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7 11:20:12

훈족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866e81aac694ce606cba21b55bd3a27.jpg
훈족을 표현한 이 그림은 몽골로이드에 가깝게 묘사되었으나 훈족의 실제 인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Huns_empire.png
가장 많이 알려진 훈족의 최고 강성기 시절 활동 범위.

1. 개요2. 훈족은 누구인가
2.1. 흉노-훈족 동계론
2.1.1. 옹호론2.1.2. 비판론2.1.3. 정리
2.1.3.1. 정체성 계승?
2.2. 아틸라 이전
2.2.1. 4세기 중반, 게르만족 격파
2.3. 아틸라, 신의 채찍
2.3.1. 440~442, 동로마 침공2.3.2. 447, 동로마 2차 침공2.3.3. 451~, 서로마 침공
2.4. 붕괴
2.4.1. 469, 뎅기지크의 죽음
2.5. 이후
3. 니들 훈족이지?
3.1. 독일 제국군
4. 알려진 훈족의 지도자5.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훈족6. 관련 항목

1. 개요

Huns

고대 로마의 쇠퇴기 당시 몰락에 직,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정체불명의 유목민들.

기원후 370년(흑해 정착)~453년(아틸라 사후 멸망)

2. 훈족은 누구인가



현재 훈족의 확실한 정체를 알기는 매우 힘들다. 우선 훈족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로마인들 및 게르만인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이동하면서 임시거처를 설치하고 철거하길 반복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훈족들이 세운 유적이라든지 문화적 흔적도 후대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알려진 훈족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게르만어인데, 이것은 훈족이 빠르게 게르만식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으로 아틸라의 궁정에서도 고트어가 통용되었다.

훈족이 게르만 지도층으로 편입되었고, 이들을 부르는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들 훈족이 게르만식으로 표현된 이름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훈족의 왕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아틸라는 게르만식 이름이 아니며 이는 훈족 지도층들은 그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라서 언어를 통해서 훈족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도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2.1. 흉노-훈족 동계론

훈족의 계통에 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주장은 흉노와의 관계다. 이 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훈족과 흉노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둘 모두 유라시아 북부에서 활동한 기마문화권이라는 피상적인 이유에서 제기되었던 이론인데,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소수설이 아니고 정황상의 근거들도 많은 상태.

2.1.1. 옹호론

다음은 흉노가 어떤 형태로든(혈통적 연관이든, 문화적 동질감이든, 정치적 계승이든) 훈과 관련이 있다는 설의[2] 근거들이다.
  • 최소한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선,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ʿ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Tathāgataguhya-sūtra)』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며,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라 적혀있다), 308년 번역한 『보요경普曜經(Lalitavistara)』에서도 똑같이 옮겼다(산스크리트어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Étienne de la Vaissière, “Xiongnu,”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6, available at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xiongnu (accessed on November 15, 2006).
  • 흉노는 튀르크계 언어를 썼으며, 훈족 또한 튀르크계 언어를 썼다. (튀르크어와 몽골어에 비슷한 단어가 있는 것은 언어동조대일 가능성이 높다) (어족의 일치는 곧 같은 계통의 민족임을 뜻한다). 유럽 사서에 남아있는 훈의 왕족의 이름은 튀르크 계통의 언어(아틸라 등), 아랍 지역에 남아있는 훈족 추장의 이름도 튀르크 계통의 언어(카프간 등)이다.
  • 흉노와 훈은 중국과 유럽의 기록에서 동일한 민족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 표시된 훈족의 거주 지역과 중국의 위서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언급하는 흉노의 출현 지역이 상당부분 일치한다. 소그드인(고대 실크로드를 지배하고 장사하던 이란계 민족)이 북위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는 "영가의 난(흉노족장 유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훈족이 낙양을 함락하고 소그드족 상인들을 붙잡았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제작된 성(聖)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라틴어 지도에는 ‘후니스키타이’(Huniscite)란 이름이 ‘세레소피둠’(Seresoppidum, Sera Metropolis), 즉 중국의 부근에 기재되었는데, 이 지도는 기원전 7년 8월에 제작된 로마 지도와 아크리프의 세계지도(Orbis Pictus)를 인용 · 참고한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에 유럽인들이 이미 동아시아의 흉노를 훈으로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아래의 반론에서 말하듯, 유목집단이 활동무대가 겹치는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름을 쓰는 두 집단이 똑같은 활동 무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관련성을 결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 흉노와 훈족이 남긴 동복(=구리 솥)의 유물 분포를 보면 시대적으로 동유럽 중동 우크라이나 (이때는 흉노가 아닌 스키타이족)->중앙아시아-> 내몽고 -> 화북 ->서유럽의 순서로 이어진다.하지만 여기엔 이견이 많다.
    구리 솥 양식의 일치는 곧 흉노와 훈족이 같은 양식으로 음식을 지어먹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되며, 시대적으로도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훈족이 흉노의 유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 흉노족과 스키타이의 혼혈이 훈족이라는 DNA 연구 결과가 나와 혈연적인 관계성이 입증되었다. #
  • 흉노의 지도자는 선우. 선우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흉노 선우가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듯이, 아틸라도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중). 하늘의 아들이라 칭하는 문화는 몽골 계열 유목 민족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흉노와 훈의 연관성을 알려준다.

2.1.2. 비판론

  • 어족이 일치하고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한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실제 역사에선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민족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같은 어족이라는 증거가 별로 없다.
  • 훈족의 거주지역과 흉노의 거주지역이 일치한다고 해서 둘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선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에서 활동했던 유목민족이 한둘도 아니고, 활동지역이 일치한다고 같은 민족이면 역사에 존재했던 오만가지 유목민족 대부분이 다 같은 민족이란 소리다. 당장 중앙아시아 또는 몽골 고원 주위에서 발흥한 수많은 유목민족들도 다 따로 분류하는 판국에...
  • 훈족과 흉노랑만 유물과 풍습이 비슷한 게 아니다. 몽골고원에서 우크라이나 평원까지 활동했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정말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중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던 유목민들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훈과 흉노의 민족적 공통점을 말해주는 게 아니다.
  • 북흉노가 중국 사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93년)와, 훈족이 로마 제국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370년) 사이의 차가 너무 크다. 유라시아 대초원이 광활하긴 하지만 횡단에 있어서 그것도 유목민이 300년이 걸리진 않는다.
  • 유럽에 나타난 훈족은 흉노족과 문화적 차이가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하나의 선우(=왕)가 있었던 흉노와는 달리 훈족에는 서열이 나뉘는 왕이 여럿 존재했고, 머리를 묶었던 흉노와 달리 훈족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하지만 왕에 관한 건 다소 맞지 않다. 훈족이 왕에 서열을 두고 있었듯이 흉노도 선우 밑에 좌도기왕과 우도기왕을 두는 등의 서열이 나뉘는 왕이 분명 존재했다.

2.1.3. 정리

정리를 하자면 흉노와 훈의 관계에 관한 정황적 근거들은 꽤 많이 쌓여있는 상태이지만, 결정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일치성이 존재하는 요소들이 상당수 있으나, 대부분 포괄적인 범주 내에서 일치한다. 즉 아직까지는 '유력한 가설' 정도의 영역이라,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정수일 편저 「실크로드 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렇게 종합해볼 때 동족론이 좀 더 설득력이 있고, 비동족론은 자체의 논리적 모순과 미흡으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족론이 절대적 논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고 비동족론도 전혀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문헌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적 조사를 심화시켜 과학적 고증이 확실할 때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확답을 얻게 될 것이다.
2.1.3.1. 정체성 계승?
한국사를 예를 들면 옛 고려(고구려)가 멸망하고 몇 백년 뒤 신 고려가 등장했다. 시대가 지나 두 고려의 문화적 차이가 상당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가진 옛 고려의 계승의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흉노의 한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주변의 다른 유목민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혈통의 차이가 생겼고, 문화적 양식 또한 바뀌었지만 그들 자신의 뿌리를 흉노로 여겼기에 자신을 훈족으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2.2. 아틸라 이전

2.2.1. 4세기 중반, 게르만족 격파

4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킨 것이 훈족의 첫 등장이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은 국경 저 멀리에서 야만족들끼리 치고 받는다는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는데,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친 고트족도나우 강 국경에 나타나며 로마에서도 난리가 난다. 고트족과 로마 사이의 사건에 대해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항목 참조.

4세기에만 해도 훈족이 로마에 미친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 4세기 말까지도 훈족의 주력 집단은 카프카스 이북 지역에 남아 있었고, 이들의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리던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에 침투하는 것이 로마 입장에서는 더 큰 문제였다.

스틸리코의 부상과 실각, 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지배권 붕괴->재확립->붕괴, 아프리카의 상실 같은 스펙타클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훈족이 로마 세계에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훈족은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고 게르만족이나 로마 반역자를 상대로 로마와 합동 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었다. 예외적인 사례로 408년에는 그간 로마의 동맹으로 행동해오던 훈족 왕 울딘이 동맹을 깨고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온 일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동로마의 비장의 수단으로 자주 활약하는 매수 전략에 울딘의 부하 상당수가 그를 배신하여 제압되었다. 서로마 말기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훈족과의 친분을 십분 이용해 결정적인 순간에 훈족의 지원군을 활용하곤 하였다.

2.3. 아틸라, 신의 채찍

2.3.1. 440~442, 동로마 침공

훈족과 로마 사이의 의외로 원만하던 관계는 아틸라의 시대에 끝장났다. 당시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 로마 국경 바로 건너편까지 진출해 있었다.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을 통치했던 아틸라는 즉위 초기에는 근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으나, 게르만족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자 그 기회를 활용, 440년 말 동로마를 침공했다. 동로마 역시 훈족의 준동을 틀어막기 위해 연공을 두 배로 올리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였으나,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얼마 안 있어 사소한 트집을 잡아 협정을 깨버린다.

이 당시 동로마가 아프리카 수복 작전을 위해 서로마에 보낸 병력은 상당 부분 발칸 반도 야전군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동로마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동로마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었지만, 서로마는 부유한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에게서 탈환할 절호의 기회에 동로마의 지원군이 철군해버렸기에 더욱 뼈아픈 일이었다.

아틸라는 442년까지 발칸 반도 북부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여럿 함락했다. 이전 세기 말에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패배를 당한 뒤에도, 요새화된 거점들은 고트족이 공성전을 할 능력이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고트족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동로마 정부는 442년에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조약은 연공으로 황금 1,400 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처음에 씹어버린 연공 조건이 700 파운드였으며, 이것이 그전 해의 350 파운드를 두 배로 늘린 조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3년 만에 연공이 네 배로 늘어난 것이다. 또한 로마는 훈족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하여 로마로 망명해있던 훈족의 망명자들을 다시 훈족에 인도하기도 했다.

2.3.2. 447, 동로마 2차 침공

물론 로마가 아틸라에게 계속 굽히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동로마는 시칠리아까지 진출해 있던 아프리카 원정군이 복귀한 직후인 443년 즈음부터 훈족에 대한 연공 지급을 중단해버린다. 때마침 444년 혹은 445년에 형이자 공동지배자인 블레다가 사망하고[3] 아틸라가 단독 통치자 자리에 오르자 훈족 내부의 정치 상황이 어수선해졌고, 이 시기에 동로마는 반격을 준비했다.

447년 동로마와 아틸라의 훈족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아틸라는 이 전쟁에서 압승을 거뒀고, 그리스 남부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이 시기에 로마령 발칸 반도가 입은 타격은 참혹한 수준으로, 유적 발굴 사례를 보면 고트 전쟁에서 회복했던 도시가 아틸라 전쟁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동로마는 이전까지 지급을 거부한 연공을 포함해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동로마는 449년에 아틸라의 측근을 매수해 아틸라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돈을 먹은 아틸라의 측근이 곧바로 아틸라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며 계획이 들통났다. 아틸라는 영악하게도 로마가 암살자들에게 지급하려고 보낸 금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내며, 황제 접견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째서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라고 조롱했다.

2.3.3. 451~, 서로마 침공

동로마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로 돌린다. 아틸라는 서로마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얻기위해 서로마를 침공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보낸 청혼(이 여자가 딱히 정치적인 수를 쓴 게 아니라, 스캔들 때문에 유폐되자 그냥 막 질러본 미친 짓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과 둘째, 게르만족을 상대로 훈족의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4]

당시 도나우 유역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귀족에서 대량의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삥 뜯거나 약탈해온 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상당히 불균등하게나마) 재분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아틸라는 몇 년간 동로마를 털어먹으면서 발칸을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을 하기에도 마땅찮았고, 더 궁지에 몰린 동로마가 사생결단으로 나올 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가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440, 447)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의 주력군은 언제나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동로마 측도, 아틸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털어먹을 수 있는 게르만족은 거의 다 털어먹고 예속시켰으며, 아틸라 역시 즉위 초기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을 공격한 바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인용하자면, 아틸라의 훈족은 '패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전쟁기계'였다.

하지만 갈리아를 침공한 훈족은 카탈라우눔 전투(451)에서 서로마군에게 저지 당하고, 이듬해 개시한 이탈리아 침공은 야전에서는 패배하지 않았으나 보급난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교황의 중재[5]를 받아들여 철수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의 첫날 밤에 의문사하는데, 사망 원인은 암살, 복상사, 과음 등 참으로 다양한 설들이 제시된다.

2.4. 붕괴

비록 두 번의 서로마 원정에서 실패했다곤 해도, 아틸라는 뛰어난 장악력과 군사적 능력을 갖춘, 불안한 구조의 훈족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후 세 아들 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타 게피다이족이 훈족에게 반기를 들자 엘라크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전사했다.

처절한 전투 끝에 게피다이족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며 훈족의 게르만 지배는 무너져갔다.

훈족 지배하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한 정도에 따라 독자세력화에 걸린 시간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킨 게피다이족은 세력을 결집한 데 걸린 시간으로 보아 훈족 통치하에서도 나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오도아케르의 출신 부족으로 유명한 스키리족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내세운 왕이 스키리족 혈통조차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아틸라 사후의 혼란기에 내부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헝가리 지역의 상황은 훈족 잔당과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한 게르만족 + 독립한 여러 게르만족이 투쟁을 벌이고, 독립을 얻은, 혹은 시도하는 게르만족 내에서도 대대적인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난세 그 자체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자세하게 남지 않아 완벽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아틸라의 살아남은 두 아들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이끄는 훈족 잔당은 한동안 여전히 일정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떨어져나간 게르만족들과 치고받고 싸웠지만, 패권을 잡은 동고트족에게 참패한 끝에 동로마 영토로 도망쳤다. 이들은 훈족이 전성기에 동로마와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역권 등을 요구했으나 동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2.4.1. 469, 뎅기지크의 죽음

뎅기지크는 469년에 끝내 동로마군과 충돌한 끝에 대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에르나크는 다뉴브 강변에 정착하여 로마가 제공한 작은 영토에서 조용히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이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남은 기록이 없다. 이렇게 허망하게 훈족 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2.5. 이후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족은 소멸했지만, 그 밑 복속된 유목 민족들이 완전히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서방으로 파견된 동로마군의 일원으로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확실친 않지만 훈족 멸망 후에 나뉘었다고 추정되는 반 유목민 불가르족 중 하나인 우티구르족이 동로마 영토에 이주하여 그 불가리아인들을 혈연적으로 남아있는 훈족의 후예라고 볼 수도 있다만 직계라고 보긴 힘들며 문화적 언어적 관련성도 그다지 나타나질 않는다.

3. 니들 훈족이지?

3.1. 독일 제국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독일 제국군을 훈족이라 불렀다.

구체적으로는, 대전 초기에 독일 제국군이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의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침공했는데 예상 외로 벨기에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피해가 컸고 점령했던 벨기에의 도시 루뱅에서 정체모를 우발적인 총격으로 독일 제국군 소부대가 전멸하자 벨기에의 민간인들이 게릴라 전투을 펼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노동력에 대한 강제 징용을 종전까지 시행했고, 이 사건을 들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써먹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영국은 본래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독일이 벨기에를 침략하고 전범 행위를 저지른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망설임 없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독일이 벨기에 침공을 개시한 게 8월 3일이고 그 다음 날인 8월 4일에 영국도 바로 참전했기 때문에 아직 국경 요새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독일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도 없고, 영국이 그 소식을 들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물론 영국 의회가 참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가 독일의 벨기에 침공 때문에 참전한 건 맞지만, 벨기에에 독립보장을 해놓은 이상 참전하지 않으면 자국의 외교적 위신이 추락하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전범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연합군에 유리한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여, 몇 년 후 미국이 대전에 참전하면서 역시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여 훈족을 쳐부수자!의 포스터로 수많은 청년층의 자원입대를 유도한다.
정작 독일의 민족인 게르만족이 훈족에게 쫓겨서 유럽으로 왔다는 것을 연상하면 묘하다.[6] 1900년에 빌헬름 2세가 의화단의 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원정 나가려던 병사들에게 '아틸라의 훈족처럼 악귀같이 싸워라'라는 연설을 했던 것이 기원으로 보인다. 헬싱에서 월터 쿰 도르네즈가 나치 잔당들을 훈족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 영토까지 반격해온 소련군을 보고 훈족의 재림이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냥 무서우면 훈족 유럽의 암묵의 룰

4. 알려진 훈족의 지도자

5.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훈족

디즈니의 에니메이션 뮬란에 침략자로 등장하는 유목민이 훈족으로 나온다. 그러나 목란사의 배경인 북위시기를 생각하면 유연이지만 중국사에 대해서 관심이 적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훈족으로 변경한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훈족이 흉노의 일파라는 설도 어느정도 차용했다. 여담으로 북위도 북방유목민인 선비족이 한화(漢化)되면서 세운 국가다. 동아시아권에서는 당연히 흉노족으로 번역되었다.

PC용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 로마의 부흥에서는 로마의 적들 캠페인에서 마지막 시나리오의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훈족 문명이 없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로 설정되어 나온다. 결정판에서는 야마토로 변경되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의 확장팩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정복자에서 비로소 독자적인 문명으로 나오며 캠페인도 있다. 특이하게도 집을 짓지 않고도 시작부터 인구가 200[7]이어서 집짓는 데 나무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이는 food for thought가 패시브로 깔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 편리함 때문에 멀티에서 많은 유저들이 훈족을 고른다. 또한, 중기병 테크도 최종형태인 팔라딘까지 나오고, 혈통 업글도 되어 기병 라인도 상당히 강력하다. 안 그래도 기병이 강한 게임 특성상 훈족은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문명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이후 확장팩에서 대대적인 너프가 진행되었으나 여전히 강하다.

로마: 토탈 워 확장팩 로마: 토탈 워 - 바바리안 인베이젼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는 아틸라와 그 일당들이 주인공을 열심히 쫓아다닌다. 담당배우인 패트릭 갤러거는 중국계 캐나다인이지만 중국인과 아일랜드인의 혼혈이기에 생김새가 몽골계같이 생겼다가도 투르크계같이 생겼다. 말 그대로 동서양을 짬뽕한 얼굴. #

2001년, '정복자 아틸라'라는 제목의 영화(300으로 알려진 제라드 버틀러가 아틸라로 나왔다)도 나왔다.

문명 5에도 등장한다. 확장팩 '신과 왕'에서 훈족 문명이 추가되었으며 지도자는 잘 알려진 아틸라. 유럽인들의 공포였던것에 맞춰 극초반 정복전이 매우 강력하며 특히 훈족만 뽑을 수 있는 공성추는 도시를 함락시키는데 사기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단순 화력으로만 따지면 임진왜란 시절 대포에 맞먹는 전투력을 낼 정도. 또한 유목민족답게 시작하자마자 말이 보이며 목장 시설에서 추가적인 이득을 볼 수 있고 궁기병이라는 걸출한 유닛도 있어 야전에서도 뛰어나다. AI 훈족도 그에 걸맞게 매우 호전적으로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패왕이 되거나 망해서 군소국가가 되는 등 다소 극단적인 성향이다. 마지막으로 훈족은 도시 이름이 별도로 할당되어있지 않아 남의 나라 도시명을 아무거나 가져오며 수도는 아틸라 궁정이라는 작위적인 이름을 달고 있다. 이는 훈족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땅으로 무력으로 점령했던 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훈족의 도시들에 대해 많이 알려진 것이 없어서 어거지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토탈 워: 아틸라에서 당연하게도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아틸라가 주인공. 훈족 유닛들을 보면 대체로 아시아계, 특히 몽골쪽 인상을 많이 닮았다. 그리고 메인메뉴에서 나오는 음악도 몽골 유목민 특유의 Throat Singing이다. 다만 아틸라는 영어에는 서툴지만 트레일러를 보면 약간 서양인과 동양인을 합쳐놓은 모습이다. 아무래도 동양과 서양의 기록이 엇갈려서 그냥 적당히 섞어놓은 듯하다.

6. 관련 항목



[1] 과거 그들을 묘사한 기록을 종합할때 외모적인 묘사는 몽골로이드에 가까운것으로 추측되었다. 하지만 Otto Mänchen-Helfen는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 일부 몽골로이드가 섞인 인종의 혼합체라고 주장한다. Eric Crubézy는 훈족이 몽골로이드라고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The huns, rome and the birth of europe을 낸 김현진은 훈족이 유럽에서 점진적으로 코카소이드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플로 그룹에 의한 연구로도 단서를 얻었지만# 아직까지는 논란이 많다.[2] '동족론'이라고도 불리는데, '동족'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하자면 지지자들도 흉노와 훈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데 일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동 과정에서 혈연적 문화적 이질성이 나타났다는 데는 동족론 지지자들도 큰 이견이 없다.[3] 의문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아틸라가 살해한 거 아니냐는 게 정설이다.[4] 아틸라 사후 훈족이 겪은 붕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훈족 사회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복속된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힘에 의해 굴복하고 있을 뿐이지, 이들이 훈족에게 동화되거나 정교한 행정력하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훈족과 게르만족들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로 불안한 공존을 하는 상태였다.[5] 일설 중에는 교황이 아틸라를 예수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응원을 받아 꾸짖었고 아틸라가 이에 반성을 하며 물러갔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걸 묘사한 미술작품도 있다.[6]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에는 이미 훈족이 오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 뭐, 일단 영국의 앵글로색슨족도 게르만족의 일파고 벨기에에도 게르만 계통이 많기는 하지만.[7] 시나리오 편집기나 대기방에서의 인구 최대치 설정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보다 적거나 많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