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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 공화국 Respublica Ragusina | ||||||||||||||||||||||||||||||||||||||||||||||||||||||||||||||||||||||||||||||||||||||||||||||||||
국기 | 국장 | |||||||||||||||||||||||||||||||||||||||||||||||||||||||||||||||||||||||||||||||||||||||||||||||||
1358년 ~ 1808년 | ||||||||||||||||||||||||||||||||||||||||||||||||||||||||||||||||||||||||||||||||||||||||||||||||||
수도 | 두브로브니크 | |||||||||||||||||||||||||||||||||||||||||||||||||||||||||||||||||||||||||||||||||||||||||||||||||
위치 | 달마티아 남부 | |||||||||||||||||||||||||||||||||||||||||||||||||||||||||||||||||||||||||||||||||||||||||||||||||
정치 체제 | 귀족공화제 | |||||||||||||||||||||||||||||||||||||||||||||||||||||||||||||||||||||||||||||||||||||||||||||||||
국가 원수 | 렉토르 | |||||||||||||||||||||||||||||||||||||||||||||||||||||||||||||||||||||||||||||||||||||||||||||||||
언어 | 라틴어, 이탈리아어, 달마티아어, 크로아티아어 | |||||||||||||||||||||||||||||||||||||||||||||||||||||||||||||||||||||||||||||||||||||||||||||||||
종교 | 가톨릭 | |||||||||||||||||||||||||||||||||||||||||||||||||||||||||||||||||||||||||||||||||||||||||||||||||
종족 | 슬라브인, 이탈리아인 등 | |||||||||||||||||||||||||||||||||||||||||||||||||||||||||||||||||||||||||||||||||||||||||||||||||
건국 이전 | 베네치아 공화국 | |||||||||||||||||||||||||||||||||||||||||||||||||||||||||||||||||||||||||||||||||||||||||||||||||
멸망 이후 | 이탈리아 왕국, 일리리아 지방[1], 헤르체고비나의 산자크[2] |
언어별 명칭 | |
달마티아어 | Republica de Ragusa |
라틴어 | Respublica Ragusina |
이탈리아어 | Repubblica di Ragusa |
크로아티아어 | Dubrovačka Republika |
베네토어 | Repùblega de Ragux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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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에게 정복당한 19세기 초까지 두브로브니크를 중심으로 남부 달마티아(현재 크로아티아 최남단)을 지배한 해상 공화국. 15 ~ 16세기 아드리아해의 무역을 놓고 베네치아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 명칭
슬라브어 명칭인 두브로브니크는 참나무 숲을 의미하는 단어인 'dubrava'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1189년에 체결된 보스니아 반샤그와 라구사 간의 무역 협정인 <반 쿨린 헌장>에 처음 기록되었다. 학계에서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달마티아어 명칭인 라구사는 그리스어인 'ξαυ(절벽)'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러시아 언어학자인 블라디미르 에미누일로비치 오렐(Владимир Эммануилович Орëл, 1952 ~ 2007) 등은 포도를 의미하는 원시 알바니아어*rāguša 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라구사는 Rausium, Rhagusium, Ragusium 또는 Rausia로 다양하게 쓰이다가 'Ragusa'로 정착했다.3. 역사
3.1. 기원
전승에 따르면, 614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동로마 제국의 도시 에피다우로스(현재의 크로아티아 차브타트)를 파괴했을 때, 그곳의 생존자들이 차브타트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작은 섬 또는 반도인 라우사(Lausa)로 이주했다고 한다. 로마 난민들은 라우사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고, 슬라브인은 인근 해안에 정착한 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를 세웠다. 처음에 로마인과 슬라브인은 서로 거리를 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까워졌고, 12세기에 두 정착지가 하나가 되었다. 두 정착지를 분리했던 운하가 메워져 도시 거리[3]가 되었고, 이 거리가 라구사의 도심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5세기경에 동로마 제국이 세운 요새가 이곳에 존재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도 큰 규모로 존재했다고 한다.최근 일부 학자들은 두브로브니크 시에서 고대 그리스 유물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삼아, 고대 그리스인들이 두브로브니크를 처음으로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안툰 니세틱(Antun Ničetić, 1935 ~ 2017)은 저서 <두브로브니크 항구의 역사>에서 고대 선박은 하루에 해안가를 따라 45 ~ 50마일만 이동했으며, 중간에 휴식을 위한 항구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두브로브니크는 95해리 떨어진 두 그리스 정착지인 부드바와 코르출라 사이의 중간에 위치했으므로 중간에 들리는 항구로 적합했다고 주장했다.
3.2. 동로마 제국의 신민
라구사는 동로마 제국을 주군으로 받드는 해안 도시였지만, 이웃의 자흠과 트라분을 지배하는 슬라브 족장들에게 매년 금화 36개, 포도주와 올리브를 바치고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전해진다. 사라센 해적이 866년부터 867년까지 15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을 때 끝까지 항전하다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니키타스 오리파스가 지휘하는 함대를 파견한 덕분에 격퇴했다. 948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라구사를 공략하기 위한 공세를 벌였지만 격퇴되었고, 주민들은 성 블라시오[4]가 자신들을 지켜줬다고 믿고, 그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었다.998년,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라구사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고, 그 대신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전쟁을 힘겹게 치르는 와중에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을 지킬 여력은 없다고 판단하고,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와 협의한 끝에 1000년경에 피에트로를 달마티아 대공에 임명하여 달마티아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 라구사를 다스리다가 1028년 즉위한 로마노스 3세가 다시 도시의 주권을 회수했고, 라구사 주민들은 자기들의 배를 동원해 튀르크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로마 해군을 지원했다.
1050년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스테판 1세가 라구사와 무역 협약을 맺고 그들에게 해안가 영토 일부를 선물했다. 이에 따라 라구사는 라구사 시에서 16km 떨어진 자톤까지 확장되었고, 그 덕분에 식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스테판 1세는 오늘날 두브로브니크 시의 상업 항구인 그루즈 항구도 제공했다. 11세기 아랍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는 라구사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땅의 최남단 도시" 라고 언급했다. 1191년, 도시 상인들은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로부터 무역 특권을 받아냈고, 1186년 세르비아 대공국으로부터 비슷한 특권을 받아냈고, 1189년 보스니아 공국에게도 무역 특권을 받아냈다. 이때 보스니아 반 쿨린과의 협약서는 도시가 '두브로브니크'로 명명된 최초의 공식 문서였다.
3.3.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라구사는 자치 도시 코뮌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베네치아 총독을 주권자로 받들었다. 1237년부터는 베네치아 도제의 통치를 받았고, 현지 영주가 총독과 행정관을 역임했다. 내부 행정은 1272년 특별 법령으로 규제되었다. 동시에 라스토보 섬이 라구사에 합류했고, 1333년 스톤 시와 주변 지역이 보스니아 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으로부터 라구사에 양도되었으며, 1345년 믈리에트도 라구사의 통치를 받았다.라구사 주민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권자로 받들면서, 베네치아의 비호를 받으며 해상 무역을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및 흑해로 확장했으며, 보스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및 비잔티움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거나 갱신했다. 또한 이탈리아 도시, 특히 안코나, 피렌체, 나폴리, 시칠리아와 무역 관계를 맺었다. 이들의 무욕은 주로 동방의 원자재를 서방으로 운송하고, 서방의 산업 제품을 동방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렇듯 라구사는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이면서 발전을 거듭했지만, 시민들은 점점 많은 공물을 베네치아로 보내야 하고 항구가 베네치아 해군 기지로 이용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3.4. 헝가리-크로아트 왕국의 봉신
1358년 2월 18일, 헝가리-크로아트 국왕 러요시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자다르 협정을 체결해 달마티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후 라구사 주민들은 이반 사라카 대주교를 대표로 삼아 러요시 1세와 협의한 끝에 1358년 5월 27일 비세그라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라구사 시는 헝가리의 주권을 인정했고, 매년 500두카트의 공물을 보내면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헝가리를 돕기로 했지만, 현지 귀족들은 헝가리 왕실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후 라구사는 공식적으로 헝가리 국왕의 봉신인 크로아티아 반의 관할권에 속했지만, 현지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통치를 행사했다. 헝가리는 베네치아와는 달리 해상 무역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무역 활동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1358년을 라구사 공화국이 탄생한 해로 간주한다.[5]1399년, 라구사 공화국은 라구사와 펠레샤츠 사이의 두브로브니크 해안 지역을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에게서 인수했다. 1416년 1월 27일, 라구사 공화국은 노예무역과 선박을 통한 노예 운송을 금지하며,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은 자유인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통과시켰다. 만약 이 법령을 어길 경우, 6개월의 징역형과 1인당 25파운드의 벌금령에 처해졌다. 이는 이미 1272년에 작성된 법령인 라구사 법령에 통합되었다. 이로서 라구사 공화국은 유럽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한 국가가 되었다.
3.5. 오스만 제국의 봉신
1458년, 라구사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공물 지불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11월 1일 이스탄불에 특사를 보내 일정한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그 외에는 오스만 제국의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 협정을 맺을 권리를 누렸고, 라구사 선박은 라구사 깃발 아래 항해했다. 오스만 제국은 라구사 공화국에 특별 무역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아드리아해 무역로 일부를 넘겨받고 항구에 들리는 라구사 상인들로부터 일정한 세금을 받아냈다. 또한 라구사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 내에서 특권을 부여받았다. 특히 다른 나라 상인들이 들리는 것이 금지되는 흑해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1419년, 라구사 공화국은 보스니아 귀족 산달지 흐라니치 코사차로부터 코나블레 동부 지역을 인수했다. 그리고 1427년에는 라도슬라프 파블로비치로부터 차브타트와 코나블레 서부 지역을 인수했다. 베오그라드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때, 라구사 상인 무역 기지가 그 도시에서 운영되었다. 이 무역 기지는 베오그라드에 거주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별도로 수행했는데, 특히 예수회 고등학교를 1632년까지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라구사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지중해 전역에 무역 기지를 세웠다.
발칸 반도에서는 이스탄불, 테살로니키, 드리노플예, 베오그라드, 소피아, 부쿠레슈티, 사라예보 등에 세워졌고, 이탈리아(안코나, 피렌체, 시라쿠사, 메시나, 팔레르모 등), 소아시아(스미르나, 부르사) 및 이집트(알렉산드라, 카이로)에도 세워졌다. 각 기지에는 자체 영사와 특별 상업 법원, 교회, 병원 및 묘지가 있었다. 이 모든 무역 기지는 주변 지역과 라구사 간의 무역을 중개했다. 라구사 상인들은 동방에서 서유럽으로 원자재를 수송했고, 수공예품(주로 이탈리아산)을 동방에 팔았다. 오스만 제국은 피렌체와 부르사 간 대부분의 교통이 라구사를 통해 이뤄졌기에 라구사를 매우 중요한 항구로 여겼다. 피렌체의 화물은 이탈리아의 페사로, 파노 또는 안코나 항을 출발해 라구사에 도착한 뒤, 육로로 사라예보, 노비바자르, 스코페, 플로브디프, 에디르네로 운송되었다.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서유럽 국가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1497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로부터 무역 특허를 부여받았고, 16세의 첫 10년 동안 영사를 프랑스로 파견했고 프랑스 역시 라구사로 영사를 파견했다. 라구사 귀족 자제들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종종 유학가서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지중해 무역이 쇠락하면서, 라구사 공화국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던 1667년 4월 6일, 규모 6.4에 달하는 대지진이 발생해 3,000 ~ 5,000명에 달하는 주민이 사망하고 많은 귀족과 총독도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며, 도시의 공공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 후 도시는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쇠락했다. 1699년, 오스만 제국은 대튀르크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포돌리아 전체를 합스부르크 제국, 베네치아, 폴란드에 양도하기로 했다. 이후 베네치아는 라구사의 내륙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국경에 접견했다. 이로 인해 내륙 무역이 차단될 위험에 처하자, 라구사는 달마티아 해안의 네움과 수토리나 시를 오스만 제국에 양도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육상에서 공격할 경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3.6. 멸망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붕괴되면서 달만티아 해안 지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관할에 들어갔다. 이후 1805년 포준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일대가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넘어가기로 했던 코토르는 러시아 전열함 11척과 러시아군 6,000명이 주둔하는 바람에 러시아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나중에 몬테네그로 대주교 페타르 1세 페트로비치-네고시가 지휘하는 16,000명의 몬테네그로인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프랑스는 영국의 해안 봉쇄를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 도시인 라구사가 러시아군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1806년 5월, 나폴레옹 1세는 코토르를 공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로리스통 후작 자크 알렉상드르 베르나르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라구사로 파견했다. 그해 5월 26일, 로리스통의 군대는 중립국인 라구사 공화국 영역에 강제 진입했고, 다음날에는 프랑스로 귀환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음식과 음료를 제공받겠다는 핑계를 대고 라구사 시로 진입한 뒤 기습 점거했다. 이후 러시아와 몬테네그로군이 라구사 공화국 영토에 진입해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와 동시에 주변 지역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불태웠다. 러시아-몬테네그로 연합군은 라구사 시를 포위한 뒤 3,000발에 달하는 대포알을 라구사 시에 퍼부어 초토화했지만, 끝내 라구사를 공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구사에 계속 주둔하면서 내정간섭을 일삼자, 라구사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에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국내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라구사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고, 프랑스 측은 라구사 귀족들의 동태를 확인한 뒤 라구사를 완전히 복속하기로 결정했다. 1808년 1월 31일,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는 라구사 공화국을 폐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뒤, 공화국의 모든 사무실을 군대로 봉쇄하고 귀족들을 축출했다. 이후 마르몽은 라구사 영토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라구사 공화국의 옛 영역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와 함께 나폴레옹 1세가 주관하는 프랑스 제1제국의 일리리아 지방으로 통합되었다. 마르몽은 라구사 공화국을 병합한 공적을 인정받아 '라구사 공작(Duc de Raguse)' 칭호를 수여받았다.[6]
이후 라구사는 7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 이후 프랑스 제1제국이 쇠락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재개하자, 1313년 6월 18일, 옛 라구사 공화국에 속한 섬 주민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영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시판 섬, 스톤, 로푸드 섬에 있는 프랑스 수비대를 제압했다. 그 후 코나블레를 시작으로 공화국 본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라구사 시를 포위했고, 곧 라구사 시 내부 주민들도 봉기에 합류했다. 몽트리샤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수비대는 성채로 후퇴해 그곳에서 농성했다. 얼마 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라구사 주민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토도르 밀루티노비치 장군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했다.
라구사 귀족 44명으로 구성된 대평의회는 1814년 1월 18일 옴블라의 모코시차에 있는 빌라 조르지에서 공화국 부활을 선포했다. 1814년 1월 27일,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고, 라구사 주민들은 도시의 상징인 성 블라시오의 깃발을 오스트리아와 영국 국기와 함께 내걸었다. 그러나 1월 30일, 오스트리아군은 성 블라시오의 깃발을 강제로 내린 뒤 라구사 공화국 전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병합했다. 라구사 귀족들은 1815년에 열린 빈 회의에 대표단을 보내 공화국을 복원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묵살당했다. 그 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옛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를 달마티아 왕국에 합병시켰다.
4. 정치 시스템
라구사 공화국은 귀족, 시민,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오직 귀족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무역, 공예, 어업 및 해운에 종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역 및 공예 형제단을 결성했다. 농민들은 라구사 시 주변 농경지를 경작했으며, 자영농, 소작농, 농노로 구분되었다. 귀족들은 살라만케지"(Salamanquinos)와 "소르보네지"(Sorboneses)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살라만케지는 스페인식 절대주의를 숭상했고, 소르보네지는 프랑스에서 유래한 자유주의에 우호적이었다. 1667년 대지진으로 많은 귀족이 사망한 후 일부 부유한 평민들이 귀족 계급에 합류했을 때, 살라만케지는 새로운 귀족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지만, 소르보네지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양측은 지위를 유지했고 의회에서 함께 자리를 잡았지만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거리에서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 분열은 평민들에게도 반영되었다. 평민들은 성 안토니나와 성 라자로의 라이벌 형제단으로 나뉘었는데, 이들은 살라만케지와 소르보네지 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였다.공화국의 주요 기관은 대평의회, 소평의회, 원로원으로 구성되었다. 대평의회(크로아티아어: Veliko vijeće, 라틴어: Consilium maius, 이탈리아어: Maggior Consiglio)는 모든 라구사 귀족 남성 성년 구성원들로 구성되었으며, 매년 초에 새로운 회원을 공식적으로 받았다. 주요 역할로는 국가 관료와 공무원의 선출, 의원 선출, 법률 채택, 주 법률 문제 해결이었다. 14세기에 원로원이 등장한 후에는 원로원에 점차 실권을 잃었지만, 라구사를 이끌 지도자인 렉토르(rector)를 선출하는 권한만은 그대로 가졌다.
소평의회(크로아티아어: Malo vijeće, 라틴어: Consilium minus, 이탈리아어: Minor Consiglio)는 처음엔 대평의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 기관이었지만, 나중엔 원로원의 집행기관이 되었다. 초기엔 렉토르와 11명의 참의원으로 구성되었으나, 나중에는 렉토르와 6명의 참의원-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것 외에도 렉토르에게 조언하는 역할도 맡았으며, 외국 영사와 사절단에게서 신임장과 신용장을 접수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원로원(크로아티아어: Senat, 라틴어: Consilium rogatorum, 이탈리아어: Consiglio dei Pregadi)은 본래 임시로 세워진 '청원자 협의회'로서 청원인들의 의견을 접수하는 역할만 맡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권한을 갖게 되었고 대내외 정책에 있어서 지침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내리는 정치적 운영 기관으로 활동했다. 원로원 의원은 40세 이상의 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는데, 대체로 큰 문제가 없는 한 매년 거의 같은 사람이 선출되었다.
렉토르(rector)는 명목상 공화국의 지도자였지만, 임기는 단 1달 밖에 안 됐다. 이들은 대평의회에서 매달 선출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렉토르 궁전에서 살았다. 그들은 공화국의 '얼굴마담'으로서 외국 영사 및 사절단을 접견했고, 국새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명목상 최고 통치자인 렉토르에 대한 이러한 제약은 어떤 단일 가문도 절대적인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한편, 국가 제공자(크로아티아어: Državni provizori, 라틴어: Proveditores terrae, 이탈리아어: Provveditori dello stato)도 있었다. 1년 임기로 대평의회에 의해 5명이 선임되었으며, 법질서의 조화와 합법성 존중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종종 법안 초안을 작성하고, 상원과 대의회 회의에 참석하고, 절차적 규범을 준수하고, 현재의 법적 질서에 반하는 제안의 투표를 방지해야 하며, 소규모 의회의 결정을 중단하고 왕자를 찾아 상원에 중재를 요청했다. 또한 2심 형사 소송에서 소평의회에 원로원에 회부될 수 있는 항소 가능성을 결정했다.
이외에도 라구사 공화국 영토에서의 경제 및 기타 활동을 관할하는 수많은 치안 판사가 있었다. 치안판사(officiolii pubblici)는 귀족 중에서 독점적으로 선출된 관료로,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관직을 관리하고 국정을 집행했다. 또한 cancellieri , segretari , scribani , Ministers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공무원이 있었다. 이들은 관청에서 주로 행정적, 기술적 업무를 수행했으며, 귀족이 아닌 시민 중에서 선출되었다. 한편, 코나블레, 스톤, 슬라노, 시판, 라스토보, 로푸드, 콜로체프 등지에서는 콩테(conte)라고 일컬어지는 행정관이 특별히 세워졌으며, 오레비치, 자니나, 차브타트에는 무관인 카피타노(capitano)가 군정을 행사했다. 콩테와 카피타노는 대평의회에 의해 선임되어 반년 또는 1년 동안 중앙 정부의 결정 대로 행정을 집행했다. 여기에 대평의회에서 선출된 신딕스(sindici)는 콩테와 카피타노의 업무를 감독했다.
5. 법률 시스템
라구사 공화국의 법률 체계는 1272년에 시행된 <라구사 법령(Liber statutorum civitatis Ragusii)>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법령은 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률집으로서, 총 8권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책에는 국가 당국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무원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고, 교회의 법적 지위를 규정했다. 두 번째 책에서는 관료들이 취임 전 했던 맹세문이 나열되었다. 세번째 책은 법원의 조직과 관할권, 법원 절차에 관한 규정을 다뤘고, 네번째 책은 상속, 결혼 및 가족법을 다뤘다. 다섯번째 책은 농업 관계, 부동산 및 공공 시설과 관련된 문제를 규제했다. 여섯번째 책은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을 정의하고 특별한 임무로 불법 복제 와 밀수를 진압하는 것을 명시했다. 일곱번째 책은 해상법과 항해를 다뤘으며, 여덟번째 책은 새로운 규정과 기존 규정에 대한 추가 사항, 특히 법원 절차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다. 1358년 공화국이 베네치아로부터 독립한 뒤 일부 내용이 개정되었지만, 완전한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베네치아인의 도착 및 선서에 관한 규정 등은 사문화되었다.또한 1335년부터 1410년까지 조항을 나열한 모든 종교 개혁서(Liber omnium reformationium), 녹서(Liber viridis), 황서(Liber croceus) 등 경제 및 사회 관계를 다룬 특별법이 존재했으며, 라구사 시 세관 법령(Liber statutorum doane Ragusii), 새로운 관세법(Capitolare della Doana grande), 해상 보험법(Ordo super assecuratoribus), 라구사 공화국 국가 항해규정(Regulatori della) Repubblica di Ragusa per la navigazione nazionale) 등 무역 활동과 관련된 법령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5세기까지는 소평의회와 렉토르가 사법 기능을 맡다가, 15세기 초에 대재판소(Curia maior)가 설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419년에 민사 재판소(Curia consulum causarum Civilium)가 탄생했으며, 1459년 형사 재판소(Sex iudices de Crimei)가 설립되었다. 판사는 대평의회에서 선출되었고, 대다수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1년의 임기를 가졌다. 항소심에서는 국가 제공자, 항소 심의회(Collegium appelationum), 소평의회 및 원로원이 결정을 내렸다.
라구사 공화국의 법률은 진취적인 면이 많았다. 1301년 의료 제도가 유럽 최초로 도입되었고, 1377년 유럽 최초로 검역에 관한 체계적인 규정이 도입되었다. 라구사 당국은 단순히 모든 선박의 석호 진입을 금지한 베네치아나 환자들을 가택 연금 조치한 밀라노 공국과는 달리, "전염병 지역"(locis pestiferis)에서 오는 모든 선박의 승무원과 화물이 주파 만의 수페타르, 므르칸 또는 보바라 섬에서 검역소의 감도가에 한 달을 보내야 한다고 규정했다. 1395년에는 유럽 최초로 해상보험에 관한 법을 제정했으며, 1416년에는 유럽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6. 언어
라구사는 로마화된 해안 도시인과 슬라브 부족이 정착한 내륙 농촌 지역으로 나뉘었다. 라틴어는 라구사 공화국의 공식어로 채택되어 멸망 때까지 쭉 사용되었고, 이탈리아어는 1420년대부터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두 언어 모두 공화국의 공식 칙령 및 서한에 사용되었다. 라틴어는 일상어로는 사용되지 않았고, 베네토어와 토스카나 방언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는 상류계층이 사용했으며, 상인과 건축 프로젝트를 위한 건축가를 포함한 수많은 이탈리아인을 끌어들였다. 크로아티아어는 주로 하류 계층에서 사용되었다.그러다가 점점 더 많은 슬라브인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후반기에는 많은 라구사인들이 이탈리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었다. 시인 사비노 보발리(Savino Bobali, 1530 ~ 1585)와 딘코 란지나(Dinko Ranjina, 1536 ~ 1607), 그리고 라구사 공화국 최고의 학자로 일컬어지는 루지에로 주세페 보스코비치(Ruggiero Giuseppe Boscovich, 1711 ~ 1787)[7] 등은 작품을 집필할 때 크로아티아어와 이탈리아어를 동시에 구사했다. 라구사 귀족 가문과 시민 계층 구성원들은 이탈리아어와 슬라브어 버전의 성과 이름을 모두 사용했지만, 하층민들은 슬라브어 이름만 사용했다.
[1] 프랑스 제1제국의 자치 지방[2] 오스만 제국의 행정 단위[3] 플라카(Placa) 또는 스트라둔(Stradun)[4] 4세기에 활동안 세바스테의 주교. 리키니우스 황제가 기독교 박해를 단행했을 때 순교했다.[5] 다만 라구사는 9세기부터 '라구사 코뮌(Communitas Ragusina)'이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시기엔 동로마 제국에 대적하는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함대를 제공할 정도로 군사 활동을 독자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6] 오귀스트 마르몽은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 프랑스 제국의 수도 파리를 아무런 저항 없이 연합군에게 개방하는 방식으로 나폴레옹을 배신했다. 이 때문에 그가 칭호로 삼았던 '라구사'는 프랑스어에서 "배신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전락했다.[7] 원자론을 주장했고, 회전하는 행성의 적도와 궤도를 계산하는 기하학적 기법을 고안했으며, 달에 대기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