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9 13:56:18

킬데베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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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의 왕
Childebert II | 킬데베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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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한국어 킬데베르 2세
프랑스어 Childebert II
생몰 년도 570년 4월 6일 ~ 596년
재위 기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575년 ~ 596년
부르군트의 왕
592년 ~ 596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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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왕.

2. 행적

570년 4월 6일 부활절에 아우스트라시아 왕 시게베르 1세서고트 왕국의 공주 브룬힐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575년, 킬페리크 1세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던 시게베르 1세가 킬페리크 1세의 왕비 프레데군트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시게베르 1세를 따르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킬페리크 1세는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은 뒤 여세를 몰아 브룬힐트와 킬데베르가 머물고 있던 파리로 진격했다. 만약 그가 킬데베르를 잡는 데 성공한다면,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5살배기 아이를 삭발시켜 후계자 자리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릴 수 있었다.

시게베르 1세의 총신이었던 군도발트 공작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는 브룬힐트를 내버려둔 채 킬데베르만 챙겨 아우스트라시아의 본거지인 메츠로 이동했다. 메츠에 무사히 도착한 후, 57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시게베르 1세의 충복들을 불러모아 킬데베르 2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후 누가 섭정을 맡을 지를 놓고 격렬한 대립이 벌어진 끝에 루푸스와 고곤이 섭정을 맡았다. 루푸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주요 지역인 샹파뉴 공국을 통치했고, 고곤은 막대한 자금을 궁정의 여러 인사에게 빌려주고 영향력을 행사한 덕분에 국정을 장악했다. 두 사람은 "왕의 교육자"라는 칭호를 획득하고 왕국을 좌지우지 했다. 두 사람에게 밀려난 이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그 중 상당수는 킬페리크 1세가 다스리는 네우스트리아에 귀순했다.

한편, 브룬힐트는 딸들과 함께 킬페리크 1세의 군대에게 체포된 뒤 루앙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킬페리크는 나중에 브룬힐트와 결혼하고 "킬데베르 2세의 보호자"를 내세워 아우스트라시아까지 집어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576년, 푸아티에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던 아들 메로베가 루앙으로 가서 브룬힐트를 만나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는 분노해 루앙으로 달려가 아들과 직접 대면했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쿤트와 킬페리크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와 메로베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적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가 삭발식을 거행해 상속권을 박탈한 후 아니솔 수도원에 보냈다. 이렇듯 부자간의 대립이 벌어질 때, 브룬힐트는 루푸스의 도움으로 루앙에서 빠져나와 메츠로 이동했다.

브룬힐트는 메츠에 도착한 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1세와 연락을 주고받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저항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랭스의 에지디우스는 루푸스와 고곤이 잘못되기를 기다렸다.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두 사람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브룬힐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굴욕감을 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기술했다. 브룬힐트는 이런 상황에서 잘못 행동했다간 끝장이라고 판단했다.이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편을 들지 않고 통치자가 아닌 어린 왕의 어머니 역할을 주로 수행해 귀족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친 네우스트리아 파의 반대 세력인 베르테프레드의 딸의 대모를 맡았으며, 고곤과도 친분을 다졌다. 579년, 브룬힐트의 장녀 인군트와 서고트 왕 리우비길드의 아들 헤르메네길드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이는 서고트 왕국의 지원을 토대로 세력을 키우려는 브룬힐트의 계책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윽고 여러 귀족 집단의 지지를 확보한 브룬힐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치에 독자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580년, 로데츠의 달마티우스 주교가 56년간 재임한 끝에 선종했다. 차기 주교 선거를 앞두고, 고곤은 토른소바트라는 이름의 지역 신부를 지지하려 했다. 그러나 로데츠 주민들이 달마티우스의 유언장을 읽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 도착했을 때, 킬데베르 2세는 테오도시우스 사제를 주교로 선출하라고 명령했다. 고곤의 지원을 받았던 후보가 낙마한 것은 "왕의 교육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왕비가 그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음을 암시한다.

581년 고곤이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브룬힐트가 고곤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고곤의 장례가 정중하게 치러졌고 각종 명예 칭호가 수여되었다는 사실이 고곤의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곤이 사망한 후 교육자의 자리는 반델린이라는 인물이 맡았는데, 이 인물에 대해서는 고곤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섭정의 새로운 '강자'는 랭스의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였다. 그들은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의 동맹을 추구했던 고곤의 정책을 바꿔서 킬페리크 1세와의 동맹을 추진하기로 했다.

당시 킬페리크 1세는 아들들을 모두 죽이거나 병으로 잃어버리면서 더 이상 후계자를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킬페리크 1세와 가까워져서 후계 자리를 맡아둔다면, 장차 네우스트리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지디우스는 킬페리크를 찾아가 이 문제를 논의했고, 킬페리크는 자신이 죽으면 모든 영토를 킬데베르 2세에게 상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네우스트리아와 가까이 지내기로 한 것에 불만을 품은 루푸스가 반기를 들면서, 아우스트라시아는 내전에 시달렸다. 브룬힐트는 두 파벌 중 어느 쪽도 승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무너뜨린다면, 그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가 군대를 이끌고 루푸스를 해치려 하자, 브룬힐트는 남자처럼 허리를 두른 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 제발 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지 마십시오. 나라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르시온이 호통쳤다.
"이 여자야,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당신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통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당신의 아들이 통치하고 왕국은 당신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너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우리 말의 말굽이 너를 짓밟게 하지 마라."

우르시온 일당은 오랫동안 온갖 조롱을 퍼부었지만, 브룬힐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이에 병사들이 왕비의 입장에 동조하자, 결국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이후 루푸스는 우르시온 일당이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는 걸 보고 킬데베르 2세와 함께 군트람에게 망명했고,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줬다고 한다. 그리하여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 등이 이끄는 친네우스트리아파가 정국을 장악했지만, 루푸스가 여전히 건재했고 군트람이 개입하여 어린 왕의 보호를 천명했기에 모든 걸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581년, 고곤의 오랜 친구였으며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부유한 남부 일대를 다스리던 다이나미우스가 친네우스트리아파를 규탄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군트람과 동맹을 맺고 그해 말에 마르세유 절반을 넘겼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들과 군트람 왕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킬페리크 1세는 이 때를 틈타 부르군트를 침공해 페리구스와 아쟁을 공략했다. 결국 군트람은 582년 킬페리크가 점령한 두 도시를 그대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582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에게서 아들 테오도리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측은 불만을 품었다. 얼마 후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부르군트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일부러 늦장을 부렸고, 네우스트리아군은 부르주 근처에서 군트람의 군대에게 요격당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킬페리크는 평화 협정을 이루기 위해 부르군트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후 군 내부에서 친 네우스트리아파를 박멸하라는 목소리가 일어나자, 에기디우스 등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이 반란이 브룬힐트에 의해 계획되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브룬힐트는 이 덕분에 전권을 쥘 수 있었다.

군트람은 브룬힐트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를 돕기로 하고 584년 초 마르세유의 절반을 킬데베르 2세에게 돌려줬다. 그녀는 군트람의 지원 덕분에 인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 이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친척인 군돌프 공작 등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으며, 진영을 바꾸기로 한 에기디우스도 끌여들었다. 이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다. 당시 2살배기 아들 테오도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한 것에 낙심했던 킬페리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캉브레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다른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지만 몇달 후인 584년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프레데군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당분간 숨어 지내다 군트람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곧바로 파리로 향했다.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를 보호하려 했고, 킬데베르 2세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인 그를 제거하려 했다. 얼마 후 파리에 먼저 도착한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를 자기 진영으로 들여보냈다.

이에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가 568년 그와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가 파리를 공유지로 남기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며 파리를 접수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자, 군트람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577년 부르군트와 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581년에 킬페리크와 동맹을 맺고 자신을 공격한 바 있다고 언급하며 묵살했다. 브룬힐트는 다시 사절을 보내 본래 아들의 영역이어야 했으나 킬페리크에게 빼앗겼던 땅을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군트람은 시게베르 1세가 형제의 허락 없이 계약을 위반하고 파리에 들어갔고, 나중에 킬페리크도 똑같이 했으니, 그들이 과거에 한 맹세에 따라 왕구의 분할에서 자신의 몫을 잃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그 땅의 주인을 맡을 수 있다고 답했다. 현실적으로 군트람을 거역할 수 없었던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승복했고,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와 킬데베르 2세 모두를 양자로 삼고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584년, 쾰른에 숨어지내다가 갈리아에 들어온 클로타르 1세의 아들 군도발트가 아키텐에서 킬페리크의 옛 지지자인 데시데리우스 공작, 블라다스트 공작, 사가타리우스 주교, 와돈 등과 함께 아키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툴루즈, 앙굴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군트람에 맞섰다. 군트람은 반란 토벌에 전념하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와 화해하기로 하고, 585년 봄 킬데베르 2세를 궁으로 초대해 군도발트의 공범들 중 일부를 동등한 입장에서 심판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왕좌를 세웠다. 이후 군트람은 그에게 창을 건내주고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 후 군트람과 함께 군도발트를 살해하고 항복한 반역자들을 심판한 뒤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한 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처형하라고 독촉했고 군트람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으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선언하며, 그가 자신의 조언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어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권고였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간 킬데베르 2세는 어머니에게 국정을 계속 맡겼다. 그는 라틴어를 잘 이해했고 몇 개의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그리 관심이 관심이 없었고, 취미인 낚시를 즐겼다. 그렇지만 브룬힐트는 혹여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예방 조치를 내렸다. 먼저 아들의 결혼 상대를 페일루바라는 여인으로 정했다. 이 여인의 출신 성분은 알려지지 낳았지만,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볼 때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외국 공주나 귀족의 여식이 왕비가 되었을 때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릴까 두려워했기에 이같은 조치를 내렸을 것이다. 또한 요직에 자신의 충복과 친구들을 대거 앉혀서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친네우스트리아파 지도자인 랭스의 에지디우스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이에 에지디우스는 킬데베르 2세를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과거에 저지른 무례를 사죄했고, 킬데베르는 그를 용서했다. 루푸스 공작 역시 옛 정적을 용서하기로 했다. 또한 일전에 축출되었던 마르세유의 테오도르 주교도 복위했다. 한편, 브룬힐트는 본래 네우스트리아에 속했지만 라우칭 공작이 아우스트리아에 귀순할 때 함께 딸려왔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590년, 프레데군트는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어진 조사 결과, 에지디우스가 라우칭의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지디우스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590년 11월 중순 메츠에서 사법 재판이 열렸다. 에지디우스는 자신이 켈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를 암살할 계획에 참여했고 네우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킬페리크와 군트람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킬페리크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와 동맹을 이어갔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그가 처형될 거라고 예쌍했지만, 놀랍게도 브룬힐트는 직위 해제 후 스트라스부르로 유배할 뿐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이는 죄를 고백한 거물들을 언젠가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의 총독으로 선임된 로마누스는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헀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589년 프랑크군을 전격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랑고바르드 왕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누스가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590년 아우타리가 사망한 뒤 새 랑고바르드 왕이 된 아길루프는 프랑크 왕국과의 화해를 꾀했다. 프랑크 왕국 역시 랑고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지속하길 원치 않았기에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한편, 브룬힐트의 딸 인군트와 결혼했던 서고트 왕자 헤르메네길드가 580년 아버지 리우비길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583년에 진압당했다. 헤르메네길드는 곧 피살되었고, 인군트와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는데, 인군트는 도중에 시칠리아 또는 아프리카에서 병사했다. 브룬힐트는 손자를 돌려받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친척, 최고위 인사, 고위 사제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간청했지만,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타길드가 인질로 활용하기 적합하다고 여겨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은 전쟁을 벌이다가 586년 서고트의 새 왕위에 오른 레카레드 1세가 화해를 촉구하면서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 킬데베르 2세는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레카레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군트람이 레카레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그는 일부 병력을 보낼 뿐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588년, 브룬힐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군트람을 찾아가서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종식하라고 요구하게 했다. 마침 서고트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해 기세가 꺾여 있던 군트람은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브룬힐트는 자신의 딸 클로도신다를 레카레드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관계를 개선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브룬힐트의 어머니 고이빈타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아리우스파를 탄압하는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하고자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된 후 곧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자, 양자간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레카레드는 협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바도라는 이름의 서고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리우바 2세를 낳았다.

킬데베르 2세의 통치 말년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에 관한 소상한 기록을 남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590년대 초에 사망해버렸고, 또다른 연대기 작가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도 모종의 이유로 저술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단지 반 세기 후 편찬되었고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프레데르가의 연대기만 남았기에, 당시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592년 군트람이 사망하면서 아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가 통일되면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된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는 오랜 숙적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적군과 격돌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고, 이후 몇년간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한편, 킬데베르 2세는 군트람이 생전에 굴복시키려 했지만 연전연패하면서 끝내 실패했고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약탈하는 브르타뉴의 바로스 2세를 제압하기로 하고 594년 토벌대를 파견했다. 원정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브르타뉴가 이후로 조용해진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595년, 튀링겐과 북해 사이에 살던 바르네스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크군은 즉시 투입되어 이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이 지역에 대한 프랑크의 주권이 복원되었다. 한편 바이에른 왕 가리발트 1세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낌새를 보이자, 킬데베르 2세는 바이레른으로 쳐들어가서 그를 축출하고 타실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렇듯 대외에서 문제가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네우스트리아의 숙적 프레데군트를 축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킬데베르 2세는 입법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595년 2월 29일에 반포된 '킬데베르 법령'은 593년 안데르나흐, 594년 마스트리히트, 595년 쾰른에서 열린 세번의 사법 회의에 대한 설명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프랑크인과 로마인을 별도로 다뤘으며, 대부분의 조항은 전통 관습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삼았다. 의무적인 일요일 휴식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며, 근친상간 금지에 관한 법안을 재확인했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프레데가르는 그가 아내 페일루바와 함께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별다른 근거는 없으며 단지 소문일 뿐임을 인정했다. 사후에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와 테오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올랐고,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브룬힐트를 타도하고자 군대를 동원하면서,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