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2:36:54

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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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외드(Eudes)
생몰년도 860년? ~ 898년 1월 1일
재위기간 888년 ~ 898년 1월 1일
아버지 '강철공'(르 포르) 로베르 4세
어머니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장녀 아델라이드
1. 개요2. 생애

1. 개요

라틴어: Odo (오도)
프랑스어: Eudes (외드)

서프랑크 왕국의 제6대 국왕. 처절했던 대바이킹 전쟁의 구국영웅으로 로베르 왕가의 시조였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프랑스 왕국의 주인이 되는 카페 왕조의 시조 위그 카페의 큰할아버지(할아버지의 형)였다.

2. 생애

파리 백작이자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의 백작으로서, 888년부터 승하할 때까지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었다. 외드는 느스트리 백작 로베르 4세와 황녀 아델라이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로베르 4세 '강철공'이 866년 9월 15일, 브리샤트 전투에서 패배해 바이킹 수장 해스테인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동생인 로베르를 출산한 후 사망하자 외드는 어린 나이에 파리와 느스트리, 앙주의 백작이 되었다.

단 수백 명의 병력만으로, 조국인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한 20,000여 명의 바이킹 군단을 물리치고, 왕국을 수호한 공로로 888년 1월, 비만왕 카를 3세가 폐위된 뒤 서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말더듬이왕' 루이 2세의 유복자였던 카롤루스 왕실의 '단순왕' 샤를 3세와 서프랑크의 왕위를 놓고 계속 다투었다. 하지만 자식이 없었던 외드는 정통성이 있는 샤를 3세에게 서프랑크의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모계가 카롤루스 왕조이긴 했으나, 직계는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떨어졌는데 이것이 외드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다. 외드는 수차례 바이킹을 격퇴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루이 2세의 유복자인 샤를 3세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이에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인 아르눌프에게 사실상 봉신하고, 여러 차례 그의 소환을 받아 동프랑크로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샤를 3세의 도전을 받았다. 895년 보름스로 소환한 아르눌프의 명령에 따라 외드는 많은 조공품을 가져갔지만 샤를 3세는 오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아르눌프는 외드가 보유한 서프랑크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자식이 없었던 외드는[1] 결국 정적이었던 샤를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898년에 승하했다.


[1] 외아들인 아르눌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외드보다 먼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