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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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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메로빙거 왕조
2.1. 건국기2.2. 1차 분열기2.3. 2차 분열기2.4. 중흥기2.5. 왕조의 몰락2.6. 부흥의 실패와 종말
3. 카롤링거 왕조
3.1. 피핀의 치세3.2. 카롤루스 1세의 의한 전성기3.3. 루도비쿠스 1세의 치세
4. 세개의 왕국으로 분열
4.1. 중프랑크 왕국(현 저지대 지역 및 부르고뉴와 프로방스 일대)4.2. 서프랑크 왕국4.3. 동프랑크 왕국
5. 찰나의 재통합과 재분열6.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6.1. 카롤링거 왕조의 황혼기6.2. 콘라트 1세의 치세와 작센 왕조
7. 서프랑크 왕국
7.1. 카롤링커 왕조의 황혼기7.2. 카페 왕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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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메로빙거 왕조

2.1. 건국기

알프스 이북 지대는 서로마가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여러 게르만족들에 의해 부족 왕국들이 세워지고 있던 상태였다. 물론 왕국을 자칭한 세력도 있었지만 이중 약한 세력의 경우 왕(Rex)를 자칭하는 것보다는 서로마 황제가 하사한 둑스(DUX) 칭호를 자칭하는 것만 만족했다. 그리고 서로마가 붕괴되면서 그나마 현재의 수아송 지방에 남은 로마인들은 마기스테르 밀리툼이란 칭호를 내세운 아에기디우스의 통솔 하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481년 서로마 제국의 봉신을 자처했던 메로베우스의 손자인 클로비스는 아버지 킬데리크 1세가 사망하자 프랑크의 부족장이자 독스직을 물려받은 후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에 프랑크 왕국을 실질적으로 건국한 후 갈리아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은 어느새 수아송 지역으로까지 닿았고, 이내 수아송의 라틴 세력을 공격해 병합하였고, 이후에도 이후 클로비스는 꾸준히 프랑크족 통합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여과없이 보여주게 된다. 친척이자 잘리어 프랑크의 다른 세력 지도자 지게베르트 부자를 살해했고 경쟁 상대였던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보물로 매수해 카라리크를 살해하게 한 다음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카라리크의 신민들에게 자신은 카라리크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자신이 죽은 왕의 원수를 갚았다고 맹세했다.
또 캉브레족을 이끌던 라그나카르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한 뒤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라그나카르를 제거했다. 그러나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고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차후 경쟁자가 될지 모를 친척들을 전부 제거해 놓고서는 "도와줄 친척도 없이 낯선 사람들 틈에 홀로 남았네. 외로워요ㅠㅠ"라고 한탄하며 남은 친척들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며 큰 잔치를 여는데, 사실 그의 본심은 혹시라도 못 죽인 친척이 남아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완전 막장 또한 수틀리는 사람이 있으면 도끼로 박살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한번은 부하가 약탈물을 공평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 자리에선 알겠다고 해놓고, 다 잊은 척 행동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하의 칼을 점검하다가 더럽다며 땅에 떨어뜨리는데 부하가 주우려 고개를 숙이자 도끼를 꺼내 그 자리에서 참수한 적도 있다. 클로비스의 이런 행동은 당시가 서로마 제국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중세 이후 이런 행동을 했다면 교황에게 파문당하거나 연합한 적대 세력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다만 주변의 다른 게르만족들과는 결혼 동맹을 맺었는데, 90년 즈음 프랑크족 통합을 달성해 서유럽의 강자로 올라선 클로비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였던 동고트 왕국테오도리쿠스 대왕과 자신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결혼시켜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동로마 제국과도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중 부르군트 왕국의 공주인 클로틸데와 결혼한 것이 그의 인생은 물론이고 나아가 프랑크 왕국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래 클로비스 1세를 비롯한 프랑크 인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지만 클로틸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남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끊임없이 권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처음엔 아내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알레만니와의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적들에 대한 승리를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받겠다"라고 했다. 그 후 알레만니족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그는 비로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496년, 로마 교황 펠릭스 3세로부터 세례와 왕관을 받았다. 그리고 508년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아 개종하게 되었다.[1]
클로비스 1세의 가톨릭 국교화는 신의 한 수였다. 당시 갈리아에는 로마인과 로마화된 식민지인들이 다수였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프랑크 지도층을 'barbarius', 즉 이방인/미개인 취급하며 경멸했다. 하지만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왕국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하자, 로마인들은 아리우스파를 강요하며 핍박하는 다른 이민족과는 다르다고 여기고 프랑크 왕국에 호응했다. 일부 로마 교회 소속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2]의 칭호를 받게되는 일도 생기게 됐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게 된다.
한편, 세례를 받는 건에 대해 클로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3] 비엔의 아비투스(Avitus of Vienne) 주교는 '그리스정통파(orthodox) 군주[4]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더 이상 그리스만이 유일하게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는 않습니다.' 라고 썼다고 한다.[5]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때는 서로마가 멸망한 지 30년 정도밖에 안 된 508년 전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동로마가 로마도 아닌 그리스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 나아가 동방의 그리스에 대응되는 서방의 프랑크라는 구도의 초보적인 형태가 벌써부터 그려지고 있다는 점[6], 로마 황제 다음 두 번째로 클로비스 당신이 정통파 기독교도 군주가 될 수 있다며 개종을 촉구했던 것으로 보아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대세였다는 점[7],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사실 본심은 단성론이었지만 통치를 위해 내키지 않는 정통파 코스프레를 해야 했는데, 편지에는 마치 정통파 군주의 모범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세례 후에도 클로비스는 꾸준히 군사적 원정을 나서 자치를 요구하는 알레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부르군트 왕국의 일부를 공략해 프랑크 왕국의 우위를 인식시켰고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에 부근의 부이예(Vouillé)에서 크게 격파하고 알라리크 2세를 살해하였다.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제지로 인해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짓게 된다.
다만 클로비스는 전쟁으로만 왕국을 통치하지 않았다. 클로비스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프랑크 왕국의 파리로 천도하여 왕성을 옮겼고, 파리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게 된다. 종교면에서 오를레앙 종교회의를 개최해 교회법을 제정했으며 국내에 로마 교회의 선교를 장려하고 주교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업적을 쌓았다. 그 외에 성직자를 위시한 현지의 갈리아-로마계(Gallo-Roman)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프랑크 왕국 내에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하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근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서유럽 왕위 계승의 법칙의 대표격인 살리카법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클로비스는 511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에게, 랭스는 테우데리크 1세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각자 나라를 이끌면서 전시에는 힘을 합쳐 외적에 대항하기로 했지만, 나중에는 프랑크 왕국 최고의 권위자가 되려고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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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경의 유럽. 클로비스가 한참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2.2. 1차 분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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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년 클로비스의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네 아들인 클로도미르, 킬데베르 1세, 클로타르 1세, 테우데리크 1세에 의해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랭스는 토리데리크 1세에게 주어졌고,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가 갖는 식으로 분할되었다.
515년, 데인족이 테우데리크의 영역에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포로로 잡고 배에 태운 후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데인족의 왕 하이겔라크는 마지막으로 승선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가 급파한 강력한 기병대의 급습을 받았다. 데인족은 크게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헤이겔라크는 전사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가려던 노획물을 전부 회수했다.
523년, 킬데베르 1세, 클로도미르, 클로타르 1세는 부모를 처참하게 죽인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에게 복수하려는 어머니 클로틸데의 부추김에 따라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테우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왕위에서 물러난 뒤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지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클로도미르는 베체롱체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부르군트군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클로도미르가 이렇게 죽자 문제가 발생했다. 클로도미르에게 세 아들이 있었으나 클로도미르의 형제들인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파일:두 조카를 살해하는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jpg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클로틸데는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성 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에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갔다. 한편, 테우데리크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해 트루아, 센, 오세르, 리모주를 접수했다.
529년 튀링겐 왕국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내전이 발생하자, 테우데리크 1세는 자신의 조카 아말라베르가와 결혼한 헤르만프리드를 지원해줘 단독왕이 되게끔 했지만 보상을 받지 못하자 클로타르 1세와 손을 잡고 튀링겐을 공격하기로 했다. 531년 또는 532년, 그와 아들 테우데베르 1세, 그리고 클로타르 1세가 튀링겐을 공격했다. 이들은 운스트루트 강 전투에서 튀링겐군을 격파하고 스키팅기 왕궁을 공략했다. 헤르만프리드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조카 라데군트 등 여러 왕실 인사는 붙잡혔다. 이후 테우데리크는 헤르만프리드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고 요구하며 선물을 보냈다. 헤르만프리드는 이에 응해 줄피히(Zülpich) 성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나, 도중에 누군가가 그를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하여 튀링겐 왕국은 멸망했고, 테우데리크 1세와 클로타르 1세가 영토를 분할했다.
531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리크에게 시집갔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가 킬데베르 1세에게 남편이 자신을 학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고트 왕국으로 쳐들어가 나르본에서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그는 나르본에서 보물을 대거 거둬들인 뒤 여동생과 함께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뒤 아버지가 묻힌 생 드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532년,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가 연합하여 부르군트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오툉에서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포위한 뒤 맹공을 퍼부은 끝에 534년 오툉을 함락하고 고도마르 3세를 처단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켰을 무렵, 테우데리크 1세가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클로타르 1세와 칼데베르 1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테우데리크 1세가 다스렸던 영역을 접수하려 했다. 테우데베르 1세는 서둘러 랭스로 귀환한 뒤 전리품을 랭스 일대에 주둔한 프랑크군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그들의 충성을 받아냈다. 이후 두 숙부에게 뇌물을 건네며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청했고,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536~537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프로방스를 함께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데베르 1세는 테우데베르 1세와 손잡고 클로타르 1세를 협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상이변, 어머니 클로틸데의 강력한 항의, 프랑크족 전사들의 반발 등 다양한 이유로 세 형제는 다시 화해하고 군대를 거뒀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동고트 왕국노리자 자신들도 예외가 아닐 수 있기에 테우데베르 1세는 게피드 및 랑고바르드족과 협약을 맺어 동로마 제국이 장차 프랑크 왕국까지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러다 539년 여름 동고트 왕 비티게스로부터 "라벤나에서 포위된 우리를 도와준다면 북이탈리아 전체를 주겠다"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대군을 일으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에 도달한 뒤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웠다. 동고트군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프랑크인들은 돌연 태도를 바꿔 이들을 물리치고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동로마 군대도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해 거부했다.
541년, 테우데베르 1세는 알레만니 장군 부틸루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해 리구니아 일부 지역과 알프스 산맥 지역 및 대부분의 베네티 지역을 공략하고 공물을 부과하게 했다. 한편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공동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고트 왕국의 도시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비록 함락에 실패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전역을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귀환했다.
547년 말 또는 548년 초, 테우데베르 1세가 사망하고 아들 테우데발트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직후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절단이 랭스에 찾아와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테우데발트는 고심 끝에 어느 쪽도 공개적으로 돕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왕이 중용했던 알레만니 족장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 형제가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허락했다. 아가티우스에 따르면, 알레마니 족이 주축이 된 7만 5천 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장성 나르세스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이었던 파르마를 함락하였다. 그곳의 로마군은 헤룰리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 풀카리스는 패배 이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하였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하였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만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였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 시에 주둔했다.
554년 초엽, 프랑크군은 이탈리아 중부를 약탈하고 삼니움까지 남하했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양갈래로 진군해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우타리스가 방향을 돌려 본국으로 귀환하려 하자, 아르타바네스의 군대가 피사룸 인근에서 기습 공격해 선봉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고트족들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였는데, 전염병에 걸려 3만의 군대가 2만명으로 축소되었다.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을 지었다. 이후 18,000명의 동로마군이 현지에 도착해 탑에 불을 질러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어진 회전에서, 프랑크군은 완패했고 부틸리누스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이 이탈리아에서 섬멸당하고 있을 무렵, 테오데발트는 허리가 아파서 곧게 펴지 못하는 등 중병에 시달리다가 555년 11월 또는 12월에 사망했다. 테오데발트의 아내이자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부데트라다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클로타르 1세는 테오데발트가 사망하자 즉시 영지를 접수하고 부데트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이 일에 비난을 퍼붓자 부데트라다와 이혼하고 비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에게 부데트라다를 시집보냈다. 그 후 동로마군은 556년 프랑크군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한때 테우데베르 1세가 정복했던 땅에 대한 로마 제국의 권력을 회복했다.
이 무렵,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군림하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클로타르 1세의 아들 크람도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킬데베르 1세와 손을 잡으려 했다. 클로타르 1세는 아들을 달래고자 오베르뉴로 보내고 그에게 왕에 버금가는 칭호와 권한을 내렸다. 그러나 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킬데베르 1세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결국 삼촌인 킬데베르와 함께 클로타르에게 칼을 겨누면서 내전을 벌였고, 프랑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일부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키텐 왕국'을 세웠다.
클로타르 1세는 또다른 아들 카리베르 1세와 군트람을 보내 크람을 토벌하게 했다. 두 아들은 리모주에서 크람을 포위했지만, 크람이 클로타르 1세가 색슨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탈영병을 통해 퍼트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크람은 그 틈에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뒤늦게 아버지가 건재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베르 1세는 회군하여 크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던 558년, 킬데베르 1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서 파리-오를레앙 일대마저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 전역이 클로타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동맹을 잃은 크람은 브르타뉴로 피신한 뒤 항전을 이어갔다.
560년, 클로타르 1세는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하여 브르타뉴 백작 차나오를 격파했다. 크람은 패전 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아버지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클로타르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아들에게 분노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녀를 오두막에 가둬놓고 산채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들은 너무 잔혹하다고 여겨 몰래 그들을 먼저 교살한 뒤 시신을 오두막에 안치한 후 불태웠다.

2.3. 2차 분열기

하지만 클로타르 역시 통일된 프랑크 왕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제위 1년만인 561년 11월 29일, 클로타르 1세가 콩피에뉴 사유지의 별궁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인군트 왕비와의 사이에서 시게베르 1세, 카리베르 1세, 군트람을 낳았고, 아레군트와의 사이에서 킬페리크 1세를 낳았다. 킬페리크 1세는 이복형제들에게 뒤쳐지지 않고자 국고를 서둘러 확보한 뒤 병사들에게 금을 나눠줘서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이후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프랑크 왕을 자처하려 했다. 시게베르 1세, 카리베르 1세, 군트람이 연합하여 파리로 진군해 압박을 가했고, 킬페리크 1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협상한 끝에 수아송에서 왕국을 조용히 이끌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복동생을 멀리 쫓아낸 뒤, 세 형제는 나머지 프랑크 영토를 분할했다. 파리 일대는 카리베르 1세가 맡았고, 오를레앙은 군트람이, 메츠는 시게베르 1세가 맡았다. 킬페리크 1세가 이끄는 수아송 왕국은 훗날 네우스트리아 왕국이 되었고, 군트람이 이끄는 오를레앙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으로, 시게베르 1세가 이끈 메츠 왕국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으로 일컬어졌다. 형제들은 곧 서로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빼앗고자 각축전을 벌였다. 562년, 클로타르 1세는 시게베르 1세가 아바르족의 침략에 맞서싸우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지내겠다는 맹세를 파기하고 랭스를 공격해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시게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수아송을 공략하고, 뒤이은 킬페리크와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데우데베르는 1년 내내 폰티오에서 포로로 남아있다가 다시는 시게베르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565년, 시게베르 1세는 군트람에 속한 아를을 공략하고자 클레르몽의 프림과 아도발라 백작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아도발라 공작은 아를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시게베르 1세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군트람의 군대가 아를에 도착하여 프림과 아도발라를 포위했다. 두 사람은 요격에 나섰으나 패퇴하고 도주했다. 아를을 탈환한 군트람은 여세를 몰아 아비뇽을 점거했다가 시게베르 1세와 화해한 뒤 돌려줬다.
567년 11월 또는 12월,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 군트람은 프로방스의 분배를 놓고 시게베르 1세와 분쟁이 벌어졌다. 시게베르는 그의 재산인 아를 시를 기습 공략했다. 이에 부르군트의 파트라케인 켈수스가 즉각 반격해 아비뇽을 공략하고 뒤이어 시게베르가 남겨놓은 부관을 물리치고 아를을 탈환했다. 군트람은 아비뇽을 시게베릉에게 돌려주고 화해했다.
568년, 서고트 왕국의 공주이자 킬페리크 1세의 아내였던 갈스빈트가 살해되었고, 갈스빈트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프레데군트가 킬페리크 1세의 아내가 되었다. 이에 길스빈트의 언니이자 시게베르 1세의 아내인 브룬힐트가 분노하여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평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이에 시게베르는 이참에 킬페리크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의 장남 테우데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군트람은 '군트람 보손'을 보내 테우데베르를 돕게했지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데우데베르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시게베르는 킬페리크가 숨은 투르를 포위 공격하다가 프레데군트가 사주한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해산했고, 킬페리크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은 뒤 파리로 진군하여 그곳에 있던 브룬힐트를 생포한 후 루앙 시로 유배보냈으며, 그녀가 파리로 가져온 보물을 탈취했다.
하지만 시게베르 1세와 브룬힐트의 아들 킬데베르 2세는 무사히 탈출해 메츠로 이동한 뒤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을 맡았고, 575년 말 또는 576년 초에 후견인 자격으로 마르세유 절반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한편, 킬페리크 1세는 측근 한 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성 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킬데리크는 아들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게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
576년, 킬페리크는 아들 메로베에게 군대를 이끌고 군트람을 따르는 푸아티에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메로베는 명령을 무시하고 투르에 진군해 그 일대를 심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어머니 아우도베라에게 가고 싶은 척하면서 루앙으로 갔고, 그곳에서 브룬힐트를 만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 1세는 분노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쿤트와 킬페리크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와 메로베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적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둔 후 상속권을 박탈한 후 아나솔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사이에 브룬힐트는 루앙을 탈출한 후 메츠로 이동하여 아들 킬데베르 2세와 합세한 뒤 섭정을 맡았다.
아노솔 수도원에 보내진 메로베는 얼마 후 그곳을 탈출한 뒤 투르로 도주했다. 킬데리크는 메로베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투르로 군대를 재차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메로베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주선한 루아나 주교는 체포된 후 브룬힐트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왕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긴 혐의가 적용되어 교회 법원에 회부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왕의 압력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루아나는 주교직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밤에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심하게 구타당한 뒤 저지 섬으로 보내졌다.
577년, 메로베는 아버지의 공세를 피해 아우스트라시아로 도주하여 브룬힐트와 합류했다.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는 시게리크 1세의 어린 아들 킬데베르 2세가 군림했지만 실권은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브룬힐트의 권력이 강화되는 걸 꺼렸기에 메로베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메로베는 정체를 숨긴 채 랭스에 숨어있다가 테루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메로베에게 킬페리크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기뻐해 가장 용감한 추종자들만 데리고 테루안으로 갔다가 도중에 붙들려 별장에 갇혔다. 주민들은 별장 주위에 무장한 남자들을 배치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킬페리크는 메로베가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갔지만, 메로베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 세간에서는 프레데군트가 아우도베라의 모든 아이들을 멸하려고 살인을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킬페리크는 아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되자 살인자를 처형했다.
577년, 킬페리크와 프레데군트의 아들 삼손이 이질에 걸려 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프레데군트 역시 병에 걸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578년, 킬페리크는 브르타뉴 원정을 계획하고 투르, 푸아티에, 베른, 르망, 그리고 앙주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브르타뉴 공작 바로스 2세는 야밤에 원정군을 습격해 대부분의 적병을 격파했지만, 나중에 킬페리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면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하에 빼앗겼던 도시들을 돌려받았다. 이에 킬페리크의 군대가 철수했지만, 579년 바로스 2세는 맹세를 어기고 렌을 공격해 약탈을 자했고, 뒤이어 낭트를 습격해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모조리 거둬들였으며, 여러 주민을 포로로 끌고 갔다.
579년, 킬페리크는 프레데쿤트의 조언에 따라 세금 징수량을 늘리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밭, 숲, 집, 가축,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580년 2월 갈리아-로마 출신인 마르크가 리모주에 도착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1일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크는 간신히 도시를 탈출한 뒤 킬페리크에게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킬페리크는 즉시 군대를 보내 리모주의 폭도들을 학살하고 리모주 대표 및 모든 저명한 시민들을 추방했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들을 잡아들인 뒤 도시 광장에서 다양한 고문을 가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추방된 이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고, 리모주 시는 이전에 지불하기를 거부했던 세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과세를 내야 했다. 당시 킬페리크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의 세금이 너무 무거워서, 많은 이들은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킬데리크 2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나 군트람이 지배하는 부르군트로 도주했다.
580년 봄, 론, 소나, 그리고 루아르 일대가 홍수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베르니 계곡 전체가 물에 잠겼고, 리옹의 많은 집이 파괴되었으며, 도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해 여름 동안 우박이 쏟아지면서 오베르뉴 일대가 파괴되었으며, 오를레앙 시는 화재로 절반이 파괴되었고, 강한 지진이 보르도를 강타했다. 8월에는 천연두가 갈리아 전역을 휩쓸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때 킬페리크와 두 아들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도 병에 걸렸다. 킬페리크는 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죽었다. 이 일련의 자연재해에 동요한 킬페리크는 추가 세금을 폐지하고 인명부를 불태웠으며, 교회, 바실리카, 그리고 빈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눠줬다.
프레데군트 사이에서 낳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가 모두 죽자, 킬페리크는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클로비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클로비스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클로비스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를 마법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했고, 마법사로 간주된 한 여인을 체포해 화형에 처했다. 클로비스는 조사를 위해 한 별장으로 보내졌다가 프레데군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프레데군트는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아우도베라를 살해하고, 아우도베라의 딸 바시나를 강간한 뒤 푸아티에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때 아우도베라의 모든 소유권과 여동생 바시네는 프레데군트의 소유로 넘어갔다.
581년, 군트람이 이끄는 부르군트 왕국과 브룬힐트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이 마르세유 일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으며, 투르 지역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킬페리크의 부하인 블라다스트 공작이 바스크 왕국까지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583년, 킬페리크의 부하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브레뉴 측은 1만 5천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사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584년 초,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던 테우데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동안 여동생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킬페리크 1세 및 프레데군트와 대립했던 브룬힐트는 자기 아들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물려받을 가능성을 고려해 화해를 모색했고, 킬페리크 1세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런데 584년 5월경, 프레데군트가 클로타르 2세를 낳으면서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군트람과 브룬힐트는 화해를 포기하고 킬페리크 1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킬페리크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전쟁을 이어가다가 그해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되었다. 암살을 사주한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프레데군트는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묵살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을 불러놓고 당시 사생아로 의심받던 클로타르 2세를 킬페리크 1세의 아들로 인정하라고 명령해 복종을 얻어낸 뒤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삼았다. 당시 그는 브룬힐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킬데베르 2세도 양자로 들였기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상호간의 전쟁을 멈추고 화해했지만, 양자간의 적의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586년, 프레데군트는 일찍이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장악하고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베폴렌 공작을 몰아내고 이 영토를 탈환했다. 베폴렌 공작은 군트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에, 그녀는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체포되었고, 군트람은 프레데군트에게 등을 돌리고 브룬힐트의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라우칭이 다스리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렇듯 갈수록 강성해지는 브룬힐트의 권세를 경계한 프레데군트는 590년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녀는 일찍이 아들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아내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성 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하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고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라고 거짓말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론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시를 내렸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610년,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가로쟀다고 한다. 빌리헬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랐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리푸아리 백성들이 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테우데리크 2세는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사망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그가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테우데리크 2세가 사망한 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사생아이자 자신의 증손자인 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아르눌프, 피핀 1세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귀족들은 클로타르 2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던 브룬힐트는 그에게 테우데리크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포기히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에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녀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와 맞서러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기베르,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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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기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간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 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으로 시집온 이래 40여 년간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고트족 여인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프랑크 왕국은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통합되었다.

2.4. 중흥기

브룬힐트를 제압하고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클로타르 2세는 614년 파리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교회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은 교회 선거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으며, 성직자들이 왕을 제외한 세속인들의 보호 아래 귀속되는 것을 금지했고, 성직자들을 위해 주교급 또는 법관과 주교가 함께 참여하는 법원을 개설했다. 또한 모든 교육과 과학 연구는 교회의 책임하에 실시되었다. 칙령의 세속적인 조항들은 왕권의 측면에서 국민들, 특히 귀족들에게 유리한 내용이 많았다. 범죄자가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는 한 피고인의 말을 듣지 않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판사와 백작은 주어진 지역에 살고 그 지역에 재산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어야 했다. 귀족들은 이 조항에 따라 판사와 백작 지위를 독점하고 세습했다. 왕은 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과부와 소녀들을 그들의 동의 없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로 제정된 세금은 폐지되었으며, 주인의 허락없이 교회와 사유지에서 왕 소유의 돼지를 방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관직을 맡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바나차르는 브룬힐트 축출에 공을 세운 보답으로 부르군트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왕으로부터 폐위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냈다. 또한 아르눌프는 614년경 메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옛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영역은 라돈, 후카 등 귀족들이 다스리다가 623년부터 피핀 1세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617년, 클로타르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로부터 36,000 솔리디의 선물을 받은 후 랑고바르드 왕국이 본래 지불해야 하는 연간 12,000개의 금화 공물을 취소했다. 622년,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로부터 자신들을 이끌 왕을 세우라는 강한 압력을 받은 그는 아들 다고베르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선임했다. 당시 18세였던 다고베르는 메츠에 도착한 뒤 메츠 주교 아르눌프와 피핀 1세의 보좌를 받았다. 다만 프로방스와 오베르뉴, 랭스 일대는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이탈하여 클로타르의 수중에 들어갔다.
624년, 다고베르 1세는 바이에른 귀족 크로도알트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용병을 고용한 뒤 자국을 침략하는 것에 분노해 군대를 파견해 격파한 뒤 크로도알트를 체포한 푸 피핀 1세의 조언에 따라 처형 명령을 내렸다. 클로타르는 크로도알트로부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서신을 받고 아들에게 크로도알트를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고베르는 아버지의 명을 무시하고 크로도알트를 처형했다. 이 일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625년, 클로타르 2세의 아내이자 다고베르 1세의 계모인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가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다고베르는 아버지에게 프로방스, 오베르뉴, 랭스 일대를 지참금 형식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자, 아르눌프를 포함한 12명의 프랑크 귀족들이 공의회를 개최해 중재에 나섰고, 클로타르 부자는 곧 화해했다. 클로타르는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루아르와 프로방스의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지기로 했다.
626년, 부르군트 공작 바나차르가 왕의 허락 없이 주교회의를 소집할 권한을 얻었으나 곧 사망했다. 클로타르는 바나차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참에 부르군트 공국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나차르의 아들 고딘이 계모 베르타와 결혼한 걸 문제 삼고 교회법을 어긴 죄를 적용해 체포하려 했다. 고딘은 교회에 피신한 뒤 베르타와 헤어질 테니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베르타가 고딘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자, 클로타르는 고딘을 죽이기로 했다. 고딘은 성지 순례를 떠나서 속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길을 떠났다가 샤르트르 인근에서 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클로타르는 부르군트 귀족들과 궁정 관료들을 트루아에 소집한 뒤 바나차르의 후임자가 되길 원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왕의 의중을 눈치채고 한 목소리로 공작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직 왕이 직접 다스리기를 요청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는 왕의 소유로 돌아갔다.
629년 10월 18일, 클로타르 2세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외삼촌 브로둘프가 이 계획을 주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 1세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고베르 1세는 브로둘프를 처형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한 카리베르 2세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다고베르 1세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이 군사적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해줘서 지지 기반을 강화했으며, 란덴의 피핀 1세를 궁재로 임명해 지역 귀족들을 통제하게 했다. 또한 카리베르 2세의 외삼촌이며 일전에 그를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브로돌프를 처형했다. 이제 이복동생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 그는 카리베르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몸이 허약했던 카리베르 2세는 3년만인 632년에 사망했다. 아키텐 귀족들은 카리베르 2세의 아들 킬페리크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다고베르의 군대가 킬페리크를 살해했다. 이로써 아키텐은 다고베르 2세에게 귀속되었다.
한편, 슬라브가 점차 서진하면서 프랑크인들과 접촉했다.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지역에서는 슬라브 상인들이 잇따라 방문했으며, 사모[8]는 6세기부터 시작된 서부 슬라브와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아바르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625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보헤미아의 벤트인[9]으로부터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동방 원정을 떠날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려던 630년경, 프랑크 상인들이 보헤미아를 지나가던 중 벤트인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고베르는 이를 빌미삼아 사모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가 소집되었다. 그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고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고 알레만니인으로 구성된 두 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었으며,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해 슬라브의 영역을 공격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와 벤트인들이 성문을 열고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였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 보급품,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벤트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고베르를 물리친 뒤, 사모는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하여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631년, 수인틸라 왕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시세난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시세난드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수인틸라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수인틸라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632년, 다고베르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3년 전에 왕비 라그네트루드 사이에서 낳은 시게베르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세웠다. 이듬해, 그는 왕비 난틸다로부터 또다른 아들 클로비스 2세를 낳았다. 그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5년, 하도인에게 부르군트에서 소집한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와 연합하고 프랑크 왕국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는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바스크인들은 전투에서 패한 뒤 피레네 산맥으로 피신하려 했다. 부르군트군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포로를 확보한 뒤, 여세를 몰아 그들의 산악 마을까지 들어가서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다만 철수하던 중 바스크인들의 습격으로 후위대를 이끌고 있던 프랑크 공작 1명이 전사했다. 636년, 가스코뉴 귀족들과 그들의 공작 아이기나는 다고베르에게 바스크인과 손잡았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아들들을 인질로 보냈다.
다고베르는 여세를 몰아 그동안 프랑크 왕국에 대적하며 연이어 약탈을 벌였던 브르타뉴를 공격해 렌과 낭트를 파괴한 뒤, 친구 엘리기우스 등 사절단을 파견해 복종을 요구했다. 브르타뉴 공작 주디카엘은 다고베르에게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며 다시는 프랑크 왕국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다고베르는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왕국 소유지와 이전의 국경선을 따라 세워진 요새를 회복하고 위트레흐트에 성 베드로 성당과 조폐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영토인 셉티마니아를 제외한 갈리아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양국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했다.
이리하여 위신을 세웠지만, 일전에 슬라브인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에게 경원시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공작들을 해임하고 새롭게 임명하는 방식으로 귀족들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했으며, 콘스탄츠와 추르 등 새로운 교구들 사이의 경계를 규정하는 등 동부 교회도 통제하려 했다. 638년 9,000명의 불가르인들이 아바르족을 피해 바이에른으로 피신한 후 자신들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허용했다간 그들이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사병으로 귀속되어 그들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한 뒤 군대를 은밇히 파견해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한편, 그는 유대인들의 공직 참여를 금지한 아버지 클로타르 2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이어가 유대인들에게 가톨릭 세례를 강요했고, 이를 따르지 않은 이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2.5. 왕조의 몰락

638년 말 병에 걸려 생드니 수도원으로 이송된 다고베르 1세는 639년 1월 19일에 사망했다. 클로비스 2세의 어머니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 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시게베르 3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6살이었던 클로비스 2세의 공식적인 섭정은 난틸다 왕비였지만, 실권은 에가 궁재에게 넘어갔다. 에가는 641년 사망할 때까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다고베르 1세가 귀족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641년 에가가 사망한 후 새 궁재가 된 에르치노알트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청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르군트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627년 바나차르 2세가 사망한 후 클로타르 2세가 왕실의 직할지로 삼은 이래, 부르군트에는 별다른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왕실의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군트 지역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의중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다고베르 1세가 생전에 바스크인을 물리치고 그들과 손잡았던 가스코뉴 귀족들을 통제하고자 세웠던 윌레바트 공작은 리옹과 발랑스 사이의 영역을 사유지로 삼고 권세를 누렸다. 난틸다는 642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자시느이 조카 라그노베르트와 결혼한 플레차드를 부르군트의 궁재로 삼으려 했다. 플레차드는 부르군트 귀족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윌레바트는 이를 따르길 거부하고 프랑크 왕국에 적대적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642년, 난틸다는 오를레앙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해 9월, 클로비스 2세는 에르치노알트와 플레차드와 함께 오툉으로 간 뒤 윌레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윌레바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확신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오툉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전사했고, 윌레바트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플레차드가 부르군트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샬롱에 도착한 직후 열병에 걸려 왈레바트가 사망한 지 11일만에 병사했다.
한편, 시게베르 3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게 돌아갓다. 640년 란덴의 피핀 1세가 사망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왕실은 피핀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경계해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피핀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바이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토를 란덴 공작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튀링겐 공작 라둘프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11~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우선 라둘프의 동맹자였던 크로도알트의 아들 파라를 사로잡아 처단했고, 뒤이어 라인 강을 건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라둘프는 언스트루트의 높은 둑에 울타리를 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 병력과 가족들을 울타리 너머 진영에 세우고 장차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시게베르 3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크군이 대패해 수천 명의 전사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프랑크인들은 전부 달아났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시게베르 3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장에 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그리모알드가 달려와서 왕이 탈고 있는 말 고리를 잡고 이끌어서 적에게 죽거나 사로잡힐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뒤, 시게베르 3세는 라둘프가 제시한 조건에 승복하고 평화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둘프는 자신을 튀링겐의 왕으로 자처하며 주변 종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의 부추김을 받은 알레만니 공작 로타리가 642년 란덴으로 쳐들어가 오토를 죽였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줬던 그리모알트를 란덴 공작으로 세우고 왕국의 통치를 일임했다. 이 무렵 알지셀 왕이 이끄는 프리슬란트인이 다고베르 1세가 공략했던 도레슈타트와 위트레흐트를 도로 빼앗았다.
그 후 시게베르 3세와 클로비스 2세는 실권을 신하들에게 내주고 정치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다가 각각 656년과 657년에 잇따라 사망했다. 이후 메로베우스 왕조는 급격하게 쇠락했다.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자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자가 왕위에 오른 것에 반발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클로비스 2세 사후 클로타르 3세를 왕으로 옹립한 뒤 정권을 휘두르고 있던 궁재 에브로인이 이 기회를 틈타 아우스트라시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했다. 이후 수 개월간 차기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키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에브로인은 614년 클로타르 2세가 반포했던 칙령을 폐지해 귀족들이 직위를 세습하는 걸 막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에 반감을 품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에브로인을 축출할 임모를 꾸몄고, 파리의 새 주교 시게브란트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되었고, 주교는 처형되었다. 에브로인은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한편, 귀족들이 왕궁에 접근하는 것마저 차단했다. 그러나 오툰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가 이끄는 부르군트는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관례대로 자치를 누렸다.
665년, 클로타르 3세의 어머니 바틸다가 에브로인의 강요에 의해 셀라에 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에브로인은 이후에도 권세를 누렸고, 클로타르 3세는 별다른 정치 참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다 열병에 걸려 재위 16년째인 673년 3월 10일에서 5월 15일 사이에 사망했다. 이에 에브로인은 귀족들과 논의하지 않고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레오데가리우스 등 귀족들은 킬데리크 2세에게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3가지 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첫째 법령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법과 관습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법령은 고위 관리인 공작과 백작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 법령은 궁재 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3가지 법령 모두 받아들였다. 다만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는 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74년 성년이 된 그는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려 했다. 레오데가리우스가 이를 막으려 들자 주교 직을 박탈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우수트라시아 왕국만 관장하던 울포알드가 왕국 전체를 관장하게 했다
한편, 툴루즈 공작 루푸스 공작은 673년에서 676년 사이에 프랑크 왕국이 권력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데즈와 알비를 점령했으며, 전통적으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소유지인 리모주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루푸스는 비엔 강에서 가론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아키텐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킬데리크 2세는 툴루즈 공작의 영역 확장에 신경쓰지 않고 귀족들을 숙청했다. <프랑크 왕국 역사집>에 따르면, 그는 보딜로를 잡아다가 막대로 채찍질 했다고 한다.
675년, 보딜로와 친구 아말베르트, 잉고베르트는 리브리(오늘날 로그네스) 숲에서 사냥하던 왕을 암살하기로 했다. 왕은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아내 빌리칠트, 다섯살 된 장남 다고베르와 함께 살해되었다. 사후 네우스트리아 왕위에는 지난날 폐위되었던 테우데리크 3세가 복위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수도원에서 나온 뒤 아우스트라시아로 이동한 후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사생아로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서 왕위에 올렸다. 이후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테우데리크 3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클로비스 3세의 혈통을 의심해 왕으로 옹립하기를 거부하자, 에브로인은 클로비스 3세를 폐위하여 수도원에 보낸 뒤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했다. 아무런 실권이 없던 테우데리크 3세는 에브로인이 궁재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방관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왕을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레제 주교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왕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피핀 2세는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지아 부족들을 공략, 원정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영향력을 공고히했다.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691년 테우데리크 3세가 사망한 뒤 클로비스 4세가 즉위해 4년간 왕좌에 앉았지만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695년 사망했고, 뒤이어 동생 킬데베르 4세가 왕위에 올라 16년간 통치했지만 역시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711년 사망했다. 이후 킬데베르 4세의 아들 다고베르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역시나 허수아비 국왕일 뿐이었다. 피핀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한편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아들 그리모알드에게 맡겼다.
그러던 714년, 그리모알드가 모종의 이유로 급사했고 피핀 2세도 곧 사망했다. 이후 그리모알드의 아들 테오도랄드가 궁재를 세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피핀 2세의 미망인인 플레트루다가 섭정을 맡았다. 카롤루스 가문의 권력 독점과 세습에 반감을 품고 있던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715년 상파뉴 인근의 숲에서 아우스트라시아군을 격파하고 카롤루스 가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뒤 라간프레드를 궁재로 선출했다. 프랑크 왕국이 이 일련의 상황으로 혼란스러울 때, 715년 오세르의 주교 사바리크가 오를레앙, 네베르, 아발론, 톤네레를 정복하고 남부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2.6. 부흥의 실패와 종말

킬페리크 2세는 675년 아버지 킬데리크 2세가 암살당한 뒤 수도원에 보내져 40여년간 수도자로서 성직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715년 다고베르 3세가 사망한 뒤 반 카롤루스 세력에 의해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갈수록 몰락해가고 있는 왕조를 부활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716년,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카롤루스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는 프리슬란트 왕 라드부드와 동맹을 맺고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을 상대로 쾰른 인근 평원에서 격파했다. 마르텔은 에펠 산맥으로 숨었고,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에 입성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플레트루다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고를 넘겼으며, 테오도랄드 역시 궁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롤루스 가문은 몰락하고 메로베우스 왕조가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와 라겐프리드가 네우스트리아로 돌아갈 때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르텔은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돌아가는 적을 추격하여 말메디 인근의 앙블레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717년 3월 21일, 카롤루스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로 진군해 캉브레 인근의 빈시에서 킬페리크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로 귀환한 마르텔은 플레트루다와 테오도랄드를 축출한 뒤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자, 킬페리크 2세와 레겐프리드는 아키텐의 공작 외드와 동맹을 맺었다. 718년 초, 킬페리크 2세는 외드의 군대와 연합하여 수아송 인근에서 카롤루스 마르텔과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대패한 킬페리크 2세는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주했고, 라겐프리드는 앙제로 도망쳤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외드는 킬페리크를 버리고 카를 마르텔에게 귀순했다.
때마침 마르텔이 옹립한 클로타르 4세가 사망했다. 이에 마르텔은 외지에 숨어있던 킬페리크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프랑크 왕국 전역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자신을 궁재로 인정하고 전권을 쥐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더는 대항할 도리가 없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719년 병사들에 의해 방패 위로 올려져서 모든 프랑크인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명목상일 뿐이었고, 마르텔이 사실상 프랑크 군주로 군림했다. 그 후 실의 속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721년 2월 13일 아르덴의 아티니에서 사망했다.
킬페리크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이는 다고베르 3세의 아들로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 활동을 하고 있던 테우데리크 4세였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그를 명목상 왕으로 섬기면서도 전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었다. 마르텔은 내치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군을 격파해 기독교의 수호자로서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던 737년 테우데리크 4세가 사망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왕을 세우기를 거부하고 왕좌를 비어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왕으로 오르기 위해 사전 작업을 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텔은 왕이 없는 왕국의 궁재로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741년 사망했고, 두 아들 카를로만과 피핀 3세가 궁재를 세습했다. 두 사람 역시 몇년 간 왕을 옹립하지 않다가 이복 동생 그리포와 처남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반란에 직면하자, 그들의 통치에 합법성을 더하기 위해 743년 선왕의 아들인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한편 오딜로 반란을 진압한 후 피피누스와 카를로만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작센을 공격해 1년 간의 전쟁 끝에 자센족의 지도자인 테오도릭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 후 카롤로만과 피핀 3세는 최고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 그러다가 경쟁에서 밀린 카롤로만이 747년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피핀 3세가 유일한 궁재가 되었다. 751년, 피핀 3세는 모두가 자신을 추종하는데 왕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프랑크 대표단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문의했다.
"실력은 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왕이면서도 실력이 없는 자가 통치를 해야 합니까?"
파일:킬데리크 3세의 폐위.jpg
자카리아는 피핀의 속내를 눈치채고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피핀 3세는 751년 11월 킬데리크 3세의 머리를 삭발하고 생오메르에 있는 생베르탱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그곳에 갇혀 지내던 킬데리크 3세는 754년경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메로베우스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고 카롤루스 왕조가 등극했다.

3. 카롤링거 왕조

3.1. 피핀의 치세

752년 왕위를 차지한 피피누스 3세는 즉위 초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진격, 알프스 산맥에서 아이스툴프 가 직접 이끄는 랑고바르드 왕국군과 교전했다. 이때 고산지대의 기상 악화와 군량의 부족을 겨우 극복하고 랑고바르드 군을 격퇴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피핀의 군대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Pentapolis)를 쳐서 점령한 뒤 교황에게 봉헌하였다. 그러나 곧 말머리를 돌려 752년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진군하여 사라센과 계속 교전하였다. 론 계곡의 동쪽을 넘어 셉티메니아를 정벌한 후 님(Nîmes)과 셉티메니아 백작인 안세문도(Ansemund)를 복속시켰다. 7년간의 교전 끝에 759년 그는 사라센을 몰아내었고 이후 계속 영토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즉위 초부터 피핀은 이탈리아 공략에 전력을 쏟았다. 교황 자카리아가 죽고 교황이 된 스테파노 2세는 로마 공작인 아이스툴프왕이 이끄는 롬바르드군이 공격해오자 비잔티움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마 공작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여기던 비잔티움 제국 쪽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되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753년 그리폰을 처형한 뒤, 피핀은 그리폰에게 동조했던 알레만니아를 정벌하였으며, 바이에른까지 진군했으며, 사전에 피핀은 바이에른 귀족 란프레도(Lanfredo)를 포섭하여 바이에른으로 쉽게 들어갔다.
피핀은 바로 처남이자 외가 일족인 오딜로를 폐위시키고, 오딜로와 자신의 누이동생 힐다의 아들인 친외조카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고, 누이 힐다를 명목상의 섭정으로 임명한 뒤 자신이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바이에른 공작을 임명한 후 그는 바로 로마로 들어갔다. 753년 가을 피핀은 아이스톨프와 교전했고, 계속 패하던 아이스톨프는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로 도주하였다.
피핀의 군대는 파비아 근처까지 추격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파비아 주변의 땅을 약탈, 파괴했다. 결국 아이스툴프는 라벤나와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과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라벤나 땅도 교황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오래 이탈리아에 체류할 수 없었던 피핀은 아이스톨프에게 확약받고 회군했다. 그러나 아이스톨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계속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754년 2월 6일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파리로 직접 와서 피핀을 만나서 도움을 청했는데, 이때 그는 피핀을 ‘로마인의 수호자’라는 뜻의 로마의 파트리키우스(patricius Romanorum)로 임명했다. 이에 피핀은 교황을 도와줄 것을 약속했고, 교황은 바로 로마로 되돌아갔다. 754년 여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다시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방문, 여름 내내 생드니 수도원에 체류하며 여름을 보내고 되돌아갔다. 7월 28일 교황은 생드니 수도원에서 피핀과 그의 아들 카를을 왕과 그 후계자로 각각 세례 후 축성하였다.
피핀은 교회와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 했던 아버지 카를 마르텔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긴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전쟁 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의 재산을 징발, 압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세와 평민 장정들, 정복지의 포로들로 병사를 조달하였다.
한편 피핀의 외가 쪽 일족이기도 했던 바이에른의 부족 출신 공작들은 741년 이후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였다. 또한 바이에른 공작인 오딜로는 피핀과 그의 형 카를로만이 자신과 카를로만, 피핀 형제의 여동생 힐다와의 결혼을 반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742년 바이에른 공 오딜로는 그리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743년 오딜로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탈리아 문제에 계속 개입 요청을 받던 중에도 바이에른을 공략하였다.
749년 먼 외가 친척이자 매부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는 다시 분리 독립을 기도했다. 751년에는 다시 아키텐의 분리독립 기도를 진압하였다. 753년 바이에른에서는 다시 그리폰이 피핀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이복동생 그리폰과도 싸워야 했다. 피핀은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고, 753년 생장드모리엔(Saint-Jean-de-Maurienne)에서 그리포의 군대를 크게 물리쳐 결국 그리포군은 진압되었고, 그리폰은 알프스 산맥 근처에서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이를 기회로 피핀은 오딜로를 축출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어린 아들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앉히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아이스톨프는 라벤나 영지 제공도, 교황과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교황은 계속 피핀에게 아이스톨프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호소를 해왔다. 754년 10월 14일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에 대표단을 보내 하느님의 은혜로 세워진 프랑크 왕국은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의 맏아들이라 선언하고, 맏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이며, 롬바르드 왕국은 "신성한 어머니"와도 같은 교황의 거처를 괴롭히는 짓을 중단하라고 포고하였다.
피핀은 아이스톨프로부터 라벤나와 교회 소유의 영토를 반환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9] 그러나 피핀은 곧 아키텐을 공략하러 떠났다. 셉티메니아를 공략하는 중에도 피핀은 이탈리아로 종종 진격하였다. 753년 봄에는 이탈리아로 가 파비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753년과 757년 한차례씩 작센 족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작센 족은 그때만 피핀에게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충성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작센 족 정벌에 시간을 전념할 수 없었던 피핀은 이탈리아나 아키텐으로 가야 했기에 이내 종주권을 확인받고, 환대를 받은 뒤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였다. 755년 여름 피핀은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이이스툴프와 싸웠으며 롬바르드군을 물리치고 아이스톨프의 로마 공작직을 박탈하였다. 피핀은 교황에게 아이스톨프에게서 압류한 일부 땅을 바쳤고, 교회의 모든 재산과 라벤나와 펜타폴리스의 영지를 확인하고 되찾아 줄 것을 약속하였다.
교황은 그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에게 붙인 '로마인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피핀에게 부여하였다.[10] 756년에도 피핀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교황과 교회를 위해 롬바르드와 싸웠다. 이때 피핀이 교황과 약속한 것을 가리켜 소위 피핀의 기증이라고 부르며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이나 롬바르드의 속령이면서도 로마 제국의 직계 후손이라는 자존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던 로마 공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사절단을 파견하여 친선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했다.
756년 피핀은 다시 이탈리아로 와 아이스톨프를 응징하고, 약속을 이행할 것을 종용하였다. 아이스톨프는 다시 라벤나 영지 봉헌 및 교황과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준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피핀은 양피지를 동원해 아이스톨프에게 서명을 강요했고 아이스톨프는 굴복하여 서명하였다. 이는 그대로 성문화되어 19세기까지 교황이 바티칸 외에도 이탈리아 중부 지역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과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가 되었다.
756년 아이스톨프는 낙마 사고로 죽고, 757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롬바르드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피핀은 서신을 보내 교황과 교회의 재산에 손대지 말 것을 명시했다. 757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죽고,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1세 역시 피핀에게 계속 롬바르드의 군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약속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748년 작센의 봉기를 진압해야 했고, 749년 바이에른의 독립 운동도 진압해야 했으며, 753년에는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이복동생 그리폰과도 싸워야 했고, 그의 통치기간 내내 독립운동을 기도한 아키텐도 정벌하고, 아키텐과 손잡은 사라센 무슬림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이탈리아에는 혼란이 계속되었고, 피핀 3세는 계속된 원정으로 누적된 피로와 체력저하로 고통받았다.
755년 7월 11일부터 7월 20일 피핀은 수학자들을 동원하여 도량형 일치를 제정, 각종 무게와 길이의 정리 작업 및 표준화를 진행하게 했다. 또한 즉위 초부터 화폐 개혁에 착수하여 프랑크 왕국의 각 분국마다 사용되던 화폐들을 하나로 통일, 7월 20일 통일된 데나리온 동전을 발행하고 공용 화폐로 선언한다. 도량형 통일과 공통 화폐는 우아즈에서 처음 칙령으로 발표하여 우아즈 칙령(또는 베르-쉬르-로네뜨(Ver-sur-Launette) 칙령)이라 부른다.
756년 피핀은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우위를 확정짓고 아이스톨프에게 종주권을 확약받았으며, 아이스톨프에게 라벤나 태수로 봉하였다. 757년 피핀은 다시 바이에른으로 진군하여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제압하고 그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759년 다시 군사를 이끌고 서남부로 가 나르본을 탈환하고 이 지역에 있던 사라센인들을 모두 강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나르본은 다시 아랍인들에게 빼앗기게 된다.
760년 피핀은 아키텐과 셉티메니아를 공략하였다. 카를 마르텔의 사망 직후와 힐데리히 3세의 폐위 직후 아키텐 공작 바이프레스는 아키텐의 독립, 자치화를 기도하였고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무슬림과도 동맹을 맺었다. 히스파니아에 있던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반도 밖으로 몰아낸 피핀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아키텐을 공략하였다. 클레르몽과 부르봉 등을 함락시킨 피핀은 이때 사로잡은 아키텐인 및 무슬림의 아내와 자식들을 프랑크 왕국 북부 지역에 노예로 보내버렸다. 이어 루시용에서 이교도와 손잡았다는 이유로 아키텐 지도자들을 배교자로 단죄하고, 자신에게 저항한 대가로 툴루즈와 알비(Albi) 지역을 파괴, 황폐화시켰다.
763년 바이프레스는 무슬림군과 손잡고 다시 저항하였고, 피핀은 보복으로 아키텐 공작령의 중심지인 푸아티에, 리모, 앙굴렘 등을 차례대로 약탈하여 황폐화시켰다. 765년 다시 아키텐을 공략하여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고, 767년 다시 아키텐 공국을 공격하여 보르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피핀은 보르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바이프레스 공작은 아키텐을 탈출하였지만 자신의 부하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아키텐을 영구히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고 마지막으로 작센을 정복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는 다시 작센 원정을 준비하던 중 과로와 체력저하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768년 9월 24일 네우스트리아의 생드니 서쪽에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카를과 카를로만 2세가 그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카롤루스 대제가 영토 동부를, 카를로만 2세가 영토 서부를 분할하기로 했다.

3.2. 카롤루스 1세의 의한 전성기

이전 왕조와 마찬가지로 분할되어 장남인 카룰루스는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아키텐의 서쪽 및 북쪽을, 동생인 카를로만은 셉티마니아, 아키텐의 남동쪽, 부르고뉴, 슈바벤, 이탈리아 접경지역을 물려받았다.하지만 이러한 분할 상속은 늘상 그래왔듯이 형제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아키덴 반란때 카룰루스는 카를만에게 원조를 청했지만 묵살된 것으로 시작되었고, 2년 후 카를만이 사망한 후 동생의 가족을 내쫓고 동생의 영토를 차지해 프랑크의 단독 왕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카룰루스는 동쪽으로 외정을 시작해 아버지가 미쳐 하지 못하던 작센 지역 정복과 롬바르디아 왕국 정복을 재개했다. 우선적으로 작센 지역부터 그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작센족과의 전쟁은 카롤루스 치세의 거의 2/3을 차지할 정도로 길었고, 매우 잔인한 전쟁이었다. 명분은 이단 척결과 기독교의 전파였다. 카롤루스는 정복과 지역 흡수에 공격적인 기독교 선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왕 중 한 명이다.
카롤루스는 개종을 명분으로 무력토벌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굴복(개종)하지 않을 경우 초토화와 대량 학살 등의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무력 선교를 조장했던 교황청에서조차 지나치게 잔혹하다면서 말릴 정도였다. 카롤루스의 이런 잔혹한 만행에 대한 작센족의 저항 또한 맹렬하여 라인 강 이동 프랑크 왕국 본토까지 유린하는 등 혈전이 벌어졌다. 작센족이 완전히 무릎을 꿇기 전까지 카롤루스는 몇 번이나 다른 곳에서 전쟁을 벌이다가도 작센족과 싸우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고, 이는 카롤루스를 매우 분노하게 했다.
이들의 대족장은 데인족 왕의 동서인 비두킨트였다. 그는 매우 용맹스런 전사였고 그와 벌인 전쟁에서 프랑크 왕국의 고위 귀족 4명이 전사할 정도였고, 간신히 카롤루스가 승리했지만 비두킨트는 덴마크로 도주했다. 카롤루스는 작센족의 성지이자 토템인 이르민술을 베어버리고 그 근방에서 적지 않은 전리품을 얻었다.
그러다가 772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즉위 후 바로 교황청 내의 친랑고바르드 세력을 일소하고 시종장을 투옥시키는 강경책을 수행하자 이에 대해 데시데리우스는 다시 한번 교황청으로 군대를 파견, 이에 교황은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파문시키겠다며 위협하는 동시에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카롤루스는 작센 원정 중인 상태였기에 결국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의 무력에 굴복하며 카를로만의 두 자식이 카를로만이 남긴 유산의 정당한 상속자라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카롤루스가 카를로만의 영토에 대한 적법한 상속자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헛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입장에서도 '야만인'인 랑고바르드족의 무력에 굴복하고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773년 초,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데시데리우스는 거의 동시에 카롤루스에게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사절을 보낸다. 이에 대해 카롤루스는 데사데리우스가 카를로만의 자식들의 편을 들어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기에 교황의 편을 들기로 결정하고, 군을 소집,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한다.
프랑크군은 제네바에서 둘로 나뉘어 움직였고, 카롤루스는 그의 숙부인 베른하르트에게 절반의 군사력을 맡겼다. 이후 알프스를 돌파한 두 군대는 8월 중순에 재합류, 수사에서 데시데리우스의 군과 격돌하여 이를 깔끔하게 완파하고 파비아로 몰아넣었다.
파비아 공성전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파비아에만 붙들려있지 않았다. 대군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크군은 파비아를 포위공격하면서 동시에 일부 군을 나누었고, 카롤루스는 이를 직접 지휘하였다. 그는 베로나에 있던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달기스를 혹한을 뚫고 기습공격을 가해 격파, 곧바로 밀어붙여 제노바까지 함락했으며 이후 남진하면서 곳곳에 흩어져있던 랑고바르드족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774년 4월, 로마로 입성하여 교황과 회담을 가진 후 다시 북상, 파비아를 공격하는 프랑크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파비아는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카를로만의 자식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7월에 카롤루스는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고 랑고바르드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존세력들은 여전히 많았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워낙에 귀족의 세가 강한 국가였으며, 각지의 공작들은 거의 왕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775년 작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파비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알프스를 넘어갔다.
작센족들은 카롤루스의 원정으로 주요 성지였던 이르민술이 파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라인 강 동쪽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프리츨라르 수도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에 775년 파비아가 함락된 후 카롤루스는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 키에르지에서 대의회를 소집하고 "신앙 없는 이교도 작센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패배시켜 기독교에 굴복시키든지 아니면 전멸시킬 것"을 선언했다. 카롤루스는 잉글랜드 지역 노섬브리아 왕국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야만적이고 잔혹한 보복공격을 가하여 이를 굴복시켰다.
그 사이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베네벤토, 스폴레토, 프리울리, 토스카나 등 중부~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랑고바르드족 공작들은 반프랑크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카롤루스는 776년 다시 알프스를 넘었다. 작센족 원정 와중에 돌아와야만 했던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봉기에 대해 초토화작전을 수행했으며, 프리울리 공작을 전사시키고 베네벤토 공작 아라키스에게 굴복을 강요, 복종시켰다. 때마침 랑고바르드 봉기를 지원하던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손을 떼자 더 이상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존 세력들은 카롤루스에게 대향할 힘이 없었고, 결국은 굴복하였다. 이로써 북부 이탈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이에 카롤루스는 다시 작센 원정에 매진하여 777년에 다시 작센 지역을 공격해 파더보른 개간지를 거점으로 한 프랑크 왕국 군대는 작센족에 대한 무력을 동반한 공격적인 강제개종, 강제이주, 그리고 프랑크 귀족들에 대한 토지 하사와 정착을 실행하였다.
이후 카룰루스는 이슬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 눈을 돌렸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크게 세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는 알-안달루스 왕조(후우마이야 왕조), 이에 복종하지 않고 멀리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바치며 자치를 누리던 지사들, 그리고 서북부 산악지대에 존재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으로 나눠져있었다.
이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은 알-안달루스 왕조로, 이때 이미 이베리아 반도의 2/3을 장악하고 꾸준히 북상해왔다. 이에 자치권을 누리던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우에스카, 지로나 등 동북부 지역의 친아바스계 지사들은 알-안달루스조의 세력팽창을 저지할 수단으로 한참 기세등등하던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또한 알-안달루스 왕조의 세력팽창을 당혹해하고, 이들 지사들의 중개를 통해 아바스 왕조와도 협력작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들 지사들은 프랑크족에게 피레네 북동쪽 약간의 땅을 넘겨주는 대가로 알-안달루스의 군대를 막아낼 용병을 기용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와 프랑크 귀족들은 이에 응했다. 이들의 생각은 단순히 용병 수준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베리아 반도도 정복할 야심을 갖고 있었고, 778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했으나 알-안달루스 측은 이에 신속히 대응하였다. 우선 아바스 왕조의 원정군을 먼저 격퇴한 후 성전을 내세우며 지사들에게 자신들과 협력할 것을 강요하여 프랑크족의 군대로 가는 지원군을 끊고자 시도하였고, 이는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거기다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너무 규모가 컸기 때문에 이들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확산되었고, 협력을 약속했던 지사들의 대표격인 사라고사 지사는 약속을 취소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프랑크군은 사라고사를 공격해 보았지만 1달여에 걸친 공성에도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센 지역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나자 카룰루스는 군대를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장기 원정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고자 한 바스크족의 도시인 팜플로나까지 문을 닫자 분노한 카롤루스는 바스크족이 이슬람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여겼으며 팜플로나를 함락시키고 파괴해 버린 후 철수하였다. 이에 바스크족은 철수하는 프랑크 군대의 후미를 론세스바예스(롱스보) 고개에서 공격하였고, 브르타뉴 변경백 흐로들란드가 지휘하던 프랑크 후위부대를 전멸시켰다.
이에 프랑크 왕국령으로 귀환한 카룰루스는 781년 아키텐에 군사 활동이 가능한 괴뢰왕국을 만들어 아직 13세였던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 왕으로 내세운다. 이베리아 반도의 바스크족들과 이슬람 제국을 견제하도록 하고 작센으로 향했다. 이때 작센족은 프랑크 군대의 잔혹한 공격에 복수의 칼을 갈던 작센족의 봉기는 매우 격렬하여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인 라인 강 서안의 상당수 지역까지 작센족의 약탈이 계속되었다. 거의 왕국의 존망까지 위협받은 카롤루스의 반격 또한 격렬했다. 779년 6월부터 782년까지 실시된 카롤루스의 반격은 대량학살이 동반된 것이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장 스투르미가 전사하자 카롤루스는 수도원 세력도 통제하여 작센 지역을 지역별로 나눈 후 주교를 파견하였다. 강제이주와 대규모 강제개종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일시적인 일이었다.
782년 여름 카롤루스는 작센 지역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작센 지역의 평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가을, 작센족 대족장 비두킨트는 최대의 작센족 반란을 일으켰다. 작센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크군은 쥔텔에서 괴멸당했고, 카롤루스의 시종장, 근위대장마저 전사했다. 신뢰받던 작센족 용병대까지 이탈했으며 프리지아족, 벤드족까지 작센족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이 또한 결국 진압한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작센족의 숲속 정착지인 베르덴 부근으로 작센족 주력군을 몰아넣어 4,500여 명에 달하는 포로를 생포했는데, 카롤루스는 4,000여 명의 포로 전원을 모두 학살했다. 이를 베르덴 학살이라 부른다. 이 충격적인 학살로 작센의 저항의지가 한풀 꺾이며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살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하드리아누스 교황마저 이를 '잘못된 열광의 결과'로 칭할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베르덴 학살로 작센족의 핵심 전사계급이 대거 제거당하자 작센족의 기세는 꺾였고, 결국 785년 지도자였던 비두킨트가 항복하여 개종하면서 작센족 정벌은 일단락된다.
카롤루스는 작센 법령집을 만들어 반포하는데, 이에 따르면 34가지 비기독교적 관행은 사형, 11가지는 무거운 벌금형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사형으로 언급된 죄로는 왕에 대한 불경한 행동, 성직자 살해, 명문가 처녀에 대한 강간, 교회 모독, 교회재산에 대한 독단적인 절도와 파괴, 반발하는 이교도인과 음모 꾸미기, 우상숭배, 마녀의 희생,[10] 인육 먹기 등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도 작센 지역에 지속적인 강제이주와 종교적 제제, 제약을 부과했다.
하지만 남부 이탈리아엔 여전히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존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786년, 베네벤토 공작 아라키스는 교황청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에 대응하여 카롤루스는 로마로 직접 행차하여 이를 저지했다. 그러나 카롤루스가 북쪽으로 돌아간 직후 아라키스는 곧바로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다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게서 남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중북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공인받은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롤루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내려와 살레르모를 공격, 베네벤토 공작을 일시적으로 복종시켰으나, 곳곳에서 전쟁을 진행 중이던 카롤루스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있을 수 없었고, 그가 귀환하자 상황은 다시 되풀이되었다. 한편 카롤루스는 현재의 바이에른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바이에른 지역은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의 사위로 자치권을 누리던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랑고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후 거의 고립되었다시피 한 상황에 처한 상태였고, 확장되어 가는 프랑크 왕국의 영역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788년, 그는 아바르족과 방어 동맹을 맺으며 카롤루스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그가 바이에른 지역을 아바르족에게 개방하면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 프리울리 등 내륙지역이 아바르족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프랑크 왕국과 바이에른 공작령 사이에는 압도적인 실력 차가 존재했다. 카롤루스는 바이에른과 게르마니아 지역의 경계선인 레흐 강가에 군을 모아 바이에른을 압박하는 동시에 교황을 움직여 바이에른을 파문하겠다는 협박을 이끌어냈고, 결국 1년만에 타실로 3세는 굴복하고 만다. 그는 프랑크족 법정에 붙여졌고, 직위와 생명은 유지했지만 영토는 빼앗겼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대한 정당한 지배권을 계속 주장했지만, 끝내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포기하고 두 아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바이에른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면서 잘츠부르크에 설치된 대주교좌에 편입되었다. 이 당시 교회조직은 곧 카롤루스의 행정조직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는 바이에른 지역이 완전히 프랑크 왕국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뒤이어 아바르족들을 치면서 북부 슬라브족을 정복하기 시작했다.789년, 카롤루스는 아우스트리아와 작센 지역에서 징집된 군대를 이끌고 북부 슬라브족 중 가장 강성한 빌츠족(Witzes)을 목표로 엘베 강을 넘어 원정을 수행하였다. 빌츠족의 지도자인 비친(Witzin)은 곧 포로로 잡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의 아들인 피핀의 지휘 아래의 군대는 아바르족에 대한 방어와 반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당시 카롤루스는 이전에 군대를 둘로 나눠 움직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이는 그만큼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한층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788년 아바르족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 시작된 전쟁은 790년부터는 아바르족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피핀이 이끈 랑고바르드 군대는 791년 드라바 계곡을 지나 아바르족의 본토인 판노니아로 진격했으나 페스트로 인해 군대가 타격을 받았으며 작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 이상의 진격을 멈췄다.
카룰루스는 곧장 작센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800년이 되는 동안 작센 지역의 반란 진압과 베네벤토 공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것과 지중해의 중요한 섬들, 즉 코르시카,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들을 약탈하는 이슬람 해적들을 막고 있었다. 허나 프랑크 왕국은 해군이 부재하고 있었기에 이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데 실패했고, 이를 빌미로 제노바와 토스카나의 귀족들은 카롤루스의 권위에 반항하였다. 카롤루스는 이들의 반항을 제압하면서 801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협정을 맺고 이들을 통제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응답을 받았다. 하룬 알 라시드는 인도코끼리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800년 로마에 네번째 방문했다. 이때 교황은 레오 3세로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주변의 반발을 받고 스폴레토 공작의 도움을 받아 파더보른으로 피신한 상태였다.레오 3세는 카룰루스에게 도움을 요청, 카롤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레오 3세와 함께 로마로 입성한 후 사건 주동자들을 색출해 처형시키며 레오 3세의 직위를 복귀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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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답례인지 이틀 후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아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대관식은 카룰루스에게 예기치 못한 것으로 카롤루스는 교황보다 우위에 서서 교황을 지켜주고, 교황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까지도 정해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이 황제의 관을 씌워줬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누려온 교회와 교황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레오 3세에게는 황제를 추대할 법적 권리가 없었고,그보다 더 정치적 힘이 있었던 교황들도 그처럼 황제를 추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황제 즉위의 정통성 자체가 상당히 취약했고, 카룰루스 교황의 결정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결국 서방 황제를 자칭했다. 이와중에 여전히 이탈리아 남부의 베네벤토 공국을 800~801년 동안 공격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결국 남이탈리아 경락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황제 칭호를 인정받기 위해 802년 당시 동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여제인 아테네의 이리니에게 청혼하였다. 살리카법에서도 알 수 있듯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여성 통치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는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이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렇지,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 서명으로 대신하는 야만족을 황제로 받아들인다는 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동로마 제국의 구성원들로서는, 바로 그 때문에 이리니가 이를 수용할 것처럼 보이자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키고 니키포로스 1세를 옹립하기까지 하였다.
이리니가 폐위되면서 혼담이 중지되자 카롤루스는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애초에 두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전쟁은 주로 아드리아 해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카롤루스는 이 전쟁의 대부분을 자신이 랑고바르드 왕으로 세운 아들 피핀을 대리인 삼아 전담시켰다.
주요 교전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펼처졌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분쟁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줄 것을 요청하는 사신단을 보냈고, 이에 응한 카롤루스가 베네치아를 접수하자 동로마 제국은 즉각 함대를 파견해 베네치아를 다시 장악하였다. 이를 수복하고자 한 피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의 손에 의해 동로마 제국에 양도되었고, 이내 추방당했다.
그러는 동안 카롤루스의 데인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군이 없었던 카롤루스는 바다에서 밀어닥치는 이들 데인인들을 미리 눈치챌 방법이 전무했다. 거기다 이들은 뛰어난 전사이기도 하고 수로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기동력도 출중했다. 거기다 이들은 다른 적들과는 달리 가진 것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기껏 전투에서 이겨도 잘해야 본전치기였던 셈이다.
물론 이는 데인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작센 지역에 카롤루스가 수행한 가혹한 점령책에 두려움을 느꼈고 가장 강력한 슬라브 부족들이 카롤루스에게 대응도 못하고 무릎꿇은 데 대해 우려를 품었다. 작센족들의 대족장이었던 비두킨트는 데인족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을 정도로 데인족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데인족들은 카롤루스가 강압적으로 토착 종교를 제거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 두려움까지 느꼈다. 그래도 카롤루스는 그의 후손들보다는 적극적으로 데인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력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808년 덴마크 왕 구드프레드(Gudfred)는 다네베르케 지협에서 슐레스비히에 달하는 장벽을 쌓았다. 이는 카롤루스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데인족들은 해안선을 습격,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약탈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잉글랜드 사이를 오가는 것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라인 강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의 상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피핀은 810년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재차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중심지역인 리알토 군도는 프랑크 왕국에 계속 저항했고, 케팔리니아 총독 파블로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즉각 반격하자 피핀은 결국 열병에 걸린 채 철수하고 말았다. 피핀은 그 해 7월 8일 사망하였다.
그러는 동안 카롤루스의 데인족 원정도 점차 카롤루스의 패색이 짙혀지고 있었다. 라인 강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의 상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카롤루스는 이에 대한 보복원정을 계획하나 곧 포기하였다. 구드프레드가 아헨으로 협상을 위해 왔다가 살해되는 등의 사건이 있긴 했으나 결국 811년, 힐리겐 조약을 통해 국경을 정하고[11] 일시적으로 이들의 왕으로부터 사적 약탈을 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또한 이제 휴전에 들어갔다. 카롤루스는 거듭된 베네치아 장악 시도에 실패하여 유능한 아들 하나를 잃었고, 동로마 제국은 당시 새롭게 강적으로 등장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좋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핀 사후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은 아헨으로 들어가 평화협상을 개시했고, 니키포로스 1세가 811년 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이 은으로 칠해지는 참극 속에서 잠깐 중단되었던 협상은 미하일 1세가 새롭게 즉위하면서 다시 진행되었다. 결국 평화협상은 812년에 타결되었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이 베네치아 속주들과 이스트리아 속주들을 지배함을 인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그만두었다. 다만 베네치아가 프랑크 제국에서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대신 황제 칭호를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12]
카롤루스의 47년의 치세는 거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통치 당시의 프랑크 왕국은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 세력보다 경제적 기반이 빈약했다. 왕국은 지속적이고 끊이지 않는 군사적 성공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지속적인 전쟁의 승리를 통한 전리품의 획득으로 군대를 유지했었고, 카롤루스는 매년 전쟁에 나서야 했고,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국가를 꾸려고 군대를 강화시켜야 했고, 그에게 있어 전쟁은 곧 외정이자 내치였다.
물론 그가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 전쟁만 벌인 것은 아니다. 카롤루스는 잉글랜드의 브레트왈다(Bretwalda)인 머시아의 군주 오퍼(Offa)와는 상당한 친교를 맺었었다. 거기다 그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인 아바스 왕조와 교류하여 하룬 알 라시드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어 후우마이야 왕조 및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였다.
그렇다고 평화적인 내치를 완전히 방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정에 있어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내치에 있어선 기존의 200여 주를 다스리던 공작(DOX), 백작(COMES)과 더불어 후에 변경백=후작으로 불리게 될 부중백, 지방의 건절한 궁전팔츠(pfalz)를 관리할 궁중백 제도를 설치하였으며 이 봉읍 귀족들 위에 자신의 아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고 코메스와 성직자가 한조를 이루어 지방을 순시하는 순찰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제국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내정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의 제국은 여전히 메로베우스 왕조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자치권이 그대로 유지 되고 있었으나 차이점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지방의 귀족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신들로 채우는 등 비교적 중앙집권에 가깝게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의 문화 진흥책은 카롤루스 르네상스로 부른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해가 가능한 학자들을 양성하고 각지의 수도원에서는 로마와 그리스 고전들의 필사본을 대량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 시기 개혁된 카롤루스 문자에서 현존하는 알파벳 소문자가 유래되었으며 중세 번역본의 10분의 9가 바로 이 카롤루스 시대에 번역된 판본이다. 라틴어 고전들 중 8세기 이전에 유래한 판본은 숫자도 적지만 띄어쓰기 부재나 난삽한 필체로 해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으나 카롤루스 시대 이후에는 그런 문제는 거의 없어지는 등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는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또한 약탈 경제에 의존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라인 강 하류의 저지대에서 프로방스 및 베네치아까지 라인 강을 중심으로 여타 강들과 연계된 프랑크 왕국 중부지역의 상업망은 고대~중세 초기까지의 주요 경제지역이었던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경제권을 형성했다. 이 지역에서는 카롤루스의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을 받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를 감독하며 국제적인 시장을 열기도 했다. 파리 근방의 생 드니, 솜 지역에 위치한 아미앵 근방의 생 리키에, 로렌 일대의 중심지인 메스 근방에 있었던 코르비는 이러한 경제망 속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카롤루스 시기의 프랑크 왕국 수도인 아헨,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도시인 랭스도 이 경제망 안에 위치할 정도.
물론 이쪽 경제망만이 상업의 중심지인 것은 아니어서, 톨루즈(생 세르냉) 등 부유한 아키텐 지역에서도 상업적 중심지는 존재했다.
카롤루스는 화폐도 개혁하였다. 이 당시 이슬람 세력이 남부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이 귀해졌기에 자체적인 금화 통용은 어려워져 이전까지 쓰이던 트리엔스 금화는 발행이 중지되었고, 그 대신 은을 단일 기축통화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은 1파운드를 1리브르로 하여 240 데나리우스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하고 이를 발행했다. 이는 20 솔리두스에 해당한다. 이는 카롤루스 생전 그 가치가 유지되었다. 영국의 머시아 군주 오퍼도 이를 수용하였고, 새로이 페니를 주조하였다. 이로써 솔리두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경제권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폐망이 구축되었다.
카롤루스는 또한 강력한 기병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친유력자적인 경제 정책을 폈고, 조부 카롤루스 마르텔의 은대지 정책 고스란히 승계해 이들 유력자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들을 소유하는 것을 용인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전시에 이들은 중무장한 기병대가 되어 정복전쟁에 참전하였다. 조부와 마찬가지로 카롤루스의 치세는 봉건제도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사실상 유일한 제국인 상황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역시나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으로 인해서 꾸준히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히인 것은 카롤루스 대제의 적자들 중 살아남은 아들이 루도비쿠스 한 명이였던 점이었다. 이에 813년 9월 11일 그는 아헨에서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국왕 겸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듬해 1월 28일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는 아헨에서 늑막염과 우울증 등으로 사망한 후 공동 황제었던 루도비쿠스 1세가 이어 받는다.

3.3. 루도비쿠스 1세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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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년 카롤루스 대제의 사망 후 즉위한 루도비쿠스 1세는 본래라면 계승권과 먼 막내 아들로 위로 여섯 명의 형들이 있었으나 큰 형인 이복형 곱사등 피핀 4세는 어머니가 이혼하면서 사생아로 격하되었고,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792년 피핀 4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수도원에 유폐당했다. 그 아래의 형들 또한 모두 요절했기에 루도비쿠스가 온전히 제국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상속받고, 바로 'Vivat Imperator의 Ludovicus'라 하여 황제로 축성되었다. 즉위한 뒤 아버지 샤를마뉴의 서자인 드로고 3세와 테오도리히, 후고 등 자신의 서제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로 만들고, 그때까지 귀족가나 다른 왕가로 시집가지 않은 친 누나, 여동생들과 서모에게서 낳은 이복 여동생들을 모두 수녀원에 보내 수녀로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첩들도 수녀로 만들었다. 나이가 들 수록 그는 대외 활동보다는 신앙에 의지하려 했다. 루도비쿠스는 독실한 서방 교회 신자였기에 국가정책은 부활절,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축일을 국가적인 행사로 치르게 하였고, 교회와 수도원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성직자들을 요직에 등용하는 이러한 행보로 경건왕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영주와 기사들은 성직자를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정책에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는 그의 치세는 각종 반란들로 점철되어 있다. 밖으로는 아버지 카롤루스가 점령한 지역들인 크로아티아, 바이에른 등이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안으로는 조카와 아들들에 의한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반란들이 이어졌다.
루트비쿠스의 첫 중점 과제는 카롤루스 대제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항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루트비쿠스는 제국을 분할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보았다. 즉위 직후 그는 814년 8월 루도비쿠스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바이에른 국왕으로, 차남 피핀을 아키텐 공작으로 봉했다.
또한 샤를마뉴가 813년 자신에게 물려주었으며 둘째형 피피노 카를로만의 자리인 랑고바르드의 왕위를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상스의 테오델린트와의 사이에서 얻은 상스 백작 아르눌프의 몫으로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814년 말부터 상속령을 정하여 곧 영토를 세 아들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루트비히 독일인 등에게 분배했으나 이에 반발을 품은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화해하는 척 하고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를 불러들인 뒤 두 눈을 뽑고 근육을 지져 불구로 만들어 쫓아냈다. 이어 로타르를 롬바르디아(이탈리아)의 군주로 봉하고,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바이에른 분국왕에 봉했다.
그러자 먼저 죽은 형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인 조카 베른하르트 1세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루도비쿠스의 제위 계승이 정통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막내삼촌의 자식들인 사촌들의 부하가 되는 처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도비쿠스 1세는 베른하르트의 반란을 진압했고 조카와 그의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처벌했다. 이로 인해 제국 내에서 그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818년 봄 경건왕 루트비쿠스는 아헨에서 의회를 소집, 베른하르트를 도운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재판을 하였다. 루트비쿠스는 베른하르트의 협력자들, 그를 도운 성직자들을 처벌하였다. 귀족 및 평신도 공모자들은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았고, 베른하르트에게 협력하거나 군사를 지원한 가톨릭 성직자들은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오를레앙의 테오둘프 (Theodulf of Orleans) 주교는 투옥당한 뒤 곧 죽었다. 그 외에도 베른하르트에게 협력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인사들을 체포하여 가혹하게 다루었다. 818년 4월 17일에 롬바르드의 베른하르트는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루트비히는 이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루트비히는 샤를마뉴를 총애하던 아인하르트를 역시 중용하여 왕국 내 여러 대수도원장직을 맡겼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이기도 했던 아인하르트는 기록에 루트비히가 카롤루스 대제의 유언을 비교적 매우 꼼꼼하게 살펴보고 처리했다고 썼지만, 루트비히가 살던 시대와 동시대의 다른 자료에 나오는 이야기들에 의하면 유언 집행에 대해 두루뭉실하고 불명확했다 하여 아인하르트의 견해와는 다르다.
815년 루트비히 1세는 아들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아헨에서 즉위시켰다. 그는 국토분할을 막고자 장남인 로타르에게 왕위와 프랑크 전 국토를 양도하고, 차남 피핀과 셋째 루트비히에게는 변방 지역을 주기로 결정했다. 곧 루트비히는 상속령을 발표하여 로타르는 총괄 국왕 겸 황제로, 피핀은 아키텐과 가스코뉴(Gascony), 툴루즈, 카르카손 (Carcassonne), 오툉(Autun), 아발론과 낭베르를,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및 작센 등을 상속령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분국왕으로 임명된 세 아들이 죽으면 그 세 아들의 아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정한다. 이는 바로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라는 이름으로 성문법화되었다. 그러나 상스의 테오델린트에게서 태어난 아들 아르눌프의 몫은 정하지 않았다.
816년 루트비히는 제국 내 교회의 참사위원에 대한 규정인 '참사 위원 제도서(Institutio Canoniconum)'를 저술, 간행하였다. 7월 20일에는 생모르데포세 성당을 방문했다가, 친히 면세 혜택을 부과하는 면세 허가장을 양피지에 친필로 써서 봉정하였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재위기간 내내 성당과 수도원, 수녀원, 학교 기관에 한해서 토지 기증 및 면세 혜택 정책을 수시로 부여하였다. 816년 10월 5일 루트비쿠스는 랭스 대성당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열었다. 이후 후대의 서프랑크와 프랑스의 왕들은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한편 상술한 대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항상 예배당을 찾았으며, 성직자 및 성직자와 가까운 세속인들을 수상과 대신으로 중용하였다. 부활절과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은 국가적인 행사로 치루도록 지시하였다. 그의 충실한 조언자이기도 한 아니얀의 베네딕토를 통해 세속화된 사회를 정화, 도덕화할 정책을 편다. 아니얀의 베네딕토는 816년과 817년에는 교회회의를 통해서 루트비히 집권 초반, 교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과 도덕적 재무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817년 1월 교황 스테파노 4세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 즉위한 교황 파스칼 1세는 즉위하자마자 1월 24일 루트비히에게 교황청 대사를 보냈다. 루트비히는 교황청의 대사를 융숭히 대접했고, 교황의 정치 사회문제애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교황권을 확고히 하였다. 교황 파스칼 1세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는 교황청에서 사신이 방문할 때마다 직접 나와서 교황청 사절단들을 맞이한 뒤 이를 융숭히 대접했고, 황제는 교황의 충실한 보호자임을 재확인시켰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는 교회·수도원을 보호하고 새로 건립하였으며 성직자를 요직으로 등용하였다. 822년에는 유월절 때 아르덴의 부지에(Vouziers)와 아티니(Attigny)의 수도원에서 교황 파스칼 1세 앞에서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가 죽은 것과 충실한 조언자인 베네딕토의 병사 등 대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공개 참회와 속죄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귀족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황제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냐'며 조소하였다. 루트비히는 814년 자신이 강제로 수도자로 만든 드로고 3세는 메츠의 주교에, 후고는 생 퀘틴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친척들인 삼촌 베른하르트의 친손자들 아달하르트(Adalhard)와 왈라(Wala 또는 Walacho)는 엑샹 라샤펠 수도원에 보낸다. 또한 각 수도원과 성당에 각종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과 친인척인 니타르트 등 친척을 중용하였다. 그밖에 유산 상속을 우려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과 친척들을 결혼 협정을 맺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인접국가로 시집보내는 대신에 수녀원에 보냈고, 몇몇 이복형제들과 조카들, 친척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수도자로 만들었다.
817년 7월에 루트비쿠스는 아헨의 제국의회에서, 그는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다시금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발표한 칙령에서 둘째 아들 피핀은 왕의 칭호와 아키텐, 툴루즈 일대의 통치권을, 셋째 아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에게는 바이에른과 카린티아, 보헤미아 및 왕의 칭호와 주권을 부여했다. 당초 그는 아버지의 사후 아들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프랑크족의 전통 살리카 법 대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일찍 다른 아들들에게는 일부의 영지만을 봉하고 장자인 로타르에게 넘겨주어 장자 상속을 확립하려 했지만, 일부 관료들만 루트비히 경건왕의 뜻을 이해했을 뿐, 다른 아들들은 자기 몫의 봉토를 차지하려 했고, 대다수의 귀족, 궁재들이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그의 뜻은 실패하고 만다.
같은 해 루트비쿠스는 로마 헌법을 발표, 자신에게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음을 선언하고, 교황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루트비히는 아르눌프를 상스와 부르군트 백작에 임명했다. 후술하지만 아르눌프는 베르덩 조약 당시 840년의 내란 당시 로타르 1세의 편에 가담한다. 이때 루트비히는 나중에 아이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않고 있다가 이르멘가르트 황후가 818년에 죽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결혼해 823년 또는 822년 6월 그녀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을 얻자 829년 그에게 알레만니아와 게르만인 루트비히의 영지, 로타르의 영지를 일부 떼어 주었다. 그러자 로타르 1세를 비롯한 본처 이르멘가르트 소생 세 아들은 수시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기도하게 된다.
818년 4월 17일 루트비히 경건왕은 장남 로타르 1세에게 제국의 제위와 함께 롬바르디아를 넘기기로 정하고, 로타르를 롬바르디아 왕으로 임명한 뒤 교황 파스칼리스에게 보내 축성과 황제의 제관을 받게 하였다. 바로 루트비히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선포,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다며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한다. 818년 가을 그가 제국을 순시하러 나간 사이, 그 해 10월 3일 황후 히스파니아의 이르멘가르트가 병으로 사망했다. 왕실 측근들은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재혼을 권고하였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법정으로 간택된 귀족 처녀들을 검사한 후, 루트비히는 바이에른과 아르톨프의 공작이며 레겐스부르크의 영주인 구엘프 1세의 딸 유디트 바이에른(Judit Babariae)을 낙점, 그와 재혼하였다. 819년 봄에는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아헨에서 유디트의 성대한 황후 책봉식을 주관했다.
821년 10월 중순 티옹빌의 제국의회에서 베른하르트 1세의 추종자들을 사면할 때 사촌 아달하르트와 왈라를 사면하고, 추방령에서 해제되었다.
821년 그의 스승이자 조언자이기도 한 아니아네의 베네딕토가 사망했다. 그해 황후 유디트 바이에른에게서 딸 기셀라와 822년 6월 13일 넷째 아들 대머리 카를 2세가 출생했다. 유디트는 그를 이리저리 꾀어 카를에게 유리한 분할안을 내놓도록 설득하였다. 이에 전처의 자식들은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러한 분위기에 824년 불가리아의 공작 오무르탁이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쳐왔다. 824년 2월 불가리아의 사신들은 프랑크 왕국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하여 방문하자 루트비히는 뜻밖의 사절단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바이에른 출신의 막켈름(Machelmum)을 불가리아 사신들과 함께 불가리아 칸 오무르탁에게 보냈다. 824년 12월 오무르탁은 사신을 다시 보냈으며 루트비히는 불가리아 사신을 접견하기에 앞서 불가리아인들과 이웃하여 사는 다키아(Dacia)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아보드리트 족을 비밀리에 불러 불가리아 왕 오무르탁의 저의를 파악하려 하였다. 아보드리트족은 불가리아의 부당한 침략을 프랑크 왕국에 호소하였고, 루트비히 프랑크 왕국의 왕은 불가리아 사신을 돌려보냈다.
그 후 루트비히는 825년 5월 프랑크 왕국과 국경 문제를 논하러 아헨을 방문한 불가리아 사신을 만났다. 루트비히는 싸움을 피하려 했고 협상을 시도한다. 불가리아 왕 오무르탁은 826년과 824년에 보냈던 사신대표를 다시 바이에른으로 보내 양국 사이의 국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어길 시는 전쟁도 불사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판노니아 백작 발데리히(Balderich)와 게롤트(Gerold)는 불가리아 군대의 침략가능성이 없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827년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탁(Khan Omurtag)은 프랑크 제국의 동남부를 침략하여 판노니아 땅을 점령한다.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한 아바르 카간국의 유민들은 오무르탁에게 협력하여 제국의 동남부를 위협하는 데 가담한다.
루트비히는 818년 아들 로타르 1세를 롬바르디아의 분국왕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들은 샤를마뉴 시대에 이미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루이는 베네벤토의 공작인 그리모알드 4세(Grimoald IV)나 후임 공작 싸이코(Sico) 등으로부터 충성 맹약을 받았지만 이는 모두 형식적인 것이었다.
828년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는 레겐스부르크에서 바이에른과 아르톨프의 공작이며 레겐스부르크의 영주인 구엘프 1세의 딸 바이에른의 엠므와 결혼했다. 엠므는 루트비히 경건왕의 후처 유디트의 여동생이었다. 한편 카를의 출생과 후처 유디트의 설득으로 루트비히 경건왕은 829년 영토를 다시 분할했으나, 유산이 줄어든 본처 소생 세 아들의 반발로 830년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로 반란은 진압되고, 경건왕 루트비히는 권좌에 복귀했다. 내란은 14년간 지속되었다.
830년 셉티메니아의 백작 베른하르트가 분리독립을 기도하고 거병하였으나 루트비히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해 아키텐의 피핀 1세는 정변을 일으켜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수도원에 감금하고 대머리 카를은 강제로 성직자로 만들어 수도원에 보낸다. 제국의 일부인 아키텐, 바이에른만을 피핀과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넘겨주었으므로 경건왕 루트비히는 아들들에게 더 많은 영토를 주겠다고 회유하여 반란을 진압한다.
831년, 833년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등은 반란을 일으켜 한때 그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지지로 834년 기적적으로 복위했다. 이 일은 종내 부자 형제간의 분쟁을 야기하고 프랑크의 국력을 쇠하게 했다. 당초 로타르는 두 동생의 지원을 업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0년 10월에 열린 네이메헨 의회는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으며, 831년 2월 아헨의 제국의회가 개입해서 상속령을 정해 제2차 분배에서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만을 배당받았다. 그리고 로타르의 북부 로트링겐, 프로방스 등의 영토를 대머리 카를에게 준다고 명시했다.
831년 피핀은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측근인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사주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화해하였다. 832년 루트비히는 피핀에게서 아키텐 영지를 빼앗아 카를에게 주었다. 이에 피핀은 강력 반발했고 그의 계비인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오 4세의 지원을 얻어 거병, 반란을 일으켰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다시 아버지인 그를 폐위했다.
로타르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는데 성공, 롤페르트로 끌고갔다가 말렘으로, 말렘에서 메츠로, 메츠에서 다시 수아송까지 끌고 갔다가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동시에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은 부모에게서 떼어내 아르덴 근처 프륌 수도원에 보냈다. 그러나 834년 3월 루트비히는 다시 황제 지지파들의 지원으로 제위에 복귀했으며 피핀 및 독일인 루트비히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834년 말 로타르 1세는 혼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롬바르디아로 패주했다.
835년에는 아들들에 의해 수아송의 한 성에 투옥되었으나 감시병들이 조는 틈을 타서 이들을 베고 탈출하기도 했다. 반란들을 진압함에 따라 837년 아헨 제국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의회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영토 일부를 떼어 더 많은 영토를 아들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로타르,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834년 다시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폐위되었으나 극적으로 복귀한다. 836년 바이킹이 위흐레흐트와 안트워흐를 침략, 약탈하고 되돌아갔으나 이를 막지 못했다. 837년 봄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을 알레만니아와 부르고뉴의 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지가 축소된 것에 반발한 루트비히 독일인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837년 바이킹족이 침투 로리크가 침투하자 직접 이들을 영역 동북방으로 몰아냈다. 이들은 프리슬란트의 프리시아까지 자신들의 영토라고 요구했다. 838년 12월 차남 아키텐의 피핀 1세가 갑자기 죽자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아키텐은 대머리 카를에게로 넘기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한편 839년 봄 둘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와, 손자이자 피핀의 아들 피핀 2세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바이킹은 계속 프리슬란트와 프리시아를 요구했다. 결국, 루트비히는 839년 바이킹 족이 요구한 조약을 체결해주어 프리슬란트의 프리시아를 그들에게 주는 조건으로 이들을 되돌려보낸다.
니타르트 등을 시켜서 왕실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니타르트에게 어린 카를의 후견을 부탁하기도 했다. 838년 아들 피핀이 죽자 아키텐을 다시 카를 2세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했고, 그도 결정을 취소하고 피핀의 아들 피핀 2세를 아키텐 분국왕으로 봉했다. 이는 후일 카를 2세와 피핀 2세간 아키텐의 권리를 두고 860년대까지 내전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838년 6월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다투었다. 838년 9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몫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했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데 대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군사를 이끌고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판노니아로 퇴각하였다.
839년 봄, 독일인 루트비히는 그가 카를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루아르에서 군사를 거병하여 피핀 2세를 지원했다. 이에 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 2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로타르 1세가 경건왕 루트비히의 편에 서서 이들과 싸웠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전해에 죽은 피핀 1세의 아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결국 루트비히 경건왕은 대머리 카를에게 아키텐을 주려는 결정을 결국 취소하게 된다.
그해 프리슬란트와 덴마크에 있던 바이킹이 제국 동부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고 바이킹은 수시로 동북방 프로이센 지방을 약탈하였다. 839년 말경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는, 5월 30일의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 선언을 하였다. 840년 초 독일인 루드비히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경건왕 루트비히가 진압군을 보내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840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만년의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져 정사를 수상과 궁재들에게 다 넘겼고, 루트비히 본인은 기관지염과 함께 위암, 식도암 등에 걸려 고생했다. 840년 초, 병석에 누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여 그해 6월 20일경 그는 라인강변으로 가 요양하였다. 그해 초,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루트비히는 제국의 상징물을 모두 장남 로타르 1세에게 보냈다. 루트비히 1세는 840년 7월 1일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의 라인강변에 있는 페터사우에를 건너던 중 성직자와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복형제인 드로고 주교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기관지염, 식도암, 위암 등의 후유증이었다. 곧, 이복동생인 메츠 교회 주교 드로고의 집례하에 자신의 어머니 힐데가르트가 안치된 아우스트라시아 메츠에 있는 장크트아르눌프 교회 내에 안치되었다.

4. 세개의 왕국으로 분열

840년 8월 27일 루도비쿠스 1세가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에서 죽은 뒤 로타리우스 1세는 아헨에서 단독으로 황제가 되고, 프랑크 왕이 되었다. 이에 이복동생 대머리왕 카를과 셋째 동생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스트라스부르크의 서약을 체결한 뒤, 로타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민 전쟁이라 부른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41년 6월 25일부터 발생한 퐁트누아 전투에서 출정했다.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아키텐 군대가 로타르 1세에게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1세와 아키텐인 피핀 2세는 아헨에서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격파당하고 도주했다. 7월 25일 동생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에게 최종적으로 패했다. 로타르는 곧 아헨(Aachen)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4일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동맹을 결의한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조약문을 읽었다 한다.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의 힘이 너무 강하여 로타르 1세는 가져갈 수 있는 보물을 모두 챙긴 뒤, 자신의 수도 아헨도 버리고 달아났다. 로타르 1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센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왔고, 한때 로마 시내를 포위하기도 했다. 결국 교황청의 주도하에 사라센 군대를 겨우 몰아냈다.
이후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 842년 6월 로타르는 두 동생인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를 작센 또는 손 강(Saône)의 한 섬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이때 각자의 입장을 대표할 성직자 40명씩을 동원해 배석시키기로 정하게 되었다. 842년 11월에 로타르는 코블렌츠에서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과 재협상하였으나 실패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로타르가 패하면서 결국 843년 8월 제국을 3분하기로 하고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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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8월 10일에 로타르, 루트비히, 카를 간에 체결한 베르됭 조약에 따라 로타르는 제국이 3분되자 이탈리아의 왕과 황제의 직위는 계속 가졌고,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와 로트링겐(로렌), 부르군트, 프로방스, 라인 마스 등, 북해에서 네덜란드, 제네바, 이탈리아에 이르는 프랑크의 중부 왕국을 차지했으며 동부 영토는 루트비히에게, 서부 영토는 카를에게 돌아갔는 이때 피핀 2세는 협상에 아예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848년 잘못된 처신으로 인해 아키텐마저 샤를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실권은 곧 장남 루트비히 2세에게 넘겼다.

4.1. 중프랑크 왕국(현 저지대 지역 및 부르고뉴와 프로방스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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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중프랑크 왕국만 통치하게 된 로타리우스 1세는 844년 아들 루도비쿠스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845년 아를 백작 풀카르트(Fulcrad)가 프로방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로타르는 이를 진압했다. 846년 서프랑크 국왕 대머리 카를의 측근인 마스가우의 기셀베르트는 로타리우스 1세의 딸 이르멘가르트를 납치하고, 로타르에게 새로운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딸이 납치되자 분개한 로타르는 협정 요구를 거부했다.
846년 사라센 제국 이슬람 군대가 롬바르디아로 쳐들어왔다. 그해 여름 사라센 군은 로마를 위협했고, 8월에는 성 피에트로 성당을 약탈해갔으며, 첫 번째 사도의 무덤을 약탈, 파괴했지만 로타르는 손을 쓰지 못했다. 로타르는 즉시 아들인 루트비히 2세를 시켜서 로마를 방어하게 했다. 847년 로타르의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사라센 군을 몰아내고 베네벤토를 차지하고 로마로 되돌아왔으나 사라센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루트비히를 보내 베네벤토를 다시 회복시킨다. 848년에 아들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사라센인들을 베네벤토에서 최종 격파하였다.
848년 아랍계 유목민들이 그의 영토를 침략하였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랍 군대는 아헨까지 쳐들어와서 약탈을 감행했다. 북부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이 쳐들어와서 그의 영토를 침입, 방화와 노략질을 하고 되돌아갔다. 한편 가톨릭 성직자들에게도 세속의 법을 적용하려는 로타르의 시도에 성직자들은 집단으로 반발하였다. 850년 아들 루트비히 2세를 롬바르드와 살레르노, 베네벤토의 공작에 임명했다가, 그해 로마에서 교황 레오 4세에게 기름부음 의식을 받게한 뒤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851년 5월 20일 왕비 투르의 이르멘가르트가 에르스틴에서 사망하였다. 왕비 이르멘가르트는 849년 엘사스에 에르스틴 수도원(abbey Erstein)을 설립하였고, 그 곳에 매장되었다. 이후 로타르 1세는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고 한다.
855년 무렵 로타르 1세는 심한 통증을 겪었고, 병세가 위중해지자 회복이 힘들다고 본 그는 절망하여 왕좌를 포기하게 되었다. 9월 19일 중부 제국의 나머지 영토를 둘로 분할, 다른 두 아들인 로타르 2세와 프로방스의 샤를에게 각각 통치권을 넘겼다. 로타르 2세에게는 프리슬란트와 로트링겐을, 프로방스의 샤를에게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와 리옹을 넘겼다. 그런 다음 9월 23일 왕위를 버리고 아이펠의 프륌 대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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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프랑크 왕국은 프륌 조약을 통하여 그의 세 아들인 장남 루도비쿠스 2세, 차남 로타르 2세, 막내 샤를 2세(프로방스의 샤를)에게 또 다시 분할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황제 칭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 샤를 2세는 부르군트를 나누어 가졌다.
855년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이 된 프로방스의 샤를은 아직 미성년자였고, 심지어 간질병자였다.샤를의 두 형 루트비히와 로타르는 그가 여전히 미성년자이고 간질 발작을 앓는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올베 지역에서 샤를에게 자신의 영토를 포기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를은 형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샤를이 차지한 프로방스와 부르고뉴가 영토가 넓었으므로 형 루트비히와 로타르 2세는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856년 그가 제네바 호수 주변의 오브레, 스위스를 각각 형들에게 양도하여 반발을 가라앉혔다. 또한 이 조약에 의해 리옹(Lyon) 공국의 영유권을 그가 확보한다. 즉위 초 리옹의 공작이던 그의 이모부 루시용 출신 제라드 2세(Girart de Roussillon)가 그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루트비히, 로타르 2세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한편 855년 당시 그는 병약한데다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856년 리옹 공국이 그의 영지가 되면서 비엔나 백작 겸 루시용 공작 제라드가 860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또한 제라드는 론강과 발랑스 일대를 방어하였다. 교회를 제어하는 것은 프로방스와 아를의 백작 풀카르도(Fulcrado)가 맡았다. 루시용 공작인 제라드는 샤를의 어머니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여동생이자 위그의 딸 베르타의 남편으로 그의 이모부였다.
샤를 2세는 지병인 간질로 고통받았다. 한편 858년 샤를 2세는 자신이 자녀 없이 죽으면 자신의 영토는 둘째 형 로타르 2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샤를의 이 유언에 대해 맏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샤를은 859년 로타르 2세를 후계자로 한다는 자신의 유언을 관철시켰다.
858년과 859년에는 바이킹 족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형제들에게 호소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하스팅(Hasting) 일대에 나타난 바이킹 및 지중해 해안가 일대를 약탈하고 아를지역까지 나타난 노르만족을 직접 맞서 싸웠고, 860년 겨울 카마르그 일대에서 노르만 족을 크게 격파하였다. 카마르그에서 프로방스의 샤를 2세에게 격퇴당한 노르만인들은 그 이듬해 봄 이탈리아 지역으로 가서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사실상 프로방스의 두 번째 군주였던 그는 860년 처음 친정하였으나, 그해에 그의 영토를 침범하려던 삼촌 샤를 대머리왕을 물리쳤다. 861년 샤를 대머리왕은 프로방스, 부르군트에 개입해달라는 아를 백작의 개입 요청을 받고 다시 프로방스를 쳐들어왔으나 역시 격퇴하였다. 대머리 샤를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마콘 강(Macon, 후대의 벨기에)을 넘다가 랭스대주교 힝크마르에게 제지당했다. 프로방스의 샤를 2세는 후계자 없이 죽었는데 그의 영토는 맏형인 루트비히 2세가 차지했다. 질병에 걸린 그는 864년 1월 25일 리옹의 리옹 세인트 피에르 레 노망 수녀원(Abbay of Saint-Pierre-les-Nonnains of Lyon)에서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당초 로타르 2세에게 자신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넘긴다고 하였으나, 형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이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였으므로 제라드가 이를 중재하여 아를과 액 상 브랑을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에게 넘겨주고, 나머지 비엔나와 그르노블 지역 그리고 리옹 주교관구를 로타르 2세에게 분배하여 넘겨주었다. 그러나 로타르 2세 마저도 869년에 사망하여 그의 영지는 최종적으로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에게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로타링기아의 왕이 된 로타르 2세는 라인강 서안에서 북해에 이르는 베네룩스 지역을 상속받았는데, 이 지역은 로타르의 왕국(Regnum Lotharii) 로 불리는 지역으로 나중에 10세기 초반부터는 로타링기아로 불리는 지역이다. 그밖에 로타르는 아헨과 벨기에 지역도 그의 영토로 지정되었다. 로타르 2세의 형인 루트비히는 황제의 지위와 북 이탈리아를 물려받았고 동생 샤를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 아날레스 연대기에 의하면 로타르 2세와 그의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동생 샤를이 나이가 어린 점과 간질병을 앓는다는 점을 들어 동생에게 영토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한다.
형인 로타리우스 1세가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대머리 샤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샤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 그러나 대머리 샤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855년 11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고, 856년 삼촌인 독일인 루트비히의 집전 하에 기름부음 의식(세례)을 받았다.
863년 동생 샤를이 간질 등의 지병으로 죽자 로타르 2세는 형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와 함께 재빨리 동생 영토의 일부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바이킹 해적의 침략으로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이때 로타르 2세는 프로방스-부르군트 왕국의 동북부 지방과 쥐라산맥의 남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로타르 2세의 생애는 아내와 이혼하고 정부와 결혼하는 것과 이를 위해 두 삼촌들, 즉,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의 영향력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일찍이 정부인 발트라가가 있었지만 그는 855년 그는 아버지 로타르 1세의 강요에 의해 발루아 백작을 지냈고, 성 마우리키우스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원장이던 힉베르트의 여동생이자 알사스, 토리노, 발루아의 백작 노인 보소(Boso the Elder)의 딸인 토이트베르가와 결혼하였다.
그는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하였으나 아버지 로타르 1세는 그녀의 집안이 지체가 낮음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 토이트베르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로타르 2세는 857년부터 이 결혼을 청산하고 이미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정부 발라다를 정식 아내이자 왕비로 맞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힘있는 집안인 보소 가문의 눈치를 보는 데다가, 잘못이 없는 이혼, 파혼은 신뢰 문제가 걸린 일이고, 교회법상 부도덕한 일이라서 왕을 도와주기를 주저했다.
로타르의 첩들 중 첫 아들을 안겨준 발트라다는 왕비처럼 행세하다가 일부 귀족, 성직자들의 눈밖에 났다. 로타르의 귀족, 사제들 설득은 난항에 봉착했다.
로타르 2세는 이혼에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고자 지역 가톨릭 주교들에게도 꾸준한 설득과 투자를 했다. 857년경 그는 토이트베르가와 이혼을 계획하였다. 동시에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 우베르토와도 갈등했다. 그는 결혼 자체를 취소하게 하려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는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심하게 싸웠다. 이 일로 그는 교계의 인망을 잃게 된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끝내 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계략을 꾸몄다.
로타르는 아내 토이트베르가를 자신의 친정 오빠인 생 모리스 다곤(Saint-Maurice d'Agaune) 성당의 우베르토와 근친상간했다고 비난하고 재판을 했는데, 그녀가 불에 달군 쇠로 받는 형문과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신판(神判)을 모두 이겨내자, 주교단은 모두 무죄를 선언했다.
로타르 2세는 이 판결을 무시한 채 아내를 감금해 결국 죄를 자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의 자백을 들은 주교들은 로타르 2세의 재혼을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그러나 신학자 중 한 명인 힝크마르 대주교가 로타르의 재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학문적으로 탄탄한 보고서를 내놓자 재혼을 반대하는 쪽이 더욱 강경해졌다. 로타르 2세는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과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이혼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858년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힝크마르 대주교는 로타르의 재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학문적으로 탄탄한 보고서를 내놓아 재혼을 반대하는 쪽이 더욱 강경해졌다. 그러나 힝크마르는 로타르의 삼촌인 서프랑크 대머리 카를의 지도신부였다. 힝크마르는 자신의 후원자인 대머리 카를 가문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에는 대단히 탄력적인 결혼 원칙을 적용한다. 대머리 카를의 딸이 근친상간을 금지한 중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반하여 의붓아들과 결혼했을 때 그는 반대하지 않았고, 대머리 카를이 아들에게 적법한 아내를 버리고 새 아내를 얻으라고 강요했을 때에도 그저 가볍게 항의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머리 카를의 이혼 강요에 말더듬이 루이 2세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하지만 힝크마르는 로타르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는 결혼을 결코 깰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쳐서 승리를 거뒀다. 858년 초 로타르 2세는 자신의 동생 프로방스의 샤를과 화해하였다. 한편 샤를은 자신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 자신의 영지는 모두 로타르 2세에게 넘겨준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의 루트비히는 반발하였다. 858년 여름 로타르 2세는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연합하여 로타링기아 북방에 출몰한 바이킹을 격퇴하였다.
로타르는 자신의 동맹들에게 호의적인 콜로네(쾰른)과 트리에의 대주교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쾰른의 대주교는 로타르가 이혼한 뒤 자신의 조카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860년 2월 로타르 2세는 아헨의 공의회 또는 엑스 라 샤펠에서 아내 토이트베르가가 순결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발라다와의 결혼하려고 토이트베르가와 별거하였다. 곧 아헨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던 토이트베르가는 같은 해에 탈출하여 친정 오빠 힉베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로타르 2세는 집요하게 토이트베르가와의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 루트비히 황제의 지원을 얻었는데, 그는 형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지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삼촌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일부 얻어냈다. 로타르 2세는 쾰른 대주교 군타하르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사주하여 아헨 2차례 종교회의를 열어 이 결혼을 취소시키고 862년 정부 발트라다와 결혼했다.
862년 로타르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 회의가 엑스에서 열렸다. 로타르는 왕비가 엄청난 짓을 저질러 자신을 배신했다고 감정적으로 설명했으며, 재혼이 허락되지 않으면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로타르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을 허락해주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메츠 종교회의에서 이 결정에 대한 교황 대리의 추인을 받았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는 로타르의 숙부 카를 2세의 궁정으로 피신했고, 카를은 랭스 대성당 내 수녀원에 토이트베르가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다시 대머리 카를 2세는 토이트베르가에게 아브네 수도원(abbey of avenay)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7]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의 이혼 허릭 결정을 번복하고 대주교 군타하르와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해임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고, 로타르 2세의 형인 황제 루트비히는 로마 시내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862년 말 대머리 카를 2세의 반대에 부딛친 카를 2세의 딸이자 앵글로색슨족 왕의 과부 유디트와 플랑드르의 보두앵 1세가 로타링기아로 피신했고, 로타르 2세는 이들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들은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은 결혼 무효화와 이혼 결정을 반려하라고 로타링기아의 주교들에게 지시하였다.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에 대해서는 성직자들 사이에서 계속 이의제기가 된 끝에 863년 메츠의 공의회에서 다시 로타르 2세의 결혼의 적법성이 논의되기도 했다.
865년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대머리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파문의 위협을 하면서 로타르에게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필요하다면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서라도 교황의 결정을 실행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자 로타르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가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하자 로타르는 1년 뒤 그녀에게 윽박질러 이혼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그해 6월 15일에는 교황청에서 로타르 2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특사가 로타링기아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2세는 거절했고 같은 해 파문당했다. 867년 교황 니콜라오의 뒤를 이어 좀 더 융통성 있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자 로타르는 아내에게 직접 새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토이트베르가가 이혼을 요구하고 나섰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발트라다에게 가해진 파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토이트베르가가 로타르 2세와 이혼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어서 로타르 2세도 재혼할 수 없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869년 토이트베르가는 메츠의 성 글로신드 수녀원(Abbatiale Sainte-Glossinde)으로 은퇴, 수녀원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869년 로타르 2세는 교황과의 접견을 통해 이혼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귀환하는 중에 열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한편 그의 정부 발트라다는 그가 이혼 승낙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이던 869년 4월 9일 병으로 죽어 르미르몽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로타르 2세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2세를 면담했으며, 이혼 승낙을 받고 돌아오던 길에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로타르는 그해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죽고 말았다. 남겨진 발트라다의 아들 위고는 즉각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 의해 불법적인 사생아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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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로타르 2세의 영토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두 명의 삼촌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에게 분할되어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 로타르의 형이었던 루도비쿠스 2세는 중병에 걸린 상태로 이 영토 분쟁에 개입하기는 커녕 알지도 못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분쟁에 개입해 이 갈등을 조율하고자 했으나 잘 해결되지 못했고, 위고 또한 알자스 백작직을 박탈되면서 로타링기아에서 추방되었다.[13]
이후 875년 루트비히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마저 사망하면서 루트비히 2세의 서자 카를만이 롬바르디아 왕국을 물려받았으나 샤를 2세가 이탈리아를 정복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루도비쿠스 2세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중프랑크 왕국은 소멸하게 되었다.

4.2. 서프랑크 왕국

843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샤를 2세는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영주들을 제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844년 툴루즈 백작령을 공격해 툴루즈 시를 포위했고, 셉티마니아의 베르나르도를 체포한 뒤 반역 혐의로 참수했다. 이에 아키텐의 피핀 2세가 위협을 느끼고 브르타뉴인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을 무찌르러 진격했지만 844년 6월 14일 아그우트 강변에서 아키텐-브르타뉴 연합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루트비히 2세, 로타리우스 1세와 회동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고 재차 원정을 단행하려 하자, 피핀 2세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스스로 봉신이 되기를 자처하며 아키텐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푸아투, 앙주, 생옹제(Saintonge) 등지를 제외한 아키텐 일대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브르타뉴인들은 항복을 거부했고, 845년 11월 22일 그가 파견한 군대를 발롱 전투에서 섬멸했다. 결국 846년 브르타뉴인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한편 샤를 2세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학교인 스콜라를 본따, 자신의 파리의 궁정에도 궁정학교를 세우고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다. 그의 궁정학교의 교수진 중 유명한 이는 아일랜드 출신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로, 에리게나는 845년경부터 랑의 왕궁에서 문법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랑의 왕궁에 설치된 궁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을 가르쳤다. 에리게나는 범신론을 주장하여 논쟁꺼리가 되었지만 카를은 그를 각별히 보호하였다. 에리게나는 카를의 명으로 「가짜 디오니시우스 (Dionysius)」를 갈리아 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작가이자 시인인 니타르트를 후작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측근에 두었다. 니타르트는 카를의 친척이기도 한데,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음유시인인 안길베르트의 아들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845년, 라그나 로드브로크가 이끄는 바이킹이 120척의 배를 이끌고 센 강을 거슬러 이동하여 파리를 포위했다. 바이킹들은 곧 파리를 공략한 뒤 도시를 반쯤 파괴한 후 생드니로 피신한 샤를 2세에게 파리를 돌려받고 싶으면 7,000파운드의 은화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몸값을 지불했고, 바이킹들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847년, 피핀 2세가 샤를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어 보르도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의 동맹인 바이킹 용병대에 맡겼다. 이 바이킹들은 보르도를 거점으로 삼아 루아르 일대를 황폐화하고 낭트를 약탈했다. 이에 아키텐 귀족과 주민들이 피핀 2세에 대한 지지를 거뒀고, 848년 아킨텐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축출하고 샤를 2세에게 아키텐을 바쳤다.
851년 샤를 2세는 피핀이 바이킹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수아송에서 의회를 개최하고 피핀 2세의 해임을 선언했다. 이는 아키텐이 서프랑크 왕국의 일개 공작령으로 편입됨을 의미했기에 아키텐의 귀족들은 샤를 2세의 결정에 반발했다. 마인츠의 대주교이자 피핀 2세의 형제인 샤를은 피핀 2세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키텐 정복에 착수했다. 여기에 바이킹 용병대를 고용한 피핀 2세가 합세했다. 이들은 셉티마니아 백작 기욤과 연합하여 샤를 2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849년 기욤 백작이 바르셀로나를 공략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루에르그의 프레델로네가 툴루즈 성문을 개방하여 입성하게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레델로네를 툴루즈 백작에 선임했다. 한편 기욤은 바르셀로나 장악에 성공했지만 얼마 안가 카탈루냐인들의 습격으로 사로잡힌 후 처형되었다. 851년에서 852년 사이에 피핀 2세 역시 가스코뉴의 산초 2세에게 사로잡혀 샤를 2세에게 넘겨졌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산초 2세를 백작으로 공작으로 칭호를 바꿔줬다. 피핀 2세는 강제로 머리를 밀고 수아송에 있는 성 메다르 수도원에 투옥되었다.
854년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아키텐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샤를 2세를 공격하여 리모주에 이르렀다. 여기에 바이킹들은 루아르 계곡에서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괴, 리모주, 클레르몽, 부르주 일대를 약탈했다. 피핀 2세는 상황이 혼란해진 틈을 타 탈출한 뒤 아키텐 귀족들을 설득해 루트비히 3세를 버리고 자신을 지지하게 했다. 피핀 2세는 몇 달 동안 아키텐 전역을 장악했지만 그가 파견한 군대에 패배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자신의 아들 샤를 3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고, 이로 인해 아키텐은 북쪽의 샤를 3세와 남쪽의 피핀 2세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856년 바이킹들이 또 센 강을 거슬러 항해하여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모든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파리를 약탈했다. 파리 시민들은 바이킹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샤를 2세의 무능에 치를 떨고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여론이 이렇듯 좋지 않자, 858년 바이킹들과 싸우기 위해 루트비히 2세와 조카 로타르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에 센 강 주변에 일련의 요새와 다리를 설치해 바이킹들의 통행을 막으려 했다.
863년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인 프로방스의 샤를이 죽자, 그는 즉시 그 땅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또다른 조카 루도비코 2세가 먼저 프로방스에 도착하여 자기 영토로 삼았고, 일부 영지를 형제 로타르 2세에게 넘겼다. 864년 무렵 틸추한 피핀 2세가 바이킹 족에 가입해서 바이킹이 되었다는 소문이 그리스도교 사회에 확산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예배 대신, 바이킹 족의 하나로 살며 바이킹의 신을 숭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864년 샤를은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피핀 2세를 사로잡았다. 이로서 카를과 피핀 2세간의 아키텐 분쟁은 종결되었다.
869년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로타르 2세는 생전에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된 아이들의 영지 상속을 인정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로타르 2세의 영지를 분할하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해 분할을 확정했다. 루도비코 2세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두 삼촌이 자신을 무시하고 분할을 진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교황은 랭스의 힌크마르 주교에게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를 찾아가서 루도비코 2세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권하게 했다. 그러나 힌크마르 주교는 자신의 주권자인 샤를 2세를 따르기로 하고 교황의 바람을 무시하고 메르센 조약을 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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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년 8월 루도비코 2세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접하자, 그는 루트비히 2세와 함께 루도비코 2세의 이탈리아 왕국을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그들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두 딸만 남기고 사망하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파비아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해 12월 25일에 교황 요한 8세의 주관하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자,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는 샤를 2세를 지원하는 베르가모 백작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고 루트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처남 보소를 이탈리아에 두고 이탈리아 총독이자 프로방스 백작으로 임명한 후 급히 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아헨과 쾰른을 공략하고 동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루트비히 2세가 라인강을 건너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강을 도하했다가 루트비히 2세에게 참패하고 파리로 달아났다. 루트비히 2세는 몇달 후인 876년 8월 28일에 사망했고, 세 아들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한편 바이킹들이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생드니 수도원을 위협하자 은화 5,000파운드를 바치고 물러나게 했다. 이후 영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877년 6월 말 아내 리실드와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간 그는 베르첼리에서 교황 요한 8세와 접견했다. 그 동안 카를로만은 상당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브래너 고개를 통과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보소를 포함한 영주들은 바이킹들의 침략이 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히 이탈리아로 오라는 샤를 2세의 명령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귀국하다가 877년 10월 6일 브리데레벵에서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사후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루이 2세가 뒤를 이어 서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한편 카를로만은 파비아 의회에서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877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 의해 서프랑크 왕에 선출, 랭스의 주교로부터 축성을 받고 즉위하였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말을 더듬자 이내 그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878년 9월 7일에는 교황 요한네스 8세(Pope John VIII)의 주도로 트로이에서 열린 두 번째 대관식에서 다시 왕관을 받았다. 하지만 귀족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힘없는 왕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878년 트루아에서 교황이 소집한 종교 회의에서 교황은 루이에게 자신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지만 루이는 거절했다. 교황은 그에게 이탈리아로 오면 황제위를 주겠다고 설득하였으나 그는 이탈리아로 가기를 주저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사촌형인 카를만이 차지하였으므로 황제는 되지 못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루이 2세의 외삼촌이자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가 귀족, 영주들의 대표 자격으로 루이 2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루이 2세는 내각의 각료들, 서프랑크 왕국 내의 여러 대주교, 주교 등을 해임하고 개각을 단행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강력 반대로 철회해야 했다. 이들 귀족들은 루이 2세가 자신들의 권리와 지위를 지켜주는 조건으로 왕으로 받들었기 때문이었다.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는 879년 4월 초에 사망하는데 이때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지도자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루이는 그의 외삼촌 위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된다.
878년 2월 루이 2세는 왕비 안스가르드가 있는 상태에서, 파리의 아델하이트와 결혼식을 하였다. 안스가르드와는 866년 이후 사실상 별거 상태였다.
878년 11월 1일 동프랑크 왕이었던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와 로타링기아(로렌) 근처 포에른(Fouron)에서 만나, 로트링겐의 분할을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인 카를 2세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게르만인이 870년 메르센에서 로렌을 분할한 조약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어 리에 주의 푀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인 부르고뉴의 앙스가르데와의 사이에서 루이와 샤를로망을 낳았다. 이 두 아들은 나중에 서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식이 없었고 마지막 부인인 파리의 아델라이데와의 사이에서 유복자인 샤를을 낳았다. 샤를은 나중에 두 형이 모두 죽고 한참 후에 왕위에 오른다.
877년 랭스의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받았는데도 이듬해 9월 7일 트루아에서 종교 회의를 주재하던 교황 요한 8세에게 다시 한번 대관식을 받고 황제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루이는 제관을 거절했다. 루이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버지보다 겨우 2년을 더 살았으므로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일찍 사망하면서 귀족들이 그의 두 아들 중 누구를 국왕으로 선출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국왕을 선출하는 방법이 정착되었다. 이로서 국왕 및 차기 왕위 계승자는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 제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 그의 유복자 아들 샤를은 주교들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가, 귀족들에 의해 폐위당하게 된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형제들의 이른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또한 발음이 다소 정확하지 않아 귀족들로부터 말더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루이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서프랑크 왕국 내 귀족들의 발호를 두려워하여 수상과 궁정 행정관들을 비롯하여 각료들을 해임, 교체하려 했으나 서프랑크의 실력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권력을 아버지에게서 계승했다고 보던 루이 2세와 달리 이들은 루이 2세가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존중해주는 대가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2세는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병약하였고, 결국 왕실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878년 왈프레드 2세 수염공에게 바르셀로나 백작직과 제로나, 베살로 백작직을 수여했다.
루이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879년 초, 쿠데타를 일으킨 이복 여동생인 로틸드의 남편 아키텐의 지게베르트를 체포하여 영국으로 추방했다. 루이는 로틸드를 메인의 귀족 부기스(Bourges)의 후작 위그(892년 사망)에게 시집보냈다. 부기스가 죽은 뒤 로틸드는 다시 부기스의 친조카인 메인백작 로저(900년 사망)와 재혼하였다. 말더듬이 루이는 죽기 직전 그는 유럽을 침입해 내려오는 바이킹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는데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났고, 879년 4월 초 그는 오툉과 마콘의 백작 베르나르 플랑타뷜리(Bernard Plantevelue)가 반기를 들자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를 토벌할 군사를 준비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다. 그는 아키텐 백작 지게베르트의 반란에 동조한 셉티메니아 공작 베른하르트를 응징하려고 했지만 병으로 실패하였다. 루이 2세는 죽기 전, 왕국의 분열을 염려해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와 위그 드 아블, 보소 5세 등에게 아들 루이 3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정하고 후일을 부탁하였다. 위드 드 아블은 구엘프 1세의 손자이자 파리 백작이자 아르겐가우후작 콘라트 1세의 아들로 카를 2세의 외사촌 동생이었으며, 프로방스의 보소 5세는 대머리 카를 2세의 후처 리첼다의 친정 남동생이었다.
그러나 루이 2세의 유지는 지켜지지 않았고, 귀족들은 그의 두 아들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를 지지하는 지지파가 나뉘게 된다. 결국 공동통치로 가닥이 잡히고, 두 아들에게 왕국은 분할되었다.
즉위 초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는 안스가르드가 루도비쿠스 2세의 정비이고 첫 아내임을 확정했다. 동시에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와 어머니 안스가르데는 루도비쿠스 2세의 계비인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가 간통했다고 비난했다. 당시 임신중이었던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동시에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를 통해 어머니 안스가르드가 루도비쿠스 2세의 정실 부인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875년의 이혼은 잘못된 조치라고 번복하였다. 정통성 문제를 정리한 후 루도비쿠스 3세는 페리에르에서 기름부음의식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 카를로마누스 3세와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는 연합하여 왈롱의 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여기서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 3세 연합군은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의 바이킹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티에몽 전투 직후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에게 양도하는데 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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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년 5월 아미엥에서 루도비쿠스 3세는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고,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루도비쿠스 3세는 북쪽의 영토인 네우스트리아와 일드프랑스를 받았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키텐, 셉티메니아, 부르고뉴, 프로방스를 차지했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로트링겐(로렌)은 공동 영역으로 남겨두었는데, 귀족들의 도움을 얻어 로트링겐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위그를 물리쳤다. 루도비쿠스 3세는 즉위 초반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일대 해안가를 침입한 바이킹족을 물리쳤다. 그러나 프로방스와 하부르고뉴 일대의 귀족들은 카를로마누스 2세를 영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보소 5세를 군주로 추대했다.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는 형 루도비쿠스 3세 및 삼촌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도비쿠스 3세는 곧 출병하였다.
880년 9월 21일 또는 그해 3월 22일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3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놓고 동프랑크 왕국 작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이 870년 8월의 메르센 조약은 잘못된 조약이니 불법이라며, 그에게 로트링겐을 요구해왔다. 작센의 루트비히와 갈등하던 중, 결국 그는 카를로마누스 2세 및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와 함께 리베몽에서 조약 체결에 서명하였다. 루도비쿠스 청년왕은 카롤루스 2세 칼부스가 로렌 영토를 불법으로 점유했고, 메르센 조약이 잘못 체결된 조약이라며 반환을 강요했다. 바이킹족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 했고, 이에 따라 서프랑크가 차지한 로트링겐의 영토는 독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에게로 넘어갔다.
882년 루도비쿠스 3세는 덴마크에 사는 바이킹족 해적들이 프리슬란트를 경유하여 프랑스 북부 해안가를 내려와 약탈하였다. 루도비쿠스 3세는 이들을 격파했고, 솜 강 근처 아브빌에서 바이킹 족을 격퇴한다.
만년에는 프로방스와 부르군드에서 자립한 보소 일파와 싸웠다. 같은 해 8월 5일 루도비쿠스 3세는 네우스트리아 파리시내 근처 생드니에서 후계자 없이 죽었고 그의 영토는 동생인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 넘어갔다. 그는 파리시내 근처 생드니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투르 출신 게르몽(Germond) 후작의 딸을 말을 타고 추격하던 중, 게르몽 후작의 성 문 상인방에 이마를 부딛치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루도비쿠스 3세의 말은 그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고, 루도비쿠스 3세의 머리는 그대로 골절되었다. 이에 샤를로망 2세는 형 루도비쿠스 3세의 영지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왕국은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매우 혼란하였고, 지역의 제후들과 영주들, 기사들은 반란과 반발을 기도했으며, 흉년과 기근까지 겹치면서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882년 노르만 족이 프리슬란트를 넘어 왕국의 북부를 휩쓸고 랭스 지역까지 쳐들어오자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를 시켜 격퇴하게 했지만, 힝크마르의 군대는 패배했고, 에페르네에서 패주했다. 882년 1월 20일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청년왕이 사망하자 카를로마누스 2세와 루도비쿠스 3세는 로트링겐을 되찾으려 한다. 노르만 족은 같은 해 다시 쳐들어왔는데, 그는 아시네를 쳐들어 온 노르만 족을 직접 격퇴했다. 882년 9월부터 카를로마누스 2세는 본격적으로 로트링겐(후일의 로렌)을 다시 회복하려 했지만 삼촌인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이미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882년 11월 보름스의 제국 의회에 소환되어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로부터 서프랑크 왕국 전체의 국왕으로 책봉되었다.
883년 초, 바이킹 족이 쉽게 아브빌까지 쳐들어오자 카를로마누스 2세는 이를 겨우 물리쳐서 쫓아냈지만, 884년 노르만족은 다시 솜 강 주변에 나타나 약탈을 감행하였다. 노르만족은 아미엥에서 집단으로 천막을 치고 유숙하면서, 돈을 요구했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꽁피에뉴에서 1만2천 데나리온 은화로 노르만족들을 매수하여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일부 바이킹족은 되돌아가지 않고 로렌 주변의 국경지대와 루벤 지역에서 천막을 치고 유숙하였다. 카를로마누스 2세의 치세기간 중 노르만족 해적들은 수시로 서프랑크의 해안가를 약탈했고, 결국 부르고뉴의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보소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고, 보소는 그에게 딸이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보소와의 계약은 보소의 이른 죽음과 카를로마누스 2세의 이른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884년 12월 초, 카를로마누스 2세는 오트노르망디의 레장들리(Les Andelys)에 멧돼지 사냥을 나갔다가, 레 장들리의 베주(Bézu) 마을에서 우연히 그의 시종 베르톨드(Bertold)에 의해 사고로 부상당했다. 그는 884년 초의 바이킹족과의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장 레들리에서 부상과 낙마사고를 당한 지 수일 후, 884년 12월 12일에 사고 후유증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는 카롤루스라는 서자는 있었지만, 정식 결혼으로 얻은 적자는 없었다. 이복 동생 단순왕 샤를은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왕국은 삼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에게 넘어갔다. 이로서 일시적으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다시 짧은 시간 동안 명목상 통일된다.

4.3. 동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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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년 8월 11일 베르덩 조약에 따라 샤를 2세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서부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 2세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즉위 직후 루트비히는 정부와 행정 문서 형식을 간소화시켰다. 동시대의 동프랑크의 백성들은 그의 별명을 피피(piious) 또는 피피오스무스(piiousmus)라 불렀다. 서프랑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렉스 게르마니아(Rex Germaniae) 또는 렉스 게르마노룸(Rex Germanorum) 또는 렉스 테우톤(Rex Teutons)으로 불렸다. 독일인 루트비히라는 별명은 18세기 이후에 붙여졌다 한다.
844년 왕국을 침략한 슬라브 족과 교전, 서슬라브족 연합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함부르크까지 침략한 데인 족의 왕 호릭 1세의 군사를 막지 못했고, 함부르크의 주교 안스가르는 주민들을 이끌고 브레멘으로 피신하였다. 845년 보헤미아 공작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 침례를 받고 루트비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동프랑크의 국왕에 올랐지만, 왕국은 바로 프랑켄,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등의 여러 부족 출신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루트비히는 순찰사(Missi dominici)와 변경백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알레만니아와 작센 지역에서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성 갈렌 수도원의 그리모알드(Grimoald), 슈바벤의 백작 처남 콘라트 1세 등 해당 지역의 유력자 및 해당 지역과 인근 지역 교회의 주교, 수도원의 원장, 평신도 수도원의 간부, 유력 평신도, 봉신 등의 지원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 갈렌의 그리모알드는 그의 자문관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카를로만 3세와 소 루트비히를 각각 바이에른과 작센으로 보내 분봉왕으로 봉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지역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만 족과 마자르 족의 잇단 침입으로 국왕의 통치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853년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은 아키텐의 귀족인 마이네 백작 고즈베르트(Gauzbert)를 처형하였다. 이후에도 카를에게 대항한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루트비히에게 원조를 청하자 아들 루트비히 청년왕을 아키텐으로 보냈으며, 피핀 2세를 지원하게 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대머리 카를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854년까지 아들 소 루트비히는 아키텐에 체류하고, 그 이듬해에 되돌아왔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지원하여 피핀 2세를 복직시켰다. 또한 서프랑크왕 샤를 2세의 폐위를 위한 거사에는 피핀 2세, 프로방스의 샤를까지 참여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858년 자신이 직접 서쪽으로 가서 카를을 폐위하려 했으나 장거리 이동으로 병력과 물자 조달에 실패하면서 중단하게 됐다. 결국 860년 6월 코블렌츠 조약을 맺어 카를의 영토에 대한 권리주장을 취소했다.
한편으로 그는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수시로 지원하였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상속 몫을 분배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서프랑크의 샤를로망이 아버지 샤를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망명하자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동프랑크 각지에 교회와 수녀원 설립에 투자하였다. 853년 취리히에 펠릭스 운드 레굴라 수녀원을 건립하였는데, 그의 딸 힐데가르트(853년~856년)와 베르타(857년~877년)가 한때 이 수녀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도 루트비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튀링겐에는 클로스터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는 또 성 갈렌 수도원, 잘츠부르크 성당, 풀다 성당 등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그는 일부 수도원의 원장에 자신의 딸들과 자녀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카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 그러나 대머리 카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
856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 카를로만 3세에게 군사 지휘권을 부여, 케른텐 공략을 지휘하게 했다.
858년 8월~859년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 칼부스를 폐위시키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859년 1월 동프랑크 왕국 동부 국경의 소르브인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군사를 이끌고 서둘러 회군했다. 860년 6월 코블렌츠에서 대머리 카를과 평화협정을 체결, 서부 영토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했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들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3세는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다른 아들들인 소 루트비히와 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카를로만의 측근인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
863년 아들 카를로만 3세를 판노니아 변경백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를 판노니아 변경백에서 해임한 루트비히는 윌리엄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한편 모라비아 부족장 엔겔샬크 등을 판노니아 변경백에 임명하여 그를 견제했다. 86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들로부터 아들 카를로만 3세에게 바이에른 왕국의 전권을 넘겨줄 것을 강요당했다. 86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들과의 반란에 시달리면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카를만에게는 바이에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프랑켄과 튀링겐, 뚱보 카를에게는 슈바벤과 라이티아를 주었다. 그러나 866년 아들 카를로만 3세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다시 아버지인 독일인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위 초부터 모라비아와 판노니아, 마자르 족, 슬라브 족 등을 상대로 한 그리스도교 포교를 장려, 후원하였다. 그는 직접 모라비아, 판노니아 등에 프랑크족 사제와 선교사를 파견했고, 바이에른과 케른텐을 다스리던 카를만, 아르눌프 및 모라비아 공작, 판노니아 변경백 등을 통해 이들 선교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모라비아 대공 로스티슬라프(Rostislav) 역시 교황에게 선교사 포교를 요청, 성 시릴루스(St. Cyrillus)와 성 메토디오는 863년, 864년 무렵부터 모라비아와 판노니아 지역의 그리스도교 포교를 담당하였다. 이들 지역은 잘츠부르크 대주교 관구였고, 성 시릴루스가 병으로 로마로 돌아갔다가 사망하지만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개종은 계속되었다. 860년대 말부터 모라비아인들과 판노니아인들은 동프랑크 교회의 관리 감독이 아닌 독자적인 교회 관구 설치와 슬라브어 성서 간행을 원하였다. 성 시릴루스의 사후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교구 분리 운동은 계속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이들의 정치적 분리 독립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성 메토디오를 모라비아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모라비아인들은 단독 주교구 설치를 청원했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동프랑크 지역 관구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동프랑크의 주교들은 관구 독립을 반대했고,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판노니아인들의 분리 독립을 우려하였다. 870년 루트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Ratisbon) 시노드에서 메토디오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투옥시켰다가, 슈바벤으로 유배보냈다. 873년 교황 요한 8세가 성 메토디오를 석방해줄 것을 계속 요청하므로 루트비히 독일인은 메토디오를 풀어주게 된다.
868년부터 독일인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과 비밀리에 메츠에서 만나, 로타르 2세가 죽으면 미리 선수쳐서 로타링기아를 점령하고 로타링기아를 분할할 계획을 비밀 약속하였다.
869년 초 셋째 아들 비만왕 카를 3세가 봉토 배정에 불만을 품고,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869년 루드비히는 중병에 걸려 레겐스부르크에서 요양하며 유언장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상속권 박탈, 영토 조정 대한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을 들은 그의 아들 청년 루트비히와 비만왕 카를은 슈파이어가우에 모였다.[9] 그러나 그해 9월 비만왕 카를 3세는 곧 사촌 로타르 2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철군한다. 869년 8월 8일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사망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의 서자인 어린 위그를 제치고 로타르 2세의 영토를 공동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위그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로타링기아에서 추방했다. 869년 9월 로타링기아에 도착한 대머리 카를은 자신이 로타링기아 전체를 정복했음을 선언하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라고 선언했다.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시 반발했다.
869년 9월 9일 대머리 카를는 메츠에서 로타링기아의 전체의 왕으로 선언했다. 카를이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로타링기아를 합병하자,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와 모라비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침공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 전역을 점령했고, 대머리 카를에게 사자를 보내 분할안에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교황청이 나서서 중재를 요구했고, 그해 2월부터 3월 메르센에서 대머리 카를을 만나 메르센 조약에 따라 카를과 함께 로타링기아를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루트비히는 옛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아헨 지역, 라인강 서쪽의 영역과 쾰른, 프리슬란트 등을 차지했다. 이때 로타리우스 2세의 가까운 친척이자 친형인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871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 출몰하는 해적들과 아랍인들을 상대로 싸워야하는데다가 중병까지 걸려 조약 체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자신을 배제한 분할조약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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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년과 872년 3명의 아들인 카를로만, 루트비히 청년왕, 비만왕 카를 3세를 맏이에게는 바이에른과 케른텐, 둘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셋째 카를에게는 각각 알레만니아 영토를 나누어 주었으나, 이 분할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은 861년부터 873년에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프랑크 족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안전한 선교를 주선하였으나, 모라비아를 흡수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869년 군사를 보내 모라비아를 공략하여 870년 병합시켰다. 그러나 모라비아는 라스티슬라프 공의 지휘하에 분리독립을 기도했고, 라디스슬라프가 죽자 모라비아의 반란은 진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71년 슬라보미르, 라스디슬라프의 조카 스바토풀크 2세 등을 중심으로 모라비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해 동프랑크 군을 몰아냄으로써 모라비아의 영지를 잃게 되었다. 873년 다시 모라비아와 전쟁을 하였으나 전쟁에 져서 874년 이후 대모라바 왕국은 독립했다.
870년대 이후 다시 바이킹들이 영토를 침략, 프리슬란트, 함부르크, 베를린 주변지역을 약탈하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바이킹의 침입과 마자르족, 슬라브족의 침략과 약탈은 계속되었다.
871년 독일인 루트비히가 병에 걸리게 되자, 소 루트비히는 아버지의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슈파이어 근처에서 형 카를로만 3세를 만났고, 형제는 다시 독일인 루트비히를 상대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871년 아들 청년 루트비히와 비만 카를은 맏형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라며 반발, 반란을 일으켰다.
872년과 873년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는 사절단을 동프랑크로 파견, 레겐스부르크의 루트비히에게 직접 와서 그의 통치가 콘스탄티노플까지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875년 크로아티아를 합병할 목적으로 달마티아 지역에 살고 있던 프랑크인들을 뒤에서 선동해 당시 크로아티아 공작 도마고이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850년대 이후 사라센 인들의 이탈리아 남부 해안가 침략은 계속되었고, 872년 12월 14일 즉위한 교황 요한 8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군사를 보내 이탈리아 남부로 들어오는 사라센 군 및 해적들을 상대하게 했다. 한편 루트비히는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황제관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풀다 대수도원장 지그하르트 폰 풀다(Sigihard von Fulda)를 로마 교황 요한 8세에게 여러번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다. 그는 여러번 교황청에 교섭하여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교황청은 그때마다 거부했다. 한때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사망했다는 오보를 듣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려다가, 아직 죽지 않은 루트비히에 의해 저지되었다.
873년 1월 26일 청년 루트비히와 비만 카를은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아버지를 축출하고 체포할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했다. 같은 해인 873년 청년 루트비히와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형제는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감금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일단 이들 형제를 용서하였다. 87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유력 귀족인 작센 공작 리우돌프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혼인시켰다.
874년 모라비아인들과의 갈등을 계기로, 대머리 카롤루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자신과 그의 후손을 위해 제국을 차지하려 했다. 875년 8월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황제 루트비히 2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장남 카를로만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하였다.
이탈리아의 황제 루트비히 2세 황제가 카를로만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를 확정하고자 바티칸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875년 8월 풀다의 지그하르트(Sigihard von Fulda) 주교를 바티칸에 파견, 교황 요한 8세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876년 봄 다시 지그하르트를 로마 바티칸에 보냈고, 876년 5월 18일 인겔하임으로 돌아와 루트비히에게 이탈리아의 황제 루트비히의 유언 및 이탈리아 상황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가 그를 제치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 요한네스 8세의 지지를 받아 이탈리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을 차지하자,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있는 카를의 영지에 쳐들어가려다 실패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조카의 죽음과 유언이 공개되자 바로 셋째 아들 뚱보 카를 3세를 북이탈리아로 보내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와 손잡고 카를만의 추대 협상을 지원했다. 그러나 대머리 카를은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와 교황의 보호자는 자신임을 선언하고 제관을 차지했다.
한편 카를로만은 아버지가 계획한 크로아티아 공국 합병 계획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876년 계획을 진행하지만 도마고이가 죽고 트르피미르 1세의 아들로 동로마 제국에 망명 중이었던 즈데슬라브가 다음 공작이 되면서 무산되었다.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형 루트비히가 살아 있을 때에도 황제 직위를 욕심내어 세력을 이탈리아까지 확대했고,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자 라인강까지 진출하려 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가 작은 아버지인 대머리 카를과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카를은 전쟁 노획물과 많은 선물을 받아 서프랑크로 귀환했다.
874년경부터 부인 바이에른의 엠므가 뇌졸중으로 무기력해졌다. 엠므는 뇌졸중으로 목소리를 잃었고 875년 5월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876년 1월 부인 엠므의 죽음을 보았고, 그해,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차지한 카를 2세를 다시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던 중 그해 8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급성 질환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루트비히의 죽음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분할되었다. 장남 카를로만은 바이에른(현재의 바이에른 외에도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지역을 포함) 차남 루트비히는 작센과 구 로타링기아 지역을 삼남인 카를은 알레마니아와 슈바벤 지역을 나눠가졌다. 샤를 2세에게 서로마의 제관과 이탈리아 왕위를 빼앗겼다지만 카를만이 정통 계승자라는 인식으로 인해 동프랑크의 국왕위는 차남 루트비히가 대표하게 되었다.
즉위 초반부터 루트비히는 바이킹의 잦은 침입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자국 내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 동프랑크 전체의 국왕 칭호를 물려받았지만 형제들은 각자 동프랑크 왕국 내 개인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였고, 전쟁에서도 서로 협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로 라인란트에 머물렀으며 자신의 영지 작센이나 동부 변경으로 가는 것은 가급적이면 피했다.
청년 루트비히는 왕이 되자마자 곧 삼촌 카를 2세의 위협을 받았다. 대머리 카를은 동부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했고,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사후 876년 가을,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동프랑크로 쳐들어왔다. 동 로트링겐에서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교전하여 물리친 뒤 청년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876년 10월 안더나흐에서 맞붙었다. 877년 10월 8일 안더나흐에서 서프랑크 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하였다. 전략과 수적으로 모두 우월했던 동프랑크의 군이었으나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 이들을 본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우왕좌왕 도주하거나 실신해서 쓰러졌고 카를 2세는 당황해하며 되돌아갔다. 루트비히의 기지로 훨씬 많은 수의 서프랑크군을 작은 부대 몇 개만 움직여서 물리칠 수 있었다.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형 루트비히가 살아 있을 때에도 황제 직위를 욕심내어 세력을 이탈리아까지 확대했고,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자 라인강까지 진출하려 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가 작은 아버지인 카를과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했다.[4] 카를은 전쟁 노획물과 많은 선물을 받아 서프랑크로 귀환했다.
877년 청년 루트비히는 교회에 일정 부분 재산을 기증했는데, 이는 왕비인 리우트가르트의 명의로 기부되었다. 877년 말 루트비히는 형 카를로만 3세,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동부 로타링기아를 어떻게 분할하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뇌졸중 등으로 병세가 위중했던 카를로만이 로타링기아를 포기하자 로타링기아는 루트비히와 카를이 분할하기로 했으며, 878년 10월 알자스에서 루트비히는 카를과 로타링기아를 분할했다.
877년 10월 삼촌 대머리왕 카를이 죽자, 그를 계승한 사촌 루이 2세와 로타링기아(로렌)에서 만나, 로트링겐의 분할을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인 카를 2세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게르만인이 870년 메르센에서 로렌을 분할한 조약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바로 리에 주의 푀렌에서 포에렌 조약을 맺어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영토를 서로 유지하는 데 동의했는다.
그러나 푀렌 조약이 발효되려는 참에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요슬랭(Joscelin) 대주교가 이끄는 서프랑크의 일부 귀족이 그를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했고, 바로 초청하였다. 또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루트비히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타링기아를 손에 넣은 루트비히 3세는 베르덩 전투에서 승리하여 메츠와 베르덩, Scheldt을 수중에 넣었지만, 나중에 내부 반란을 수습하고 출정한 새로운 서프랑크의 왕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에게 로타링기아에서 격퇴당했다.
879년 서프랑크의 루트비히가 죽고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와 카를로만이 서프랑크의 공동 국왕이 되자, 청년 루트비히는 870년의 메르센 조약은 불법이라며 계속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해안가로 쳐들어오는 바이킹 해적을 상대하던 서프랑크인 루이 3세는 자신의 동생 샤를로망 3세와 함께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위그를 추방했지만 계속 바이킹을 상대해야 했고, 청년 루트비히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 결국 루이3세와 샤를로망 형제는 청년 루트비히와의 리베몽에서 영토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로트링겐을 사실상 동프랑크에 복속시켰다. 879년 겨울, 형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는 형에게서 슈바벤과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879년부터 이미 바이에른의 실질적 통치자 노릇을 하고 있던, 형 카를로만 3세의 서자 아르눌프에게 바이에른 공작 자격으로 바이에른을 직접 통치하게 했다.
879년부터 다시 바이킹의 침략이 프랑크 왕국 내 각국에서 계속됐고 일부는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공격, 약탈을 감행하였다. 루트비히는 880년 2월 티에몬(현재의 벨기에 샤를루아 일대)에 들어온 바이킹과 교전 티에몬 전투에서 바이킹을 크게 물리쳤지만, 이 전쟁에서 서자 위그가 스켈트강변(river Scheldt)에서 전사했다. 바이킹을 나이메헨 바깥까지 몰아냈지만 처남 브루노의 지휘 하에 출정한 작센인 군사들은 함부르크에서 바이킹에게 크게 패하고 브루노와 많은 작센 귀족, 병사들이 전사했다. 티에몬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다.
880년 2월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카를로만 2세, 서프랑크의 루이 3세를 도와, 이들과와 연합하여 왈롱의 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여기서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와,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 카를로마누스 2세의 연합군은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의 바이킹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티에몽 전투(880년 2월))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자였던 위그를 잃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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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년 2월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영토 문제를 협상, 리베몽 조약을 체결했다. 청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동생 뚱보 카를 3세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 청년 루트비히가 점령한 곳을 국경지대로 하기로 결정, 그가 점령한 지역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간의 국경으로 확정하여 동프랑크는 로타링기아를 흡수했다. 한편 동생 뚱보 카를이 로타링기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로타링기아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리베몽 조약으로 결정된 독일-프랑스간 영토, 국경은 14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 청년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반대로, 왕실의 이익을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감소시켰다. 그는 처가인 작센의 리우돌핑 가문을 포함해 왕가의 힘을 왕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시켰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이에른에도 2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한편 형 카를만이 사망하자, 청년 루트비히는 880년 내내 형 카를만의 서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르눌프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작센 공작 오토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 아들 루트비히와 베른하르트를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했다. 아들 루트비히는 879년 가을 레겐스부르크 성의 난간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쳐 죽었다. 서자였던 위그는 880년 2월 바이킹 족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후계자가 없던 청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서자로 당시 중년이었던 작센 백작 위그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위그가 전사한 뒤 루트비히는 실의에 빠졌다. 880년 뇌졸중과 중풍 등으로 고생하던 친형 바이에른의 국왕 카를만이 사망하자, 청년 루트비히는 카를만의 영지 중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881년 겨울, 청년 루트비히는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져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카를 3세가 동프랑크 국왕이 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으며 880년부터 이탈리아 국왕까지 겸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때 카를 3세는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과 함께 보소 토벌을 목적으로 프로방스를 공격중이었다. 프로방스와 마콘(Macon)을 점령한 카를과 루이 3세, 샤를로망의 연합군은 보소를 비엔나로 추방했고, 같은 달 비엔나까지 점령했다. 카를은 비엔나 성의 왼쪽에서 공격을 맡았지만, 그러나 곧 연합군에서 이탈하여 되돌아갔는데, 881년 2월 12일 황제관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서였다.
뚱보 카를은 교황과 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881년 7월 18일 교황 요한 8세는 바티칸을 위협하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에게 반발하여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동시에 황제관을 약속한다. 정치적 야심이 고려되지 않고, 뚱보 카를이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인 점을 주목한 교황은 그가 황제관을 받을 적임자로 보고 그를 불러서 로마 황제 제관을 수여한다. 882년 2월 12일 그는 로마 황제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는 10개월 만에 로마로 가서 제관을 받는다. 그해 카를은 요한네스 8세의 초청으로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갔으며, 881년 12월 교황에게 로마에 도착, 요한네스 8세의 축성세례를 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바로 회군, 베르덩으로 돌아왔다. 그는 비만인데다가 평소 몸이 약해, 자주 병을 앓아 정사를 돌보는데 무기력했다 한다.
이에 앞서 11월에 이탈리아에 사자를 보내 귀도 3세에게 불법으로 교황을 위협하지 말도록 크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881년 봄과 겨울 제국의 북동부 네덜란드에 바이킹이 침략, 카를은 이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한편 교황은 귀도 3세에게 수시로 시달림을 당했고 그에게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는 군대를 보내지 못했고, 사자만 몇 번을 보냈다. 880년 7월 18일 교황 요한 8세는 스폴레토의 귀도 2세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귀도 2세는 묵살하고 교황령을 침략했고, 교황은 그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의 지원 요청은 880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881년 2월 12일 황제로 선언되자, 그해 여름부터 카를은 샤를마뉴의 아헨 황궁을 본따 알자스 셀레스타트(Sélestat)에 새로운 황궁을 건설하였다. 882년 이후 거의 이탈리아 문제에 손을 대지 못했다. 카를은 친척인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를 시켜 귀도 3세를 치게 했지만, 전염병과 한파로 정벌은 실패하고 만다.
881년 여름 바이킹이 네덜란드에 침략해 오자 간신히 바이킹을 물리쳐 패퇴시켰다. 882년 2월 뚱보 카를은 라벤나에서 의회를 소집, 스폴레토의 귀도 2세와 그의 삼촌 카메리노의 귀도 백작을 소환했다. 여기에서 카를은 스폴레토의 귀도 2세 및 카메리노의 귀도에게 교황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3월의 편지에서 교황 요한 8세는 서약대로 되지 않았음을 호소했다. 882년 1월 20일 형 소 루트비히가 사망할 때 아들인 루트비히는 그보다 앞서 사망했으므로 그는 작센과 바이에른을 수중에 넣어 동프랑크를 통일하였다. 프로방스를 다스리던 보소가 881년 스스로 자립하고 왕을 자처하자 루이 3세, 샤를로망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 형제와 손잡고 프로방스와 부르고뉴를 침략하여 보소를 공격하였다. 883년 5월 말 카를은 노난툴리아에서 의회를 개최, 사라센과 동맹을 맺은 스폴레토 공작을 반역 혐의로 기소했다. 카를은 귀도의 작위를 박탈하기 위해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에게 군사를 보내 귀도를 치게 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스폴레토를 공격하며 스폴레토 공작에게 은퇴를 종용하였다.
882년 카를은 라인란트를 습격한 바이킹을 아셀트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이후로도 바이킹은 계속 그의 제국에 출몰하였다. 882년 이탈리아를 다녀오던 중 카를은 보름스로 침략한 바이킹의 처리를 목적으로 보름스 의회를 개최하였다. 카를은 케른텐 공작 아르눌프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동프랑크 왕국 전체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이킹과 교전시켰다. 아르눌프와 하인리히의 군대는 아셀트(Asselt)에서 바이킹을 포위하였다. 얼마 뒤, 카를은 바이킹 족장과 협상을 하여 바이킹 족장 고드프리와 시그프리드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고드프리는 가톨릭 세례를 받고 개종한 뒤 카를의 봉신이 되었으며, 뫼즈강변의 에슬루의 영주로 봉하였다. 고드프리는 곧 카를 3세의 사촌형제인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였다. 시그프리드에게도 영지를 주어 되돌려보냈다.
882년 카를은 부르군트의 리샤르를 보내, 프로방스를 차지하고 자립한 보소를 공격하게 한다. 883년 귀도를 피해서 정치망명을 한 이탈리아군 사령관 베니스 공작 조반니 2세 드 파르키티파치오에게는 벌금 100 데나리우스를 물린 뒤 이탈리아로 추방해버렸다.
882년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884년 11월 12일 샤를로망이 죽자 그들의 이복동생이자, 카를 자신의 미성년인 5촌 조카 샤를 3세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까지 차지했다. 아베(Abbé)의 위그는 말더듬이 왕 말더듬이왕 루이의 유복자 아들인 어린 단순왕 샤를 3세 생쁠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카를을 초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아베의 위그의 주장은 바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884년 1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뚱보 카를을 왕으로 받들고 그를 초청했다. 카를은 자신의 휘하에 두겠다며 수락하였다. 885년 5월 20일 랑그르의 주교 게일은 로트링겐에서 카를을 렉스 갈리아노룸(갈리아의 왕)이라 선언하면서 이로써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5. 찰나의 재통합과 재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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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덕망 높은 군주로 알려졌지만 점차 그가 무능한데다가 비만으로 인한 합병증, 그리고 간질과 같은 중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프랑크에서부터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때문에 서자라는 이유로 케른덴을 제외한 친부인 카를만의 영지를 받지 못했던 케른텐의 아르눌프는 이를 호기로 이용하여 정변을 기도한다.
건강하지 못했던 그는 오랜 지병인 간질 외에도 뇌졸중과 척추질환 등의 병으로 시달리게 되자 만년에는 업무를 소홀히 했다. 제국의 동부와 남부에 쳐들어온 사라센 이슬람의 침략을 막지 못했고, 황제 자리를 요구하는 귀도 3세에 맞선 교황청의 지원 요청에도 도와주지 못했다. 887년이 되자 그는 자신의 서자 베른하르트의 후계자 임명을 포기하게 되었다. 카를은 결국 외드와 베렝가르를 각각 서프랑크와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의 측근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카를은 베르첼리의 주교 리우트바드에게 왕비 슈바벤의 리첼다가 아키텐츨러(총리대신)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첼다 왕비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불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결국 리우트바드 주교는 왕비의 결백을 인정했다. 리첼다는 곧 안드라우의 수도원으로 떠났다. 베르첼리의 주교 리우트바드는 곧 교황 스테파노 5세에게 왕비 리첼다의 결백을 보고하였다.[14] 카를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리우트바드 주교를 미워하여, 그를 왕실 자문관에서 해임하고 마인츠의 대주교 리우트베르트(Liutbert)를 대신 왕실 자문관으로 임명하였다.
886년 파리에 침입한 바이킹에 대항해 군대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모두 침략자를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냈다. 887년 1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왕을 자처했던 보소 5세가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의 요청으로, 자신의 손자뻘이기도 한 보소의 어린아들 맹인왕 루이를 자신의 후견하에 두고 보호하였다. 한편 카를의 무능력함과 변덕스러움에 염증을 느낀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강력공 로베르는 그의 조카이자 적대자인 아르눌프의 편에 가서 붙게 된다.
그의 무능함과 동시에 야심을 품은 조카 아르눌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영토인 바이에른을 요구하다가, 그가 외적을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냈다며 그에게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아르눌프와 제후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서프랑크의 귀족들 또한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그는 아들 베른하르트를 후계자로 내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지병으로 정무를 주관하기 어려웠으며, 노르만족을 돈과 은으로 매수하여 되돌려보낸 일로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887년 4월 키르첸에서 소집한 의회에서 맹인왕 루트비히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거부당했다. 조카 아르눌프는 귀족들을 규합해 카를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887년 7월부터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에서 카를을 만나려 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지지를 얻언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의 군주 자리를 원했다.
887년 11월, 결국 동프랑크의 동부에서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의 군사가 아헨에 입성, 11월 11일에 카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제국회의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887년 11월 17일, 퇴위를 종용당한 카를은 알레만니아로 은퇴하였다. 그는 아르눌프에게 노이딩겐에서 살 수 있는 몇 채의 집을 요구했다. 그의 몰락은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가 죽자 알레만니아 공, 바이에른 공 작위와 동프랑크 왕국의 왕위, 이탈리아 왕위, 로트링겐의 왕위,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아르눌프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외드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서프랑크는 아키텐 공국과 서프랑크 본국으로 분리된다.

6.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6.1. 카롤링거 왕조의 황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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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동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한 아르눌프는 바로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를 바이에른 후작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영지를 대신 통치하게 했다.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는 훗날 아르눌프가 사망한 뒤에도 그 아들 루트비히 4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마자르족과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했다.
아르눌프는 이탈리아의 왕이 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를 비롯한 이브레아, 프리울리, 밀라노 등의 귀족들, 서프랑크의 유력자인 파리 백작 외드, 부르고뉴의 루돌프 등의 지지를 얻어내 887년 11월 정변을 감행한다. 카를은 슈바벤으로 물러났고, 슈바벤의 몇 채의 저택만을 요구했다. 아르눌프는 이를 허락하였다. 아르눌프는 887년 11월 안에 동프랑크 왕국의 동부에 있던 슬라브족 귀족들만을 티부르로 소집하여 의회를 개최, 티부르 의회에서의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동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아르눌프는 백작 엔길데오(Engildeo)와 케른텐과 판노니아의 백작 리우트폴트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부재시 궁정에 국내 정치를 통솔하게 했다.
그는 파리 백작 오도,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부르고뉴의 라울 등과 손잡았고, 프랑스 국왕이 된 파리 백 외드,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부르고뉴의 라울 등을 봉신으로 삼았다. 이어 아르눌프는 이들에게 이탈리아의 군주 자리와 서프랑크의 왕 자리를 약속했다. 888년 1월 아르눌프는 외드의 서프랑크 국왕 즉위를 승인했고, 베렝가리오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 역시 승인하였다. 뚱보왕 카를 3세가 죽자 아르눌프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자신의 서자 츠벤티볼트를 로트링겐으로 파견하여 로트링겐을 통치하게 했다. 2월 아르눌프는 교황청에 이탈리아 내의 자신의 영지 일부를 기부하였다.
889년 초 아르눌프는 맹인왕 루트비히의 프로방스, 부르군트 통치권을 승인하였다. 이는 맹인왕 루트비히의 어머니 이르멘트루드의 호소에 의한 것으로, 이르멘트루드는 889년 5월 아르눌프를 만나러 이탈리아에서 포르흐하임(Forchheim)과 레겐스부르크를 직접 찾아왔다.
아르눌프는 880년 초부터 네덜란드를 공략하려고 니더작센과 브레멘 일대의 해안가를 노략질하는 노르만족을 888년 말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 모조리 격퇴, 궤멸시켰다. 아르눌프는 사로잡힌 포로들은 강제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바이킹족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바이킹족의 북독일지역 해안가 노략질은 한동안 뜸해졌다.
889년 1월 베렝가리오가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축출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베렝가르와 교황 스테파노 5세가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르눌프는 당시 동프랑크 왕국 영토 동남부 대모라바 왕국과 영토 동부 국경 밖에 자리잡은 슬라브족을 상대로 원정중이어서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탈리아의 중부 이하 지역은 스폴레토의 구이도 3세가 차지했다. 891년 2월에 귀도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891년 6월 아르눌프는 북쪽으로 진군해 로이벤 전투에 참전, 브뤼셀 북쪽의 딜라 강에서 노르만족의 침입에 맞서 대승을 거두고 그 지역의 변경을 튼튼히하였다.
889년 5월 말 아르눌프 폰 케른텐은 포르크하임(Forchheim)에서 제국의 정무를 자문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아르눌프는 자신의 두 아들 츠벤티볼트(Zwentibold)와 라톨드(Ratold)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프랑코니아와 바이에른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890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왕국의 동부를 침입한 슬라브족을 판노니아 평원에서 크게 격퇴하여 물리쳤다. 이어 모라바로 진격해 마자르족을 축출하고 모라바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바이킹의 일파가 로타링기아를 침략하자 아르눌프는 동프랑크 군을 보내 바이킹과 싸웠고, 모라바에서 승리한 뒤 바로 로타링기아로 가서 바이킹을 최종 격파한다. 891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지역으로 침략한 바이킹족과 교전, 루벵 근처 데일에서 바이킹족을 크게 격퇴하여 승리했고, 로타링기아 내륙까지 침입한 바이킹족을 크게 격파하고 연이어 승리를 거뒀다. 이어 891년 6월 루뱅과 플랑드르에서 바이킹족을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그밖에 바이킹이 독일 북부 해안가로 쳐들어오려 하자, 군사를 해안가에 매복한 뒤 물안개가 끼인 틈을 타 대량의 화살을 날려 패퇴시켰다.
890년부터 아르눌프는 모라비아에 사람을 보내 염탐하게 했다. 그는 모라비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크인 주교 니트라의 위칭(Wiching)에게 군사와 사제들을 딸려 보내 모라비아를 염탐하게 하는 한편, 당시 모라비아에 포교 중이던 동방 정교회 사제인 메소디우스(Saints Cyril and Methodius)의 정교회 선교 활동을 방해하게 했다. 작전에 성공한 공로로 아르눌프는 가톨릭 성직자인 위칭에게 한때 내각 수상직을 임명한다. 이때 아르눌프는 모라비아의 스바토풀크와 교섭하는 한편, 스바도풀크의 정치, 군사에 대한 비밀들을 캐냈다. 그는 후일 모라비아를 공략할 때 이때 얻은 정보들을 이용했다.
891년 하순 데인족이 로트링겐을 침략, 마인스크리트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러나 891년 9월의 루벤의 전투(Battle of Leuven)에서 바이킹족의 침략을 최종 격퇴시켰다. 그러나 전투에서 죽은 노르만족 병사들의 시체가 강의 흐름을 막는 것을 본 아르눌프는 승리가 확실시되자 마자, 강줄기 옆으로 새로운 물길을 파서 강의 흐름을 유지시켰다. 동시에 아르눌프는 데일레 강(Dijle)에 있는 섬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기도 했다. 892년 7월에는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으로 구성된 바이에른 부대를 이끌고 모라바를 정벌했다.
892년 아르파드(Arpad)의 지휘 아래 마자르는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와 연맹을 맺고 모라바의 왕 스바토풀크에 대항했다. 그러나 스바토풀크는 아르눌프의 봉신이자 동맹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눌프는 모라바인들을 경계했고, 모라바인 지도자 중에서 그에게 충실하게 협조하는 스바토풀크를 내심 경계하면서도 일종의 정치적 동맹자로 여기기도 했다.
893년 모라바의 왕 스바토풀크를 직접 만나 교섭하였다. 그해 로마의 교황이 된 포르모소가 사람을 보내 아르눌프에게 황제직을 제의하자, 아르눌프는 황제관과 이탈리아 문제로 관심사가 분산되면서 더이상 헝가리, 모라비아 등의 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894년 헝가리인들은 다시 판노니아와 모라바로 쳐들어갔다. 895년 불가리아인들에게 패하고, 스텝 지역에서는 페체네그족의 압박을 받게 되자, 헝가리인들은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판노니아 지역에 정착했다.
비만왕 카를 3세가 사망한 후, 혹시 모를 서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주장할 것에 대비하여 서프랑크 왕국에 대한 동프랑크의 우선권을 선언했다. 뒤에 그는 자신의 서자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의 왕으로 임명한다.
893년 1월 28일 외드가 폐위되고 단순왕 샤를을 추대하자, 그해 2월 아르눌프는 일단 그의 즉위를 승인했다. 샤를 3세가 13세의 나이로 서프랑크의 왕에 즉위하자 아르눌프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내전을 끝내기 위해 외드와 샤를을 보름스로 오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외드와 단순왕 샤를의 갈등을 이용, 894년초 일부 장군들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서프랑크와 접경지역의 영지를 빼았았다. 895년 5월 외드는 보름스로 와 자신의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왕 샤를은 자신의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르눌프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대신 단순왕 샤를은 대리인을 보름스로 보냈다. 그해 외드는 수행원들과 많은 선물을 들고 보름스로 다시 왔다. 샤를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데 크게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동시에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트링겐의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츠벤티볼트에게 서프랑크 왕국을 감시하게 했다.
북쪽의 노르만족이 군사력을 강화시켜 네덜란드로 진출하려고 해안에 자주 침입했으나, 아르눌프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893년말부터 894년 사이에 다시 대모라바 왕국의 영토의 일부가 보헤미아 수중으로 들어가자, 895년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보헤미아를 정벌하고, 보헤미아 공작 스피티흐네프 1세에게 종주권을 확인하고 그를 봉신으로 삼았다. 893년 그는 다시 제국을 완성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질병으로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893년 초, 새로운 교황 포르모소는 귀도와 람베르트에 대항하여 아르눌프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주면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려줄 것을 제의해왔다. 893년 가을, 교황 포르모소는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이탈리아 해방을 요청하였다. 바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를 보내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와 공동으로 그들의 군사를 격퇴했으며, 바바리안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지원하게 했다. 이듬해에는 아르눌프 자신이 직접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 순식간에 밀라노와 파비아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계속 진군해 귀도를 공격했지만 내부의 반란으로 퇴각했다. 이때 서 프랑크 왕국에서는 외드가 폐위되고 단순왕 샤를이 왕에 즉위했는데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고,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왕위에 앉혔다. 894년 1월 베르가모를 함락시켰다.
894년 교황 포르모소는 스폴레토 공작가의 무단통치를 비판하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뒤 스폴레토의 귀도 3세가 죽자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다시 한번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을 구원할 것을 호소했다. 아르눌프는 바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한다. 그러나 원정 이후 아르눌푸스는 잦은 병치레에 시달리다가 죽게 된다. 894년 그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가을 스폴레토의 귀도는 병사했지만, 아르눌프 역시 열병에 걸려 고생했다. 아르눌프 군이 북부 알프스를 넘었을 때 그의 봉신을 자처하던 부르고뉴의 라울이 공격해왔는데, 분노한 아르눌프는 후에 자신을 종군하였던 서자 츠벤티볼트를 보내 부르고뉴를 약탈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도착했고,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람베르트(Lambert II of Spoleto)를 격파했다. 람베르트와 그의 어머니 안겔트루드는 성소에 수감되었고, 아르눌프는 교황 포르모소와 면담하기 위해 로마에 선발대를 보냈다. 아르눌프가 보낸 선발대는 베르가모와 밀라노를 점령하여 아르눌프 일행은 손쉽게 로마까지 왔다. 당시 교황 포르모소는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에 감금되어 있었고 이탈리아는 람베르토 2세와 그의 모후 안젤트루드(Ageltrude)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눌프 군이 되돌아간 뒤 포르모소는 다시 산탄젤로 성에 고립되고 만다.
894년 아르눌프는 자신의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타링기아를 넘겨주었지만 이듬해 5월 11일에 로트링겐으로 가서 즉위했다. 아르눌프는 자신에 대한 로타링기아 귀족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자신을 대신하여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의 국왕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여전히 츠벤티볼트를 거부하였다. 아르눌프는 반항적인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서자를 보호하기 위해 4년간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죽자마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폭동을 일으켜 츠벤티볼트를 살해하고 만다.
이탈리아 원정을 하는 중에 아르눌프는 동프랑크 왕국내의 교회간 분쟁을 중재해야 했다. 브레멘, 함부르크와 쾰른의 주교구 중 브레멘과 함부르크가 연합 주교구를 독자적으로 결성하려 하자 쾰른의 주교구에서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 895년 아르눌프는 외드와 단순왕 샤를 3세를 895년 5월까지 다시 소환하지만 단순왕 샤를 3세는 독일 소환을 거부했고, 그해 5월 외드만이 도착했다. 한편 외드는 많은 선물과 향신료를 조공으로 들고 보름스에 나타났다. 아르눌프는 898년 외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외드를 지지하였다. 895년 9월 교황 포르모소는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아르눌프에게 원조를 간청했고, 10월 아르눌프는 두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한다.
894년 스폴레토의 귀도 3세가 죽자,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다시 한번 이탈리아를 공략하여 교황령을 해방시켜줄 것을 촉구했다. 895년 9월 포르모소는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9월초 아르눌프는 거병하여 이탈리아에 다시 개입하였다. 895년 10월 재빨리 이탈리아 북부를 손에 넣고, 같은 달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빠르게 알프스 산맥을 넘어 파비아에 도착했으며, 서서히 토스카 지역까지 진군했다. 밀라노 백작 마기눌프, 파비아 백작 발트프레드 등이 합류했고,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2세는 람베르토 2세를 포기했다. 이때 아르눌프와 그의 군사들은 추위와 눈보라 등 악천후와 감기, 폐질환 질병에 시달렸고, 일부 병사들이 아사, 동사, 감기환자 등이 속출했다. 출정 전,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가 병력 지원과 군량 조달을 약속했지만 갑작스러운 기후악화로 베렝가리오의 군량,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로마에 도착했다. 토스카니에 도착하자 밀라노 후작 마기눌프(Maginulf)와 파비아 후작 발트프레드(Waltfred)가 그를 도왔다. 토스카니 후작 아달베르토 2세(Adalbert II)도 결국 람베르트를 포기하고 그의 편에 합류하였다.
896년 2월 21일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로마 시내가 열리면서 아르눌프의 군사는 로마시 주변을 점령하고, 아르눌프는 로마 시 원로원의 호위하에 로마에 입성하였다. 2월 22일 교황 포르모소에의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 성 바오로의 대성당에서 기름부음 의식과 대관식을 치른 뒤 한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잠시 로마에 머물던 아르눌프는 람베르트를 분쇄하기 위해 스폴레토 공격을 계획하고, 계속 남부 이탈리아로 가던중 갑자기 중풍에 걸려 896년 5월 독일로 철수했다. 그해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다시 람베르트 2세가 실권을 잡았다. 이때 아르눌프를 지지하던 로마 시 원로원 의원 콘스탄틴과 스테파누스는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한편 889년부터 아르눌프는 자신에게 적자가 태어나지 않을 것을 예상,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에게 츠벤티볼트와 라톨드가 자신의 정당한 상속인임을 인정하라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던 아르눌프는 서자 츠벤티볼트를 동프랑크의 유력 귀족의 하나인 작센 공작인 광휘공 오토의 딸 오다를 로타링기아에서 직접 결혼시킨다.
그러나 풍토병과 간질, 뇌졸중 등의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라둘프와 베렌가르를 대리인으로 지목하고, 897년 초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전쟁을 마치고 바이에른으로 되돌아온 아르눌프는 뇌졸중으로 한동안 통증을 겪었다. 뇌졸중 외에도 눈꺼풀에 사면발이에 의한 가려움증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아르눌프에게 패하고 교황이 폐위를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람베르트는 승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법한 황제임을 주장했다. 아르눌프는 아들 라톨드를 이탈리아의 왕에 임명하고 파비아에 남겨두었으나 람베르트 일파의 공격으로 도주하고 만다. 람베르트는 896년 2월에 자신의 폐위를 주도한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그 반대파였던 교황 스테파노 6세와 함께 그의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교황의 옷을 입히고 재판, 포르모소의 교황 즉위식과 법령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부관참시하기도 한다. 896년 4월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라톨드와 베렝가리오 1세는 도주했고, 람베르토는 마기눌프를 비롯, 아르눌프가 임명했던 궁재 및 그에게 협력한 귀족들을 살해했다. 아르눌프는 바로 군대를 보내 람베르트 일파와 전쟁을 한다.
896년 4월 베렝가리오 1세는 람베르토 2세와 손잡고, 이탈리아를 나눠갖기로 하고 라톨드를 죽이려 했다. 라톨드는 다시 바이에른으로 도주하였다. 896년 5월 22일 교황 스테파노 6세가 즉위하자, 로마에 남아있던 아르눌프의 지지자들과 대리인들은 스테파노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막지 못했다. 교황 스테파노 6세는 처음에는 아르눌프의 지지를 선언했다가 곧 철회, 다시 람베르토 2세 지지로 돌아섰다.
896년 8월 그는 병중에 포르츠하임에서 귀족들을 소집하였다. 이때 갑작스러운 사고로 건물 발코니가 붕괴하기도 했다. 896년 11월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보낸 사신들을 병석에서 영접했다.
개인적으로 아르눌프는 이탈리아 북부지역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르눌프는 자신의 서자 중 한명인 라톨드를 이탈리아 왕에 봉해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밀라노까지 획득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 후 아르눌프는 계속해서 병에 시달렸는데의 소문에는 아르눌프가 반대파에 의해 중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교황은 수시로 아르눌프에게 개입을 요청했지만 그 이후에 아르눌프는 더이상 교황령과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모라비아와 마자르 족도 수시로 동프랑크의 영토를 습격하였다. 898년 1월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한 샤를 3세가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로렌의 변경을 공략, 이어 츠벤티볼트에게 퇴위를 강요했지만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동시에 로트링겐에서도 아르눌프 생전에 이미 츠벤티볼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는 개입하지 못했다.
898년 10월 15일 람베르토 2세가 밀라노 남부 피덴차 근처에서 사냥하던 도중 마기눌프의 아들 우고의 사주를 받은 인물에게 암살당했지만, 오랫동안 뇌졸중과 간질, 중풍, 사면발이에 의한 눈 피부병 등에 시달렸던 아르눌프는 끝내 이탈리아 문제에 간여할 수가 없었다.
889년부터 그는 포르트하임에서 귀족들을 소집, 자신의 두 아들 츠벤티볼트와 라톨드가 자신의 계승자임을 주장했지만 그의 설득은 소용없었다. 결국 아르눌프는 바이에른의 실력자 귀족들을 면담했는데, 풀다에 의하면 귀족들은 오직 아르눌프에게 왕비에게서 적자녀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만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그에게 서명하게 했다. 그런데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태어났고, 894년 6월을 전후해서 츠벤티볼트를 동프랑크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임명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탈리아에서 과로로 얻은 병과 폐질환, 지병인 간질 등의 증세로 계속해서 병고에 시달려 자리에 노운 아르눌프의 생애 말년 3년 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896년에는 눈꺼풀에 사면발이에 물려서 피부질환을 겪었다. 황제권은 불안정한 가운데 모라바인들과 헝가리인들이 독일에 침입했고, 로트링겐에서는 츠벤티볼트에 대항한 반란, 폭동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이탈리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서프랑크(프랑스)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다.[4] 또한 해적들은 수시로 왕국의 남부 해안가에 출몰, 약탈을 감행해 그를 괴롭혔다. 동프랑크 왕국 내부에서도 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은 심화되었다. 아르눌프는 바로 로트링겐에도 군사를 보내 소요 사태를 강경진압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898년에는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된 단순왕 샤를 3세 생쁠이 국경을 넘어 라인강까지 쳐들어왔고, 로타링기아를 지속적으로 침략하였다.
899년 봄, 아르눌프는 반란의 조짐을 보이는 모라바를 통제하기 위해 마자르족의 몇몇 부족을 판노니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 마자르족은 아르눌프 사후 동프랑크 왕국 영토 동부지역을 약탈하는 골칫거리가 된다. 그는 중풍과 뇌졸중으로 고생했지만, 스스로 움직이려 노력하여 의사소통과 신체 움직임은 가능했다. 아르눌프는 마자르족과 밀약을 맺고, 정착을 돕는 대신 동프랑크 왕국에 대한 약탈을 중단하고 대신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 1세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899년 6월에는 계비 네우스트리아의 오타가 귀족들에 의해 간통죄로 고소당하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정에 소환되었다. 아르눌프는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를 사생아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 자문관을 보내 오타를 돕게 했다. 법정에서 오타 황후는 열렬히 무죄를 주장했고, 참석한 귀족들 증 72인의 귀족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어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몇주 뒤 아르눌프는 중풍과 뇌졸중으로 다시 쓰러졌고, 병세가 심각해지자 바이에른 성으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이때 그가 누군가에 의해 중독되었다는 음모론이 계속 제기되었다. 아르눌프는 899년 12월 8일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 라티스보른(Ratisbonin)에서 간질과 뇌졸중, 중풍, 폐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동프랑크의 왕위는 7세의 어린 아들인 루트비히 4세에게로 넘아갔다.
루트비히는 어려서부터 병을 앓았으므로 체력이 좋지 않았다. 899년 12월 아버지가 죽자 6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사실상 당시 왕국은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있었고, 지방 귀족들의 발호로 왕국은 거의 해체되어 있었다. 그의 재위기간 내내 마자르족의 습격으로 혼란에 빠졌다. 루트비히는 어리고 심약하여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의 치세내내 권력은 귀족들과 주교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었다. 그는 잦은 병치레를 하였으므로 한때 독에 중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루트비히를 대신하여 섭정을 한 주요 자문은 마인츠 주교 하토(Hatto von Mainz)와 콘스탄츠의 주교이자 성 갈렌 수도원장 솔로몬 3세(Bischof Salomo III. von Konstanz), 아우구스부르크의 주교 아달베롱(Adalberon) 등이었다.
900년 1월 21일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900년 2월 4일 바이에른의 포히하임(Forchheim)에서 정식 국왕으로 선언되고, 대관식을 하였다. 900년 8월 그의 이복 형이자 서출인 츠벤티볼트가 로트링겐 귀족들이 일으킨 폭동에 휘말려 암살되자, 그는 어린 조카들을 제치고 로타링기아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렌의 귀족들은 프랑켄의 게버하르트를 로트링겐 공으로 임명해 그를 대신하여 로렌을 통치하게 했다. 유약한 루트비히를 대신해 마인츠 대주교 하토와 콘스탄스 주교 솔로몬 3세 등 두 명의 주교들이 권력을 행사했는데 그들은 프랑코니아 공작 콘라두스 1세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900년 마자르 족이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후작 리우트폴트와 파사우의 주교 리샤르에 의해 격퇴되었다. 901년에는 마자르 족이 케른텐을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901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903년 포히하임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시기 어머니인 네우스트리아의 오타 역시 사망하고 그는 고아가 되었다. 일찍이 콘라디안 집안에서는 바벤부르크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여 다른 귀족들과 말썽을 빚었다. 이때 루트비히는 자신의 외척이자 이런저런 혈연관계가 있던 콘라디안 집안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외조카이자 연상이었던 콘라두스 1세를 프랑켄 공작에 임명했다.
904년 루트비히는 마자르 족의 지도자 쿠르산(Kurszán)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을 요청했지만, 쿠르산은 루트비히가 보낸 사자들을 살해하였다.
906년 트레부르(Trebur)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쿠르산 사후 906년과 907년 마자르 족은 다시 작센으로 쳐들어와 황폐화시켰다.(브라티슬라바 전투) 이는 후작 리우트폴트에게 바이에른에서 패한 데 대한 보복으로 리우트폴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 잘츠부르크의 주교 테오도마르 등을 잃었다. 908년에는 튀링겐에 침략한 마자르 족에 의해 후작 부르하르트 폰 튀링겐과 뷔르츠부르크 주교 루돌프 등을 일었다.
그러나 마자르 족과의 전투에서 번번히 패배하고 왕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906년 콘라디언 가문과 바벤베르크 가문과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루트비히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프랑켄 공작 콘라트를 죽이는 것을 지원하였다. 루트비히와 귀족들은 마자르 족에게 사절단을 보냈고, 마자르 족 역시 아르파드의 다음 순위인 2인자 쿠르잔을 친히 보냈다. 루트비히는 이들을 독살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906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작센을 침략한 마자르 족과 교전했다. 907년 초 루트비히는 마자르 족이 국경지대를 넘어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프레센부르크 전투에서 병사를 잃고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그해 여름에도 마자르 족이 쳐들어와 직접 출정하였으나 907년 7월 4일 바이에른의 공작 리우트폴트와 대주교인 잘츠부르크의 테오트마르(Theotmar) 등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이름뿐인 통치자에 불과했고, 어머니 네우스트리아의 오타는 903년경에 사망했다. 루트비히는 친정을 하려 했지만,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의 정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루트비히는 콘스탄스 주교이자 성 갈레 수도원장 살로몬 3세(Salomo III)와 아우구스부르크 주교 아달베르트, 마인츠 대주교 하토 1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결국 마인츠 대주교 하토 1세와 프랑켄 공작 콘라트가 동프랑크 왕국의 사실상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루트비히는 성장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마자르족에 대한 군사원정을 벌였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907년 그가 군사 통제권을 쥐었을 때는 이미 에르네스부르크 등의 도시들은 파괴된 상태였다. 그해에 마자르 족이 나타나자 루트비히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교전하였으나 안스부르크에서 참패했다.
909년 작센과 튀링겐에 마자르 족이 나타나자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불쾌공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르눌프는 로트 강변에서 마자르 족과 싸워서 격퇴했고, 910년 루트비히는 친히 동프랑크 왕국의 육군을 이끌고 아우구스부르크 근처에서 마자르 족을 격파했다. 이어 레흐 강 근처 레흐펠트 전투에서 마자르 족을 상대했지만, 루트비히의 군사가 패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발길을 돌려 슈바벤과 프랑켄을 약탈한 뒤 라인강을 넘어 부르고뉴까지 쳐들어가 황폐화시키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왕권의 실추를 막지 못한 그는 콘라디안 가문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바벤베르크 가문과 콘라디안 가문의 갈등 때 강력한 귀족이었던 프랑켄 공 콘라트를 제거하는데 비밀리에 협력한다. 그러나 콘라트의 아들인 콘라트 1세는 오히려 실권자 행세를 하게 된다.
910년 마자르 족이 아우크스부르크 근처까지 쳐들어오자 유아왕 루트비히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족과 싸웠지만 루트비히의 군대는 안스부르크에서 참패, 전멸하고 말았다. 911년 마자르 족의 군대가 슈바벤과 프랑켄을 약탈하고 라인강을 넘어 부르고뉴로 건너갔지만 루트비히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910년 무렵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있던 루트비히는 911년 9월 24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18살의 나이로 죽었다.

6.2. 콘라트 1세의 치세와 작센 왕조

루트비히 4세가 후사가 없이 사망했으므로 900년 11월 동프랑크 귀족들이 포르츠하임에 모여 국왕을 선출하였다. 새로운 국왕 후보자로는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 생쁠과 프랑켄 공작 젊은 콘라트(콘라두스)가 물망에 올랐다. 투표 결과, 루트비히의 근친이자 프랑켄의 공작인 콘라트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국왕선출에서는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와 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공작이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이는 2백년간 유지되다가 1198년부터는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 및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공작과 왕이 독일 군주를 선발하는 제도로 명문화되어 정착된다. 이들 국왕 선거인들 중 왕과 공작 등은 선제후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선출 군주에게 충성하느냐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군주 샤를 3세 생쁠에게 충성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가 하인아우트 출신 레니에가 서프랑크 왕국 샤를 3세 생쁠에게 충성하자고 강력 주장하여 서프랑크 왕국으로 가게 되었다. 한편 콘라트 말고도 카롤링거 왕조의 가까운 인척으로는 바이에른 공작이 지명되었으나, 전임 바이에른 공작 리우트폴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딸 기셀라의 딸 쿠니군데와 결혼했으나 907년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그 아들 아르눌프는 소년이었으므로, 귀족들은 콘라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의 강력한 정적인 오토는 고령을 이유로 들어 왕위를 사양했지만 콘라트의 지지 기반은 매우 취약하였다. 귀족, 제후, 주교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왕이었으므로, 각지의 귀족, 제후, 영주, 주교들의 입지는 커졌고, 왕권과 왕의 발언권은 약화되었다.
아득하게 계승권을 가졌지만 카롤링거 왕조의 직계 후손이 아닌데다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그의 치세는 매우 불안했다. 일부 귀족들은 그의 집권에 반발했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콘라트를 거부하고, 서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단순왕 쪽으로 기울어졌다. 초기에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공작 루트비히 등을 비롯한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콘라트에게 충성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로타링기아의 섭정이며, 콘라트와 동프랑크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레니에 폰 로트링겐은 끝까지 콘라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서프랑크 왕국으로의 합류를 주장했다. 콘라트의 숙부이자 전임 섭정 겸 로타링기아 공작인 게브하르트는 이미 사망하여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 로타링기아는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 군주 샤를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콘라트 1세는 가톨릭 교회와 가깝게 교류했고, 솔로몬 3세 콘스탄스 주교를 왕국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콘스탄스 주교는 콘라트 1세의 재위기간 대부분을 총리로 재직했다. 그외에도 마인츠의 하토 대주교는 그의 주요 자문관이었다. 이후의 그의 치세는 작센, 바이에른 및 슈바벤의 귀족들과의 경쟁에 맞서 왕권을 확립하는 일에 소진되었다. 그의 군사 행동은 대부분 실패했고 자신의 가문을 굳건한 독일의 왕가로 올려 놓지 못했다.
서프랑크의 샤를 3세는 자신이 카롤링거 왕가의 후손이므로 동프랑크의 왕위 역시 요구하였고, 귀족들은 마땅히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채 수수방관하였다. 아들도 없던 그는 자신의 동생 에버하르트만이 있었다. 이로 인해 콘라트는 즉위 후 7년간 스스로 독립, 자립하려는 동프랑크 왕국 각처의 동프랑크인 공작, 백작들을 억압하였다. 동시에 마자르 족의 변방 약탈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었다.
911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1세가 갑자기 사망했다. 팔라틴 백작 에르찬가르와 베르톨드 등이 공작령을 탐냈고, 이후 슈바벤 공작위를 놓고 여러 귀족이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들 부르하르트와 울리히는 유배되고, 부르하르트 1세의 동생 아달베르트는 콘스탄츠의 주교 솔로몬에 의해 죽게 된다. 이어 에르찬가르가 슈바벤의 새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에르찬가르는 사사건건 콘라트 1세에게 도전하였다.
콘라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로트링겐을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역시 아헨 성 공략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907년 동프랑크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바이에른의 프레센부르크에서 교전했지만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콘라트는 군사적 무능이 드러나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상당부분 실추당했다. 912년 1월에는 서프랑크의 샤를 3세가 군사를 이끌고 알사스를 침공하기도 했다. 콘라드 1세는 912년과 913년에 군사를 일으켜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요구하며 로타링기아를 침공하였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913년 로트링기아의 귀족들은 다시 알자스를 침공하고, 스트라스부르 성곽을 불태웠다.
913년 콘라트는 서프랑크의 총리이자 트리어 대주교인 트리어의 라트보트를 영입하였다. 프레센부르크 전투에서 참패한 후 각처의 귀족들은 그의 지도력을 의심했고, 그는 작센의 하인리히 등과 정치적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슈바벤의 공작 에르찬가르와 그 뒤를 이은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는 그의 재위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912년부터 917년까지는 마자르 족이 수시로 침략하여 그를 괴롭혔다. 지역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고,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913년 마자르 족은 팔라틴에서 백작 에르찬가르와 그라프 오달리히(Odalrich)를 격파했고, 913년에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군대 대다수를 잃고 말았다. 콘라트왕은 동프랑크 국내의 공작, 백작들 간의 갈등을 조절하지도 못했다. 913년 이후 콘라트는 권위 상당부분을 잃게 되었다.
작센의 오토 광휘공은 그의 강력한 정적으로, 그는 작센족 군대에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 오토가 죽기 전 자신의 권한을 하인리히에게 양도하자, 콘라트 1세는 이를 경계하였다. 콘라트 1세는 마인츠 대주교 하토를 사주, 자객을 보내 오토의 아들 하인리히를 목걸이로 살해하려 하였으나, 자객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913년 콘라트 1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슈바벤 공작의 미망인이자 슈바벤 백작 에르찬가르(Erchanger)의 누이인 쿠니군데와 결혼하였다. 바이에른 공작 레오폴트의 과부였던 쿠니군데는 그에게 할머니뻘이 되는 친척으로, 쿠니군데에게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베르톨드라는 아들이 이미 있었다. 쿠니군데의 전 남편인 레오폴트는 다시 황제 아르눌프의 생모인 리트빈데의 친족이었다. 쿠니군데는 그에게 딸 쿠니군데와 아들 헤르만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아들 헤르만은 어려서 요절했다. 913년 초, 에르찬가르는 콘라트 1세에 대해 모반을 기도했고, 콘라트1세가 그해 로타링기아를 정벌하러 간 사이 반란을 일으켰다. 로렌에서 급히 퇴각한 콘라트는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콘라트는 에르찬가르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에르찬가르의 누이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전임 슈바벤 공작의 아들 부르하르트가 반역을 기도했고, 에르찬가르는 부르하르트의 편을 들었다. 콘라트는 호헨트비엘(Hohentwiel)을 점령했던 부르하르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작센 공작 작센의 하인리히가 군사를 이끌고 프랑켄에 침입했기 때문에 철군해야 했다. 그 해 에르찬가르는 콘라트 1세의 자문 솔로몬 주교를 납치했고, 콘라트는 군사를 일으켜 솔로몬 주교를 구출한 후 에르찬가르를 추방했다가 곧 풀어주었다. 솔로몬 주교는 에르찬가르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여러번 설득하였으나 에르찬가르는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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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년부터 917년 사이에 최소 4번 이상 마자르족이 동프랑크 제국을 침공했으나, 콘라트1세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있던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지역 귀족, 제후, 지방관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지역을 방어하였다. 915년 콘라트 1세는 형제 에베르하르트 3세에게 군대를 딸려보내 작센의 하인리히 1세를 치게 하였으나, 에레스부르크에서 크게 패하였다. 콘라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작센으로 갔고, 하인리히는 일단 콘라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협상하였다.
바이에른 전 공작의 미망인과 결혼한 것을 근거로 콘라트는 바이에른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914년 6월 콘라트는 계약서를 작성, 아내 쿠니군데가 보통의 왕비가 아닌 왕국 내에서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명시하였다. 아들 헤르만이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했고 딸 쿠니군데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915년까지 콘라트는 필사적으로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였다. 918년 2월 7일 왕비 슈바벤의 쿠니군데가 사망했다. 쿠니군데는 생전 풀다 수도원에 장지를 정했지만 로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후에 18세기에 이르러 로쉬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쿠니군데의 시신은 도난당했다.
916년 9월 20일 콘라트 1세는 동프랑크 왕국 내 교회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교황의 승인을 얻어 프랑코니아 주교 오르트의 페트로(Petero von Orte)에 의해 호엔알테임(Hohenaltheim)에서 소집되었다. 호엔알테임의 주교회의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교회와 왕 사이의 가까운 동맹을 강화하기로했다. 그는 교계와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916년 바이에른의 아르눌프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콘라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곧 헝가리로 도주했고, 콘라트는 자신의 형제 에베르하르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1년 뒤 돌아와 에베르하르트에게 돈을 주고 바이에른 영지를 매입, 회복하였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얻은 상처는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긴밀한 협조, 연락을 유지했지만 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로타링기아의 제후, 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는 자신이 카롤링거 왕조의 적자, 정통임을 들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콘라트가 즉위한 뒤에도 동프랑크의 일부 귀족들은 샤를을 지지하여, 샤를을 동프랑크로 초빙하려 했다. 콘라트 1세는 서프랑크의 샤를 3세 생쁠의 계속된 국경지대 침공에 번번히 패배하고,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하여 지방 제후들의 신임을 잃었고, 국왕으로서의 권위도 상실하였다. 또한 아들이 없었던 점이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917년 1월 23일 콘라트는 호엔알테임에서 소집한 주교회의에서 자신의 정적인 슈바벤 공작 에르찬가르와 베르톨드, 그리고 그들의 조카 리우트프리드(Liutfrid)를 수도원에 감금하기로 했다가, 곧 참수형에 처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한 콘라트는 곧 909년부터 911년 잠시 선출에 의한 슈바벤 공작이었던 부르하르트 1세의 아들로 일찍이 유배되었던 부르하르트를 슈바벤 공작에 임명하였다.
콘라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교전 중에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918년 12월 23일 낫소의 바일부르크(Weilburg)에서 죽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외아들 헤르만의 요절로 아들이 없던 콘라트는 임종시에 자신의 동생 에베르하르트에게 유언으로 왕위를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에게 넘기라고 유언을 남겼다. 콘라두스는 에베르하르트에게 왕위 욕심을 단념하라고 요구했고, 그를 새 왕에게 상징물을 전달하는 역할을 내정하였다. 당시 하인리히는 침범하는 마자르족에 맞서 왕국의 영토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영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베르하르트와 다른 귀족들은 유언을 지켜 프리츨러의 의회에서 하인리히를 독일의 왕으로 선출했다.
그가 정식 독일의 군주로 즉위한 것은 919년 5월 6일이었다. 그 날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인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를 선출한 제후들은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형식적으로 선출할 때 선제후들이 참여하도록 정착되었다. 이어 후대에 가서 선제후에 보헤미아 공작 등이 추가되었다. 이때 볼테르에 의하면 그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손에 올라온 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새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는 카롤링거 왕조의 일가는 아니었고, 단지 그의 고모가 동프랑크의 군주였던 소 루트비히의 왕비였던 적이 있었고, 그의 누나는 로타링기아의 왕 츠벤티볼트의 왕비였던 적이 있었다. 즉위 전 일부 귀족들로부터 마인츠의 대주교로부터 세례, 기름부음 의식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지만 하인리히는 이것을 가치없는 짓이라며 거절했다. 그는 내 조상과 신들 앞에 나는 왕이라고 그렇게 임명될 것으로 예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프리츨라어에서 소집된 회의에서는 작센과 프랑켄의 귀족들만이 절대 찬성했으므로, 그는 다른 지역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특히 나쁜 공작 또는 악마 공작이라는 별명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대머리와는 92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 중 라티스본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거절했다.
919년 일부 귀족들은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921년 바이에른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자치권과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권리를 추가로 요구했고, 하인리히 1세는 이를 승인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슈바벤의 부크하르트 2세도 하인리히 1세에게 일단 충성을 맹세했지만 계속 반발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계속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하려고 암암리에 시도하였다. 부크하르트 2세가 죽자 하인리히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에 임명한다. 그밖에도 프랑크 족 역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귀족들과의 불화는 그의 즉위의 정당성 및 왕국의 안정에 위협적이었고, 마자르 족의 잇단 침략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920년대 내내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동프랑크 왕국은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콘라두스 1세가 아들이 없어서 결국 동프랑크의 강력한 귀족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지만 슈바벤,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그에게 반발했고, 한동안 무정부상태였다. 그는 바이에른 등 일부 지역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재위기간 내내 불안정했다. 즉위 직후 바이에른 공국과 전쟁을 벌였고, 하인리히는 자신이 주교를 임명할 능력이 있는 것을 들어 우위를 선점하려 했다. 바이에른 공작의 일부 권한을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료시켰지만 끝내 바이에른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무력으로 바이에른을 점령하였다.
920년 부활절에 하인리히 1세는 풀다 수도원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콘라두스 1세가 매장된 곳이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이 독일인 왕 루트비히와 콘라두스 1세의 합법적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통치권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미약했고, 그는 스스로도 왕국을 왕국이 아닌 공국과 제후들의 연맹체 또는 연합체 정도로 인식했다. 그는 재위기간 중 귀족들과 갈등하였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후임자들이 시도한 것처럼, 샤를마뉴처럼 관료를 파견하여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고 제국을 관리하려 하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바이에른 공국 등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승인하였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수도원과 교회의 설립을 장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수도원, 교회의 공적 기능 행사를 억제하려 하였다.
920년 서프랑크의 왕 샤를 르 생쁠이 군사를 이끌고 보름스 근처 페더르스하임( Pfeddersheim)까지 쳐들어왔지만 하인리히 1세가 미리 군사를 준비해둔 것을 알고 퇴각하였다. 하인리히 1세는 911년 11월 7일 동프랑크를 대표해 서프랑크의 왕 샤를 르 생쁠과 만나 동맹,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샤를 르 생쁠은 이를 어기고 로타링기아(로렌)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한편 하인리히 1세는 샤를 르 생쁠이 로베르 1세에게 축출당하자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기회를 봤다가 923년 말, 하인리히는 두 번 라인강을 건너 로타링기아로 들어갔고, 924년 10월까지 로타링기아의 동부 지역은 하인리히의 영향력하에 남게 되었다.
전임자인 콘라두스 1세는 마자르 족에게 공물로서 회유하여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에게 공물을 더이상 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912년부터 마자르 족은 계속 동프랑크를 침략해왔고 919년 하인리히 1세의 즉위식 직후에도 마자르 족이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런데 이때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2세는 하인리히를 도와주는 것을 거절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내심 하인리히를 왕이 아닌 단지 공작 정도로 취급하였다. 하인리히는 부르크하르트 2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대신 헤르만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921년 마자르 족이 왕국의 동부와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마자르 족의 상당한 병력에 대부분의 도시, 제후들은 패배했지만 일부 지역인 바이에른의 카란티아 후작령에서 에버하르트와 메란 백작(Count of Meran) 등은 마자르 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엘사스(Elsass, 현재의 알사스)의 백작 리우트프리트는 마자르 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마자르 족은 계속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하였다.
924년 동남부에 있던 마자르 족이 독일 영토를 침략하자 하인리히는 일단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겠다 약속하여 되돌려보냈다. 동시에 이전에 포로로 생포했던 마자르 장군들을 넘겨주었다. 동시에 하인리히는 국내에 성곽을 쌓아 도시들을 요새화시키고, 기병대 양성 및 기병대에 대한 훈련을 강화하였다.
925년부터 로트링겐을 공략하여 928년 줄피히(Zülpich)에서 로트링겐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트링겐을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대신 그는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에게 대신 자신의 가신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로트링겐 공작 직위를 주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대신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주어 반발을 무마시켰다.[5] 하인리히는 910년 이후 잃어버린 다섯번째 영역을 다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928년 아들 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마자르와 보헤미안, 모라비아, 바이킹 등이 동프랑크 왕국을 수시로 유린하는 가운데,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마이센, 슐레스비히, 고타, 헤르포드, 고슬라, 크베들린부르크 등 작센 지역도 이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의 측근, 봉신들은 그에게 군사 및 민병대, 군량 등을 제공하여 작센 지역에 침입한 이민족들을 몰아냈다. 그는 측근, 봉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도시 헌장이라는 일종의 규약을 제시하였다.
926년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 족을 재차 공격, 마자르 족의 근거지인 헝가리를 들어가 926년 10월 마자르 족의 왕자를 사로잡고 마자르족에게 10년 간의 휴전을 얻어냈다. 동시에 마자르 족에게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동시에 하인리히는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기병대 양성과 훈련을 강화한다.
926년 11월 보름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마자르 족의 침략에 대한 전국적인 전쟁 대비를 하도록 제후들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하인리히는 데인 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과거 켈트 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앵글로 색슨족이 도시를 요새화한 것을 참고하고 마자르 족과 슬라브 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932년에 가서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에게 공물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 왕국을 쳐들어오게 된다.
마자르 족과의 휴전을 얻어낸 직후 동쪽 국경 지대에 있던 슬라브 족이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슬라브 족의 하나인 폴라비안 슬라브 족(Polabian Slavs)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928년 겨울 슬라브계의 다른 부족인 헤벨리(Hevelli) 족이 차지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였다. 이후 골로마츠(Glomacze) 땅과 엘베강변까지 점령하고 슬라브 부족을 몰아냈고, 알브레히츠부르크와 마이센 성을 점령하였다.
928년 그는 폴란드 브란덴부르크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인 헤벨리족과 마이센의 달레민치족을 정복하고 독일에 복속시켰다. 928년 겨울, 슬라브 족이 다시 브란덴부르크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엘베강 중류에 있는 글로마츠까지 침공하여 성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작센 족 역사학자 비두킨트에 의하면 이때 하인리히는 위기에 직면했다 한다. 동시에 보헤미아에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단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등의 지원으로 퇴각하여 929년 프라하를 공략, 보헤미아의 벤첼 1세를 굴복시키고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받았다. 그해 9월 28일 보헤미아의 벤첼 1세는 죽고, 벤첼이 죽자 바로 그의 형제 보로슬라프가 보헤미아족의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 하인리히는 보로슬라프를 강제로 끌고 가 950년 여름까지 독일 군에 복무하게 했다.
929년 슬라브계 부족인 레다리 족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살해하고 새 지도자를 선출한 뒤, 작센 안할트의 발스리빈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백작 베른하르트와 테이마르(Thietmar)와 군사를 보내 레다리 족과 싸워 929년 9월 4일 렌젠 요새에서 고전 끝에 슬라브 족을 최종 격파했다. 슬라브 족을 최종적으로 격퇴한 뒤 하인리히는 슬라브 족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슬라브 족은 이교도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거절한다.
한편 슬라브족의 침공에 대해 그는 932년과 934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엘베강을 건너 슬라브 족의 본거지인 동부지역 영토 밖을 진격하여 슬라브족들을 격파하고 영토에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는 영토 밖 동부지역의 이민족인 슬라브인, 마자르인의 침략과 북방의 데인족의 침입을 모두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다른 제후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슬라브계 부족과 전쟁 중이던 928년부터 하인리히는 사자를 보내 마이센에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한편 이때를 기점으로 일명 게로 변경주라 불리우는 작센 동부 변경주 혹은 메르제부르크 변경주가 현재의 브란데부르크와 작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그동안 이름만 남아 있던 소르비아 변경주는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에 흡수되었고, 테이마르가 변경백이 되었다. 테이마르는 932년 사망하였고, 장남으로 추정되는 지그프리트가 메르제부르크 변경백을 승계받는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불안정했고, 동시에 이민족의 공격과 약탈이 계속되었다. 아들 오토 1세와 잉글랜드의 에디트의 결혼식을 계기로, 930년 하인리히 1세는 오토의 결혼식을 마친 뒤 아헨에서 오토가 자신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동시에 프랑켄 공작을 비롯한 각처의 귀족들에게 동의하도록 설득하였다.
932년부터 마자르 족이 지도자 볼레스쿠(Bulcsú)와 하르카(harka)의 지도 하에 다시 영토를 침략하였다. 933년에 와서 하인리히는 9년의 협정 종료를 이유로 마자르 족에게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로 쳐들어왔고, 하인리히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독일 왕국을 침략한 마자르 족을 상대하여 운스타트 강변을 따라 튀링겐 북부 지역 일대에서 마자르 족을 맞서 싸웠다.
933년 3월 15일에 리아드 전투에서 마자르 족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리아드에서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는 933년 헝가리까지 내려가 헝가리 북부에서 마자르 족을 크게 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독일 동부 지역을 침략한 슬라브 족을 엘베강변 및 기타 지역에서 격파하였다. 곧 그는 귀족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이것은 그의 대에 한한 것이었다. 933년에 마자르 족은 그에게 공물을 보내왔다.
934년에는 데인 족의 공격을 받아 직접 출정하였다. 데인 족은 바다 건너 프리슬란트의 해안가를 약탈했다. 데인 족은 이어 밴드 족과 연합해 하인리히의 작센 영지까지 공격했다. 같은 해인 943년 하인리히는 덴마크를 침공, 덴마크 왕 크누트 1세와 교전하였고, 슐레스비히에서 데인 족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슐레스비히를 독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동시에 그는 덴마크 족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받고 되돌아왔다. 이어 엘베 동부의 슬라브족의 영토까지 쳐들어갔다.
하인리히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는 한편 독일 내 후작급 반대파 귀족들을 설득했다. 하인리히는 독일을 국가라기보다 여러 부족 공작, 제후들의 연맹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은 포기하고 종주권을 획득하는 선에서 그쳤다. 프랑켄 지역을 복속시키면서도 자치권을 인정하고 명목상의 권리만 행사했을 뿐이고, 슈바벤과 바이에른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했고, 그는 919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켰지만 부르하르트에게 통치권과 민사행정권을 허락하고 종주권만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방어하는 한편 왕국 내에서의 권위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가고 싶어했다. 하인리히는 로마 지역의 정국 불안을 이용하는 한편 그의 무력에 의존하여 로마로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정국 불안 역시 자신이 교황으로부터 황제관을 수여받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이탈리아 방문은 실패하고 만다. 935년에는 하르츠로 사냥을 나갔다가 뇌졸중으로 되돌아왔다. 936년 초여름에 하인리히는 아들 오토 1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한다. 이후 이탈리아로 갈 준비를 하던 도중 936년 2월 1일 그는 튀링겐의 멤레벤의 한 수도원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지명된 아들 오토 1세가 즉위했다. 즉위하면서 오토 1세는 제후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프랑켄의 에버하르트와, 같은 이름인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와 전쟁을 벌였다. 또한 동시기에 메르제부르크 변경백[15] 지크프리트마저 사망했는데, 계승권을 박탈당한 이복형 탕그마르가 자신의 어머니가 지그프리트의 누이이기에 자신이 메르제부르크 변경주의 상속자임을 주장하지만 오토 1세는 이를 묵살하고 지크프리트의 동생 게로를 메르제부르크 변경백으로 임명한다.
이때 오토 1세의 인사 정책에 불만을 품은 빌롱거 가문의 위히만을 비롯한 작센의 귀족들이 비슷한 처지였던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마르는 또다른 이복 동생 하인리히가 있던 메네 강변의 베레케 요새를 포위했다. 하인리히는 생크머에게 납치되었다. 그러나 슈바벤 공 헤르만 1세 조카인 게프하르트가 베레케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헤르만 1세는 오토 1세에게 항복한다.
다음 목표는 생크머의 습격 거점이 된 엘레스부르크였다. 여기서 에버하르트는 탕크마르를 배신하고 하인리히를 데리고 오토 1세에게로 도주하였고, 위히만 또한 탕크마르의 군대에서 이탈한다. 위두킨트에 따르면 왕은 사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938년 7월에 어쩔 수 없는 엘레스부르크로 옮겼다. 탕크마르는 오토 1세의 군대 진군하는 것을 보고 요새로 퇴각했다. 938년 7월 28일, 오토 1세의 군대는 요새 안으로 진입했고, 탕크마르는 교회로 도망쳤다. 하인리히의 부하들이 그를 쫓았다. 탕그마르는 그 자리에서 배신한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토 1세는 개인적으로 탕그마르의 죽음에 대해 씁쓸하게 생각한 것 외엔 끝까지 탕그마르를 따른 추종 세력들을 처벌한다..
939년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동맹을 체결했다. 다만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을까 우려, 반발했다. 그러나 서프랑크의 실권자인 위그 르 그랑 역시 이딜하이트가 죽자 936년에서 938년 무렵 하인리히 1세의 딸이자 오토 1세의 누이였던 작센의 헤드비가와 결혼하였다.
어째든 서프랑크의 지원을 받은 오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이 승리와는 별개로 939년 로타링기아의 일부 귀족들은 루이 4세에게 충성 맹새를 했다. 루이는 곧 군사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로 갔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와 로타링기아 지방의 영유권 문제로 분쟁이 있었는데, 루이를 지지한 귀족 중의 한 명인 기셀베르트는 그해 10월 2일 안더나흐 전투 (939년 10월)에서 패하고 라인강에서 익사했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의 적인 위그 백작에게 군대를 제공하여 랭스를 침략, 941년 루이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942년에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시에 루이 4세는 이때 로타링기아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다. 얼마 뒤 루이는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의 여동생인 게르베르가와 결혼했는데, 루이를 견제하려는 오토 1세의 의도였다는 설과, 오토의 동의 없는 결혼이었다는 설이 있다.이후 942년 11월 뫼즈에 있는 비즈에서 오토 1세와 루이 4세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939년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게로는 변경주 내의 슬라브족 반란을 간신히 진압한 후 슬라브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기획했다. 우선 화해를 가장해 약 30여명의 슬라브 족장들을 연회에 초대해 그들을 모두 죽였다. 게로가 30여명의 슬라브 족장들을 대상으로 접대의 관습을 어겼다는 사실이 슬라브족들에게 알려지가 슬라브족들은 복수를 천명했다.
결국 작센 변경백 헤르만 빌롱과 국왕인 오토 1세마저 작금의 상황에 대해 개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자레강, 푸네강, 무르데강, 엘베강에 끼워진 세리문트 지구와 티티지 지구로 이루어진 지역들은 정복 후 오토 1세의 직접적인 권한 하에 놓이게 되었고, 940년대 중반 이후, 오토 1세는 토지를 가족에게 양도하거나 게로나 다른 귀족들에게 영지를 주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무르데 강까지의 더 남쪽 지역은 작센인의 조공 통치하에 있었지만, 분명히 현지 슬라브 부족장의 지배 체제가 계속되었지만 게로에 의한 슬라브 족장들의 집단 학살은 슬라브 족장들의 권력 구조를 영구적으로 불안정화시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941년에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꾸몄다. 그의 음모에 엘베 슬라브 원정에 참전했지만 적은 전리품에 오토 1세에게 불만을 품은 작센 귀족들까지 가담했으나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지만 모후인 마틸다의 중재하에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947년에 바이에른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이떼 경험으로 친족들이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된 오토 1세는 제후 세력들을 견제할 대안을 물색하게 되었고, 이때 도시를 통치하던 주교들을 포섭해 주교후로 대표되는 제국교회정책을 실시, 세습되지 않는 성직자들의 힘을 키워 제후들을 견제하도록 만들게 했다.
한편 루이 4세는 실권자인 위그를 경계했고 945년 루이는 노르망디를 차지하려다가 도리어 노르망디와 헤르베르티언 가문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다. 그는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져 1년 동안 파리의 감옥에 투옥당했다. 그러나 루이는 아내 게르베르가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토 1세는 군사를 보내 서프랑크 왕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루이 4세를 풀어주게 했다. 독일의 군주로 서프랑크에 대한 권한이 없었지만 오토 3세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전체 유럽의 황제라는 명분으로 각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이후 교황청이 개입했고, 서프랑크 왕국의 국내 여론도 국왕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강해지면서 루이는 풀려나게 되었다. 위그는 루이 4세의 석방을 거부하다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파문당하고 결국 루이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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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난 루이는 곧 오토 1세에게 군사를 빌려 946년 랭스를 되찾았으며 949년에는 레온 지역을 다시 손에 넣었다. 948년 오토 1세는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을 중재할 목적으로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잉겔하임 회의에서는 왕권은 신성 불가침으로 선언되고 이를 어긴 위그 르 그랑은 이를 어겼다며 파문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위그 르 그랑은 파문에 개의치 않았고 루이 4세의 영지였던 수아송 지역을 약탈하였으며, 동프랑크가 점유하던 로렌 지역까지 쳐들어가 약탈하였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를 지원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북동부 지역에서의 루이의 영향력을 키워주었다. 이후 위그와 계속 갈등관계에 있었지만 950년 오토 1세의 중재로 위그 르 그랑과 일단 화해하였지만 951년 동,서 프랑크의 종교회의와 교황에 의해 위그는 파문당했다. 위그는 곧 루이 4세와 다시 휴전 겸 화해를 청했다.
954년 9월 루이 4세가 죽자 오토는 자신의 형제이자 쾰른의 주교인 브루노와 함께 외조카인 로테르의 후견인이 되었다. 956년부터 로테르는 외삼촌이자 오토 1세의 형제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의 보호아래 있었다. 한편 또다른 외삼촌 오토 1세는 로테르와 대 위그를 적당히 균형, 조절하여 서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대 위그 및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가문에 앙심을 품어온 헤르베르티언 왕가를 견제할 목적으로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를 프랑스에 머무르게 하고 싶어하였다. 당시 파리백작이던 대 위그는 프랑크 공작이라는 직책으로 국정에 개입했고, 로테르는 대주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에게도 특별히 프랑크 공작(duc des Francs)이라는 작위를 부여하였다.
965년 10월 11일 후견인이자 보호자인 외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랭스 대성당에서 죽고, 969년 5월 5일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외숙부 오토 1세를 배신하고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왕국의 변경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쪽에서는 변경백인 게로와 헤르만 빌룽이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들의 전과는 937년 마크데부르크에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을 건립하고 948년에는 2곳의 주교관구를 창설함으로써 공고해졌으며, 특히 오보트리테스 부족이 자리잡은 땅에 빌롱거 가문의 이름을 딴 변경주가 설치되었다.
북쪽에는 기독교 선교를 덴마크로 확대하기 위해 3곳에 주교관구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덴마크 왕 고름의 신기를 건드려 947년 독일의 작센 북부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교도 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 하랄 고름손 블로탄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 반란은 3년이나 이어지다가 950년 오토 1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보헤미아 지역 또한 연이은 공격 끝에 95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난 뒤 오토는 프랑스의 로렌 영유권 주장을 물리치고 나아가서 프랑스 내분의 중재자 역할까지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로렌 공국을 점유하는데 성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부르고뉴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게다가 홀로 된 이탈리아의 왕후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아델하이트)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 변경백에게 포로가 되어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 오토는 951년 이탈리아로 진군해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하였고 948년 왕비였던 이드기스가 죽자 951년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952년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그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토는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중단해야 했는데 이드기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리우돌프가 아버지의 재혼으로 후계자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해 몇몇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반기를 들었다. 오토는 형세가 불리해 작센으로 퇴각해야 했으나 954년 마자르족이 독일을 침공하면서 반군의 입장이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반군은 독일의 적들과 공모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리우돌프는 아버지에게 항복하고 자신의 영지를 박탈당했다.
참고로 게로 변경백은 반란에 가담은 하지 않았지만 리우돌프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일로 인해 게로와 오토 1세간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오토 1세는 마자르족을 격퇴하기 위해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레히펠트 평원으로 이동해 마자르 족들의 대군을 격퇴하였고,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전신인 동부 변경주를 재건했다.
북동부에서 게로는 954년에 우크란족을 정복했다. 이러한 독일 왕국의 행보에 오토트리테스 연맹에 속해 있던 지르지판족의 족장 스토이뉴는 자신의 부족은 물론이고 빌젠과 톨렌시안족, 부족들을 모아 반 작센 연합을 구성 955년 10월 16일, 현재의 레그니츠 강으로 추정되는 락샤강이란 곳에서 오토와 그의 아들 리우돌프, 게로와 보헤미아의 지원군과 격돌하나 결국 락샤 강 한복판에 포위된 채 굶주림과 질병으로 궤멸되는 것이 시간 문제였다.
이때 오토는 게로에게 스토이뉴와의 우호동맹의 협상을 의뢰했으나 게로는 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토뉴를 조롱하거나 작센군의 힘을 자랑하며 도발했고, 강 너머의 대화는 상호 모욕으로 끝나고 다음날 전투로 이어졌다. 게로의 책략 덕분에 작센인들은 다음날 한적한 곳에서 누구에게도 눈치 채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놀란 슬라브족들은 도망쳤다. 패전으로 도주하던 스토이뉴는 호세드라는 이름의 기사에 의해 참수되었고, 생포된 오보트리테스 부족 연맹의 700명의 전사들 또한 참수하였다. 오토 1세는 자신의 명령마저 항거한 게로를 견제하기 위해 작센 변경백인 헤르만 빌룽을 통해 게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후 957년 장남 리우돌프가 사망했고, 그사이 베렝가리오는 독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의 주권을 회복하려 하자 이에 오토 1세는 다시 베렝가리오를 굴복시킬 겸 다시 이탈리아로 원정을 개시했다. 이때 베렝가리오가 교황령 북쪽을 점령하면서 요한 12세가 오토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요청을 받은 오토 1세는 961년 로마로 진군했고 이시기에 아델하이트의 소생인 오토 2세를 독일왕으로 대관식을 갖도록 주선해 후계자로 공식화한다. 이탈리아 원정 가운데인 959년 오토 1세는 로렌 공국을 남북으로 분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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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베렝가리오를 사로잡은 오토 1세는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고, 962년 2월 2일에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10일 뒤에 교황과 오토는 황제가 교황령 독립의 보증인이 되는 ‘오토의 특권’ 조약을 체결했다. 다음에 오토가 로마를 떠나 교황령 북쪽을 되찾았지만 요한 12세가 오토 1세의 힘을 두려워했다.
교황이 자신을 두려워한 사실을 모른 채 오토 1세는 다시 엘베강 동부 원정을 떠났다.963년 오토와 게로의 슬라브 원정은 어느새 루사티아 부족과 슬루피아 부족을 정복했고, 이로 인해 당시 국가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던 미에슈코 1세의 폴란드 영지와 맞닿게 되었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일대에 거주하는 울린인과 벨레티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숙부 헤르만 빌룽과의 상속 투쟁에서 패한 작센 빌룽 가문의 비흐만 2세와 그의 형제 에크베르트가 포메라니아 서부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이끌고 963년 미에슈코 1세를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두고 미에슈코의 이름없는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시기 독일 왕국은 새로이 영토로 편입한 엘베강 동부 전역에 기독교 선교 및 봉건제와 농노제 등을 이식해 완전히 독일 왕국의 영역으로 동화하려고 했다. 한편 요한 12세는 마자르 인들과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오토에 대항하는 동맹을 촉구했다. 963년 11월 오토는 로마로 돌아와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 레오 8세를 선출했다. 그러나 오토가 로마를 떠나자 오토 지지 세력과 요한 12세 지지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요한 12세가 거대한 유혈사태 가운데 힘을 가지고 돌아와 자신을 내쫓은 오토를 파문했다. 이것 때문에 오토는 964년 교황 베네딕토 5세를 폐위시켜야 했다. 이 기회에 오토는 제국의 인정 없이 교황을 선출할 수 없다는 약속을 로마 시민들에게 받아냈다. 966년부터 972년까지 몇 차례나 남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965년 게로가 사망하였다. 959년 장남인 지그프리드가 로마로 성지 순례 도중 사망하였고, 차남인 게로 2세 또한 사망한지 오래였다. 이에 따라 오토 1세는 게로 변경주를 분할해 현재의 메르제부르크, 혹은 게로 변경주는 여러개의 변경주로 분할, 현재의 메클렌부르크에 자리한 빌룽 변경주 외에도 현재의 브란덴부르크에 자리한 북방변경주와 작센을 구성하는 마이센 변경주, 차이즈 변경주, 루사티아 변경주 등으로 분할되었다.
967년에 베네벤토와 카푸아의 지배자이며 메조기오르노의 강력한 동맹인 판덜프에게 스폴레토 공작령을 주었다. 968년에 오토는 판덜프에게 맡겨진 바리의 포위를 풀었으나, 판덜프는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동로마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오토가 보낸 사신인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를 박대하고 오토의 황제 즉위를 불인정했으나, 니키포로스 2세를 죽이고 황제가 된 요안니스 1세는 972년 오토의 서방황제 직위를 인정했고 그의 조카딸 테오파노와 오토의 아들인 오토 2세가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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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독일로 돌아온 오토 1세는 퀘들린부르크에서 개최된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였다. 973년 3월 멤레벤에서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가 병자성사를 받고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외조카인 서프랑크 국왕인 로테르가 정치, 군사 동맹 계획을 파기하고 독일 진출을 계획한다. 이는 로테르의 선왕인 루이 4세와 샤를 3세의 동방 진출 정책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962년부터 로테르는 플랑드르 지방을 복속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 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타링기아를 다시 복속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965년 플랑드르의 백작이던 아르눌프 1세는 아들 보두앵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를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영지를 로테르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의 손자 아르눌프 2세는 로테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로테르의 보호자 브루노가 죽자 로테르는 독일에 대항하였고 978년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을 침공했다.
바로 뫼즈 강에서 오토를 패퇴시키고 아헨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오토 2세를 거의 붙잡을 뻔하였다. 오토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거의 파리까지 진격하였고 도중에 수아송, 랭스 등을 유린했다. 그러나 위그 카페등 강력한 귀족들이 로테르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결국 퇴각하고 980년 7월 오토와 로테르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978년 그는 아헨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진격했다. 오토 2세는 임신중이던 아내 테오파노와 함께 황급히 쾰른으로 도주했다. 로테르는 오토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아헨 점령을 확인했으나 통치를 위해 다시 자기 영토인 서프랑크로 돌아와야 했다. 퇴각하기 전 로테르는 아헨의 제국 궁전을 약탈, 파괴하였다. 후에 외사촌 오토 2세는 그의 동생 하로트링겐 공작 샤를과 로테르의 갈등을 유도하여 혼란을 부추겼으나 실패했다.
한편 오토 2세는 서프랑크의 영토를 쪼개어 로테르의 동생 샤를 또는 로테르의 서자 아르눌프를 분리한 부분의 왕으로 임명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로테르는 979년 6월 8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자신의 아들인 루이 5세를 축성하고 공동 통치자로 선언하였다. 오토는 978년 10월 파리를 침공했고, 로테르는 도피했다. 바로 오토는 그의 동생 샤를을 프랑크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위그 카페의 군사력에 의지해 복위할 수 있었다. 오토 2세는 둘로 나눠진 로렌 중 북쪽의 하 로렌의 공작으로 로테의 동생 샤를을 임명한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선임(先任) 황제가 된 바실리우스 2세의 서쪽 황제의 권위 아래 이탈리아의 전부를 가져와야 된다고 말에 설득되어 독일의 내정은 빌리지스 대수상과 작센 공작 베르나트 1세가 맡게 되었다. 오토 2세는 아들, 아내, 바이에른의 오토, 보름스, 메츠, 메르센부르크의 주교들, 많은 백작과 남작들과 복속한 오보트리티 함께 동행했다.
로마의 상황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오토 1세가 선출했던 교황 베네딕토 6세는 로마인들에 의해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974년에 선종했다. 베네딕토 6세의 후계자를 자칭한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났고 수트리의 주교였던 베네딕토 7세가 교황이었다. 오토 2세는 981년 부활절에 베네딕토 7세의 인도로 환영을 받으면서 로마로 입성하였다.
982년 7월 14일, 오토 2세의 군대는 스틸로 전투에서 시칠리아 토후국의 이슬람군에 완패를 겪었다. 오토 2세는 이탈리아 전체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 합병시킨다는 희망을 품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군사 원정을 벌이고 있었다. 오토 2세는 다치지 않고 전장에서 빠져나왔지만 전투의 사상자들에 다수 제국의 주요 관료들이 있었다.
차선책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보좌할 지휘관들의 부재로 인해 실패로 끝난다. 스틸로 전투 패전 그리고 제국의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오토 2세는 983년 오순절 때 베로나에서 궁중의회를 소집하였고, 이곳에서 그는 의회에 세 살이었던 오토 3세를 독일 및 이탈리아왕으로 선출시켜 오토 2세가 분명한 법정추정상속인이 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처음으로 독일 지배자가 이탈리아 땅에서 선출된 것이었다. 의회가 결론을 마친 뒤, 오토 3세는 독일왕들의 전통적인 즉위식 거행 장소인 아헨에서 즉위를 하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건너갔다. 오토 2세는 무슬림들과의 군사 활동 문제로 이탈리아에 있었다. 하지만 중부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오토 2세는 983년 12월 7일에 급사하였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혔다.
오토 3세는 아버지가 죽은 지 3주 뒤인 983년 크리스마스 때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라벤나 대주교 요한 10세 등을 통해 독일왕으로 즉위하였다. 오토 2세의 사망 소식은 아들의 즉위가 이뤄진 지 얼마 안 되어 독일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이탈리아 남부 및 제국의 동부 국경 지역에서 작센 귀족들의 착취와 기독교화에 반발한 슬라브족들의 봉기로 빌롱 변경주와 북부 변경주 등의 폐지 같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하였다. 이렇게 왕위에 미성년자가 오르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오토 3세의 어머니 테오파노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 역할을 취하였다.
오토 3세의 친척 하인리히 2세는 반란이 실패한 뒤에 976년에 오토 2세에 의해 바이에른 공작위에서 폐위당하고 위트레흐트 주교국에 감금되어 있었다. 오토 2세가 죽은 뒤, 하인리히는 풀려났다. 오토 3세의 가장 가까운 오토 왕조 출신 남자 친척이었던, 하인리히 2세는 유가기에 불과했던 친척에 대한 섭정권을 주장하였다. 쾰른 대주교 바린은 별다른 반대 없이 하인리히 2세에게 섭정권을 부여하였다. 오토 3세의 어머니 테오파노가 오토의 조모인 황태후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그리고 이모인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녀원장 마틸다 등과 더불어 이에 반대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와 마틸다 모두 이탈리아에 있었기에 자신들의 반대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섭정으로서, 하인리히 2세는 어린 주군의 후견자로서는 덜 집중하고 왕위에 오르는 행동을 취했다. 오리악의 게르베르에 따르면, 하인리히 2세는 비잔티움 제국 방식의 공동 왕권 통치를 채택하였다. 984년 끝을 앞두고, 하인리히 2세는 제국 내 주요 인사들과 동맹을 형성하려 했는데, 그 중에 주요 인물로는 친척인 프랑스의 로타르가 있었다. 하인리히 2세가 독일왕이 되는 것을 로타르가 동의하는 대가로, 하인리히 2세는 로타르에게 로타링기아를 내주기로 합의하였다. 이 둘은 브라이자흐를 장악하기 위해 985년 2월 1일에 군대를 합류시키기로 동의했으나, 막판에 하인리히의 의지가 변심하였다. 그럼에도 로타르는 독일땅으로 공세를 이어나갔고 985년 3월경에는 베르됭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어린 오토 3세를 데리고 작센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하인리히 2세는 마그데부르크에서 985년 종려주일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 왕국의 모든 대귀족들을 초청하였다. 이때 그는 독일 왕위에 대한 그의 왕위 주장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제한된 성공만을 거뒀다. 그의 주장에 호응한 이들로는 오보트리테스 연맹장 미스티보이와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가 있었다. 하인리히 2세는 또한 트리어 대주교 에그베르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기질러, 메츠 주교 디트리히 등의 지지도 받았다.
하인리히의 주장을 반대한 이들은 그에 대한 모의를 꾸미기 위하여 작센의 크베들린부르크로 달아났다. 하인리히가 이 공모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이 반대를 꺾기 위하여 군대를 크베들린부르크로 이동시켰다. 하인리히 2세는 공모 모의자들과 강화 협상을 맺어보기 위해 자신보다 앞서 위트레흐트 주교 폴크마르를 보냈다. 이 협상은 공모자들이 오토 3세 외에 그 누구한테 충성의 맹세를 하기를 거부하면서 실패하였고,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는 어린 왕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다. 작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하인리히 2세는 장래에 평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고 바이에른 공국으로 향했다. 바이에른 지역과 그의 가문이 오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많은 주교들과 백작들은 그를 왕위에 대한 정당한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오토 3세한테 작위를 받았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토 3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였다.
작센 및 바이에른 지역에서 성공과 실패로, 하인리히의 왕위 주장은 독일 왕들의 직할지였던 프랑켄 공국의 지지를 얻는 데 의지하였다.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 (독일 수석 대주교)와 슈바벤 공작 콘라트 1세 등이 이끌었던 프랑켄 귀족들은 오토 3세를 저버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면적인 내전 발발을 우려한, 하인리히 2세는 985년 6월 29일 오토 3세에게 오토의 어머니와 조모 등과 공동 섭정권을 내주었다. 항복에 대한 대가로, 하인리히 2세는 신임 케른텐 공작이 된 하인리히 3세를 대신하여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위되었다.
984년부터 사망한 시기인 991년까지 이어진 테오파노 섭정 시기는 내부 반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녀는 남편인 오토 2세가 981년에 마그데부르크 대교구에 흡수시킨 메르제부르크 교구를 복구시키기 위하여 임기 내내 고군분투했었다. 테오파노는 또한 오토 2세의 궁중 담당 사제들에, 힐데스하임 백작 베른바르트 그리고 마인츠 대주교로서 직권상 독일의 대제상이던 빌리기스를 유지하였다. 테오파노가 섭정이기는 하였으나, 빌리기스에게는 왕국을 관리하는 상당한 재량이 부여됐다. 황후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를 오토 3세 정권을 받아들이도록 하면서 보헤미아를 독일의 패권 하에 있도록 유지시켜 낸 것이었다.
986년에 5세였던 오토 3세는 크베들린부르크에서 부활절을 지냈다. 독일의 주요 네 공작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2세, 슈바벤의 콘라트 1세, 케른텐의 하인리히 3세, 작센의 베른하르트 1세) 역시도 어린 왕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936년 오토 1세 때, 961년 오토 2세 때 행해진 유사한 예식들을 모방하며, 이 공작들은 각각 오토 3세의 예식상의 궁내관, 시종관, 잔지기, 원수 역할을 하였다. 이 행위는 오토 3세에 대한 공작의 충성심과 그를 위하여 기꺼이 움직이겠다는 마음 가짐을 상징화 한 것이었다. 주목할 점은 하인리히 2세의 순종으로, 그는 불과 2년 전에 반란을 실패했으나 친척에게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6세가 된 다음 해부터, 오토 3세는 히델스하임의 베른바르트와 제르베르 도리악한테서 교육을 받았다.
테오파노 섭정 기간, 간데르스하임 수도원과 그 토지 소유권을 두고 '간데르스하임 분쟁'이 발발하였다. 마인츠 대주교와 힐데스하임 주교 모두 다 이 수도원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였으며, 이 권한에는 이 수도원의 수녀들의 지명권도 포함했었다. 이 분쟁은 오토 3세의 누이 소피아가 이 간데르스하임 수도원의 수녀가 된 989년에 일어났다. 소피아는 힐데스하임 주교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고 대신에, 마인츠 대주교의 권위만을 받아들였다. 이 분쟁은 고조되다가 오토 3세와 테오파노의 궁정까지 이어졌다. 왕실의 개입으로 양 측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었는데 양 측의 주교들이 소피아를 도유(塗油)하는 한편 수도원의 남은 수녀들을 도유하는 것은 힐데스하임 주교가 단독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989년에 테오파노와 오토 3세는 로마에 있는 오토 2세의 무덤을 방문하러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의 파비아에 도착한 뒤, 황후는 오랜 기간 절친인 요안니스 필라가토스를 피아첸차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탈리아에서 1년을 보낸 뒤, 독일로 돌아왔고, 테오파노는 네이메헌에서 991년 6월 15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쾰른의 성 판탈레온 교회에 묻혔다.
오토 3세는 여전히 어렸기 때문에 그의 조모인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황태후가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와 함께 984년에 통치를 할 만큼 나이를 먹을 때까지 섭정이 되어주었다.
오토 3세가 나이가 들면서, 조모의 권한은 오토가 14세가 된 994년까지 점차 줄어들었다. 994년 9월 졸링겐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오토 3세는 섭정 없이 왕국을 온전히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를 통하여, 아델라이드는 알자스의 셀즈강에 그녀가 세운 수녀원으로 은퇴하였다. 비록 그녀는 수녀가 되지는 않았으나, 여생을 교회 일과 자선 행위를 하며 보냈다. 오토 3세가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995년부터 997년까지 누이인 소피아가 그와 동행하여 동생의 배우자 역할을 대신하였다.
단독 통치자로서 오토 3세의 첫 행동 중 하나는 쾰른의 헤리베르트를 이탈리아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었는데, 그는 직위를 1002년에 오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 오토 3세는 재위 시작 시기 때 조부인 오토 1세의 행보를 따랐으며,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5세를 임명하고 로마를 떠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5세는 축출당하고 오토 3세는 998년에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영구히 머물렀다. 995년 여름에, 오토는 아버지 오토 2세가 비잔티움의 테오파노와 혼인함으로써 왕위를 확고히 한 것 같은 예시를 따라,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와 결혼 주석을 위한 대표자로 피아첸차 대주교 요안니스 필라가토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한동안 그 결혼 주선 대상자가 조이 포르피로게니타였을 것이다.
서슬라브족계 폴라비아 부족들의 루티치 연맹은 오토 3세의 재위 초에는 잠잠히 있었으며, 심지어는 하인리히 2세의 실패로 끝나고 만 반란 시기에도 잠자코 있었다. 983년에, 스틸로 전투에서 오토 2세가 패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맞서 슬라브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국은 북반변경과 빌룽 변경 등 엘베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 기독교화 진전이 멈추자, 슬라브인들은 제국과 평화 상태에 돌입했고, 테오파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란이 진압되자, 985년을 시작으로 상실한 동방 영토를 되찾기 위한 다수의 군사 활동을 계시하였다. 오토는 겨우 6살에 불과했을 당시 몸소 이 군사 활동에 참전했었다. 986년 원정 시기 때, 오토 3세는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충성의 맹세를 받았는데, 그는 제국군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었고 오토 3세에게는 낙타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루티치 연맹이 987년에 항복은 하였으나, 이들은 어린 왕의 이목을 계속해서 끌었다.
오토 3세가 11살이던 991년 9월에, 슬라브족 약탈자들이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였다. 992년에 바이킹 약탈자들의 발발과 더불어 이 침공은 오토 3세로 하여금 침입자들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이 군사 활동 중에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 독일은 기근과 역병의 시기를 마주하였다. 994년과 995년에, 오토 3세는 북방의 슬라브족과 바이킹을 별 소득 없는 군사 원정을 벌였지만, 993년에는 브란덴부르크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고, 995년에는 오보트리티 슬라브족들을 굴복시켜냈다.
슬라브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993년 그동안 서프랑크 왕국은 위그 카페를 시조로 하는 카페 왕조가 들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위그 카페의 권력은 카롤링거 왕조를 위협할 때만큼 반대급부로 약해진 상태였다. 이때 위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프랑크 직함을 자신의 조모의 친척이었던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3세에게 넘겼는데 문제는 블루아 백작 외드 1세가 프랑크 공작직을 원하다가 다른 자에게로 넘어간 것에 대한 앙심으로 랑의 주교 아달베룽과 모의해 위그의 그의 아들이자 공동왕인 로베르 2세를 몰아내고 하 로트링겐 공작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루이 5세의 조카 루트비히를 서프랑크의 왕을 추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오토 3세 또한 가담했고, 위그 부자가 왕령지인 파리 외곽 밖으로 나오면 그때 생포해 독일로 끌고 가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기상천외한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면서 없던 일로 되었다.
995년 가을에, 오토 3세가 성인이 되자, 그는 다시 루티키 연맹과 전쟁에 돌입하였고, 이때는 폴란드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의 도움을 받았다. 997년에 그는 엘베강의 아르네부르크에 대한 루티치 연맹의 공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점령된 이 도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오토 2세는 983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죽기 앞서 피에트로 카네판노바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스스로를 교황 요한 14세라 칭하던 카네판노바는 이탈리아에서 오토 2세의 재상 역할을 수행했었던 롬바르디아 출신의 비로마 출신 인물이었다. 오토 2세가 죽은 뒤, 요한 14세는 섭정권을 두고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2세와 테오파노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하인리히는 섭정권을 오토의 어머니에게 넘기라는 포고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혼란 시기 동안, 로마의 귀족 사회에서는 비로마 출신의 요한 14세를 몰아내고 자신들 사이에서 교황을 세울 기회를 포착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9년간 망명 생활을 했던 대립 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귀족들의 군대와 합류하여 교황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984년 4월 로마로 진격하였다. 크레스켄티우스 1세의 아들들인 크레스켄티우스 2세와 크레스켄티우스 3세의 도움으로, 보니파시오 7세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요한 14세를 감금시킬 수 있었다. 네 달 뒤인, 984년 8월 20일에, 요한 14세는 구금 중에 아사하거나 또는 아마 보니파시오의 명령으로 독살당하였다.
독일에서 오토의 섭정 기간이 있는 동안,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파트리키우스 로마노룸'(로마인들의 파트리키)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으나, 그는 스스로를 오토 왕의 부관이라 나타내며 중앙 권력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보니파시오 7세가 985년에 죽자, 교황 요한 15세가 그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이 선출의 자세한 내용들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크레스켄티우스 2세가 이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해에 걸쳐서,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로마시에 권한을 행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교황의 자율권을 심각히 제한시켰다. 테오파노 황후가 989년과 991년 사이에 로마에 있던 동안, 크레스켄티우스 2세는 표면상으로는 그녀에 복종했으나, 그는 로마의 지배자로서 그의 지위를 유지했었다.
오토 3세는 로마를 제국 행정의 중심지로 바꾸고 정교한 로마의 관습 및 비잔티움의 궁정 의례를 부활시켰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황제와 교황은 교회를 개혁하려했고, 몰수된 교회 재산은 각 기관들에 반환되어다. 더군다나, 메르제부르크 주교국의 폐지를 주도한 자 중 한 명이었던 할버슈타트 주교가 996년 11월에 죽은 뒤, 오토 3세와 그레고리오 5세는 메르제부르크 주교국의 복원을 시작하였다. 오토 1세가 폴라비아 슬라브족들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헝가리인들에게 승리를 거둔 다음 978년에 이 교구를 설치했다가 오토 2세가 983년에 죽은 해에 일어난 슬라브족 대봉기 때 사실상 파괴되어 있었다.
오토 3세는 팔라티노 언덕에 황궁을 지으려 했었고 고대의 로마 원로원을 그 중요성에 맞게 부활시킬 계획을 했었다. 그는 로마시의 파트리키,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그리고 로마법만을 받아들이라는 그의 명령을 받은 판사들의 조직을 임명시키는 등, 로마시의 고대 행정 체계를 되살렸다.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기독교 국가의 수호자라는 위치를 알리기 위하여, 오토 3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인', '사도들의 하인', '로마 원로원과 인민들의 집정관', '세계의 황제' 등의 지위를 썼다.
998년과 1000년 사이에, 오토 3세는 몇 차례 순례를 떠났다. 999년, 그는 가르냐노에서 베네벤토로 향하는 순례를 떠났는데, 베네벤토에서 그는 크레스켄티우스 2세에게 안전을 약속한 뒤 처형한 것 때문에 속죄를 하기 위하여 은둔 수도사 로무알드와 당시 저명한 종교 지도자였던 수도원장 로사노의 성 네일로스를 만났다. 특히 이 순례 동안에, 그의 친척인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질병으로 로마에서 죽고 말았다. 그레고리오 5세의 사망 소식을 듣자, 오토 3세는 그의 오랜 기간 가정 교사였던 오리악의 제르베르를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세웠다. 실베스테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기독교 제국'을 세웠다고 하는 초대 교황의 이름 상기시켰다. 또한 이는 자기 자신을 로마 제국 및 교회와 더욱 연관시키려는 계획의 일부였다.
한편 오토 3세는 로마에 머물면서 동유럽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폴란드와 보헤미아의 경우 오토 3세에게 봉신으로 복종했지만 헝가리의 경우 이슈트반 1세가 헝가리를 왕국으로 격상하기 위해 오토 3세의 호의를 받으려고 했고, 이슈트반은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고 하인리히 2세의 딸이자 오토 3세의 먼 조카인 기젤러와 혼인하였다.

7. 서프랑크 왕국

7.1. 카롤링커 왕조의 황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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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년 카를 3세가 폐위되면서 프랑크 제국 또한 다시 서프랑크, 동프랑크, 이탈리아 왕국 등으로 분열되었다. 본래라면 루이 3세샤를로망 2세의 이복 동생인 샤를 3세가 서프랑크 국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카를 3세에 의해 서프랑크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다가 결국 배신해 아르눌프를 도왔던 외드가 자신이 서프랑크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본래 카롤링거 왕조의 본거지는 현재의 저지대 국가들이 들어선 아우스트라시아였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으로 셋으로 분열된 후 여러 조약으로 그 영역으로 조정되면서 점차 변방 지역으로 전락, 심지어 아우스트라시아는 동서 프랑크 국왕들에 의해 그 영역을 동서로 분할되었기에 서프랑크의 왕들은 네우스트리아의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문제는 아우스트라시아에 대한 네우스트리아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 본디 네우스트리아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본거지와 같은 곳으로 메로베우스 왕조에 대해 우호적인 곳인데다가 현시점에서 로베르 가문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또한 외드 본인은 단 수백명의 병력으로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한 20,000여명의 바이킹을 물리치고, 왕국을 지켜낸 공로가 있었고, 모계쪽으로 루도비쿠스 1세의 외손자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었다.
결국 서프랑크 왕국의 주교들과 제후들은 외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888년 몽포콩과 다른 여러 곳에서 노르만과 싸워 승리했지만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지 못했고 비만왕 샤를의 반대를 받았고 후에는 랭스 대주교 풀크와 몇몇 강력한 귀족의 지원을 받은 단순왕 샤를 3세의 도전을 받았다. 외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요절했고, 왕이 된 뒤 그는 적자가 없었으므로 파리 백작위는 동생인 로베르 1세에게 주었다.
893년부터 단순왕 샤를 3세 생플은 자신이 선왕의 아들임을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하였다. 893년 초 단순왕 샤를의 지지자들이 외드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일시적으로 추대하자 아르눌프는 일단 단순왕 샤를의 즉위를 승인했다. 샤를이 13세의 나이로 서프랑크의 왕에 즉위하자 케른텐의 아르눌프는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내전을 끝내기 위해 외드와 샤를을 보름스로 오도록 지시했다. 895년 5월 외드는 보름스로 와 자신의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샤를은 자신의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르눌프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샤를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데 크게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트링겐의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츠벤티볼트에게 서프랑크 왕국을 감시하게 했다.
외드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고 지원을 받기 위해 동 프랑크 왕국의 케른텐의 아르눌프에게 배상금을 바치기도 했지만 894년 아르눌프는 샤를의 편에 섰다. 그는 죽기 전 3년간 그는 샤를과 싸웠으나 자녀가 어리던 외드는 결국 샤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종주권을 유지하던 아르눌프는 893년 그와 샤를 3세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보름스에 가기를 거부했다. 아르눌프는 샤를 생플이 미성년자인 점을 들어 통치가 가능한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895년 3월에도 아르눌프는 다시 샤를과 외드를 895년 5월까지 다시 보름스로 소환했는에, 이때에도 샤를은 역시 거절했다. 그 해 5월 외드만이 도착했다. 분노한 아르눌프는 이 일을 계기로 외드를 지지한다. 한편 외드는 많은 선물과 향신료를 아르눌프에게 조공으로 들고 보름스에 나타났다. 아르눌프는 898년 외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외드를 지지하였다. 샤를 드 생쁠은 계속 자신의 왕위를 요구했고, 외드는 샤를 3세 생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드는 898년 죽었다.
외드가 죽자 샤를 3세는 서프랑크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죽은 외드의 동생 네우스트리아 백작 로베르 1세는 바이킹과의 교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인망을 쌓고,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베르는 911년 샤르트르에서 노르만족과 싸워 승리했다. 로베르는 왕의 자리는 샤를에게 양보했지만, 여론을 형성하여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군권 역시 로베르 1세에게 있었고, 샤를은 일단 이를 승인하였다. 이는 군주권의 상당한 약화를 의미했다. 샤를의 집권 초, 북부에서는 바이킹과 남부에서는 사라센이 쳐들어와 약탈을 감행했다. 샤를은 이들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였다.
898년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로트링겐을 침공하였다. 이어 아헨을 획득, 서프랑크령으로 병합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비무(Vimeu) 지역에서 노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이겨 다량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러나 종종 이겼을 뿐 계속된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패하게 된다.
900년대 초부터 노르웨이에서 온 흐롤프 등의 바이킹이 프랑스 서북부와 노르망디를 약탈했다. 샤를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907년 4월 19일 또는 5월 19일 로트링겐 출신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 백작인 이멘티가르(Immedinger)와 부인 기슬라]의 딸로, 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캄파네 백작인 브레브 2세(Beuve II, 일명 보보)의 누이인 프레데루나와 결혼했다. 프레데루나의 친정 고모가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링겔하임의 마틸다였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영지를 노리던 하인리히 1세나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루나는 딸만 6명을 낳고 917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아들을 원했던 단순왕 샤를은 919년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재혼하였다.
이시기에 들어서 서프랑크의 주교들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많은 주교들이 왕의 허락을 받아 지역 백작의 권력을 장악했다.예를 들어, 샬롱쉬르마르네에서는 주교가 마을 주변 20km의 땅을 지배했고 랭스 대주교는 쿠르빌, 코르미시, 베테네빌, 셉트사울스,샤우무지의 다섯 개의 요새로 그의 영토를 정했다.많은 프랑스 주교들은 대개 그들의 자리 주위에 작은 영토가 있는 귀족 작위을 가지게 되었다.
911년 9월 24일 동프랑크의 유아왕 루트비히가 18세로 죽자, 11월 21일 샤를은 자신이 루트비히의 친척임을 내세워 동프랑크와 로트링겐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샤를을 지지했고 그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외손자였던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추대했다. 유아왕 루트비히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츠벤티볼트에게는 어린 딸들만이 있었다. 그러자 샤를 르 생쁠은 자신이 유아왕 루트비히의 가까운 친척이자, 정당한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동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받드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이 발생했고, 로트링겐의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 1세는 콘라트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샤를 3세의 지지를 선언, 샤를을 왕으로 받들었다.
그는 로트링겐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으므로, 프레데루나의 부모인 이멘티가르와 라그네힐드, 로트링겐의 귀족으로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사위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을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해 사실상 로트링겐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레니에 1세는 마스(Maasgau) 백작 기셀베르트와 황제 로타르 1세의 딸 이멘가르드의 아들이었고, 레니에 1세의 부인 에시나다(Hersinda)는 샤를 르 생쁠의 할아버지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서녀였다. 그럼에도 샤를은 로트링겐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다. 레니에 1세는 로트링겐의 귀족들과 폭동을 일으켜 츠벤티볼트를 몰아냈기에, 샤를 3세는 레니에 1세를 불신하였다. 레니에 1세는 자신이 사망하는 916년까지 로트링겐의 공작이자 섭정으로 대신 로렌을 통치하였다.
909년 샤를은 자신의 누이인 서프랑크의 이르멘가르트와 이브레아의 베르너(Werner)의 딸 쿠니군데를 로트링겐의 귀족, 로트링겐의 비게리히(Wigeric of Lotharingia)와 결혼시켰다.
911년의 바이킹 그룹이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여 루앙을 차지했다.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 족은 바로 파리와 샤르트르를 점령했다. 샤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패배했고, 8월 26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겨우 승리하였다. 911년말 샤를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같은해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두스 1세 대신 샤를을 왕으로 받들겠다 하여 로타링기아도 복속시켰다.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은 나중에 노르망디 공국으로 불리게 된 지역을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롤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샤를의 봉신이 되었다. 조약 체결을 전후해서 로베르 1세는 막후에서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이 체결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미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의 딸 아델라와 결혼했으나 상처한 롤로에게 자신의 누이 서프랑크의 기셀라와 결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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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샤를이 로렌 지역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자 귀족들은 반발했다. 918년부터 그의 지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안 독일의 하인리히 1세 등은 서프랑크의 변경을 침략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했다. 919년 8월 잉글랜드에 결혼 동맹을 제의, 그해 8월 17일 브리튼 섬의 웨식스 왕국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결혼하였다. 한편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총애했고, 그 중에서도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 하가노(Hagano)를 중용하였다.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분개했다. 로트링겐 내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조카사위가 되는 비게리히,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인 하가노 등 소수만이 그를 지지했고,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공작의 사후, 로트링겐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소극적 지지로 돌아선 귀족들이 나타났다.
919년 로트링겐에서 샤를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하였다. 920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독일 왕국을 침공하였으나 보름스 근처 페데르스하임에서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920년 샤를의 로트링겐 집중 및 하가노 편애에 반발하여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랭스 대주교 헤르베우스(Herveus)의 중재로 곧 진압되었다. 921년 7월 11일 샤를 3세는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와 로렌에서 만나 우정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922년 샤를 3세는 자신의 배다른 고모인 로틸드의 세실수도원장 직을 박탈했다. 대머리 카를과 오툉의 리첼다의 딸이었던 로틸드는 우르수스 공작의 미망인이자 895년 마이네 백작 로저 드 마이네와 결혼했다가 과부가 되었다. 또한 그녀의 딸들 중 이름이 전하지 않는 딸은 후일 위그 르 그랑과 결혼했다 한다. 샤를은 로틸드에게서 빼앗은 세실수도원을 로트링겐 출신 총신 하가논에게 제공한다.
922년 로렌에 침입한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를 상대하여 겨우 이기고 화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그는 로타링기아의 군사와 병력에 주로 의존하였다. 샤를이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소외시키자 920년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를 왕으로 뽑았다. 900년대 이후 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 풀크는 그해 7월 2일에 사망하였다. 샤를은 로트링겐으로 피신하였다. 샤를은 랭스나 라온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그는 로트링겐을 선택했다.
922년 6월 29일 귀족들은 로베르 1세를 왕으로 선출하고 6월 30일 랭스 대주교 고티에(Gautier)의 주관하에 랭스 대성당에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로베르 1세는 군사를 이끌고 로트링겐과 전쟁, 아들 위그 르 그랑을 쉐브르몽(Chèvremont) 성으로 보냈다. 샤를은 기셀베르트 등과 함께 로베르 군을 대적했다.
922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샤를 르 생쁠은 바이킹 군대의 지원하에 서프랑크로 되돌아왔다. 923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뫼즈, 아팅기에,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싸웠으나, 6월 15일 수아송 전투 (923년)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수아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객을 보내 로베르 1세를 죽였지만, 플랑드르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해 7월 플랑드르성에 미리 숨어있던 로베르 1세의 처남이자 사위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 로베르 1세의 사위였던 부르고뉴의 라울이 새로 왕이 되었다. 샤를 3세의 아내 에드지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샤를마뉴의 차남 피피노 카를로만의 손자 상리스의 피핀 2세의 후손으로, 샤를마뉴의 여섯째 아들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인 샤를 3세에게는 같은 가문의 먼 친척이 되었지만, 818년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가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에 의해 두눈이 뽑히고 장님이 되어 병을 얻어 죽은 일 이후,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사로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923년 7월 13일 상스의 대주교 발터에 의해 수아송 생메다드 수도원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왕관을 수여받았다. 라울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동생 위그에게 부르고뉴 공작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순왕 샤를은 아직 죽지 않고 계속 자신의 왕위를 주장했는데, 라울의 동서인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2세는 계략을 써서 샤를을 만나 그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겠다고 한 뒤, 감금시켜버렸다.
그러나 국왕 선거에 대한 내용을 접하지 못한 프랑스 남부의 귀족들은 샤를 3세 단순왕의 복위를 요구하며, 라울의 서프랑크 왕 선출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키텐공작 기욤 2세는 라울에 반기를 들고, 왕위를 요구하였는데 기욤 2세의 외할아버지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이었고, 외할아버지 베르나르 플랑타뷜리의 할머니는 카를 마르텔의 딸 알다(Alda)였다. 이때 마자르족도 국경을 넘어 상파뉴 일대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감행했다. 라울은 먼저 마자르 족 군사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라울은 왕위에 오르자 마자 로타링기아를 병합하려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와 맞써 싸웠고, 평화협상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925년 다시 라울의 서프랑크 군을 공격하여 결국 로타링기아는 완전히 독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24년 초 라울은 루아르 강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 베리(Berry)와 마콘(Macon), 부르제(Bourges)를 공략한 뒤 아키텐 공 기욤 2세를 설득, 다시는 왕위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베리, 마콘 등을 되돌려 주었다.
당시 왕국은 마자르족 외에도 바이킹족의 새로운 침공이 있었는데, 924년 침략때까지만 해도 라울은 처음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다가 바이킹족이 왕위를 위협하자 부르고뉴에서 거병하였다. 또한 라울은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한편 라울은 프로방스의 군주인 맹인왕 루트비히 3세에게 사람을 보내, 이주해온 마자르 족 등을 처리하라고 계속 강요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샤를 3세를 사로잡아서 데리고 있는 것을 근거로, 외조카사위이자 동서인 라울에게 이런 저런 이권을 요구하였다. 헤르베르트는 샤를을 라울과의 협상 수단으로 이용했다. 라울은 비록 죄수복을 입은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샤를 3세 생쁠을 만나자 그에게 칼을 바치며 군주로 예우하였다. 한편 군주를 납치하고 감금하면서 이런저런 이권을 요구하는 헤르베르트 2세에게 염증을 느낀 라울은 그를 의도적으로 멀리하였다.
925년 해안가로 침입한 노르만족이 루아르강변을 거쳐 부르군트(현, 부르고뉴)까지 올라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노르만을 격파, 국경 밖으로 쫓아냈다.
926년 레온의 백작 로저 1세(Roger I de Laon)가 사망하자 헤르베르트 2세가 레온백작직을 자신의 아들 외드에게 줄 것을 요구했지만 라울은 이를 거절, 반대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감금된 샤를 3세 생쁠을 위협하면서 라울에게 레온을 요구하였고, 레온 시내를 점령했지만 라울은 거절했다. 927년까지 레온 백작직을 요구하는 헤르베르트 2세의 요구를 거절하며 갈등하였다.
927년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생 캉탱에, 929년에는 페로네에 요새를 건설하자, 라울은 그를 경계하였다. 928년 헤르베르트가 아미앵에 성곽을 수축하자, 931년 아미앵을 압수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는 아미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의 아들 위그가 잠시 아미앵 백작직을 얻게 된다. 927년 헤르베르트가 라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927년 헤르베르트 2세가 라울에게 자신이 샤를 3세 생쁠를 데리고 있는 것을 들어, 레온 지역을 요구했지만 라울은 이를 거절했다. 헤르베르트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힘을 빌어 라울 왕에게 다시 레온을 요구하여 929년에 확보한다.
928년에는 매제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에게 랑을 양도해야 했는데 카롤링거 왕조 출신인 에르베르는 처음에는 라울을 지지하는 귀족이었지만 단순왕 샤를을 자신의 수중에 두고 그를 이용해 라울을 협박했다. 그러나 929년 단순왕 샤를이 죽고 헤르베르트 2세에게 라울을 반대할 도구가 없어지자 라울은 반격에 나섰고 여러 귀족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930년 노르만족은 맹인왕 루트비히 3세와 라울을 위협했다. 마자르 족은 이때 랭스 주변을 침공했지만 935년에 가서야 라울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 족을 격퇴하였다. 이후 그의 죽음까지 1년여 정도, 서프랑크 왕국은 마자르 족과 노르만 족의 침입 없는 평화를 구가하였다.
931년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르 그랑의 도움을 얻어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를 공격, 랭스까지 진격하였으며 이때 헤르베르트에게 양도했던 영지들을 모두 몰수하였다. 만년에 라울은 피부병에 오래 시달렸다. 933년과 934년에 걸쳐 그는 헤르베르트 2세의 세력을 꺾기 위해 랭스로 쳐들어가 헤르베르트 2세가 단순왕 샤를 르 생쁠을 감금했던 요새를 불태우고 935년 헤르베르트 2세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라울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헤르베르트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샤토 티에리 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라울은 갑자기 다른 병에 걸렸고 1월 14일 또는 1월 15일에 곧 죽고 말았다.
라울이 죽자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923년 잉글랜드로 도망친 샤를 3세의 아들 루이 4세를 웅립했다. 플로도하르트에 의하면 네우스트리아 후작 위그 르 그랑은 일단 루이의 귀국을 주선하였는데, 후일 루이와 그의 아들 로테르 3세의 주요 정적이 된다. 잉글랜드의 군주 애설스탠은 서프랑크에서 온 사절단들에게 루이에 대한 충성을 요구, 확약받은 뒤 루이와 어머니 에드지푸의 귀국을 허용하고, 일부 영국 가톨릭 주교들과 몇몇 종들을 딸려보냈다.
루이는 그해 6월 19일 영국에서 배편으로 서프랑크 서북부 불로뉴 해변에 도착했다. 곧 노르망디를 거쳐 돌아와 랑에서 랭스 대주교 아르탕에게 왕관을 받고 서프랑크의 국왕이 되었다. 아르탕 대주교는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그의 즉위과정이나 즉위식 장면에 대해 전해지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즉위 초기 루이의 주권이 미치는 곳은 랑과 일부 북 프랑스 지방 뿐이었으며 루이 4세는 평생을 자신의 최대의 적인 파리의 백작 대 위그(위그 르 그랑)와의 권력 투쟁으로 보냈다.
즉위 초기 루이 4세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루이 4세는 아버지 샤를 3세의 개인 영지는 다른 귀족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왕국내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루이 4세는 귀족들의 이권 요구에 반대하는 한편, 부왕 단순왕 샤를과 같은 취급을 당할까봐 염려했다. 위그 르 그랑은 그를 뒤에서 조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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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엽 서프랑크 왕국의 왕령지[17]
936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해 6월 19일 레온에서 랭스 대주교 아르탕에게 왕관을 받고 왕이 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지지파였던 대주교 아르탕은 파리 백작 위그에게 대항하는 루이의 중요한 후견인이 되었다. 스스로 프랑크 공작에 취임한 위그 르 그랑은 전임 왕 라울의 처남이기도 했다. 위그는 서프랑크 왕국의 실권자로 활동했고, 위그는 자신이 즉위하는 대신 루이 4세를 추대했다. 그러나 루이 4세는 위그 르 그랑이 원하던 꼭두각시 군주가 아니었다. 위그 르 그랑은 그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지만, 루이가 순순히 듣지 않자 압력을 행사하려 했고, 루이는 위그 르 그랑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리를 떠나 랑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또한 왕권 대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는 지방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그는 왕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위그 르 그랑이 결혼 11년만에 본처 유디트가 죽자, 루이의 어머니 에드지푸는 위그 르 그랑에 대한 베르망두아백작가문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자신의 앵글로 색슨 친정에 부탁하여 자신의 여동생 이딜하이트(Eadhild)를 위그 르 그랑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딜하이트는 얼마 뒤 자녀 없이 사망하고 만다.
루이는 독일의 하인리히 1세의 딸이자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인 게르베르가와 결혼, 정략 결혼을 통해 독일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루이 4세는 오토 1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을까 우려, 반발했다. 그러나 위그 르 그랑 역시 이딜하이트가 죽자 936년에서 938년 무렵 하인리히 1세의 딸 작센의 헤드비가와 결혼하였다.
939년 루이는 노르망디 지역을 압수하였다. 그러자, 롤로의 아들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기욤 1세는 파리 백작 위그 르 그랑,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 등과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에서 루이 4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 4세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한 끝에, 교황 스테파노 8세의 중재로 휴전하게 되었다. 보다못한 교황 스테파노 8세가 개입하여 바티칸 특사들을 파리로 파견, 서프랑크의 귀족들에게 루이 4세를 국왕으로 인정할 것, 루이 4세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은 교황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보고 누구든지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위그 르 그랑,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일단 위축되거나 슬슬 지지를 철회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의 특사들의 칙령에 복종하는 척 했지만, 위그, 헤르베르트 2세를 지지하던 프랑크인 사제들은 일시에 지지를 모두 철회하였다. 940년 루이는 다시 기욤 1세에게 노르망디 공작령을 되돌려줘야 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헤르베르트에게 아들인 베르망두아의 위그에게 랭스의 대주교 자리를 제안하고, 루이 4세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교황 스테파노 8세는 바티칸 특사를 다시 보낼때 서프랑크 지역을 관할하는 대주교의 상징과 팔리움을 딸려서 파리로 보내 서프랑크 귀족들에게 루이 4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약속받았다.
루이 4세는 아버지 단순왕 샤를이 통치했던 로타링기아(현, 로렌)을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내심 동프랑크 왕국에 대한 수복 의지를 드러냈다. 939년 로타링기아의 일부 귀족들은 루이 4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루이는 곧 군사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로 갔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와 로타링기아 지방의 영유권 문제로 분쟁이 있었는데, 루이를 지지한 귀족 중의 한 명인 기셀베르트는 그해 10월 2일 안더나흐 전투 (939년 10월)에서 패하고 라인강에서 익사했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의 적인 위그 백작에게 군대를 제공하여 랭스를 침략, 941년 루이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942년에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시에 루이 4세는 이때 로타링기아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다.
얼마 뒤 루이는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의 여동생인 게르베르가와 결혼했는데, 루이를 견제하려는 오토 1세의 의도였다는 설과, 오토의 동의 없는 결혼이었다는 설이 있다. 940년 위그와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2세가 랭스를 점령하고 말머리를 돌려 레온으로 진격하자 도피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레온을 지켰다. 루이가 로렌 지역을 수복하려는 것을 간파한 동프랑크의 오토 1세는 그가 이전에 로렌 지역 문제에 간섭했다는 이유를 들어 위그 르 그랑과 헤르베르트 2세를 지원하는 군대를 보냈다. 위그와 헤르베르트 2세는 루이의 군대를 완벽하게 격파하였다.
942년 11월 뫼즈에 있는 비즈에서 오토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934년 위그의 주요 지지자였던 헤르베르트가 죽은 뒤 위그와도 화해했다. 943년 2월 23일에는 베르망두아의 헤르베르트 2세를 체포하여 생 캉탱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아버지 단순왕 샤를 르 생쁠을 투옥하고 왕위를 로베르티엥 가문으로 넘긴 데 대한 보복이었다.
루이 4세는 위그를 경계했고 945년 루이는 노르망디를 차지하려다가 도리어 노르망디와 헤르베르티언 가문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다. 그는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져 1년 동안 파리의 감옥에 투옥당했다. 그러나 루이는 아내 게르베르가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토 1세는 군사를 보내 서프랑크 왕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루이 4세를 풀어주게 했다. 독일의 군주로 서프랑크에 대한 권한이 없었지만 오토 3세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전체 유럽의 황제라는 명분으로 각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이후 교황청이 개입했고, 서프랑크 왕국의 국내 여론도 국왕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강해지면서 루이는 풀려나게 되었다. 위그는 루이 4세의 석방을 거부하다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파문당하고 결국 루이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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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난 루이는 곧 오토 1세에게 군사를 빌려 946년 랭스를 되찾았으며 949년에는 레온 지역을 다시 손에 넣었다. 948년 오토 1세는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과의 갈등을 중재할 목적으로 잉겔하임(잉겔하임암라인)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잉겔하임 회의에서는 왕권은 신성 불가침으로 선언되고 이를 어긴 위그 르 그랑은 이를 어겼다며 파문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위그 르 그랑은 파문에 개의치 않았고 루이 4세의 영지였던 수아송 지역을 약탈하였으며, 동프랑크가 점유하던 로렌 지역까지 쳐들어가 약탈하였다. 오토 1세는 루이 4세를 지원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북동부 지역에서의 루이의 영향력을 키워주었다. 이후 위그와 계속 갈등관계에 있었지만 951년 동,서 프랑크의 종교회의와 교황에 의해 위그는 파문당했다. 위그는 곧 루이 4세와 다시 휴전 겸 화해를 청했다.
950년 초 왕비 게르베르가는 갑작스러운 종말에 대한 불안에 빠져, 몽티에르의 수도자 아드소(Adso)를 초빙하여 그의 자문을 받게 했다. 950년 오토 1세의 중재로 위그 르 그랑과 일단 화해하였다.
954년 라온에서 랭스로 갔고, 그해 9월 10일 랭스 부근에서 승마 사냥중 늑대 무리를 보고 도피하던 중 갑자기 낙마하여 죽었고, 제위는 아들 로테르에게 돌아갔다. 뒤를 이은 아들 로테르 또한 마찬가지로 위그 드 그랑을 비롯한 로베르 가문과 왕좌의 게임을 하면서 로트링겐의 회복을 위해 독일 왕국과 전쟁을 이어나갔다.
954년 11월 랭스의 생 레미 바실리카에서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960년까지 파리 백작 공작 위그의 섭정으로 보호를 받았다. 귀족들은 대 위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 게르베르가의 민첩한 움직임으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테르는 아버지의 정적인 대 위그의 영향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던 외삼촌 브루노 등과 비밀리에 연락했다. 아버지 루이 4세가 죽자 로테르는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독일의 친정에 급히 연락하였고,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기 전에 외삼촌인 오토 1세, 쾰른의 대주교 브루노, 이모이자 대 위그의 부인인 작센의 헤드비가의 개입하에 그해 11월 12일 랭스 대성당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대 위그를 지지하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그의 정적이나 다를바 없었고, 베르망두아의 백작 아달베르트 1세 역시 로테르를 위협하는 적이었다. 로테르는 즉위 직후 독일의 외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브루노 3세 대주교는 그해 11월 12일 로테르가 즉위할 때부터 962년까지 그의 후견인을 맡았다.
아버지의 정적인 대 위그는 그의 이모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대 위그의 가신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오토 하인리히와 아키텐 공작 윌리엄 3세의 공작직위와 공작령 박탈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955년 아키텐 공작 윌리엄 3세의 아키텐 공작직 박탈을 놓고 대 위그와 갈등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편 로타르는 자신의 동생 로렌의 샤를에게 아무런 직위도 부여하지 않은 채 농장에서 살게 했다.
955년 위그와 로테르는 푸아티에를 손에 넣었으나 위그는 곧 죽었고, 그는 카를 마르텔을 기념하여 푸아티에를 성역화하였다. 그뒤 로테르는 위그의 아들 위그 카페와 동생 오토-앙리의 사이를 중재했다. 위그 형제의 갈등으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는 자신의 후견인으로 독일에 있던 외삼촌 브루노를 서프랑크로 초빙했다. 956년부터 로테르는 외삼촌이자 오토 1세의 형제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의 보호아래 있었다. 한편 또다른 외삼촌 오토 1세는 로테르와 대 위그를 적당히 균형, 조절하여 서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대 위그 및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가문에 앙심을 품어온 헤르베르티언 왕가를 견제할 목적으로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를 프랑스에 머무르게 하고 싶어하였다. 당시 파리백작이던 대 위그는 프랑크 공작이라는 직책으로 국정에 개입했고, 로테르는 대주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외삼촌 브루노 대주교에게도 특별히 프랑크 공작(duc des Francs)이라는 작위를 부여하였다.
956년 대 위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위그 카페가 15세의 나이에 파리 백작직과 함께 프랑크 공작직 및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위그 카페가 아버지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과 네우스트리아 변경백령의 봉신들을 즉각 독립시킬 것을 요구되었고, 결국 이 요구는 들어지면서 네우스트리아는 앙주 백작령, 베르망두아 백작령, 블루아 백작령으로 사실상 분할되었으며, 귀그 카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름뿐인 네우스트리아 변경백과 파리 등의 일부 도시들이나 마을밖에 없게 되었다.
965년 10월 11일 후견인이자 보호자인 외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랭스 대성당에서 죽고, 969년 5월 5일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사망하자 그는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수립한다. 973년 또다른 외삼촌인 오토 1세가 죽자 로테르는 오토와의 정치, 군사 동맹 계획을 파기하고 독일 진출을 계획한다. 이는 로테르의 선왕인 루이 4세와 샤를 3세의 동방 진출 정책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한편 그는 아들 루이 5세를 969년 아키텐 백작 미망인인 아키텐의 윌렘 3세의 딸 아키텐의 아들라이데와 결혼시키고, 아키텐의 왕이라는 작위를 부여하였다.
962년부터 로테르는 플랑드르 지방을 복속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 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간 로타링기아를 다시 복속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965년 플랑드르의 백작이던 아르눌프 1세는 아들 보두앵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를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영지를 로테르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아르눌프 1세의 손자 아르눌프 2세는 로테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로테르의 보호자 브루노가 죽자 로테르는 독일에 대항하였고 978년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을 침공했다. 바로 뫼즈 강에서 오토를 패퇴시키고 아헨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오토 2세를 거의 붙잡을 뻔하였다. 오토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거의 파리까지 진격하였고 도중에 수아송, 랭스 등을 유린했다. 그러나 위그 카페등 강력한 귀족들이 로테르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결국 퇴각하고 980년 7월 오토와 로테르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977년 로테르는 자신의 아내 이탈리아의 엠마와 라온의 대주교 아달베론(Adalberon)이 간통했다고 주장, 생 메르크(Sainte-Macre)의 법정에 회부한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린다.
978년 그는 아헨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진격했다. 오토 2세는 임신중이던 아내 테오파노와 함께 황급히 쾰른으로 도주했다. 로테르는 오토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아헨 점령을 확인했으나 통치를 위해 다시 자기 영토인 서프랑크로 돌아와야 했다. 퇴각하기 전 로테르는 아헨의 제국 궁전을 약탈, 파괴하였다. 후에 외사촌 오토 2세는 그의 동생 하로트링겐 공작 샤를과 로테르의 갈등을 유도하여 혼란을 부추겼으나 실패했다. 이탈리아의 왕 로타르 3세와 아델라이드의 딸 엠므와 결혼하여 아들 루이 5세를 얻었다. 한편 오토 2세는 서프랑크의 영토를 쪼개어 로테르의 동생 샤를 또는 로테르의 서자 아르눌프를 분리한 부분의 왕으로 임명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로테르는 979년 6월 8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자신의 아들인 루이 5세를 축성하고 공동 통치자로 선언하였다. 오토는 978년 10월 파리를 침공했고, 로테르는 도피했다. 바로 오토는 그의 동생 샤를을 프랑크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위그 카페의 군사력에 의지해 복위할 수 있었다.
오토 2세는 로렌을 둘로 나누어 북쪽의 하 로렌의 공작으로 그의 동생 샤를을 임명한다. 983년 12월 7일 오토 2세가 죽고 어린 오토 3세가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에게 납치되었다가 독일왕으로 즉위하자, 로테르는 이를 기회삼아 독일을 침공, 984년 베르덩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베르덩 공작 고드프리와 상 로렌의 공작 디트리히 1세는 오토 3세를 지지했고, 그는 베르덩을 다시 반환해야 했다. 그러나 985년 3월 다시 베르덩을 침공하고 고드프리와 디트리히를 사로잡는다. 그는 동부 로렌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 군사작전을 펼치던 중 병을 얻게 된다.
984년 다시 독일을 공략, 어린 오토 3세를 사로잡았으나, 오토 3세는 테오파노 황후와 마인츠의 성 빌리지스(Willigis) 대주교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985년에는 코르도바의 칼리프 알-만수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베르덩에서 위그 카페의 측근인 몽 백작이자 안트워프 후작 프리드리히의 기습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986년 초 랭스 대주교와 리에 대주교의 도움을 얻어 캉브레를 진격하여 획득하였다.
977년 로테르의 동생인 하로렌 공작 샤를은 왕비 엠므가 라온의 주교 아스셀린(Ascelin)과 간통했다며 고소하였다. 생 마스레의 종교 회의에 회부된 왕비 엠므는 무죄를 주장했고, 재판 결과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왕비 엠므의 무죄를 선언했다. 즉시 하로렌 공작 샤를은 독일로 도주하였다.
978년 6월 로테르는 아들 루이 5세를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선포하였다. 공동 국왕으로 지명하여 자신이 죽었을 때, 무리없이 단독 국왕으로써 통치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한편 로테르는 로트링겐(로렌)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동시에 독일로의 진출을 계획하던 중 과로로 병을 얻었다. 오토 2세가 죽자 그는 오토 3세의 후견인 중 한사람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로테르는 로트링겐 회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986년 2월경부터 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986년 3월 2일에 로테르는 라온에서 갑자기 죽었고 왕위는 아들 루이에게 돌아갔다. 그의 왕비인 엠므는 로테르가 라온의 주교 아스셀린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986년 즉위한 루이 5세는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는 혼자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어머니 엠마와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6촌인 오토 3세와 친교를 맺으라고 충고했으나, 루이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해 11월 2일 어머니 엠마도 사망했다. 랭스의 대주교 아달베롱은 오토가문과 루이를 화해하려 노력했지만 루이는 듣지 않았고, 오히려 아달베롱은 반역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하려고 했다.
987년 5월 루이 5세는 주교 아달베롱의 반역죄를 추궁하려는 재판을 하려는 중에 승마를 하다, 상리스 근처 오이세의 알라떼 숲에서 말에서 떨어져 낙마 사고로 죽었다. 친동생인 랭스 백작 외드는 그보다 앞서 986년에 먼저 사망했다.
루이 자신에게는 적법한 후계가 없었고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중에는 하 로렌로타링기아의 공작 샤를, 루이의 서제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샤를이 당시 여러 가지 점들에서 서프랑키아 귀족들의 불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977년 무고한 왕비를 간통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동프랑키아의 오토 2세와 협력하여 선왕인 로테르의 왕권을 위협하고 왕위 찬탈을 꾀하기도 했다.이러한 이유로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7.2. 카페 왕조

서프랑크의 여러 제후들과 주교들의 의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루이 5세의 뒤를 이어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해 카페 왕조를 세우게 되지만 이 일들을 계기로 서프랑크의 왕권이 약해지는 결과로 입증되고 말았다. 귀족들 중 한명을 대표자로서 선출된 것인 만큼 귀족들을 대상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데에 제약이 생겼기고 만다. 위그 카페는 즉위하자마자 아들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왕위계승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프랑키아 오토 가문의 측근이었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한 가문에 의한 왕위 독점을 막고 대귀족들이 번갈아서 즉위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카페 가문만의 왕위계승을 보장해 주는 로베르의 축성식을 거부했다. 이에 위그 카페는 이슬람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카탈루냐 백작 보렐 2세가 군사원조 요청을 해온 사실을 들어 자신이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 자신을 대체할 왕위계승자가 필요하다고 아달베롱을 설득해야 했다.
또한 로테르의 동생인 저지대 로타링기아 공작 샤를 또한 위그에게 있어서 위험한 정적이었다. 샤를은 자신이 서프랑키아(프랑스)의 정당한 왕위계승자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동부 지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위그 카페는 989년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사망하자 랭스 대주교에 로테르의 서자인 아르눌을 임명하여 카롤링거 왕조에 대한 이 지역의 민심을 달래보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눌은 결국 같은 가문 출신인 샤를과 협력해 나갔다. 하지만 반대로 샤를에 의해 랑(Laon) 시에서 쫓겨난 랑 주교 아달베롱은 샤를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위그 카페를 지지하였다.
또한 베르망두아 백작 아달베르트 1세 또한 부계쪽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일원이었기에 다른 귀족들의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위그 카페는 로베르 1세의 손자로, 아달베르토의 어머니 아델라의 친정 조카였지만 그는 위그 카페에게 저항하였다. 그는 위그 카페의 즉위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비토했지만, 987년 7월 3일 위그 카페는 누아용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달베르트는 위그 카페를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였다. 위그 카페는 그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아달베르트는 두도 드 생캉탱(Dudo of Saint-Quentin)을 노르망디로 보내 노르망디의 리샤르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위그 카페는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계속 의심했다.
서프랑크의 왕위를 요구하던 하 로렌의 공작 샤를은 아달베르트 및 아달베르트의 두 명의 조카인 뫼욱스 백작 헤르베르트 3세와 블루아백작 오도 1세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991년 샤를이 위그 카페에 의해 투옥된 뒤에도 위그 카페를 반대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987년 988년 9월 8일에 죽었다.
991년 그는 위그 카페와의 화해를 주선한다는 거짓 약조로 샤를과 아르눌을 안심시킨 다음 이들이 자고 있는 동안 납치하여 위그 카페에게 보냈다. 결국 샤를은 오를레앙의 감옥에서 사망했고 아르눌은 랭스 대주교에서 파직당했다. 이로써 위그 카페의 왕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던 카롤링거 가문 일파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러나 권모술수로 카롤링거 가문 일파를 제거한 탓에 지지하던 영주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다.특히 이 당시 교회에서는 989년의 샤루 공의회를 기점으로 사회적인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 ‘신의 평화운동’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던 남부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아달베롱과 위그 카페의 권위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거부감은 샤를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왕의 모습에 위그 카페의 계략과 술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과정에 위그는 교황청과도 충돌하고 만다. 991년에 한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랭스 대주교 아르눌프의 사임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요한 15세의 개입은 처음에는 아무런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이 사건은 훗날 서임권 투쟁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교황들과 프랑스 군주들 간의 갈등의 전초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프랑스 국왕 위그 카페는 자신의 최대 적수(로렌의 샤를)의 조카였음에도 아르눌프를 988년 랭스의 대교구장 주교로 서임하도록 하였다. 이후 샤를은 랭스를 함락하고 아르눌프 대주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위그는 요한 15세에게 그를 대교구장직에서 파면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요한 15세로부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위그 카페는 서둘러 샤를과 아르눌프를 사로잡아 991년 소집된 랭스 시노드에서 아르눌프를 대교구장직에서 파면시키고 후임자로 제르베르 드 오리야크를 추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제르베르 드 오리야크는 훗날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되는 인물이다.
시노드에서 오를레앙 교구장 아르눌프 주교는 요한 15세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였다.
거룩한 아버지들인 우리가 겸손한 사제품 후보자들의 생활과 윤리, 성과를 면밀히 살펴볼 의무가 있을진데, 하물며 모든 사제의 주인이자 우두머리이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그 직무에 적합한지 우리가 더욱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를 위한 모든 미덕이 지극히 부족하고, 성직품 가운데 가장 낮은 품을 받기에도 미흡한 사람이 가장 높은 성직에 오른다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줏빛과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성전에 앉아 스스로를 하느님처럼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출처]
랭스 시노드는 제2차 회의에서 칙령이 비준되어 발표되었지만, 로마로부터 거부당했다. 요한 15세는 랭스 대주교의 파면 사건을 다시 심의하기 위해 프랑스 주교들에게 프랑스 국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시노드를 프랑스 밖 영토인 아헨에서 다시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프랑스 주교들이 이를 거부하자, 요한 15세는 그들에게 즉시 로마로 출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프랑스 주교들은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 위험하고, 로마의 치안도 불안정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이후 요한 15세는 교황 특사를 통해 프랑스와 독일의 주교들에게 무송에서 시노드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시노드 소집 당일 무송에는 독일의 주교들만 참석하고, 프랑스의 주교들은 위그 카페와 그의 아들 로베르의 반대로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 특사의 노력으로 아르눌프의 파면은 최종적으로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996년 10월 23일에 위그 카페가 죽고 난 후에 아르눌프는 감금 상태에서 풀려나서 곧 자신의 모든 지위를 회복하였다. 제르베르는 랭스 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나 마그데부르크 궁정으로 가서 오토 3세 황제의 개인 지도 교사로 임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세갈레로 찢어진 후 각각의 프랑크 왕국들은 왕권의 약화와 함께 지방분권화되어 갔으며 서프랑크 왕령지 또한 현재의 일드 프랑스를 중심으로 월경지 수준으로 산개되어 있었다. 위그 카페의 부친인 위그 대공의 경우 그나마 네우스트리아의 마그레이브 직함으로 911년 노르만족의 롤로가 봉신으로 받고 나눠진 노르망디 공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위그 카페에 대한 신뢰가 없어져 각각 따로 놀기 시작했고, 위그 카페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왕령지의 규모는 매우 보잘 것 없었다. 다른 백작령과 공작령은 통합된 거대 영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 왕령지는 베르망두아와 블루아 백작령 들 내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었다.관련 이미지
이는 왕으로서 위그 카페의 권력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위그 공작 시절의 로베르 가문은 카롤링거 왕가를 견제할 정도로 강했으나 사실 왕국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물론 위그 공작의 권력 또한 직접적인 영토 장악이 아닌 귀족들의 수장으로서 다른 제후들을 이끄는 지도적 영향력에 불과했다. 로베르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자 위그 대공의 우려대로 로베르 가문은 제후의 수장으로 자처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만큼 세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백작령과 공작령들도 북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보다 작은 단위의 영지들로 분할되어 대제후들의 종신들에게 배분되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질서 있는 무정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봉건주의(feudalism) 정치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토지와 인민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종신들이 군사력의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주군들은 이 종신들을 최대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종신들과 쌍무적 계약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이는 프랑스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다른 대제후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대제후들의 통치에 개입할 수 없었고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통치 영역은 자신의 왕령지에만 국한되었다.
대제후들의 입장에서 위그 카페의 왕위는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찬탈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이들에게 왕이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하는 미약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제 다른 대제후들이 제2의 로베르 가문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위그 카페는 이들의 무력 투쟁에 대해 어떠한 중재나 개입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왕권이 약하다 보니, 라마르슈 백작 보송 1세[19]와 말다툼을 벌이다 제대로 뒷목 잡을 뻔 한 일화도 있었다. 참다 못한 위그 카페가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 줬더냐!
라고 호통을 쳤더니, 라마르슈 백작 왈,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왕위에 앉혔소?
이런 상황에서 위그 카페 또한 손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상술한대로 그는 자신의 아들 로베르 2세의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왕위계승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그를 공동왕으로 내세우는 꼼수를 동원하는 등 지방의 제후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했다. 그 일환으로 988년 아들의 결혼 상대를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2세의 딸 로잘라로 택했다.
하지만 로잘라는 이미 플랑드르 백작 아르눌 2세와 결혼하여 987년에 사별한 여인으로 로베르 2세보다 무려 17살이나 연상이었다. 물론 이 결혼은 로잘라가 지참금으로 가져올 영지들을 확보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당연히 왕령지 팽창에 기여했다. 하지만 로베르 2세에게 로잘라와의 결혼 생활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나마 한때 네우스트리아의 마그레이브 시절 봉신이었던 앙주 백작 폴크 3세만큼은 그에게 절대적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고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는 위그 카페의 누이인 엠마와 혼인한 상태였기에 위그 카페의 우군이었다.. 또한 그의 왕비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는 남다른 정치 감각을 갖고 있었기에 위그는 왕비를 정치적 동반자로 삼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했고,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섭정을 하고있는 테오파누황후와 협상을 맺는등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며 위그 카페가 지원했다.
993년 블루아 백작 외드 1세는 위그 카페로부터 프랑스 공작직을 받는 것이 실패하자 한때 위그 카페의 동맹이지만 이제는 정적으로 돌아선 랑의 주교 아달베롱의 지원을 받고 위그와 로베르를 독일왕 오토 3세에게 넘기고, 아르눌프의 아들 루이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이 사건과 연관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카페 왕조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줬다. 다만 위그가 계속 왕위에 있는 것과 함께 공동왕이란 안정장치로 아들인 로베르의 왕위 세습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을 볼 때 그의 정적들이 위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능한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공식적인 처벌은 업다는 것이지 995년을 기점으로 블루아와 동맹 관계였던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세력권이 약화되고, 대신 카페 왕가의 세력권이 강화되면서 직할지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직활지 주변에 있던 블루아와 베르망두아의 세력 하에 있던 봉지들이 왕실령에 편입되었다.관련 지도[주의] 이러한 왕령지의 확대로 위그 카페는 말년에나마 봉신들간의 다툼을 힘으로 중제할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996년 위그 카페가 사망하자 로베르 2세가 서프랑크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단독 왕이 되기 전 로베르 2세는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왕국 내 종교 세력이 부과하는 상징 권력을 보다 철저하게 확보하고자 했다. 위그 카페와 로베르 2세는 준성직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세속인과 일반 성직자들을 중재하는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려고 했다. 또 자신들의 정책을 교회의 가르침이나 요구에 최대한 부합시키면서 성직자들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특히 로베르 2세는 라틴어를 습득하여 음악과 철학책에 몰두하고 누구든 용서하는 성직자적인 태도를 지닌데다가 궁정을 수도원처럼 만들었기에 그에게는 ‘경건왕’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별칭과는 반대로 로베르 2세는 왕비 로잘라와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로잘라는 로베르 2세와의 사이에서 어떤 자식도 출산하지 못했다. 결국 로베르 2세는 996년 위그 카페의 사망 이후 로잘라와 이혼하고 블루아 백작 외드의 미망인인 베르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베르트는 부르고뉴 왕국의 왕 콘라드 3세와 루이 4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었다. 마틸다의 어머니는 다시 동프랑키아 왕 하인리히 1세의 큰딸 제르베르주(게르베르가)였는데 그녀는 바로 로베르 2세의 할머니 에드비주(하드비히)와 친자매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경우 교회법에 따르면 로베르 2세와 베르트의 결혼은 근친혼으로 분류되었고 곧 교황 그레고리오 5세와 후임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이들에게 이혼을 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로베르 2세는 교황들을 상대로 4년간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이는 1003년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카페 왕조의 왕권은 독일의 오토 왕조와 비교하면 12세기까지 매우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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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이게 전통으로 굳어져 후대 프랑스 왕들은(프랑크 왕국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기타 서유럽 국가의 공통의 역사가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카롤루스 왕조이고, 프랑스에 대한 역사적 귀속권에 있어서 메로비우스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보다 그 정도가 훨씬 높다.) 대관식을 랭스에서 해야만 했고 백년전쟁에서는 이게 첨예한 화두가 되었다.[2] 로마 황제[3] 개종 및 세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정치행위이기에 당연히 함부로 할 수 없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익에 대해서 주변 인사들과 직접 만나서, 혹은 서신을 통해서 교류하며 의견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4] 시점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불과 60년도 안 된 시점이고, 카톨릭-정교회가 소위 동서 대분열이 되는 1054년에서 550년이나 이전이기 때문에, 'orthodox'를 '정교회'로 번역하면 안 되고 카톨릭-정교회 공통의 소위 칼케돈 정통파 기독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5]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5p, 원문: 'Bishop Avitus of Vienne wrote to Clovis on the occasion of his baptism: 'Let Greece, to be sure, rejoice in having an orthodox ruler, but she is no longer the only one to deserve such great a gift.''[6] 이는 9세기에 현실화되었다.[7] 게르만인들이 아리우스파에 대단한 신심이 있다기보다는, 로마의 국교인 니케아-칼케돈 정통파를 믿으면 그 세계관에서는 무조건 로마 황제를 상급자로 인정하고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정통파를 피한 것이다. 그런데 클로비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각 게르만 왕국들의 게르만인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대세일 때 남들보다 먼저 정통파에 몸담았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가 '가톨릭교회의 맏딸(fille aînée de l'Église)'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8]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그의 기원을 프랑크인이라고 명시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슬라브인이며 본명은 사모슬라프 또는 사모스뱌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9] 중세에 게르만인들이 자신들과 인접한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을 부르던 명칭[10] 마녀사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녀사냥하려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중세 초기에는 마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녀가 문제가 아니라 없는 마녀를 우기는 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11] 덴마크 최초의 국경 조약이며 이 국경이 독일-덴마크 국경의 기초가 된다.[12] '로마' 제국의 황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만이 가졌으며, 프랑크인은 '황제'까지만 인정했다고는 하나 이후에는 이를 무시한다.[13] 이후 위고는 외가가 있던 보름스가우에 있다가 나중에 영지인 알사스로 갔다. 중프랑크 왕국의 황제 이탈리아인 루트비히가 죽고 이탈리아를 놓고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 2세가 전쟁을 벌일 동안 그는 알자스 공작직을 회복한 후 로타링기아의 왕위를 회복하려 했으나 작센 공작 소 루트비히 등에 의해 번번히 실패하였고, 결국 885년 뚱보왕 카를에게 생포되어 청력과 시력을 잃고 폴다 수도원에 감금되다가 곧 죽게되었다.[14] 화형의 고통을 견뎌내고 자신의 무죄, 결백성을 입증한 슈바벤의 리첼다 황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가서는 신화화되었다. 1049년 11월로 교황 레오 9세는 슈바벤의 리첼다 황후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15] 당시 변경백이 거처하는 곳이 메르제부르크였기에 메르제부르크로 부르기도 하지만 게로 변경주나 작센 동부 변경주로도 부르기도 한다.[16] 해당 지도에 오류가 있는데 당시 사르데냐는 오토 1세의 땅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주디카토(Giudicato)'라 불리는 토착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17] 노란색이 카롤루스 왕조의 명령이 미치는 부분. 랭스를 포함한 샹파뉴 지방에 국한된다.[출처] Schaff, Philip; Schley Schaff, David (1885).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Charles Scribner & Sons.[19] 탈레랑페리고르 가문의 시조.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그의 먼 후손이었다.[주의] 해당 지도에 카페 왕조의 세력권이 피카르디 지방 전체를 통제하면서 도버해협까지 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나 여전히 베르망두아 백작령에 속해 있어 정확히는 샹리스와 보배까지가 카페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