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Regina di Napoli e Sicilia)
1752년 8월 13일 1814년 9월 8일 페르디난도 1세
슬하 6남 9녀[53]
4남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Ferdinand Karl, Erzherzog von Österreich-Este)
1754년 6월 1일 1806년 12월 24일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슬하 4남 3녀[54]
10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Reine de France)
1755년 11월 2일 1793년 10월 16일 루이 16세
슬하 2남 2녀[55]
5남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
(Maximilian Franz, Erzbischof und Kurfürst von Köln)
1756년 12월 8일 180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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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어로 마리 앙투아네트[2] 쾰른 선제후.[3] 1729~1737.[4] 1729~1765. 훗날 테셴 공작위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둘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물려받았다.[5] 1737~1765.[6] 1740~1765.[7] 팔켄슈타인 백작의 이름은 나중에 이 작위를 물려받은 장남 요제프 2세가 가명으로 활용했다.[8] 프란츠 1세 사후 아버지가 겸한 토스카나 대공위까지 물려받았다.[9] 독일어로는 로트링겐 공작 카를 4세.[10] 본래 폴란드 왕국 영토였지만 1335년 트렌첸 조약으로 보헤미아 왕국에 양도했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된 땅이다. 프랑수아의 부친 레오폴드는 가까운 친척이었던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공작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 계승권을 요구했는데, 이 지역은 카를 6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동맹의 대가로 사보이아 공국에 양도하기로 이미 약속한 뒤였으므로 대신 자신의 테셴 공국을 떼어주었다. 어차피 로렌 가문은 합스부르크의 친척이기도 했고. 이후 현대엔 폴란드체코가 모두 영유권을 주장해 오늘날 체코의 체스키테신(Český Těšín), 폴란드의 치에신(Cieszyn) 지역으로 나뉘었다.[11] 레오폴트 1세의 이복누이이다.[12] 국사조칙은 아들을 못 낳을 것을 대비한 보험용이었다. 1713년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공표했는데,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후와의 사이에서 맏아들 레오폴트 요한을 낳는 데 성공했지만, 생후 7개월 만에 죽고 이후에 태어난 자식들도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포함해 모두 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정식 상속녀이자 후계자로 삼았다.[13] 동맹국 영국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유럽의 다른 왕국의 군주와 혼인해 동군연합이 되는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는 로렌 공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쳐지는 걸 밥통 싸들고 반대, 그 결과 한 판 붙었다.[14] 다행히도 상대편이었던 스페인-프랑스 역시 이탈리아 원정에서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15]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토스카나 대공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생각보다 오래 살아서(?) 1738년에야 사망해서 발효된 것이지 1735년에 빈에서 이미 예비조약으로 조건은 합의되었다.[16]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결국 오스트리아-러시아가 지지한 아우구스트 3세가 다시 회복, 유지했다.[17] 하필이면 로렌 공국을 프랑스 국왕이 아니라 국왕의 장인에게 돌렸느냐 하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위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사위가 장인에게 여생이나 보내라는 식으로 준 것이었고, 그의 사후 로렌은 프랑스에 영구적으로 합병되었다.[18] 토스카나는 메디치 가문의 혈통이 끊어진 후 스페인 보르본 왕조 출신의 파르마 공작 카를로 1세(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소유권을 주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전쟁 중 점령하고 스스로 즉위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그대로 갖는 대신 토스카나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며 어머니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상속분이었던 파르마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넘겼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결국 파르마 공국은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펠리페 왕자에게 넘어갔다.[19] 어머니와 달리 동생 샤를은 야심가에 출세지향적인 성격이라 형의 결혼과 조상 땅 팔아먹는 것을 적극 찬성(?)했다.[20] 카를 알렉산더는 제7차 대튀르크 전쟁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활약하고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형과 형수의 인맥으로 장군이 된다. 그리고 로렌과 바의 공작 칭호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는데 그냥 명목상 타이틀이고 실제 로렌 공국은 1766년에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진 게 맞다.[21] 원어는 Franz I. 풀 네임의 원어는 Franz Stefan von Habsburg-Lothringen(프란츠 슈테판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22] 10번째 딸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동명이인.[23]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던 황제로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를 모국어로 쓴 룩셈부르크 가문하인리히 7세체코어를 쓴 하인리히 7세의 손자 카를 4세, 네덜란드어(플람스어)가 모국어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카를 5세스페인어(카스티야어)가 모국어인 페르디난트 1세 형제가 있었다. 하인리히 7세는 중세 시기 인물이라 라틴어가 아직 먹히던 시절이어서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하면 되었고, 카를 4세는 독일어에 능숙했다. 카를 5세의 경우는 젊은 시절 마르틴 루터를 대질심의했던 보름스 제국의회 때라면 모를까 나이가 들어 능숙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독일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이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독일왕 선출 지원을 요청한 제국의회나 슈말칼덴 전쟁에서는 독일어로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페르디난트 1세는 스페인 태생이지만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열심히 독일어를 배워 나중에는 독일인으로 정착하였다.[24] 모국과 사이가 나쁜 적국으로 시집/장가를 온 왕족이 차별과 박대를 겪는 것은 유럽으로 멀리 갈 것도 없이 동아시아에도 해당된다. 당장 한국사 역사상 최후의 외국인/이민족 출신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본명: 보르지긴 부다시리)도 본인의 의지로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소중한 고향과 아버지를 배신하면서까지 공민왕의 개혁과 반원 정책을 적극 지지했지만, 몽골/원나라의 공주라는 이유로 반원 및 개혁 정책을 펼치려는 공민왕의 최대 정적이자 방해물이 될 거라는 이유로 친 공민왕파 대신들과 시어머니 명덕태후의 엄청난 적대와 경계를 받았었다. 이는 단순히 노국대장공주가 원나라 공주라서 견제를 받은 게 아니었으며, 제국대장공주를 비롯해 원 간섭기가 시작한 이래부터 고려에 시집 온 원나라 출신 왕비들은 하나같이 고려 왕들과 사이가 나빴다. 심하면 대낮에 대놓고 왕비가 왕의 옥체에 물리적 폭력과 갑질을 행사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에 대한 강경한 처벌은커녕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갔다. 왕비 혹은 후궁이 왕보다 뒷배가 미약한 집안 출신이었으면 성종의 정비 폐비 윤씨성종의 계비 희빈 장씨, 영조의 승은후궁 숙의 문씨의 사례처럼 왕비/후궁의 지위를 박탈, 폐서인당하고 사약을 받거나 그보다 더한 잔혹한 수위의 숙청과 처형을 당해 죽는 게 당연하겠지만, 동시에 고려 내 원나라 왕족과 친원 권신들의 권위가 고려 왕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었다. 국왕 개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원나라 군주의 변덕과 의향에 따라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25] 국가 운영과 정치 감각은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월등히 높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회의장에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면 프란츠는 박수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며 아내를 언제나 지지했다. 프란츠는 정치적인 감각보다 재산을 늘리는 경제적인 관념에는 아내보다 뛰어나 재산을 늘리는 수완이 좋았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쟁 자금이 부족할 때 남편이 지원해 줄 정도로 부부 궁합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 정치적 파트너이자 후원자였다.[26] 마리아 테레지아 항목에도 나오지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려고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는 바람에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했던 데다, 10대 때부터의 임신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군대에 대해 남편만큼 잘 알지는 못했다.[27] 야사에서는 외교관을 통해 내용을 듣게 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란츠 1세에게 동정심을 가졌다고 한다.[28]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본인과 결혼하기 위해 기꺼이 프랑스의 협박에 의해 로렌 공국을 희생해야 했던 비극을 생각해 애써 묵인해줬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자신을 신성 로마 황제로 만들어준 훌륭한 아내를 냅두고 자의로 바람피운 사실은 변함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하늘을 찔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순결위원회라는 기관을 설치해 매춘부들을 삭발하고 채찍질을 하거나 전신을 타르로 칠해 화풀이하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어버리는 데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순결위원회는 프란츠 1세 사후 권력을 잃었고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친 요제프 2세의 단독 통치기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된다.[29] 1세기 뒤인 19세기에 태어나 자신처럼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을 온 고손며느리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비극적인 인생과 말로와 비교해도 답이 나온다. 엘리자베트 황후 역시 고대 그리스어와 헝가리어 등 다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철학과 과학, 승마, 문학에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지녔으며 자유주의를 지지한 지성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평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놀아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여걸이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면서 인생이 꼬이게 된다. 19세기의 합스부르크 왕실은 프란츠가 갓 장가 올 때와 달리 프랑스 대혁명과 그 후속전쟁으로 볼 수 있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멸망할 위기를 겪으면서 손자인 프란츠 2세와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에 의해 보수주의, 반동주의로 회귀한 상태였기에 더더욱 가부장제적이고 에티켓과 규율도 엄혹하기 그지없는 숨 막히게 삭막한 왕실로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의 장인 카를 6세와 달리 며느리에게 절대 잘해주지 않고 오히려 엘리자베트가 결혼하자마자 낳은 자식들의 양육권까지 모두 빼앗아버리고 사소한 잘못까지 부풀리며 며느리를 학대하는 악독한 시어머니였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런 어머니의 말에 꼼짝도 못하는 마마보이에 네가 좀 참으라고 말하는 등 한국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우유부단한 호구 남편이라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마저 울고 갈 정도로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보수주의자라 절대 엘리자베트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엘리자베트는 평생토록 황후의 공무에 나서지 않고 해외여행으로 도피하게 되었으며 아들이자 황태자 루돌프마저 외면할 정도로 정신이 더욱 심각해진다. 결국 개혁에 반대하는 답답한 아버지와 자신을 방임하는 어머니로 인해 절망한 루돌프 황태자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자살해버렸고 엘리자베트는 소중한 아들을 잃고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국민의 비난에 시달리다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총 맞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결혼한 순간부터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에 비하면 프란츠 1세는 배우자복과 장인복, 자식복, 처가복, 운빨을 무척 잘 타고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살다 간 편이며 암살은커녕 천수도 누리고 갔다.[30] 굳이 고손며느리까지 안 가도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도 마찬가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만큼 유능하고 훌륭한 군주도 아니라 인품은 선량해도 능력은 그에 못 미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암군이었다. 루이 14세부터 이어진 거액의 부채를 감당 못해 도탄에 빠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물결을 감당 못하고 악녀라는 누명을 쓰면서 단두대에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심지어 본인은 상냥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지닌 선한 인물이었고 사치도 역대 프랑스 왕비들에 비하면 현저히 적었음에도 프랑스 왕가를 어떻게든 악마화시켜야 했던 혁명 세력에 의해 어린 아들을 강간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움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고생 끝에 낳아 키운 소중한 아들이자 왕태자 루이 17세는 왕이 되기는커녕 불과 7세의 나이에 혁명군 세력과 부르봉 왕가를 증오한 민중의 학대와 괴롭힘에 시달려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2004년 6월 7일에 생 드니 대성당에 무사히 부모 곁의 안장된 심장을 빼면 루이 17세의 유골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다.[31] 몇 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요청해 헝가리 의회에서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긴 했다.[32]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자리이기도 했으며 페르디난트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몇백 년간 독점했다.[33] 막시밀리안 3세의 숙부 클레멘스 아우구스트가 쾰른 선제후였기 때문에 2표를 확보하였고 보헤미아 여왕으로서 자신의 1표, 동맹인 영국 국왕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 1표, 전통적인 지지자 마인츠 선제후트리어 선제후의 1표씩,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1표 총 7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는 본인에게 셀프투표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끝까지 엿이나 먹으라면서 카를 테오도어에게 투표했다.[34] 요제프 2세는 선제 생전에 선출된 마지막 황제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황태자 직위 자체가 없었으며, 독일왕이 차기 제위 계승자처럼 여겨지기는 했지만 정작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준세습화 이후에도 선제 생전에 선출된 경우보다 사후에 선출된 경우가 더 많았다.[35] 프랑스어로는 로렌 가문이다.[36] 이탈리아어로는 아스부르고에스테 가문이다. '합스부르크에스테의' 라는 뜻으로 d'Asburgo-Este로 표기하면 다스부르고에스테로 발음된다.[37] 7세기에 알자스 공작 아달리히 혹은 에티호가 세웠다고 알려진 가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 로트링겐 가문, 슈바벤 지역을 다스렸고 나중에 바덴을 통치하는 체링겐 가문 등이 에티호넨 가문의 분파라고 추측된다.[38] 기존 로트링겐 가문이 차지했던 로트링겐 공작 작위는 루이 15세장인에게 넘어갔다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없어졌고, 로트링겐 지방은 프랑스에 뺏겼다.[39] 여러 대에 걸쳐서 가문이 합쳐지거나 양자로 가거나 하면 가문명이 엄청나게 길어져서, 가문명이 길수록 가문의 역사 추정이 가능할 지경이다.[40] 여기는 마리아 2세페르난두 2세의 후손인 마누엘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마리아 2세와 대적했다가 쫓겨난 미겔 1세의 후손들이 가문의 수장이 되면서 다시 진짜 브라간사 가문이 되었다.[41] 그 전에도 남편이 대놓고 시간날 때 사창가를 들르며 바람피울 때 분노했지만 후아나처럼 정신이 나가 수도원에 감금되거나 평생 남편과 아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인하고 냉철하게 공사를 구분하며 이를 묵묵히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정책 결정과 의회 조집, 공공 사업 같은 국정에만 전념하여 오스트리아를 유럽 최대의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장기적인 성과와 업적을 남겼다.[42]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듯 프란츠는 바람을 숱하게 많이 피웠다. 16명의 자식이 태어날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부부 금슬이 분명 좋았지만, 전근대 사회였으니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바람 피우는데 뭐라 할 만한 명분도 없었고, 자존심 강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연녀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도 당시 남편의 이례적인 위치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소중한 조국인 로렌 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던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배경을 고려해서 남편의 불륜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하게 눈감아주는 대신 황제로서의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위협할 만한 행동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특히 다른 여성들과 연인이나 여사친처럼 친하게 지내고 사귀는 등의 사소한 불륜 행위는 허용하지만 중혼이나 두집살림은 절대 안된다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조건을 걸었고 프란츠 1세는 이를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아내가 제시한 인내심의 조건을 지켰다고 한다.[43] 사실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녀는 마리아 엘리자베트였지만 고작 3살 때 요절했기 때문에, 마리아 안나가 사실상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의 장녀이자 맏이었다.[44] 마리아 안나는 거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고, 특히 남동생 요제프 2세와 그의 아내인 이사벨라와는 원수지간이었다. 한때는 프란츠 1세마저 마리아 안나를 외면했을 정도. 그래도 아버지 프란츠 1세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하며 잘 지냈지만 남매들간의 관계만은 개선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마리아 안나는 프란츠 1세가 죽고 요제프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함께 수녀가 된 여동생 마리아 엘리자베트(장녀 마리아 엘리자베트와는 동명이인)와는 화해해서 평생 절친하게 지냈고, 나중에는 요제프 2세도 누나와의 사이가 회복되어 마리아 안나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45] 7년 전쟁 비용으로 국가 수입의 11년치를 꼴아박았다.[46] 매점매석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적국에게도 대출을 해준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이적행위보다는 오히려 적국에 대한 트롤링에 가깝다. 더군다나 깊게보면 적국에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 자신의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므로 오히려 고도의 방책.[47] 정확하게는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된 신용을 담보로 한 거다.[48] 예컨대 18세기 프랑스는 국가예산의 3%가 왕실 예산이었다.[49] 지금도 빈 쇤부른 궁전의 정원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궁전 내부를 보고 난 후 구경한다. 동물원이 조성이 된 지 2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동물원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으며, 특히 최우수 등급을 받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자이언트 판다와 코알라를 사육하고 있다.[50] 카를 7세의 막내딸.[51] 루도비코 1세[52] 프란츠 2세, 페르디난도 3세, 테셴 공작 카를 대공[53]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체스코 1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54]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55]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 테레즈, 루이 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