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6:15:16

신성 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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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부터 독일 제국까지 독일과 그 주변의 봉토들의 변천사.

1. 개요2. 중세 초기
2.1. 프랑크 왕국
2.1.1. 카롤루스 왕조2.1.2. 왕국의 분열
2.2.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2.2.1. 오토 왕조2.2.2. 교황과의 갈등2.2.3. 호엔슈타우펜 왕조
2.2.3.1. 영토 확장과 황제의 권력 강화2.2.3.2. 하인리히 6세의 급사와 중앙집권화의 실패
2.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3. 중세 후기
3.1. 황권의 약화와 금인 칙서3.2. 합스부르크 왕조의 제위 독점
3.2.1. 종교 개혁·구교의 갈등3.2.2.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자유도시3.2.3. 30년 전쟁과 전 국토의 황폐화
4. 근대
4.1.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갈등4.2.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후계자들4.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과 제국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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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문서.

2. 중세 초기

2.1. 프랑크 왕국

2.1.1. 카롤루스 왕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랑크 왕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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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00px-Merovingian_dynasty.jpg
파일:440px-Charles_Martel_01.jpg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마르텔
5세기 경 로마 제국의 세력이 날로 쇠퇴하면서 현지 게르만 부족들이 강성해졌다. 5세기 말과 6세기 초, 클로비스 1세가 이끌던 메로빙거 왕조라인강 부근에 모여살던 게르만 연합체인 프랑크족을 하나로 통일했고 확장을 거듭해 갈리아 북부와 라인강 유역 중뷰를 장악한 거대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8세기 중반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는 명목상의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카롤루스 마르텔 궁재가 이끄는 카롤루스 가문이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실세로 떠올랐다. 결국 751년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가 메로빙거 가문을 뒤엎고 스스로 프랑크 왕위에 오르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1]

768년에는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 1세가 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며 엄청난 기세를 뽐냈다. 뛰어난 정복군주였던 카롤루스 1세는 현재의 프랑스, 독일, 북부 이탈리아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모조리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와 직접 맞닿은 거대한 대왕국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의 실세로 떠오르자 교황은 이 프랑크 왕국을 이용하려 들었다. 당시 교황은 해주는건 없고 요구만 많은 동로마 제국에 질릴대로 질려 있었다. 게다가 726년 레온 3세성상파괴운동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와는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졌다. 교황은 새로 등장한 프랑크 왕국의 힘을 뒤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로마로부터 일소하고자 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797년 동로마의 이리니 황태후가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내쫒고 직접 제위에 오르겠다고 선포했는데, 라틴 교회는 오직 남성만이 기독교의 수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기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교황은 이 틈을 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 들었다. 이런 교황의 눈에 나타난 이상적인 후보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였다. 프랑크 왕국은 이전부터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교황청을 보호하고 교황령을 선물하면서 교황의 호의를 산 이력이 있었다.[2]
파일:프랑크 왕국(814).svg
파일:800px-Kaulbach_Die_Kaiserkrönung_Karls_des_Großen.jpg
814년 프랑크 왕국 서로마 황제로 대관받는 카롤루스 대제
800년 성탄절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1세를 서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해 324년만에 서방 제국의 제위를 복구했다. 동로마 제국은 당연히 로마의 정통 황제는 자신들의 황제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카롤루스 1세 본인도 교황 주관 대관식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동로마 황제였던 여제 이리니와 카롤루스 1세가 혼인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3], 812년 미하일 1세가 카롤루스 1세를 '로마 황제'가 아닌 단순한 황제로 인정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4]

2.1.2. 왕국의 분열

파일:Carolingian_empire_843.svg.png
베르됭 조약으로 3분할된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과 제위는 루도비쿠스 1세가 물려받았으며,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그의 장남이자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하던 로타리우스 1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인해 현대 독일의 동프랑크 왕국, 북이탈리아의 중프랑크 왕국, 프랑스의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5] 세력이 강했던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9세기 내내 시시건건 충돌하며 제위를 두고 다퉜는데,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한 번, 동프랑크의 카를 3세가 한 번씩 프랑크를 통일했지만 888년 카를 3세가 죽자 제국은 다시 쪼개졌고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의 제위 자체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은 중프랑크 왕국과 그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승계되었다.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중프랑크 왕국은 이리저리 쪼개지는 와중에 제위는 그의 아들 루도비코 2세에게 넘어갔다. 루도비코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제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다.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겠답시고 치고받고 싸웠던 것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여러 명이 군주를 자처하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교황도 이들이 원하는대로 황제 대관을 해주면서 제위 역시 왔다 갔다 했다.[6]

카롤루스 왕조 최후의 황제는 915년 즉위한 베렝가리오 1세였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가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카롤루스 왕조에서 시작된 황제위는 완전히 대가 끊겼고, 그의 사후 황제를 자칭할만한 실력자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제국은 962년 오토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38년 동안이나 공위 시대를 맞았다.

=====# 오토 1세 이후의 제국과 별개라는 관점 #=====
일반적으로 오토 1세대관식(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식(800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을 보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대관을 받을 때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 대관의 중요한 선례가 되기는 했지만,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식이 오토 1세에게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제국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우선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가 중간에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는 중프랑크로 계승되다가 924년 완전히 소멸했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같은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중 하나로 영토상 차이가 있다. 비록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었지만, 카롤루스 왕조 때 황제들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크 전역의 황제였다. 그러나 오토 1세 때는 서프랑크와 아를 왕국은 황제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아를 왕국은 후에 다시 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서프랑크는 제국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또한 황제 선출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카롤루스 왕조 시절 제위는 순수하게 혈통에 의한 상속이었다. 반면 카롤루스 왕조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세습과 제후들에 의한 선출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적용되었고 이 점은 단순히 혈통에 의한 상속과는 분명한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실권이 달랐다. 카롤루스 1세의 제위는 실권이 없는 완전한 명예직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업적은 전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시절 그의 제국 = 그의 직할 왕국이었으므로 자신의 직할 영지와 제국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은 나중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손자인 로타리우스 1세 시절에 시작된다. 즉 로타리우스 1세는 명목상 중프랑크, 서프랑크, 동프랑크를 아우르는 황제였지만 그의 직할 영지는 중프랑크에 한정된 것이었다.

반면 오토 1세와 그의 직계인 작센 왕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역시 명문화된 권한은 없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실제 제후들에게 영토를 빼앗거나 하사하고 작위와 통치권을 하사하거나 빼앗는 등 큰 실권을 행사했다. 당장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 때 제국 내 최대의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이에른 공국을 쪼개 분할을 명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또 카롤루스 1세가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은 것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이것은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되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왕조 이후 흐지부지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볼 필요가 있다. 궁예고구려를, 견훤백제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이들의 국가가 기존의 고구려, 백제와 같은 나라로 취급 받는 건 아닌 것처럼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만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지속되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서구에서도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루스 제국'(Carolingian Empire, 800년~888년)으로 부르기도 한다.

독일 역사학계는 동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연속성은 인정하지만, 962년 2월 2일 오토 1세의 대관식을 신성 로마 제국 성립으로 보기 때문에 둘을 같은 나라로 놓지는 않는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962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표기해 놓고, 800년을 각주 표기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와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SAT 교재, AP 교재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나라의 교과서에도 962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 카롤루스의 제국을 계승했다는 관점 #=====
파일:Albrecht_Dürer_-_Emperor_Charlemagne_and_Emperor_Sigismund_-_WGA06997.jpg
카롤루스 대제와 지기스문트 황제(Karl der Große und Kaiser Sigismund)알브레히트 뒤러
왼쪽 그림은 카롤루스 대제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그 그림이다. 당대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연속성만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 연속성이 끊긴 대공위시대 이전과 이후의 제국을 완전한 별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오토 1세 대관 이전의 공백기도 대공위시대처럼 일시적인 계승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 및 깃발과 의복 등을 갖다 바치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해명한 후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목상 동로마 제국의 신하로 들어갔기에, 교황에게는 카롤루스 1세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를 자칭하다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인정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토 왕조 역시 동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기에 가문의 교체만 있었을 뿐 제위는 그대로였다.

독일 왕국에서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과 옛 카롤루스 제국과의 연관성이 크게 강조된 것은 룩셈부르크 왕조 때의 일이었다. 황제 넘버링을 계산할 때,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시작하여 서프랑크왕인 대머리왕 샤를을 소급하여 카를 2세라 하고, 동프랑크왕인 비만왕 카를을 카를 3세로 만들고 나서 자신을 카를 4세로 칭했던 보헤미아 국왕 카렐 역시 룩셈부르크 왕조 출신이었다. 대머리왕 샤를이나 비만왕 카를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2세, 3세 넘버링없이 부르는 경우가 많다.

2.2.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2.2.1. 오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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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왕조의 혈통이 끊겨가는 건 이탈리아의 중프랑크 왕국 뿐만 아니라 독일의 동프랑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루스 왕조 출신 국왕 루트비히 4세가 911년 후사없이 죽으면서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를 새 국왕 콘라트 1세로 선출했다. 동프랑크 내부에서는 900년 경에 이미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로타링기아 이렇게 5개의 강력한 공국들이 등장했고, 이 공국을 다스리는 공작들이 콘라트 1세를 추대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죽기 직전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7]

이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특징들 중 하나인 황제 선출이 시작되었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지도자 선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8]

흔히 하인리히 1세의 즉위를 기점으로 독일 왕국의 시작이라고 본다. 919년 프리츨라르 회의에서 동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한 하인리히 1세는[9] 동프랑크를 찝적거리던 마자르족을 습격했고 933년에는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왕위를 공고히 했다. 하인리히가 936년 죽자 그의 아들 오토 1세아헨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명군이었던 오토 1세는 남동생과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하는 한편 공작의 임명을 통제하고,[10] 동프랑크의 주요 공작령 지도자들을 대거 자신의 인척으로 교체해버렸으며 왕족들이 함부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찍어누르는데에 성공했다.
파일:AKG160383.jpg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받는 오토 1세
오토 1세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951년에는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여왕의 도움을 받아 적들을 물리치고 그녀와 결혼해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955년에는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에게 결정적인 대승을 거뒀고, 962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하고 그 공로로 동년에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마침내 962년 요한 12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당시 교황 입장에서도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가장 성공적인 활약을 펼친 오토 1세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웠다.

오토 1세는 황제로 즉위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로마'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그의 후계자이자 967년에 즉위한 오토 2세 시절부터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지만 오토 2세가 동로마 황녀 테오파노와 결혼하면서 아예 관계를 단절하진 않았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토 3세는 고작 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로마의 집정관 크레센치오 2세 공작이 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아 독일과 북이탈리아를 통치했다.
파일:Holy_Roman_Empire_1000_map-de.svg.png
1000년경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11]
994년 오토 3세는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 996년에는 그의 사촌 그레고리오 5세를 최초의 독일 출신 교황으로 임명했다. 로마의 귀족과 추기경들은 독일 출신 황제와 그가 임명한 독일 출신 교황이 로마를 집어삼키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결국 크레센치오 2세를 중심으로 로마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들이 그레고리오 5세를 부정하고 대립교황 요한 16세를 내세우면서 한동안 2명의 교황이 존재하기까지 했으나 황제가 빠르게 반란을 진압하면서 다시 잠잠해졌다.[12] 이후 오토 3세는 슬라브족을 제국의 국경 내로 편입, 동화시키려 노력했고 기독교와 라틴 문화의 확산을 장려했다. 또한 로마의 교황과 황제를 중심으로 제국 내 왕국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시도했으나 1002년 21살의 나이에 갑자기 요절하고야 말았다.

오토 3세가 워낙 일찍 죽어 결혼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황위는 6촌 형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넘어갔다. 주교와 성직자들을 제국 내에 편입시키고 통제하는데에 나름 업적을 남겼던 하인리히 2세는 1024년에 죽었다. 이후 귀족들의 추대로 1027년 콘라트 2세가 선출되면서 오토 왕조가 종결되고 잘리어 왕조가 시작되었다. 콘라트 2세가 다스리던 시기의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공국, 부르군트 왕국 이렇게 4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합체였다.

걸출한 황제였던 콘라트 2세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공작들을 견제하기 위해 비자유민 출신의 시종 계급 '미니스테리알레(Ministeriale)'들에게 많은 봉토를 하사했다. 미니스테리알레는 본디 귀족들의 업무를 보던 계급으로 병역이나 가직을 도맡아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하사받은 봉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나중에는 제국의 또다른 기반인 제국 기사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콘라트 2세는 미니스테리알레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제후를 감시토록 만든 한편, 주교 영지를 제국 직할령으로 만드는 등 독일 제후의 숨통을 틀어쥐고 살았다.

2.2.2. 교황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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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노사의 굴욕.jpg
파일:9e2f169cb7c1137083c2913f887860d2.jpg
카노사의 굴욕 1100년 경 신성로마제국의 강역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가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했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콘라트 2세, 하인리히 3세 등 황제들은 이를 바탕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교황들을 찍어내는 등 강력한 황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13] 이 구조에 불만이 많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정면으로 반발했고, 당시 황제이자 하인리히 3세의 후계자 하인리히 4세서임권 분쟁에 들어갔다.

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간섭을 거부하고 오히려 황제 휘하의 주교들에게 교황을 파문해버리라고 압박했다. 하인리히 4세는 아예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으로 인정도 하지 않아 그의 본명인 '힐데브란트'라 부르기까지 했다. 반대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고 그의 폐위를 선언했으며 귀족들이 그를 섬길 이유도 없다고 선포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불리해진 쪽은 오히려 황제였다. 귀족들이 슬슬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자칫하면 제위를 빼앗길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 아군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는 1077년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을 치렀다. 그는 교황 앞에 무릎꿇은 대가로 파문을 해제받았다.[14]

하인리히 4세의 황권이 약해지자 독일 귀족들은 따로 슈바벤의 루돌프 공작을 새로운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카노사에서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재위 말기로 갈수록 더 많은 반란, 봉기, 파문에 시달렸고 심지어 아들들에 의해 유폐되고야 말았다. 하인리히 4세를 유폐하고 제위를 찬탈한 차남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교황, 주교들과 보름스 협약을 맺어 정교 갈등을 겨우겨우 수습했다. 허나 이는 오히려 독일의 제후들과 교황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주교 서임권은 물론 황제가 누렸던 종교적인 권한은 거의 박탙당하고야 말았다. 이후 독일은 수많은 제후와 영주들이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난립하는 복잡다단한 정치체계를 이루는데, 이를 영방국가 체제라 부른다.

한편 이 시기는 독일 민족이 당시 인구 희박지였던 동유럽으로 이동해 정착하던 동방식민운동의 시기였기도 하다. 당시 동유럽에는 슬라브계, 핀란드계, 발트계 민족들이 일부 살고는 있었지만 그 수가 적어 인구 밀도가 희박했다. 그래서 독일어권 민족들은 쉽게 이들을 밀어내고 새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구 동독 지역, 폴란드 서부가 새로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으로 들어왔고 독일인들은 저멀리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일대까지 진출했다. 슐레지엔은 토착 제후들이 폴란드 국왕의 간섭을 피해 자치권을 추구한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1100년대 후반부터는 포메른 공국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며 튜튼 기사단의 정복으로 완전한 독일어권으로 편입됐다.[15]

2.2.3. 호엔슈타우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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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1. 영토 확장과 황제의 권력 강화
1125년 하인리히 5세의 죽음으로 잘리어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하인리히 5세의 친척을 뽑는 대신에 적당히 강력하지만 나이가 매우 많았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새 황제로 선출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얼마 못가 사망하자 귀족들은 다시 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그래서 그들은 로타르 3세가 생전 총애하던 후계자이자 사위였던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가 아닌 하인리히 4세의 외손자이자 하인리히 5세의 외조카였던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콘라트 3세를 새 황제로 선출했다. 이렇게 신성 로마 제국 역대 왕조들 중 가장 강력한 황권과 거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작되었다.[16]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의 또다른 업적은 제국 전역에 '란트프리덴(Landfrieden)'의 확립이었다. '땅의 평화'라는 뜻을 가진 이 제도는 봉건 영주들이 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제국 법정이나 기소, 소송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만든 제도였다. 독립적인 사조직이 제국 내에서 멋대로 폭력, 군사력을 휘두르는 것을 억제하고 법치주의를 적용해 모든 행위를 법에 묶어놓으려는 시도였던 것이다.[17] 뿐만 아니라 황제와 제후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에 대응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신도시를 지었다. 그 이전에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내려오는 도시나 주교좌가 있는 곳에만 도시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인구 폭증으로 더이상 그곳들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 이 시기에 설립된 도시들 중에는 프라이부르크뮌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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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18]
콘라트 3세 사후 1155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는 황권을 교황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싶어했다. 황제는 교황의 대관에 의해서 그 권위를 얻었는데, 이 교황으로부터 황제만의 독립적인 권위를 얻어내고자 제국의 '로마성'을 강조했던 것. 115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법령을 본떠 모호하던 황제의 권한을 정확하게 확립했다. 공공 도로, 관세, 주화 발행, 벌금 징수, 공직자의 임면권 등이 황제의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았다. 이 권한들은 모두 옛 로마 제국로마법 대전과 상당히 유사했는데 이 역시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프리드리히 1세의 계획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이탈리아에 깊숙히 관여했다. 이런 개입은 북이탈리아의 자유분방한 도시국가들과의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고 황제는 밀라노와 시시건건 충돌했다.[19] 게다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즉위를 부정하고 소수파가 선출한 대립교황을 지지하기까지 하는 등 교황과도 다툼이 끊일 날이 없었다.[20] 독일에서는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21]을 정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지만, 반면 사자공이 황제의 정책에 미온적으로 반응하고 결정적으로 황제의 군사 요청도 씹어버리자[22] 결국 분노해서 사자공의 모든 영지를 몰수해버렸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가 킬리키아에서 익사했다.

독일 귀족들은 호엔슈타우펜 왕조 아래에서 동방식민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서부 슬라브족들만이 희박하게 살아가던 동쪽 땅들을 개간해 평화롭고 성공적인 식민정책을 펼친 것. 독일어를 사용하는 농부, 상인, 유대인들이 이 지방으로 이주했고 포메른과 슐레지엔이 새롭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다. 한편 폴란드 고공 콘라트 1세는 1226년 고대 프로이센인의 기독교화를 촉진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을 프루시로 초청해 정착시켰다.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공국의 전신인 독일 기사단국을 세워 동방식민운동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결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하인리히 6세 아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쿠스탄차 1세와 결혼해 이를 빌미로 시칠리아 왕국을 제국의 영토로 추가했다. 하인리히 6세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보헤미아 왕국, 폴란드 왕국에 봉건적 주종관계에 있었고 키프로스, 소아시아까지 황제에게 봉건적인 경의를 표했다. 이베리아-모로코의 칼리프는 튀니스와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하인리히 6세의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인리히 6세는 카롤루스 대제 이래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고 유럽 각지의 국왕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2.2.3.2. 하인리히 6세의 급사와 중앙집권화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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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신성로마제국의 강역
이대로라면 신성 로마 제국은 누더기 제국에서 벗어나 강력한 군주 아래 하나로 움직이는 단일 제국으로 변모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이 대놓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견제해 괴롭혔으며,[23] 강력한 군주를 원하지 않던 교황 역시 계속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하인리히 6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위 세습을 확립하려 시도했지만 귀족과 주교들의 격렬한 반발로 실패했다. 그와중에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31살이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급사해버리면서 강력한 호엔슈타우펜 제국의 꿈은 허사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에게는 아들 프리드리히가 있었지만 당시 고작 4살에 불과했기에 친정을 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의 동생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가 새 로마왕에 즉위했지만 반호엔슈타우펜 세력도 결집해 하인리히 사자공의 아들 오토 4세를 새로운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필리프오토 4세는 제위를 두고 치열하고 내전을 벌였다. 필리프가 승기를 잡는 듯 했지만, 1208년 필리프가 사적인 말다툼으로 암살당해버리는 바람에 내전은 자연스레 오토 4세의 승리로 끝났다. 교황 주관 대관식을 치른 오토 4세는 한동안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교황은 오토 4세의 최대 후원자였던 잉글랜드 왕국과 힘을 합친 강력한 제국의 부상을 두려워했고, 마침 하인리히 6세의 정당한 후계자 프리드리히 2세가 성인이 되자 바로 그를 지원해 새로운 대립왕으로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반오토파를 모으고 또 한번 내전을 벌였다. 잉글랜드의 존 왕과 오토 4세가 한편,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한편이 되어 싸웠다. 이 내전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승리하며 제국은 다시 통일되었다.[24] 그러나 한 번 무너져버린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다시는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강력한 제국을 원했으나 그의 치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약화일로였다. 그는 내전 도중 교황에게 시칠리아를 제국에서 분리시키겠다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 파문당했고,[25] 1228년에도 제6차 십자군 원정을 친히 이끌었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일시적인 복구에 그쳤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반도에 집중하는 동안 독일의 귀족들은 갈수록 자율성을 띠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들의 압박에 밀려 독일 내에서 갈수록 많은 이권들을 포기했다. 징세권, 화폐 주조권, 요새를 지을 권리들을 빼앗겼고 살판난 지방 귀족들은 갈수록 황제의 말을 무시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집착하는 와중에 알프스산맥 이북의 독일 귀족들은 조용히 있어주는 대가로 많은 이권들을 챙겨가며 더욱 강력해졌다.[26]

보헤미아 왕국이 처음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보헤미아는 이미 중세부터 중요한 지방이었는데, 1198년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가 도움이 시급했던 필리프를 도와주는 대가로 보헤미아 왕위를 받았다. 1212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시칠리아의 황금 황소'라고 불리는 3개의 문서를 받아내어 보헤미아 왕위의 세습권과 주교 임명권 등을 인정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이 강성해짐에 따라 제국에 대해 보헤미아가 지는 정치적, 재정적 의무는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2.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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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던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사라진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아예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대공위시대가 개막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자 차남 콘라트 4세가 제위 계승을 시도했지만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지극히 경계하던 교황은 그를 되려 파문하고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254년 콘라트 4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콘라트 4세의 아들은 고작 2살에 불과했기에 황제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미 프리드리히 2세 시절 대립왕으로 즉위한 홀란트 백작 빌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1256년 죽어버렸다.

콘라트 4세의 죽음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위는 1254년부터 1273년까지 무려 19년 동안 공백을 맞았다. 잉글랜드와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를 독일왕으로 내세웠고 프랑스와 호엔슈타우펜파는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를 독일왕로 내세웠다. 리처드나 알폰소 10세나 둘다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교황은 오히려 이런 사태를 즐기며 아무에게도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무려 20년이나 지속되고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하자 교황도 어쩔 수 없이 독일왕을 대관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273년 콘월 공작 리처드가 죽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선거를 열었고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2세 폰 에프슈타인과 뉘른베르크 성백 프리드리히 3세[27]의 주도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백작 루돌프 4세를 새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했다. 사실 루돌프 1세가 왕위를 차지한 것은 오히려 한미하고 힘이 약한 가문 덕택이었다. 유력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꺼리던 제후들이 일부러 적당히 세력이 약한 루돌프 1세를 택한 것이다. 공작이 아닌 백작이 왕으로 선출된 것 역시 루돌프 1세가 최초였다. 이로써 20년에 걸친 대공위시대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루돌프 1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세력 확장을 거듭했다.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키면서 세력을 꺾었고 아들 알브레히트에게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등을 분봉하는가 하면 케른텐 공국, 크라인 변경백국을 동맹 괴르츠 백작 마인하르트에게 분배하였다. 한미한 시골 백작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곧 제국 내에서 가장 강대한 가문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다른 제후들도 점차 합스부르크 가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루돌프 1세가 1291년 사망하자 맏아들 알브레히트 대신 나사우 백작 아돌프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알브레히트는 아돌프를 물리치고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로 즉위했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황제 대관식은 치르지 못했고, 1308년에는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

알브레히트가 암살당하자마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동생 샤를을 새 독일왕으로 선출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필리프 4세는 아비뇽에 위치한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뿌려대며 독일 귀족들을 포섭했고, 쾰른 대주교의 약속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샤를을 독일왕으로 선출하겠다는 야심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걸 지극히 경계하던 클레멘스 5세가 지원을 거부하면서 꺾이고야 말았다. 게다가 유력 독일왕 후보로 루돌프 1세의 외손자였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라인 궁정백이자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돌프 1세가 등장하면서 샤를의 꿈은 갈수록 멀어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독일 제후들은 이미 오랫동안 황제 없이 살아온 터라 굳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황제를 새로 올리기는 죽어도 싫었기 때문에 발루아의 샤를이나 라인 궁정백 겸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돌프 1세나 둘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제후들은 대신 어중간한 입지의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를 새로운 독일왕 하인리히 7세로 선출했다. 하인리히 7세는 1308년 아헨에서 독일왕으로 대관식을 치렀고 1312년 6월에는 로마에서 추기경들에게[28] 황제로 대관받았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 이후 62년 만에 신성 로마 황제가 부활한 것이다.[29]

대공위시대의 영향은 상당히 컸다. 황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안그래도 누더기였던 제국은 귀족들의 자치권이 커짐에 따라 더더욱 지방분권화되어버렸다. 원래 선출로 뽑혔던 황제였지만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유력 제후들의 투표로 뽑혔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공포된 《금인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왔다.

3. 중세 후기

3.1. 황권의 약화와 금인 칙서

대공위시대를 종결한 하인리히 7세는 이탈리아의 구엘프 파벌과 맞서싸우다가 1312년 38살의 나이에 급사했다. 대관식을 치른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죽어버리자 귀족들은 다시 제위를 놓고 다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비텔스바흐 가문루트비히 4세[30]와 전전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였다. 황제선거에서 루트비히 4세는 5표, 프리드리히는 4표를 얻으면서 루트비히 4세가 간발의 차로 1314년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리드리히가 이에 불복하고 쾰른에서 또다른 대립왕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제국은 또다시 내전에 빠져들었다. 루트비히 4세는 1322년 가멜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리드리히를 포로로 붙잡았고 1325년 트라우스니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하며 단독 독일왕으로 인정받았다. 3년 후에는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루트비히 4세는 제국의 자유도시들을 밀어주는 한편 튜튼 기사단을 지원하고 룩셈부르크 가문의 힘을 빼놓는데 주력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기반을 다지는데 열중했기에 당연히 적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31] 특히 교황 클레멘스 6세가 1346년 여름,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렐을 새로운 대립왕으로 선출하면서 루트비히 4세의 힘은 갈수록 약해졌다. 루트비히 4세는 카를 4세와 내전을 벌이다가 1년 후인 1347년 곰 사냥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루트비히 4세의 신하들은 슈바르츠부르크의 귄터를 새 대립왕으로 추대했지만 그마저도 2년 후 죽어버리면서 카를 4세가 유일한 독일왕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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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32] 금인 칙서
새롭게 황제로 즉위한 카를 4세는 대단히 현실적인 군주로서, 오랜 분란을 끝내기 위해 1356년 그 유명한 금인 칙서를 반포했다. 명분은 다시는 대립왕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으로 선제후를 세속 선제후 4명, 성직 선제후 3명 총 7명으로 고정했으며 황제선거의 절차,[33] 선제후의 권한과 의무를 명시했다. 카를 4세는 금인 칙서를 통해 교황, 합스부르크, 비텔스바흐 가문을 견제할 수 있었고 본인의 봉토였던 보헤미아 왕국의 지위를 격상시킬 수 있었다. 카를 4세의 결단은 분명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벌어진 치열한 내전을 잠재우고 평화를 불러오긴 했지만, 반면 선제후들은 독립적인 군주나 다름없게 되었고 황제는 선제후들 중 가장 강한 선제후 수준으로 격하되면서 중앙의 권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카를 4세는 아들 바츨라프 4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빼앗는 등 온 힘을 쏟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선제후들은 이 금인 칙서의 최대 수혜자였다. 재판권,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 유대인 보호권 등을 모두 손에 넣었고 선제후 영지의 분할 금지와 장자 상속권, 황제의 호출에 응하지 않을 권리와 소환되지 않을 권리, 선제후에 대한 반란은 대역죄로 처벌, 선제후의 지위 확립 등 수많은 혜택을 얻어갔다. 게다가 선제후들은 얻어낸 선거권을 이용해서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선거권을 무기로 황제 후보를 협박해 수많은 특혜를 뜯어갔다. 사실상 하나의 제국 아래 7개의 선제후 왕국이 세워진 것과 같았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의 황제들은 점점 자기 소유의 영토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까지는 '제국 재산(Reichsgut)'라고 하여 황제 소유의 재산들이 부동산, 상품, 금 등의 형태로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 제국 재산은 특정 개인이나 가문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직 '황제'의 칭호를 단 사람만이 직무용으로 쓸 수 있는 공적 재산이었다. 이전의 황제들은 이 제국 재산을 기반으로 재정을 꾸렸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의 황제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주요 자금을 끌어왔다. 제국의 파편화와 분권화가 심해지면서 운용하기 까다로운 제국 재산보다 훨씬 더 다루기 쉬운 본인 가문 소유의 땅에 의존한 것이다. 루트비히 4세는 자신의 영지 바이에른 공국과 저지대 국가[34] 힘을 끌어왔고,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제국 재산들은 지방의 공작이나 귀족들에게 팔려나가거나 충성의 대가로 하사됐다. 이렇게 황제가 제국 전역이 아닌 자기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만 더욱 큰 관심을 가지면서 중앙의 권력 약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3.2. 합스부르크 왕조의 제위 독점

3.2.1. 종교 개혁·구교의 갈등

15세기 중반부터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황제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카를 4세가 죽자 제위는 잠시 혼란기를 거쳤다가 카를 4세의 차남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일차적으로 넘어갔다. 지기스문트는 당시 최대 현안이던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여 난립하던 교황들을 정리하고 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새 교황으로 세웠다.[35] 또한 얀 후스후스파를 섬멸하기 위해 후스 전쟁을 벌였으나 진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지기스문트는 오직 딸 엘리자베트만 남겼는데,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와 결혼했다. 알브레히트는 엘리자베트와의 결혼과 발칸반도에서 치고 들어오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위협 방비를 근거로 새로운 독일왕으로 선출되는데 필요한 선제후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360여년에 걸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독점이 시작되었다.

알브레히트 2세가 즉위 1년만에 사망하자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친척[36]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가 새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재위 내내 반란과 친척들 간의 갈등에 시달렸다. 타고난 무능함 때문에[37] 선제후 등 영방군주들이 허구한 날 반기를 들었고 심지어 친동생 알브레히트 6세는 군대까지 이끌고 와서 형을 겁박했으며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크로아티아군에게 을 빼앗기고 린츠까지 도망가는 굴욕까지 겪기까지 했다. 그나마 명줄이 길어 경쟁자들이 먼저 죽어주었고 실력있는 아들 막시밀리안이 분열된 오스트리아를 재통합시켰으며, 마차시 1세가 급사하자 헝가리-크로아티아군을 오스트리아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1493년 프리드리히 3세가 죽자 막시밀리안 1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제국개혁을 반포하야 황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황권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이래로 꾸준히 쇠퇴해왔는데, 제국개혁의 목표는 황제 아래 강력하고 통일된 제국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사적인 폭력과 결투, 복수를 금지하고 모든 다툼을 제국의 사법기구 아래에서 판결받도록 만들었다. 또한 로마법을 수용해 제국 전역에 적용시켰으며,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을 설치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일부러 반 황제 세력의 수장인 마인츠 선제후 베르돌트(Berthold von Henneberg 1442~1504)의 힘을 빼놓았고, 재무관청을 설치해 행정을 일원화했다. 뿐만 아니라 1500년에는 제국을 여러 관구로 나누어 이전보다 통일된 행정을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38] 제국개혁은 전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은 이 개혁을 통해서 19세기까지 지속된 제도들 대부분을 확립했으며 기반 인프라 제공, 초기적이지만 근대적인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는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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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 카를 5세가 다스리던 강역
막시밀리안 1세는 제국개혁 뿐만 아니라 혼인동맹정책을 왕성하게 펼쳤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혼인동맹과 기막힌 행운이 겹친 결과로 맏손자 카를 5세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쓴 인물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는 상속으로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 스페인, 이탈리아 일부라는 엄청난 영토를 물려받았고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식민지 영토를 개척했다.[39] 카를 5세 개인의 판도는 스페인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 행운아 카를 5세의 시대에 이 모든 걸 뒤엎는 거대한 시대적 해일이 밀어닥쳤으니 1517년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이래로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구교와 신교의 갈등에 정면으로 휘말렸다.[40]

처음에는 카를 5세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개신교 제후들을 밀어붙이면서 가톨릭의 위세를 과시하는 듯 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최대 라이벌인 프랑수아 1세를 꺾었고,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어쨌든 1529년 오스만 제국과의 제1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냈으며[41],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하며 가톨릭의 입지를 재확인하고 유럽 대륙의 유일한 패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슈말칼덴 전쟁 직후부터 카를 5세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승리에 취하고 늙어서 지나치게 꼬장꼬장해진 황제는 신교도의 싹을 잘라버리려 들었고 이는 제국 전역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자신의 대리인이자 차기 황제나 다름 없는 입지였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몰아내려 시도하는 완벽한 실책을 범하고야 말았다. 강력 반발한 페르디난트 1세는 영방제후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독자적으로 독일의 신교도들과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맺었고, 유명무실해진 황제는 무력한 채로 스페인에서 사망했다.[42]

카를 5세 이후에도 제국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다툼으로 썩어들어갔다. 페르디난트 1세막시밀리안 2세는 각기 다른 이유이기는 했지만[43]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막시밀리안 2세의 무능하고 유약한 후계자 루돌프 2세가 국정을 방기하고 천문학, 점성술, 고고학, 연금술에 빠져든 채 프라하에서 은둔 생활을 하자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형 루돌프 2세를 감금하고 선출된 마티아스는 멜히오르 클레즐 추기경(Melchior Klesl 1552~1630)과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을 조율하려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이 신구교 갈등은 1619년 페르디난트 2세의 선출로 30년 전쟁이라는 대재앙으로 폭발했다.

3.2.2.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자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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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동맹과 자유도시들의 교역 지도
신성 로마 제국의 파편화되고 분권화된 정치 체제는 의도치 않게 자본주의상인들의 발전을 불러왔다. 당시 제국에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11세기 인구 증가와 상업발전으로 이 도시국가들이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 기존 주교나 영주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치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민들간의 서약공동체인 코뮌을 설치, 다양한 방법으로 자치를 요구했다. 황제들은 이 상황을 써먹기로 결심했다. 도시들이 영주의 손에서 독립을 얻어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후들의 권력이 약해진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이들을 아예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1200년대와 1300년대의 황제들은 도시에 칙령을 내려 자치권을 인정하였는데, 이를 자유도시라고 부른다.[44]

자유도시는 주교나 영주가 아닌 시민들 스스로가 다스리는 구조였다. 물론 실상은 유력 대가문 몇몇이 서로 결탁해 도시를 다스리는 과두정이나 독재에 더 가까웠다. 말이 자유도시지, 인근 제후의 심기를 거스르면 망하는 일도 흔했기에 매일 주변 제후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했고 정치적으로도 극히 불안정했다. 시의회 내부에서는 장인조합, 상인, 귀족, 명문가들 사이의 암투가 치열해 싸움 그칠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도시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시민들은 정치적 특권층으로 인정받았고 스스로의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이 자유도시들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것이 한자동맹이다. 14세기 초 플랑드르가 급부상하자 위협을 느낀 라인강과 발트해의 상업도시들이 힘을 합쳐 세운 무역 공동체로, 뤼베크를 맹주로 쾰른, 브레멘, 베를린, 함부르크, 뮌스터, 마그데부르크와 제국 외 독일어권 도시인 단치히, 리가 등도 참여해 90여 도시가 참여하는 대형 동맹이었다. 1370년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면서 그 세력이 정점을 찍었고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해 전성기 시절에는 북해발트해의 패자로 군림했다. 한자동맹은 여러 이유로 1450년대 이후 쇠퇴했지만,[45] 제국 내에 퍼진 자본주의와 상업의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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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경제의 중심이었던 아우크스부르크
1450년대 이후 남부 독일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울름, 레겐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도시에서 은행업과 거대 자본 카르텔들이 등장했다. 특히 제국의 자본이 블랙홀처럼 모여들던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푸거 가문, 벨저 가문, 바움가르트너 가문 등 거대한 자본가 가문들이 등장하며 초기 자본주의의 수도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특히 막시밀리안 1세가 우편국을 설치하면서 자본주의의 발달은 더욱 가속화됐다. 대륙을 관통하는 우편선이 깔리며 인스브루크, 베네치아, 브뤼셀, 안트베르펜 같은 대도시들이 하나로 연결됐으며, 푸거 가문 같은 은행가들은 이 우편선을 이용해 도시들마다 지점을 설치하고 자본을 불렸다.

하지만 이같은 신성 로마 제국의 경제는 1500년대 중후반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1557년, 1575년, 1607년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가가 연달아 파산하면서 이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푸거 가문과 은행가들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신대륙이 발견되며 유럽 경제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갔다. 신대륙에서 쏟아져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자원들은 헝가리 왕국티롤의 중요성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유럽 본토의 자원과 인력이 원시적인 운하와 도로에 묶여서 제대로 이동하지 못했던 것에 반해 신대륙에서는 수없이 많은 항구들이 아무 제한없이 막대한 자원들을 쏟아냈다. 제국 본토의 경제적 가치는 날로 감소했고, 독일은 19세기 말까지도 1500년대의 경제적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독일 본토는 경제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제국에 속해있던 저지대 국가는 이야기가 달랐다. 거대한 물동량을 바탕으로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막시밀리안 1세가 저항을 막기 위해 부여해준 특권[46] 덕분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는 항구로 떠올랐다. 한때 세계 물동량의 40%가 네덜란드를 지나간다고 할 정도였다.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가가 파산을 연발하며 신용을 잃어버리자 상인들은 칼같은 신용으로 유명한 네덜란드로 몰려왔다. 네덜란드는 그 덕에 유럽 최고로 부유한 지역이 되었고 1600년대 내내 황금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3.2.3. 30년 전쟁과 전 국토의 황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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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47]
마르틴 루터가 촉발시킨 종교 개혁은 제국 내에 극심한 종교적 분열을 유발했다. 카를 5세는 개신교 제후들을 억누르려 시도했지만 무리한 탄압과 내부의 계승 갈등 때문에 실패하고, 스페인으로 은퇴하여 무력해진 상태로 사태를 관망했다. 그나마 페르디난트 1세의 노력으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어 루터파 개신교의 권리가 인정받으면서[48] 루터파와 가톨릭 사이에는 다시 위태로운 안정이 찾아왔지만, 17세기 들어서 칼뱅파의 부상으로 상황이 또 달라졌다.

칼뱅파는 루터파보다도 더 급진적인 종파였다. 루터파는 가톨릭의 교리만 거부했을 뿐 종교에 따라오는 정치사회적 구조는 기존의 절대주의적인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도시민들이나 지역 영주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칼뱅파는 아예 기존의 사회구조 자체를 부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된 시점에서는 칼뱅파의 세력이 미약했지만 이들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49]

칼뱅파의 대두와 함께 신교와 구교 사이의 갈등은 더욱 악화됐다. 1618년에 골수 가톨릭 신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가톨릭만을 강제하려 들자, 이에 반발해 귀족들이 창문 밖으로 왕의 대리인들을 던져버리는 대사건이 터지면서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30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페인 등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전쟁이었다.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총 4차에 걸쳐서 진행됐다. 1차 전쟁은 보헤미아와 팔츠의 주도권을 두고 페르디난트 2세 황제와 보헤미아인 귀족들에 의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50]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전쟁은 황제의 승리로 끝나며 종결됐다. 2차 전쟁은 덴마크-노르웨이 국왕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공작이었던 크리스티안 4세가 제국이 흔들리는 틈을 타 잉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제국을 침공하며 시작되었으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라는 뛰어난 황제파 장군의 등장으로 오히려 덴마크가 유틀란트 반도까지 위협당하는 역관광을 당하며 역시 황제파의 승리로 끝났다.

1차와 2차 전쟁을 모두 황제파의 우위 속에 끝낸 페르디난트 2세는 기세당당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황제는 야예 <복권 칙령>(Restitutionsedikt)을 내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이전으로 가톨릭의 위세를 되돌리려 들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태를 관망하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와 같은 온건파 제후들의 분노를 부르는 등 당연히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고, 개신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제국을 침공했다. 구스타브 2세는 온 독일을 휘젓고 다니며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측 총사령관 틸리 백작까지 죽여버리는 등 황제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가 1632년 발렌슈타인과의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며 개신교 군대의 세는 크게 약화됐고, 결국 새로 즉위한 페르디난트 3세 황제가 이 틈을 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을 어느 정도 제압하고 1635년 프라하 조약으로 전쟁을 일시 종결시켰다. 하지만 스웨덴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독일 북부 해안지대 포메른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지막 전쟁이자 4차 전쟁인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황제의 대패로 끝났다. 페르디난트 3세는 전쟁을 종결하고 싶어했지만 포메른 일대에 대한 스웨덴의 욕심[51]과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겠다는 프랑스의 야심이 맞물려 전쟁을 마음대로 끝내지 못했다. 지원만 해오던 프랑스는 아예 직접적으로 참전하여 남독일을 휩쓸고 다녔고, 스웨덴은 북독일과 보헤미아를 약탈했다. 너무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비어버린 합스부르크 황가는 이에 맞설 여력이 없었다.[52] 오랜 동맹이자 같은 합스부르크스페인마저도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으로 바빴던 터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황제군이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협상이 진행됐고,[53]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며 마침내 30년 전쟁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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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에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혔다.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전쟁으로 사라졌다. 300여개의 영방국가들은 반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떨어져나가며[54] 합스부르크 왕조에 치명타를 입혔고,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수준으로 무너졌다.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프랑스스웨덴은 각자 유럽 대륙과 북유럽의 패권국이 되었고 네덜란드,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벗어나 독립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고,[55] 뿔뿔히 분열된 독일 지방은 100여년 후 독일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제적 입지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영방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56] 특히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인데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이렇듯 제국은 이후 오스만 제국의 끊임없는 확장에서의 사례에도 보이듯,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함으로서 구성원들의 주권과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시에 제국 구성원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 역시 해체시까지 잘 수행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파편화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관점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57]

페르디난트 3세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후폭풍을 수습하고 스웨덴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는 등 동분서주하다가 1657년 사망했다. 그나마 합스부르크 왕조의 행운이라면 페르디난트 3세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1세가 외교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1658년 즉위한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 왕국,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였으며 퇴쾨이 임레로 인해 촉발된 제2차 빈 공방전과 이어지는 대튀르크 전쟁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오스만 헝가리에르데이 공국을 합병하며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을 병합했다. 가톨릭을 중시해 제국 내 상공업의 발전은 지지부진했으며 같은 합스부르크계인 스페인을 내다버리다시피하는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58] 그래도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북독일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다스리는 벨프 가문의 개신교도 군주들의 딸과 자신의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을 새로이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책봉하는 등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무너지던 신성 로마 제국 내 오스트리아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톨릭을 후원해 반종교 문화운동을 펼쳤고 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치장했다. 이 당시의 빈은 바로크 문화의 수도였으며 빈에서는 튀르크가 남긴 동양적 문화가 흥성해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미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레오폴트는 '바로크 황제'라고도 불렸다.

제위는 1705년 요제프 1세에게 넘어갔지만 그가 6년 만에 천연두로 죽으면서[59] 다시 그의 동생 카를 6세에게 넘어갔다. 카를 6세는 이곳저곳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썩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섣불리 참전했다가 패배해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통치권을 넘겨줬고[60]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제7차 튀르크 전쟁에서도 패배해 벨그라드 조약을 맺고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등 영토를 상당히 빼앗겼다. 카를 5세가 군사적 실패를 연발하자 점차 유럽은 합스부르크 황가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고, 때문에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할 때부터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레오폴트 1세 까지만 하더라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나름 열의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다. 그러나 요제프 1세카를 6세 대에 들어 점차 제국 경영을 포기하고 합스부르크 제국 통치에 주력했고 요제프 2세 대에 들어서 제국 문제는 거의 등한시되었다.

4. 근대

4.1.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갈등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356년의 금인칙서로 공식적인 7명의 선제후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제국의 북동쪽 변방에 불과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415년 호엔촐레른 가문프리드리히 1세가 집권한 이래 노이마르크[61] 동부 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뻗어나갔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계기로 요아힘 2세 헥토어 선제후는 루터교회로 개종하였고 부국강병책을 시행해 중앙집권화에 성공했으며,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권을 확보하는 등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요한 지기스문트 선제후는 1614년에는 크산텐 조약으로 클레베 공국과 마르크, 라벤스베르크 등 베스트팔렌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할 교두보를 마련했고 1618년에는 가까운 친척이자 장인이었던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하자 폴란드 국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제국 밖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30년 전쟁의 바로 한복판에 있었기에 16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외부의 프로이센 공국을 중심으로 재기를 이룩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휘하에서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30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힌터포메른[62]을 확보하는 한편 루스 차르국스웨덴이 일으킨 대홍수를 이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보유한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권을 폐지하는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프로이센 공국의 융커 계층을 탄압하고 신분제 의회를 베를린 중심으로 통합하여 브란덴부르크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하였다. 1701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레오폴트 1세 황제에게 '왕'을 칭할 권리를 얻어내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국왕'으로 스스로를 격상시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대관식을 치렀다.[63]

당시 독일의 최고 종주권자는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1452년 합스부르크 가문 레오폴트계의 프리드리히 5세가 프리드리히 3세로 선출된 이래로 계속해서 황제를 배출했고,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와 카스티야-아라곤의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오도록 하였으며 카를 5세 치하에서 전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전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까지 얻어내며 중부 유럽 전역을 손에 틀어쥐고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을 호령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황제들은 죄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고 합스부르크는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을 모두 겸임한 어마어마한 대가문이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 발생하면서 가톨릭의 후원자를 자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국 내부의 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침체기에 빠졌다. 1555년에는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로 개신교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30년 전쟁으로 제국의 권위는 수직낙하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북부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작센 선제후국[64]을 제치고 새로운 도전자로 떠올랐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 프리드리히 1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 이어지는 명군 라인을 타고 급속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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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65] 프리드리히 대왕
이때까지만 해도 대놓고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1740년 황제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등이 시작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를 6세의 승하를 틈타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 산하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카를 6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는데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치 않는 살리카법 때문에 외국들이 이에 간섭하려 들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고[66],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끼어들어 1742년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슐레지엔 땅을 차지하는 등 한몫 단단히 챙겼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강탈해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이를 갈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시도햇지만 동맹 내에서의 내분, 전술적 실패, 불운이 겹치면서 연달아 실패했다. 특히 1756년에는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고 프로이센을 아예 갈라먹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 동맹해 이들과 맞섰지만 열세에 시달렸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사하고 친프로이센계 표트르 3세의 즉위로 기사회생한다. 러시아가 빠져버리면서 대프로이센 동맹의 핵심 축이 날아가버렸고, 프랑스에서도 반전 여론이 심해지는 등 날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눈물을 머금고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합병을 최종 인정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려는 프로이센 왕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합스부르크의 황제 사이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4.2.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후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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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유럽의 지도
1700년대 들어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수없이 많은 분쟁들에 휘말렸다. 1740년 카를 6세가 승하하자 후계자로 지명된 마리아 테레지아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법은 살리카법으로 오직 '남성 후계자'만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엄격하게 박아두고 있었기에 논란이 터졌다.[67] 이로써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고 야심가득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742년 카를 7세로 선출되었다. 새 황제 카를 7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도 선출되었고 오스트리아까지 위협하며 마리아 테레지아를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카를 7세를 배신하고 단독 강화를 맺었고, 본진인 바이에른이 털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왕국을 되찾고 남편 프랑수아 에티엔을 차기 황제로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카를 7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를 굴복시키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 도중 위태로운 틈을 타 슐레지엔을 뜯어간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등과 동맹을 맺고 7년 전쟁을 일으켜 프로이센을 몰아쳤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뛰어난 능력과 각종 악재가 연달아 겹치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1763년 종전 협정이 맺어졌고 슐레지엔은 여전히 프로이센 영토로 남았지만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파르마 공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부르봉 왕조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위상은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사 충돌을 멈추고 내부 개혁에 전념했다.

국사조칙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상속받을 수 있었지만 국사조칙과 별개로 살리카법 때문에 제위에 오를 수 없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새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시켰고 이로써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가 시작되었다. 실권을 거머쥔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부 개혁에 전념했다. 그녀는 느슨한 동군연합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 구성 국가들을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했고 재무부, 제국대법원, 제국의회를 새로 세웠으며 1749년 보헤미아 왕관령을 사실상 해체시켜 보헤미아 왕국의 국정이 프라하가 아닌 에서 처리되도록 하였다. 그녀의 재위 아래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입은 10년만에 2천만 플로린에서 4천만 플로린으로 2배 넘게 늘었고 1775년에는 최초로 균형예산을 달성했으며 1780년에는 수입이 5천만 플로린을 돌파했다. 법전 제정, 고문 철폐, 교육 개혁, 사관학교 설립, 농노제 폐지 등 여러 개혁에 나섰고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부 보수적, 전근대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을 복구하고 중흥하는 업적을 남겼다.

프란츠 1세가 1765년 사망하자 요제프 2세가 황제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이상주의에 빠진 전제적 계몽주의자였던 요제프 2세는 어머니 생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였으나 1780년 단독 통치자가 되면서 농노제 폐지,[68] 종교 관용령, 헝가리 왕국에서의 독일어의 공용어 지정, 중앙집권화 등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는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에 나섰고 바이에른 합병을 시도했다.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은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왔다. 중앙집권정책과 독일어 공용어 지정은 헝가리인의 반발을 불렀고 종교 관용령은 가톨릭 사제들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외치도 실패였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을 점령했으나 막판에는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여 죄다 다시 뱉어냈고, 바이에른 병합은 프로이센을 위시한 다른 영방국가들의 반대로 포기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에 자극받아 독립을 선포했다. 크게 낙심한 요제프 2세는 말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차단하는데에 온 여력을 쏟아부었고, 개혁의 실패에 크게 상심한 채 1790년 사망했다.[69]

요제프 2세가 허무하게 사망하자 토스카나 대공으로 있던 동생 레오폴트 2세가 1790년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을 차남 페르디난도 3세에게 물려주고 빈으로 온 레오폴트 2세는 형의 실책을 만회하고자 온 힘을 다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짓고 네덜란드 일대 안정에 온 힘을 쏟았다. 대내적으로도 온건 정책을 피며 유럽에 몰아닥친 혁명의 기운을 억눌렀고 동맹의 역전 이래 적대관계였던 영국과 다시 동맹을 맺어 혁명 프랑스를 견제했다. 이미 토스카나 대공국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던 레오폴트 2세는 능력있는 황제였지만, 재위 2년만인 1792년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선출되었다.

4.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과 제국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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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763년 7년 전쟁 이후 제국 내 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중소 제후들은 반쯤 죽어버린 제국의 시체 안에서 안심한 채 '게으른 잠'에 빠져들었다. 중소 제후들이 연합해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고, 제국은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사이의 줄다리기 속에서 양극화되어 불안한 평화기를 맞았다. 특히 헤센카셀 방백은 용병 사업을 시작해 1만 7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한창 미국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에 용병으로 보내 받은 돈으로 사치를 누리면서 그저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도 황제라는 칭호의 허명에만 집착하며 제후들의 명예욕이나 채워주고 있었고 제국 운영은 내다버린 채 합스부르크 제국 경영에 주력할 뿐이었다.[70]

그렇게 제국은 명맥만 이어오던 중 프랑스가 대혁명으로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호기롭게 프랑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혁명 정신으로 무장해 사기가 드높았던 프랑스군에게 역으로 털렸고, 되려 라인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몽땅 잃었다. 그 와중에 전공을 세워 득세하게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코르시카 촌놈이 프랑스의 권력을 잡고 여러 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박살내버리면서 그 결과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강 서안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였다.[71] 더군다나 나폴레옹에 줄선 제국 내 군소국가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데다가 180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나폴레옹은 선제후 자리가 대거 비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소 위성국들을 선제후로 대거 임명하면서 차기 황제위는 나폴레옹이나 나폴레옹의 하수인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72]

그런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법적으로 하나의 나라도 아니고 동군연합 국가들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표 작위조차 오스트리아 대공[73]에 불과했기 때문에 차기 황제선거에서 패배하면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괴뢰국인 독일 듣보잡 제후의 신하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제위를 잃더라도 가문이 보유한 모든 국가들을 아우를 수 있는 대표 작위가 필요했고, 이에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보험으로 삼았다.

그러자 1806년 6월, 신성 로마 제국을 그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자신은 더이상 신성 로마 제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74]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영방들이 나폴레옹을 보호자로 하는 라인 동맹을 결성했으며, 이들은 8월 1일을 기해 송식적으로 제국을 탈퇴해버려 완전히 독립했다. 나폴레옹이 8월 10일 전까지 프란츠 2세의 퇴위를 대놓고 요구하자 결국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프란츠 2세는[75]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이로서 10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76]

후일담으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으며관심없다면서 언급은 왜? 해체되던 날의 일기에는 "독일 제국이 해체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라고 담담하게 적었다. 이것을 보면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해도 이상할게 없었던 상황.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미 베스트팔렌 조약 때 사망진단서를 받았고 1806년에는 그저 그 시체를 땅에 묻을 매장 허가증이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난 이후에 왜 다시 신성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지 않았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당사자들이 제국 부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일단 독일의 옛 제후들은 다시 신성 로마 제국이 부활해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꼴을 보기 싫어했다. 게다가 그동안 황제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싸움에 생뚱맞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이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제후국들은 제국 체제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제국 부활에 큰 메리트가 없었다.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제국이라 부활시켜봤자 언제든 중소 제후국들이 모여 황제에 반기를 들고 합스부르크 일가에 시시건건 훼방놓을 우려가 컸던 것이다. 거기다가 옛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독일 연방이 탄생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은 완전히 의미가 사라지고야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굳이 골치아픈 신성 로마 제국이 없이도 독일 연방 내에서 1860년대까지 독일의 종주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일부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였지만, 현실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비용도 많이 들고 리스크도 큰 일이었다.

다만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라 해도 당시 독일인들은 제국이라는 외피를 갖추지 못한 독일을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폰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했고,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1] 카롤링거 왕조는 시작될 때부터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교황 자카리아를 회유해 승인을 받았기에 초창기부터 교황과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엄밀하게 말하면 자의적으로 선물한 건 아니다. 교황은 피핀 3세의 왕조교체를 인정하는 대가로 롬바르드족의 격퇴와 이탈리아 중부를 교황에게 기증할 것을 요구했고, 이 상당히 부담되는 요구를 피핀 3세가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것에 더 가깝다.[3] 원래는 카롤루스 1세가 이리니한테 청혼을 했지만, 동로마 귀족들이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현대 역사가들은 "우간다의 잔인한 군사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한테 청혼을 했다고 생각하면, 왜 거부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유머스럽게 해석한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동로마인들은 서유럽을 가리켜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멸시했기 때문에, 청혼이 성사되기는 어려웠다.[4] 공식적인 승인은 미하일 1세가 했지만 기본은 니키포로스 1세때 이미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니키포로스의 평화라고 부른다.[5] 개중에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은 중프랑크 왕국과 그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얻는 자가 제위에 올랐다.[6] 한편, 교황에게 대관 받는 수동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교황권을 쥐락펴락하였다. 황제 귀도는 교황 포르모소에게 자기 아들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라 강요하였고, 귀도 사후 람베르토는 로마로 가서 포르모소에게 자기의 제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는데 퇴짜를 맞자 포르모소를 감금하였다.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 와서 포르모소를 구출하고 황제 대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동프랑크로 돌아가고 포르모소도 죽자 다시 권력을 잡은 람베르토는 새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시켜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시체를 재판대에 앉혀놓고 능욕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노테오도로 2세 등 여러 교황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의문사하였다. 부관참시 외에도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을 부활시켰는데, 이게 뭐냐 하면 교황의 선출에 황제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황제는 교회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밖에서도 어느 정도 권한이 남아있었는데, 일례로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1세는 황제가 되고 나서 독일 왕국의 영토였던 리에주 교구의 대주교 선출에 분쟁이 생기자 자기가 직접 개입하여 대주교를 임명하였다.[7] 콘라트 1세도 자기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었지 하인리히 1세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작센의 세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고, 자칫하면 분리독립할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콘라트 1세는 임종 직전 울며 겨자 먹기로 하인리히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8]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이며, 독일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부터다.[9] 하인리히 1세도 쉽게 왕위에 오른건 아니었다. 5대 공작령 중 슈바벤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즉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학계에서는 하인리히 1세의 즉위를 독일 왕국의 시작으로 본다.[10] 오토 1세는 공작들을 견제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했다. 교회에 관세권, 시장권, 화폐 주조권 등 다양한 혜택을 부과했으며 교회 재산을 보호했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들은 지방 대귀족들의 권력을 효율적으로 견제했다. 대신 성직자는 독신이어야 한다는 약점 때문에 주교가 죽으면 재산은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왔고, 황제는 이로써 교회의 고삐도 쥘 수 있었다. 오토 1세는 당시 독일의 교회 영지 대부분이 교황의 통치를 받지 않는 개인 교회라는 점을 이용해 성직자들의 서임권을 거머쥐었다. 이 서임권은 어마어마한 권력이었고 훗날 교황과 직접적인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11] 녹색 계열 영토는 독일 왕국, 붉은색 계열은 이탈리아 왕국, 주황색 계열은 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계열은 부르군트 왕국이다. 로마 쪽의 자줏빛 영토는 교황령이다.[12] 요한 16세는 코, 귀, 혀가 잘려지고 눈이 뽑혀나간 채로 수도원에 처박혔고 1001년 8월에 사망했다.[13] 특히 하인리히 3세의 경우 3명의 대립교황을 황제의 힘으로 추방시키고 허수아비 교황을 세워 교회를 지배, 이후에도 3명의 교황을 순차적으로 갈아치워 황제의 교황 지배권이 절정에 달했다. 하인리히 3세는 중세 독일 최강의 지도자였다. 39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신성 로마 제국이 통일 제국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14] 이 것만 보면 그레고리오 7세의 완승으로 보이지만 그레고리오 7세도 썩 좋은 말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는 카노사의 굴욕 이후 또 하인리히 4세와 충돌했는데, 이때 남부의 노르만인들을 로마에 끌여들였다. 그러나 노르만인들은 로마를 잔혹하게 약탈했고 이에 민심이 땅에 떨어진 그레고리오 7세는 살레르노로 망명갔다가 허무하게 사망했다.[15] 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초기와 후기를 비교할 때 서남부 일대의 이탈리아반도의 도시국가들이나 저지대 국가, 스위스는 아예 따로 놀게 되었고 알자스-로렌부르군트는 프랑스 왕국에 귀속되었지만 이러한 영토 손실을 동방식민운동으로 메꾸면서 점차적으로 제국의 영토가 동쪽으로 이동한 모양새가 되었다.[16] 콘라트 3세는 자신의 제위를 위협했던 벨프 가문을 싫어했다. 그는 벨프 가문을 제국 밖으로 내쫒았지만, 콘라트 3세가 1152년에 죽자 그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1세는 벨프 가문과 화해하고 그들이 영지를 명목상으로나마 돌려주었다. 하지만 벨프 가문은 시시건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위협으로 남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권강화노력 역시 이 벨프 가문에게 제위를 빼앗길거라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당시 권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교황 역시 호엔슈타우펜 왕조에게 큰 걸림돌이었다.[17] 이 정책 자체는 이미 1103년 하인리히 4세가 마인츠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전 영토에 란트프리덴을 적용한건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절 들어서였다.[18] 노란색은 신성 로마 제국, 보라색은 교황령, 주황색은 시칠리아 왕국이며 초록색은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이들 모두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19] 밀라노는 볼로냐 등 여러 도시들과 손을 잡고 롬바르디아 동맹을 결성해 제국에 맞섰다. 북이탈리아가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로 분열되어 싸움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시기다.[20] 이 다툼은 제국이 레냐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1177년 황제가 알렉산데르 3세를 인정하면서 끝났다.[21]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지배했던 제후 중 한 사람이며, 벨프 가문의 최대 전성기를 이루어냈던 인물. 작센과 바이에른의 공작으로서 황제보다 더 넓은 영토를 보유했고 동방식민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후원자로서 그 권세가 막강했다.[22] 처음부터 씹은건 아니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제1차 이탈리아 원정 때 군사를 보냈고, 프리드리히는 벨프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화해를 위하여 하인리히 사자공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원정이 지속되면서 하인리히 사자공도 점차 파병에 미온적으로 변했고, 황제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워 숙청해버렸다.[23]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벨프 가문의 장인 가문으로 원래부터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싫어했으며, 특히 하인리히 6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귀환하던 리처드 1세를 사로잡고 막대한 돈을 뜯어내 시칠리아 정벌에 써먹으면서 더욱 사이가 안좋아졌다.[24] 특히 오토 4세가 난관 타파를 이유로 자신을 대관해준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다스리던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하자 괘씸함을 느낀 교황이 오토를 파문해버렸다.[25]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청과 내내 각을 세운 것으로 유명했다. 호노리오 3세에게는 시칠리아를 주겠다는 약속과 십자군 결성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고, 그레고리오 9세가 소집한 공의회에 참석하는 독일 추기경은 황제의 적이라고 엄포를 놓았으며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의 압박을 못견디고 프랑스 왕국의 리옹으로 도망쳤다.[26]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의 권위 원천을 가톨릭이 아닌 로마 제국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그의 근거지는 이탈리아와 로마가 아니면 안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에 머물며 본토인 독일을 반쯤 속주 취급했다.[27]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 조상으로, 호엔촐레른 가문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5대조이다.[28] 당시 교황은 아비뇽에 있었던지라 부재중이었다.[29] 대공위 시대의 종결은 루돌프 1세가 선출된 1273년으로 잡지만, 루돌프 1세도 어디까지나 독일왕으로 인정받았을 뿐 황제 대관식을 치르지는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서거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황제는 1312년 즉위한 하인리히 7세다.[30] 앞서 언급되었던 라인 궁정백 겸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돌프 1세의 동생.[31] 루트비히 4세는 아비뇽의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추기경 일색이었던 교황청이 독일인 황제를 마음에 들어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트비히 4세가 교황의 대관 절차를 무시하고 스스로 '로마 시민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르면서 교황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32]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일대는 원래 프리드리히 2세사생아 만프레디가 호엔슈타우펜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카페 왕조 출신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교황이 힘을 합쳐 만프레디를 몰아내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일소했다.[33] 이때 이후로 만장일치가 아닌 과반으로 황제를 뽑으며 이에 불응하는 선제후는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조향을 넣었다. 또한 황제 선출에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34] 뭔 말인가 싶을텐데 루트비히 4세는 에노 여백작 마르그리트와의 재혼으로 오늘날 베네룩스 3국 대부분을 접수했다. 루트비히 4세 사후 저지대 국가는 4남 빌헬름과 5남 알브레히트에게 상속되었고 이들의 후손인 자클린이 후사가 없자 부르고뉴 공국선량공 필리프가 빼앗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영지로 만들었다.[35] 이 과정에서 지기스문트는 교황의 난립이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이던 백년전쟁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키려 노력했지만, 프랑스의 반발에 밀려 실패하고 말년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36] 알브레히트 2세는 알브레히트계, 프리드리히 5세는 레오폴트계였다. 두 가계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4남)의 두 아들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 대에 갈라졌다.[37] 어찌나 무능했던지 '신성 로마 제국의 게으름뱅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장점은 단 하나, 너무 오래 살아서 적들이 먼저 자연사했다는 것 밖에 없었다고 했을 정도. 허나 현대 들어서는 합스부르크의 제위 독점 기반을 탄탄히 다진, 나름 업적을 남긴 군주로 재평가되는 추세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친동생 알브레히트 6세,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먼지나게 두들겨 맞은건 사실이다. 심지어 제국 내에서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를 필두로 라인란트와 슈바벤에서 대놓고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38] 당시 제국은 수백개의 영토들로 나뉘어서 제대로 행정이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제국을 6개, 나중에는 10개의 관구로 나누어 이 관구 안에서는 통합된 행정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각 관구는 식수 공급, 전염병 예방, 경찰, 도로 건설, 의료 등 필수적인 통합 기반 시스템을 제공했다.[39]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왕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는 땅이 늘었을 뿐.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 왕위와 이탈리아 영토, 아메리카 식민지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갔다. 하여튼 카를 5세 개인의 위세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40]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이 바로 1524년의 독일 농민전쟁이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방제후들은 이를 바로 진압해버렸고 이런 반란을 진압할 때마다 영방제후들의 권력 기반은 더욱 탄탄해졌다.[41] 빈 공방전의 수훈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이지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전쟁에 정신 팔려 도움 하나 주지 않았다.[42] 사실 황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스페인에 살면서 독일 행정은 페르디난트에게 맡겨온 상태였다. 충분히 페르디난트를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페르디난트가 독일왕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보름스 제국 의회 이후 방문하지 않았던 독일을 직접 방문하면서 선제후들을 회유하였고 페르디난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자 실질적인 후계자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제가 자신에게 충성해온 동생을 내쫒고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제위까지 물려주려하자 이에 반발한 페르디난트가 카를 5세를 내쫒아버린 셈.[43]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완전한 상속을 위해 신교도 제후들의 도움을 얻고자 제국 영방제후들의 종교 선택권을 보장했을 뿐 자신의 영토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는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했다. 반면 막시밀리안 2세는 젊은 시절부터 사적으로 루터교회에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노력했다.[44] 제국에는 대략 50~60여개의 자유도시들이 있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당시 65개의 자유도시가 있었고, 이후 수가 감소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부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약 50여개 선에서 왔다갔다했다.[45] 16세기 들어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의 왕권이 강해지고 한자동맹의 특혜를 앗아갔고, 종교 개혁으로 인해 동맹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무역로가 대서양으로 옮겨간 탓도 있었다. 결국 한자 동맹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 완전히 유명무실해진다.[46] 저지대 국가는 1482년부터 1492년까지 막시밀리안 1세에 저항해 2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신 특권을 부여받았다.[47] 자신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보헤미아 국왕이자 유력한 차기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왕의 대리인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다.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로 여겨진다.[48] 정확히는 제후들이 가톨릭이나 루터파 신앙 중 하나를 원하는대로 골라서 믿을 수 있는 권리였다.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 것이 아니다. 제후가 한 신앙을 선택하면 그 아래 신민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제후의 신앙을 따라야했다.[49] 당장 루터교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작센, 브란덴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같은 곳들은 죄다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군주들이 조직화된 관료 집단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반면, 칼뱅교가 퍼져나간 팔츠 선제후국, 네덜란드, 남프랑스, 스코틀랜드, 에르데이 공국, 라인강변의 자유도시 등의 지방들은 이런 상업 문화가 발달한 도시들이었거나 런던, 파리, 등 군주들이 거주하는 수도의 권력 팽창에 맞서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펼쳐졌던 지역들이다.[50] 원래 보헤미아 국왕은 페르디난트 2세였는데, 그에게 반발한 보헤미아 의회가 팔츠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황제로 선출되었고 당연히 보헤미아 왕위를 되찾으려 프리드리히 5세와 전쟁을 벌였다.[51] 1529년 체결된 그림니츠 조약에 따라 포메른을 통치하는 그라이펜 가문의 대가 끊기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포메른을 상속받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나 포어포메른의 항구를 탐낸 구스타브 2세는 마지막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4세를 구워삶아 브란덴부르크가 포메른을 온전하게 상속받지 못하게 했고, 스웨덴군은 30년 전쟁이 끝날때까지 포메른에 주둔했다.[52] 페르디난트 3세는 1646년 안카우 전투, 제2차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연달아 대패했고 1648년 베벨링호펜 전투로 쐐기가 박히며 굴욕적으로 프라하에서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했다.[53] 당시 스웨덴과 프랑스는 이미 전쟁에서 반쯤 승리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존 동맹국이던 네덜란드가 프랑스가 지나치게 강해지자 이젠 프랑스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저멀리 오스만 제국마저도 준동할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는 여기까지 하고 전쟁을 마무리짓기로 마음먹는다.[54] 가장 큰 결정타는 선제후를 제외한 영방제후들이 제후들 사이는 물론이고 외국과도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황제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조건이 붙어있긴 했지만 구속력은 거의 없었고 제후들은 아무와도 거리낌없이 동맹을 맺고 황제를 적대했다. 사실상 제국이 형해화되어버린 것이었다. 당장 바이에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와 손잡고 황제에 저항했고 프로이센 왕국이 되는 브란덴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바이에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제국추방령을 당해 황제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벌을 받기라도 했지만 두 차례의 전쟁에서 황제를 모두 꺾은 프로이센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했다.[55]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구 제국 영토보다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으로 확장 방향을 변경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실제 황권 및 국력의 수준과는 별개로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 자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56] 일단 제국과 황제라는 보호 장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만약 없어진다면 슈바벤 지역 약소국들의 경우 슈트라스부르크처럼 프랑스에 먹혀 사라질 위기에 처할 실정이었다.[57] 제국 체제는 대략 나폴레옹 전쟁 전까지 잘 돌아갔다. 문제는 후술하듯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 칭호에만 관심이 있었고 정작 중요한 제국 경영은 서서히 포기하며 세습령 통치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황권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더이상 영향력 행사가 어려운 제국보다는 확실하게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통치에 집중하고 동유럽으로 세력방향을 넓히는 것이 더 일리있는 운영이긴 했다.[58] 레오폴트 1세는 스페인 왕위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스페인이 보유한 이탈리아 였으며 이는 루이 14세 역시 마찬가지였다.[59] 하지만 요제프 1세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선동한 라코치 페렌츠 2세헝가리 왕국 반란 때문에 꽤나 골치를 썩여야만 했다.[60] 원래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결국 프랑스 국왕 측이 스페인 왕위를 가져갔지만, 오스트리아도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던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등을 가져올 수 있었다. 허나 개중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이때 스페인에게 다시 빼앗겼다.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파르마-피아첸차 대공국을 얻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손해였다.[61] 현재 폴란드 루부시주 일대.[62] 현재 폴란드 서포모제주 일대.[63] 프리드리히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황제에게 8,000명의 군사를 제공하는 대가로 칭왕을 허락받았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브란덴부르크 국왕'이 아닌 '프로이센 국왕'이라는 칭호다. 브란덴부르크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내부였던 만큼 함부로 왕을 칭하기 어려웠지만, 프로이센은 아무래도 제국의 외부였다보니 상대적으로 거리낌없이 왕위를 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64] 작센은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 형제가 1485년 라이프히치 조약을 체결해 갈라졌다. 라이프치히 조약은 베틴 가문의 영지를 오늘날 작센튀링겐으로 분열시킨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받는다.[65] 북쪽의 푸른색이 프로이센 왕국이고, 아래쪽의 주황색이 오스트리아다. 둘다 제국 내의 영토만 표시한 것으로 프로이센은 동쪽에 동프로이센 등 영토가 더 있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등 거대한 땅덩어리를 제국 국외에 보유하고 있었다.[66]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반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여성의 계승을 인정했고 자신의 딸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게 하려고 조카들을 결혼시킬 때 상속권을 포기하게 하는 등 외교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였으나 말년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대 오스만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군사적인 실패로 외교적인 성공이 빛이 바랬고 오스트리아의 군사적인 실패를 본 다른 국가들은 국사조칙을 겉으로는 인정했더라도 뒤로는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했다.[67] 이 점을 우려했던 선황 카를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안정적인 제위 승계를 보장하기 위해 생전 국사조칙을 발표해 유럽 각 세력들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계승을 약속받았는데, 정작 카를 6세가 죽자 죄다 이 국사조칙을 무시해버렸다.[68] 이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도한 정책이었으나 귀족들의 극렬한 반발로 실패한 정책이었다.[69] 요제프 2세의 개혁이 온전히 실패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의 개혁은 결국 결실을 맺었으며 요제프 2세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합스부르크 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다. 그의 개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환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70] 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후계자들' 문단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후계자들의 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 개혁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위한 개혁이었다.[71] 라인강 서안의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영토는 모두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되었고 기존의 제후들은 라인강 우안에서 영토적 보상을 할 것이란 합의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자신이 승인한 것이었다. 사실상 제국 서쪽 영지는 싹다 프랑스가 낼름하고 제후들이 손해본 영토는 황제가 알아서 보상해줘라 이것인데, 당연히 황제의 체면은 지하까지 떨어졌고 이렇게까지 떨어진 체면탓에 아무도 더이상 황제를 신뢰하지 않았다.[72] 팔츠 선제후는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멸하면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인 팔츠 선제후가 바이에른을 통합할 때, 팔츠-바이에른 통합 1표만 행사하는 조건으로 상속하면서 자연스럽게 통폐합되었고, 친합스부르크파인 쾰른, 마인츠, 트리어 선제후는 영지를 프랑스가 먹어치우면서 소멸했으며, 반프랑스파인 영국 국왕이 가지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는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먹어치우면서 사라져버렸다. 이들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이 선제후로 임명한 나라들이 바로 친프랑스파인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바덴, 뷔르템베르크였다. 남아있는 선제후들도 친합스부르크파인 것은 아니라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편으로 갈아탔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밀약으로 하노버를 먹어치운 후 입 딱 다문 상태였으며, 작센은 어디에 붙을까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 선제후와 토스카나 대공국을 잃은 동생 페르디난도 3세에게 주어진 잘츠부르크 두 장만 가지고 있는 프란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73]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서 보헤미아 국왕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도 겸하고 있었으나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 중 유일한 체코계 국가인지라 이질성이 강했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아예 신성 로마 제국 관외의 독립 국가였다.[74]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아우르는 보편 제국을 추구하던 나폴레옹에게,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의 야심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과거의 잔재일 뿐이었다.[75] 프란츠 2세는 끝까지 신성 로마 황제라는 거창한 칭호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806년 초까지만 해도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내는 서한에 '성하께서는 로마의 주권자이시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입니다'라고 썼을 정도로 자부심이 상당했다. 하지만 이 거창한 칭호를 들고 있기에는 나폴레옹의 위협이 너무나도 컸다.[76] 정작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로 그렇게 치고박았던 프로이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의 순간까지도 명목상 오스트리아의 편에 남아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에나 날을 세웠지 호엔촐레른 가문은 루돌프 1세 시절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을 도와 성공가도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