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3 09:41:37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Regnum Francorum
Franci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Carolingian_Empire_map_1895.jpg
843년경 베르됭 조약으로 나뉜 프랑크 왕국 강역
481년 ~ 843년
위치 중서부유럽
수도 투르네 (481년 ~ 508년)
파리 (508년 ~ 768년)
아헨 (768년 ~ 843년)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왕 (481년 ~ 800년)
황제 (800년 ~ 843년)
주요 군주 클로도베쿠스 1세 (481년 ~ 511년)
다고베르투스 1세 (629년 ~ 634년)
피피누스 3세 (751년 ~ 768년)
카롤루스 대제 (768년 ~ 814년)
주요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언어 고대 프랑크어,[1] 라틴어
종교 아리우스파가톨릭
종족 프랑크족, 로마인
주요사건 481년 건국
800년 카롤루스 황제 등극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서·중·동 분할
통화 데나리우스
성립 이전 게르마니아
서로마 제국
수아송 왕국
알레만니
부르군트 왕국
프리시아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작센
바이에른
황제 대관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분할 이후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중프랑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오늘날 네덜란드
독일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바티칸
벨기에
산마리노
스위스
스페인(일부)
슬로베니아
안도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일부)
크로아티아(일부)
프랑스

1. 개요2. 역사
2.1. 역대 프랑크 국왕2.2. 메로비우스 왕조2.3. 카롤루스 왕조2.4. 분열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4. 관련 문서5. 역사 틀 둘러보기

언어별 명칭
라틴어 Regnum Francorum / Francia
프랑스어 Royaume des Francs
네덜란드어 Frankische Rijk
독일어 Fränkisches Reich
이탈리아어 Regno franco
서플람스어 Frankisch Ryk
영어 Kingdom of the Franks
그리스어 Βασίλειο των Φράγκων
아랍어 إمبراطورية الفرنجة

1. 개요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 중세 초에 서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나라이자 서유럽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의 이름을 자처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후대 여러 유럽 왕위에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라는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2. 역사


2.1. 역대 프랑크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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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6px; margin-bottom:-5px"
메로비우스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클로비스 1세 힐데베르트 1세 클로타르 1세 하리베르트 1세
메로비우스 왕조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클로타르 2세 다고베르트 1세 클로비스 2세 클로타르 3세
메로비우스 왕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힐데리히 2세 다고베르트 2세 테우데리히 3세 클로비스 4세
메로비우스 왕조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힐데베르트 4세 다고베르트 3세 힐페리히 2세 테우데리히 4세
메로비우스 왕조 카롤루스 왕조
제17대 초대 제2대 제3대
힐데리히 3세 피핀 3세 카롤루스 대제 루도비쿠스 1세
♔: 신성 로마 황제
서프랑크 국왕 →
중프랑크 국왕 →
동프랑크 국왕 →
}}}}}} ||



2.2. 메로비우스 왕조

영어로는 '메로빙거'라 한다.

메로비우스라는 이름은 창시자라고 알려진 프랑크족 족장 메로베크에서 유래한다. 메로베크(Merovech, 411-458)는 서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용병 출신이었다. 메로베크는 서로마 제국군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인 킬데리크 1세는 서로마 제국에서 용병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실상 메로비우스 왕조의 건국자는 킬데리크 1세의 아들 클로비스 1세로 486년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인 수와송 왕국을 멸망시켜서 북프랑스를 통일하고 국왕 시아그리우스를 참살한다. 그는 파리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전까지 믿던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받아들여 486년 교황 펠릭스 3세에게 세례왕관을 받았다.

메로비우스 왕조는 클로비스 1세의 계획적인 분할 혹은 전통에 의한 분할 정책에 의해서 여러 차례 분할과 통합을 겪었다. 여기서 분할 상속의 전통은 일반적으로는 살리카 법전에 의거하는 게르만 족의 전통이라고 하지만, 이는 하나의 학설일 뿐이다. 다른 학설에서는 후기 로마 제국의 전통이나 클로비스 1세의 우려 등등이 있다. 실제로, 살리카 법전과 맞지 않는 것들이 메로빙 시대에 종종 등장한다.

메로비우스 왕조 시대는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 되는 시대였다. 개별적인 지방 간의 차이는 점층적으로 커져 갔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닌 이방인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주교나 여러 관료들의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지방의 유력자들이 행하고는 했다. 물론 이는 왕권이 심각하게 약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왕들은 이들에게 이러한 타협을 통해서 국가 체제를 유지 시켰음을 시사한다.

여러 프랑크 왕들은 지속적으로 로마의 전통을 흡수한 정부 체제를 국가 전체에 퍼트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 정치적 움직임은 지방분권적인 귀족들에게는 좋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왕과 여러 차례 대립하게 된다. 물론 이런 대립과 갈등을 능력 있는 성인 왕들이 중재하거나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다고베르트 1세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들이 왕위를 물려받으면서부터 왕국의 문제가 터지고 만다. 왕국은 중앙적인 정부를 설립하려는 왕권에 대항하고,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잡은 왕들을 유린하고 농락하며 그들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분을 끝없이 벌이게 된다.결국 지속적인 어린 왕들의 즉위와 귀족들의 궁재 작위를 두고 가문, 지방 간의 기나긴 내분으로 왕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메로비우스 왕조 시기만 해도 프랑크 왕국의 왕권에는 그리스도교 요소만이 아니라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요소가 많았다. 메로비우스 왕조의 왕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황소를 타고 외출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 전통에 따라 신성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귀족 가문들의 내분 속에서 승리한 카롤루스 가문은 사실상 메로비우스 프랑크의 군주가 된다. 결국 751년, 교황을 등에 엎은 피핀 3세가 킬데리크 3세를 삭발시키고 수도원에 유폐 시킴으로써 메로비우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카롤루스 왕조가 시작된다.

2.3. 카롤루스 왕조

파일:1591px-Frankish_Empire_481_to_814-en.svg.png

영어로는 '카롤링거'라 한다.

카롤루스 가문의 영화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1세에서 시작되었다. 피핀 1세의 외손자 피핀 2세는 687년 텔토리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잡았으며 피핀 2세의 서자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격퇴하면서 군사적 권위를 얻었다. 이는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했다는 의의가 있다. 서자라는 약점을 군공으로 극복하면서 가문을 이어받은 카롤루스 마르텔은 내란으로 잠시 공석이 되었던 왕위를 대신하여 메로비우스 왕조를 통치하기도 했지만 감히 왕위까지는 넘보지 않았다.조조? 하지만 그의 아들 피핀 3세는 메로비우스 왕조의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교황 자카리아는 피핀 3세에게 힐데리히 3세의 폐위를 종용했기 때문에 그의 왕위를 인정했다. 피핀 3세는 75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라벤나 일대의 토지를 기증하여('피핀의 기증'이라 함) 교황령의 시초를 만들었다.

파일:external/www.muenchner-kirchennachrichten.de/140128Karl_der_Grosse_imago_ddp.jpg

그 아들이 바로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이며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를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파일:european.world.ad.814.png

카롤루스 대제 사후 그의 유일한 아들 경건왕(자비왕) 루도비쿠스 1세(루이 1세)가 뒤를 이었다.

2.4. 분열

프랑크 왕국의 분열 및 영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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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중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고지 부르군트
이탈리아 왕국
고지 부르군트 아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저지 부르군트 저지 부르군트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로타링기아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동프랑크 왕국
>>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 >> >>
: 신성 로마 제위 }}}}}}}}}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100%><-9> 카롤루스 대제

신성 로마 황제 초대 ||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경건한
루도비쿠스 1세

신성 로마 황제 2대
카를 2세[2]
피핀 1세

아키텐
대머리
샤를 2세

네우스트라시아

서프랑크

신성 로마 황제 5대
로타리우스 1세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3대
독일의
루트비히 2세

바이에른

동프랑크
피핀 2세

아키텐
말더듬이
루이 2세

신성 로마 황제[3][4]
프로방스의
카롤루스

프로방스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4대
로타리우스 2세 뚱보
카를 3세

슈바벤

알레만시아

신성 로마 황제 6대
카를로만

바이에른

동프랑크[5][6]
흘로도비쿠스
  • 카롤루스 대제와 루도비쿠스 1세는 프랑스 왕국,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에서 각자 자국 왕으로 생각하여 국왕의 대수에 포함시킨다.
    카롤루스(샤를, 카를로, 카를), 루도비쿠스(루이, 루도비코, 루트비히)
  • 원래 대수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별명을 붙였다.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독일의 루도비코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루도비코, 루이, 루트비히 1세)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815년 공동 황제로 삼기로 선포하고 이탈리아 총독 후에 이탈리아 왕에 임명하고, 둘째인 피핀에게 서프랑크의 남부인 아키텐, 가스코뉴 등의 지역을, 셋째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바이에른, 슈바벤 등 동프랑크 지역을 나눠주기로 하였다. 나중에 후처에게서 샤를 2세(대머리 샤를)을 얻자 영지를 조정하여 물려주려고 하였고 이에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여러 사건들을 거치게 되었다. 이후 아키텐의 지배권을 두고 피핀 1세와 대머리 샤를이 싸우던 도중 피핀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피핀 2세가 상속받는다. 대머리 샤를은 서프랑크의 북부인 네우스트라시아를 영유하고 있었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려고 했으나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가 힘을 합쳐 로타리우스 1세에게 대항하고 아키텐의 피핀 2세는 삼촌인 로타리우스 1세편을 든다. 결국 세 형제는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만나 베르됭 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따라 피핀 2세는 아키텐을 노리던 샤를 2세를 주군으로 섬기게 되어 반발을 했고 최후에는 아키텐을 샤를 2세에게 잃게 된다. 제국은 3개(서·중·동) 지역으로 분할된다.

파일:Carolingian_empire_843.svg.png

로타리우스 1세는 제위와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자스, 부르군트, 이탈리아 왕국을 가지고,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 부분인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가지고, 샤를 2세는 제국의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라시아(테두리 위쪽), 피핀 2세에게서 빼앗은 아키텐(테두리 지역) 지역 등을 가진다.

파일:621px-Carolingian_empire_855_svg.png

로타리우스 1세 사후 중프랑크 또한 세 아들이 물려받는데, 855년 프륌 조약으로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이탈리아를 장남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2세, 독일인 루트비히의 조카)에게 제위와 이탈리아를, 로타르 2세에게는 로타링기아(로트링겐, 로렌)로 불리는 중북부를, 프로방스의 샤를에게는 중남부의 부르군트를 넘겼다.

파일:621px-Carolingian_empire_870_svg.png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영지를 정부에게서 난 아들인 사생아 위고에게 물려주려고 법적 지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체 869년 죽게된다. 이후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조카손자 위고가 법적 권리가 없는 사생아라고 선포한 뒤 870년 메르센에서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나눠가진다. 프로방스의 샤를은 869년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의 영지는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가 차지했다가 샤를 2세(대머리 샤를)에게 넘어가게 된다. 메르센 조약은 중세 유럽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다.

파일:Carolingian_empire_887_svg.png

루도비코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사촌인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로만에게 상속을 하였으나 샤를 2세가 이탈리아로 진격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가시화되고 형인 루트비히 2세가 죽자 샤를 2세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내였다. 루드비히 2세의 둘째 아들인 '작은 루트비히'(홀로도비코스, 루트비히 3세)가 이를 저지하였고 샤를 2세는 병사한다.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루이)가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로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은 비슷한 시기에 죽게 되었다. 카를로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뚱보 카를)에게 상속한다. 아들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사생아였기 때문에 물려주지 않았고 이에 계속 분쟁이 되자 카를 3세는 상속한 영지 중 아르눌프가 다스렸던 바이에른 지역을 넘겨준다. 카를 3세는 형 카를로만이 상속해준 제위와 바이에른을 제외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부르군트를 제외한 이탈리아와 중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말더듬이 루이의 아들인 5촌 조카 샤를 3세(단순왕)가 5세의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서프랑크의 왕을 대리하게 됨으로써 제국을 다시 통합하였으나 1년 만에 다시 분열된다. 이후 귀도 왕조를 거쳐 아르눌프가 제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아르눌프를 끝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는 끝나게 된다.

파일:Carolingian_empire_915_svg.png

915년 카롤루스 왕가의 지배지

파일:600PX-~1.png

10세기 중엽 서프랑크 왕국의 왕령지(노란색이 카롤루스 왕조의 명령이 미치는 부분. 랭스를 포함한 샹파뉴 지방에 국한된다.)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 서프랑크 왕국: 후처 소생의 막내 샤를 2세의 나라.
  • 아키텐: 차남 피핀 1세의 영토. 하지만 피핀 1세는 839년 사망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상속 전쟁에 끼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는 아키텐을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 했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발했다. 이에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 피핀 2세을 지지하여 루도비쿠스 1세는 결국 피핀 2세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855년에 샤를 2세는 피핀 2세를 사로잡고 축출했으며, 피핀 2세의 동생 샤를은 강제로 수도사로 만들어 아키텐을 강제로 뺏어버렸다.
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고지 부르군트 왕국
저지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 중프랑크 왕국: 장남 로타리우스 1세의 나라. 중심지인 로타링기아를[7] 비롯한 중부 영토, 이탈리아 영토, 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왕에 불과한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을 명목상으로 지배하였다.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 동프랑크 왕국: 삼남 루트비히 2세의 나라.

파일:9759943ac9186799a312c0133b861e9f.png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중프랑크 왕국은 프룀 조약을 통하여 그의 세 아들 장남 루트비히 2세, 차남 로타르 2세, 막내 샤를 2세에게 또 다시 분할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칭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 샤를 2세는 부르군트를 나누어 가졌다. 863년에 샤를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두 형은 샤를의 부르군트 영지를 나누어 가졌는데, 부르고뉴(고지 부르군트) 지역은 로타르 2세가 가졌고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는 루트비히 2세가 가졌다. 869년에 로타르 2세가 죽었다. 그는 서자였던 위그 외에는 후계자가 없었다. 위그는 계승자를 선언했지만, 결국 그들의 숙부들인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와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두 숙부들은 870년에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동서로 나누어 가졌다. 875년에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가 후사 없이 죽었는데, 이탈리아, 저지 부르군트, 신성 로마 황제위는 모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가졌다. 그러나 877년에 샤를 2세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저지 부르군트,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위는 그의 조카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의 장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이탈리아는 혼란을 겪다가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가지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은 루트비히 2세의 증손자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911년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망했다. 서프랑크 왕국은 샤를 2세의 5대손 무위왕 루이 5세가 987년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망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일드프랑스(Île-de-France, 파리)의 백작 위그 카페[8],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프랑켄 공 콘라트 1세[9]가 왕위에 선출되어 독일과 프랑스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참고로 위그 카페는 계속 대를 이어 카페 왕조를 이루었고 방계 왕조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를 이루며 절륜한 가계를 자랑했지만 콘라트 1세는 딸 쿠니군데 외에는 아들 헤르만이 요절하여 후계가 단절되고 만다. 또한 판노니아 지역에서 마자르족이 계속 동프랑크 왕국과 바이에른을 침공했으며, 결국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왕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던 작센의 하인리히 1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게 되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며, 이후 동프랑크의 역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승계되었다.

파일:Europe_in_1100_(2756×2232).jpg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결과적으로 12세기에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 두 국가로 통일된다.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동로마 제국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일단 로마의 발상지이자 이 당시에는 동로마 영토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중부 이탈리아를 피핀 3세가 멋대로 교황에게 바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으며 이후 카롤루스가 동로마의 봉신국이던 베네치아와 직할령인 남부 이탈리아까지 노리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 자리를 수여하였고 카롤루스가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동로마 여제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동로마 황제 자리까지 노리면서[10]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입장은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제위를 동로마 제국에게 바쳤기 때문에 자신들이 동서로마 황제 자리를 동시에 보유한 로마 제국이며, 따라서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은 자신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크족이 원래 서로마 제국의 밑에 있던 야만족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신하한테 자신들의 직위를 뺏긴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로 서명을 대신하는 무식쟁이 게르만인이 로마 주교와 결탁하여 멋대로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고 생각하여[11] 자존심이 상한 동로마인들은 자기들 여제가 아예 황제 자리를 넘겨주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폭발하여 이리니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로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한 다음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베네치아와 아드리아 해를 중심으로 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카롤루스는 막강한 경제력과 해군력을 가진 동로마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고 도리어 유능한 아들만 하나 잃었으며 동로마는 북쪽 국경에 나타난 신흥 세력 불가리아과의 전쟁에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하는 참극을 겪으면서 멀리 떨어진 프랑크 왕국보다 직접적으로 제국을 위협하는 불가리아를 더 큰 위협으로 보았기에 양측은 곧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양측은 전쟁 전 세력권을 그대로 유지하며 동로마 측에서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황제 칭호만 인정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둘은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어 멸망할 때까지 친교를 유지한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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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역사
Die Geschichte Deutsch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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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역사
Die Geschichte Österrei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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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역사
Storia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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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언어의 직계 후손뻘 되는 언어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어이다.[2]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3] 대관을 거부하였다.[4]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5]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제위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가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받았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6]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제위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7] 이곳이 바로 훗날의 알자스-로렌이 되는 '로렌'('로트링겐') 지방이다.[8] 할머니가 카롤루스 왕조 루도비쿠스 1세의 딸 아델라이드였기 때문에 왕족의 후손이었다.[9] 어머니가 동프랑크 왕국 아르눌프의 딸 글리스무트였기 때문에 그 역시 왕족의 후손이었다. 동프랑크 왕국 마지막 왕 루트비히 4세는 그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아르눌프의 아들이기 때문에 항렬 상으로는 루트비히 4세는 외삼촌이었고, 콘라트 1세는 외조카에 해당되었다.[10] 이리니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귀족들에 맞서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던 것이었겠으나...살리카법에서 알 수 있듯이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작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눈으로 보면 동로마는 그냥 황제 자리가 빈 거나 다름없었다.[11] 사실 카롤루스 마뉴스는 분야가 좀 달랐을 뿐 결코 무식한 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