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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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강과 도나우강의 합류 지점에 세워진 칼레메그단 성채
▲ 도심부의 성 사바 대성당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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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 Београ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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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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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사이트 | | ||||||||
관련 사이트 | 주 세르비아 대한민국 대사관 베오그라드 무역관(KOTRA) | ||||||||
시의회 의장 | 니콜라 니코디예비치 | [[세르비아 진보당|]] |
세르비아어 | Београд/Beograd |
튀르키예어 | Belgrad |
헝가리어 | Lándorfejérvár(과거) Nándorfehérvár(과거) Belgrád(현대) |
라틴어 | Singidunum(고대) Alba Bulgarica(중세) Belogradum(현대) |
러시아어 | Белград |
우크라이나어 | Білград |
영어 | Belgrade |
1. 개요
Klangkarussell의 Netzwerk(Falls Like Rain)이라는 음악인데 뮤직비디오 촬영지가 베오그라드다. |
베오그라드라는 지명은 세르비아어로 "하얀(beo) 도시(grad)"라는 의미를 지닌다.[1] 도시 이름에 맞게 건물들도 대부분 흰색으로 도색하게끔 조례가 잡혀 있다. 세르비아에 대한 국민 감정이 나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베오그라드를 두고 "폭격에 하얗게 불타버려서 하얀 도시"라 비꼬기도 한다.
전근대에는 독일어로는 바이센부르크(Weißenburg), 베네토어로는 카스텔비앙코(Castelbianco), 헝가리어로는 란도르페예르바르(Lándorfejérvár)·난도르페헤르바르(Nándorfehérvár) 같이 각국 언어로 흰색 도시라 번역차용되어 불리기도 했다.
2. 상세
▲ 위가 도나우강, 아래가 사바강이다. 합류로 인해 강물 색깔 차이가 보인다.
두 강의 합류 지점이라는 지리적 요충지이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베오그라드 시가지는 사바 강의 양안에 형성되어 있다. 본래 사바 강 동안만 베오그라드였으나, 2차 대전 후 서안에 신도심이 세워져 본래 별개의 도시였던 서쪽의 제문 역시 베오그라드 광역권에 포함되었다. 도나우 북안은 주로 습지대고, 군데군데 중소 도시와 산업 단지가 있다. 사바 강 동안 시가지의 최대 높이는 300m에 달하여 판노니아 평원에서 나름 고지대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남고북저의 지형으로, 남쪽으로 갈 수록 발칸 산맥의 고원 혹은 협곡 지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후는 여름에 35도, 겨울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등 대체적으로 한반도와 비슷한 편이다.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군단 기지인 싱기두눔이었고, 서쪽의 시르미움에 밀려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중세 시기에는 여러 게르만족과 슬라브 이주민 세력이 발칸반도로 침입하는 통로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부터 12세기까지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제1제국, 마자르족(훗날의 헝가리 왕국) 등이 뺏고 뺏기는 쟁탈전을 벌이는 군사 요새였으며 상황에 따라 거의 버려지다시피 하기도 했다. 슬라브어식 이름 베오그라드(Beograd)는 9세기에 불가리아 제1제국이 점령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1204년 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세르비아인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았고, 헝가리 왕국의 봉신으로 시작해 독립 세력을 구축한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드라구틴(1244~1316)이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다. 14세기 후반 세르비아 남부가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함락되어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이 마지막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고, 1427년에는 결국 헝가리 왕국에 자진 합병되었다. 헝가리 치하에서는 헝가리어로 '불가리아인(lándorok)의 하얀 성채(fejérvár)'라는 뜻의 란도르페예르바르(Lándorfejérvár)라고 불렸으며[2] 계속해서 오스만의 폭발적인 확장을 저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새가 되었다. 그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공략을 시도했지만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에게 완패해 음독 자살까지 시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3. 역사
▲ 베오그라드 성채의 지단 성문 일대
▲ 베오그라드 광역권의 서북부를 이루는 제문의 옛 시가지
제문에서 발견된 뗀석기 유물을 통해 구석기 시대부터 일대에 인류[3]가 정착했음을 알 수 있고, 기원전 5천년 전후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특히 동남쪽 외곽 도나우강변에 위치한 빈차의 벨로-브르도 (흰 언덕) 유적은 유럽 혹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상고대 시기 일대에는 다키아인과 트라키아인의 혼혈로 여겨지는 싱기 부족이 거주했고, 그리스 신화 중 이아손과 아르고노트가 떠난 아르고호 원정단이 현 칼레메그단 성채 언덕을 지나갔다. 기원전 279년에는 지중해 방으로 남하하던 켈트인의 일원인 스코르디스키 족 (Scordiscii)이 점령하여 싱기 족에 성채 접미사인 -둔을 붙여 싱기둔 (Singidūn)이라 명명했다.
3.1. 로마 제국: 싱기두눔
▲ 칼레메그단 성채에 남아있는 로마 제국기 카스투룸 유적
기원전 33년 무렵 일대는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 싱기둔은 라틴어 발음인 싱기두눔 (Singidunum)으로 개칭되었고, 서기 86년에 6천 병력의 제4 플라비아 군단이 배치되며 로마 제국의 도나우강 리메스 (방어선)의 주요 군사 기지 중 하나가 되었다. 군단 기지로써 현 성채 언덕에 사각 형태의 병영 성채인 카스트룸이 세워졌고, 본래 토성이었으나 곧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로마군은 사바 강에 다리를 놓아 싱기두눔과 타우루눔 (제문)을 연결했고, 다키아의 습격을 막던 병사들이 그대로 도시에 정착하며 일대를 로마화시켰다.
성채 밖에는 점차 장방형의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포룸과 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13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싱기두눔에 도시 지위인 무니키피움을 하사했고, 2세기 말에는 콜로니아 (식민도시)로 승격되었다. 332년에는 후일 로마 황제에 오르는 요비아누스가 탄생했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병합 후 1세기 이상 안정을 누리던 싱기두눔은 270년 아우렐리아누스의 다키아 포기 후 다시 전방 도시가 되어 이민족의 침공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395년부터 싱기두눔은 동로마 제국의 서북쪽 끝에 놓이게 되었다.
3.2. 중세 초의 혼란기
441년 싱기두눔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에게 함락되었다. 아틸라는 성채와 시가지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454년 훈 제국의 붕괴 후 싱기두눔은 동로마 령으로 회복되었지만 곧 사르마티아인에게 점령되었다. 471년에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이끄는 동고트 왕국이 도시를 정복했고, 488년 테오도리크의 이탈리아 원정을 틈타 다키아의 게피드족이 점령했으나 504년 다시 동고트 군이 점령했다. 다만 510년, 동로마 제국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을 체결하며 평화적으로 싱기두눔을 회복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싱기두눔 성채를 재건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다만 6세기 중반 내내 싱기두눔은 서쪽 시르미움을 장악한 게피드 족의 공격에 시달렸고, 584년에는 바얀 1세가 이끄는 아바르 칸국에게 점령되었다. 하지만 7세기 초엽 아바르 인은 싱기두눔을 약탈, 파괴했다. 그렇게 버려진 도시는 630년에 슬라브인 (세르브인)들이 성채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정착했다.본래 아바르 칸국과 동로마 모두에 복속한 채로 일대에 거주하던 세르브 인들은 9세기 들어 신흥 강자로 떠오른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 복속했다. 세르브 인들은 싱기두눔을 하얀 도시란 뜻인 벨로그라드라 불렀고, 이는 878년 불가리아의 차르 보리스 1세가 교황 요한 13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지명은 점차 벨그라드 혹은 베오그라드로 정착되었다. 1세기 이상 불가리아 령이던 도시는 서기 1000년 전후 무렵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고, 헝가리 령인 제문과 사바 강을 사이에 둔 동로마의 최전선 요새가 되었다. 1071년, 동로마에 복속된 페체네그족의 약탈에 반격에 나선 헝가리 왕국은 베오그라드를 공격했다. 3개월의 포위 끝에 성주 니케타스가 섭정격이던 게저 1세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는데, 국왕 셜러몬이 반발해 양측이 갈등을 겪다가 회군해버렸다.
1096년 5월, 민중 십자군의 선발대가 당도해 도시를 약탈했다. 6월에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본대가 제문에서 학살을 벌이자 주민들이 니슈로 피신했고, 11월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이끄는 1차 십자군이 베오그라드를 지나갔다. 1126년에는 헝가리 왕국의 이슈트반 2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1147년 루이 7세의 2차 십자군은 폐허가 된 베오그라드 대신 동로마 총독부가 된 동쪽의 브라니체보에서 도나우강을 도하해 남하했다. 1167년 시르미움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헝가리군을 격파하며 베오그라드는 완전히 동로마 령이 되었지만, 1182년 동로마의 내분을 틈타 벨러 3세가 다시 도시를 파괴했다. 따라서 1189년 6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3차 십자군은 벨러 3세와 함께 베오그라드의 폐허에서 경기를 여는 등 4일간 궁정을 세우고 머물며 휴식했다.
3.3.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1기
1200년 전후 무렵 베오그라드는 재건되었고, 헝가리어로 '불가리아인의 하얀 도시'란 뜻인 난도르페헤르바르 (Nándorfehérvár)로도 종종 불렸다. 1203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세르비아 내전에 개입하며 반대파를 지지하던 헝가리-크로아티아를 공격해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 1214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2세는 비딘의 반란을 진압해 준 대가로 불가리아에게서 두 도시를 돌려받았다. 1221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5차 십자군 원정 후 돌아오던 언드라시 2세를 협박해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할양받았다. 다만 언드라시 2세는 1232년에 아들 벨러 4세를 보내 두 도시를 수복했다. 1242년에는 베오그라드 총독 로스티슬라프가 사위인 차르 미하일 아센 1세의 암살을 명분 삼아 불가리아에 개입, 벨리코 터르노보를 함락한 후 회군하여 불가리아의 황제를 칭했다.3.4. 스렘 (시르미움) 왕국
1276년부터 세르비아 왕국의 공동왕이던 스테판 드라구틴은 1282년에 낙마하여 중상을 입자 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양위하고 대신 왕국의 서북부이자 베오그라드 남쪽인 루드니크에 영지를 받아 은퇴했다. 그러다 1284년, 드라구틴은 처남인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에게서 베오그라드 일대를 할양받아 스렘 (시르미움) 왕을 칭하였다. 본래 베오그라드 동남쪽의 드라츠를 수도로 삼던 그는 곧 번화한 베오그라드로 천도했다. 따라서 드라구틴은 베오그라드를 수도 로 삼은 첫 세르비아 군주였다. 본래 헝가리의 봉신으로써 통치하던 그는 1290년 들어 헝가리가 사실상 내전에 돌입하자 자립했고, 세르비아 차기 왕위를 두고 동생과 대립하다가 화해한 후 1316년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블라디슬라브가 계승했으나, 1319년 숙부 밀루틴의 공세에 패해 영토를 빼았겼다.[4]감금되어 있던 블라디슬라브는 1321년 밀루틴의 사후 그의 두 아들인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콘스탄틴이 내전을 벌이던 틈에 탈옥, 베오그라드를 수복하고 세르비아 왕을 칭했다. 하지만 블라디슬라브는 내전에서 승리한 데찬스키에게 1324년에 패한 후 헝가리-크로아티아로 망명했고, 이듬해 사망하자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는 베오그라드와 시르미움 일대를 병합했다. 이로써 시르미움 왕국은 2대, 40여년 만에 멸망했고 베오그라드는 다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남쪽 관문 도시로써 난도르페헤르바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3.5.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2기
1330년대에 대규모 영토 확장에 나선 데찬스키의 아들 스테판 두샨은 몇 차례 베오그라드를 노렸지만 헝가리군에게 격퇴되었고, 그는 대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지방을 평정한 후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했다. 1371년 마리차 강 전투로 세르비아 패권이 무너진 후 세워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은 1389년 코소보 전투 후 위기에 몰렸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는 베오그라드를 거점으로 종종 세르비아를 침공했고, 결국 1392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했다. 다만 1402년 앙카라 전투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 약화되자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에게서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아 세르비아 모라비아 공국을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1403년 지그몬드에게 복속한 그는 베오그라드를 하사받았다.3.6.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스테판은 기존 성채에 내성 (시타델)을 더하고 성탑들을 둘러 보강했다.[5] 요새화 후 1405년에는 기존의 크루셰바츠에서 더욱 안전한 베오그라드로 천도했다. 이로써 도시는 더욱 성장했고, 오스만 지배를 피해 몰려든 난민들로 인구가 5만에 달하게 되었다. 1423년 스테판은 베오그라드를 찾은 오스만 사절과 협상하여 무라트 2세에게 복속했다. 다만 자녀가 없던 스테판은 대립하던 사촌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지정했고, 1426년 주군 지그몬드와 협상했다. 지그몬드는 베오그라드, 골루바츠, 마츠바 할양을 대가로 이를 승인했다. 따라서 1427년 스테판 사후 즉위한 주라지는 그해 가을에 약속대로 베오그라드를 헝가리-크로아티아에 넘겼고, 대신 새 수도 스메데레보를 건설한다.3.7.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3기
▲ 베오그라드 공방전을 묘사한 오스만 삽화
1439년 무라트 2세가 스메데레보를 함락하자 주라지는 베오그라드로 도주했고, 이듬해 4월 무라트 2세는 베오그라드마저 포위했으나 헝가리-세르비아 수비대가 대포를 이용해 저항하여 격퇴했다. 그후 반격에 나선 헝가리-크로아티아 장군 후녀디 야노시는 여러 승리를 거두었고, 주라지는 그와 오스만 제국의 협상을 도운 대가로 1444년에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1456년 7월,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는 5만 대군과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포위했다. 오스만 군대는 신형 대포로 도시를 포격했고,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다. 국왕 라슬로 5세까지 겁을 먹고 오스트리아로 도주한 상황에서도 총독 실라지 미하이는 7천의 수비대와 저항했고, 10일 만에 후녀디 야노시가 4만의 구원병과 함께 당도했다. 그는 우선 해전에서 오스만 전함 3척을 침몰시키고 나머지를 패주시켰다.
이로써 후녀디는 베오그라드의 봉쇄를 풀고 직접 성으로 들어가 보급품과 병력을 지급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은 일주일 간 여러 차례 공세를 가했으나 실패했고, 21일에는 예니체리 부대가 투입되어 외성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후녀디가 직접 나서 격퇴했다. 이때 루멜리아 총독 다으 카라자 파샤가 전사할 정도로 오스만 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밤중에 불이 나서 수레가 타버리는 악재도 겹쳤다. 술탄은 거짓 후퇴 전술로 수비대를 끌어내려 했는데, 막상 헝가리 군이 기세를 타고 돌격하자 직접 참전했다가 부상당할 정도로 전세가 악화되었다. 결국 오스만 군은 1만 이상의 전사자와 3백문의 대포 등의 보급품을 둔 채로 철수했다. 다만 이듬달 역병이 퍼지며 후녀디는 제문 (지모니)에서 병사했고, 12월에는 주라지도 사망했다. 1458년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오스만 제국에 완전 병합되었다.
이후 베오그라드 (난도르페헤르바르)는 오스만 제국의 가톨릭권 유럽 진입을 막는 중요한 군사 거점이 되었다. 다만 16세기 들어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암군 울라슬로 2세의 통치 속에서 쇠퇴했고, 1521년 봄 쉴레이만 1세는 자신의 첫 원정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를 목표로 했다. 파디샤의 군대가 시르미아 지역의 샤바츠를 점령하는 동안 대재상 피리 메흐메트 파샤는 제문을 점령했고, 후자는 파디샤의 회군 명령에도 베오그라드 포위에 나섰다. 쉴레이만 1세는 괘씸히 여겼지만 마침 사바강에 홍수가 나서 도하가 불가해지자 그와 합류했다. 무려 10만에 달하는 포위군에 비해 내전의 여파로 수비대는 7백에 불과했지만, 결사 항전했다. 다만 포위 2달만인 8월 24일에 헝가리인과 갈등을 빚던 세르비아인의 내통으로 베오그라드는 함락되었고, 수비대는 70명만이 살아남았다. 헝가리인은 대부분 학살되었고, 세르비아인은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갔다.
3.8. 오스만 제국: 벨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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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에 세워진 바즈라클리 (바이라클르) 모스크 | 성채 내에 남아있는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분수대 (체슈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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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16년간 대재상을 역임한 다마트 알리 파샤 영묘[6] | 1784년 칸카 (수피 회관) 단지 내에 세워진 셰이흐 무스타파 영묘 |
오스만 시기 벨그라드 성채 앞의 평지는 터키어로 성채를 뜻하는 칼레와 광장을 뜻하는 메이단이 합쳐진 칼레메이단이라 불렀고, 성채가 위치한 언덕은 생각하는 언덕이란 뜻인 피키르 바지르라 불렀다. 종종 오스만 주둔군의 연병장 및 훈련장으로 쓰이던 칼레메이단은 세르비아어로 칼레메그단으로 바뀌어 점차 성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1594년 바나트 지역의 세르비아인 봉기를 진압한 대재상 시난 파샤가 이듬해 4월 벨그라드 외곽의 브라차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상징인 성 사바의 유골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남은 재마저도 흩뿌려졌다. 그 여파로 1596-97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도 세르비아인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20세기에 그 자리에 성 사바 대성당이 세워졌다.
3.8.1. 대튀르크 전쟁
▲ 1700년경에 묘사된 1688년 베오그라드 함락도
▲ 1690년에 처음 건립, 오스만 재점령 후 파괴되었다가 합스부르크령 세르비아 왕국기에 재건된 왕의 문
대튀르크 전쟁기인 1688년 7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와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3만 4천의 신성로마제국군 및 세르비아 민병대가 벨그라드로 남하했다. 벨그라드에는 막 부임한 총독인 예엔 오스만 파샤 휘하 2만 5천의 수비대가 있었다. 포위군은 우선 도시 서남쪽, 사바 강의 하중도인 아다 치간리자에 거점을 마련한 후 8월 들어 사바 강을 도하했다. 이에 병력과 주민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성내에 1만명을 남긴 채 성밖에 주둔하던 예엔 오스만 파샤는 포격을 가하고 두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격퇴되었고, 언덕에 포대를 설치한 신성로마제국군이 성을 포격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수장 레오폴트 1세는 서신을 보내 예엔 오스만 파샤에게 항복하고 전향한다면 왈라키아 공으로 봉할 것이라 권유했지만, 후자가 슬라보니아와 보스니아 전역을 요구하며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예엔 오스만 파샤는 벨그라드 근교를 불태우고 스메데레보로 철수해 역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후 니시로 도주해 조정에 반역한 세르비아인의 절멸을 건의하며 벨그라드 구원을 청했다. 이에 조정은 금 120 자루를 보내며 무슬림 주민 동원령을 내렸다. 한편 한 달의 포격에도 수비대가 항복하지 않자 포위군은 공세를 가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사부아 공 외젠이 후퇴하는 척 수비대를 성밖으로 끌어내 야전에서 격파한 후 공세를 가하자, 1천여만 남은 수비대는 기독교도 주민들을 앞세워 공격을 멈추게 한 후 자신들을 세르비아 인들에 넘기지 않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다만 포위군 역시 4천을 잃을 정도로 격렬한 공성전이었다. 벨그라드 점령 후 막시밀리안 2세는 성채 보강에 나섰는데, 불과 20일만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라인란트를 침공하며 본토에서 9년 전쟁이 발발하자 회군했다.
1690년 가을, 반격에 나선 대재상 쾨프륄뤼 파즐 무스타파 파샤는 12만 대군과 함께 북상해 니시와 스메데레보를 수복한 후 벨그라드를 포위했다. 그해 10월, 파즐 무스타파 파샤는 예니체리와 이집트 및 알바니아 부대 등으로 이루어진 포위망을 구축했다. 오스트리아 귀족 페르디난트 고베르 휘하의 수비대는 전투 6일째에 화약고에 적탄이 명중해 (혹은 내부 배신자의 공작으로) 벌어진 대폭발로 4천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자 전의를 상실했다. 오스트리아 병력은 배를 타고 도주했고, 벨그라드는 함락되었다. 오스만 령으로 수복된 벨그라드에는 1만 4천의 수비대와 대포 1백문이 배치되었고, 1692년 남쪽 성벽에 2개의 삼각꼴 포대가 추가되었다. 1693년 7월에 3만의 오스트리아군이 재차 벨그라드를 포위했으나, 9월에 총공격을 격퇴한 수비대가 반격에 나서자 8천의 병력을 잃고 대패하여 사바강을 건너 철수했다.
3.8.2. 합스부르크령 세르비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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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년 벨그라드 공방전. 그림 상단은 오스만 진영, 하단은 오스트리아 진영이다 | 파사로비츠 조약 체결 후 국경 지도 |
▲ 1730년 경에 묘사된 베오그라드 전경.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외성의 모습도 확인 할 수 있다.
결국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벨그라드는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하지만 20년도 안되어 도시는 다시 오스만-오스트리아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1717년 5월,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10만의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벨그라드로 남하했다. 저번 포위에서 부상을 입으며 뼈저린 교훈을 얻은 그는 이번에는 50척의 함대로 벨그라드를 봉쇄했고, 6월에 육군과 사바강을 건너 16km에 달하는 포위망을 구축했다. 성내에는 3만의 수비대와 대포 6백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대재상 하즈 할릴 파샤가 14만의 구원병과 함께 7월에 당도했다. 할릴 파샤는 직접 공격하는 대신 포위망을 두르는 참호를 파 수비대와 함께 오스트리아 군을 역포위했다. 시간이 지나며 오스트리아군은 소모전과 말라리아로 지쳐갔고, 8월에는 4만의 크림 타타르 군대까지 2차 포위망에 합류했음에도 할릴 파샤는 기다림을 택했다.
그의 계획대로 되어가던 8월 중순, 제문의 오스트리아군이 발사한 포탄이 성채의 화약고에 명중하여 3천의 수비대가 폭사하는 변수가 생겼다. 이에 외젠은 다음날 밤, 수비대를 견제할 1만 병력만 남긴 채 할릴 파샤 진영에 모든 것을 건 야습을 가했다. 짙은 안개 속, 장기화된 전선에서 제대로 경계하지 않고 있던 오스만 진영은 당황한 채로 저항했지만 결국 포대를 버리고 물러났다. 오스트리아군은 좌우 양익에 병력을 집중하여 8만의 예니체리 부대를 압박했고, 이에 오스만 제국군이 중앙 돌파를 시도하자 외젠이 직접 반격해 중상을 입으면서 격퇴해냈다. 결국 참호에서 밀려난 오스만 제국군은 혼란에 빠졌고, 할릴 파샤는 철수를 명령했다. 10시간의 격전 끝에 오스만 제국군은 세 파샤를 포함해 1만 5천의 병력과 166문의 대포를 잃었고, 오스트리아군도 6천을 잃었다. 외젠은 무려 13곳의 부상을 입었다. 5일 후, 희망을 잃은 수비대는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했고 외젠은 2만 5천의 주민들에게도 거취의 자유를 주었다. 이에 무슬림 주민 대부분이 수비대와 함께 니슈로 떠났다. 1718년의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벨그라드는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 세르비아 왕국령의 수도거 되었다. 하지만 재차 발발한 오스만-오스트리아 전쟁 시기인 1739년 7월, 대재상 이바즈 메흐메트 파샤는 벨그라드를 포위했다. 8월에는 전임 대재상 헤키모을루 알리 파샤가 보스니아 병력과 합류해 포위군은 10만에 이르렀다. 51일간의 포위 끝에 수비대장 게오르그 올리비어는 함대를 불태운 후 항복 협상에 나섰다. 오스트리아 측은 일단 벨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 왕국 할양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고, 이에 성벽을 허문 채로 벨그라드 할양을 제안했으나 역시 거절되자 기존 오스만 시기 시설만 유지한 채로 할양하기로 합의했다. (벨그라드 조약)
3.8.3. 18세기 말의 혼란
▲ 1789년 벨그라드 공방전
1739년 후 오스만 령으로 회복되어 반세기 가량 안정을 누리던 벨그라드는 1789년에 또다시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직면했다. 그해 8월, 에른스트 폰 라우돈 휘하 12만 오스트리아 군대가 제문에 집결했다. 9월에 오스트리아군은 사바강을 건너 도시를 포위했고, 성내에는 오스만 파샤 휘하 9천의 수비대와 456문의 대포가 있었다. 1717년 당시의 포위망을 재사용한 오스트리아군은 10여일간 포격을 가한 후 압디 파샤 휘하 3만의 오스만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총공격을 가하였다. 시가지에서 집집마다 지연전을 펼치던 수비대는 1천여 전사자를 낸 후 성채로 철수했다. 다만 압디 파샤의 원군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게릴라 전으로 도중 철수했고, 수비대는 4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0월 들어 포위군이 포격을 강화하자, 오스만 파샤는 6시간의 휴전을 제안한 후 직접 적진으로 향해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했다.
다만 에른스트 폰 라우돈은 이듬해 병사했고, 1791년의 시스토바 조약에 따라 벨그라드 등의 세르비아 방면 점령지는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친 오스트리아군의 세르비아 일시 점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고취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고,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싸웠던 세르비아인 하이두크 (민병대)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멘디레 산작을 수복한 파디샤 셀림 3세는 벨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했던 예니체리 부대를 도나우 국경에 배치했는데, 그들이 현지 세르비아인에게 보복하려 하며 갈등이 일자 1793년에 평화를 추구하는 하지 무스타파 파샤를 총독에 봉했다. 동시에 셀림 3세는 예니체리를 신식 군대인 니자므 제디드로 교체하려 했고, 여론의 반발을 사던 예니체리 장교들을 해임하며 1793년과 1796년 징세권을 현지 호족 (오보르-크네즈)에 주는 유화책을 펼쳤다.
그러자 1794년에 벨그라드 주둔 예니체리 부대가 비딘의 동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파디샤의 명령 없이 세르비아인을 습격했다. 1797년 예니체리 반군은 벨그라드와 비딘 사이의 포자레바츠를 점령하고 칼레메그단 성채를 포위했다. 그해 11월, 크네즈들이 이끄는 세르비아 민병대가 벨그라드에 당도해 성채를 구원했고 예니체리 부대는 스메데레보로 철수했다.[7] 1799년 1월, 파디샤의 사면을 받은 예니체리 부대는 벨그라드로 돌아왔다. 하지 무스타파 파샤에 순응하는 듯하던 그들은 샤바츠에서 부당한 추가 징수를 거부한 세르비아 인을 죽인 예니체리 부대원을 파샤가 직접 나서 처벌하자 비딘을 장악한 예니체리 장교 오스만 파즈반토을루의 도움으로 봉기했다.
3.8.4. 세르비아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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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세르비아 봉기군의 베오그라드 기습 점령도 | 1831년까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궁전이던 코낙 크냐진제 류비체 |
1801년 12월, 하지 무스타파 파샤는 예니체리 겸 크라구예바츠의 무타살림 (징세관)인 쿠추크 알리야에게 벨그라드에서 암살당했다. 이후 쿠추크 알리야, 메흐메드 포차오을루, 아가늘리 바이락타르, 뮐라 유수프의 4인의 예니체리 장교가 다히예라 부르는 군벌 정권을 수립하고 벨그라드 등 세멘데리 산작을 장악했다. 다히예 정권은 파디샤가 보장한 세르비아 호족들의 수조권을 박탈, 세금을 인상하고 무작위로 토지를 몰수하며 세르비아인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세르비아인이 파디샤에게 고발하자, 다히예 정권은 크네즈들이 다시 조정을 대변하여 공격해 올 것을 우려하여 각지의 무타살림들에게 정해진 날에 크네즈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8] 그 결과 1804년 1월, 세르비아 각지에서 72명 이상의 크네즈들이 학살되어 그 수급이 벨그라드로 보내져 성채 앞 (칼레메그단)에 진열되었다.
경악한 세르비아인은 삼림으로 숨어들어 살아남은 크네즈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 하에 봉기했다. (1804년 2월) 봉기군은 빠르게 농촌과 중소 도시들을 장악했다. 봉기군의 기세에 놀란 셀림 3세는 그해 7월, 표면상으로는 봉기에 대한 지지를 표하며 옛 벨그라드 총독 베키르 파샤를 다시 총독에 봉하여 파견했다. 당시 벨그라드의 예니체리 부대장이던 알리야 구사나츠는 베키르 파샤에게 도시를 넘겼고, 다히예 지도부는 도나우강의 아다 칼레로 도주했으나, 베키르 파샤의 묵인 하에 봉기군의 공격을 받아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다히예 청산 후 베키르 파샤는 봉기군에 해산을 지시했으나, 카라조르제는 예니체리 세력이 아직 여러 주요 보직에 있다며 봉기를 지속했고 조정에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후 봉기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재와 함께 조정과 협상하며 1년 가량 휴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외세의 중재를 거부하는 조정과 일단 무장해제를 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봉기군이 거부하며 결렬되었다. (1805년 5월) 분노한 파디샤는 니시의 하프즈 파샤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진압군은 패배했고 11월에 세멘디레가 함락되어 봉기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에도 진압군과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모두를 격파한 카라조르제는 그해 12월, 이둘 피트르에 수비대가 방심한 틈에 1만여 봉기군과 성문을 기습해 도시를 장악했다. 3천의 수비대는 3백의 전사자를 낸 후에 배에 올라 비딘으로 철수했고, 봉기군은 칼레메그단 성채를 제외한 벨그라드를 장악했다. 점령 직후 베오그라드로 명명된 도시는 혁명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고, 성채의 수비대도 1807년 1월에 철수했다. 이때 시내의 비기독교도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강제로 기독교 개종을 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조정을 자극하려 학살을 권장했다.
그에 따라 6천여 무슬림과 유대인이 강제로 기독교 개종을 당했고, 대부분의 모스크는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또한 기존 무슬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까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무슬림 여성들은 성노예로 팔렸다.[9] 베오그라드 상인 페타르 이츠코가 주도한 2번째 평화 협상도 1808년에 그가 봉기군에게 독살되며 무산되었고, 혁명 세르비아는 농노 해방을 선포하며 정부를 세웠다. 당시 오스만 조정은 셀림 3세의 암살과 러시아의 왈라키아 공국 점령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상당한 자치권 부여를 골자로 하는 협상에 나섰으나 이미 독립에 근접했다 여긴 봉기군이 많은 영토를 요구하며 결렬되었다. 재개된 전쟁에서 1809년 니슈 인근 체가르 전투에서 봉기군은 후르쉬드 파샤에게 첫 대패를 당했다. 그해 8월, 오스만 제국군이 베오그라드로 진격하자 주민들은 도나우강 너머로 도주했다.
이에 카라조르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거절당했다. 1812년, 러시아와 휴전을 맺고 왈라키아 공국을 수복한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 수복에 나섰다. 1813년 10월, 오스만 제국군은 혁명 정부의 내분 속에 손쉽게 베오그라드를 재점령했고 카라조르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망명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베오그라드에서 2천여 여성과 아동을 잡아 노예로 팔았고, 봉기군 수뇌부 주택들을 파괴했으며 그 외에 여러 사유 재산을 압수했다. 1814년, 크라구예바츠 등지에서 벌어진 하지 프로단의 봉기를 진압한 후 오스만 당국은 베오그라드에서 2백여 봉기 가담자들을 관통형으로 처형시켰다. 1815년 봄,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제2차 세르비아 봉기가 터지자 오스만 조정은 결국 자치적인 세르비아 공국의 설립을 허가했고, 1830년 마흐무트 2세는 공식적으로 자치권을 부여했다.[10] 1832년 10월에는 보스니아의 아얀 후세인 그라다스체비치가 벨그라드를 통해 제국으로 돌아왔다.
3.8.5. 세르비아 공국
▲ 1882~84년에 세워진 궁전 (스타리 드보르)
1841년 크네즈 (공작)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는 크라구예바츠에서 베오그라드로 천도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공식 수도로 이어진다. 한편 1840년에 완공된 성 미하일 성당 등 유럽식 건물들이 세워졌고, 시가지는 점차 교외로 확장되었다. 다만 시내에는 여전히 무슬림 주민들도 거주했고, 성채와 각 성문에는 오스만 수비대가 유지되는 2중 체제가 이어졌다. 그러던 1862년 6월, 시내의 추쿠르 우물에서 오스만 병사와 세르비아인의 다툼에서 2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이 사살되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무장하고 성문을 장악했다. 봉기는 영사들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오스만측 총독은 영사들을 성채로 소환한 후 56문의 대포로 두 희생자의 장례가 거행되던 시가지를 오후까지 포격했다. 영국 영사의 개입으로 멈췄지만, 결과적으로 50여명이 사망하고 주택 20채가 불탔다.
추쿠르 우물 사건 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개입해 오스만 조정을 압박하여 세르비아 공국 내 튀르크 주민을 소개시키도록 했다. 미하일로 공은 주요 도시 성채들에 남은 오스만 수비대에 대해서도 오스만 조정에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며 설득했다. 그 결과 1867년 4월, 칼레메그단 성채의 오스만 수비대가 떠나며 세르비아 공국군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베오그라드 시가지는 빈을 참고하여 격자형으로 재편되었고, 여러 공원이 조성되었다. 1868년 미하일로 공은 새로 조성된 공원들 중 하나에서 산책하던 도중 암살된다. 명목상으로나마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던 세르비아 공국은 1878년 독립을 얻었고, 칼레메그단 성채에 세르비아 깃발과 나부끼던 오스만 깃발이 내려졌다. 16개에 달하던 구도심의 모스크는 1869-96년에 걸쳐 대부분 파괴되었고, 세르비아 공국은 1882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승격된다.
3.9. 근현대
▲ 1차 대전 국난 극복을 기념하며 칼레메그단 성채에 세워진 승리의 기둥
▲ 1911~22년에 세워진 노비 드보르 (신 궁전)
▲ 1907-36년에 세워진 세르비아 국회의사당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가 된 베오그라드는 빠르게 발전했고, 1885년 니시와의 철도가 개통했다. 1896년 6월에는 중부 유럽 최초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상영될 정도로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00년 기준 베오그라드의 인구는 7만이었는데, 5년 후에는 1만이 늘어 8만에 달했다. 1909년에는 첫 영화관이 생겼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4년에는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인 제문을 제외하고도 10만 인구를 넘겼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직후인 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베오그라드를 포격한 데에 이어 12월 1일에 점령했다. 비록 12월 16일 세르비아 왕국군이 수복했으나 전투가 장기화되며 시가지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1915년 10월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의해 베오그라드는 재차 함락되었다가 1918년 11월 1일에 프랑스-세르비아 군에게 재차 수복되었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기 베오그라드는 여전히 수도였으나 인구 상으로는 한동안 수보티차에 밀렸다.[11] 다만 1920년대 들어 베오그라드는 빠르게 발전했고, 1931년에 24만 인구가 된 것에 이어 1940년에는 32만에 이르렀다. 1927년에 공항, 1929년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세워졌다. 1934년 사바강에 알렉산데르 국왕 다리, 1935년에는 도나우강에 판체보 다리가 놓였다. 1939년 9월에는 제1회 베오그라드 그랑프리 대회가 성채 주변에서 개최되었고 8만의 관중이 몰렸다. 1941년 3월에 왕실이 추축국 가입을 선포하자 반대 시위가 열렸고,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친연합군 정부가 세워져다. 이에 4월 6일, 독일 공군이 베오그라드를 포격해 2천 2백명 이상이 사망했다. 뒤이어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군이 침공했고 베오그라드는 4월 12일에 불과 6명의 독일군이 부풀린 허장성세로 항복하고 말았다. 독일 치하에서 1941년 여름부터 게릴라 전이 이루어졌고, 독일군은 유대인 등 주민들을 학살하며 분풀이했다. 1944년 4월 16일, 연합군이 하필이면 정교회 부활절에 베오그라드를 폭격해 1천 1백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해 10월 20일, 파르티잔과 소련군에 의해 도시는 해방되었다. 1945년 11월 29일, 요시프 티토가 베오그라드에서 유고 연방의 설립을 선포했다. 2차 대전동안 무려 1만 1천 5백 채의 주택이 붕괴했기에 전후 재건 사업이 이루어졌고, 1948년에는 신 베오그라드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냉전기 베오그라드는 1961년의 회담을 시작으로 '비동맹주의'의 거점으로 주목을 받았다. 1962년에는 니콜라 테슬라 국제공항이 세워졌다. 1964년 티토의 '시장 사회주의' 정책과 함께 베오그라드에는 서방 자본이 들어왔고,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다만 1968년에는 학생 운동과 경찰의 진압이 있었다.
3.10. 현대
1938-39년에 세워진 발칸의 첫 마천루인 팔라타 알바니야[12] | 1964-79년에 유고 양식으로 세워진 베오그라단카[13] 빌딩 |
▲ 1999년 NATO 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청사 건물. 현재까지도 폭격 맞은 상태 그대로 일종의 관광자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 사방 강 건너편의 노비 베오그라드 전경
1969년 베오그라드 인구는 백만을 넘겼다. 다만 이촌향도가 가속화되며 주택난이 심해졌다. 1980년 5월에는 티토가 사망하여 128개국의 조문과 및 많은 인파와 함께 장례가 거행되었다. 1991년 3월 9일, 베오그라드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반대하는 10만 단위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이에 군경이 발포해 203명이 사망했고 108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에는 탱크가 배치되었다.
이후로도 사라예보 연대 시위 등 많은 반전 시위가 열렸고, 1996-97년에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있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나토군이 종종 베오그라드를 폭격해 2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여러 관공서, 호텔, 병원 등이 파괴되었다. 전후 베오그라드에는 많은 세르비아인 난민이 정착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시에 베오그라드에서는 많은 시위가 열렸고, 결국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밀로셰비치 축출 후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수도가 되었으나, 2006년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하면서 결국 세르비아 공화국만의 수도가 되었다. 2014년부터 사바 강 서안의 신 베오그라드에는 세르비아-아랍에미리트 공동 투자로 168m 높이의 베오그라드 타워 등 여러 마천루가 세워졌다. 2023년 6월에는 2027 베오그라드 엑스포의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4. 관광
▲ 랜드마크와도 같은 칼레메그단 성채의 진단 성문
▲ 칼레메그단 성채의 항공사진
긴 도시의 역사에 비해 도시 규모 자체가 작고 오랜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곳이 많아 체코 프라하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만큼 볼거리가 많지는 않다. 성채 외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 18세기 초에 지어진 주택일 정도.. 그러나 관광 물가는 유럽 최저 수준으로 크게 저렴하며[14] 시민들도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중세풍의 유럽을 여행하고 싶다면 베오그라드를 방문하는 것이 좋다.
여러곳에 오래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들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고 특히 중심가인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Улица Кнез Михаилова)와 스카다를리야 거리(Скадарлија)에는 유럽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잘 남아 있다. 특히 도나우강 과 사바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은 칼레메그단(Калемегдан) 요새는 자그마치 3세기 로마 제국 시절부터 존재해 왔으며 중세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여러 양식들이 혼합된 형태로 남아 있다. 요새 내부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쓰이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혹시 밀덕이 베오그라드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이곳도 한 번 방문해 보길.
그리고 세르비아가 낳은 천재적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15]가 살아생전에 발명한 테슬라 코일 등 발명품들을 전시한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도 동유럽 여행을 갈 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가봐야 될 명소 중 하나이다. 베오그라드는 도시에 위치한 국제공항 이름이 베오그라드 니콜라 테슬라 공항일 정도로 테슬라의 도시라고 홍보를 하는 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묘소과 기념관, 유고슬라비아 박물관도 이곳에 있다. 세르비아에선 티토가 크로아티아계란 이유로 그의 묘소를 철거하고 유해를 크로아티아로 보내자는 여론도 조금 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정식 승계국을 주장하고 있는 세르비아 정부에선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건국의 아버지라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함부로 묘소를 크로아티아로 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과거 세르비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실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왕궁도 이곳에 있는데 가이드 투어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도시를 여행하는 중국인 관광객이 매우 많다. 아무래도 중국 시민이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인데다가 세르비아의 친중성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베오그라드를 걷다보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에게 '니하오' 라고 인사를 건네는 세르비아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건 인종 차별하는게 아니라 진짜로 그냥 중국인인 줄 오판하고 인사하는 경우에 더 가깝다.
5. 교통
▲ 사바강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인구 100만을 넘어가는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이웃국가인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와는 다르게 지하철은 없고 노면전차가 지하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하철은 1923년에 처음 주장이 나왔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인 1970년대부터 건설 계획이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계속 미뤄지기만 해서, '고도를 기다리며(Čekajući Godoa)'를 패러디한 '지하철을 기다리며(čekajući metroa)'로 불리는 등 완전히 떡밥 취급당하다가 드디어 2021년 12월에 착공했다! 기사 2개 노선 43개 역으로 2025년 개통 예정이었다가 2026년으로 연기되더니 2028년 8월로 또 연기되었다.
세르비아 철도망의 중심지이다. 베오그라드 중앙역이 과거 주역을 대체해 영업하고 있다. 2016년 선개통 후완공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6. 치안
유고슬라비아 전쟁 직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를 틈타 세르비아 마피아들이 활개치면서 피 튀기는 사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테러와 암살 등 범죄들이 빈발했다. 2003년경 당시 조란 진지치 총리가 세르비아 마피아에 암살당한 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단속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많이 개선이 된 편이다.다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풀린 총기들은 회수가 잘 안 되는 듯싶은데, 민간에 회수가 안 된 총기로 각종 안전사고가 벌어지기도 한다. 2023년 5월에는 초등학교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의 보복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
7.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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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FK 파르티잔과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그리고 OFK 베오그라드가 있으며, 축구에 미쳐 사는 도시로 '악명'이 높다.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각 공화국 간 갈등이 고조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말기 무렵 즈음에는 축구계와 팬 문화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특히 명문가인 베오그라드의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팬클럽인 델리예(Delije)가 훌리건 수준을 넘어서 거의 준군사 조직화된다. 델리예의 단장은 과격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이자 깡패 출신인 젤리코 라즈나토비치[16]였다. 젤리코는 델리예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 보았고 많은 동조자들이 델리예에 가담했다.
이런 위험한 분위기는 다른 공화국의 축구팀 서포터즈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1990년에는 크로아티아에서 분리 독립 투표를 시행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즈베즈다가
결론적으로 세르비아를 비롯한 구유고 구성국에서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를 넘어서 민족주의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는 뜨거운 감자와도 직접 연결되기도 하는 사안이다.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분위기가 한번씩 과열되기가 쉽다.
8. 경제
▲ 시내 중심부의 야경[17]
▲ 사바 강변의 금융 지구[18]
유고 연방의 붕괴 후 경제가 어려운 편이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사바강 주변에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고, 2027 베오그라드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 자본의 투자가 늘어나고 있어 꾸준히 발전 중이다.
9. 여담
- 이스탄불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성문 중에는 '벨그라드 성문'이 있는데, 이는 1521년 베오그라드를 정복한 술탄 쉴레이만 1세가 현지 세르비아 주민들을 일대에 이주시킨 후 세운 성문이다. 보통 오스만 제국 시기 성문들은 수십 km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도시를 이름으로 많이 썼는데, 베오그라드와 이스탄불 간의 거리가 1천 km에 달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사정 덕에 벨그라드 성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0. 자매 도시
- 1957년 영국 코번트리
- 2005년 미국 시카고
- 2010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 2012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 2018년 중국 상하이
- 2020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스릅스카 공화국) 바냐루카
11. 대중매체에서
중국의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의 대형 이벤트 전역 이성질체와 일반전역 11지역이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HOI4에서 베오그라드그라드는 지형으로 인해 더럽게 안 뚫리기로 악명 높다. 그와 비슷한 건 네덜란드 지형을 침수시키는 범람선 디시전으로 독일을 바보로 만드는 네덜란드 침수 그라드가 있다. 언젠간 뚫리는 베오그라드그라드랑 달리 이쪽은 작정하고 밀어도 1945년 넘게 뚫리지도 않아서 대다수 멀티에서는 금지다.
[1] 러시아의 벨고로드와 같은 뜻.[2] 세르비아인의 땅인데 '불가리아' 운운하는 이유는 헝가리인들이 카르파티아 분지 일대에 정착했을 당시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세르비아 일대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3] 다만 현생 인류가 아닌 네안데르탈인일 가능성이 높다[4] 블라디슬라브 입장에서는 1282년 부친의 양위 당시 밀루틴 사후의 세르비아 왕위를 약속받았고, 1312년 드라구틴-밀루틴 휴전 시에는 적어도 스렘 왕위는 보장받기로 했으나 1319년에 그마저도 빼앗긴 것..[5] 그중 데스포티스의 탑과 서부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6] 벨그라드 무하피즈 (수비대장) 이제트 메흐메트 파샤, 셀림 파샤, 하산 파샤도 합장되어 있다. 현재 해당 건물은 주세르비아 터키 대사관 소유이다.[7] 본래 하지 무스타파 파샤가 진압을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자 크네즈들이 자신들이 직접 싸울테니 믿어달라 했고, 바로 1만 병력을 소집해 벨그라드로 향했다.[8] 실제로 하지 무스타파 파샤의 측근들이 복수를 위해 크네즈들과 연대하고는 있었다[9] 봉기군 지도자 중 하나인 밀렌코 스토즈코비치는 많은 무슬림 여성을 사들여 하렘을 세우기도 했다[10] 불론 10여차례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조정이 승인한 것은 밀로시는 카라조르제와 달리 완전한 독립이 아닌 폭정 종식과 자치권만을 요구했고, 마침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러시아가 다시 발칸에 개입할 것을 조정이 염려했으며, 메테르니히 체제 하에서 안정을 원했던 유럽 국가들이 휴전을 촉구한 영향이 겹친 결과이다. 1817년에는 카라조르제도 암살당하고 밀로시는 벨그라드 총독 마르샬리 알리 파샤와 휴전을 체결하며 2차 봉기를 끝낸다. 이후 그리스 독립 전쟁에 치중하던 오스만 제국은 결국 그리스를 잃은 후, 세르비아를 명목상으로나마 지키기 위해 자치권을 공식 인정했다.[11] 헝가리어로는 서버드커(Szabadka)라 불리는 수보티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성 이슈트반 왕관령 제3의 도시였다.[12] 알바니아 궁전이란 뜻. 본래 오스만 풍의 알바니아 카페가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13] 베오그라드 아가씨란 뜻[14] 숙소만 잘 잡으면 볼 거 다 보고, 먹을 거 다 먹으면서 3박 4일을 숙소 포함하여 불과 14만원으로 보낼 수도 있다.[15] 다만 출생지는 크로아티아.[16] '아르칸'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젤리코는 얼마 뒤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민병대를 꾸려 참전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젤리코와 그의 부대는 전쟁범죄와 민간인 학살 혐의를 받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했다. 젤리코 본인은 2000년에 암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17] 사진은 슬라비야 광장(Trg Slavija)이다. 뒤로 보이는 대성당은 성 사바 대성당(Hram Svetog Save).[18] 베오그라드 워터프론트(Beograd na Vodi)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