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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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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Кнежевина Моравска Србиј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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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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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년 ~ 1402년
수도 크루셰바츠
위치 세르비아, 코소보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크냐지
언어 세르비아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종족 세르비아인
건국 이전 세르비아 제국
계승국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1. 개요2. 역사3.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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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71년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모라바 분지를 중심으로 건국한 공국. 라자르의 지속적인 확장 정책 끝에 1389년경 세르비아 대부분을 석권했지만,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가 오스만 제국군과 맞서다 전사한 뒤 오스만 술탄국의 속국이 되었다. 1402년 라자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테판 라자레비치앙카라 전투 이후 오스만 술탄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으면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으로 개편되었다.

2. 역사

1355년 12월 20일, 세르비아 제국 초대 황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47세의 나이로 급사했고, 외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황제에 선임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리아의 통치자 시메온 우로시는 1359년 우로시 5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를 칭했으며, 제국의 북동부 지역인 브라니체보와 쿠체보를 지배하던 라스티슬라리치 가문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나머지 지역을 다스리는 대귀족들은 우로시 5세를 주군으로 받들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명령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우로시 5세는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드리나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의 세르비아 북서부를 지배하며 헝가리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에게 의존했다. 보이슬라프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세르비아 중앙부의 루드니크 산에서 아르아 해안의 코니블리까지, 그리고 드리나 강 상류에서 코소보 북부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렇듯 혼란한 시기에 걸출한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니, 바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였다.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버지 프리바크 흐레벨랴노비치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치하 세르비아 궁정에서 로코테티스(Логотет: 특정 부서의 수장)를 역임했으며, 세르비아의 주요 광산 중심지인 노비 브르도 주변의 광산과 정착지를 영지로 다스렸다. 라자르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퍼터(ставилац: 왕실 식탁에 차릴 음식을 구입, 준비 및 제공하는 자)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퍼터는 세르비아 궁정에서 가장 낮은 직위였지만, 통치자와 매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다가 두샨 사후 세르비아가 여러 귀족에 의해 분열되고 있을 때, 라자르는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의 측근이 되었고, 1363년 7월 우로시 5세가 보이슬라프와 세르비아 영주 무사 사이의 영토 교환을 허용한 헌장에서 증인으로 언급되었다.

1363년 9월, 보이슬라프가 급사했다. 그 후 부카신과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 형제가 세르비아 제국의 가장 강력한 거물이 되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제국 남부 지역을 통제했다. 우로시 5세는 부카신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으로 선임했고, 우글레샤를 데스포티스로 삼았다. 한편, 보이슬라프의 조카인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1368년까지 삼촌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라자르는 이 시기에 독립하여 지역 영주로서 성장했다. 그는 남쪽의 므라냐브체비치 가문의 영지, 서쪽의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의 영지, 북쪽의 라스티슬라리치 가문의 영지와 경계를 이룬 일대를 다스렸다.

라구사 공화국의 역사가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라자르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우로시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공물을 바쳤지만, 1370년 4월 우로시 5세를 배제하고 부카신에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받았다. 다만 니콜라는 헝가리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1371년 9월 26일, 세르비아 제국의 권신 부카신과 우글레샤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마리차강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부카신의 아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가 뒤이어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 되었지만, 오스만 제국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많은 영토를 헌납했다. 그해 12월 4일, 우로시 5세가 사망했다. 세르비아 영주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를 자처한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부카신의 옛 영지를 공략했다. 이때 라자르도 끼어들어 프리스티나를 점령했다.

라자르는 다른 세르비아 대귀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갈수록 강성해지던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 트브르트코 1세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그와 함께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를 협공하기로 했다. 1373년 가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보스니아군과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니콜라는 우지체에서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라자르는 그를 세르비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세르비아 공 칭호를 사용하는 걸 인정받았으며, 자기가 가진 영지의 지배권 역시 인정받았다.

그 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를 받으며 다른 세르비아 귀족들을 압박했고, 루드니크 산지의 니콜라 조이치와 토플리카 강 계곡의 노박 벨로크비치를 복속시켰다. 1379년, 라자르는 헝가리의 가신을 칭하던 라스티슬라치치 가문으로부터 쿠체포와 브라니체포를 공략하고, 해당 지역의 영주로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제 라자르의 영토는 옛 세르비아 제국 영토에 있는 다른 영주들보다 거대했으며, 군대와 행정망이 잘 조직되었다. 그는 수도를 크루셰바츠로 정했으며, 모라바 강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다뉴브 강과 사바 강, 북서쪽으로 드리나 강을 따라 이어진 영역을 지배했다. 여기에 니시와 우지체 등 주요 도시와 세르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중심지인 노보 브르도와 루드니크를 지배했다.

또한,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는 지역에서 도망친 정교회 수도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이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아 경작되지 않았던 모라비아 일대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이주민들을 그곳에 정착하도록 했다. 그리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황제 즉위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페치의 세르비아 총대주교간의 분열을 치유하고 화해하고자 노력했다. 1375년 4월 세르비아 초대주교 사바 4세가 사망하자, 그해 10월 라자르는 페치에서 세르비아 교회 공의회를 소집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대해 온건적인 성향의 제프렘을 선출하도록 유도했다. 그 후 두 총대주교청은 과거의 앙금을 씻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라자르는 이외에도 1381년 라비니차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로 삼은 크루셰바츠에 성 스테판 교회를 세우는 등 교회 후원에 힘썼다.

이렇듯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 아래 갈수록 위세를 떨쳤지만, 제타 공국을 세운 발시치 가문, 코소보의 부크 브란코비치, 마케도니아 서부의 마르코 므르냐체비치, 마케도니아 일대의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 등은 라자르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중에서 마르코 므르냐체비치와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은 오스만 제국의 가신이 되었다. 1388년에는 제타 공작 주라지 스트라미로비치 발시치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도 점점 거세졌다. 1381년, 가신들의 영토를 방해받지 않고 통과하던 튀르크 약탈대가 모라비아 세르비아에 침입했다. 이에 라자르의 가신인 크렙 부코슬라비치와 비토미르가 파라친 시 인근의 두브라브니차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1386년,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가 훨씬 많은 군대를 이끌고 니시를 탈취했다. 이에 라자르는 니시 남서쪽에 있는 폴로치니크에서 무라트 1세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거세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다. 1386년 불가리아 제2제국차르 이반 시슈만과 자기 딸 드라가나를 결혼시켰으며, 1387년 3월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 국왕 자그문트와 동맹을 맺고 딸 테오도라를 자그문트의 핵심 추종자인 가라이 미클로시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부크 브란코비치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트브르트코 1세로부터 군사 원조를 약속받았다. 이윽고 1389년 6월, 무라트 1세가 이끄는 27,000 ~ 30,000가량의 오스만군이 부크 브란코비치의 영토인 프리슈티나 인근 코소보 평원에 이르렀다. 라자르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군대를 일으켜 부크 브란코비치와 합세했고, 트브르트코 1세도 원군을 파견했다. 여러 연대기는 오스만군에 맞선 라자르, 부크, 트브르트코 1세 연합군의 규모를 최소 12,000명, 최대 30,000명으로 추산한다.

1389년 6월 15일, 1차 코소보 전투가 발발했다. 양자는 이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자르와 무라트 1세 모두 목숨을 잃었다.[1] 전투 자체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라자르가 이끌던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은 이 전투로 인해 라자르 흐르벨랴노비치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과 장병들을 상실했다. 그 후 장남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새로운 세르비아 공이 되었고, 어머니 말리카가 스테판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1차 코소보 전투 3주 후인 1389년 7월 7일,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지그문트는 헝가리 귀족 가라이 미클로시를 부크 브란코비치에게 파견해,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을 나눠 가지는 일에 관해 논의하도록 했다. 가라이 미클로시와 부크 브란코비치 모두 스테판의 여동생들과 결혼했지만,[2] 당대에는 가까운 친척들이 미성년자였던 적법한 상속인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협상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그문트는 그해 10월 군대를 파견했다. 헝가리군은 사바 강을 건너 크니치 인근에 있는 보라치 요새와 체스틴 요새를 함락하고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북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헝가리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세르비아 총대주교 스피리돈 1세의 제안에 따라 오스만 술탄국의 신임 술탄 바예지트 1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1390년 중순 오스만 제국군이 세르비아 남부 국경에 집결한 뒤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따르면, 스테판은 오스만 술탄에게 보조군을 보내고 경의를 표해야 하며, 남동생 부크와 여러 저명한 귀족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술탄의 궁정에 가서 바예지트 1세에게 복종을 서약하기로 했다. 바예지트 1세는 그 대가로 스테판을 외세로부터 보호해주기로 했고, 스테판의 막내 여동생인 올리베라를 첩실로 삼기로 했다.

1390년 여름, 세르비아군은 오스만 보조군의 지원을 받고 헝가리군에게 잃어버렸던 영토를 탈환했다.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헝가리-세르비아 국경지대인 골루박을 장악하고 헝가리를 침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그 후 세르비아-헝가리 국경 분쟁은 2년간 지속되었다. 1392년 여름, 지그문트는 코빈 인근에서 믈라바 강을 건넌 뒤 세르비아의 즈드렐로까지 침투해 약탈을 자행한 뒤 골루박을 탈환하려 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지그문트와 함께 세르비아를 나눠가지려 했던 부크 브란코비치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받다가 1392년 스코페가 함락되자 그해 말에 바예지트 1세에게 귀순하고 스테판과 함께 바예지트 1세의 가신이 되었다.

1393년, 스테판은 성년이 되어 친정에 나섰고, 어머니 밀리카는 수녀 '에우제니아'로 개명한 뒤 류보스티냐 수도원에 들어갔다. 같은 해, 바예지트 1세는 헝가리 왕국과 내통한 불충한 가신 이반 시슈만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트르노보를 점령하고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많은 불가리아 학자들이 주변 기독교 국가로 피난했는데, 그중에는 스테판이 다스리는 세르비아도 있었다. 1394년 초, 바예지트 1세는 기독교 가신들을 소집했다. 스테판은 여기에 참여했고, 테살리아와 테살로니키 공략전에 참여했다.

1394년 가을, 바예지트 1세는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를 복속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스테판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벨부즈 데스포티스 콘스탄틴 드라가쉬와 함께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1395년 5월 17일 하류 다뉴브 저지대에 위치한 로비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패했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와 콘스탄틴 드라가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스테판은 목숨을 건졌다. 바예지트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테니 물러나달라는 미르체아 1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마르코와 콘스탄틴의 영지를 합병했다.

1396년 여름, 스테판은 바예지트 1세의 원정에 참여해 비딘과 바나트 공방전을 수행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고 헝가리에 충성을 맹세한 부크 브란코비치가 다스리던 영지 침공전에도 참여해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영지 대부분을 석권하는 데 기여했다. 얼마 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이 헝가리에 집결한 뒤 다뉴브 강을 건너 비딘을 공략하고 오스만 수비대가 지키던 니코폴리스를 포위하자,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하던 바예지트 1세는 포위를 풀고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스테판은 보조군을 이끌고 폴로브디프 인근에서 바예지트 1세와 합세했다.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스테판은 세르비아 중기병대를 이끌고 헝가리군 전선을 돌파했으며, 가라이 미클로시의 군기를 비롯한 헝가리군의 주요 깃발을 빼앗았다. 십자군은 헝가리군 군기가 쓰러진 걸 보고 지그문트가 전사했다고 믿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패주했다. 십자군이 무너진 뒤, 오스만 술탄국은 발칸 각지를 휩쓸었다. 이때 부크 브란코비치는 오스만군에 맞서다 생포된 뒤 1397년 10월 6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이후 부크 브란코비치의 영지 대부분은 스테판에게 넘어갔고, 부치트른 등 일부 지역은 부크 브란코비치의 아내이자 스테판의 여동생 마라 라자레비치와 자식들에게 넘어갔다.

1398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은 보스니아를 침공했다. 스테판은 이 원정에도 가담했지만, 이번에는 극심한 추위와 폭설 때문에 큰 희생만 치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세르비아 영주 니콜라 조이치와 노박 벨로크빅비치, 미하일로는 바예지트 1세에게 스테판이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 내통했기 때문에 보스니아 원정이 실패했다고 고발하려 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스테판이 오스만 술탄국의 신임을 잃어버리고, 자기들은 그로부터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로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스테판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쳤고, 스테판은 노박 벨로크빅비치를 자기 궁정에 소환한 뒤 처형하고 그의 영지인 토플리카와 흐보스노를 몰수했다. 니콜라 조이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루드비크 산 꼭대기에 있는 오스트비카 요새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면서 목숨을 건졌지만,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니콜라와 노박의 고발이 바예지트 1세에게 전해졌고, 오스만군은 3월 하반기에 세르비아 국경에 진군했다. 이에 스테판의 어머니 밀리카가 바예지트 1세를 찾아가 아들이 무고하다고 호소했고, 뒤이어 스테판이 바예지트 1세를 찾아가서 그 앞에서 해명했다. 바예지트 1세의 하렘에 있던 스테판의 여동생 올리베라도 오빠가 무고하다고 호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예지트 1세는 그애 대한 의심을 풀었고, 스테판은 1398년 11월에 세르비아로 돌아갔다. 이때 스테판은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 부르사에서 성 페트카의 유물을 가져와서 크루세바츠의 라자리카 교회에 전시했다.

1402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공한 티무르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가신들을 대거 소환했다. 스테판은 동생 부크,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 그르구르 브란코비치와 함께 세르비아 중기병대를 이끌고 여기에 가담했다. 1402년 7월 28일에 발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그의 5,000 세르비아 중기병대는 우익에 편성되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펼쳤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적군을 맹렬히 공격해 적의 대열을 여러 차례 돌파했다. 심지어 적장 티무르도 세르비아 기병대의 용맹을 개인적으로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출신의 튀르크 영주들이 대거 티무르 편으로 넘어가버리면서, 전세는 오스만 제국군에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급기야 티무르의 군대는 오스만 제국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바예지트 1세 본인이 예니체리 10,000명과 함께 있던 중앙 부대를 포위했다. 스테판은 포위망을 부분적으로 뚫고 바예지트 1세에게 달려간 뒤, 속히 전장을 빠져나가 패잔병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예지트 1세가 거부하자, 스테판은 할 수 없이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쉴레이만 첼레비를 데리고 부르사로 철수했다.

앙카라 전투 이후, 스테판은 동생 부크와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렀다. 이때 서유럽 전역을 돌며 원조를 요청하던 마누일 2세를 대신해 제국을 다스리던 요안니스 7세는 1402년 8월 스테판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했다. 이때부터 스테판은 스스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를 칭했다.

3.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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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자르는 모든 사료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무라트 1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사료마다 다르게 나오기에 불분명하다.[2] 가라이 미클로시는 테오도라 라자레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는 마라 라자레비치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