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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대머리왕 샤를(Charles le Chauve), 카를 2세(Karl II) |
생몰년도 | 823년 6월 13일 ~ 877년 10월 6일 (54세) |
재위기간 | 843년 8월 ~ 877년 10월 6일 |
출생지 |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독일 헤센) |
사망지 | 브리데레벵 |
1. 개요
라틴어: Karolus II (카롤루스 2세)고대 갈로 로망스어: Karlo (카를로)[1]
프랑스어: Charles II (샤를 2세)
네덜란드어: Karel II (카럴 2세)
독일어: Karl II. (카를 2세)
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1대 왕으로 실질적인 첫 프랑스 왕국 국왕, 카롤루스 제국의 5대 황제
흔히 대머리 또는 대머리왕 샤를(카를)이라 불린다.
2. 재위 이전
프랑크 왕국 루도비쿠스 1세의 막내 아들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로 태어났다.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르멘가르트 황후가 죽자 불과 4개월 후 바이에른 출신의 유디트와 재혼했는데, 샤를 2세는 바로 유디트에게서 난 늦둥이 아들이었다. 이르멘가르트 황후 소생의 이복형들인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트비히 2세와는 20살 이상에서 거의 30살 가까운 나이차가 났다.루도비쿠스 1세는 어여쁜 계비 소생에게 난 늦둥이인 대머리 샤를을 무척 이뻐했다. 루도비쿠스 1세는 과거 자신이 공포한 제국 상속령을 깨고 이미 장성한 아들들에게 나뉘어져 있던 토지의 일부를 떼어내어 대머리 샤를에게 주었다. 그로 인해 전처 소생의 세 아들들이 아버지인 루트비히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830년에 시작된 아들들의 반란은 833년 성공하여 루도비쿠스 1세가 퇴위당했으나, 834년 교황이 루도비쿠스 1세를 지지하면서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복위된 이후 루도비쿠스 1세의 권한이 강해졌고 샤를 2세 역시 마찬가지로 강력한 입지를 지니게 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의 둘째 아들 피핀이 죽자 피핀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대머리 샤를에게 물려 주었다. 이에 반대하여 이복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 서프랑크 성립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이복형인 로타리우스 1세가 프랑크 왕국 왕과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자신으로의 권력집중화를 꾀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이복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와 손을 잡고 로타리우스 1세를 공격했고,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자신의 영지였던 프랑크 왕국의 서쪽 영토의 지배권을 확립받았다.852년부터는 이복조카였던 아키텐의 피핀 2세와 대립했으며, 이로 인해 853년에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폐위 직전에 몰리게 된다. 이때에는 이복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와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이었던 조카 프로방스의 샤를과 이미 자신과 대립했던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까지 가담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855년 형 로타리우스 1세가 죽고 로타리우스 1세가 가지고 있던 중부 프랑크 지역[2]을 물려받은 로타리우스 2세가 각각 869년 죽자 그 영토를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 2세와 함께 나눠가졌고 이가 바로 메르센 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