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5 23:06:44

알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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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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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초대 국왕
Alboin | 알보인
파일:알보인.jpg
제호 한국어 알보인
라틴어 Alboin
생몰 년도 미상 ~ 572년 6월
재위 기간 560년 ~ 572년 6월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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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초대 국왕.

2. 행적

판노니아에서 게피드 족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던 랑고바르드족의 군주 아우도인과 로델린다의 아들이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아우도인은 동고트 왕국과 튀링겐족의 혼혈인 아말라프리다의 누이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여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파울 부제에 의해 명시된 로델린다와 동일인물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알보인의 초기 생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훗날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일찍부터 전술 훈련과 무술을 착실하게 교육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552년 아스펠드 전투에서 게피드 족의 군주 튀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처단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역량을 입증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알보인은 전투가 끝난 후 관례에 따라 게피드 족의 본거지로 찾아가서 투리스모드가 생전에 착용했던 무기를 돌려줬고, 튀리신드는 투리스모드의 팔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560년경 아버지의 뒤를 이어 랑고바르드족의 군주가 된 그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 했다. 알보인은 자신에게 귀순한 게피드족과 힘을 합쳐 아바르족과 맞섰으나, 아바르족의 군사적 역량이 월등했기에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이에 판노니아에 계속 있다가는 종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동로마 제국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 여파로 피폐해졌고, 동고트 왕국을 꺾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된 동로마 제국은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게다가 사산 왕조와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터라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랑고바르드족은 지난날 나르세스 장군 휘하의 동로마군에 고용되어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적이 있었기에, 이탈리아의 땅이 비옥하고 기후는 온화하다는 걸 잘 알았다. 알보인이 이탈리아로 진출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전후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568년, 알보인은 부족 전체를 이끌고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포룸 줄리(Forum Julii. 오늘날 프헤쥬스) 마을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아퀼레이아로 진군하여 역시 무혈 입성한 뒤 569년 밀라노를 공략하고 북부 이탈리아 각지로 진군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하지만 랑고바르드족은 공성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로마군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거점을 삼고 36개의 공국을 점령지 곳곳에 신설했다. 공작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전시에 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의무를 준수하는 한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알보인의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군이 주둔한 해안 도시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알보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희소하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의 치하에서 어떠한 폭력이나 부당한 억압이 없었고, 아무도 약탈하지 않고 도둑도 없고 강도도 없었으며, 모두가 안전하고 두려움없이 원하는 곳으로 갔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묘사를 과장된 것으로 여기지만, 그의 통치가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비해 지극히 온건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로마인들의 선진 문화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으며, 침략 과정에서 이렇다할 약탈이나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군림하는 로마 황제의 혹독한 통치를 받는 것보다는 이민족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그들의 통치를 받는 편이 나았다.

알보인은 이렇듯 민심을 얻고 나라를 순조롭게 다스렸지만,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베로나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쿠니문드의 해골에 술을 담은 뒤 쿠니문드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로자문드에게 이를 마시라고 요구했다. 로자문드는 억지로 술을 마신 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분노를 느꼈고, 남편에게 복수하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녀는 알보인의 양형제인 헬메치스와 남몰래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의 설득을 받아들여 근위대원 페레도를 포섭해 알보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파일:알보인 암살.jpg

572년 6월 어느 날, 알보인이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헬메치스와 페레도가 공격했고, 로자문드는 알보인의 검을 사전에 숨겼다. 알보인은 검이 없자 발판을 뜯어서 저항했지만 끝내 두 사람에게 피살당했다. 페레도는 알보인의 어린 딸 알부이다와 함께 라벤나로 이동해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토대로 알보인 암살 사건의 배후에 동로마 제국이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헬메치스는 알보인을 죽인 뒤 왕을 칭했다. 그러나 공작들은 헬메치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파비아 공작 클레프를 왕으로 옹립했다. 헬메치스와 로자문드는 라벤나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로자문드는 이탈리아 총독 롱기누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헬메치스를 독살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헬메치스 역시 그녀가 배신할 것을 우려해 독을 따로 마련해뒀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가 먹을 음식에 독을 타서 함께 죽었다. 클레프는 18개월 동안 랑고바르드 왕국을 다스렸으나 신하에게 암살당했고, 공작들은 10년간 왕을 세우지 않고 알아서 지냈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584년 아우타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