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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인도이란어파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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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 ||
언어 | 인도이란어파 | |
사상 | 범이란주의 | 범아리아주의 | | |
신화 | 페르시아 신화 | 인도 신화 | 오세트 신화 | }}}}}}}}} |
스키타이 Σκυθαι 𐎿𐎣𐎠[1] | ||
오늘날 고고학 발견과 연대측정 등을 통해서 비정된 스키타이(갈색)와 사카(주황색)의 영향권.[2] | ||
존속기간 | 기원전 9~8세기(?) - 기원전 3세기 | |
위치 |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폰토스-카스피 스텝 | |
수도 | 카미안카 | |
민족 | 스키타이인 | |
언어 | ||
종교 | ||
성립 이전 | ||
멸망 이후 |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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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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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Scythians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현대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서북부 일대 스텝 지역에서 존속했던 이란계 유목민족.
스키타이족이 쓰던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군에 속했다. 오세트어가 이 언어의 후손 중 하나다.
한국고고학사전의 스키타이 설명
2. 명칭과 분화
페르시아어 '사카(𐎿𐎣𐎠)'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인들을 부르는 용어였고, 중국어 '사이(중국어: 塞; 상고한어: *sˤək)'는 한 때 일리강과 추강의 계곡에 거주했다가 타림 분지로 이주한 사카인들에게 사용하는 용어였다.[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이 스스로를 스콜로트, 혹은 소클로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세메레니 오스벌드는 스키타이인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을 연구했고 다음의 결과를 제시했다: Skuthes Σκύθης, Skudra, Sug(u)da, Saka.[7]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다양한 명칭들에는 2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1) "나아가다", "쏘다"[8]를 뜻하는 인도유럽어 어근 *(s)kewd-에서 유래했다. *skud-는 동일 어근의 제로 그래이드[9] 형태이다. 세메레니는 스키타이인들이 스스로를 '스쿠다(*skuda)'[10]라고 불렀다고 추정했다.[11]
2) 고대 페르시아어 𐎿𐎣𐎠,[12] 그리스어 Σάκαι; 라틴어 Sacae, 산스크리트어 शक 와 같은 형태들은 "이동하다", "돌아다니다"를 뜻하는 이란어 동사 어근 sak-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유목민"을 뜻한다.
- [ 언어별 명칭 보기 ]
- 아카드어[13]
- 아스쿠자이(𒇽𒊍𒆪𒍝𒀀𒀀, Askuzāya)
- 아슈구자이(𒇽𒀾𒄖𒍝𒀀𒀀, Ašguzāya)
- 아스구자이(𒇽𒊍𒄖𒍝𒀀𒀀, Asguzāya)
- 이스쿠자이(𒇽𒅖𒆪𒍝𒀀𒀀, Iškuzāya)
- 사카(𐎿𐎣𐎠, Sakā)
- 스쿠드라(𐎿𐎤𐎢𐎭𐎼, Skudra)
- 수그으다(𐎿𐎢𐎦𐎢𐎭, Sugᵘda)
- 스쿠다(Skuẟa)
- 이스키굴루(𒆳𒅖𒆥𒄖𒇻, Išqigulu)
- 사카에(Sacae)
- 사카(शक, Śaka)
- 사이(塞, sˤək)
- 스키우트(սկիւթ, Skiwtʰ)
고대 작가들은 다뉴브강과 돈강 사이의 스텝지역, 그러니까 흑해 북안에 살았던 유목민들을 한데 묶어 '스키타이'라고 불렀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의 지리학자들은 '철기 시대에 유라시아 대초원 지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기마 유목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스키타이를 사용했으며, 이들의 특징을 독특한 무기와 마구, 그리고 동물들을 표현한 예술품 등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키타이는 점차 카스피해의 북쪽에 거주한 사르마티아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이전의 유목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의미가 축소되기 시작한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스키타이'라는 용어를 두고 이전의 정의들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개체군들을 한데 모아서 철기 시대의 유라시아 대초원 지대에 있었던 다양한 기마 유목문화들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하여 기원전 7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흑해 북안에 거주했던 유목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정형화되었다. 현대 인류학자들은 대신 '스키토-시베리아인(Scytho-Siberian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유라시아 대초원과 중앙유럽에서 북중국의 한계선까지 이어지는 삼림~초원 지대에 거주했던 유목민들의 공통된 문화적 집단으로서 간주하기도 한다.[17]
3. 역사
당시 아무도 살지 않았던 스키타이의 땅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타르기타오스라는 남자였다. 그의 양친은 제우스와 보류스테네스강의 딸이라고 한다. 타르키타오스에서 리포크사이스, 아르포크사이스, 크라크사이스 3명이 태어났다. 이 세명이 있던 시대에 하늘에서부터 황금의 그릇붙이가 스키티아의 땅에 떨어져 왔다. 장남이 제일 먼저 이것을 찾아냈고 이것을 얻을려고 하니까 황금이 불타올랐다. 장남이 멀리 떨어지고 둘째 아들이 가까이가니 다시 황금은 불타올랐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가 가까이 가니 불은 꺼지고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장남과 둘째 아들은 셋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를 왕으로 추천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장남의 리포크사이스를 시조로 하는 아우카타이씨, 둘째 아들을 시조로하는 카티아로이씨와 트라스피에스씨, 셋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를 시조로 하는 왕족 파라라타이씨의 4씨족이 생겨났고 그들 모두의 이름과 왕의 이름은 스콜로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크라크사이스는 광대한 스키티아의 국토를 3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중에 하나의 나라를 가장 크게 하여 그 나라에 황금의 그릇붙이를 보관하였다. 헤로도토스, 저서《역사》에서 |
스키타이의 출현은 기원전 1천년부터 기원후 1천년까지 계속된, 중앙아시아의 인도이란계 유목민들이 동남유럽과 중앙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이주물결의 일부였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그 가운데서는 킴메르나 사르마티아 같이 다른 유목민족들도 있었다.
3.1. 선스키타이 시대(스키타이 등장 이전)
3.1.1. 유목민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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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인 도시인 우르에서 발견된 장식 중 일부. 기원전 2,500년경의 것으로, 말이 끄는 전차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
이처럼 일찍부터 말이 순화되고 재갈이 발명되었으며 이륜마차의 등장으로 기동성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는 등 유목민의 출현을 위한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졌지만, 정작 본격적인 유목민은 기원전 1,000년 전후가 되서야 출현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떠한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2가지의 가설이 존재한다.
1) 기후변화설: 기원전 1,000년기 초에 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의 환경은 이전보다 더 시원하고 건조해지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이 변화로 인해 농경과 목축을 병행하여 살아가던 변경지대의 주민들이 농경을 포기하고 광역적인 이동목축에 전념하기 위해 초원 깊숙히 들어갔다는 주장이다.[19] 이들은 대체로 초지와 삼림 지대가 많이 분포해 있던 서부 유라시아의 카프카스 북부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정치환경설: 인구의 증가로 변경지대의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강력한 국가들의 출현으로 농목 복합경제의 포기와 유목민으로의 전환이 강요되는 상황이 일어났다는 가설이다. 또한 이 가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고도화되면서 다양한 물자와 자원의 유통이 필요해진 정주문명 때문에 원시 목축민들이 초원으로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도 설명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가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목민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3.1.2. 선스키타이인들의 이주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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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의 기원지로 추측되는 알타이-사이얀 지역의 모습. 이 지역에는 안드로노보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 카라수크 문화 등 고대 청동기 문화권들이 있었다. |
기원전 9~8세기가 되면 유라시아 초원의 대부분, 특히 알타이-사이얀 지역과 흑해 북안에서 기마 관련 자료들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다. 재갈·재갈멈치와 같은 마구, 활(복합궁)과 화살촉, 아키나케스 검,[20], 청동 가마솥, 사슴돌, 동물문양 장식물 등의 유목적 문화요소들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출현한 스키타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다고 하여 '선스키타이 문화'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스키타이와의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있다고 하여 '스키타이식 문화'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문화의 광범위한 분포는 역사성 처음으로 출현한 유목민들이 이동목축과 기마술 덕분에 흭득한 기동성에 힘입어 신속한 문화적 접촉과 전파를 이룩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스키타이와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의 유목민들이 서로 공통적인 기원, 문화, 언어를 공유하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민족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일수도 있다.[21]
3.2. 고스키타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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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시베리아의 아르잔 쿠르간에서 발견된, 고양잇과 동물을 묘사한 듯한 금속제 링 장식품. 기원전 8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3.2.1. 스키타이의 첫번째 이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는 본래 아락세스 강의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맛사게태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것과 고고학적 증거물들을 연관시켜 추정해본다면 대략 3개의 결론이 나온다.1) 스키타이의 조상들이 기원전 10~9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에서 수십년에 걸쳐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민족들과 접촉하고 동화되면서 '스키타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2) 기원전 9세기 초, 스키타이는 마사게타이족에 의해 중앙아시아에서 완전히 쫒겨났고, 볼가 강(=아락세스 강)을 건너 카스피해와 시스코카시아[23]로 이주하였다. 이때 유라시아 대초원에 있었던 다른 유목민족들은 스키타이에 밀려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다.[24][25][26]
3) 스키타이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가 되자 완전히 시스코카시아와 흑해 북안으로 이주하였고, 그 지역에 먼저 이주하여 살고있었던 또다른 유목민족인 킴메르인과 충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27][28] 카스피해의 초원지대에 남아있었던 잔존 킴메르인들은 유전적으로도 비슷하고[29] 생활 방식도 유사했던 스키타이에게 금세 동화되었다.
곧 스키타이는 흑해와 카스피해 이북의 초원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후에는 시스코카시아 스텝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아락세스강, 남쪽으로는 코카서스 산맥, 서쪽으로는 마에오티아 해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즉 남동유럽 부분을 차지하게 된것이다. 기원전 750년경에서 600년 사이에 그 지역에 있던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는 완전히 스키타이 문화에 동화되어 사라졌다.그렇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일부 측면들, 예를 들어 장례 의식이나 도자기, 마구, 무기 유형 등은 스키타이인들이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음을 보여준다.[30]
3.2.2. 시스코카시아의 스키타이 왕국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스키타이는 (상술했듯이) 흑해와 카스피해 북안의 초원지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흑해로 이주한 뒤의 스키타이의 중심지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 추정해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중심지는 대체로 시스코카시아의 스텝이었고 특히 쿠반강 일대의 계곡지대[31]에 밀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의 초기 역사가 시작되었고, 유목국가와 유목민 문화가 발전하였으므로, 기원전 600년경까지 시스코카시아는 스키타이의 주요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32]기원전 7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러 스키타이식 무덤, 예를 들어 스타브로폴, 켈러메스카야, 울스키 아울, 코스트롬스카야 스타니차, 크라스노예 즈나미야 등은 초기 스키타이인들 사이에 사회적 계층구조가 존재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이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매장지들은 일반 매장지와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농경민족인 마에오티아인을 포함하여 그 지역에 원래 살고있었던 여러 민족들은 이주해온 스키타이에게 대부분 정복당했다. 지배층인 스키타이와 피지배층인 토착 원주민들 사이에는 상당한 사회적 격차가 있었는데, 스키타이는 호화로운 물품들과 함께 거대한 쿠르간에 묻혔던 반면, 마에오티아인을 위시한 원주민들은 대충 만든 평평한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스키타이가 원주민들을 무조건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스키타이는 그들과 상호 의존적인 체계를 형성하였다.[33] 스키타이와 원주민들 간의 이러한 관계는 기원전 8~7세기 사이에 더욱 발전하여 그들의 문화가 혼재·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토착민들은 스키타이에게 동화되어 스키타이 왕국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고, 이 기간 동안 스키타이와 코카서스 지역의 원주민들 사이에도 중요한 교류가 이루어졌다.[34][35]
3.2.3. 서아시아 진출과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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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의 서아시아 이주 |
당시는 아시리아, 메디아, 엘람,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때 갑작스럽게 등장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들과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새롭고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스키타이의 본격적인 서아시아 진출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37] 키루스 강과 아락세스 강 사이의 무간 평야에 정착한 스키타이는 기원전 600년경까지 그 지역 일대를 본거지로 삼았다.[38] 이 시기에 스키타이 문화는 시스코카시아에서 더욱 남쪽으로 나아가서 카스피해의 서안부를 따라 남카프카스와 이란고원, 아나톨리아까지 퍼져나갔다.[39][40]
이후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으로 내려갔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 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여러 곳을 호령하면서 여러 세력들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41] 메디아의 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불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끝났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3.2.4. 북폰토스의 스키타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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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3세기 사이에 폰토스 스텝 지역의 스키타이인과 이들과 관련된 고고학적 집단을 나타낸 지도 |
이 지역에 스키타이가 이주해오자, 기존에 남서유럽의 스텝과 삼림지역에 있었던 원주민들은 더 외딴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또다른 인도이란계 유목민인 아가티르족도 있었다.[43] 스키타이는 기원전 650~600년 사이에 폰토스 스텝을 장악했고 다른 민족들을 완전히 밀어냈다. 한편 트라키아와 판노니아 평원에서 발견된 초기 스키타이 매장지는 부분적으로 아가티르족, 혹은 폰토스 스텝과 카르파티아 지역에 있었던 토착 원주민들의 그것과 유사한데, 이를 보아 아마도 스키타이는 이전에 그랬던것처럼 기존의 문화를 흡수,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남동부 유럽, 특히 트라키아와 판노니아 평원에서 발견된 일부 고대 매장지들은 스키타이 양식으로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3.2.4.1. 페르시아의 침공
다리우스가 항복의 의미로 흙과 물을 바치라고 하자 스키타이의 왕인 이단튀르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하여 도망친 적은 없다. 단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될만한 도시나 경작지가 없다.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은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다...(중략) 그렇게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어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아라. 그때에 가서야 (그대는) 내가 정말로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헤로도토스, 저서 《역사》에서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하여 도망친 적은 없다. 단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될만한 도시나 경작지가 없다.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은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다...(중략) 그렇게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어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아라. 그때에 가서야 (그대는) 내가 정말로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헤로도토스, 저서 《역사》에서
페르시아 놈들아, 선택해라. 새처럼 하늘로 솟든지 쥐새끼처럼 땅으로 꺼지든지, 개구리처럼 물에 뛰어들든지, 이 화살에 맞아 죽든지.
다리우스 1세의 측근 고브뤼아스, 스키타이가 보낸 새와 쥐, 개구리, 화살을 보며
기원전 6세기 후반, 서아시아에서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리디아를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였던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기 위해 스키타이 원정을 계획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군세가 70만명에서 최대 80명이었다고 한다.다리우스 1세의 측근 고브뤼아스, 스키타이가 보낸 새와 쥐, 개구리, 화살을 보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청야 전술을 펼치면서 초원으로 계속 후퇴했다고 한다. 다리우스 1세는 끝끝내 타나이스 강을 건너 요새와 정착지를 건설했지만, 스키타이가 계속해서 기습해오고 병사들의 사기도 점점 떨어지자 결국 회군하였다. 원정의 결과는 불분명한데, 페르시아 비문에서는 다리우스가 '사카'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헤로도토스와 다른 그리스 사료에서는 스키타이가 승리하였다고 한다.
3.3. 중스키타이 시대 (고전 스키타이)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시스코카시아의 스키타이는 새롭게 폰토스 스텝에 도착한 사르마티아인들에게 밀려났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으며[44] 이는 중스키타이 시대[45]를 열었다.사르마티아인의 압력과 페르시아의 위협 덕분에 스키타이 왕국은 기원전 5세기 초가 되자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 기간 동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일련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이 시기는 일개 부족 연맹체에 불과했던 스키타이가 초기 국가 정체를 형성하여 자신들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타 세력들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또한 스키타이 왕들은 주요 문명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3.3.1. 트라키아 진출
기원전 5세기 동안 스키타이인들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우회하여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일대에 진출하는 한편으로 이스트로 강의 남안부, 만갈리아와 디오니소폴리스에 정착지를 건설했다.기원전 496년, 스키타이는 헬레스폰트의 트라키아 체르소네까지 남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스키타이의 트라키아 진출은 오드뤼사이 왕국이 건설되자 제동이 걸렸다.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480년경에 오드뤼사이 왕국과 조약을 맺어 이스트로 강을 경계로 설정하고 그 너머로는 진출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3.3.2. 그리스와의 관계
이전까지, 스키타이는 흑해 연안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에 곡물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들을 수출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상품들을 얻어오는 등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이어갔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초가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스키타이 왕들은 그리스 식민지에 더욱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자신들이 아예 그곳을 정복하려고 시도했고, 그리스인들은 이에 맞서 방어시설을 건설하거나 식민지를 버리고 떠나갔기 때문이다.[46]그렇지만 스키타이는 그리스와 계속해서 교역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기원전 5세기 초 이전에 파괴된 그리스 식민지 '크렘노이(Krēmnoi)'를 재건하여 자신들의 중심지이자 대그리스용 창구로서 활용하였다. 이 40헥타르에 달하는 정착지의 인구는 스키타이와 소수의 그리스 상인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요새화되어 있는 부분에는 현지의 스키타이 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스키타이는 이곳을 거점삼아 폰토스 해안의 북서부 지역과 니코니온, 티라스, 폰토스 올비아, 케르키니티스와 같은 크림반도 서부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영향권 아래 넣을수 있었다.[47][48]
그 결과 스키타이인들이 대거 폰토스 올비아로 이주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인구분포에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들은 소수의 그리스인들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를 계속 고수해왔지만, 스키타이가 이주해오자 그들과 혼혈되면서 점차 스키타이식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리스 문화 또한 스키타이인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었는데, 특히 스키타이 상류층들은 그리스 문화를 빠르게 차용하였다.[49]
3.3.2.1. 곡물 거래
기원전 431년, 그리스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에 곡물을 공급하는 데 있어 폰토스 지역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이로 인해 보스포로스 왕국은 그리스에 곡물을 공급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 정착지들은 보스포로스 왕국에 곡물을 사고파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스키타이인들은 숲 초원의 비옥한 농경지역에서 곡물을 생산하여 이를 보스포로스 왕국에 내다팔아 수익을 얻었다.3.3.2.2. 노예 거래
5세기 들어 에게해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 끝나가자 스키타이에게서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흑해의 그리스 식민지들은 노예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그들 스스로 노예를 확보하지는 않았고 대신 스키타이에게서 노예를 받아왔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과 달리 노예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피지배 민족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거나 사로잡은 포로를 노예로 주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에 계속 노예를 공급하였다.3.3.2.3. 그리스 상품 수입
흑해의 그리스 식민지들은 스키타이에게 있어 사치품과 예술품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공급자였다. 그리스인들은 노예와 곡물 수입의 대가로 스키타이에게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했는데, 그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은 포도주였다. 에게해의 키오스 섬은 아예 스키타이에게 판매할 전용 포도주를 생산했다고 전해진다.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에게 판매한 다른 상품으로는 직물, 그릇, 귀금속 장식품, 청동기, 암포라 등이 있었다.
3.3.2.4. 경제적 번영
곡물과 노예 무역을 통해서 스키타이는 막대한 수입을 챙길 수 있었고, 획득된 재화는 일부 계층에 집중되어 스키타이 사회의 내적 분화를 촉진했다. 이 시기에 건설된 스키타이 무덤들을 보면 금은으로 된 호화로운 장식품들, 그리스산 고급 유물, 그릇, 보석 등이 풍부하게 나오는 상류층 무덤과 그렇지 않은 하류층 무덤이 현저하게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이 시기의 스키타이식 예술을 보면 명성과 왕실 권력을 강조하는 것들이 많으며, 군사적인 성공이나 용맹을 드러내는 것도 많은데 이는 이러한 예술품들을 즐길 수 있는 상류층들의 부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3.4. 한민족과의 관계
'바지·저고리차림' 한복 원류는 스키타이 문화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이부식(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 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50]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한족(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출처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이부식(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 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50]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한족(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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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서 검사해서 나온 DNA분석 |
2009년에 제작된 KBS의 <역사스페셜> -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편에서 제작진이 아시아 지역 고인골 샘플 2,000여 개를 보유 중인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신라인과 흉노의 유전적 근원성에 관한 DNA분석을 의뢰했는데, 스키타이인과 신라인의 유전자가 흡사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신라인과 흉노의 DNA 일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뜻밖에도 모계 DNA와 부계 DNA 둘 다 흉노보다는 스키타이와 흡사하게 나왔다. 해당 영상에서 중앙대 이광호 교수는 자신도 뜻밖의 결과라 여러 번 반복 검증했지만 신라인과 스키타이인의 유전자가 유사하게 나온다는 인터뷰를 한다. (36분 16초)
현대 한국인의 조상은 알타이 산맥에서 대이동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연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의 언어, 문화, 정치적 계보는 고조선과 부여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연원을 두고 있다. 건국 신화나 국호도 부여와 연관지은 고구려와 백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역시 고조선 유민들이 사로 6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51], 고고학적으로도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고조선계 문화였음이 확인된다. 이런 만주의 초기 한민족 문화는 북방 유목민 문화의 동쪽 끝자락에 닿아 있었고 최소한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고 받았거나 아예 그러한 유목민 문화의 일파로 여겨진다. 이때 그 '초기 북방 유목민 문화'가 바로 문헌상 나타나는 제일 오래된 유목민 문화인 스키타이로 비정된다.
신라의 무덤 양식이라든가 신라의 금관, 황금 보검 등은 실제로 굉장히 유사하다. 특히 신라 금관에서 나타나는 장식들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에서 나타나는 사슴, 나무,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고구려를 위시한 고대 한복의 모태가 스키타이였다는 것이 한국 복식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흉노족 신라왕족설 등 신라를 흉노족과 연관짓는 설이 있으나, 유목문화와의 연관성은 신라 이전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부여에서 파생된 국가(고구려,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신라 문화가 흉노와의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신라가 흉노에서 파생되었기보다는 흉노와 신라가 같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파생된 흔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 생활상
그리스의 역사가에 따르면 스키타이에는 네 가지로 구별되는 집단이 있었다고 한다. 남아서 농사를 하는 농경 스키타이[52], 그에 찬동하는 상공 스키타이, 그 외의 기타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이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로열 스키타이였다. 그 중 로열 스키타이를 위주로 한 집단이 승리를 거두고, 스키타이는 유목제국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이들이 남긴 자료나 물건, 외부의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스키타이인들은 금발에 튀어나온 광대뼈와 장신에 큰 체구를 지니고, 털이 많았던 편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및 마케도니아와 인접하여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무역을 하며 동쪽 알타이 지방의 황금이나 모피들을 헬레니즘 국가의 황금 세공 물건들과 교환했다. 그래서 스키타이의 황금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황금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유럽 흑해 지방 드네르프강 유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들이 남긴 황금 유물이 출토된다. 사카와 오르도스로 이어지는 황금문화의 원류격이다. 출토되는 황금 유물들의 수준이 무척 높은데, 이런 조형기술은 기원전 7세기부터 흑해에 정착한 보스포로스 왕국 같은 그리스계 국가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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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내몽골 일대 오르도스 고원에서 출토된 장신구. 기원전 3세기~기원전 1세기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
흉노 연맹은 초창기에 스키타이계 유목민들의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어로 기록된 흉노 인명을 분석해본 결과 기원전 2세기까지는 흉노에서 인도-유럽어에서 기원한 이름을 즐겨 썼다.
스키타이는 호전적인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다소 잔인한 문화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잡은 포로의 가죽으로 망토 등을 만들었다. 승리자가 부자라면 포로의 두개골을 눈썹 윗쪽을 잘라내고 가공해 도금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 헤로도토스가 스키타이를 방문하고, 이 물건들을 체험한 뒤 평가를 남겼는데 만져보면 매끈거리고 광택이 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뜻이 맞는 자들끼리 모여서 우정의 맹세를 할 때는 커다란 질그릇에 자신이 가진 무기를 집어넣고 술을 부은 뒤 거기에 서로의 피를 흘려 넣고 주문을 외우며, 그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자가 그것을 마시는 것이 의식의 절차였다고 한다.
스키타이인들 또한 제사를 지냈는데 이들은 모든 동물을 제물로 바쳤지만 오로지 돼지만은 불결한 생물이라고 터부시하여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고, 돼지고기 역시 먹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모로 후대의 유대인이나 이슬람의 관습이 생각나지만 이들과 스키타이의 문화적, 유전적 연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53]
천막 안에서 연기를 피우고 이 연기로 몸을 씻는 '연기욕'을 한다고 헤로도토스는 기록했는데 아마도 유목생활의 특성상 물이 귀했기 때문에 원시적인 사우나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의 증언처럼 실제 고고학적으로 연기욕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대마초의 잔여물이 발견되었기에 연기욕을 하는 과정에서 대마초를 넣으며 일종의 유희로도 즐겼을 가능성이 있다.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54]의 저자인 존 워리(John Warry)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은 활시위를 당길 때 다른 유목민족들과 달리 중지와 검지를 이용하는 오늘날의 양궁식 사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도리어 당시 그리스인들이 엄지와 검지로 활을 당겼다고 한다.
수직으로 세 손가락을 줄에 걸고 당기는 지중해 방식(Mediterranean draw), 위력이 약한 활을 쓰는 남미 원주민들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활줄을 꼬집듯이 당기는 핀치 방식(Pinch draw), 그리고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쓰는 방식인 엄지에 깍지를 끼고 줄을 잡은 뒤 나머지 손가락으로 엄지를 감싸고 당기는 일명 썸 링 방식(Thumb ring) 등의 세 가지가 있다.[55]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방식이 현대 올림픽의 양궁으로까지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도자기 그림이나 벽화를 보면 그리스의 활쏘기 방식은 정말로 핀치 내지는 썸 링 방식이었든 듯하다. 정작 고대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은 썸 링을 안 썼다. 사족으로 이 차이점은 활의 위력과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으로 활이 튼튼하지 않거나 줄 힘이 강하지 않으면 핀치 방식으로, 활을 무조건 강하게 멀리 쏴야 할 때는 썸 링으로 당긴다. 대표적으로 몽골 활은 활줄에 걸리는 무게가 무려 40kg대에 달하기 때문에, 썸 링 이외 다른 방법으로는 당기기도 힘들다.
거세마를 처음으로 만든 것도 스키타이인들이었다. 거세마는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니 충동적인 성향이 덜하고, 기수의 통제가 용이하며 다른 말들이 근처에 있어도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거나 울지 않아서 무리를 지어 사육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아주 먼 훗날의 스페인에서는 군마로 거세를 안 한 수말만 썼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비된다.
5. 역대 통치자
※ 중간에 계보가 끊겼기 때문에 기록상 알려진 순서로 적었다. Scythians 스키타이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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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야훼의 말이다. 북녘 땅 한 끝에서 한 강대국이 일어나 쳐들어온다. 활과 창을 움켜잡은 잔인무도한 자들이 설레는 바다같이 고함지르며 말타고 달려온다. 수도 시온아, 너를 쳐부수려고 일제히 무장하고 나섰다.
<예레미야> 6:22-23 (《공동번역성서》)
<예레미야> 6:22-23 (《공동번역성서》)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 6장에는 북쪽에서 말을 탄 군대가 나타나 유다 왕국을 약탈할 것이라는 내용이 써있는데, 일반적으론 당대의 패권국인 아시리아나 신바빌로니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를 스키타이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근세의 서유럽에서는 러시아를 부르는 멸칭으로 '스키타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9세기에 민족주의 열풍을 탄 서양의 낭만주의 수정주의자들은 스키타이족을 잔인한 야만인에서 아리아인의 거칠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조상으로 변형시켰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대영제국에서도 샤론 터너와 존 윌슨 같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스키타이족을 자신들의 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의 조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56]
대낫(큰낫)을 영어로 Scythe라고 하기 때문에 해당 단어가 스키타이와 "어원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이도 있으나 별개의 어원이다. scythia는 위에서 언급한 인도유럽조어 (s)kewd-에서 왔고, scythe는 인도유럽조어 어근 sek-(자르다)에서 온 고대 영어 sīþe에서 왔다.
7. 대중매체 및 전설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에키드나와 헤라클레스의 자식인 스키테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이걸 포함해서 기원에 대한 네 개의 설을 소개했다. 영어 위키백과에 나온다.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트라키아의 왕 레소스가 주인공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레소스》에서 레소스가 원래 예정보다 트로이 전쟁에 뒤늦게 참전했는데, 헥토르가 이를 질책하자 스키타이와의 전쟁 때문에 늦어졌다고 해명하는 대목이 있다.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는 주인공인 에우메네스의 출신으로 나오고, 스키타이의 왕인 아테아스가 잠깐 등장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아틸라 미션에서 스키타이 여전사(Scythian Wild Woman)들이 등장한다. 무슨 짓을 한 건지 길마다 시체들이 널려있으며, 만나면 일꾼을 달라고 한다. 일꾼을 일정수 갖다주면 일꾼은 나무하러 보내고 보수로 늑대와 자폭병을 준다. 결정판에서는 늑대와 자폭병 대신 만구다이 9개, 보강된 공성추 3개, 아나저 투석기 3개를 준다.
<로마: 토탈 워>에서 논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하며, 야만인 하위세력이다. 올팩션으로 수정해야만 플레이가 가능하다. <토탈 워: 로마 리마스터드>에서는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바뀐다.
<토탈 워: 로마 2> 유목민 문화팩 DLC에서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토탈 워: 로마2/로얄 스키타이> 항목 참조,
<토탈워 트로이>에서 아마존 진영과 신화 모드의 아리마스포이들이 스키타이 문화권의 유닛이다. 아마존들이 스키타이계라는 학설에 따라 스키타이식 복장을 하고 있다.
<문명 6>에서 토미리스 여왕을 지도자로 하는 스키타이 문명이 등장한다.
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에서 주인공 "앤디"가 스키타이 출신으로 나온다.
우크라이나군의 대전차미사일 Skif가 스키타이에서 이름을 땄다.
<워해머 판타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Warhammer)의 모티브가 되었다. 여기서는 고스포다르족과 쿠르간족의 조상격 민족으로, 오직 배경 설정에서만 등장한다.
오래 전, 한국의 토랜드에 '스키타이의 황금'이라는 텍스트 파일이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아마 어느 작가가 소설을 썼다가 출판이 안 되어 그냥 웹 토랜드에 올린 모양인데, 스키타이족이 황금처럼 사용했다는 마약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스키타이' 표기에 관한 글
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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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한 것은 사카족 참고.[2] 저 멀리 동쪽의 중국 지역에 혼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은 오르도스 문화인데, 스키타이-시베리아 양식의 예술품들이 다수 발견되면서 의외로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났다.[3] 크림 반도에 존재함[4] 도브루자 지역에 존재함[5] 관련 내용은 체르케스인 참조.[6] 중앙아시아에 있던 사카의 일파는 남하하여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에 정착했는데 나중에 이곳에는 '사카스탄'[57]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카인들, 혹은 이들과 관련된 집단이 북인도를 침략하여 인도-스키타이인이 되었다.[7] Szemerényi, 1980 & see bibliography.[8] 영어 단어 shoot와 같은 어원이다.[9] 기본적인 모음 교체가 이뤄지는 모음 음소 */e/와 */o/가 없어져서 만들어진 모음 교체[10] '활을 쏘는 사람', 즉 궁수라는 뜻이다.[11]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스쿠테스(Σκύθης)'와 '스쿠타이(Σκύθαι)', 아카드어 "아스쿠자이"를 만들어냈으며, 여기서 이타과정을 한번 더 거쳐서 고대 아르메니아어 "스키우트(սկիւթ)"로 넘어갔다. /d/에서 /l/로 바뀌는 후기 스키타이어 음성 변화는 그리스어 단어 소클로토이(Skolotoi)를 만들어냈으며, 이것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로열 스키타이인들의 자기 지칭 명칭인 스키타이어 스쿨라 (*skula)에서 온 것이다.[12] "흑해 너머의 사는 스키타이"라는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 𐎿𐎣𐎠 𐏐 𐎫𐎹𐎡𐎹 𐏐 𐎱𐎼𐎭𐎼𐎹(Sakā tayaiy paradraya)라는 용어도 있다.[13] 엄밀히는 신아시리아 아카드어이다.[14] 단수형[15] 복수형[16] 이쪽은 페르시아로부터 역수입된 경우다.[17] 이것도 비판이 적지 않은데, 특히 니콜라 디 코스모나 안드레이 로즈와도프스키는 '스키토-시베리아인' 대신 '초기 유목민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18] 그렇지만 말의 사육과 재갈 사용이 곧 기마술의 급속한 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안장이 고안되지 않아서 말의 허리에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엉덩이 부분에 걸터앉았기 때문이다. 순화된 말은 처음에는 기마보다는 마차에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58] 말이 사육되고 한참이 지난 기원전 1274년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기병을 쓰지 않고 전차를 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19] 실제로 기후변화 이후에는 청동기 시대에 초원에 있었던 모든 정주 정착지들이 사라졌다.[20] 오르도스식 동검이라고도 한다.[21] 실제로 초기 스키타이 문화와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 문화를 보면 거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흡사하다.[59][22]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스키타이의 청동기문화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시베리아 자체에서 기원하였거나 동과 서쪽에서 동시에 기원하였다는 설이 제시된다. 전형적인 스키타이문화는 기원전 7세기 말엽에서야 나타나지만, 대형 목관무덤과 같은 일부 요소를 제외하면 이 지역의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인 스루브나야 문화(Srubnaya culture)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23] 북카프카스의 초원 지대를 일컫는 지명이다.[24] 학자들은 이때 이주한 인도이란계 유목민족들 중 일부가 고대 오리엔트에 정착하여 메디아, 페르시아 등을 형성했다고 본다.[25] 스키타이인들의 이러한 이주는 대략적으로 기원전 8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는데, 시기적으로 본다면 기원전 9세기 후반에 남시베리아의 투바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8~7세기까지 흑해와 남동유럽으로 향한 민족 이주와도 겹쳤다.[26] 이후 스키타이는 기원전 750년에서 700년 사이에는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의 주민들의 이주와 동일한 경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이동했다.[27] 학자들은 킴메르가 스키타이의 압력을 받아 이동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스키타이의 이주와 그들의 남하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고, 스키타이가 흑해 북안으로 이주한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킴메르가 서아시아로 남하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들이 있다. '민족 전체'가 아무리 거대한 위협이 등장했다고는 하나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이동하고 또 사라진다는 것은 더더욱이나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28] 몇몇 학자들은 이때문에 사실 킴메르인들은 스키타이가 이주하기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서아시아 방면으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스키타이는 단지 카프카스를 건너서 서아시아로 이동한 것이라고도 한다.[29] 킴메르는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에 속한 유목민족으로 추정된다. 즉, 그들의 본향은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 일대였다.[30] 한편 스키타이가 청동기 시대에 흑해 북안에 존재했던 옛 스루브나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도 있다. 인류학자 돌루하노프에 따르면, 이는 스키타이가 남시베리아 문화권과 더 밀접하고 중앙아시아의 사카와는 근연종이지만 다소 이질적이었다는 인류학적 증거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또다른 인류학자인 맬러리에 의하면 이러한 가설은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안드로노보 문화와 "목재무덤 문화권의 최소한의 동쪽 거주자"들은 인도이란인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31] 오늘날 남러시아 지역[32] 다만 이곳에 정착한 초기 스키타이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33] 스키타이인들은 쿠반 원주민들과 시스코카시아의 마에오티아인들로부터 농작물, 청동 및 유기그릇, 각종 공예품, 다양한 무기, 마구 등을 공물로서 걷어들였다.[34] 스키타이 문화가 토착 시스코카시아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시스코카시아인들 역시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무덤을 스키타이식으로 짓기도 하는 등의 교류가 있었다.[60][35] 초기 스키타이 문화는 부분적으로는 시스코카시아 토착 원주민 문화의 영향을, 더 작게는 서아시아 문명권(고대 근동)의 영향을 받았다.[36]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시스코카시아의 스키타이인들은 알라기르, 다리알, 클루호르 고개를 통해서 남카프카스로 이동한 후에 그곳에서 이란 고원과 아나톨리아로 진출했다고도 하는데, 대체로 카스피해의 서안부를 따라 이동한 뒤 카프카스 산맥의 동부를 크게 우회하여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진출했다는 설이 더욱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중이다.[37] 서아시아에 진출한 스키타이는 시스코카시아의 본향과도 계속 관계를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그들보다 더욱 서쪽으로 진출한 폰토스 스텝의 스키타이와도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38]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어 사료에서는 그곳을 '스키타이의 땅'이라는 뜻의 '마트 이스쿠자이(𒆳𒅖𒆪𒍝𒀀𒀀)'라고 지칭하는 것이 확인된다.[39]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사이에 서아시아의 문명들 사이에서는 유목민 무기와 기마 장비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스키타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스키타이식 화살촉과 반곡궁은 당시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있던 원거리 무기였으며 서아시아의 기존 활보다 대단히 우수하였다.[40] 국경지대에 위치한 스키타이 부족들의 정착지들은 스텝지역의 유목민들과 서아시아의 정주민들 사이에 필요한 물품들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교역소 역할을 겸했다.[41] 메디아와 만나이 왕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후자는 아예 멸망 직전까지 갈뻔했다.[42] 나중에 스키타이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서아시아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카르파티아 산맥까지가 한계선이었다.[43] 이들은 이전에 등장했던 체르노고로프카-노보체르카스크 복합체를 형성했던 민족들로, 이전 유목민들의 첫번째 이주물결 시기에 폰토스 스텝으로 이주해왔었다.[44] 특히나 매장지가 많이 건설되기 시작한다.[45] 혹은 고전 스키타이 시대라고도 한다.[46] 오늘날 흑해에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네크로폴리스에서는 스키타이에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묘지가 상당히 많다.[47] 당시는 이 도시들이 고대 아테네의 패권 아래 있었던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스키타이는 자연스럽게 아테네와 관계를 맺었다. 실제로 당시 아테네에는 스키타이 공동체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케라메이코스 공동묘지에는 스키타이 무덤도 있다.[48] 다만 이들 도시가 모두 다 스키타이의 영향권 아래 순순히 들어간 것은 아니어서, 헤르모나사, 티리타카, 코로콘다마, 판티카파이온, 파나고리아, 미르메키, 케파, 포르프미야을 포함한 대략 30개 도시들은 스키타이에 대항하여 성벽을 건설하고 서로 연맹을 맺었다. 이후 이들은 판티카파이온을 수도로 삼아서 보스포로스 왕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자세한 것은 보스포로스 왕국 문서 참조).[49] 이들이 헬레니즘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50] 細袴: 가는 바지[51] 마한 지역은 아예 고조선 왕이 직접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건마국, 준왕 항목 참고.[52] 일설에 의하면 이 농경 스키타이 주민들이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의 주류민족인 슬라브족이라고 한다.[53] 사실 유목민들은 공통적으로 돼지를 먹지 않는 관습이 있다. 키우는 데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반면, 고기를 제외하면 유용한 자원을 얻을 수도 없고 노동력이나 이동수단으로 써먹기도 힘든 가성비가 심히 떨어지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54] 한국어 번역본[55] 국궁의 활쏘기 방식도 썸 링이다.[56] 하지만 앵글로색슨족이 속한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이 속한 이란족이 같은 인도유럽계 민족이라고 해도 촌수가 너무 먼 편이다.
[57] 앞서 설명했던 '사카'와 '~의 땅'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어근 '스탄'이 붙어서 만들어진 용어로, 해석하자면 사카인들의 땅이라는 뜻이 된다.[58] 수레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기원전 3,500년경의 서아시아 지역이었지만 바퀴가 원반 형태라서 매우 무거웠으므로 소가 아니면 끌기 힘들었다. 그런데 바퀴살이 발명되면서 수레의 활용에 변화가 일어났고, 곧 바퀴 두 개가 달린 가벼운 수레를 말에 매달아 달리는 이륜마차가 탄생했다. 바퀴살은 늦어도 기원전 2,000년경이 되면 서아이사와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59]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소그드인과 같은 다른 인도이란계 민족들과 스키타이의 공통된 중앙아시아적 기원설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는 기원전 5세기경까지 대체로 복장과 장식 면에서 서로 유사하였고, 신화 역시 공통적인 측면이 있었다.[60] 특히 쿠반과 콜키스 지역의 매장지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