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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벤토 공국 Ducatus Beneventi Principatus Beneventi | ||
571년 ~ 1077년 | ||
위치 | 이탈리아 남부 | |
수도 | 베네벤토 | |
정치체제 | 봉건제 | |
국가원수 | 공작 → 대공 | |
주요 공작 | 조토(571~591) 아레치스 2세(758 ~ 787) 지카르드(832 ~ 839) 아테눌프 1세(900 ~ 910) 란둘프 6세(1054 ~ 1077) | |
언어 | 이탈리아어, 랑고바르드어, 라틴어, 아랍어, 중세 그리스어 | |
종족 | 랑고바르드인, 라틴인, 그리스인, 아랍인, 노르만인(후기) | |
종교 | 아리우스파 → 가톨릭 | |
주요사건 | 571년 건국 774년 아레치스 2세의 대공 자칭 838년 지카르드의 남부 이탈리아 패권 확보 851년 살레르노 공국의 이탈 900년 카푸아 가문의 지배 1051년 교황청에 귀속 1077년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정복됨. | |
성립 이전 |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 |
해체 이후 | 로베르 기스카르 치하 아풀리아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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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71 ~ 1077년 베네벤토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배한 랑고바르드계 공국. 랑고바르드 왕국의 봉신국이었다가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 정복된 뒤 카롤루스 대제의 침공에 일시적으로 복속했을 때를 제외하고 300여 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라센 해적, 동로마 제국, 노르만인의 침략 등으로 쇠락하다가 1077년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정복되었다.2. 역사
2.1. 랑고바르드 왕국 치하 베네벤토 공국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파도바를 수도로 삼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알보인 휘하 귀족들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해 독립 공국들을 세웠는데, 그 중엔 조토라는 인물도 있었다.<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를 집필한 8세기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 따르면, 조토는 570년 8월 캄파니아에 침투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베네벤토에 거점을 삼고 공작(Duke)으로서 주변 지역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나폴리 공략에 착수했지만 수 년간의 공방전 끝에 581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파비아에 정착한 알보인의 랑고바르드 왕실에 겉으로나마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584년 왕위에 오른 아우타리에게는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다가 588년 아우타리가 프랑크 왕국의 침공을 무사히 막아내고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해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자 589년 파비아에 공물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591년 조토가 사망한 뒤, 그의 인척이었던 아레치스 1세가 랑고바르드 국왕 아길루프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594년 테라 디 나보로(Terra di Lavoro)와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지역의 카푸아를 공략하고 595년 베나프로(Venafro)를 정복했으며, 여세를 이어가 나폴리를 포위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파견한 트리뷴 콘스탄티노에게 패배해 공략에 실패했다. 596년 놀라를 공략하고 아말피를 위협했으며, 크로토네를 한때 공략했지만 동로마 함대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5986년 라벤나 총독부 총독 칼리니쿠스와 아길루프가 휴전 협약을 맺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601년 휴전이 파기된 후 공세를 지속해 620년 무렵에 살레르노를 장악했다.
이후 파비아의 랑고바르드 왕실이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느라 베네벤토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로마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636년 집권한 로타리가 자신에게 거역한 공작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어느 공작도 왕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자,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들 아이울프 1세를 파도바 궁정에 인질로 보냈다. 그런데 아이울프는 파비아에 가던 중 라벤나에 들러 술을 진창 마셨다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다. 이에 아들의 앞날을 근심한 아레치스는 641년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는 대신 양자인 라도알트와 그리말트에게 섭정을 맡겼다.
642년 슬라브인들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시폰토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했다. 아이울프는 두 섭정이 마침 자리를 비웠을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입자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말이 적진 주변에 슬라브인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구덩이에 갇힌 채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도알트는 군대를 이끌고 슬라브족에게 접근했다. 라도알트는 슬라브어를 할 줄 알았기에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슬라브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좋은 말로 달래는 것에 안심하여 경계를 풀었다. 이때 라도알트가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그들을 덮쳐 마구잡이로 쳐죽였고, 몇몇 슬라브인 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헤 랑고바르드 국왕 로타리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어 5년간 통치하다가 647년에 사망했다.
라고알트 사후 동생 그리말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가르가노 산에 있는 몬테 산탄젤로 성역을 약탈하려 한 '그리스인'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러던 662년, 랑고바르드 왕위를 놓고 형제 페르타리트와 한창 내전을 벌이던 고데페르트가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비아로 진군했다. 고데페르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페르타리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663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이탈리아 전역을 재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강력한 군대를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해 로무알트를 격파하고 베네벤토를 포위했다. 그리말트는 즉시 아들을 구하고자 출격했고, 콘스탄스 2세는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리로 후퇴했다.
671년 그리말트가 사망한 뒤 그리말트와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의 아들인 가리발트가 랑고바르트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재위 3개월 만에 왕국에 돌아온 페르타리트에게 축출되었다. 로무알트는 이복동생을 몰아낸 페르타리트와 맞서기보다는 타협하기로 하고, 자신이 무제한의 자치권을 누리는 걸 용인받는 대신 그리발트가 생전에 포로로 잡아뒀던 페르타리트의 아내 로델린다와 아들 쿠닝페르트를 랑고바르트 왕실이 있는 파비아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후 로무알트 1세는 판노니아에서 벌어진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 이탈리아로 망명한 불가르족 또는 아바르족인 알제코(Alzeco)에게 목초지를 주고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에 선임하는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고, 이를 토대로 타란토와 브린디시 공략에 성공했다.
687년 로무알트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그리말트 2세가 새 공작이 되었지만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689년에 사망했다. 이후 남동생 기술프 1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703년경 라벤나 총독부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폭정에 분노한 라벤나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 있던 소라, 아르피노아르케 일대를 공략하고 캄파니아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다 푸테올리 마을에서 교황 요한 6세의 사절단이 찾아와서 막대한 뇌물을 찔러주며 돌아가달라고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706년 기술프1세 사후 아들 로무알트 2세가 베네벤토의 새 공작에 취임했다. 717년 나폴리 총독 요안네스를 격파한 뒤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쿠마에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교황 특사 테오디무스를 보내 70파운드의 금을 줄 테니 쿠마에를 돌려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쿠마에를 돌려줬다. 731/732년 로무알트 2세가 사망하자, 많은 이들은 로무알트 2세의 아들인 기술프 2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공작 계승권을 박탈하고 아우델라이스를 공작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733년 기술프 2세의 지지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베네벤토에서 축출되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국왕 리우프란트가 개입해 자신의 조카 그레고리오를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하고 기술프 2세를 파비아로 데려가서 아들처럼 키웠다.
739년 그레고리오가 사망한 뒤, 베네벤토인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의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고데스칼을 독자적으로 선임했다. 그는 아내 안나와 함께 볼투르노 수도원에 여러 땅을 기증해 교회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리우프란트의 편을 들기로 했고, 역시 리우프란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는 리우프란트의 공세에 밀렸다. 이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742년 리우프란트의 공세에 직면하자 아내와 함께 배에 귀중품을 싣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나려 했다가 도중에 기술프 2세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리우프란트에 의해 베네벤토 공작에 세워진 기술프 2세는 745년 9월 킨기아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 테아노 인근의 영지를 기증했으며, 750년 볼투르노 수도원에도 재산을 기증했다. 이 사실은 12세기 불투르노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요한이라는 수도자가 라틴어로 집필한 <볼투르노 연대기>에 기재되었다.
751년 기술프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프란트가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스카우니페르가가 756년까지 섭정했다. 756년 랑고바르드 국왕 아이스툴프가 사망한 뒤 라치스와 데시데리우스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 758년, 역시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스폴레토 공작 알보인을 사로잡은 데시데리우스가 베네벤토로 쳐들어왔다. 그는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동로마 제국에 속한 오트란토로 도주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사위 아레치스 2세를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했다.
2.2.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를 오가다
774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아레치스 2세는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베네벤토 대공의 칭호를 채택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예상되는 공세를 대비해 살레르노로 궁정을 옮긴 뒤 살레르노 시와 해안을 수비하기 위해 카스텔로 디 아레칠리(Castello di Arechi)를 건설했다. 이 성채는 중세 이탈리아의 가장 견고한 성채로 손꼽혔다. 그리고 랑고바르드 국왕 로타리가 제정한 법률을 개정해 독자적으로 법률을 집행했으며, 예술과 교육을 후원했다.한편, 아레치스 2세는 저명한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파울 부제에게 <히스토리아 로마나(Historia Romana: 로마인의 역사)>를 집필하도록 의뢰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파울 부제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사(Historia Gentis Langobardorum)>를 집필하도록 의뢰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787년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 이르자,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모면하기 위해 상당량의 선물과 함께 아들 로무알트를 보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는 로무알트를 생포한 뒤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가 베네벤토를 손쉽게 공략했다. 하지만 아레치스 2세가 웅거하고 있는 살레르노 공략에 실패했고, 아레치스 2세의 협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아레치스 2세는 아들 그리말트 3세를 인질로 보내고 프랑스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며 연간 공물로 7,000 솔리두스를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아르케, 아퀴노, 아르피노, 소라, 테아노, 카푸아를 교황령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도시를 교황에게 넘기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한 뒤 데시데리우스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한 아델치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787년 8월 26일 아레치스 2세가 사망한 뒤, 베네벤토인들은 프랑크 왕국에 인질로 보내졌던 그리말트 3세를 새 공작으로 추대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아델페르가가 섭정하게 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를 보내주는 것을 망설였지만, 그가 "앞으로 프랑크 왕국에 대적하지 않고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하자 이를 믿고 보내줬다. 788년 초 베네벤토 공국으로 돌아온 그리말트 3세는 시칠리아의 파트리키우스인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아델치스를 앞세워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와 위니게스 위하의 프랑크군과 연합해 동로마군을 협공해 궤멸시켰다. 아델치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테오도로스는 생포되었으며, 4,000명의 동로마군이 사살되고 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내던 그리말트 3세는 790년경 마음을 달리 먹고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동로마 귀족이며 콘스탄티노스 6세의 왕비 암니아의 마리아의 할아버지인 필라레토스의 딸 에우안티아(Euanthia)와 결혼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이며 롬바르드 국왕인 피핀 카를로만은 이에 자극받아 791년 베네벤토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792년 피핀의 형인 아키텐 왕 루트비히는 베네벤토 공국을 향한 2번째 공세를 준비했지만 기근으로 인해 취소했다.
그리말트 3세는 792년 이래로 주조한 동전에 카롤루스의 이름을 더 이상 새기지 않았고, 자신의 칭호를 프린켑스로 지정했다. 또한 동전에 "Langobardorum Genti"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이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800년 카롤루스 대제는 피핀에게 베네벤토 공략을 재차 맡겼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말트 3세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실패했다. 802년, 그리말트 3세는 루체리아에서 스폴레토 공작 위니게스를 생포했다가 1년 후에 석방시켰다.
806년 그리말트 3세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스톨세이스(stoleseyz), 즉 재무관을 맡고 있던 그리말트 4세가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리말트 3세의 반 프랑크 정책을 지속했지만 812년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카에티 백작령을 이탈리아 중부에서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던 스폴레토 공국에 넘기고 매년 25,000 두카트를 지불하는 대가로 평화를 약속받았다. 이 이 금액은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하고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후 7,000두카트로 삭감되었다.
이후 궁정을 살레르노에서 베네벤토로 옮긴 그는 817년 나폴리 시민들이 베네벤토 공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으로 이탈하자 이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아세렌차의 지코와 콘차의 라델치스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대공에 선임된 지코의 행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파편적으로 전해지는 중세 이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나폴리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폴리의 수호성인인 성 제나로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고 한다. 또한 란둘프라는 인물을 가스탈트[1]에 선임했다. 란둘프는 본거지 명칭을 지코폴리스(Sycopolis)라고 정함으로써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했다. 훗날 그의 후예들로 구성된 카푸아 가문은 남이탈리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832년 지코눌프가 사망한 뒤, 장남 지카르드가 베네벤토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소렌토, 아말피, 나폴리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836년 7월 세 도시와 5년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상인들에게 통행권을 인정했지만, 전쟁은 이후에도 반복되었다. 837년 지카르드의 공세에 밀린 나폴리 공작 안드레아 2세는 시칠리아 토후국에 사절을 보내 막대한 급료와 무제한의 약탈 권한을 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아랍인들이 들어오면서, 무슬림의 영향력은 남부 이탈리아에 미쳤다.
838년 아말피 시를 해상을 통해 공략하는 데 성공하고 그곳의 시민들을 살레르노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일부 아말피 상인들을 고용해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인 에올리에 제도에 있던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유물을 회수하게 했다. 그는 이 유물을 살레르노 대성당에 안치시켰다. 그러나 839년 돌연 암살당했는데, 암살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추정하는 재무관 라델치스 1세는 즉시 대공을 자처하고, 지카르드의 동생 지코눌프를 타란토에 감금했다. 이에 지난날 지코 대공에 의해 카푸아의 가스탈트에 선임되었던 라둘프가 841년 지코눌프를 구출했고, 지코눌프가 살레르노로 가서 독자적인 공국을 세우면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벤토 공국은 살레르노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으로 양분되었다.
2.3. 내우외환
841년 베네벤토 공국과 살레르노 공국의 분열.
베네벤토 공국이 라델치스 1세를 따르는 세력과 지코눌프를 따르는 세력으로 양분된 뒤, 양자는 공국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841년, 라델치스는 자력으로 지코눌프와 란둘프를 이기지 못하자 시칠리아 토후국에 막대한 재물을 바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많은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카푸아를 약탈했고, 란둘프는 트리프리스코(Triflisco) 언덕 인근에 새로운 수도를 세워야 했다. 지코눌프는 이에 대응해 많은 아랍인 용병들을 끌여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아랍인 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이들이 벌이는 약탈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847년에 아글라브 왕조의 노예 출신인 칼푼이 바리를 탈취하고 바리 토후국을 건국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무슬림 국가가 최초로 등장했다.
851년,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의 혼란과 무슬림들의 이탈리아 진출을 보다못한 루도비코 2세가 두 사람에게 당장 타협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라델치스와 지코눌프는 베네벤토 공국을 절반으로 나눠 가지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코눌프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이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몇 달 후 라델치스 1세가 사망했고, 장남 라델가르가 대공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3년만인 854년에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아들로 왈페르를 두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형제 아델치스가 대공을 계승했다.
856년, 아델치스는 살레르노 공국의 공작 아데마르와 동맹을 맺고 바리 토후국을 세운 무슬림을 물리치려 했으나 참패했다. 그 후 무슬림군이 두 공국으로 쳐들어가 막대한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인구를 끌고 갔다. 결국 860년 바리 에미르 사우단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86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는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북부 이탈리아의 전사들에게 루세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출진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 엥겔베르가와 함께 캄파니아 일대를 여행했다. 이에 아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조속히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로마까지 몰아붙일 테니 서둘러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867년 봄, 비로소 바리 토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한 루도비코 2세는 마테라를 공략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오리아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이 장악한 바리와 타란토와의 교통로가 끊어졌다. 이후 황제는 베네벤토에 도착한 루도비코 2세는 868년 겨울을 베네벤토에 머물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바리 토후국을 향한 합동 공세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마침 바리 토후국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연이어 습격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던 바실리오스 1세는 루도비코 2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이후 루도비코 2세가 이끄는 제국군과 아델치스의 베네벤토군, 동로마 함대가 합동 공격을 펼친 끝에 871년 2월 바리를 공략함으로써 바리 토후국은 24년 만에 멸망했다.
아델치스는 바리 토후국이 지배하던 아풀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바랐지만, 루도비코 2세는 그가 그다지 유순하지 않은 가신이라 여기고 아풀리아를 넘겨주길 거부했다. 게다가 베네벤토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베네벤토를 완전히 통제하려 했다. 그러자 아델치스는 베네벤토에 머무는 황제 일행을 습격했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와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40일간 억류되었던 황제는 다시는 베네벤토로 오지 않을 것이며 랑고바르드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관계를 끊고 동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서약한 그는 무슬림 해적들의 맹공으로 곤경에 처한 교황령이 동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할 때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876년 바실리오스 1세가 바리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그는 이번에는 아랍 세력에 접근하여 동로마 제국을 축출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인 878년 5월 말에 돌연 암살당했다. 암살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베네벤토 대공에 선임된 왈페르 본인 또는 추종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왈페르는 재위 말년에 무슬림 세력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려 했던 숙부와는 달리 바리의 동로마 총독과 우호관계를 맺고, 교황령에 사절을 보내 무슬림들의 습격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879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가 사망한 후 계승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란둘프 3세에 맞서 싸우는 판데눌프를 지원했다. 881년 5월 아델치스의 자식들을 지지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폐위되어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탈옥에 성공한 그는 바리에 망명했고,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하여 프로토스파타리우스에 선임되었고 오리아 시의 행정관이 되었다.
왈페르를 몰아낸 베네벤토인들에 의해 대공에 선임된 아델치스의 장남 라델치스 2세는 885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침공으로 칼라브리아를 상실하면서 위신이 실추된 틈을 탄 동생 아이울프 2세의 정변으로 인해 폐위된 후 베네벤토 외곽으로 추방되었다. 뒤이어 대공을 맡은 아이울프 2세는 얼마 후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의 공세로 인해 베네벤토를 빼앗기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스폴레토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스폴레토 공국까지 공격하면서 귀도 3세가 이를 막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탈출해 베네벤토로 귀환했다. 887년 바리 총독 테오필락토스가 가릴리아노강 유역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에 착수한 틈을 타 바리를 기습 공략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나폴리 공작 아타나시우스가 즉시 반격에 착수하자 바리를 도로 내주고 베네벤토로 철수했다.
이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맹공을 퍼부으면서 산타 세베리나, 레기온, 타오르미나, 트로파 등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상실하고 베네벤토마저 포위되는 형국에 처하자, 스폴레토 공국과 카푸아 백국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891년 10월에 사망했고, 아들 우르수스가 배네벤토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우르수스 역시 동로마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892년경 칼라브리아의 스트라테고스인 시바티키오스에 의해 베네벤토가 공략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설치한 랑고바르디아 테마의 일부로 전락한 베네벤토 공국은 895년 스폴레토 공작 귀도 4세가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시메온 대제와의 전쟁에 관심이 집중된 틈을 타 베네벤토를 탈취하고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했다. 이후 여동생 이타의 남편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 섭정을 맡겼지만, 과이마르 1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의 중용을 받던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하는 바람에 생포되었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7년, 귀도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친척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가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3세의 시종이었던 알베리크 1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알베리크 1세는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에 선임되었고, 베네벤토 대공에는 지난날 스폴레토 공국에 망명했던 라델치스 2세가 귀도 3세의 아내이자 그의 누이인 아게투르데의 지원에 힘입어 복위했다. 그러나 900년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에 의해 폐위되면서 베네벤토 공국은 카푸아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4. 카푸아 가문
베네벤토를 최종적으로 장악한 카푸아 백작 아테눌프 1세는 901년 아들 란둘프 1세를 베네벤토 공동 대공에 선임하고 베네벤토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했다. 베네벤토 주교 피에트로가 카푸아 가문의 지배에 맞서 정변을 꾀했지만, 아테눌프 1세는 이 음모를 조기에 막아내고 피에트로를 살레르노로 추방했다. 903년 아말피 공화국과 나폴리 백작 그리고리오스 4세와 동맹을 맺고 가릴리아노강 유역으로 침투한 사라센을 격파했다. 이후 사라센에 대적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봉신을 자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공물을 바쳤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사라센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추진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910년에 사망했다.아테눌프 1세 사후 두 아들 란둘프 1세와 아테눌프 2세가 베네벤토 와 카푸아 대공을 공동으로 맡았다. 이후 나폴리 공작 그리고리오스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으며,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지속하면서도 봉신을 자처한 아버지와는 달리 황제의 가신이 되겠다고 서약하지 않았다. 915년, 란둘프 1세는 아버지가 추진한 사라센에 대항한 원정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스폴레토 공국의 알베리크 1세, 살레르노 공국의 과이마르 2세, 교황 요한 10세, 바리 총독부의 스트라테고스인 니키타스 피킨기오스와 연합했다. 이때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나폴리 전임 백작 아나스타시오스 2세의 딸 게마와 결혼했고, 동생 아테눌프 2세의 딸 가이텔그리마(Gaitelgrima)를 과이마르 2세와 결혼시켰으며, 아들 아테눌프 3세를 과이마르 2세의 딸 로틸다와 결혼시켰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의 알베리크 1세가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연합군에 지원병을 파견했다.
915년 6월, 연합군은 캄포 바카노, 비아 카시아, 티볼리 및 비코바로 등지에서 무슬림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에 알리쿠(Alliku)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가릴리아노 강 인근의 요충지인 트레토로 철수했다. 연합군은 트레토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고, 동로마 함대는 해상에서 구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바닥난 무슬림들은 포위망을 뚫고 시칠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원 죽거나 사로잡혔다.
914년 또는 916년, 아테눌프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안티파토스와 파트리키오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921년 아풀리아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이 때를 틈타 아스콜리 요새를 공략하고 바리 총독부의 새 스트라테고스인 오르솔레오스를 처단했다. 그러나 922년에서 925년 사이에 사라센와 슬라브 해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캄파니아가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925년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의미로 제국으로부터 받은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929~934년 살레르노의 과이마르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령 아풀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제국은 935년 파트리스 직책을 맡고 있던 코스마스에게 11척의 함대를 이끌고 슬라브 함선 7척과 함께 아풀리아로 파견했지만 혼란 수습에 실패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베네벤토와 살레르노 대공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왕 우고와 동맹을 맺었다. 란둘프 1세는 이에 대응해 형제 아테눌프 2세 및 아들 아테눌프 3세와 함께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와 상호 원조 협약을 체결했다.
936년, 란둘프 1세는 아풀리아 지역의 만프레도니아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937년, 우고 왕에게 고용된 마자르족이 론 계곡을 거쳐 이탈리아로 행진해 캄파니아로 진입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격퇴에 실패했고, 마자르족은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고 돌아갔다. 940년 란둘프 1세가 파견한 베네벤토군이 동로마 제국에 소속된 마테라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란둘프 1세는 911년 동생 아테눌프 2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고, 933년 아들 아테눌프 3세를 공동 대공으로 선임했다. 940년 아테눌프 2세가 죽자 조카 란둘프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지만 모종의 이유로 추방했다. 이후 또다른 아들 란둘프 2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란둘프 1세가 943년 10월 4일에 사망한 뒤, 란둘프 2세가 아테눌프 3세를 살레르노 공국으로 쫓아내고 권좌에 올랐다. 이후 장남 판둘프 1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워서 후계 계도를 공고히 한 그는 살레르노 공국을 결합시켜서 장차 랑고바르드 왕국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946년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2세가 죽자, 나폴리 공작 요안니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살레르노 공국의 새 대공 기술프 1세를 축출했다. 그러나 아말피 공화국의 마스탈로의 급습으로 인해 카바 계곡에서 패배했고, 기술프 1세는 살레르노 대공으로 복위했다. 이후 정책을 바꿔서 나폴리 공국과 동맹을 끊고 기술프 1세와 연합해 나폴리를 공격하여 놀라 시를 공략했다.
950년 아퀴노의 가스탈트인 아테눌프 메갈루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인 알리게르노가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기술프 1세와 함께 몬테 카시노로 이동해 아테눌프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몬테 카시노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살레르노 공국과 함께 영토를 분할했다. 955년 아풀리아 지역민들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만, 동로마 제국이 이를 손쉽게 진압하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오자 동로마 제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961년 란둘프 2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판둘프 1세와 란둘프 3세가 카푸아-베네벤토 연합 대공국을 공동으로 이끌었다. 965년 12월 16일 로마 귀족들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와 손을 잡고 자신들의 권력을 통제하려는 교황 요한 13세를 체포해 캄파니아의 로프레도 성에 감금했다. 요한 13세는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카푸아로 달아났고, 판둘프 1세는 교황에게 기꺼이 은신처를 제공했다. 요한 13세는 이에 보답하고자 카푸아 교구를 관구로 승격시키고 판둘프 1세의 동생 조반니를 카푸아 관구의 첫 관구장 주교로 선임했다. 10개월 후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때 호위병을 제공했다.
967년 오토 1세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판둘프에게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을 넘겨주면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동생과 함께 병력을 소집한 뒤 968년 오토 1세의 남부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란둘프 3세가 갑작스러운 병환에 걸려 베네벤토로 간 뒤 얼마 안가 사망하자, 판둘프 1세는 신속하게 베네벤토로 돌아와 아들 란둘프 4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우고 란둘프 3세의 두 아들 판둘프 2세와 카푸아의 란둘프 7세를 추방했다.
이후 오토 1세의 원정군에 재합류한 그는 바리 포위전에 가담했지만, 969년 보비노 전투에서 동로마군의 역습으로 참패하고 생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끌려갔다. 970년 그가 부재한 동안 동로마군이 카푸아를 포위 공격했고,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는 베네벤토 공국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이후 요안니스 1세가 니키포로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뒤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자신의 조카딸 테오파노를 결혼시키는 과정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었다.
973년, 아테눌프 2세의 아들이었으며 940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백부 란둘프 1세에 의해 공동 대공에 선임되었다가 얼마 안가 추방당한 란둘프가 나폴리 공작 마리누스 2세와 아말피 공화국의 만소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 기술프 1세를 몰아내고 살레르노 공국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판둘프 1세가 즉각 살레르노로 진격해 란둘프를 몰아내고 기술프 1세를 복위시켰다. 978년 기술프 1세가 사망한 뒤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계국인 베네벤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스폴레토 공국, 카메리노 공국, 카푸아 백국 전역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동로마 제국령 남부 이탈리아마저 석권하기 위해 공세를 계획하던 판둘프 1세는 981년 원정을 채 감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장남 란둘프 4세는 카푸아의 베네벤토 공국을 상속받았고, 차남 판둘프 2세는 살레르노 공국을 상속받았다. 반면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공국은 오토 2세에 의해 회수되어 트라사문트 4세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981년 중반, 베네벤토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란둘프 4세를 축출하고 판둘프 1세의 동생 란둘프 3세의 아들이며 지난날 란둘프 3세가 사망한 뒤 판둘프 1세에 의해 추방당했던 판둘프 2세를 새 대공으로 추대했다. 그는 카푸아 공국으로 피신한 뒤 아말피 공화국의 만소 1세에 의해 축출되어 카푸아로 망명한 형제 판둘프 2세와 합세한 뒤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을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82년 오토 2세로부터 타란토의 사라센 토벌에 함께하라는 통보를 받자, 이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서 베네벤토와 살레르노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할 기회를 얻기로 했다.
982년 7월 14일 콜로네 곶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은 시칠리아 토후국의 에미르 아불 카심을 전사시킴으로써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사라센들이 전의를 상실하기는 커녕 더욱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숨겨두고 있던 예비 기병대가 뛰쳐나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측면과 배후를 습격하는 바람에 도리어 신성 로마 제국군이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4,000여 명이 사살되었고,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하인리히 1세,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귄터, 풀다 수도원장을 포함한 19명의 독일 백작들이 죽었다. 황제 오토 2세 조차 전장을 간신히 탈출한 뒤 동로마 선박을 타고 로사노로 피신했다가 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란둘프 4세와 판둘프 2세 역시 전사했다.
두 사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판둘프 2세는 카푸아 대공을 겸임하려 했지만 오토 2세에게 제지되었다. 오토 2세는 란둘프 4세의 또다른 형제인 란데눌프 2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987년, 판둘프 2세는 자신의 아들 란둘프 5세를 베네벤토의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993년 부활절에 란데눌프 2세가 테라노 백작 라이둘프의 선동을 받은 백성들에게 피살당했고, 라이둘프가 카푸아 대공에 추대되었다. 99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란데눌프 2세를 살해한 것에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이둘프를 공격해 생포하여 독일로 압송한 뒤 아데마르를 카푸아 대공에 세웠다. 판둘프 2세는 이에 불복해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에 반감을 품은 카푸아인들을 부추겨서 그해 7월 정변을 일으켜 카푸아에서 아데마르를 축출하게 한 뒤 동생 란둘프 7세를 카푸아 대공으로 세웠다.
1000년, 판둘프 2세는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성물을 놓고 오토 3세와 대립했다. 황제는 대군을 일으켜 베네벤토를 포위했지만, 베네벤토인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한 데다 제국의 수도로 정한 로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철수했다. 1003년 아벨리노 백작 아델페르가 정변을 일으켜 판둘프 2세와 란둘프 5세를 베네벤토에서 축출했다. 이후의 향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1005년경에 베네벤토에서 통치를 행사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몇년 안에 진압된 것으로 추정된다. 1007년 카푸아를 다스리던 란둘프 7세가 사망하자, 판둘프 2세는 카푸아 대공을 겸임하면서 또다른 아들 판둘프 4세를 카푸아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1014년 판둘프 2세가 사망한 뒤, 란둘프 5세가 베네벤토 시의 권력을 승계받은 뒤 아들 판둘프 3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웠다. 얼마 후 베네벤토 시민들이 반기를 들었지만 진압되었다. 하지만 베네벤토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그는 그들이 최초의 코뮌을 결성하여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는 등 많은 특권을 양보해야 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바리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네스가 베네벤토 인근의 트로이아를 재요새화하고 압박을 가하자,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102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 대공이자 란둘프 5세의 형제인 판둘프 4세를 사로잡은 뒤 베네벤토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트로이아 공략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군은 트로이아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공략에 실패한 후 철수했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1024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남부 이탈리아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자, 다시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 과정에서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하에 있던 대부분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 귀속되거나 독립했고, 공국의 남은 영토는 베네벤토 시와 주변 시골에 불과했다.
1033년 란둘프 5세가 사망한 뒤, 판둘프 3세가 권력을 계승하고 1038년 아들 란둘프 6세를 베네벤토 공동 대공에 세웠다. 1040년, 롬바르드족 출신의 아두인, 멜피의 토포테리파, 그리고 노르만 용병들은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는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판둘프 3세의 동생인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남이탈리아인들에게 여전한 경외를 받는 베네벤토 공국의 일원이고, 실제로는 한미한 세력이니 자기들을 통제하려 들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1041년 9월 3일, 반란군은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 보이오안네스를 사로잡고 베네벤토에 수감했다.
그런데 1042년 2월, 아테눌프는 동로마 제국이 엑사고스토스의 몸값으로 지불한 돈을 가지고 그리스로 도망쳐 버렸다. 당시 노르만 용병대가 살레르노 공작 과이마르 4세에게 상당한 급료를 지불받아 점차 포섭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달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용병대는 기껏 세웠던 지도자가 돈을 갖고 도망쳐버리자 아르이로스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아르이로스는 동로마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며 4년간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다가 1046년 콘스탄티노스 9세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귀순했다. 이렇듯 남부 이탈리아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는 동안,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 부자는 베네벤토 시에서 잠자코 지냈다.
10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메초조르노를 장악했다. 이후 황후 푸아투의 아그네스와 함께 가르가노에 순례자로 방문하고자 했는데, 베네벤토 정부는 아그네스는 기꺼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하인리히 3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마음이 상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 베네벤토를 포위했고, 황제의 압력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2세는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를 파문했다. 판둘프 3세는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동생 디우페리우스[2]와 함께 살레르노 공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군이 베네벤토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하자 베네벤토로 귀환했다.
1050년 교황 레오 9세가 가르가노를 순례하면서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의 파문을 재확인했다. 이에 베네벤토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두 부자를 몰아내고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1051년 4월, 시민들은 교황에게 도시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7월 5일에 이를 수락했고, 1053년 교황 특사 로돌포에게 베네벤토를 관장하게 했다.
1053년 6월 치비타테 전투에서 참패한 레오 9세가 노르만인들에게 사로잡히자, 베네벤토인들은 판둘프 3세와 란둘프 6세를 도시에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복위에 성공했지만, 그들은 교황의 봉신을 자처하고 교황령에 상당한 공물을 바쳤다. 이후 1056년 손자 판둘프 4세를 공동 대공으로 세우고 수 년간 통치하던 판둘프 3세는 1059년 은퇴하여 산타 소피아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1060년에 사망했다.
판둘프 3세의 뒤를 이어 베네벤토 시의 권력을 장악한 란둘프 6세는 1065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부터 "유대인의 개종을 강제로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과 1071년 10월 교황에 선임된 그레고리오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벤토 시민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낸 것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1074년 2월 7일 아들이자 공동 대공인 판둘프 4세가 베네벤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노르만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출진했다가 몬테사르치오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리하여 유일한 후계자가 사라져버린 란둘프 6세는 1077년 11월 27일에 사망했고, 베네벤토 공국은 노르만계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아풀리아 공국에 흡수되었다.
2.5.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베네벤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이름만 걸어놓을 뿐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다가 1081년 교황에게 돌려주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서임권 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에, 베네벤토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베네벤토에는 공작이나 대공이 오랫동안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베네벤토를 공략한 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베네벤토 대공으로 세웠다. 탈레랑은 1815년까지 작위를 유지하다가 빈 회의 직후 교황에게 반납했다.3. 역대 공작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베네벤토 공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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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베네벤토 공작
가우시 가문[3]- 라도알트 (642 ~ 647)
- 그리말트 1세 (647 ~ 662): 662년부터 671년까지 랑고바르드 국왕으로 재위.
- 로무알트 1세 (662 ~ 687)
- 그리말트 2세 (687 ~ 689)
- 기술프 1세 (689 ~ 706)
- 로무알트 2세 ( 706 ~ 731/732)
- 아우델라이스 (731/732 ~ 733)
- 그레고리오 (733 ~ 740)
- 고데스칼 (740 ~ 743)
- 기술프 2세 (743 ~ 749)
- 리우프란트 (749 ~ 758)
- 아레치스 2세 (758 ~ 774)
3.2. 베네벤토 대공
- 아레치스 2세 (774 ~ 787)
- 그리말트 3세 (787 ~ 806)
- 그리말트 4세 (806 ~ 817)
- 지코 (817 ~ 832)
- 지카르드 (832 ~ 839)
- 라델치스 1세 (839 ~ 851)
- 라델가르 (851 ~ 854)
- 아델치스 (854 ~ 878)
- 왈페르 (878 ~ 881)
- 라델치스 2세 (881 ~ 885)
- 아이울프 2세 (885 ~ 891)
- 우르수스 (891 ~ 892)
- 동로마 제국의 지배 (892 ~ 895)
- 스폴레토 공국의 귀도 4세 (895 ~ 897)
- 라델치스 2세 (897 ~ 900)
3.3. 카푸아 가문의 지배
- 아테눌프 1세 (900 ~ 910)
- 란둘프 1세 (901 ~ 910): 아테눌프 1세와 공동 통치
- 란둘프 1세 (910 ~ 943)
- 아테눌프 2세 (911 ~ 940): 형 란둘프 1세와 공동 통치.
- 아테눌프 3세 (933 ~ 943): 아버지 란둘프 1세, 삼촌 아테눌프 2세와 공동 통치.
- 란둘프 2세 (940 ~ 943): 아버지 란둘프 1세와 함께 공동 통치.
- 란둘프 2세 (943 ~ 961)
- 란둘프 3세 (961 ~ 968)
- 판둘프 1세 (961 ~ 981)
- 란둘프 4세 (968 ~ 981): 아버지 판둘프 1세와 공동 통치.
- 란둘프 4세 (981)
- 판둘프 2세 (981 ~ 1014)
- 란둘프 5세 (987 ~ 1014): 아버지 판둘프 2세와 공동 통치.
- 란둘프 5세 (1014 ~ 1033)
- 판둘프 3세 (1014 ~ 1033): 아버지 란둘프 5세와 공동 통치
- 판둘프 3세 (1033 ~ 1050)
- 란둘프 6세 (1038 ~ 1050): 아버지 판둘프 3세와 공동 통치
3.4. 교황의 가신
- 로돌포 (1053): 교황청 특사
- 판둘프 3세 (1054 ~ 1059): 1059년 베네벤토 대공 직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간 뒤 1060년에 사망함.
- 란둘프 6세 (1054 ~ 1077): 1077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로베르 기스카르가 베네벤토 공국을 점거함.
- 판둘프 4세 (1056 ~ 1074): 할아버지 판둘프 4세, 아버지 란둘프 6세와 함께 베네벤토를 공동 통치함. 1074년 몬테사르치오 전투에서 전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