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7:46:33

클로타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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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의 왕
프랑크인의 왕

Chlothar II | 클로타르 2세
파일:클로타르 2세.jpg
제호 한국어 클로타르 2세
프랑스어 Chlothar II
생몰 년도 584년 5월 ~ 629년 10월 18일
재위 기간 네우스트리아의 왕
584년 ~ 613년
프랑크인의 왕
613년 ~ 629년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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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군주. 네우스트리아 왕으로서 브룬힐트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을 꺾고 40여년간 이어지던 내전을 수습하고 왕국을 통합했다.

2. 행적

584년 5월경 네우스트리아 왕 킬페리크 1세프레데군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킬페리크 1세가 맞는지에 대해 당대부터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몇몇 기록은 그의 아버지는 프레데군트 왕비와 간통하던 랑데리크라는 종자라고 주장했다.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는 클로타르 2세 이전에도 클로도베르, 다고베르트, 삼손, 테우데리크 등 여러 아들을 낳았지만 전부 질병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여동생 갈스빈트와 남편 시게베르 1세를 죽음으로 몰아간 킬페리크 1세와 대립했던 브룬힐트는 자기 아들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물려받을 가능성을 고려해 화해를 모색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2세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태어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클로타르 2세가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584년 9월 27일, 킬페리크 1세가 사냥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당했다. 프레데군트는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묵살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을 불러놓고 당시 사생아로 의심받던 클로타르 2세를 킬페리크 1세의 아들로 인정하라고 명령해 복종을 얻어낸 뒤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삼았다. 이후 585년 여름에 클로타르 2세의 세례식이 거행되면서, 클로타르 2세의 입지는 공고해졌다. 당시 군트람은 브룬힐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킬데베르 2세도 양자로 들였기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군트람이 사망하면 킬데베르 2세가 기존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군트람이 이끄는 부르군트까지 상속받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브룬힐트는 본래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도시였지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으로 넘어간 수아송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렇듯 갈수록 강성해지는 브룬힐트의 권세를 경계한 프레데군트는 590년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592년 군트람이 사망하면서 정식으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 왕국의 군주가 된 킬데베르 2세와 어머니 브룬힐트는 오랜 숙적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했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적군과 격돌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다고 한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반 브룬힐트 세력의 준동, 아바르족, 랑고바르드 왕국, 데인족 등 외부 세력의 압박, 전염병 창궐 등 여러 악재로 인해 공세를 더 펼치지 못했고, 네우스트리아 왕국은 이 틈에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테우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오르고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에 걸려 쓰러졌고, 1년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병상에 누워서도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사후 생 드니 대성당의 남편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어머니가 사망한 뒤, 클로타르 2세는 위기에 직면했다. 600년, 브룬힐트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다. 당시 16살이었던 클로타르 2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는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이렇듯 주변 정세가 불안해지자, 테우데리크 2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손잡으려 애썼다. 이무렵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가 메로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클로타르 2세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던 610년, 테우데베르 2세는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이후 브룬힐트의 두 손자간의 내전은 2년간 이어지다가 612년 브룬힐트의 지원을 받은 테우데리크 2세가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테우데베르 2세를 제압하면서 종결되었다.

613년 8월 23일, 테우데리크 2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사생아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증손자를 세우고 계속 권력을 쥐려는 그녀의 야욕에 넌더리가 났고, 숙청을 일삼는 그녀보다는 클로타르 2세의 지배를 받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아르눌프, 피핀 1세[1] 등이 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던 브룬힐트는 그에게 테우데리크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포기히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에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녀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와 맞서러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게베르,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앞으로 끌려갔다.

파일:브룬힐트 처형.webp

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게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간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 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그는 614년 파리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교회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은 교회 선거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으며, 성직자들이 왕을 제외한 세속인들의 보호 아래 귀속되는 것을 금지했고, 성직자들을 위해 주교급 또는 법관과 주교가 함께 참여하는 법원을 개설했다. 또한 모든 교육과 과학 연구는 교회의 책임하에 실시되었다. 칙령의 세속적인 조항들은 왕권의 측면에서 국민들, 특히 귀족들에게 유리한 내용이 많았다. 범죄자가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는 한 피고인의 말을 듣지 않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판사와 백작은 주어진 지역에 살고 그 지역에 재산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어야 했다. 귀족들은 이 조항에 따라 판사와 백작 지위를 독점하고 세습했다. 왕은 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과부와 소녀들을 그들의 동의 없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로 제정된 세금은 폐지되었으며, 주인의 허락없이 교회와 사유지에서 왕 소유의 돼지를 방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관직을 맡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바나차르는 브룬힐트 축출에 공을 세운 보답으로 부르군트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왕으로부터 폐위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냈다. 또한 아르눌프는 614년경 메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옛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영역은 라돈, 후카 등 귀족들이 다스리다가 623년부터 피핀 1세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617년, 클로타르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로부터 36,000 솔리디의 선물을 받은 후 랑고바르드 왕국이 본래 지불해야 하는 연간 12,000개의 금화 공물을 취소했다. 622년,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로부터 자신들을 이끌 왕을 세우라는 강한 압력을 받은 그는 아들 다고베르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선임했다. 당시 18세였던 다고베르는 메츠에 도착한 뒤 메츠 주교 아르눌프와 피핀 1세의 보좌를 받았다. 다만 프로방스와 오베르뉴, 랭스 일대는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이탈하여 클로타르의 수중에 들어갔다.

624년, 다고베르 1세는 바이에른 귀족 크로도알트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용병을 고용한 뒤 자국을 침략하는 것에 분노해 군대를 파견해 격파한 뒤 크로도알트를 체포한 후 피핀 1세의 조언에 따라 처형 명령을 내렸다. 클로타르는 크로도알트로부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서신을 받고 아들에게 크로도알트를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고베르는 아버지의 명을 무시하고 크로도알트를 처형했다. 이 일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625년, 클로타르 2세의 아내이자 다고베르 1세의 계모인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가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다고베르는 아버지에게 프로방스, 오베르뉴, 랭스 일대를 지참금 형식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자, 아르눌프를 포함한 12명의 프랑크 귀족들이 공의회를 개최해 중재에 나섰고, 클로타르 부자는 곧 화해했다. 클로타르는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루아르와 프로방스의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지기로 했다.

626년, 부르군트 공작 바나차르가 왕의 허락 없이 주교회의를 소집할 권한을 얻었으나 곧 사망했다. 클로타르는 바나차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참에 부르군트 공국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나차르의 아들 고딘이 계모 베르타와 결혼한 걸 문제 삼고 교회법을 어긴 죄를 적용해 체포하려 했다. 고딘은 교회에 피신한 뒤 베르타와 헤어질 테니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베르타가 고딘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자, 클로타르는 고딘을 죽이기로 했다. 고딘은 성지 순례를 떠나서 속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길을 떠났다가 샤르트르 인근에서 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클로타르는 부르군트 귀족들과 궁정 관료들을 트루아에 소집한 뒤 바나차르의 후임자가 되길 원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왕의 의중을 눈치채고 한 목소리로 공작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직 왕이 직접 다스리기를 요청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는 왕의 소유로 돌아갔다.

같은 해, 팔라디우스와 그의 아들이자 오슈의 주교인 시독이 가스코뉴 봉기에 연루된 혐의로 추방되었다. 또한 시킬트 왕비와 에탐피아 공작 보소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627년에는 베르토랄트 공작이 이끄는 작센 봉기가 일어났지만 다고베르 1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8세기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의 역사집>에는 클로타르 2세가 반란군의 지도자와 결투를 벌여 죽였다고 기술되었지만 신빙성은 없다.

629년 10월 18일, 클로타르 2세는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장남 다고베르 1세가 아우스트라시아에 이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물려받았고, 다고베르의 이복 동생인 카리베르 2세는 아키텐을 물려받았다.

3. 가족

클로타르 2세는 첫번째 아내로 할드트루트를 두었고, 그녀로부터 메로베, 엠마를 낳았다. 메로베는 604년 부르군트군과의 전투 도중 사로잡힌 뒤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엠마는 618년경 켄트 왕 에드볼트와 결혼했다. 613년경, 그는 부르군트의 파트리키 리키메르의 딸 베르트루트와 재혼했다. 프레데리가 연대기에 따르면,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주변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남편에게 사랑받았고 프랑크인들로부터 존경받았다고 한다. 또한 궁중 귀족 알레테우스가 남편을 죽이고 자신과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운 걸 알아채고 적시에 남편에게 알려 음모를 막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고베르 1세를 낳았다.

619년 베르트루트가 사망한 뒤, 그는 정부였던 시킬트를 왕비로 삼았고 아키텐의 왕이 될 카리베르 2세를 낳았다.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는 625년에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626년 에탐피아 공작 보소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보소와 함께 처형되었다.


[1] 이 두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훗날 카롤루스 왕조의 두 시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