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7 08:33:58

불가리아 제1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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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로마, 근대 유럽의 황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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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국
ц︢рьство бл︢гарское

ts'rstvo bl'garskoe
파일:크룸의 군기.svg 파일:불가리아 제1제국 국장.svg
군기(軍旗)[1] 국장
파일:Balkans850.png
681 ~ 1018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불가르 칸국
위치 발칸 반도[2], 헝가리
수도 플리스카 (681 ~ 893)
프레슬라프 (893 ~ 972)
스코페 (972 ~ 992)
오흐리드 (992 ~ 1018)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913)→차르(913~)
주요 차르 아스파루흐(681~701)
크룸(803~814)
보리스 1세(852~889)
시메온 1세(893~927)
사무일(997~1014)
언어 불가르어→고대 불가리아어(고대 교회 슬라브어), 중세 그리스어
민족 불가르족,남슬라브족→불가리아인
로마인(그리스인)
종교 텡그리정교회
면적 400,000 km² (850년)
주요 사건 681년 정착
864년 기독교로 개종
919년 시메온 1세의 칭제, 제국으로 승격
1018년 멸망
언어별 명칭
고대 교회 슬라브어 ц︢рьство бл︢гарское
불가리아어 Първа българска държава
그리스어 Πρώτη Βουλγαρι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영어 First Bulgarian Empire

1. 개요2. 역사
2.1. 조상, 튀르크계 유목국가 불가르 칸국2.2. 아스파루흐의 불가리아 칸국 건설2.3. 2대 칸 테르벨2.4. 혼란기2.5. 카르담 칸의 반격2.6. 크룸 칸의 영토 확장2.7. 오무르타그 칸의 통치기2.8. 말라미르 칸과 프레시안 1세의 통치기2.9. 865 보리스 1세, 정교회로의 강제 편입2.10. 893~927 차르 시메온 1세, 전성기2.11. 927~970 차르 페터르 1세, 안정기2.12. 970~971 차르 보리스 2세, 쇠퇴기2.13. 997~1018 차르 사무일, 잠깐의 중흥과 멸망
3. 사회 계급4. 기독교 개종 이전 민속 신앙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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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81년 건국되어 1018년 멸망한 튀르크-슬라브계 국가로 전성기에는 발칸 반도 대부분 지역과 판노니아 분지 전역을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던 강대국이었다. 불가르 칸국의 후계 국가 중 한 곳이다. 불가르 칸국은 오늘날 러시아 서남부인 볼가 강 유역에 있었으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도나우 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도나우 불가르'로도 불린다.[3]

초창기 불가리아는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텡그리 신앙을 신봉하는 등 튀르크적 성향이 강했으나[4] 토착 슬라브인들과의 혼혈이 진행되고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결국 슬라브 문화권에 동화되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이로서 오늘날 불가리아불가리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불가리아는 튀르크 + 슬라브의 일종의 연합 집단으로 출발했고, 나라 이름부터가 튀르크족의 일파인 '불가르'족에서 따왔고 지도자를 ‘칸’이라 호칭한 만큼 튀르크 쪽이 상위 파트너였다. 하지만 불가리아 및 그 주변 발칸 반도 북부 ~ 동유럽권에서는 슬라브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군주의 칭호가 불가리아 초창기에는 칸이었는데, 913년 동로마에 대한 승전 이후 로마와 맞먹는다는 자부심을 담아서 '카이사르'의 슬라브식 음차인 차르로 바뀌었고, 군주들의 이름도 초대 군주 아스파루흐부터 시작해서 코르미소쉬, 비네흐, 텔레츠, 우모르, 오무르타그 등 척 봐도 튀르크-몽골 느낌이 강한 이름이 많다가, 9C 중반 블라디미르를 시작으로 시메온, 사무일, 로만 등 기독교-슬라브적 느낌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만은 Roman, 즉 자신들의 최대의 적인 '로마인'이 맞다.(...) 보리스의 경우는 워낙 러시아나 불가리아에서 이름으로 많이 써서 슬라브스럽단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는 튀르크 이름이다.

2. 역사

2.1. 조상, 튀르크계 유목국가 불가르 칸국

오늘날의 캅카스 북부, 흑해 북부 볼가 강 유역 일대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유목 국가인 불가르 칸국의 불가르족의 일파가 7세기경, 현재 불가리아 북부인 모에시아 지방으로 남하해 왔다. 이들 불가르족은 오늘날의 볼가 타타르, 바시키르인추바시인의 사실상 직계 기원으로 여겨지며, 불가르족들의 언어는 오늘날의 추바시인들의 추바시어와도 흡사했다. 불가르족은 기마술이 뛰어났으며 농업 경제도 겸하는 반농반목 민족이었다.

2.2. 아스파루흐의 불가리아 칸국 건설

대 불가리아의 왕 쿠브라트가 죽자 쿠브라트의 아들 아스파루흐하자르 칸국의 위협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발칸반도 동북부로 남하해와 아바르 칸국이 다스리던 영토 일부를 병탄하고 주변 남슬라브족을 포섭하여 불가르족의 나라를 건국한 것이 시초다. 680년 콘스탄티노스 4세의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681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 받았다.

2.3. 2대 칸 테르벨

2대 칸 테르벨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제위를 도와주고 "카이사르"[5]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를 발판 삼아 발칸 반도 내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리아 칸국이 장악한 동로마 영토를 탈환하려 하면서 양국 사이에서는 소규모 접전이 빈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717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무슬림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일어나자 불가리아 칸국은 동로마를 지원하여, 아랍 포위군 기지를 일부러 혹한기에 공격하여 아랍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불가리아 칸국의 참전은 동로마의 승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고, 결국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영토 확장을 사실상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2.4. 혼란기

3대 칸 코르메시와 4대 칸 세바르 시대엔 동로마 제국과 별다른 갈등을 벌이지 않고 무역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바르가 753년 사망하면서 둘로 왕조가 단절되자, 불가리아는 혼란에 휩싸인다. 불키 가문의 코르미소쉬 칸은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불가리아와의 국경지역을 요새화하자 사절단을 보내 양국의 국경지대에 요새를 세우지 않기로 했던 협약 위반이라고 항의하면서, 공물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절단을 추방하자, 756년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40km 떨어진 아나스타시아 성벽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가 친히 이끈 동로마군에게 참패하였고, 그 직후 궁정 쿠테타가 일어나면서 피살당했다.

6대 칸 비네흐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756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쳐들어오자 마르첼레에서 응전했으나 참패했고, 자식들을 인질로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759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재차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리슈카 고개에서 매복 공격을 가해 물리쳤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하려 하다가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던 귀족들의 반발을 사면서 760년 가족과 함께 피살당했다. 7대 칸 텔레츠는 즉위 직후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763년 6월 16일 8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갔다. 텔레츠는 처음엔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산길을 차단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평야 지대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763년 6월 30일, 양군은 안키알로스 평원에서 맞붙었다. 하루 종일 지속된 격전 끝에 불가리아군이 참패하여 많은 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의 피해 역시 컸기에, 황제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수도로 돌아간 뒤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 일로 신망을 잃은 텔레츠는 정변으로 피살되었다. 그 후 새 칸으로 선임된 사빈은 비밀리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이어갔으나, 766년 호전파 귀족들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인민 회의를 열어 그를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사빈은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해 목숨을 건졌다.

사빈을 축출한 귀족들은 우킬 가문의 일원인 우모르를 9대 칸으로 선임했지만, 40일 만에 우가인 가문의 토크투와 바얀 형제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우모르 역시 피살되었다. 토크투는 새 칸에 즉위했지만, 1년만인 767년 반란군을 피해 달아나던 중 다뉴브 강 북쪽의 어느 숲에서 형제 바얀과 친척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11대 칸에 오른 파간은 콘스탄티노스 5세와 친히 만나서 평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였지만, 황제가 돌연 불가리아 영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뒤 돌아가는 바람에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768년 바르나 주변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되었다.

12대 칸에 오른 텔레리그는 774년 콘스탄티노스 5세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해 말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르치티아(현재의 마케도니아 북부)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사전에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콘스탄티노스 5세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불가리아군을 물리쳤다. 황제는 여세를 이어가 불가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함대가 메셈브리아(현재 네세바르) 인근에서 북풍에 저지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텔레리그는 내부의 배신자가 황제에게 정보를 누설했다고 여기고, 귀순을 하겠다며 불가리아 내에서 도와줄 이를 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그 말을 믿고 알려줬고, 텔레리그는 그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자신을 속인 그를 응징하려 했지만, 도중에 병사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그러나 텔레리그는 777년 궁정 쿠데타로 축출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렇듯 불가리아는 753년부터 777년까지 24년간 8명의 칸이 교체되는 정국 혼란에 휩싸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면서 국력이 쇠락하였다.

2.5. 카르담 칸의 반격

텔레리그 칸이 망명한 뒤 새 칸이 된 카르담 칸은 791년과 792년에 콘스탄티노스 6세를 상대로 연거푸 대승을 거두고 공물을 매년 받아내는 협약을 맺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너희에게 금보다 어울리는 공물을 보내겠다"라며 똥물을 보내자 다시 침공해, 더 많은 공물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2.6. 크룸 칸의 영토 확장

서기 803년 제위한 크룸 칸은 불가리아 칸국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였으며 크룸 칸 치세 하 불가리아 칸국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었다. 크룸 칸은 먼저 804년부터 806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중유럽에 남아있던 아바르 칸국의 잔당들을 소탕하면서 다뉴브 강 일대 영토를 안정화시키고 트란실바니아일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후 808년 불가리아 군대가 동로마 제국 국경 지대를 넘으며 군사적인 대립이 심화되었다. 809년에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해당하는 세르디카 시를 점령하였다. 특히 811년, 동로마 제국의 니키포로스 1세가 당시 불가리아 칸국의 수도 플리스카로 직접 쳐들어가 도시 전체를 불태우자 위기에 빠졌는데, 크룸 칸이 직접 동로마 제국으로 복귀하는 니키포로스 1세의 군대를 몰살시키며 전황을 역전시켰다. 이후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두개골을 잘라 은도금해 술잔(...)으로 사용했다.

이후 크룸은 여세를 몰아 트라키아 내 동로마 항구 메셈브리아를 점령하였으며 813년에야 양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평화 조약 이후 얼마 안 가 크룸 칸을 암살 시도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동로마 제국의 사주로 해석한 크룸 칸은 다시 트라키아 동부를 공격하고 동로마 주민 1만여 명을 납치해서 불가리아 칸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크룸 칸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던 중 814년 4월 14일 급사하였고, 그의 후계자 오무르타그는 동로마 제국과 30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으며 양국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사족으로 트라키아는 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에 해당하는 수도권이다. 동쪽 끝에 그 도시가 있으며, 즉 불가르인들은 수도권까지 몰아붙일 정도로 강성했단 얘기.

2.7. 오무르타그 칸의 통치기

816년 동로마 제국괴 평화 조약을 맺은 뒤, 오무르타그 칸은 831년까지 통치하면서 불가리아의 내치를 잘 닦았다. 자꾸만 동로마 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에 붙고 반란을 일삼던 슬라브 부족들을 제압하고, 전국을 여러 지방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해 통치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불가르 기병대와 슬라브 보병대로 이분화되어 있던 군대를 여러 민족이 뒤섞인 통합군으로 개편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파괴된 수도 플리스카를 재건하고 화려한 궁전을 세워 왕권을 강화했으며, 요새들을 지어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는데, 맏아들이었던 엔라보타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자 왕위계승권을 박탈하고 셋째 아들 말라미르를 후계자로 삼았다.

2.8. 말라미르 칸과 프레시안 1세의 통치기

말라미르 칸은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이어가려 노력하였고, 플리스카의 수로 건설 공사를 완료했다. 그러나 836년 테오필로스 황제가 불가리아로 전격 침략하여 국경지대를 황폐화하면서 평화는 깨졌고, 카반 이스불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즉시 보복에 나서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했다.그러나 836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고, 오무르타그 칸의 둘째 아들 즈빈니카의 아들 프레시안 1세가 칸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그의 대에 처음으로 백해 연안까지 진출하였고, 프랑크 왕국이 3분할된 뒤에도 동프랑크 왕국과 평화 협약을 이어갔다.

2.9. 865 보리스 1세, 정교회로의 강제 편입

이후 865년 불가리아의 칸 보리스 1세(Борис I, 재위 852~889)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세계 총대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정교회권으로 편입된다.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원래 보리스 1세는 불가리아가 동프랑크 왕국[6]과 동맹관계라는 것을 고려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미하일 3세가 서방교회가 동로마 제국 코앞까지 세력을 뻗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863년 불가리아를 침공해 보리스 1세에게 정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했고, 주력군이 북쪽으로 가있던데다, 지진과 기근으로 영 좋지 않은 상태였던 보리스 1세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종 배경과 다르게 기독교 개종 자체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864년 불가리아인들의 기독교화는 문화적 진보를 뜻했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화 과정의 완성을 의미하고, 신생 제국의 국가적, 인종적 통일성을 완결지어준 것이었다. 새로 미카일이라는 이름을 얻은 보리스 아니 보리스-미카일은 기독교화와 슬라브화에 반기를 든 불가르족 귀족들을 제압하고 보야르 52명의 목을 베게 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기독교화를 통해 문화적 발전과 내적 결속이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

-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불가리아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텡그리 신앙을 믿던 튀르크인과 슬라브 토속 신앙을 믿던 슬라브인, 기독교를 믿는 동로마계 주민들은 같은 종교를 믿게 되면서 서로 더 빠른 속도로 융화되기 시작했다. 889년 보리스 1세의 양위로 칸에 오른 블라디미르반기독교 정책을 펼쳐 대세를 거스르려 했지만, 3년만인 892년 보리스 1세의 쿠데타로 폐위되고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

2.10. 893~927 차르 시메온 1세, 전성기

10세기 초반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의 루마니아, 헝가리,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불가리아의 영토로 편입했다. 보리스 1세의 아들이자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전성기를 연 시메온 1세(Симеон I, 재위 893~927) 때는 차르의 칭호를 사용했고, 동로마 제국을 이 유튜브 지도 영상에 의하면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밀어 붙여 테살로니키아드리아노플을 점령,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등, 그리스 전체를 차지할 뻔 하기도 했다. 이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면 영어 위키백과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을 참고하면 된다.

이 무렵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독립된 불가리아 총대주교좌를 인정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키릴 문자가 고전 불가리아어에 도입되었다. 이는 중세 교회 슬라브어의 바탕이 되어 키예프 루스의 문어 형성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는 불가르족, 슬라브인 및 로마인의 문화가 융화되면서 동로마 문화와 차별화된 불가리아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하는 문화적 황금기이기도 했다.

2.11. 927~970 차르 페터르 1세, 안정기

시메온 사후 제위에 오른 페터르 1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불가리아 대주교가 총대주교로 승격하는 걸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인정받았고, 교회 진흥 정책을 펼쳐 정교회가 불가리아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평화로웠고, 많은 순례자들이 불가리아에 들리면서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2.12. 970~971 차르 보리스 2세, 쇠퇴기

그러나 페터르 1세 재위 말년부터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고 바깥에서는 불가르족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유입된 유목민 마자르족과 우크라이나와 몰다비아 일대를 두고 다투던 키예프 공국,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 세력을 회복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해 당시 차르였던 보리스 2세(Борис II, 재위: 969~971)가 자신의 동생 로만(Роман, 재위: 977~991)과 함께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Святослав Игоревич, 재위: 945–972)의 포로가 되었다가 키예프와 동로마의 전쟁으로 다시 동로마의 요안니스 1세에게 넘겨져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는 수도 프레슬라프와 옛 수도 플리스카를 비롯한 동부 지역을 동로마에게 잃고 수도를 제국 서부의 스코페로 옮겼다.

보리스 2세와 로만은 977년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보리스 2세가 동로마식 복장 때문에 첩자로 오해받아 국경수비대에게 살해당해 로만만 불가리아로 귀환할 수 있었다. 로만은 황제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미혼인데다 요안니스 1세에게 거세를 당한 상태였기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고, 991년에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고, 9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한다.

2.13. 997~1018 차르 사무일, 잠깐의 중흥과 멸망

이후 제국의 대귀족 니콜라(Никола)의 아들이었던 사무일(Самуил, 재위 997~1014)이 차르 자리에 올라 불가리아 제국이 중흥하는 듯 했지만,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사무일이 홧병으로 사망한 후,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뒤를이어 동로마 제국에 항전했으나 1015년 8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피살당했다.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고자 했지만, 그를 믿지 못한 황제는 전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1018년 블라디슬라프는 디라키움을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동로마 제국에 항복하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멸망한다. 이후 1041년 페테르 데얀이 반란을 일으키나 곧 진압당하고, 1072년 게오르기 보이테흐가 두클랴 대공의 아들 콘스탄틴 보딘을 차르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1185년 제2차 불가리아 제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약 160여 년간 동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3. 사회 계급

기독교 개종 이전 불가리아에는 불가르족 귀족 계급인 보일라(보야르)[7], 중간 계급인 바가인, 일반 농민을 지칭하는 "불가리아인" 이렇게 3개의 계급이 있었다.

보일라들은 볼가 강 유역에서 이주해온 불가르족 기마 전사들의 후손으로 각 가문마다 따로 섬기는 우상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불가리아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던 시기에 상당수의 보일라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보리스 1세는 결국 보일라 지도자 52명을 직접 처형하고 개종을 거부한 가문들을 처벌하고 나서야 기독교를 불가리아에 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많은 수의 보일라들은 여전히 전통 신앙을 그리워했으며, 그래서 기독교를 없애고 전통 신앙을 되살리려는 목적으로 보일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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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주민을 학살하는 불가르족을 묘사한 그림. 튀르크계 불가르족 보일라들의 전통 의상이 묘사되어 있다.

4. 기독교 개종 이전 민속 신앙

보리스 1세의 기독교 개종 이전에 불가르족은 텡그리 신앙을 믿었고, 슬라브족은 슬라브 토속 신앙을 믿었다. 기독교 개종 이전 불가리아의 칸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하늘에 있는 최고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불가르족이 샤머니즘을 믿었으며 부적 등을 소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고 원정을 나선 크룸 칸은 바닷물로 발을 씻고는 하늘의 신한테 큰 소리로 울부짖는 종교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슬라브족은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숭배하였다. 이들이 주로 숭배하는 신은 천둥번개의 신 페룬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슬라브족은 페룬 외에도 강을 숭배했으며 강 속에 요정들이 산다고 믿었다 한다. 불가르족이 슬라브족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슬라브 토속 신앙 상당수가 불가르족에게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오늘날의 불가리아인들의 설화 뿐만 아니라 민간 풍속에도 슬라브 토속 신앙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기독교 선교 과정에서 정교회 선교사들은 페룬 신앙을 엘리야 성인 숭배로 대체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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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룸의 군대가 사용하던 군기다.[2] 불가리아, 루마니아 일대[3] 이렇게 부를 경우, 쿠브라트의 3남 아스파루흐의 지휘하에 도나우 강 유역까지 남하한 <도나우 불가르>에 대비되는 의미로 차남 코트라흐의 지휘하에 볼가강 유역에 남은 불가르를 <볼가 불가르> 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4] 초창기의 불가리아 제1제국은 튀르크계 불가르인과 토착 슬라브인의 연합적 성격이 강했다.[5] 후대 시메온 1세가 황제를 칭하며 가진 직함 차르와는 달리“부황제”라는 의미가 더 강한 뜻이었다.[6] 오늘날의 독일.[7] 보일라가 볼야르라는 발음으로 바뀐건, 불가리아 제1제국 멸망 이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