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Εὐμένης(BC 362? ~ BC 316)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이자 학자.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궁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서기관이긴 하지만 항상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따랐던 것을 보면 서기관 업무 외에 군사적인 업무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1]
디아도코이 중《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름을 올린 세 명의 장군 중 한 명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원정을 수행했다.[2]
기본적으로 문관이었지만, 막상 사령관의 위치로 올라서자 엄청난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며 다른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연달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제국을 분할하려는 디아도코이 장군들과 달리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와 제국을 지키려고 한 통합파의 거두였던 만큼, 결국 그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호사가들의 사랑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서기관에서 사령관으로
카르디아[3] 출신으로,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적의 이야기는 자료 부족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마케도니아에 등용된 것에 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트라키아령 케르소네소스에 사는 가난한 마부의 아들로 집안은 가난했지만 교육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며, 어릴 때 필리포스 2세가 카르디아를 지나가면서 이 곳에 머물러 청년들의 씨름이나 운동 경기를 참관했다. 에우메네스가 승리를 거두자 필리포스가 에우메네스를 용감한 청년이라 여겨 신하로 삼았다.
또는 아버지가 필리포스 2세를 손님으로 맞이한 적이 있어서 이 때 받은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등용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개인 서기관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처음으로 소규모 기병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당시 그가 맡은 임무는 두 소도시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도시들에 도착하기 전에 주민들이 도망갔기에 전공을 세우지는 못 했다.[4]
왕의 측근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하자[5] 그의 친위대장 직과 최선임 헤타이로이 대대장(chiliarch) 직을 페르디카스가 물려받았고,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가 가지고 있던 헤타이로이 대대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헤타이로이의 대대장 자리는 오랫동안 알렉산드로스를 따른 장군들도 가지기 힘들 정도의 명예로운 자리였다.(가우가멜라 전투에 참전한 헤타이로이는 1개 대대 2100명에 불과했고, 대대장은 필로타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유능한 서기관이 군사적 재능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알렉산드로스 사망 이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사망했다.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지지했고, 페르디카스가 제국 섭정으로,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왕에[6] 지명되게 하는 데 공헌한다.바빌론 협정에서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지역의 사트라프 자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이라 페르디카스의 지원을 받고 직접 전투를 벌여 점령한 후에[7] 기병을 6,500명이나 모으는 능력을 보여준다.[8] 에우메네스는 필리포스 2세가 군인의 개인 장구류를 국가에서 지급한 것처럼 기병 지원자들에게 말을 지급하는 등의 지원을 해 빠른 속도로 기병들을 육성할 수 있었다. 그를 따라온 헤타이로이 1개 대대가 교관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에우메네스의 기병대는 디아도코이들의 큰 적이 된다.
제국 최고의 지략가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의 주군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군사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으나 지장보다는 용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장들로 따지면 그들은 지략이 딱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을 위한 책략은 알렉산드로스가 대신 짜주었기 때문으로, 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전쟁 병기로서의 역할에 특화되어 있었다. 동방 원정 중 각각 기병대와 보병대 지휘관으로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페르디카스와 크라테로스가 있지만 이 둘도 지략면에서는 에우메네스에게 밀린다는 인상이 크다. 이 둘은 1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말 그대로 광탈한다.[9][10]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에 비해서 전술적 역량은 물론이고, 전략적 식견, 그 밖에 학자로서의 능력까지도 뛰어난 에우메네스는 별종에 속했다.
2.3. 1차 디아도코이 전쟁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크라테로스를 막을 것을 페르디카스에게 명령받았다. 하지만, 네오프톨레모스가 배신의 기미를 보이자 기습해 병사들을 차지했다. 기원전 321년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크라테로스,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사시켰다. 크라테로스는 전향하면 후대할 것을 약속하며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자신은 페르디카스와의 화해를 중재할 수는 있으나 왕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전력으로 저항하겠다고 천명했다.그리고 그는 전투 전날 한 꿈을 꾸었다 한다. 알렉산드로스 두 명이 서로 팔랑크스 방진을 가지고 싸우는데, 한 명은 데메테르의 지원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아테나의 지원을 받았다. 데메테르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가 이기고 데메테르는 곡식 줄기로 만든 왕관을 씌워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첩자들에게 받은 보고 중 크라테로스가 암구호를 "아테나와 알렉산드로스"로 정했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암구호는 "데메테르와 알렉산드로스"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팔과 머리에 곡식 줄기를 묶어두라는 명령을 했다.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노린 것 같다.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공동 마케도니아 섭정이었고,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와의 융합 정책에 반대해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군이었다. 그와 적대하고 있다는 걸 알면 자신의 병사들이 창대 끝을 돌릴 것이 뻔했기에 에우메네스는 배신자 네오프톨레모스와 피그레스라는 이름의 이방인 장군과 싸우러 간다는 헛소문을 내고 크라테로스의 얼굴을 모르는 현지인 기병들을 어떤 대화나 협상도 없이 크라테로스를 향해 돌격시켰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해 대기시켰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자신을 알아보면 전의를 잃고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를 공격한 것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아니었기에 낙마해 말발굽에 깔려 죽었다.
이 전투 중 네오프톨레모스와는 일기토를 벌였으며, 여기서 승리해 네오프톨레모스를 직접 베었다.[11] 유약한 문관으로 알려졌던 에우메네스가 제국에서 이름난 장군 둘을 하나는 무력으로, 하나는 지략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 때문에, 특히 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가장 인망이 높았던 크라테로스를 이민족 기병들의 힘으로 전사시킨 것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원망을 사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던 페르디카스가 부하들[12]에게 암살당하면서, 에우메네스는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정치적 지원자를 잃게 됐다.
에우메네스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자, 여러 장군들은 트리파라디소스 협약을 통해 크라테로스를 죽인 에우메네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사형 집행인으로는 안티파트로스와 안티고노스 1세가 선정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제국 섭정이었기에, 에우메네스를 상대하는 임무는 사실상 안티고노스의 단독 임무였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에우메네스는 무법자가 되었고, 에우메네스는 최악의 상황을 역이용한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도적떼가 된 것이다. 정규군의 훈련도와 장비를 가진 도적떼가 탄생(...). 어쨌든 안티고노스의 공격에 위기에 몰렸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여동생 클레오파트라의 지지를 받았고 대왕의 모후 올림피아스에게 후원을 받았다. 그 밖에도 페르디카스 파벌[13]들이 힘을 합쳤다면 안티고노스에 대적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서로 반목하다 각개격파당한다.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안티고노스는 크라테로스를 전사시킨 에우메네스의 기병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자살행위라고 생각했고, 그의 부하 중 하나를 매수한다. 에우메네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해 기원전 320년에 노라 요새로 퇴각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희망을 잃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노라 산악 요새는 절벽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였고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식량과 물이 저장되어 있었다. 작은 트랙을 만들어 말을 뛰게 하거나 말의 운동 기구를 만들어 언제든 요새를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에우메네스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안티파트로스 - 안티고노스 -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삼각동맹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2차 디아도코이 전쟁
결국 노라에 틀어박힌 지 1년쯤 후에 기회가 찾아온다.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고령으로 사망한 것이다. 안티파트로스는 섭정직을 자신의 부관 폴리페르콘에게 승계하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여기고 폴리페르콘과 대립한다. 에우메네스는 카산드로스와의 대립에 쓸 만한 동맹을 찾던 폴리페르콘의 도움을 받아[14] 노라를 탈출해 페니키아를 점령했다.[15]에우메네스의 목적은 왕가의 수호였기에 그때 굳이 안티고노스와 싸울 필요는 없었다. 마케도니아 본토로 돌아가 폴리페르콘을 도와 카산드로스를 쓰러트린 다음에 안티고노스와 싸워도 늦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스폰트 해협은 이미 안티고노스의 함대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마케도니아로 귀환은 실패하고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국고의 돈을 아낌없이 뿌리며[16] 군사와 용병들을 끌어모았다. 근위 기병대와 은방패 부대라는 훌륭한 교관단이 존재했으므로 신병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바빌론 근처에서 주둔하다가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를 설득해 안티고노스와 싸우도록 했으며,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트라프들에게 하나하나 싸움을 걸기 시작한다. 바빌로니아 사트라프 셀레우코스 1세, 메디아 사트라프 페이톤 등을 상대로 싸웠다.[17] 기원전 317년에 파라이타케네, 기원전 316년에는 가비에네 등에서 안티고노스와 싸웠다.[18]
2.5. 은방패 부대의 배신과 죽음
하지만, 전투 도중에 에우메네스를 후원하던 페르시스의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태만으로 인하여, 아군이 동방 원정 내내 축적해왔던 대량의 전리품들과 휘하 부대이자 마케도니아 최정예인 은방패 부대 대원들의 처자식들이 적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은방패 부대는 적들에게 에우메네스를 팔아넘겼다.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잘해주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에우메네스는 외국인 주제에 마케도니아 동족끼리 싸움을 붙여가며 이득을 취하는 재수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것이다.이렇게 어이없는 방식으로 에우메네스의 신병을 확보한 안티고노스는 그의 처우에 대해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네아르코스가 선처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험 인물인 에우메네스를 사형시키게 된다. 그러나 일전에 친분이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안티고노스는 예우를 다해 에우메네스의 장례를 치르고 유해를 가족에게 보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배반한 은방패 부대들을 불신하여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하나하나 숙청했다.[19]
능력이 뛰어났지만 배신자 때문에 패배한 인물인데, 이는 스스로의 실수라기보다도 부하 운이 없었기 때문으로, 항상 부하들에게는 섭섭지 않게 잘 대우해줬는데도 배반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부하들이 그를 배반한 가장 큰 이유는 에우메네스의 행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결국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외국인[20]인 그에게 명령을 받고 동족과 싸우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21] 물론 그런 점을 뛰어넘을 만한 카리스마는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은방패 부대는 3,000명의 60 ~ 70대 고참병들로 이루어진 왕실 근위대이자 제국 최정예 부대였다. 전투력과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선발된 이들은 험지에서 하루 60km를 행군하고 절벽을 오르고 성벽을 공격하고 사막을 건너고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자신의 용맹을 증명했다. 전쟁을 스포츠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백전노장들이었다. 전장에서 60살이 넘을 때까지 수없이 싸우며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전투력은 보장된 것이다. 은방패부대가 왕실 근위대이긴 했지만 왕 알렉산드로스 3세는 가장 앞장서서 적군에게 돌격한 맹장이었기에 은방패 부대도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했다. 젊을 때부터 필리포스 2세의 정복 전쟁에 동참했으며, 인도에서 동방 원정 중 세운 무공을 인정받아 그들의 방패에 은을 도금하는 명예도 받았다.[22] 냉병기 시대에는 담력이 완력을 압도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고령이라는 것이 큰 흠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이 가진 전투 기술과 경험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어떤 부대도 따라갈 수 없었다. 또한, 은방패 부대는 에우메네스를 배신하기 전 이미 여러 번 그를 배신하라는 제의를 거부했는데, 무려 4명의 제국 최고위 장군[23]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충성심은 꽤 타산적이었는데, 은방패 부대 지휘관 안티게네스는 애꾸눈 안티고노스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부하들을 마음대로 죽이며 자신들이 큰 공을 세운다 해도 대접받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비해 에우메네스는 외국인 서기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의지하고 충성에 보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에우메네스는 이들의 충성심을 붙잡아 놓기 위해 죽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권위를 이용했는데,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찾아와 왕좌에서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꿈을 꿨다고 주장하며 왕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매일 왕의 제단에 절을 올리며 군사 회의에는 왕의 자리를 비워두고 자신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참모로서 지휘권을 대신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책략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 은방패 부대는 그에 지휘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묘사가 있다. 그럼에도 결국 팔아넘겨지고 말았다.
3. 평가
3.1. 왕국의 마지막 수호자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에도 늘 왕의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고 어전 회의의 형식으로 군사 회의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아르게아스 왕조를 지지하며 왕국의 통일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로마 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코르넬리우스(Cornelius Nepos)[24]는 에우메네스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의 최후의 수호자라고 평하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장군들이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못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에우메네스는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의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 분할파에게 맞서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러한 입장의 차이 이외에도 그는 마케도니아인이 아니라 이민족 출신이었고, 무인이 아니라 문관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 때문에, 제국 분할파 장군들이나 심지어 휘하 장군들에게도 경원시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단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에우메네스의 숙적이자 그에게 여러 번 패배한 안티고노스 1세조차 그를 잡았을 때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실제로 에우메네스가 보여준 능력을 본다면, 이 정도의 천재적인 인적자원을 그냥 죽이기는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자신이 칼을 들고 있을 때에는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말하며 제국의 충신으로서 죽기를 원해 결국 에우메네스를 죽이게 된다. 그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디아도코이들 중 아무도 왕을 지칭하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뒤 10년이 지나고 안티고노스를 필두로 디아도코이들은 스스로 왕관을 쓰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인물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알렉산드로스 생전 가장 유능한 장수 크라테로스, 심지어 그의 숙적 안티고노스 1세 마저도 에우메네스의 능력에 감탄했다. 게다가 상대보다 항상 열세의 상황에서 싸웠는데도, 이민족 문관 출신이라는 약점으로 아군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마지막에 배신당하여 겪은 패배를 제외하면, 항상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한 걸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수준의 전술적 재능이다.
다만 그의 외국인 출신이 어느 정도로 그에게 불리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이었고 동방 원정 중 엘리트 근위 기병대의 차선임 지휘관으로서 전설적인 전공을 세운 페르디카스도 나일 강 도하 작전에 실패하자 셀레우코스, 페이톤, 안티게네스 등에게 살해당했다. 즉, 문제는 패배한 것이지 승리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그리스인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패배하자 부하들이 배신할 구실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25]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알렉산드로스 4세의 죽음까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에우메네스를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비중으로 서술하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
에우메네스에 대한 글
은방패 부대의 활약
3.2. 충심인가? 야심인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전기에서는 에우메네스가 분열되어가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그 후손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 사망한 의로운 영웅으로 기록되어있다. 헌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에우메네스를 탐욕과 야심을 채우려든 전쟁광 정도로 묘사한다. 심지어 원정에서 돈을 챙기고 숨겼다든가,[26] 헤파이스티온과 심하게 싸워 놓고 막상 죽으니까 애도했다면서[27] 에우메네스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까는 사례들도 들어있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는 처세술의 일종으로 평가받는다.플루타르코스가 단순히 음해성 기록만 모았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에우메네스에 대해 남겨진 유리한 역사 기록 역시 그의 동향 사람이자 친구였던 히에로뉘모스[28]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비록 에우메네스가 패하고 난 후에 쓰여지긴 했지만, 중립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에우메네스가 대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싸운 것,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권력을 잡으려 했던 다른 장군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야망을 채우는 데 더 유리한 기회는 많았다. 크라테로스와 대적했을 때[29]와 노라 요새에서 안티고노스에게 몰렸을 때,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안티고노스에게 생포되었을 때 모두 에우메네스는 항복하면 후한 대접을 받을 것을 약속받았으나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우선했다. 디아도코이 중 제국통합파로 분류되는 장군은 제국 섭정 3명[30]을 제외하면 에우메네스 밖에 없다. 섭정들은 왕가의 권위가 높아져야 이득인 걸 감안하면 불리함을 무릅쓰고 왕가에 충성을 바친 장군은 에우메네스뿐이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가문의 충신인지 또 다른 야심가인지 증명할 단계 이전에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니, 결국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4. 여담
4.1. 페르가몬 시조설
항간에는 에우메네스의 후손이 페르가몬 왕국을 세웠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아탈로스 왕조와 에우메네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아탈로스 왕조의 2대 왕의 이름이 에우메네스 1세이고, 에우메네스가 페르가몬 왕국의 시조가 되는 필레타이로스의 고향인 파플라고니아 지역의 사트라프였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필레타이로스의 생년은 BC 343년이고 에우메네스가 파플라고니아의 사트라프가 된 건 BC 323년 이후라서 둘은 전혀 관계가 없다. 파플라고니아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도 들르지도 않고 지나친 곳이니 에우메네스는 BC 323년 이전에 파플라고니아를 방문한 적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만화《히스토리에》에서는 이를 묘하게 비틀어, 젊은 날의 에우메네스가 떠돌이 생활을 했고, 필레타이로스의 고향 근처에서 몇년간 살며 한 여인과 친해져 동침까지 했다는 전개를 집어넣었다. 이 여인이 회임을 했고 훗날 필레타이로스를 낳을지는 미지수이다.[31]
4.2. 왕궁일지
에우메네스는 생전에 왕궁일지를 적었으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른 책에서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를 하면 꼭 언급이 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와서도 꾸준하게 왕궁일지를 찾으려는 역사학자가 많다. 당시에 쓰여진 책의 소재가 주로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로마 기록이 담긴 양피지가 긁혀나가고 있다.[32] 원본은 사라졌지만 사본은 최소한 서기 2세기까지는 존재했으며,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서로 다른 판본을 읽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놓았다.5. 대중문화 속의 에우메네스
5.1. 히스토리에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히스토리에》는 에우메네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학자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서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의 소유자라는 점이 부각된다. 작중 필리포스 2세의 평가로는 알렉산드로스와 에우메네스가 각각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싸우면 알렉산드로스는 3번 중 2번 승리하겠지만, 전사자 3,000명 중 알렉산드로스가 포함될 것이며, 에우메네스는 9,000명의 병사를 잃고도 살아남은 1,000명 중에 있을 것이라 한다.[33][34]5.2. Fate 시리즈에서
Fate/Zero의 등장인물 라이더의 보구 왕의 군세의 일원으로 처음 등장했다. 문관복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으로, 등장 당시 라이더의 마스터 웨이버 벨벳이 성장한 모습과 닮아 화제가 됐었다.
후에 둘이 닮았다는 설정이 추가됐고,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사건부에서 등장하는 헤파이스티온(의 여동생)에 따르면 생김새는 물론 성향까지 닮은 모양이다. "짠돌이, 좀생이, 어둡고 괴팍하며 아침에 고생하고, 곰팡내 나는 책자만 읽고 있어. 비굴한 주제에 오만. 낯짝에다 자못 고생하며 산다는 티를 내놓는데 다 끝나고 보면 제일 사태를 뒤집어놨어."라며 대차게 깐다.
Fate/Grand Order에서는 이스칸다르의 제갈공명과의 상호대사[35]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1] 당시의 서기관이라는 건 비서에 가까웠다.[2] 디아도코이로서 이름을 올린 다른 둘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가 아닌 에피로스의 피로스 1세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이긴 하나 동방 원정에는 참여하지 못 한 데메트리오스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버지 안티고노스는 가우가멜라 전투까지 동방 원정에 참여했지만, 정작 본인은 늦둥이로 태어나서 페르시아 원정에 같이 갈 수 없었다.[3] 아테네의 식민도시.[4]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에우메네스는 동방 원정 내내 보급과 행정 업무를 전담했기에 공이 작지 않았지만 무용에 기초한 마케도니아의 전통적 위계에서, 외국인 출신 문관에게 어떤 위치가 어울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에우메네스를 우대하려면 그에 걸맞은 군공을 주거나, 최소한 가질 기회라도 줘야 했다.[5] 헤파이스티온이 에우메네스에게 배정된 숙소를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피리 연주자에게 양보한 일으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6] 나머지 한 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다.[7]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 혼자서 그 지역을 점령하기 힘들 것 같아 소(小) 프리기아 사트라프 레온나토스와 대(大) 프리기아 사트라프 안티고노스에게 에우메네스를 지원하라 명령하나 그들이 거부하고 라미아 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에우메네스가 직접 점령해야 했다.[8]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때 동원한 기병이 5,000명이다. 단,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출발 시점에서 5천이라는 거지. 원정 중이나 바빌론으로 돌아왔을 때는 당연히 기병의 수가 5천을 넘는다. 그리고 에우메네스가 기병을 징집한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지역에 비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땅은 훨씬 큰 만큼 이것만 보고 알렉산더와 비교하는 우는 범하진 말자.[9] 페르디카스가 탈락한 사유는 정략적 오판으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든 탓에 의한 암살이다. 다만 크라테로스의 경우는 에우메네스의 부대가 보다 인망이 뛰어난 자신에게 회유될 거라는 다소 순진한 기대가 에우메네스의 아군마저 속인 책략에 무너진 이후에 전사했다.(에우메네스의 책략은 쿠데타에도 흔히 쓰인다.) 사실 크라테로스는 책략 능력이 모자랐다고 판단하기엔 전략 자체가 에우메네스를 죽이려고 했는지도 의문이었을 정도로 유하게 나갔으며 이 방심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 있는 편이다.[10] 실제 에우메네스가 취약한 입지로 페르디카스의 비호를 받으며 움직이던 것을 생각하면 "크라테로스도 그것을 노리고 알렉산드로스 생전에 총애받고 인망과 실력이 있는 자신이 에우메네스를 포섭하려고 나온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만만찮게 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 임종 당시 그 자리에 있었고 일단 인정받은 페르디카스를 그대로 선택하며 크라테로스를 죽인 것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이 이 크라테로스 광탈 사건과 대응은 에우메네스 비(非) 충신설, 암약설 등과도 관련되기도 하는데, 페르디카스도 고립된 위치에 크라테로스보다 인망이 떨어져 그에게 있으면 "에우메네스 자신의 입지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보면 당시 태풍의 눈이 될 거라고 보였던 영웅 크라테로스는 너무나 허망하게 외국 서기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페르디카스의 허망한 죽음 때문에 반감만 더 키운 격이 되어 에우메네스에게도 족쇄가 되었다.[11] 네오프톨레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이었다. 왕의 경호원의 무예가 낮을 리는 없으므로 에우메네스의 무력이 무시할 수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12] 셀레우코스, 페이톤, 안티게네스[13] 페르디카스는 마케도니아의 고위 귀족이었고 오랫동안 동방 원정에서 활약했기에 동생 알케타스를 비롯한 지지자들이 많았다.[14] 공동 섭정 제안에 은방패 부대 지휘권과 국고 사용권을 받았다. 은방패 부대는 키인다에 있는 국고를 경비하는 제국 최정예 부대였고(부대장 안티게네스, 테우타모스) 국고에는 금화 2만 탈렌트 가량의 거금이 보관되어 있었다.(당시 아테네의 1년 예산이 400 탈렌트이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에서 약탈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고가 12만 탈렌트이니 엄청난 거금이다.) 거금과 정예병을 둘 다 손에 넣는다면 안티고노스에 맞설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에우메네스의 행정가적 역량을 감안하면 어렵기는 하나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15]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재능을 탐내고 있었다. 둘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친한 사이었다. 사형 공동 집행인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이상 에우메네스를 죽일지 말지는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면 에우메네스의 사형 선고를 사면하고 풀어주는 것과 동시에 카파도키아의 사트라프로 복귀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안티고노스 휘하의 고위 장군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상대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제국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에게 양도받았기에 여기에 에우메네스의 행정가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이 더해진다면 제국의 패권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 대한 충성보다 아르게아스 왕조의 대한 충성을 더 우선하는 내용으로 교묘하게 서약서를 수정해 안티고노스를 속이고 탈출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안티고노스가 제시한 원본 서약서와 안티고노스의 대한 충성보다 아르게아스 왕조의 대한 충성을 우선하는 내용의 수정본 서약서를 자신을 포위한 안티고노스의 병사들에게 둘 다 보여 주고 어느 쪽이 더 정당하냐고 물었다. 안티고노스의 속셈이 무엇이든 표면적으로 안티고노스는 아르게아스 왕조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안티고노스의 병사들은 수정한 서약서가 더 정당하다고 말했고, 에우메네스는 나름 정식으로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안티고노스의 부하들은 에우메네스를 풀어 주었다. 수정한 서약서를 본 안티고노스는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화내지만 이미 에우메네스는 도망간 후였다.[16]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이 부여한 국고 사용권 덕분에 국고의 돈을 제한없이 쓸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나 안티고노스도 국고의 돈을 사용하려 했으나 국고의 경비병들은 그들을 국고에 들여보내기는커녕 대화조차 거부했다. 그렇다고 국고의 경비병들을 공격하거나 제압했다면 그것 자체가 반역이니 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17] 이들에겐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에우메네스와 그의 군대를 이간질하는 것이나 수문을 열어 그의 군대를 수몰시키려는 시도 정도였다. 이조차 모두 실패하고 그들은 안티고노스가 올 때까지 바빌론 성 내에서 떨고 있어야 했다.[18] 가비에네 전투에서 전열이 망가져 패배의 위기에 몰렸을 때 최후의 비책으로 안티고노스를 향해 돌격한다. 안티고노스를 직접 죽이거나 사로잡는다면 그의 군대는 와해될 것이고 자신은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배신으로 실패한다.[19] 동서고금 이익에 눈이 멀어 주인을 배신한 사냥개를 키우는 군주는 거의 없다. 설령 있어도 그 사냥개의 이빨과 발톱을 다 빼놓거나, 훗날 토사구팽하거나 둘 중 하나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두번 배신한다는걸 모르고 방심하는 군주는 난세에 살아남기 어렵다.[20] 그리스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키타이인 아니면 페르시아인이라는 추측도 있다.[21] 사실 마케도니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다른 외국인들을 깔보는 경향이 굉장히 심해졌다. 한 예로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부하 장군들이 모여서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지를 놓고 벌인 토론장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여인 바르시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 헤라클레스를 후계자로 삼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건 안 된다! 우리가 애써 정복한 노예인 페르시아인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다니, 그러면 우리가 노예의 후손한테 지배를 받으려고 여태까지 힘들게 싸웠단 말인가?"라는 격렬한 반대 의견이 나와 결국 헤라클레스는 왕이 되지 못 했다. 자신들이 모신 왕의 아들조차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날 만큼 마케도니아인들은 외국인을 싫어했던 것이다(...)[22] 이 부대의 지휘권 이동이 조금 대단하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에 돌아와 부상자들과 고참병들을 귀국시킬 때, 제대할 14,500명 중에 끼여 있었다. 크라테로스가 이들을 인솔해 마케도니아로 귀국하고 있는 도중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고가 전해졌고 곧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 요새에 고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크라테로스는 이들을 내버려두고 혼자만 귀국해 라미아 전쟁에 참전한다.(결과적으로 최악의 실책이 되고 만다. 이들이 있었다면 에우메네스에게 패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부대는 제국 섭정 페르디카스에게 지휘를 받게 되고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도 따라가나 부대장 안티게네스가 페르디카스를 암살하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국고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다 제국 섭정 폴리페르콘이 이들의 지휘권을 에우메네스에게 넘긴다.[23]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페이톤[24] 생몰년도: BC 100(?) ~ BC 25(?)[25] 하지만 위에서 나왔듯이 에우메네스는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 그를 후원하던 페르시스의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실수로 재물과 가족들이 넘어가자 은방패 부대가 배신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에우메네스에게 충성했다면 되찾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6] 원정 중 알렉산드로스는 돈이 부족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떼어먹을 돈이 아니라 나중에 갚을 돈이었지만 에우메네스는 300탈렌트를 빌려달라 요청받은 것을 "100탈렌트 밖에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대놓고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라고 은밀히 명령했다. 정말 돈이 없는지 아니면 돈을 숨기고 있는지 조금 과격한 방법으로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그의 명령대로 잿더미가 된 에우메네스의 막사에는 금과 은이 합쳐 1,000탈렌트가 넘게 나왔지만 오히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명령을 후회했다. 그 이유는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있던 그가 관리하던 제국의 행정 문서들이 모두 타버린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문서들이 한 줌 잿더미가 되어 버렸으니 알렉산드로스로서는 도리어 큰 손해를 본 것이다. 그래서 왕을 속인 에우메네스를 책망하지 않고 각지의 태수들과 장군들에게 문서를 다시 보내라고 명령한 뒤 넘어갔다. 에우메네스의 중요성 또한 절감했을 것이다. 별 생각 없이 한 일로 그 난리가 났으니[27] 에우메네스에게 배정된 숙소를 헤파이스티온이 멋대로 피리 연주가 에우이오스에게 양보했고, 에우메네스는 이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차라리 악사나 배우가 되는 게 낫겠다."고 불평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을 비난했으나 곧 마음을 바꿔 에우메네스가 왕에 보호를 바란다고 책망했다. 즉,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신 불평하지 말고 "헤파이스티온에게 직접 불평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거액을 조의금으로 내고 헤파이스티온을 기념할 상징물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28] 에우메네스의 생애를 기록한 만화《히스토리에》에서는 그의 형으로 각색된다.[29] 크라테로스 경우에는 애매한게 크라테로스가 안티고노스 이상으로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인망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임종 당시 있었으면 인장반지를 받거나 후계자가 되었을 거라고 보기도 하나 정작 대왕 임종 당시 없었고, 이 때문에 대왕의 명대로라면 축출해야할 안티파트로스와 손을 잡은 상태라 명분상 애매했다. 거기에 반대로 크라테로스에게 붙지 않은 것이 에우메네스 야심가설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크라테로스와 비교해서 인망이 적은 페르디카스의 곁에 있는 것이 자신의 권력적으로 더 유용하고 대왕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도 지킬수 있어 그런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다.[30]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폴리페르콘[31] 다만 진짜 의미로 시조가 될려면 필레타이로스가 아니라 필레타이로스의 동생 에우메네스가 에우메네스의 아들이어야 해서 현실성은 부족하다. 필레타이로스는 어릴 적 사고로 고자가 되어 환관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이게 실현되려면 필레타이로스와 (필레타이로스의 동생) 에우메네스가 쌍둥이로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려면 너무 전개가 복잡해진다.[32] 양피지의 경우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전 기록 위에 덧대어서 글을 쓰는 재활용이 많이 이루어졌고 특히 그리스 시대의 양피지는 많이 재활용되었다. 그리고 로마 기록은 역사적 가치가 그다지 없어서 웬만한 양피지 기록물들은 뒤에 내용을 덧댄 게 확인되면 그냥 긁어서 복원하는 게 현실. 참고로 로마 기록에 역사적 가치가 없는 건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렇다.[33] 이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풍신수길》에서 나오는 내용을 차용한 듯 싶다. 풍신수길 상권 p.283을 보면 히데요시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노부나가군과 가모우군이 각기 5,000명과 10,000명을 이끌고 싸우면 어느 쪽의 편을 들지 묻는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노부나가의 편을 들면 오다군의 5,000명 중 4,900명이 죽어도 노부나가님은 살아남은 100명에 속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재기하겠으나, 가모우는 투구를 쓴 장수 다섯을 베었다고 하면 그중 하나는 무조건 가모우 우지사토의 목이라고 말했다.[34] 사실 이 평가에 걸맞은 것은 그의 숙적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가 전사한 입소스 전투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퇴각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떠돌며 끊임없이 패배하면서도 카산드로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재건했다. 에우메네스와 데메트리오스 모두《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35] 응? 표정 딱딱한 군사가 하나 있구만. 에우메네스의 성질과 승부...아니, 내용물은 아직 풋내기인가. 헤파이스티온과 만났다면 재미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