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8 08:46:29

클로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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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전 프랑크인의 왕
클로비스 1세 | Clovis I
파일:clovis1.jpg
870년에 묘사된 클로비스의 세례
제호 한국어 클로비스 1세
고대 프랑크어 ᚺᛚᛟᛞᛟᚹᛁᚷ / Hlōdowig (흘로도위그)
라틴어 Chlodovechus I (클로도베쿠스 1세)
프랑스어 Clovis Ier (클로비스 1세)[1]
독일어 Chlodwig I. (클로트비히 1세)
영어 Clovis I (클로비스 1세)
출생 466년
사망 511년 11월 27일 (향년 45세)
재위 기간 살리 프랑크인의 왕
481년 ~ 509년
프랑크인의 왕
509년 ~ 511년 11월 27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북부 갈리아 정복2.3. 제1차 서고트 전쟁과 기독교 개종2.4. 아르모리카 복속과 제2차 서고트 전쟁2.5. 휴전기와 알레만니족 복속2.6. 제3차 서고트 전쟁과 부이예 전투2.7. 프랑크족 통합과 사망
3. 내치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3%A7ois-Louis_Dejuinne_%281786-1844%29_-_Clovis_roi_des_Francs_%28465-511%29.jpg
1837년 상상화
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샤를 드골, 클로비스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에서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자 메로베우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잘리어(Salian)[2]의 부족장. 전형적인 정복 군주이자 군인형 군주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의 혼란기를 잘 활용하여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고트 왕국과 알레만족, 부르군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또 다른 게르만 군주들과 달리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아닌 칼케돈파 산하 가톨릭 교회개종하여 교황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 권력 공백기를 잘 이용하여 여러 군소 프랑크족들을 통합하여 안정된 왕국을 세운 것은 업적이나, 권력을 획득하고 다른 부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하고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동시대에 활약했던 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 대왕과 달리 대왕(Magnus)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훗날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왕국과는 달리 프랑크[3]가 현대까지 존속하면서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이기에 오늘날 대중에게는 클로비스가 테오도리크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파일:Les_Francs_en_Belgique_romaine.svg.png
클로비스 1세가 즉위하기 직전 프랑크족의 위치와 범위.
프랑크족의 여러 부족장들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던 킬데리크 1세튀링겐의 왕녀 바신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킬데리크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 지도자이자 동시에 벨기카 세쿤타 속주의 총독이었으므로 현대 학자들은 클로비스가 벨기카 세쿤다 속주의 주도인 두로코르토룸(Durocortorum, 현재의 랭스)에서 출생하여 교육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랭스와의 이러한 인연은 이후 클로비스가 정통파 기독교로의 세례를 랭스에서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481년 아버지가 죽자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아 잘리어 프랑크족을 이끌게 된다. 481년 클로비스는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 지방을 정복하였다. 직후 라인 프랑크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게르마니아의 야만 부족들을 공격했고, 이후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프랑크족의 군주 지고베르트가 프랑크족을 위협하던 알레만니족을 복속시키는 것에 같이 참가했다. 이 원정의 결과 알레만니족의 위협이 완전히 분쇄되어 클로비스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지고베르트는 메츠, 트리어, 베르됭 등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2.2. 북부 갈리아 정복

이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서로마의 갈리아 지역 사령관이었던 아에기디우스의 아들인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그의 근거지인 수아송을 점령하였다. 이후 오를레앙, 파리 등 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켰고 이를 통해 루아르 강부터 솜 강까지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파리를 점령했을 때 그 지역의 유명한 수녀이자 이후 파리의 수호성인이 되는 성녀 제노베파(라틴어:Genovefa)[4]가 도시에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잡은 포로들을 석방해줄 것을 요청하자 그녀의 명성을 듣고 감화된 클로비스가 그너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로 미루어보아 다른 게르만 군주들과 달리 정통파 기독교에 딱히 큰 반감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아송에서 패배한 시아그리우스가 살아서 서고트 왕국의 알라리크 왕에게 도망친 것은 여전히 불안요소로 남아 있었다. 서고트 왕국은 이전부터 꾸준히 루아르 강을 넘어 갈리아 북부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을 여러번 드러냈는데, 시아그리우스의 망명은 이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 주는 기회가 될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클로비스는 알라리크에게 시아그리우스의 인도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쟁 뿐이라고 위협하였다. 국력 자체는 서고트 왕국이 훨씬 강대했지만 불과 몇년만에 갈리아 북부를 제패한 클로비스와 싸우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알라리크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클로비스는 시아그리우스를 감금한 후 얼마 안가 비밀리에 처형하였다.

한편 클로비스는 갈리아를 정복한 직후 갈로-로마인들에 대한 통치에 애를 꽤 먹었다. 처음에는 클로비스 또한 다른 게르만 왕들처럼 정통파 기독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에 베르둔같은 로마 도시들은 클로비스 1세에게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다 랭스 대주교로부터 '당신과 당신 부하들이 교회로부터 약탈해간 것들을 교회에 돌려주고 정통파를 공인하라'라는 편지를 받고 비로소 칼게돈파 교회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선을 전환했고, 수아송 전투 이후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시아그리우스의 잔존 군대도 그의 프랑크족 군대에 통합함으로써 그들을 회유했다.

2.3. 제1차 서고트 전쟁과 기독교 개종

490년대 초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는 한편, 부르군트족의 왕의 조카딸 클로틸데를 왕비로 맞이한다. 이때 먼저 맞이했던 라인 프랑크족 출신 왕비는 이혼당했다. 후에 클로비스가 지고베르트를 살해할 수 있었던건 이미 이때 이혼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동맹 직후 동쪽의 튀링겐족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튀링겐족은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크 왕국에 강하게 복속된다.

이후 어느 시점부터 클로비스는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 연대기에는 서고트군이 496년 생트 시를 탈환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이 시점 이전에 먼저 프랑크군이 서고트령 아퀴티니아를 침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생트 침공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이루어졌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서고트 국왕이었던 알라리크는 클로비스와 맺은 평화를 믿고 한창 히스파니아에서 서고트 왕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을 정복하는 캠페인에 착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496년 부르델레누스(Burdelenus)라는 로마계로 추정되는 현지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이 타이밍에 클로비스가 생트를 침공하면서 서고트는 부르델레누스의 반란에 대응할 여력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원정에서 킬로(chilo)라는 프랑크족 장군이 낭트 시를 포위하였다가 성 시밀리누스의 환영이 일자 이에 크게 놀라 퇴각하였고 킬로는 그 즉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또 56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투르 시를 점령한 이후 그곳에서 방문한 성 마르탱(st. martin)의 무덤에서 현지인으로부터 기적의 이야기를 듣자 기독교 세례를 받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밑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는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었거나, 혹은 클로비스의 세례에 대해 후대에 유통된 여러 이야기 버전 중 하나일 수 있다.

이렇게 서고트족과 일진일퇴의 전쟁을 벌이는 상황 속에서, 알레만니족이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는 프랑크족 일파를 침공하여 그들의 왕이었던 지고베르트가 클로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클로비스는 즉시 아키텐에서 철수하여 알레만니족을 침공하였고, 톨비아크(Tolbiac)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전세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 전멸의 위기에 놓이던 도중, 클로비스는 급하게 승리를 위해 아내인 클로틸데가 믿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 직후 알레만니족 지도자가 전사하면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 일이 생겼다.

이것이 신의 가호라 믿은 클로비스는 그 해에 랭스에서 레미기우스 주교에게 부하 3천 명과 함께 세례를 받아 개종하게 되었다.[5]

다만 위에 나온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도교 개종 서사에 자주 나타나는 내러티브이고[6], 정작 밑에 나오는 비엔의 아비투스 주교가 클로비스에게 세례에 대해 보낸 편지에는 클로비스가 전투 도중의 기적으로 신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어서, 믿거나 말거나 식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 개종 결정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갈리아의 로마계 주민들에게 자신을 '아리우스파 이단(서고트)에 맞서는 정통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일부 로마 교회 소속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7]의 칭호를 받게되는 일도 생기게 됐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게 된다.

심지어 이로 인해 서고트 영내에 거주하는 정통파 주교들과 시민들마저도 크게 동요하여, 투르의 주교였던 성 볼루시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정통파 주교들이 서고트족으로부터 프랑크인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고 유배를 당하거나 도시에서 내쫒기는 일이 발생한 사실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해 여러 기록에 전한다.

세례를 받는 건에 대해 클로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8] 비엔의 아비투스(Avitus of Vienne) 주교는 '그리스정통파(orthodox) 군주[9]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더 이상 그리스만이 유일하게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는 않습니다.' 라고 썼다고 한다.[1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때는 서로마가 멸망한 지 30년 정도밖에 안 된 508년 전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동로마가 로마도 아닌 그리스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 나아가 동방의 그리스에 대응되는 서방의 프랑크라는 구도의 초보적인 형태가 벌써부터 그려지고 있다는 점[11], 로마 황제 다음 두 번째로 클로비스 당신이 정통파 그리스도인도 군주가 될 수 있다며 개종을 촉구했던 것으로 보아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대세였다는 점[12],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사실 본심은 단성론이었지만 통치를 위해 내키지 않는 정통파 코스프레를 해야 했는데, 편지에는 마치 정통파 군주의 모범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이득과는 별개로 496년의 서고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예상과 달리 서고트 군이 너무 빠르게 히스파니아에서 철군하여 프랑크군을 격파한 데다가, 알레만니족 문제에 발목이 잡히면서 양면전선을 감당해야 했고 이로 인해 초기에 점령한 도시들을 모두 토해내야 했던 것이다.

2.4. 아르모리카 복속과 제2차 서고트 전쟁

이후 전쟁을 멈추고 내정에 전념하던 클로비스는 498년경 아르모리카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모리카는 지금의 브르타뉴, 노르망디 서부, 앙제 주변 권역의 지명이자 동시에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싸잡아 일컫는 명칭으로, 보통 브르타뉴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브르타뉴인 뿐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던 갈리아인, 로마인, 심지어 알란족이나 색슨족과 같이 프랑크족보다 먼저 정착한 게르만인 등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통파 기독교를 강하게 신봉하였으며, 클로비스의 갈리아 북부 정복 이후에도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비스가 정통파로 개종하고, '아리우스파 이단' 서고트에 맞서는 정통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자 서고트의 위협에 맞선다는 이유에 따라 클로비스에게로 복속되었다. 이로서 클로비스는 서고트령 아퀴티니아로 한번에 들어갈 수 있는 육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다시 한번 서고트령 아퀴티니아를 침공하여 투르, 생트, 보르도까지 점령하고 그곳을 다스리던 수아트리우스 공작을 생포하는 데에 성공한다.

2.5. 휴전기와 알레만니족 복속

500년, 클로비스는 당시 분할상속된 상태였던 부르고뉴 왕국에서 벌어진 내전에 자신이 결혼동맹을 맺은 고데기실레의 편으로 참전했다. 디종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곤도발드 왕을 패배시키고 그에게 왕위를 포기하길 강요하면서 승리하나 했지만, 서고트 왕국이 개입해 곤도발드와 동맹을 맺고 클로비스에게 고데기실레와의 동맹을 끊을 것을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곤도발드로 동맹을 갈아탄 후 아들을 곤도발드의 손녀와 결혼시킨다. 결국 고데기실레는 전투에서 패배해 살해당하고 곤도발드가 부르고뉴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이후 서고트의 알라리크 왕은 클로비스에게 루아르 강 유역의 현재의 앙부아즈에서 만나 평화를 회복하자고 제안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서고트 왕국과 사생결단까지 벌이기에는 힘들었던 클로비스는 이를 받아들였고, 기록에 따르면 두 왕은 연회를 통해 '우정을 약속하고 평화롭게 헤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회담을 통해 클로비스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모조리 반환했지만 알라리크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성과를 거둔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에 해당했던 프랑크가 강대국인 서고트로부터 먼저 평화회담을 요청하게 만든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이후 약 5-6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도중 506년경 클로비스는 새로운 알레만니 원정에 나서게 되는데, 동고트의 테오데리크 대왕이 클로비스에게 보낸 편지의 문맥에서 유추해 보면 아마도 알레만니족 일부가 프랑크족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클로비스는 확실히 알레만니족을 격파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고, 스트라스부르 전투라고 불리는 회전에서 알레만니군을 크게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후 알레만니족 내 반프랑크 세력 일부가 동고트의 테오데리크 대왕에게로 귀순하여, 테오데리크가 클로비스에게 편지를 보내 '불충한 자들만을 처벌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베풀라'고 압박하게 된다. 클로비스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이번 원정을 통해 알레만니족을 영구히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2.6. 제3차 서고트 전쟁과 부이예 전투

507년, 동쪽 국경을 충분히 안정시킨 클로비스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에 부근의 부이예(Vouillé)에서 크게 격파하고 알라리크 2세를 살해하였다. 그 결과 랑그도크를 제외한 프랑스 남부 전역을 점령한다.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제지로 인해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짓게 된다. 하지만 대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명예 집정관직을 수여받음으로서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2.7. 프랑크족 통합과 사망

이렇듯 서방세계 당대 최강국 중 하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정도로 크나큰 위업을 세운 클로비스였지만, 정작 그때까지도 프랑크족은 통합되지 않고 여러 부족장들에 의해 나눠진 상태였다. 클로비스가 이끈 이들은 프랑크족의 한 일파에 불과했고, 나머지 부족들은 클로비스와는 독립적이었는데, 부이예 전투 이후 이렇게 조각조각 나뉜 프랑크족을 통합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여과없이 보여주게 된다. 508년 인척이자 라인 지역 프랑크족의 지도자 지고베르트 부자를 살해했고[13][14] 또, 510년에는[15] 친족으로서 동맹 관계였던 통게렌 지역 프랑크족의 왕 카라리크가 수아송 전투 때 배신을 때리고 이기는 편 우리 편을 시전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라리크의 영토로 쳐들어가 카라리크와 그의 가족들을 멸족시켰다. 또 클로비스의 또다른 친척으로 추정되는 캉브레 지역 살리 프랑크족의 군주 라그나카르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한 뒤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라그나카르를 제거했다. 그러나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고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클로비스는 511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에게, 랭스는 테우데리크 1세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각자 나라를 이끌면서 전시에는 힘을 합쳐 외적에 대항하기로 했지만, 나중에는 프랑크 왕국 최고의 권위자가 되려고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파일:europeat500.png
500년경의 유럽.[16]

3. 내치

클로비스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왕실의 수도로 정했고[17], 파리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게 된다. 종교면에서는 죽기 직전 제1차 오를레앙 공의회를 개최해 교회법 등 여러 법률들을 제정하거나 교회와 주교의 권리를 명시했으며, 교회와 왕실은 서로 종속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차후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이 될 공의회 정치[18]의 첫 선례가 되었다. 국내에 로마 교회의 선교를 장려하고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업적을 쌓았다.

그 외에 성직자를 위시한 현지의 갈리아-로마계(Gallo-Roman)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프랑크 왕국 내에 로마의 행정 조직을 도입하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근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서유럽 왕위 계승의 법칙의 대표격인 살리카법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이 살리카법은 기본적으로 살리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관습법에 기초하지만, 갈로 - 로만계 관료들을 중심으로 로마법이나 교회법에 의한 보완도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분쟁이 났을 때 페데(fede)의 관습에 따라 사적인 전쟁이나 결투로 이를 해결하는 관습을 폐기하고 로마법의 조항을 도입해 폭력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조항을 도입했으며, 한편 로마법의 무거운 형량은 깎아 사형 집행은 최소화하고 범죄에 대한 처벌 역시 관대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중세 시대가 폭력과 야만의 시대라는 대중적 편견과는 달리 법과 절차에 의한 사법 집행은 꽤 잘 지켜진 편이었다.

하지만 이 살리카법은 왕국 전체에 적용되는 법이 아닌 살리 프랑크족 한정으로 적용되는 법으로서, 갈로 - 로만인들에게는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 2세가 개조해 반포한 알리리크 법, 정식 명칭으로 lex romana visigotorum이라 불리는 법전이 적용되었다. 한편 라인 프랑크족에게는 리푸아리법이라 불리는 고유 법이 적용되었는데, 이 법의 문서화는 약 100년 이후에나 이루어진다.



[1] 루이(Louis)와 달리 클로비스(Clovis [klɔ.vis\])는 어말 자음을 생략하지 않는다. 참고.[2] 여기서 Salic이라는 표현, 즉 살리카법이 유래되었다.[3] 비록 라틴화되고 언어도 바뀌고 왕정도 아니게 되었지만, (마치 동로마가 로마이듯이) 프랑스는 프랑크와 연속되고 동일한 Francia이다.[4] 훈족의 아틸라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도 기도를 통해 침략을 막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참고로 이게 전통으로 굳어져 후대 프랑스 왕들은(프랑크 왕국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기타 서유럽 국가의 공통의 역사가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카롤루스 왕조이고, 프랑스에 대한 역사적 귀속권에 있어서 메로비우스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보다 그 정도가 훨씬 높다.) 대관식을 랭스에서 해야만 했고 백년전쟁에서는 이게 첨예한 화두가 되었다.[6]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그 변방 앵글로색슨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흔한 이야기이다.[7] 로마 황제[8] 개종 및 세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정치행위이기에 당연히 함부로 할 수 없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익에 대해서 주변 인사들과 직접 만나서, 혹은 서신을 통해서 교류하며 의견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9] 시점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불과 60년도 안 된 시점이고, 가톨릭-정교회가 소위 동서 대분열이 되는 1054년에서 550년이나 이전이기 때문에, 'orthodox'를 '정교회'로 번역하면 안 되고 가톨릭-정교회 공통의 소위 칼케돈 정통파 그리스도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10]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5p, 원문: 'Bishop Avitus of Vienne wrote to Clovis on the occasion of his baptism: 'Let Greece, to be sure, rejoice in having an orthodox ruler, but she is no longer the only one to deserve such great a gift.''[11] 이는 9세기에 현실화되었다.[12] 게르만인들이 아리우스파에 대단한 신심이 있다기보다는, 로마의 국교인 니케아-칼케돈 정통파를 믿으면 그 세계관에서는 무조건 로마 황제를 상급자로 인정하고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정통파를 피한 것이다. 그런데 클로비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각 게르만 왕국들의 게르만인 사이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대세일 때 남들보다 먼저 정통파에 몸담았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가 '가톨릭교회의 맏딸(fille aînée de l'Église)'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13] 정확히는 지고베르트의 아들을 부추겨 아버지를 살해하게 한 뒤 지고베르트의 아들을 부친 살해죄로 몰아 죽여버리고는 그의 부족을 흡수해버렸다.[14] 참고로, 이후 살아남은 지고베르트의 자손들은 아우스트라시아에서 살아가다가 7세기 초의 메츠의 성 아르눌(Arnoul de Metz)을 통해 부계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는 카롤루스 왕조에게로 이어진다.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5] 491년이라는 설도 있다.[16] 클로비스가 한창 영토 확장을 하던 시기였다.[17] 다만, 후대의 신성 로마 제국이 고정된 수도가 없던 것처럼 클로비스 본인은 딱히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곳들 돌아다니며 지냈으므로 그의 치세까지는 파리는 사실상 명목상의 수도에 가까웠다.[18] 공의회에서 교회법 및 여러 왕국 법률들을 반포함으로서 교회와 왕실을 결속시키면서 법률의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정치행위가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자주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