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6 17:56:30

갈문왕

1. 개요2. 상세3. 목록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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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 국왕과 일정한 관계하에 있는 신라 최고 성씨 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家系)의 장에게 준 칭호.

삼국사기뿐 아니라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의 당대 금석문에서도 보이는 명칭이다. 다만 삼국사기 편찬자는 "신라 사람들은 추존왕들을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뜻은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15년(서기 148),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죽은 뒤에 봉하는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상세하지 않다.】
十五年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皆稱葛文王, 其義未詳.】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일성 이사금

2. 상세

《삼국사기》에 보이는 갈문왕은 왕의 생부의 경우, 골정(骨正:助賁王의 부) ·세신(世神:沾解王의 부) ·습보(習寶:智證王의 부) ·입종(立宗:眞興王의 부) ·국반(國飯:진덕여왕의 부) 등이 추봉되었고, 왕의 장인의 경우, 일지(日知) ·허루(許婁) ·마제(摩帝) ·지소례(支所禮) ·내음(奈音) ·이칠(伊柒) ·복승(福勝) 등이 추봉되었다.
두산백과에서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왕의 생부나 장인이 모두 갈문왕 작위를 받지는 않았으며, 왕의 숙부나 왕제 등에게도 갈문왕의 작위가 내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박씨왕 시대에는 주로 왕비의 아버지, 석씨왕 시대에는 주로 왕의 생부나 외조부, 부자 상속이 확립된 마립간 시대 이후 왕의 동생이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두산백과의 견해는 박씨와 석씨 왕 시대에서만 유효한 설명이 된다.
초기에 등장하는 갈문왕은 대부분 왕비나 왕모의 아버지이다. 그러다 차츰 왕의 아버지, 그리고 왕의 동생으로 갈문왕의 조건이 바뀐다.[1]

울주 천전리 각석에 따르면 갈문왕의 부인은 왕비라고 불렀는데, 같은 명문 안에서도 일반 귀족의 부인은 처(妻), 또는 부(婦)로 호칭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금석문에서 우리가 아는 신라국왕은 "대왕", "태왕", "매금왕" 등으로 미칭을 추가해 불렀기에 구분이 되었다.

신라 역사는 조선 역사만큼 대중적으로 읽히는 역사가 아닌데다가 관련 기록이 조선보다 적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지라, 조선의 대원군과는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단어였지만 대왕의 꿈에서 진덕여왕의 아버지인 국반 갈문왕이 등장해 지상파를 타면서 널리 알려진 적이 있다. 갈문왕이 작위가 아니라 시호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

사실 대원군과 비슷한 직위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뿐, 구체적으로 뭘 위한 직위였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해선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학자에 따라 갈문왕은 대왕(代王)·군장(君長)을 뜻할 것이라는 등 이설(異說)도 있다. '대왕' 즉 '대신하는 왕'이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서로 번갈아들며 교차되다.'는 뜻의 갈마들다라는 순우리말이 있음을 근거로 삼는 듯하나, 해당 단어는 19세기부터 문헌상 확인되는 어형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해당 설이 사실이라면 '갊은 왕 → 갈문왕'의 음차라는 해석인 셈이다[2]. 혹은 중세 한국어 어형 ᄀᆞᇕ다(나란히 놓다)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3][4], 만약 갈문왕이 위 동사의 활용형을 쓴 'ᄀᆞᆯᄫᆞᆫ王'의 고형이었다고 가정한다면, 해당 어휘는 幷王, 즉 '공동국왕' 내지는 '왕에 버금가는 왕' 정도의 뜻이었을 수도 있으나,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추측에 머무를 뿐이다.

한편 발해의 가독부와 연관지어 '거룩한 자'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6부의 족장급 지배자에게 주어진 호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독부는 성왕(聖王)이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한국어의 '거룩'과 연관지을 수 있고 '갈문'도 이와 통한다는 견해이다.

503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 갈문왕"이란 명칭이 나오는데, 이 명칭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는 지증왕이다. 하지만 503~4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증왕이 즉위한 지 4년이나 지난 다음이기 때문에, '대신하는 왕'의 뜻으로 갈문왕이라는 단어를 풀이한다면 어째서 "국왕"이 "갈문왕" 작위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갈문왕 출신으로 즉위하면 왕위에 오르고도 몇 년 동안 그냥 갈문왕을 사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배경이 깔끔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문제.

갈문왕이 부왕(副王)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신라 6부 중 김씨 왕족의 근거 부족은 탁(喙)부와 사탁(沙喙)부였다. 그 중 실제 왕은 탁부에서 대대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탁부는 김씨 왕족의 제2부족으로서 탁부 출신의 왕을 지지하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갈문왕은 바로 이 사탁부의 수장으로서 왕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자 버금가는 위치였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에서도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에서 이미 즉위하였던 지증왕(500년에 즉위)이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으로 등장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학설로는 탁부 매금왕이었던 소지 마립간의 후계로 사촌이며 사탁부의 수장인 지증왕이 신라의 전체 통치권을 계승하고, 지증의 장남인 법흥왕이 탁부의 수장직을, 차남인 입종이 사탁부의 수장직을 이어받았으며, 지증왕은 탁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사탁부 갈문왕을 칭하다가 탁부 쪽의 불만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이 공고화된 후에야 6부를 초월한 '신라 왕'을 칭했다는 학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지증왕이 최초로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여기 연관시키기도 한다.

일성이사금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에 추봉한 기록이 처음으로 갈문왕을 추봉하는 기록이며 갈문왕에 대한 분주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추봉 제도의 시작을 일성이사금의 박아도 추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5]

신라 초기, 왕비와 왕모의 아버지가 갈문왕으로 등장하는 것은 눌지마립간 19년의 역대 왕릉 수즙을 기점으로 일괄 추봉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는 실성이사금 어머니의 아버지가 갈문왕이 아닌 점도 하나의 방증 사례로 본다. 또한 '왕호'가 사용된 시기가 눌지마립간 이후라는 이유로 이전에는 '갈문'이라는 용어만 사용되다가 이 시기부터 '갈문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6]

마립간 시기 왕의 형제에게 갈문왕의 지위를 책봉하기 시작한 이유가 왕위계승의 원칙이 기존 모계 왕비 중심의 세대계승에서 부자 계승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왕의 형제의 왕권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가 있다.[7] 실제로 미추 이사금부터 눌지 마립간까지는 광명부인-보반부인-아류부인-차로부인으로 이어지는 모계를 중심으로 여사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왕비와의 혼인, 개인적인 능력, 국인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반면 눌지 마립간이후부터는 부자 계승으로 전환되면서 왕비의 계보는 불확실하거나 이름조차 전하지 않게 된다.[8]

갈문왕 제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중대 이후로는 오랫동안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 국왕이 전제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용이 중단된 듯하다. 허나 신라 후기로 갈수록 왕권이 약화되면서 충공 갈문왕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상 마지막 갈문왕이다.

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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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중매체에서

  •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갈문왕이 여러 명이 더 보이지만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제외한다. 사용목적은 현재의 신라왕이 자신 시조의 사당이나 묫자리에서 이전에 죽은 사람을 더 높은 직위로 추존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국반 갈문왕이 등장한다.


[1] 이기백, 1974, 앞의 책, 8~15쪽[2] 일부는 해당 어형을 현대어 갈무리의 어원으로 보기도 하나, 해당 단어는 《두시언해》에서 확인되는 중세 한국어 단어 '갊다(감추다, 저장하다)'의 파생형(갊- + -오리)으로 '갈마들다'와는 별개의 어원이다.[3] 예를 들어,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병서(竝書)를 뜻하는 말로 'ᄀᆞᆯᄫᅡ쓰다'라는 동사가 확인된다. 이두문에서는 이라는 한자를 빌려 표기했다.[4] 중세 한국어의 어형이 상당수 남아 있는 제주 방언에서도 쌍둥이에 해당하는 'ᄀᆞᆯ오기'라는 단어가 있다. 또 이 단어를 사용한 현대 창작물의 캐릭터로 이영도새 시리즈에서 나오는 갈바마리가 있다.[5] 박수진, 신라 갈문왕호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11쪽[6] 박수진, 신라 갈문왕호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18~22쪽[7] 신라 마립간시기 왕위계승원리와 왕권의 성격, 김재홍[8] 신라 상고기에 왕비의 이름 중에는 'ar'계 인명이 자주 보인다. 신라 시조 혁거세의 누이가 娥伊英(娥英)이고, 왕비는 閼英이다. 또한, 남해차차웅의 비인阿婁, 누이 阿老, 탈해이사금의 비인 阿孝(阿老, 阿尼), 아달라이사금의 비인 內禮, 지마이사금의 비인 愛禮, 조분이사금의 비인 阿爾兮, 내물의 비인 內禮希, 실성의 비인 阿類, 눌지마립간의 비인 阿老 등이다. 이들은 동일한 의미의 이름을 가진 왕비로 나오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과 남해차차웅의 누이 아로를 통해 사제적인 성격을 상정할 수 있다. 결국 'ar'계 인명은 사제의 성격을 가진 인물을 의미한다. 'ar'계 인명이 신라 건국기부터 왕실 여성에게 사용된 이유는 사제라는 특수한 직능과 관련되어 있으며, 여사제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ar'는 농경사회에서 사제를 수행하는 왕이나 왕비가 농작의 풍요를 기원하다는 의미에서 司祭와 연결시킬 수 있다.(신라 마립간시기 왕위계승원리와 왕권의 성격, 김재홍)
상술했듯이 눌지 마립간시기 갈문왕을 일괄 추봉하는데 대부분이 왕비의 아버지란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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