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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송의 왕 수아송-랭스의 왕 프랑크인의 왕 Chlothar I | 클로타르 1세 | ||
제호 | 한국어 | 클로타르 1세 |
프랑스어 | Chlothar I | |
출생 | 497년 | |
사망 | 561년 (향년 64세) | |
재위 기간 | 수아송의 왕 | |
511년 ~ 555년 | ||
수아송-랭스의 왕 | ||
555년 ~ 558년 | ||
프랑크인의 왕 | ||
558년 ~ 5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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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아송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시작해 형제들과 조카들이 먼저 죽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왕이 된 군주.여담으로 그의 이름 클로타르(clothar)는 후대의 카롤루스 왕 인명인 로타르(lothar) 또는 로테르(lothaire)의 어원이다.
2. 행적
497년경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군주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 왕비 사이의 사남으로 출생했다. 남자 형제로 잉고메르(494년 출생.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 클로도미르(495년 출생), 킬데베르 1세(496년 출생)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클로틸데(500년 출생)[1]가 있었다. 51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두 형제와 이복형제 테우데리크 1세와 함께 나라를 4분할했다. 그는 수아송을 가졌고, 킬데베르 1세는 파리, 클로도미르는 오를레앙을 가졌으며, 테우데리크 1세는 랭스를 가졌다.523년, 형제인 킬데베르 1세, 클로도미르와 함께 부르군트를 공격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의 모후인 클로틸데의 부추김을 받고 이런 행동을 벌였다고 하는데, 클로틸데는 부모를 처참하게 죽였던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를 쳐서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테우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준 적이 있어서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지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베체론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들은 어머니 곤테우크에게 양육되다가 곤테우크가 클로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클로틸데는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성 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에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오를레앙을 킬데리크 1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투르, 푸아티에 및 론 강 하류 일대를 챙겼다.
531년 또는 532년, 클로타르 1세는 테우데리크 1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와 함께 튀링겐을 공격했다. 그들은 운스트루트 강 전투에서 튀링겐군을 격파하고 스키팅기 왕궁을 공략했다. 헤르만프리드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곧 살해되었고 조카 라데군타 등 여러 왕실 인사가 붙잡혔다. 그는 당시 8살이었던 라데군타를 잘 키워서 아내로 삼기로 했다. 라데군타는 잘 교육받은 뒤 538년 클로타르 1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국을 망국으로 몰아간 남편을 증오했고, 어떻게든 궁정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결국 궁정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니옹의 메다드 주교의 보호하에 수녀가 되었고, 푸아티에에 성 십자가 수녀원을 세우고 여생을 종교활동에 쏟아부었다.
532년, 클로타르 1세는 킬데베르 1세, 테우데베르 1세와 함께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2년간의 공세 끝에 534년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처단하고 부르군트 왕국 전체를 병합했다. 그러던 중 랭스의 왕 데우데리크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킬데베르 1세와 함께 테우데베르 1세를 쫓아내고 랭스를 양분하려 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1세가 그동안 확보한 전리품을 랭스 일대에 주둔한 프랑크군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자, 이에 감화된 그들이 선왕의 아들을 받들기로 결의하면서 곤란해졌고, 이후 테우데베르 1세가 거액의 뇌물을 주자 원정을 중단했다.
536-537년 킬데베르 1세와 함께 프로방스를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에 킬데베르 1세는 테우데베르 1세와 손잡고 그를 협공하려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투르의 수녀원에 있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어머니 클로틸데는 하느님에게 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킬데베르 1세와 테우데베르 1세가 합세한 장소에서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반면 클로타르 1세의 진영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포를 느낀 두 사람은 바닥에 엎드린 채 형제를 해치려 한 죄를 회개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윽고 날씨가 개이자 클로타르 1세와 화해한 뒤 즉시 철수했다고 한다.
541년 또는 542년 킬데베르 1세와 연합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고트 왕국의 도시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비록 함락에 실패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전역을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귀환했다. 555년, 테우데베르 1세 사후 랭스를 통치하던 테우데발트가 사망했다. 그는 이 땅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은 뒤 테우데발트의 미망인이자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부데트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이 일에 비난을 퍼붓자 부데트라다와 이혼하고 비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에게 부데트라다를 시집보냈다. 같은 해 라인강 동쪽에 살고 있던 색슨족이 쳐들어와 라인강 서안의 여러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그는 이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켜 색슨족을 격멸했고, 그들과 합세했던 튀링겐족도 분쇄했다.
그 후 새로 확보한 랭스 등 프랑크 왕국 동부 일대를 순방하던 그는 색슨족이 500마리의 소를 연간 바쳐야 한다는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군대를 동원해 그들에게 향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색슨족은 평화를 요청하면서 더 많은 공물을 바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약탈의 욕망을 들끓은 병사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이를 묵살하고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크군은 완패했고, 클로타르는 평화 협약을 겨우 맺은 뒤 귀환했다고 한다. 반면 마리우스 연대기는 프랑크군과 색슨족이 556년에 재차 충돌했다고 기술했을 뿐 패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무렵,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군림하던 킬데베르 1세와 그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아들 크람도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킬데베르 1세와 손을 잡으려 했다. 클로타르 1세는 아들을 달래고자 오베르뉴로 보내고 그에게 왕에 버금가는 칭호와 권한을 내렸다. 그러나 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킬데베르 1세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크람은 파리로 가서 킬데베르 1세 앞에서 "저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최악의 적이 될 겁니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반란이 터지면서 프랑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일부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키텐 왕국'을 세웠다.
클로타르 1세는 또다른 아들 카리베르 1세와 군트람을 보내 크람을 토벌하게 했다. 두 아들은 리모주에서 크람을 포위했지만, 크람이 클로타르 1세가 색슨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탈영병을 통해 퍼트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크람은 그 틈에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뒤늦게 아버지가 건재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베르 1세는 회군하여 크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던 558년, 킬데베르 1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서 파리-오를레앙 일대마저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 전역이 클로타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동맹을 잃은 크람은 브르타뉴의 브로그웨네드 왕인 차나오 1세에게 망명한 뒤 항전을 이어나갔다.
560년, 클로타르 1세는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하여 차나오 1세를 격파하고 전사시켰다. 크람은 패전 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아버지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클로타르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아들에게 분노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녀를 오두막에 가둬놓고 산채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들은 너무 잔혹하다고 여겨 몰래 그들을 먼저 교살한 뒤 시신을 오두막에 안치한 후 불태웠다.
561년, 클로타르 1세는 1년 전 화재로 고통받은 투르 시에 많은 선물을 주고 교회를 복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인 브레이로 돌아와서 숲에서 가을 사냥을 준비했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에 사냥 준비를 손수 지휘하느라 무리한 나머지 열병에 걸려버렸고, 콩피에뉴로 이송된 후 561년 11월 29일에 사망했다. 사후 수아송의 메다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561년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한 뒤, 프랑크 왕국은 다시 클로타르 1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킬페리크 1세는 수아송(훗날 네우스트리아로 개칭)을 맡았고, 카리베르 1세는 파리를 맡았으며, 오를레앙(훗날 부르군트로 개칭)은 군트람이 맡았고, 메츠(훗날 아우스트라시아로 개칭)는 시게베르 1세가 맡았다.
3. 가족 관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다양한 여성들을 아내로 두었다. 이는 프랑크족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불과 몇십년전 클로비스 1세 시절이었던지라 기독교 교리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첫번째 아내는 524년 사망한 형제 클로도미르의 미망인 군데우크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두번째 결혼은 532년경 튀링겐 왕 베르타차르의 딸 라데군타와 행해졌다. 하지만 라데군타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조국을 무너뜨린 그를 원망한 끝에 수녀원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자식을 보지 못했다. 세 번째 아내는 군데우크와 결혼하기 전부터 첩으로 두었던 인군트로, 그는 인군트와의 사이에서 콘티에르(517년~532년 이후), 카리베르 1세(521년~567년), 군트람(533년 ~ 592년), 시게베르 1세(535년 ~ 575년), 킬데리크(561년 이전 사망), 클로신드(567년 이전 사망)[2] 등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인군트가 546년에 사망한 후 그는 인군트의 여동생인 아레군트와 결혼하여 킬페리크 1세를 낳았다. 마지막 아내는 쿤시아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끝까지 자신에게 대적하다가 먼저 죽은 크람을 두었다.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블리틸데(Blitilde)라는 이름의 딸도 있었다. 블리틸데는 남부의 갈로-로만계 원로원 혈통의 귀족가문에 시집가 메츠 주교 아르놀트(Arnoald)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르놀트의 딸이 메츠의 성 아르눌(Arnoul)에게 시집가 차남 안셀기젤을 통해 결론적으로 카롤루스 왕조로 이어진다. 다만 블리틸데를 클로타르 1세의 딸로 적은 것을 카롤루스 왕조가 왕조의 정통성을 메로빙거 왕조와 잇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으로 정식 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낳은 서자로 군도발트가 있는데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클로타르 1세는 많은 서출을 남겼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중에 군도발트만 알려져 있는데, 서자였던 탓에 왕국의 분할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아키텐의 왕을 자처하면서 군트람과 대립하는 등 나름 중요한 행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또 클로타르 1세의 첩 가운데 랑고바르드의 공주였던 볼데트라다(Vuldetrade)[3]가 알려져 있는데 상당히 거물급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