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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의회 Dieta Imperii | Comitium Imperiale Reichstag | |
<colbgcolor=#ffcc20><colcolor=#000000> 설립 | 803년 |
폐지 | 1806년 |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종합적인 국무를 감독하고, 영방국가 사이의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창설된 심의 기관.의회라는 이름과는 달리 우리가 생각하는 입법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사람들은 제국의회를 법률을 입법하는 의사결정기구라기보다는 협상과 토론이 이루어지는 논의기구에 더 가깝게 여겼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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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제국의회가 열리던 레겐스부르크 의사당 |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의회에서 공작들은 오토 왕조의 시조 하인리히 1세를 초대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프랑크족과 작센족 사이의 오랜 불화를 청산하고 독일 왕국의 성립을 알렸다. 북이탈리아를 정복한 뒤 열린 1158년 의회에서는 제국의 기틀을 잡을 4가지 법률을 비공식적으로 결의했고, 이에 따라 황권을 크게 약화시키고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1358년 카를 4세가 주재한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는 금인 칙서를 반포하며 7명의 선제후를 확정하고 영방군주들이 자기들의 영토 안에서만큼은 독립적으로 통치한다는 개념(Landesherrschaft)을 확립, 신성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다잡았다. 이로 인해 의회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중대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제국 정치의 핵심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의회는 비공식적인 성격의 비정기 회의에 불과했고 선제후와 일부 공작들이 황제의 궁정에 모여 열리는 궁중회의(Hoftag)에 불과했다.
1495년 막시밀리안 1세의 제국개혁으로 제국의회는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495년부터 1663년까지 각 의회 끝에 내용을 총정리한 폐회선언(Reichsabschield)을 발행했다. 초기에는 아우크스부르크, 보름스, 슈파이어 등 황제가 단기로 머무르는 제국령 도시에서 열렸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황권이 크게 약해지면서, 이를 틈타 권력 우위의 항구화를 꿈꾼 귀족들의 결정으로 제국의회는 1663년부터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렸다. 특히 의회가 결정을 내리면 황제는 이를 사실상 무조건 받아들여야한다는 공식 의무를 부과하며 황제에게 남아있던 거부권마저 박탈한 것은 황권에 치명타를 날렸다.[1]
제국의회가 내린 결정들 중에는 7인의 선제후를 확정지은 1356년의 뉘른베르크 제국의회, 제국개혁을 의결한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마르틴 루터를 심문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루터교회의 탄압반대를 요구한 1526년과 1529년의 슈파이어 제국의회 등이 유명하다. 1663년부터는 레겐스부르크에서 고정된 정기의회를 열었으며 마지막 회의는 1806년 열렸다.
제국의회의 의사결정에는 항상 논란이 많았는데 일반 제후들은 제국의 사안을 논하는데 평등한 지위를 요구했던 반면, 황제와 선제후가 암묵적으로 더 강한 발언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선거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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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겐스부르크의 제국의회의사당 |
선제후 인단은 각각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팔츠 선제후, 작센 선제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보헤미아 왕[2]이었다. 1623년 바이에른 공작이 바이에른 선제후로 승격됐고, 1692년 9년 전쟁 도중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하노버 선제후로 새로 승격되며 선제후는 총 9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다가 1773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가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물려받자 비텔스바흐 가문의 황제선거권을 명시해둔 베스트팔렌 조약의 오스나브뤼크 조약에 의거하여 팔츠 선제후와 바이에른 선제후가 팔츠-바이에른 선제후로 통합되어 1표로 줄어들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침공으로 쾰른 선제후와 트리어 선제후가 프랑스에게 병합되며 소멸됐다. 마인츠 선제후는 프랑스에게 잃은 영토 대신 레겐스부르크를 받고 레겐스부르크 선제후로 직함이 바뀌었다. 또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멋대로 선제후를 임명하며 잘츠부르크 선제후, 뷔르템베르크 선제후, 바덴 선제후, 헤센카셀 선제후 이렇게 4명씩이나 선제후가 늘어났지만 얼마안가 제국이 해체되며 별 의미는 없었다.
제후 인단의 경우, 제후인단 내에서 3가지 계층으로 소분류된다. 첫 번째는 각자 하나의 투표권을 갖는 성직자 계급(대주교, 주교, 큰 규모의 수도원의 수도원장 등)[3], 두 번째는 고위 귀족과 지방 영주 계급(후일 선제후가 될 바이에른 공작,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등), 마지막으로 제국에 직속된 중소 귀족 계급(백작, 성백, 남작 등)이 있었다. 투표권은 철저히 가문이 아닌 영지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동군연합을 하여 여러 영지를 동시에 다스리는 경우 한 명이 여러 개의 투표권을 행사가능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투표권도 가문의 본령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여러 국가가 모여있는데서 나왔다. 제국백이나 제국수도원 등 하위귀족들은 개개인이 투표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묶어 1표만을 부여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뭉치거나 다른 세력에 얹혀가는게 보통이었다. 티롤 후백국 같은 지역에서는 부르주아 혹은 농민 출신의 대표자를 선출해 내세우기도 했다.
50개 정도 되었던 제국령 도시들, 즉 도시 인단은 영주에 직속된 도시(Landstädte)들과 달리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 지방 유력자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의회(Städtetag)를 꾸리고 한자 동맹(Deutsche Hanse)[4]에 가입하는 등 자주권을 가지고 행동했다. 1489년부터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제국의회가 제국의 중요한 정치기구로 부상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5] 제국도시들은 크게 슈바벤 그룹과 라인 그룹으로 나뉘었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가 슈바벤 그룹을 이끌었고 쾰른, 아헨, 프랑크푸르트가 라인 그룹을 이끌었다.
황제를 비롯한 모든 의회의 대표자들은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럼 각 선거인단은 따로 해당 법안에 대해 논의했고, 각 선거인단은 법안의 개정판을 발표할 수 있었다. 세 선거인단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만 의회는 개정안 중 하나를 최종적으로 비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준한 법안을 의사록(Reichsabschield)이라 불렀다.
제국 내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는 바로 종교 문제였다.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죽일듯이 싸워댔던 것.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부터는 종교 문제에 한해서 단일 의회 안에서 논하는게 아니라, 제국의회를 가톨릭 의회와 개신교 의회 둘로 나누어 따로 상의하고 각각 입장을 내면 서로 합의점을 찾는 식으로 바뀌었다. 가톨릭 의회는 마인츠 대주교가, 개신교 의회는 작센 선제후[6]가 이끌었다. 개신교 의회는 작센 선제후가 토의 주제를 제시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하노버 선제후가 순서대로 발언하고 그 뒤에 규모대로 의원들이 발언하는 식이었다.
4. 주요 사건
연도 | 장소 | 주재 | 주제 |
754년 | <colbgcolor=#fff> 키에르지 | 피피누스 3세 | <colbgcolor=#fff> 최초의 Hoftag |
803년 | 아헨 | 카롤루스 대제 | 최초의 형식적인 Hoftag |
806년 | 티옹빌 | 카롤루스 대제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983년 | 베로나 | 당시 만 3세의 오토 3세가 황제로 선출 | |
1356년 | 뉘른베르크 | 카를 4세 | 금인 칙서 공표 |
1495년 | 보름스 | 막시밀리안 1세 | 제국 개혁 |
1521년 | 보름스 | 카를 5세 | 마르틴 루터 소환 |
1529년 | 보름스 | 페르디난트 1세 | 프로테스탄트 첫 사용 |
1555년 | 아우크스부르크 | 카를 5세[7]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1613년 | 레겐스부르크 | 마티아스 | 개신교 제후 동맹 |
5. 연대기
연도 | 장소 | 주재 | 주제 |
754년 | <colbgcolor=#fff>키에르지 | 피피누스 3세 | <colbgcolor=#fff>피핀의 기증[8] |
777년 | 파더보른 | 카롤루스 대제 | 작센족의 땅에서 열린 첫 의회. 비두킨트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다. |
782년 | 바트립슈프링에 | 카롤루스 대제 | 작센족의 영토를 독일인 백작들에게 분할 |
788년 | 잉겔하임암라인 | 카롤루스 대제 |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 작위 박탈 |
799년 | 파더보른 | 카롤루스 대제 |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의 승인을 받아 황제로 등극 |
806년 | 디덴호펜 | 카롤루스 대제 | 카롤루스 왕조의 3분할 |
817년 | 아헨 | ||
826년 | ? | 소르브인 초대 | |
829년 | 보름스 | ||
831년 | 아헨 | ||
835년 | 디덴호펜 | 루도비쿠스 1세 | |
838년 | 슈파이어 | 루도비쿠스 1세 | |
872년 | 포르히하임 | 루도비쿠스 2세 | |
874년 | 포르히하임 | 루도비쿠스 2세 | 상속의 대한 논의와 규정 |
887년 | 트레부르 | ||
889년 | 포르히하임 | 케른텐의 아르눌프 | |
892년 | 포르히하임 | 케른텐의 아르눌프 | 대슬라브 전쟁 준비 |
896년 | 포르히하임 | 케른텐의 아르눌프 | |
903년 | 포르히하임 | 루트비히 4세 | 반란을 일으킨 바벤베르크의 아델하이드 처형 |
907년 | 포르히하임 | 루트비히 4세 | 마자르족의 공격에 대한 소집 |
911년 | 포르히하임 | 콘라트 1세 선출 | |
914년 | 포르히하임 | 콘라트 1세 |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에게 전쟁 선포 |
919년 | 프리츨라어 | ||
926년 | 보름스 | 하인리히 1세 | |
952년 |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레히강의 목초지 | 오토 1세 | |
961년 | 포르히하임 | 오토 1세 | |
967년 | 라벤나 | 오토 2세 | |
972년 | 크베들린부르크 | 오토 1세의 아들과 동로마 황녀의 결혼 축하 | |
976년 | 레겐스부르크 | ||
978년 | 도르트문트 | 오토 2세 |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 |
983년 | 베로나 | 오토 3세 선출 | |
985년 | ? |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제위 분쟁 종결 | |
993년 | 도르트문트 | 오토 3세 | |
1018년 | 니즈메겐 | 하인리히 2세 | 블라르딩겐 전투 준비 |
1030년 | 민덴 | 콘라트 2세 | |
1066년 | 트레부르 | ||
1076년 | 보름스 | 하인리히 4세 | |
1077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098년 | 마인츠 | 하인리히 4세 | |
1105년 | 잉겔하임암라인 | 하인리히 4세 | |
1119년 | 트레부르 | 하인리히 4세 | |
1122년 | 보름스 | 하인리히 5세 | |
1126년 | 슈파이어 | 하인리히 5세 | |
1146년 | 슈파이어 | 콘라트 3세 | 제2차 십자군 원정 참여 결정 |
1147년 | 프랑크푸르트 | 콘라트 3세 | |
1152년 | 도르트문트/메르제부르크 | 프리드리히 1세 | |
1154년 | 고슬라어 | ||
1157년 | 비잔츠 | 프리드리히 1세 | |
1158년 | 피아첸차 인근 | 프리드리히 1세 | |
1165년 | 뷔르츠부르크 | 프리드리히 1세 | |
1168년 | 밤베르크 | 프리드리히 1세 / 하인리히 6세 | |
1178년 | 슈파이어 | 프리드리히 1세 | |
1180년 | 겔른하우젠 | 프리드리히 1세 / 하인리히 6세 | 베스트팔렌 공국을 쾰른 대주교에 수여 |
1181년 | 에어푸르트 | 하인리히 6세 | 하인리히 사자공 추방 |
1188년 | 마인츠 | 하인리히 6세 | |
1190년 | 슈베비슈할 | 하인리히 6세 | 하로트링겐 공국 폐지 |
1193년 | 슈파이어 | |하인리히 6세 | 리처드 1세의 재판 |
1196년 | 프랑크푸르트 | 하인리히 6세 | |
1205년 | 슈파이어 | 필리프 폰 슈바벤 | |
1213년 | 슈파이어 | 프리드리히 2세 | 1208년 밤베르크에서 살해당한 프리드리히의 숙부 필리프 폰 슈바벤을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 |
1235년 | 마인츠 | 프리드리히 2세 | |
1273년 | 슈파이어 | 루돌프 1세 | |
1287년 | 뷔르츠부르크 | 나사우 백작 아돌프 | |
1309년 | 슈파이어 | 하인리히 7세 | |
1338년 | 프랑크푸르트 | ||
1379년 | 프랑크푸르트 | ||
1356년 | 뉘른베르크 | 카를 4세 | 금인 칙서 |
1384년 | 슈파이어 | ||
1389년 | 헤프 | 벤첼 | 헤프 조약 |
1414년 | 슈파이어 | 지기스문트 | |
1444년 | 슈파이어 | 프리드리히 3세 | |
1487년 | 슈파이어 | 프리드리히 3세 | |
1487년 | 뉘른베르크 | 프리드리히 3세 | |
1488년 | 에슬링겐 | 프리드리히 3세 | 슈바벤 동맹 결성 |
1495년 | 보름스 | 막시밀리안 1세 | 제국개혁, 슈바벤 전쟁 특별세 |
1496/97년 | 린다우 | ||
1497/98년 | 프라이부르크 | ||
1500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05년 | 쾰른 | 란츠후트 계승 전쟁 종전 중재 | |
1507년 | 콘스탄츠 | ||
1512년 | 트리어/쾰른 | 10개의 제국관구 설치 | |
1518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21년 | 보름스 | 카를 5세 | 보름스 회의, 마르틴 루터 파문, 보름스 칙령 |
1522년 | 뉘른베르크 | ||
1522/23년 | 뉘른베르크 | ||
1524년 | 뉘른베르크 | ||
1526년 | 슈파이어 | 슈파이어 회의, 보름스 칙령 보류 | |
1529년 | 슈파이어 | 슈파이어 회의, 보름스 칙령 재개, 재침례파 처벌 선고(Wiedertäufermandat) | |
1530년 | 아우크스부르크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 |
1532년 | 레겐스부르크 | 페르디난트 1세 | 카롤리나 법전 반포 |
1541년 | 레겐스부르크 | ||
1542년 | 슈파이어 | ||
1542년 | 뉘른베르크 | ||
1543년 | 뉘른베르크 | ||
1544년 | 슈파이어 | ||
1548년 | 아우크스부르크 | 아우크스부르크 임시협정 | |
1550/51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55년 | 아우크스부르크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
1556/57년 | 레겐스부르크 | ||
1559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66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67년 | 레겐스부르크 | ||
1570년 | 슈파이어 | 군제 개혁 | |
1576년 | 레겐스부르크 | ||
1582년 | 아우크스부르크 | ||
1594년 | 레겐스부르크 | ||
1597/98년 | 레겐스부르크 | ||
1603년 | 레겐스부르크 | ||
1608년 | 레겐스부르크 | ||
1613년 | 레겐스부르크 | ||
1640/41년 | 레겐스부르크 | ||
1653/54년 | 레겐스부르크 | 페르디난트 3세 | 마지막 제국폐회결의(Jüngster Reichsabschied / recessus imperii novissimus) |
1663년-1806년 | 이후로 레겐스부르크 시청에서 영구적으로 회의를 가짐 |
6. 관련 문서
[1]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의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오스트리아 공국 외에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등 여러 국가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영지에서 나오는 힘으로 상당한 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국의회가 제국군 증강을 결정하면 이 제국군을 지휘할 권한도 있었다.[2] 다만 보헤미아 왕국은 제국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격으로 참석했지 보헤미아 왕으로서는 황제선거권만 행사했고 이조차도 17세기 이후에는 동수를 막겠다고 투표를 자진포기하기도 했다.[3] 여기에는 튜튼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호흐마이스터(기사단장), 잘츠부르크 대주교, 브장송 대주교 등이 전부 포함됐다. 독특한 점으로는 성직 계급의 지도자가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는 것.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은 세속 영방군주들에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성직 제후들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4] 1358년 발트해와 독일 북쪽의 자유도시들의 정치적/경제적 동맹. 15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7세기 말에 소멸했다.[5] 1663년부터 레겐스부르크에 영구의회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의회가 열리는 도시의 시의회가 의장을 맡아보기도 했다.[6] 의외로 작센 선제후국은 제국이 멸망하는 1806년까지 개신교 의회의 수장직을 맡았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67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작센 시민들은 여전히 개신교도가 주류였고 작센의 국교도 여전히 개신교였다. 그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마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1717년 브란덴부르크와 하노버가 이를 빌미로 개신교의 수장직을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7] 카를 5세의 이름으로 열렸으나 실제 회의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주도했다.[8] 피핀의 기증이란 프랑크 국왕 피핀이 자신의 왕위 계승을 교황 자카리아에게서 승인을 받고, 그 보답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를 도와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해 롬바르드 국왕을 몰아내고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여 그 땅을 교황에게 바친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