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2:31:03

콘스탄틴 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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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콘스탄틴 보딘.jpg
이름 콘스탄틴 보딘
(영어: Constantine Bodin, 불가리아어: Константин Бодин, 세르보크로아티아어: Константин Бодин/Konstantin Bodin)
출생 미상
사망 1107년
직위 달마티아 공자, 두클랴의 왕
반란 대상 미하일 7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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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반란자. 불가리아독립을 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거듭된 외침과 내란에 시달리던 제국은 그가 달마티아에서 계속 집권하도록 허용했다.

2. 생애

디오클레아(달마티아) 대공 미하일로의 아들이다. 미하일로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석호위관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제국 지도층과 긴밀히 교류하여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고 20년간 공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러던 1072년, 포모라블제와 포바르다르제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이났다. 불가리아 총독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의 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불가리아인들이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지도자로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디오클레아 공작 미하일로에게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미하일로는 아들 보딘을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하라고 요구했고, 보이테흐는 흔쾌히 수락했다.

1072년 가을, 미하일로는 보딘에게 300명의 군대를 맡기고 프리즈렌으로 보냈다. 이후 그곳에서 게오르기 보이테흐를 비롯한 반란 주동자들을 만났다. 보이테흐 등은 보딘을 불가리아차르로 선포하고 '페터르'로 개명시켰다. 페터르 3세 보딘은 자신의 모후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증손녀라면서,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몸으로서 불가리아인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했다.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프리즈렌을 향해 진격했지만 전투를 벌이기 전에 교체되었다.

이후 반란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페터르 3세 보딘이 직접 통솔하여 니시로 진격했고, 두 번째 부대는 보이보다 페트릴로의 지휘하에 오흐리드를 거쳐 카스토리아로 진격했다. 페트릴로는 오흐리드와 데볼을 전투 없이 점령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슬라브 출신의 동로마 장군 보리스 다비트에게 패퇴했다. 한편 페터르 3세 보딘은 니시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니시에 도착하자마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을 죽이거나 고문했다. 또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 사란테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스코페를 포위했고, 보이테흐는 항전을 포기하고 도시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페터르 3세 보딘에게 속히 스코페로 와달라고 청했다. 보딘은 곧장 그곳에 가다가 타오니오스에서 동로마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그 후 페터르 3세 보딘은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성 세르지오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안티오키아로 추방되었다. 보이테흐 역시 모든 게 발각되면서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아버지 미하일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동로마 장군이며 자신의 딸과 결혼한 랑고바르도풀로스에게 사람을 보내 아들을 중도에서 납치하여 자신에게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랑고바르도풀로스는 그 요청에 따랐지만, 동로마군에게 패퇴했다.

1078년, 베네치아 선원들이 페터르3세 보딘을 구출한 뒤 미하일로에게 보냈다. 당시 두클랴의 왕이었던 미하일로는 1081년 사망했고, 그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페터르 3세 보딘은 미하일로의 동생 라도슬라프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을 모조리 진압하고, 위협적이라고 판단되는 친척들을 대거 숙청했다. 안나 콤니니는 그를 "달마티아군주"라고 칭하면서,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을 저지했지만 이후 노르만인들이 동로마 영토 깊숙이 진군하는 걸 방치하는 등 불안정한 동맹자였다고 서술했다. 실제로 디라키움 공방전 때 동로마 제국 측에 섰지만 그저 전투를 관망하기만 하다가 동로마군이 패배하자 즉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바리 출신의 친 노르만 귀족의 딸 자크빈타와 결혼했고,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종결된 후, 동로마 제국은 두클랴를 응징할 태세를 갖췄다. 그들은 1089년에서 1091년 사이에 원정을 감행해 두클랴 왕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보스나, 라슈카 등을 포함한 영역을 내주고 다시는 제국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로 인해 페터르 3세 보딘의 권위를 의문시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아내 자크빈타는 그의 사촌 브라니슬라브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왕위 계승권자들을 모조리 처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지려 하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이 직접 중재에 나서 가까스로 저지했다.

두클랴 사제의 연대기에 따르면, 26년 5개월간 통치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페터르 3세는 1107년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 후 두클랴 왕국은 내란에 휩싸이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