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2:28:48

훈족

훈 제국
Huns | Hunnic Empire
파일:Huns.png
앵거스 맥브라이드(Angus McBride)의 훈족 묘사 일러스트[해설]
파일:훈 제국의 영역.png
450년 훈족의 지배 영역[2]
370년경 ~ 469년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colbgcolor=#fff,#212121>훈족(Huns)
훈 제국(Hunnic Empire)
아틸라 제국(Atilla's Empire)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부족 연맹
위치 동유럽, 중부유럽 일대
중앙아시아
언어 훈어
고트어
문자 훈 문자 (?)
고트 문자
종교 불명[3]
군주 국왕 또는 족장
주요 군주 아틸라
성립 이전 흉노 (추정)
스키타이 (추정)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불가르

1. 개요2. 계통
2.1. 흉노-훈족 동계론
2.1.1. 동질론 (2018년 이전)2.1.2. 결론: 흉노스키타이의 혼혈2.1.3. 그 외 관련 민족
3. 훈족의 역사
3.1. 아틸라 이전
3.1.1. 4세기 중반, 게르만족 격파
3.2. 아틸라 재위기
3.2.1. 440년~442년, 제1차 동로마 침공3.2.2. 447년, 제2차 동로마 침공3.2.3. 451년~452년, 서로마 침공
3.3. 아틸라의 죽음과 붕괴
3.3.1. 정치적 분열과 피지배민 독립3.3.2. 469년, 뎅기지크의 죽음
3.4. 붕괴 이후
4. 훈족의 이미지와 서양 문화에의 영향5. 알려진 훈족의 지도자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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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족(Huns)은 서기 4세기 후반부터 서로마 제국 말기까지 유럽 대륙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기마 유목민 집단이다. 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흑해 연안과 동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선주민이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밀려났고, 이는 다시 서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가속시켰다. 훈족은 정복 군주였던 아틸라의 치세 당시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평가되나, 그가 죽은 뒤 빠르게 와해되었으며 서기 5세기경 자취를 감추었다.

2. 계통

유전자 계통 연구 결과, 훈족은 이란계 스키타이인과 흉노족의 혼혈로 확인되었다. 우선 훈족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로마인들 및 게르만인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이동하면서 임시거처를 설치하고 철거하길 반복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훈족들이 세운 유적이라든지 문화적인 흔적도 후대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알려진 훈족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게르만어인데, 이것은 훈족이 빠르게 게르만식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으로 아틸라의 궁정에서도 고트어가 통용되었다.

훈족이 게르만 지도층으로 편입되었고, 이들을 부르는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들 훈족이 게르만식으로 표현된 이름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훈족의 왕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아틸라는 게르만식 이름이 아니며, 이는 훈족 지도층들이 그들 고유의 이름과 문화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2.1. 흉노-훈족 동계론

파일:Huns_and_Xiongnu.png
흉노-훈족 동계론에 따르면,
멸망 이후의 북흉노 집단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을 흡수하며 유라시아 스텝 지역을 통해 서진했다.

훈족의 계통에 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주장은 흉노와의 관계이다. 이 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훈족과 흉노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둘 모두 유라시아 북부에서 활동한 기마문화권이라는 피상적인 이유에서 제기되었던 이론인데, 2018년 결정적인 근거가 밝혀져 정설이 되었다. 한국의 학교들에서도 훈족과 흉노를 동일시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고, 구글 번역에서도 '훈족'과 'huns'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匈奴'(흉노)로 출력된다. 반대로 중국어로 '匈奴'를 영어로 번역해도 'huns'로 번역된다. 영화 <뮬란>에서도 중국을 침략하는 민족이 훈족으로 언급되고, 한국어와 중국어판에서 흉노로 번역된다.

2.1.1. 동질론 (2018년 이전)

이때까지는 명확한 연구 결과가 없어 흉노가 훈과 관련이 있다는 설의 근거들만 있었다. 또한 흉노와 훈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이동 과정에서 혈연적•문화적 이질성이 나타서 동족인지 의문이 있었다. 동질성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
    우선,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인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ʿ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인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점비일체지덕경》[4]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5], 308년에 번역한 《보요경》[6]에서도 똑같이 옮겼다.[7]



    Étienne de la Vaissière, “Xiongnu,”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6, available at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xiongnu (accessed on November 15, 2006).
  • 흉노는 튀르크계 언어를 썼으며, 훈족 또한 튀르크계 언어를 썼다.[8] 유럽 역사서에 남아있는 훈족 왕족의 이름은 튀르크 계통의 언어(아틸라 등), 아랍 지역에 남아있는 훈족 추장의 이름도 튀르크 계통의 언어(카프간 등)이다.
  • 흉노와 훈은 중국과 유럽의 기록에서 동일한 민족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 표시된 훈족의 거주 지역과 중국의 《위서》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언급하는 흉노의 출현 지역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소그드인[9]선비 탁발부가 세운 북위의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는 영가의 난[10]에 대해
    "훈족이 낙양을 함락하고, 소그드족 상인들을 붙잡았다."

    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서기 4세기 말이나 서기 5세기 초에 제작된 성(聖)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라틴어 지도에는 ‘후니스키타이’(Huniscite)란 이름이 ‘세레소피둠’(Seresoppidum, Sera Metropolis), 즉 중국의 부근에 기재되었는데, 이 지도는 기원전 7년 8월에 제작된 로마 지도와 아크리프의 세계 지도(Orbis Pictus)를 인용•참고한 것이었다. 이것은 기원전에 유럽인들이 이미 동아시아의 '흉노'를 '훈'으로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아래의 반론에서 말하듯, 유목집단이 활동무대가 겹치는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름을 쓰는 두 집단이 똑같은 활동 무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관련성을 결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 흉노와 훈족이 남긴 동복(=구리 솥)의 유물 분포를 보면 시대적으로 동유럽, 중동, 우크라이나 (이때는 흉노가 아닌 이란계 스키타이족)→중앙아시아→ 내몽골 → 중국 화북 →서유럽의 순서로 이어진다. 구리 솥 양식의 일치는 곧 흉노와 훈족이 같은 양식으로 음식을 지어먹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되며, 시대적으로도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훈족이 흉노의 유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 흉노의 지도자는 선우로 선우는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 흉노 선우가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듯이, 아틸라도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고 한다.(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중). 하늘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문화는 몽골 계열 유목민족들의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흉노와 훈의 연관성을 알려주고 있다.
  • 북흉노가 중국 사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시기(93년)와, 훈족이 로마 제국의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시기(370년) 사이의 차가 너무 크다. 유라시아 대초원이 광활하긴 하지만 횡단에 있어서 그것도 유목민이 300년이 걸리진 않는다.
  • 유럽에 나타난 훈족은 흉노족과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머리를 묶었던 흉노와 달리 훈족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2.1.2. 결론: 흉노스키타이의 혼혈

이렇게 종합해볼 때 동족론이 좀 더 설득력이 있고, 비동족론은 자체의 논리적인 모순과 미흡으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족론이 절대적인 논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고 비동족론도 전혀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문헌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적 조사를 심화시켜 과학적 고증이 확실할 때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확답을 얻게 될 것이다.
정수일 편저 《실크로드 사전》
즉, 고고학과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는다면 동족론이 맞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 논의가 정체된 상황이었다. 여태까지 아무리 파봐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섣불리 동족론 혹은 정체성 계승론을 주장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비동족론을 주장하기에는 많은 정황 증거가 비동족론에 반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8년 5월, 코펜하겐 대학교의 에스케 빌러슬레프(Eske Willerslev) 교수는 헝가리에서 바이칼 호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지역 100여 개의 인골 유전자를 분석하여, 각 민족 집단 간 DNA 유사성의 편차를 확인했다. 그 결과, 스키타이인과 흉노족의 혼혈[11]이 훈족이었음이 드러났다. # 해당 논문은 《네이처》 지에 실렸다.

위 논문대로라면 정체성 계승론에 가까운 동족론, 즉 흉노의 문화와 정체성을 상당 부분 계승한 혼혈민족, 즉 흉노의 분파 내지는 후예가 수백년 후 부흥을 내걸고 등장한 것이 훈족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가장 설득력있는 설이 된다.

2.1.3. 그 외 관련 민족

  • 에프탈(백훈)
  • 헝가리 - 이름이 Hungary라서 훈족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1200년대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실에서 마자르족과 훈족의 뿌리가 같다고 역사서에 서술했으나, 분명 아시아 쪽에서 온 민족이긴 하지만, "같은 뿌리 설"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12] 다만 훈 제국이 붕괴되면서 떨어져 나간 후손인 우티구르족(Utigurs)의 일부가 마자르족에 흡수되긴 했다. 결론적으로 마자르족과 훈족이 크게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적지만 헝가리에서 '아틸라'(Atilla, 원어 발음은 '어틸러')라는 인명이 흔할 정도로 헝가리인들의 훈족에 대한 계승의식은 확고하다.[13]

3. 훈족의 역사

3.1. 아틸라 이전

3.1.1. 4세기 중반, 게르만족 격파

서기 2세기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서부 유라시아 초원의 민족들을 나열할 때 '코우노이'(Khounoi)라는 민족을 언급했는데, 코이네 그리스어로 이것이 훈족과 발음이 거의 똑같다. 그런데 이 민족의 위치가 다뉴브 강 하류, 왈리키아 북부~몰다비아 지역인지라 이 민족이 훈족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논란이 있는 편이다.

서기 4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서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킨 것이 훈족의 첫 등장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국경 저 멀리에서 야만족들끼리 치고 받는다는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는데, 훈족을 피해 서쪽이나 남쪽으로 도망친 동게르만계 고트족도나우 강(다뉴브 강, 다누비우스 강) 국경에 나타나면서 로마 제국에서도 난리가 나게 되었다. 고트족과 로마 제국 사이의 사건에 대해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항목 참조.

4세기 후반에만 해도 훈족이 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4세기 말부터 훈족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달마티아를 위협하며 본격적으로 로마 제국과도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후 훈족의 군대는 아르메니아 지역을 넘어 사산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까지 처들어갔으나 사산 제국의 반격으로 후퇴했으며, 다른 훈족의 부대는 시리아 지역과 카파도키아 지역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다만, 훈족은 로마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게르만족이나 로마 제국의 반역자를 상대로 로마군과 합동 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어서 마냥 적대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예외적인 사례로 서기 408년에 그 동안 로마의 동맹으로 행동해오던 훈족의 왕 울딘이 동맹을 깨고,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온 일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비장의 수단으로 자주 활약하는 매수 전략에 울딘의 부하 상당수가 그를 배신하여 제압되었다. 서로마 제국 말기의 실권자였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훈족과의 친분을 십분 이용해 결정적인 순간, 훈족의 지원군을 활용하곤 했다.

3.2. 아틸라 재위기

3.2.1. 440년~442년, 제1차 동로마 침공

훈족과 로마 제국 사이의 의외로 원만하던 관계는 아틸라의 시대에 끝장났다. 당시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西進)하여, 로마 국경 바로 건너편까지 진출해 있었다. 형인 블레다와 함께 훈족을 통치했던 아틸라는 즉위 초기에 근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으나 게르만족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자 그 기회를 활용하여, 440년 말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테오도시우스 왕조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 역시 훈족의 준동을 틀어막기 위해 연공을 2배로 올리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였으나,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얼마 안 있어 사소한 트집을 잡아 협정을 깨버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 수복 작전을 위해 서로마 제국에 보낸 병력은 상당 부분 발칸반도 야전군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동로마군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부유한 아프리카 속주를 동게르만계 반달족에게서 탈환할 절호의 기회에, 동로마의 지원군이 철군해버렸기에 더욱 뼈아픈 일이었다.

아틸라는 442년까지 발칸반도 북부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여럿 함락했다. 이전 세기 말에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패배를 당한 뒤에도, 요새화된 거점들은 고트족이 공성전을 할 능력이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고트족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동로마 정부는 442년에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조약은 연공으로 황금 1,400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처음에 씹어버린 연공 조건이 700파운드였으며, 이것이 그전 해의 350파운드를 2배로 늘린 조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3년 만에 연공이 4배로 늘어난 것이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훈족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하여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해있었던 훈족의 망명자들을 다시 훈족의 아틸라에게 인도하기도 했다.

3.2.2. 447년, 제2차 동로마 침공

물론 동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계속 굽히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섬까지 진출해 있었던 북아프리카 원정군이 복귀한 직후인 443년 즈음부터 훈족에 대한 연공 지급을 중단해버렸다. 때마침 444년 혹은 445년에 형이자 공동지배자였던 블레다가 갑자기 사망하고[14] 아틸라가 단독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자 훈족 내부의 정치 상황이 어수선해졌고, 이 시기에 동로마군은 반격을 준비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치세때인 447년 동로마군과 아틸라의 훈족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아틸라는 이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트라키아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 대부분을 약탈했다. 이 시기에 로마령 발칸반도가 입은 타격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적 발굴 사례를 보면 고트 전쟁에서 회복했던 도시가 아틸라 전쟁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사례들이 꽤 나온다. 또한, 로마제국 내에서도 상당히 번영을 누렸던 니시 지역도 완전히 처참하게 파괴되어버렸다. 궁지에 몰린 동로마 황제는 이전까지 지급을 거부한 연공을 포함해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동로마 제국은 449년에 아틸라의 측근을 매수해 아틸라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돈을 먹은 아틸라의 측근이 곧바로 아틸라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면서 계획이 들통났다. 아틸라는 영악하게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암살자들에게 지급하려고 보낸 황금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내며, 황제 접견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째서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
라고 조롱했다.

3.2.3. 451년~452년, 서로마 침공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 제국으로 돌렸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게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서로마를 침공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보낸 청혼[15]과 둘째, 게르만족을 상대로 훈족의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인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복속된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힘에 의해 굴복하고 있을 뿐이지, 이들이 훈족에게 동화되거나 정교한 행정력하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훈족과 게르만족들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로 불안한 공존을 하는 상태였다.

당시 도나우(다뉴브)강 유역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귀족 무덤에서 대량의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삥을 뜯거나 약탈해온 황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상당히 불균등하게나마 재분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아틸라는 몇 년 동안 동로마 제국을 털어먹으면서 발칸반도를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을 하기에도 마땅찮았고, 더 궁지에 몰린 동로마군이 사생결단으로 나올 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제1차: 440~442, 제2차: 447)의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의 주력군은 언제나 대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동로마 측도, 아틸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털어먹을 수 있는 게르만족은 거의 다 털어먹고 예속시켰으며, 아틸라 역시 즉위 초기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을 공격한 바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제국 최후의 100년》을 인용하자면, 아틸라의 훈족은 패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전쟁기계였다.

서기 451년 아틸라의 훈족과 그의 지배를 받는 게르만족들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공했으나 카탈라우눔 전투(451년)에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의 로마군과 서고트족 등 서로마-게르만족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지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452년에 아틸라는 피해를 바로 복구하는데 성공했고, 곧바로 군세를 모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해 아퀼레이아, 파도바, 베로나, 파비아, 밀라노 등 이탈리아 북부를 유린했다. 그러나 보급난과 전염병이 이들을 덮쳤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아틸라는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중재[16]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이듬해인 453년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의 첫날 밤에 의문사했는데, 사망 원인으로 암살, 복상사, 과음 등 참으로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3.3. 아틸라의 죽음과 붕괴

3.3.1. 정치적 분열과 피지배민 독립

비록 두 번의 서로마 원정에서 실패했다곤 해도, 아틸라는 뛰어난 장악력과 지휘력, 카리스마,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불안한 구조의 유목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세 아들들인 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타 동게르만계 게피드족이 훈족에게 반기를 들자 엘라크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네다오강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처절한 전투 끝에 게피드족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면서 훈족의 게르만족 지배는 무너져가게 되었다.

훈족 지배하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한 정도에 따라 독자세력화에 걸린 시간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킨 게피드족이 세력을 결집한 데 걸린 시간으로 보아 훈족 통치하에서도 나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오도아케르의 출신 부족으로 유명한 스키리족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내세운 왕이 스키리족 혈통조차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아틸라 사후의 혼란속에서 내부를 개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헝가리 지역의 상황은 훈족 잔당과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한 게르만족 + 독립한 여러 게르만족이 투쟁을 벌이고, 독립을 얻은, 혹은 시도하는 게르만족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난세 그 자체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자세하게 남지 않아 완벽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아틸라의 살아남은 두 아들들인 뎅기지크와 에르나크가 이끄는 훈족 잔당은 한동안 여전히 일정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떨어져나간 게르만족들과 치고 받고 싸웠지만, 패권을 잡은 동게르만계 동고트족에게 참패한 끝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도망쳤다. 이들은 훈족이 전성기에 동로마 제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역권 등을 요구했으나 동로마 제국은 이를 거부했다.

3.3.2. 469년, 뎅기지크의 죽음

뎅기지크는 469년, 끝내 동로마군과 충돌한 끝에 대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에르나크는 다뉴브 강변에 정착하여 동로마 제국이 제공한 작은 영토인 도브루자에서 조용히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이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남은 기록이 없다. 이렇게 허망하게 훈족의 대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3.4. 붕괴 이후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족은 소멸했지만, 복속된 유목 민족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제2대 황제인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당시 서방으로 파견된 동로마군의 일원으로서 명장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받기도 했다.

6세기 이후 훈족은 역사에서 발자취를 감추어, 이후 민족 정체성이 어느 시점에 소멸했고 누구에게 동화되었으며 다른 민족과 어떠한 혈연 관계를 가지는지 등이 불분명하다. 훈족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들이 과거 유럽에 큰 충격을 준 덕에 후대 기록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데, 예컨대 822년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 부족 중 하나로 언급된다. 후대에 등장하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훈(Huns)'이라는 개념은 실제 훈족과 연결고리가 있는지, 혹은 유럽인의 입장에서 단순히 동쪽에 있는 야만인(barvarians) 들을 가리켜 쓴 명칭인지 알기 어렵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훈족의 쇠퇴 이후 나뉘었다고 추정되는 반유목 민족인 불가르족의 한 갈래였던 우티구르족이 동로마 제국령에 이주했다. 그 불가리아인들을 혈연적으로 남아있는 훈족의 후예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도 불가리아인이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특히 문화적, 언어적 관련성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

헝가리의 주류 민족이며, 우랄어족에 속하는 마자르족 역시 '훈족의 후예'라는 이미지로 유명하나, 현대 역사학계에서 실제 헝가리와 훈족 사이의 연관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훈족의 주요 거점이 오늘날의 헝가리인 판노니아 일대였으며, 현대 헝가리 국내에서는 역사적 정통성 강조를 위해 마자르족과 훈족의 연관성을 일종의 심볼이자 캐치프레이즈로 삼는다.[17]

4. 훈족의 이미지와 서양 문화에의 영향

파일:Georges_Rochegrosse2.jpg
조르주 로슈그로스의 그림

훈족이 사라진 뒤에도 '훈족'이라는 단어는 유럽인들에게 시대를 불문하고 위협적인 이방인들을 가리킬 때 쓰이는, 일종의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독일 제국군을 훈족이라 불렀다. 구체적으로는, 대전 초기에 독일 제국군이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침공했는데, 예상외로 벨기에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피해가 커지고, 점령했던 벨기에의 도시인 루뱅에서 정체모를 우발적인 총격으로 독일 제국군이 피격받자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노동력에 대한 강제 징용을 종전때까지 시행하게 되었다. 이 참혹한 사건을 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연합군이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써먹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작 독일의 민족인 게르만족이 훈족에게 쫓겨서 유럽 대륙으로 왔다는 것을 연상하면 묘하다.[18] 1900년에 빌헬름 2세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로 원정을 가려던 군에게
"아틸라의 훈족처럼 악귀같이 싸워라"
라는 연설을 했던 것이 그 기원으로 보인다. 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소련군소련인들에 대하여 열등한 아시아인이라고 비하하였는데, 이때 주로 꺼내든 레퍼토리 중 하나가 바로 훈족이다. 사실 전쟁기계에 가까운 군사 강국을 과거의 악몽에 빗대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5. 알려진 훈족의 지도자

역대 훈 제국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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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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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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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나크
불명
발람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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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 매체에서

중세 독일의 대서사시인 《니벨룽의 노래》의 배경이 되는 부르군트 왕국[19]을 멸망시킨 유목민과 이들의 왕 에첼이 바로 훈족과 아틸라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부르군트족은 훈족의 등쌀에 엄청나게 시달렸다가 아틸라 사후 훈족이 몰락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었다. 이후 이들은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했으나 근대 시기가 될 때까지도 이들의 거점이었던 부르고뉴는 강력한 독립성을 유지한채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에게 지속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6.1. 영화

6.1.1.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아틸라와 그 일당이 주인공 래리 데일리를 열심히 쫓아다닌다. 아틸라의 담당 배우 패트릭 갤러거는 중국계 캐나다인이지만 중국인과 아일랜드인의 혼혈이기에 생김새가 몽골계같이 생겼다가도 튀르크계같이 생겼다. 말 그대로 동•서양을 짬뽕한 얼굴. #

6.1.2. <정복자 아틸라>(2001)

2001년, <정복자 아틸라>라는 제목의 영화[20]도 나왔다.

6.2. 소설

6.2.1. 《마지막 훈족》(2004)

2004년 훈족을 주인공으로 다룬 국내 소설인 《마지막 훈족》이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21] 그러나 출판사인 북토피아가 2010년에 파산해서 현재는 구매하여 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대신 작가의 홈페이지에 다시 올라왔었으나 다음 블로그가 서비스를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은 그것도 사라졌다.

6.3. 만화 및 애니메이션

6.3.1. <뮬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에 침략자로 등장하는 유목민이 훈족으로 나온다. 그러나 <목란사>의 배경인 북위 시대를 생각하면 유연이지만 중국사에 대해서 관심이 적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훈족으로 변경한 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훈족이 흉노의 일파라는 설도 어느 정도 차용했다. 여담으로 북위도 북방 유목민인 선비족 탁발부가 한화(漢化)되면서 세운 국가였다. 동아시아권에서는 당연히 흉노족으로 번역되었다.

6.4. 게임

6.4.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로마의 부흥>: 로마의 적들 캠페인에서 마지막 시나리오의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훈족 문명이 없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로 설정되어 나온다. 결정판에서는 야마토로 변경되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에이지 오브 킹>: 확장팩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서 비로소 독자적인 문명[22]으로 나오며 캠페인도 있다. 특이하게도 집을 짓지 않고도 시작부터 인구가 200[23]이어서 집짓는 데 나무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이는 food for thought가 패시브로 깔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 편리함 때문에 멀티에서 많은 유저들이 훈족을 고른다. 또한, 중기병 테크도 최종 형태인 팔라딘까지 나오고, 혈통 업글도 되어 기병 라인도 상당히 강력하다. 안 그래도 기병이 강한 게임 특성상 훈족은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문명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이후 확장팩에서 대대적인 너프가 진행되었으나 여전히 강하다. 물론 그런 장점을 얻은 만큼 집을 이용한 심시티나 바리케이드 쌓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24] 훈족은 공격적인 운용이 필수적이다.

6.4.2. <로마: 토탈 워>

확장팩 <로마: 토탈 워 - 바바리안 인베이젼>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정확하게 궁기병을 비롯해 기병류도 끝장나게 강하고, 보병류도 강한데다가 대부분이 금~은갈매기까지 달고 돌아다니는지라 매우 강력하지만 정주하는 순간 부대 다수가 해산된다! 거기다가 자체적으로 항구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정주하려면 최소 이탈리아반도나 동로마 제국 근교의 대도시 근처까지 내려가는게 이득인데 문제는 여기까지 내려가는 동안 온갖 크고 작은 전투로 소모되고, 공방전으로도 병력을 까먹는데다가 그만큼 발전도 늦어지니, 결국 겉으로만 '쉬움' 난이도이지 실제론 보통~어려움을 달아줘야할 정도로 힘들다. 차기작에 나오는 몽골이나 티무르를 적절하게 너프해 플레이 가능 세력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6.4.3. <문명 시리즈>

<문명 5>: 확장팩 <신과 왕>에서 등장한다. 지도자는 잘 알려진 아틸라이다. 유럽인들의 공포였던 것에 맞춰 극초반 정복전이 매우 강력하며 특히 훈족만 뽑을 수 있는 공성추는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 사기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단순 화력으로만 따지면 임진왜란 시절 대포에 맞먹는 전투력을 낼 정도이다. 또한 유목민족답게 시작하자마자 말이 보이며, 목장 시설에서 추가적인 이득을 볼 수 있고, 궁기병이라는 걸출한 유닛도 있어 야전에서도 뛰어나다. AI 훈족도 그에 걸맞게 매우 호전적으로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패왕이 되거나 멸망해서 군소국가가 되는 등 다소 극단적인 성향이다. 마지막으로 훈족은 도시 이름이 별도로 할당되어 있지 않아 남의 나라 도시명을 아무거나 가져오며, 수도는 아틸라 궁정이라는 작위적인 이름을 달고 있다. 이는 훈족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땅을 무력으로 점령했던 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훈족의 도시들에 대해 많이 알려진 것이 없어서 어거지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6.4.4. <토탈 워: 아틸라>

당연하게도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아틸라가 주인공이다. 훈족 유닛들을 보면 대체로 아시아계, 특히 몽골쪽 인상을 많이 닮았다. 그리고 메인 메뉴에서 나오는 음악도 몽골 유목민 특유의 창법이다. 다만 아틸라는 영어에는 서툴지만 트레일러를 보면 약간 유라시안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동양과 서양의 기록이 엇갈려서 그냥 적당히 섞어놓은 듯하다.

6.4.5. <도미네이션즈>

훈족 전사가 용병 중 하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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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 그림은 몽골인에 가깝게 묘사되었으나 하술하듯 훈족의 실제 인종 및 인종적 외견 특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과거 그들을 묘사한 기록을 종합할 때 외모적인 묘사는 몽골로이드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지만 Otto Mänchen-Helfen은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 일부 몽골로이드가 섞인 인종의 혼합체라고 주장했다. 한편 Eric Crubézy는 훈족의 몽골로이드설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The huns, rome and the birth of europe》을 펴낸 김현진은 훈족이 유럽에서 점진적으로 코카소이드화되었다고 주장했다. 하플로그룹에 의한 연구로도 단서를 얻었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설은 없다.[2] 《Empires and Barbarians. The Fall of Rome and the Birth of Europe》 Peter Heather.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참조.[3] 텡그리 신앙을 믿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히 그것을 입증 할만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 보고있다.[4] 《漸備一切智德經》(Tathāgataguhya-sūtra)[5] 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로 적혀 있다.[6] 《普曜經》(Lalitavistara)[7] 산스크리트어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8] 어족의 일치는 곧 같은 계통의 민족임을 뜻한다.[9] 고대 실크로드를 지배하고 장사하던 이란계 민족[10] 남흉노의 족장 유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11] 스키타이는 이란계 백인 유목민이므로 이로써 아틸라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어째서 동양인스러운 묘사와 서양인스러운 묘사가 혼재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밝혀진 셈이었다.[12] 애초에 마자르족우랄어족 계통 민족으로, 튀르크계임이 유력시되는 훈족과는 기원이 다르다.[13] 조국정복시기 유전자 조사결과 마자르족은 훈족과 오랜기간 교류를 했던것으로 밝혀졌다.[14] 의문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아틸라가 살해했다는 게 정설이다.[15] 이 황녀가 딱히 정치적인 수를 쓴 것이 아니라, 스캔들 때문에 유폐되자 그냥 막 질러본 미친 짓에 가깝다는 것이 중론이다.[16] 일설 중에는 교황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의 응원을 받아 아틸라를 꾸짖었고, 아틸라가 이에 반성을 하며 물러갔다.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걸 묘사한 미술 작품도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동로마와 같이 막대한 재물을 헌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 현대의 튀르키예가 직접적인 조상도 아닌 흉노족의 역사에 관심이 크고, 자신들의 먼 뿌리 중 하나인 돌궐(쾩튀르크)과 흉노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18] 다만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에는 이미 훈족이 오기 전부터 게르만족이 살고 있었으며, 프랑크족 중에서도 살리 프랑크족, 리푸아리족이나 다른 서게르만의 일파인 작센족처럼 훈족과 접점이 많지 않았던 게르만족들도 있었고, 알레만니족처럼 훈족을 이긴 게르만 부족도 있긴 했다. 무엇보다도 바이킹으로 유명한 북게르만족들과는 접점이 아예 없다.[19] 5세기 초에 세워진 부르군트 왕국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20] <300>으로 알려진 제라드 버틀러가 아틸라로 나왔다.[21] 원래는 디펜스코리아에 2001년부터 무료로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2004년에 전자책으로 출간되었으며 2005년에 종이책으로 출간하려고 여러 출판사들과 알아보다가 결국엔 실패했다고 알려졌다. 디펜스코리아도 2016년에 완전히 폐쇄되었다.[22] 건물의 모양은 튜턴족과 같고, 유닛의 음성은 몽골족의 음성과 똑같다.[23] 시나리오 편집기나 대기방에서의 인구 최대치 설정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보다 적거나 많아질 수 있다.[24] 건설 메뉴에 집이 아예 없다. 이 점 때문에 심시티를 중시하는 상위권 실력자들은 초보, 중급자와 달리 훈족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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