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23:07:47

루이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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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ouis iv.png
이름 해외왕 루이(Louis IV, Outremer)
생몰년도 920년 9월 ~ 954년 9월
재위기간 936년 ~ 954년 9월
아버지 샤를 3세 단순왕
어머니 잉글랜드의 에아드기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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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Louis IV (루이 4세)[1]
라틴어: Ludovicus IV (루도비쿠스 4세)

루이 4세(Louis IV)는 936년에 즉위해 954년에 승하한 서프랑크 왕국의 제10대 왕이었다.

920년에 태어난 후 923년에 부왕인 샤를 3세 단순왕이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에 의해 폐위되자 잉글랜드 남부 웨식스 왕국의 공주였던 에아드기푸(Ēadgifu)가 어린 루이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잉글랜드로 탈출했다. 이후 서프랑크 귀족들의 추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해외왕 루이'[2][3]라고 불린다. 그의 일생은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들과의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2. 생애

920년 샤를 3세 단순왕과 잉글랜드 웨식스 왕국의 왕 대 에드워드의 딸인 에아드기푸 사이에서 태어났다.

923년 부왕 샤를 3세가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 귀족들에 의해 수아송 전투에서 격파되고, 암살당한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라울이 서프랑크의 국왕이 되자 왕비 에아드기푸는 아기 루이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936년 라울이 급사하자 샤를 3세를 지지했던 서프랑크 왕국의 동부 로트링겐[4]과 북부 노르망디의 귀족들에게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해 6월 랭스 대성당에서 주교인 아르탕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치렀다. 샤를 3세 이후 카롤루스 왕조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는 이번에도 루이 4세를 충실하게 지지했다.

하지만 당시 서프랑크는 로베르 1세의 아들인 파리 백작 위그 르 그랑[5]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샤를 3세 단순왕에게 적대적이었던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대 위그를 지지했다.

카롤루스 왕가였던 루이 4세는 선대로부터 정적이었던 로베르 가문의 위그 르 그랑을 제어하기 위해 동프랑크의 국왕 하인리히 1세[6]와 결혼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에 하인리히 1세의 딸이자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이었던 게르베르가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위그 르 그랑도 하인리히 1세의 딸이었던 작센의 헤드비게와 결혼했다. 즉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정계를 나누고 있었던 양대 세력의 수장들을 사위로 두고 있었다.

동프랑크에서 장인인 하인리히 1세가 승하하자, 루이 4세는 부왕 샤를 3세가 공략했던 로트링겐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동프랑크 국왕은 그 유명한 오토 1세였다. 오토 1세는 괘씸한 매제 루이 4세를 혼내기 위해 940년 또다른 매제인 위그 르 그랑과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가 레온에서 루이 4세와 전투를 벌일 때, 동프랑크의 군대를 제공하여 루이 4세를 격파시켰다.

942년 11월 루이 4세는 오토 1세와 화친을 맺었다. 이는 오토 1세가 위그 르 그랑을 견제하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화친을 맺은 루이 4세는 943년 부왕을 옥사시킨 원수이자, 권신이었던 헤르베르트(에르베르) 2세를 공격해 그를 사로잡고 교수형에 처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루이 4세에게 있어서, 부왕 샤를 3세를 사로잡아 무려 7년 동안 감금한 뒤 굶어죽게 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어 945년에는 북부 노르망디의 루앙 백작[7] 기욤 1세가 어린 사생아인 리샤르(리처드) 1세만을 남긴 틈을 타 루앙 백국을 공격했는데 여기서 대패하고, 숙적인 헤르베르트(에르베르) 가문에게 사로잡혀 위그 르 그랑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루이 4세는 1년 동안이나 파리에 감금당했다. 그러자 루이 4세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가 민첩하게 오빠인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토 1세는 또다른 매제였던 대 위그에게 압력을 넣어 루이 4세를 석방하도록 했다.

아내와 처남 오토 1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루이 4세는 다시 숙적인 위그 르 그랑을 공격해 946년 랭스를 되찾았으며, 949년에는 레온을 수복했다. 위그 르 그랑과는 계속 반목했는데 오토 1세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루이 4세와 화해하지 않았던 위그 르 그랑은 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서프랑크 왕국 전역에서 파문을 당했다. 위그 르 그랑은 이 파문에도 굴복하지 않았지만 오토 1세가 지속적으로 루이 4세를 지지하고, 그의 영향력을 키워주자 결국 951년에 루이 4세와 화해하고,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3년 뒤인 954년에 루이 4세는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 사고로 승하했다.


[1] 이 시대의 프랑스는 루이를 Lodhuuig, Lodhwig, Looïs, Luis, Ludovic 등으로 읽었다.[2] 프랑스어로는 '오트르메르 루이'(Louis the Outremer)이며, 라틴어로는 '루도비쿠스 트란스마리누스'(Transmarinus)이다.[3] '바다 건너서 온'이란 의미이다.[4] 로렌, 로타링기아[5] 일명 대(大) 위그. 카페 왕조의 창건자인 위그 카페의 아버지였다.[6] 오토 왕조(작센 왕조 혹은 리우돌핑 왕조)의 창건자였다.[7] 노르망디 공국의 전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