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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소아시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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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그리스와 아나톨리아4. 지역별 차이5. 대중매체의 아나톨리아

1. 개요

고대 그리스부터 중국의 유럽과의 직접적 교류전까지 아시아라고 불렸던 매우 큰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에 속하는 거대한 반도이다.

과거에 아시아는 소아시아(Asia Minor, Μικρά Ασία)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소아시아는 현재의 튀르키예 영토 중 토로스 산맥과 폰투스 산맥 서쪽의 반도, 그중에서도 에게 해와 인접한 지역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아시아의 의미가 점점 넓어져서 유라시아에서 유럽만 뺀 나머지 지역을 다 지칭하는 말로 바뀌어 버렸다.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는 소아시아(小ASIA - Μίκρα ασία)라고 나오는 반도 지역이다. 과거에는 아나톨리아 전체를 아시아라고 불렀으나, 로마 제국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지역에 아시아 속주가 설치되면서 아나톨리아와 아시아가 구분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아나톨리아'의 어원은 그리스어 단어 Ἀνατολή(아나톨리)에서 비롯되었다. '아나톨리'는 그리스어로 '떠오르다'는 뜻의 Ἀνατέλλω(아나텔로)에서 유래했으며 떠오르는 방향, 즉 '동쪽'을 가리킨다. 그리스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해가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의미. 역시 떠오르다는 뜻의 라틴어 'Levare'에서 유래한 레반트나 'Oriens'에서 유래한 오리엔트의 경우와도 일맥상통한다. 북쪽에는 흑해, 서쪽에는 에게 해마르마라 해, 남쪽에는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전통적인 범위의 '아나톨리아'가 가리키는 지역은 위 지도에서 테두리로 표시한 지역으로 그 동쪽의 산이 많은 지역은 전통적인 범위의 아나톨리아가 아닌 아르메니아 고원, 즉 아르메니아쿠르디스탄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대학살 이후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으로 새로 성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은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나톨리아의 범위를 동쪽으로 확장시켜 동아나톨리아라는 이름으로 아나톨리아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또한 남쪽의 하타이(안티오크) 지역도 전통적으로는 시리아 영역에 속한 곳이었지만 튀르키예인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해 튀르키예 영토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날 아나톨리아는 튀르키예의 영토 중 다르다넬스 해협보스포러스 해협 서쪽의 유럽 영토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를 가리킨다.

2. 역사

아나톨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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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의 고대 지명

2.1. 선사시대

유전자 검사 결과 여기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영국으로 건너가 스톤헨지를 지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유명한 청동기 시대유럽인 미라외치도 아나톨리아에서 오늘날의 알프스 지역으로 이주한 농경민의 후손임이 밝혀져있다. 현대 유럽인의 혈통은 유럽 초기 농경민(Early European Farmers)[1]과 서부 수렵채집민(Western Hunter-gatherers), 동부 수렵채집민(Eastern Hunter-gatherers)[2]의 삼중 혼혈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나톨리아의 선주민들은 이 중에서 유럽 초기 농경민에 속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농경 기술을 전파했고, 현대 유럽인의 혈통에도 영향을 남긴 것이다.

유럽 초기 농경민은 오늘날의 중동 지방에서 기원하여 아나톨리아를 거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아직 인류가 수렵 생활을 할 때부터 괴베클리 테페 같은 거대 석조 구조물을 지었는데, 이는 현재 발견된 인공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7100년 즈음에 아나톨리아 동남부 오늘날의 콘야 근처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서 야생 밀을 개량하여 본격적인 밀 재배를 시작했다. 차탈회위크의 인구는 5-7천여 명 정도,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은 1만여 명 정도로 학자들에 따라서 이를 세계 최초의 도시라고 보기도 한다. 아나톨리아 선주민은 기원전 7000년경에서 기원전 6000년경 즈음에 농경을 처음 시작했는데, 기원전 2000년경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기원하여 아나톨리아로 유입된 원시 인도유럽인에게 정복당해 동화되면서, 히타이트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어파[3] 계통 민족들의 기원이 되었다.

2.2. 고대

2.2.1. 히타이트

최초의 문명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척에 있는만큼 그 영향으로 일찍이 문명이 시작되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첫 역사 기록은 기원전 24세기 아카드 제국에게 정복되어 편입된 것이다. 이때 강 주위의 범람원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의 기준에서 아나톨리아는 산투성이인 땅이었기 때문에 산에서 구리를 캐내는 정도의 관심만을 기울였다.

기원전 1900년 경 부터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기원전 1600년경 이 지역의 중심부에서 히타이트가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의 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고 강성한 국력을 구가하며 고대 이집트와 대립했다. 이집트와 카데시 전투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점한 채 종전했을 정도로 강한 국력이었으나 히타이트는 기원전 1170년대 후반, 바다 민족에 의해 멸망한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뒤에는 신아시리아 제국, 리디아, 메디아, 프리기아, 파플라고니아 등이 뒤를 이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리디아는 최초로 본격적으로 금속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한 나라라고 한다.

2.2.2. 고대 그리스 / 페르시아 / 헬레니즘 제국

고전기 그리스가 번영하며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립하였는데, 그리스에서 에게해를 건너면 바로 있는 아나톨리아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밀레투스, 에페소스, 페르가몬 같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번성했으며 서부해안가는 완전히 그리스 문화권으로 편입된다. 이 시기 아나톨리아 서부를 그리스어로 일컬어 이오니아라고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리디아를 무너트린 후 이 지역을 차지하며 그리스계 도시 국가 상당수가 페르시아에게 임명된 사트라프에게 지배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에는 폰토스 왕국헬레니즘 국가들이 이곳에 위치하였으며, 페르가몬 왕국 등이 유명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에게 해 연안 일대에서만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이 동쪽으로 대거 진출해 원주민들을 그리스계로 동화하면서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정복할 때쯤 되면 아나톨리아 전체가 그리스 문화권의 일부로 편입된 상태가 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왕국들이 불러들인 켈트족들이 아나톨리아 내륙에도 정착했는데 해당 갈라티아 지역은 고대 후기까지 켈트어 계통 언어가 사용되었다 한다.

2.2.3. 고대 로마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는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등의 장군들이 폰토스 왕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로마 공화정의 동방 속주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외침이 적고 부유했고, 일찍부터 고급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따라서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후에도 번영을 누렸다. 특히 고대부터 유명했던 그리스계 도시 에페소스, 밀레투스, 페르가몬 등은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는데, 로마 제정의 대표적인 통치술로 알려진 황제 우상숭배 정책을 맨 처음 아우구스투스에게 건의해 이를 관례화시킨 지방도 위의 에페소스, 페르가몬, 밀레투스 등 아나톨리아 서부에 위치한 아시아 속주였다.

워낙 부유하고 문화 수준이 높았던 지방인데다, 예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흑해 일대에는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많고, 고대 여러 민족들의 융합 속에 번영을 누렸다. 따라서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안정화되고, 속주 출신의 부유한 권력가들이 원로원 의석을 차지할 때부터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로마 중앙정계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결과, 그리스계 로마 원로원 귀족 디오 카시우스와 같은 서기 2세기 세습 원로원 귀족들을 배출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 혈통의 아나톨리아 주민들이 아닌, 아나톨리아 출신들도 마찬가지인 터라 아나톨리아 태생으로 오늘날 터키 남부에 위치한 시리아 속주 태생 인재들도 끊임없이 로마 주류층에 편입됐다. 특히 네로,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당시, 아나톨리아가 고향인 로마인들은 이들 세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제국의 요직을 꿰찼고,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는 아프리카 속주(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튀니지), 그리스, 시리아 속주와 함께 로마 원로원 내에서 부와 권력을 모두 쥔 권세가들과 기사계급 태생의 원로원 신참자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따라서 서기 3세기에는 아나톨리아의 옛 프리기아에서 발흥한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같은 신흥귀족들을 비롯하여, 2세기 말 ~ 3세기를 지배한 황제, 근위대장, 고위 행정가들은 거진 아나톨리아 출신들과 연을 맺은 이들이거나 아예 아나톨리아 출신들로 이 일대에 근거지를 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이후 고트족들이 흑해를 넘어 아나톨리아를 약탈하고 로마 제국 동부에서 새로이 흥기한 사산 왕조가 아나톨리아 동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2.3. 중세

2.3.1. 동로마 제국

서기 2세기 이래, 로마 제국 동부 일대에서 부와 권력을 모두 쥔 대표지방답게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의 핵심 인적, 물적 기반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과거 게르만족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던 대신, 병력 상당수를 아나톨리아 남부 이사우리아인으로 충원하기 시작했다. 이라클리오스 치세 당시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토였던 시리아와 이집트를 사산 왕조에게 점령당하고 발칸반도 지역이 아바르 칸국에게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를 건사한 덕분에 제국은 금세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7세기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시리아, 이집트북아프리카크레타, 키프로스 등을 상실한 후에도 아나톨리아를 건사한 덕분에 국력은 약화되었을 지언정 지역 강국 역할을 수행하는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수세기에 걸쳐서 제국군의 기반이 된 테마 제도가 처음 실시된 곳이 바로 아나톨리아 일대였다. 또한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제국의 중흥과 확장 시에는 제국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제국이 일시 단절되고 라틴 제국이 들어섰을 때,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삼은 니케아 제국이 일어나 제국을 중흥시키기도 했다. 니케아 시대 말기 및 팔레올로고스 왕조 초기 때 활동했던 사르디스의 안드로니코스 주교(Andronikos of Sardis)가 발칸반도에서 소아시아로의 항해를 그리스(Hellas)로 귀환한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뺏긴 상태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 4차 십자군 계열의 정치체들, 로마 계열이지만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여러 분국들이 난립해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발칸 반도 대신, 아나톨리아 지역이 확실히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4]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내륙을 튀르크 계열 국가들에게 빼앗긴 뒤로 제국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로마가 아나톨리아 수복에 썩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반란이 꾸준히 발생했던 점이 있다. 아나톨리아를 기반으로 한 군사 귀족들은 유사시엔 이란/아랍/튀르크 세력을 막아주는 기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앙정부에게 자주 반란을 획책하는 것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히려 옛 동로마 제국의 중추지 총대주교구인 안티오키아의 수복에 관심을 두었는데, 군사 요충지인 아나톨리아 없이 그게 될 리가 없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아나톨리아 내륙 지방의 상실이 제국에 큰 타격이 아니었던 점도 있다. 아나톨리아의 인구와 농업 생산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곳은 튀르크족이 장악하기 시작한 내륙 고원 지역이 아닌 서부지역 및 해안지역이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 오히려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다.

다만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로 아나톨리아를 상실한 이후, 그 탈환이 중요한 과제로 다뤄진 시기는 소위 콤니노스 의 제위 기간인 1081년~1180년의 100년인데[5]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분명 국력, 경제력, 문화적 역량 모두 유럽-지중해-근동의 최강국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강대국이기는 하였으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그렇게까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아나톨리아 내륙에 자리잡은 셀주크계 룸 술탄국을 보더라도 (대체로 동로마 제국이 국력면에서 우세한 입장이기는 하였으나)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로 만만한 적수는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의 역사 내내 제국을 괴롭혔던 양면 전선 문제는 이 당시에도 여전했다. 즉, 제국의 서방과 북방을 위협하는 노르만족이나 헝가리, 페체네그족 등을 일단 제압해 놓지 못하면 동방의 대 이슬람 전선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무슬림 세력을 상대하기는 어려운 나머지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명분삼아 서유럽 세력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 당시 동로마 제국의 입장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등장한 십자군 세력에게 있어서 아나톨리아 내륙은 중근동의 대도시이자(막대한 전리품) 5대 총대주교좌 도시(예루살렘뿐 아니라 여기도 성지)라는 강력한 유인을 가진 안티오키아에 비해 전혀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따라서 동로마 제국이 '자국의 안정과 국방력 확보를 위해' 아나톨리아 내륙의 수복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취했다면 십자군으로서는 그에 협력할 이유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초기, 극도로 위태로워진 로마 제국의 회복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일단 경제의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해안지역 수복을 우선시하고, 서유럽 세력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는 안티오키아 수복을 그 다음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콤니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에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마누일 1세 치세 말기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 노력이 충분했는가, 즉, 군사적 요충지인 아나톨리아 내륙의 수복의 가치에 걸맞게 우선시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아나톨리아 수복 자체에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음을 생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즉, 아나톨리아의 내륙 상실 이후 제국이 탈환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못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제국은 1204년 4차 십자군 이후로도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은 확실히 쥐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했지만 13세기 후반부터 튀르크 유목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상황에서 미하일 8세의 삽질로 유럽 쪽이 난리가 난 덕에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고 그렇게 서서히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에게 아나톨리아 영토를 침식당하다 1337년 니코메디아가 오스만 베이국에게 넘어가며 필라델파에아와 포카이아를 제외한 아나톨리아 내륙 전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포카이아와 연안 섬들인 키오스와 레스보스는 1350년대에 제노바에게 넘어가고 필라델파에아도 1390년에 오스만 술탄국에 함락되며 동로마의 아나톨리아 지배는 종식된다.

그러나 4차 십자군 시기에 형성된 동로마계 국가인 트라페준타 제국이 아나톨리아 북부에 위치한 폰토스 지역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고 이들은 제국 중앙정부가 1453년 멸망하고도 존속해 있다가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며 로마인의 아나톨리아 지배는 1461년에 완전히 종결된다.

2.4. 근세

2.4.1. 오스만 제국

로마 제국이 물러난 자리에는 각종 튀르크아나톨리아 베이국이 난립하다가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통일했으며 이후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될때 까지 쭉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는다. 문서 참조.

2.5. 근현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그리스 왕국에서 스미르나를 확장기지 삼아서 아나톨리아 서부를 고토회복(메갈리 이데아)하고자 침공하였다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나톨리아 전역은 오늘날까지도 튀르키예 공화국의 영토로 남아있다. 튀르키예어로는 그리스어의 '아나톨리아'를 음차해 아나돌루(Anadolu)라고 부른다.

3.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현재는 그리스인들이 발칸반도 남부 끝자락서 주로 분포하고 있지만 소아시아 해안가 일대는 고대부터 그리스인의 활동무대였으므로 아나톨리아에도 20세기 초반까지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1923년 종교를 기준으로 민족분류를 한 뒤 실행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당시 이스탄불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계였고 그 이전에는 더 많았다. 소아시아 서부 연안과 흑해 연안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이 많이 살았다. 한편으로 카파도키아 지역의 일부 그리스인은 중세 이후부터 튀르키예어를 사용하였다.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 정복 후 기독교도들은 세금의 일종인 지즈야를 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당장의 생활이 힘들 만큼 과중하지는 않았지만 납부 방식이 농촌 주민들에게 상당히 번거로웠기 때문에[6] 주로 농촌 지역부터 빠른 속도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정교도(그리스인)들은 차츰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도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했던 시노페와 트라브존 등의 폰토스 지역도 18세기 이후부터 기독교도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대부분 튀르키예인에 동화된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반목, 20세기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시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시노페, 에게해 제도, 카스타모누, 삼순같은 몇몇 해안지역들에 분리된 채 남아있었으며 이것마저도 전쟁 후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고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150만 명의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에서 추방됨으로써 그리스로 넘어간 에게 해 지역을 뺀 나머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된다.[7]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인 비율은 극소수로 떨어지게 됐다. 이 때 추방된 그리스인들은 아테네 인근과 마케도니아 지방에 주로 정착하여, 그들의 원래 살던 지명을 따서 새 정착촌을 세웠다.

그리스와 튀르키예간 인구 교환이 종교에 따라 진행됐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은 튀르키예인으로 분류되어 여전히 튀르키예에 남았다. 한편 1923년 인구교환 때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이주해온 이슬람교도들도 있다.

4. 지역별 차이

중동과 인접한 동남부, 그리스와 에게 해를 사이에 둔 서부, 캅카스와 인접하고 우크라이나와 마주보는 흑해와 접한 북부 지역의 식생과 문화가 각기 다르다. 주로 서구 세계에 많이 알려진 지역은 고대 그리스인 활동 지역과 겹치는 서부이고 지중해성 기후라 자연 풍광도 그리스와 비슷하다. 흑해 주변 동북부 지역에는 러시아의 캅카스 정복 당시 피난 온 이주 정착민 인구[8]가 많으며 가 재배된다. 흑해 인근지역은 습윤한 해양성 기후로 침엽수 등 숲이 우거진 곳이 많고 에게해 인근과 달리 자연 풍광이 조지아나 동유럽과 비슷한 편이다. 동남부 지역은 현재도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 동북부는 쿠르드인 인구가 많으며 문화적으로 좀 더 보수적이다. 물론 위에 나온 지도에서처럼 동남부 지역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제외하고 보는 경우도 있다.

5. 대중매체의 아나톨리아

묘하게 거물들의 고향인 엄청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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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아랍인이나 유대인 등의 중동계 민족들과 연관된 이들이다.[2] 서부 수렵채집민과 동부 수렵채집민은 시베리아 원주민아메리카 원주민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에서 분화된 인종인데, 이들 중 후자에서 원시 인도유럽인이 분화되었다.[3] 인도유럽어족의 사멸한 분파[4]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120p, 원문 'In a letter to the metropolit of Sardeis Andronikos, he goes so far as to refer to a voyage from the Balkans to his realm in Asia Minor as a return to Hellas', evidently because western Asia Minor was the heart of Greek rule and culture in his time.[5]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에는 아나톨리아를 잃지 않았으니 수복할 필요가 없었고, 마누일 1세 사후 알렉시오스 2세안드로니코스 1세의 제위기간 및 앙겔로스 왕조 치세에는 국정의 혼란으로 고토 수복을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나서는 영토 탈환은커녕 안 망하는 게 용한 처지가 되었다.[6] 지즈야는 돈으로 내야 했는데, 이는 자급자족하는 농민 입장에서 “곡물을 팔아 화폐를 구입한 후 그걸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7] 이스탄불과 부근 섬들은 예외였으나 결국 튀르키예인들의 탄압으로 쫓겨난다.[8] 체르케스, 라즈인, 우비흐인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