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3:30:46

메소포타미아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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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
بلاد الرافدين'
Mesopotamian Civilization
파일:N-Mesopotamia_and_Syria_english.svg.png
파일:external/www.notjustanotherbook.com/ziggurat%20-%20babylon_ma.jpg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지도와 바빌론의 전경
기원전 4000년 ~ 기원전 539년[1]
위치 이라크, 시리아, 이란, 쿠웨이트, 튀르키예 일대

1. 개요2. 명칭3. 지리4. 연표5. 역사
5.1.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5.2. 도시국가의 발전5.3. 통일 제국들의 등장5.4.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5.5. 신바빌로니아의 전성기와 멸망
6. 종교7. 언어8. 문자9. 정치10. 사회
10.1. 축제
11. 군사12. 경제13. 건축14. 의복15. 문학16. 장례17. 식문화18. 수학19. 천문학20. 미술21. 음악22. 성문화23. 기타2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신바빌로니아 시기 바빌론의 도시 경관
Mesopotamian Civilization

서아시아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중심 지역에서 발흥한 문명이다. 또한 역사상 세계 최초의 문명수메르 문명이 세계 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를 세우며 문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며, 그이래 아카드, 아시리아, 고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 등 수많은 왕조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크고 다양한 문화권 간의 교류로 후세에 지대한 역사적 영향을 끼친 문명이며,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서양 문명과 중동 문명의 근본이 되는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슈타르의 문, 바벨탑과 같이 역사적으로도 길이 남을만한 불가사의를 수없이 남긴 문명이기도 하다. 특히 신바빌로니아 시기의 바빌론고대 세계 최고의 메트로폴리스라고 불리며 셀 수 없이 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오가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대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 튀르키예, 쿠웨이트, 이란[2]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에서 발흥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대표되는 초기 인류 문명의 발흥지로서, 농업, 장거리 무역, 전쟁,[3] 문학, 문자 등 문명의 기초가 이 지역에서 출발하고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흥한 지역의 경우 현대에는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과거에는 토지가 매우 비옥하고 사방이 탁 트여있는 지리적 특성상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간 지역이다.[4]

현대 이 지역은 이라크, 시리아, 튀르키예, 이란이 지배하고 있다. 이 일대를 차지한 이라크와 시리아는 격동의 현대사를 보내다가 1970년대 석유로 인해 잘 나갈 듯 싶었지만 1980년대 이후로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 전쟁, 시리아 내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 등으로 지속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사이비 종파들로 구성된 테러조직들에 의한 테러가 자주 벌어져서 여러모로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거기다가 미국과의 전쟁 당시 이라크 박물관 등의 귀중한 유물들이 약탈되었었고 IS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서 깊은 유적과 유물들을 파괴하거나 암시장에 팔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아시리아의 중심지였던 북부 이라크 지역이 ISIS의 거점 지역이었기에 아수르, 님루드, 니네베 등의 아시리아 유적들이 피해를 많이 입은 편이다.

한편, ISIS들이 토벌되어 극소수의 잔당들로 증발되었으나, 여전히 불안정된 사회, 부정부패로 인해 2019년 10월 이후 본격적인 이라크 반정부 시위로 잠깐의 혼란이 유지되었지만 동시에 조금씩 개선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현대에도 수메르가 위치했던 이라크의 남부 지역은 습지가 남아있으며,[5] 중동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생활 양식인 수상가옥을 짓고 생활하는 습지 아랍인이 남아 있다. 이 습지는 인근의 수메르 도시 유적들과 함께 이라크 남부의 아흐와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라크와 시리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세계사 과목에서 고대 이집트와 더불어서 반드시 언급되는 문명이기도 하며, 상술하다시피 기독교와 이슬람에서도 빈번히 언급된다. 하지만, 이집트와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현대에는 이라크라는 외국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다보니,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라크와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도 이라크 하면 전쟁부터 떠오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2. 명칭

그리스어로 '강들의 사이'라는 뜻인 'Μεσοποταμία'[6]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중간'을 의미하는 '메소스(μέσος)'와 '강'을 의미하는 '포타무스(ποταμός)'를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인 것. 아랍어로는 بلاد الرافدين، بین النهرین (bilād ar-rāfidayn) 페르시아어로는 میان‌رودان (miyān rudān)이라고 한다.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도 뜻은 같다.

이슬람권에서는 이 지역을 이라크[7]라고 부른다. 참고로 시리아 서부,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 등의 지역은 레반트라고 부른다. 아카드어로는 '비리툼', 혹은 '비리트 나림'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칭하는 단어다.

기원후 2세기경에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일대라고 하면 유프라테스 동편, 시리아 북부까지를 이르는 단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 넓어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 일대 전체를 이르는 단어로 확장되었는데, 그래서 시리아뿐만 아니라 이라크 전체와 튀르키예 남동부까지를 이르게 되었다. 가끔씩 메소포타미아의 개념을 넓게 잡았을 때에는 유프라테스 서부의 스텝 지대와 자그로스 산맥 서부 일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상부 메소포타미아, 하부 메소포타미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자지라'라고도 부르는데,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사이 지방으로 강들의 수원지로부터 바그다드 일대까지를 의미한다.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바그다드부터 페르시아 만 일대까지를 뜻한다. 종종 쿠웨이트와 서부 이란 일대까지 이 메소포타미아 하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3. 지리

파일:수메르의_주요_도시국가들.png
참고로 아카드의 위치는 추정이며 지도에 표시된 도시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일대 전부를 가리키는데,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수원지에서부터 바그다드까지의 지방은 상부 메소포타미아,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까지는 하부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른다. 상부 메소포타미아가 북쪽에 있고 하부 메소포타미아가 남쪽에 있다. 먼저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길이 400km에 달하는 상당히 거대한 규모의 고원 지대다. 그나마 가끔가끔씩 석회암 암석들이 돌출돼서 솟아오른 것, 그리고 자그로스 산맥 일대의 소산맥들이 조금씩 내려온 것만 제외하면 고원 중에서도 꽤나 평평한 지방이다.

상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주요 도시들을 보자면, 분홍색으로 표시된 아슈르니네베, 님루드, 두르샤루킨처럼 아시리아의 도시들이 보인다.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보면 평원 북부의 물이 풍부한 고원에는 낮은 석회암 구릉들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다. 하지만 가끔씩은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북쪽과 북동쪽에는 자그로스 산맥의 주줄기가 높게 서있어서 아르메니아쿠르디스탄 일대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전체적인 지형만 보면 썩 괜찮은 고원과 나무들이 많은 계곡들이 그득그득한,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좋은 조건이다. 참고로 이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생산량도 높고 땅도 살기 좋은 덕에 아시리아 제국의 주요 거점이었다. 애초에 '아시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 '아슈르'에서 따온 것.

상부 메소포타미아가 약간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는 고원이라면 반대로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풍요로운 대평원 그자체였다. 두 개의 거대한 강들이 흘러 물을 공급했으며 거대한 규모의 평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것이다. 현대에야 사막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지만 당대에는 정말 식량 생산량이 높은 축복받은 지방이었다. 문명이 가장 먼저 등장한 우바이드와 우루크, 우르 등은 강 하류에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신과 라르사 같은 다른 대도시들도 옹기종기 근처에 분홍색으로 있다. 이 좁은 곳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문명을 꽃피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북서부의 대표적인 대도시 마리는 녹색으로 표시된 모습. 메소포타미아 도시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바빌론은 우루크나 우르에 비하면 약간 더 북쪽에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담으로 푸른색으로 표시된 고대의 항구도시 '에리두'는 문화의 신 에아를 숭배하는 신성한 도시였다. 당시에는 항구였지만 6,000년의 시간 동안 연간 약 35m의 충적평야가 더 생겨났기에 현대에는 바다로부터 약 210km 떨어져있는 상태다. 현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당대에는 지어지지도 않았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도 당연히 없었다. 그나마 페르시아의 수도 중 하나였던 수사이라크의 북부 대도시 모술은 그 당시에도 있었다. 모술니네베를 포함하고 있는 도시이며 아시리아 시대에도 왕궁이 있던 유서깊은 도시였다. 다만 테헤란우루크우르에 비하면 제대로 된 도시가 들어서려면 한참 시간이 흘러야 했다.

4. 연표

선사 시대 (BC 6500 ~ BC 4000)[8]
할라프 문화권: 현대의 시리아 동부 및 니네베 주 지역 (BC 6100 ~ BC 5100)
하수나 문화권: 현대의 니네베 주 및 아르빌 주 지역 (BC 6000)
사마라 문화권: 현대의 살라흐 앗딘 주 및 아르빌 주 지역 (BC 5500 ~ BC 4800)
우바이드 문화권: 현대의 이라크 남부 대부분.[9] (BC 6500 ~ BC 3800)
우루크 시대 : (BC 4000 ~ BC 3100)
젬데트 나스르 시대: (BC 3100 ~ BC 2900)
초기 왕조 시대[10]: (BC 2900 ~ BC 2350)
아카드: (BC 2350 ~ BC 2170)
구티: (BC 2199 ~ BC 2119)
우르 제3왕조: (BC 2112 ~ BC 2004)
이신-라르사 시대 : (BC 2025 ~ BC 1763)
고아시리아 : (BC 2025 ~ BC 1364)
고바빌로니아 : (BC 1894 ~ BC 1595)
중아시리아 : (BC 1363 ~ BC 912)
카시트 왕조[11] : (BC 1531 ~ BC 1155)
미탄니 : (BC 1550 ~ BC 1260)
신아시리아 : (BC 911 ~ BC 609)
신바빌로니아 : (BC 620 ~ BC 539)

5.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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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도시 국가 패권경쟁 아카드 제국 제국 해체 / 구티 족 수메르 르네상스
N 신석기 청동기 니네베 / 아르벨 / 앗수르 아카드 제국 네와르 / 우르케쉬 / 안다리크 수메르 제국
H 하란 에블라 하란 / 아붐 / 안다리크 하란 / 투툴 / 사가르툼
E 에블라 마리 아카드 제국 에블라 / 우그리트
M 마리 아카드 마리 우르 남무 제국
L 수메르 문명 우바이드 기 - 에리두 우루크 기 - 왕조 출현 라피쿰 키시 아카드 - 사르곤 아카드
A 우루크 우르 A A 구티 왕조 구티 우르 제3왕조
K 라가쉬 움마 우루크 우루크 구티 족
U 우르 우루크
G 라가쉬
L 라가쉬 라가쉬
H 금석병용기 수사 / 엘람 제1왕조 고대 엘람(아완 / 슈스타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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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N 고대 아시리아 왕국 에쉬누나 <colbgcolor=#003153> <colbgcolor=#003153> 시리아 바빌로니아 제국 - 함무라비 대왕 아시리아
E 에쉬누나 <colbgcolor=#20b2aa> 데르 에칼라툼 둘 - 카틀리무
M 제국 M 마리 시리아 마리 바빌로니아 제국 M 카시트/테르카
A 엘람 <colbgcolor=#8b0000>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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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아시리아 제국 암흑기 신 아시리아 제국(~ BC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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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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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바빌로니아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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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
이란 제국
사산 왕조 부와이흐 왕조
| N: 북부 니네베 | B: 중부 바빌론 | I: 중남부 이신 |
| U: 남부 수메르(우르·우루크·라가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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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기원전 1만 년 전보다도 일찍 신석기가 시작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따로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A'와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B'로 구분해서 부른다.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A, 약칭 PPNA(Pre-Pottery Neolithic A)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기원전 8,800년 전까지,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B, 약칭 PPNB(Pre-Pottery Neolithic B)는 기원전 8,800년 전부터 기원전 6,500년 전까지를 가리킨다.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A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농경의 시작과 독특한 장례 풍습의 발달이다. 이전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마침내 한곳에 정착해 문명의 가장 밑바탕을 일구어내기 시작했던 것. 사람들은 자갈과 말린 흙벽돌을 이용해 제법 큼직한 건물들을 쌓았고 작은 화로를 만들어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야생 이나 보리들이 이때 처음으로 곡물화되며 점차 재배되었고 잉여 곡물은 창고에 쌓아놓기도 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보이지만 농경의 시작은 곧 정주 생활의 기초라는 점에서 인류사적으로도 의의가 매우 크다.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B는 기원전 8,800년경부터 시작된 걸로 친다. 앞선 신석기 시대 A와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가축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것.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A까지만 해도 아직 사냥과 농경을 번갈아가며 수렵채집인들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B에 들어서면서부터 완전한 농경 체제가 들어선다. 레반트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가옥의 구조가 팔각형이나 원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고, 건물에 점토나 회칠을 통해 벽을 매끈하게 만드는 등 여러 혁신이 일어났다. 이와 함께 불을 다루는 능력도 급속도로 발전했는데, 이 불을 다루는 능력과 회칠 기술이 합쳐지며 마침내 신석기 시대 B 후기에는 도자기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 탄생하게 된다.[12]

5.2. 도시국가의 발전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B 후기에 도자기의 등장과 함께 우후죽순 수많은 문화권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부분의 문화권은 현대의 이라크에서 탄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문화권들 중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의 할라프 문화권, 북부의 하수나 문화권, 중부의 사마라 문화권, 남부의 우바이드 문화권 등이 있다.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컸던 문화권이 바로 남부의 우바이드 문화권이다. 대략 기원전 6,500년부터 기원전 3,800년까지 번성했는데, 이들이 곧 그 유명한 수메르의 기원이 된다. 우바이드 문화권은 점차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더니 북부의 할라프 문화권과 합쳐지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우바이드 문화권의 시대에는 점차 사회계층이 세분화되었으며[13] 권력층들을 위한 대형 건축물들이 축조되는 등 진정한 문명의 모습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문화권들의 성장, 교류에 힘입어 기원전 4,000년경에 드디어 수메르 문명이라고도 하는 '우루크 시대'가 열린다. '우루크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남부의 대도시 우루크를 중심으로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 우루크 외에도 여러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긴 했지만 우루크가 개중에서 가장 강대하고 규모도 컸다. 전성기 시절의 우루크는 그 면적이 250~300 헥타르에 달했고 인구는 25,000에서 5만 명 사이를 달렸다. 현대 우루크 유적지에는 신에게 바쳐진 거대한 지구라트 유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곧 우루크가 막대한 인력을 한꺼번에 동원 가능한 힘이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기술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전에는 손으로 고랑을 파고 씨를 뿌렸다면 쟁기가 발명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폭증했고, 야생 나귀가 당나귀로 길들여졌으며[14] 물레가 발명됨과 동시에 초기적인 야금술이 등장했다.

우루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최초의 도시국가들이 등장했다는 것에 있다. 농업의 집약화와 교류 촉진, 인구 밀도 급증과 함께 거대한 도시들이 세워지며 마침내 체계적인 틀을 갖춘 국가들이 탄생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기본적인 문자와[15] 글쓰기가 발명되어 회계사와 서기들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이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행정체계가 등장했다. 글과 문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방대한 양의 정보처리가 가능해졌고 이는 도시국가의 출현에 필수적이었다. 그 외에도 건축 분야에서도 테라코타와 역청의 사용이 빈번해지는 등 여러 혁신이 일어났고, 바퀴가 이 시기 즈음에 발명되지 않았을까하는 가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16]

우루크 시대 이후에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젬데트 나스르 시대'[17]를 거쳐 '초기 왕조 시대'로 넘어간다. 초기 왕조 시대는 기원전 2900년부터 기원전 2350년까지 이어진다. 여전히 메소포타미아의 핵심 패권은 우루크 시대부터 내려온 수메르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수많은 도시들을 세우며 서로 경쟁하고 난립했는데 대표적인 대도시들은 우루크, 키쉬, 우르, 니푸르, 라가시 등이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유명한 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시의 추정 활동 시기도 바로 이 시기다. 이 시대의 역사는 유난히 도시들마다 기록도 다르고 남은 것도 많지 않아 베일 속에 싸인 부분이 많다. 그래도 그나마 알려진 것만 추려보면 우루크의 엔샤쿠샨나 왕이 1번, 라가시의 에안나툼 왕이 1번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했다고 한다.[18] 토착 수메르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수메르를 통일한 인물은 움마루갈자게시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본진이었던 움마에서 우루크로 도성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드사르곤이 루갈자게시 왕을 물리치고 수메르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을 세우면서 아카드의 시대가 시작된다.

5.3. 통일 제국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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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 대왕의 두상
아카드 제국은 세계 최초의 제국이었다.[19] 기원전 2334년 즉위한 사르곤 대왕 덕에 페르시아 만부터 지중해까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했고 보통 기원전 2334년부터 기원전 2154년까지를 아카드 시기라고 본다. 셈어파의 아카드어가 공용어로 쓰였지만 행정언어로는 여전히 기존의 수메르어가 쓰였고 거대한 댐과 저수지들을 짓기도 했다. 아카드 제국은 나람신 대왕의 재위기에 그 국력의 절정을 찍었고 이때는 왕이 곧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대했다. 하지만 나람신 대왕 사후 아카드도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원한 유목민족 구티족이 쳐들어와 제국을 헤집어놓았고 결국 아카드는 180여 년만인 기원전 2154년 경에 멸망한다.

구티족이 아카드를 꺾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차지해 구티 왕조를 세웠다지만 태생이 유목민인 탓에 행정 능력이 전무했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확고히 다스리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기록도 많이 남기지 않아서 구티족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구티족들에게 피해를 입은 기존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들을 야만인 수준으로 묘사했다. 구티족이 남부 지방을 정복했지만 라가쉬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도시국가들은 이들에게 복속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결국 구티족의 억압에 지친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우루크의 왕 우투헤갈을 중심으로 구티 왕조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구티 왕조가 떠나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패권을 거머쥐기 위하여 다시 각축전을 벌이다가, 결국 우르의 우르남무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우르 제3왕조를 건립하며 수메르인들의 나라가 다시 세워진다.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인들이 세운 마지막 왕조였다. 메소포타미아를 통합한 우르남무는 우르남무 법전을 제정하고[20] 달의 신 난나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우르지구라트를 건립했다. 우르 제3왕조는 우르남무의 후계자 슐기 국왕 때 최전성기를 찍었다. 국가를 중앙집권화시키려 노력했으며 행정 절차, 표준 문서, 조세 제도, 국가 달력 등 수많은 것들을 일원화하는 등 다양한 업적들을 남겼던 것. 엘람 왕국을 공격해 쿠틱인슈시나크 왕을 쓰러뜨렸으며 인근 일대를 편입시키기까지도 했다. 하지만 슐기 왕 사후 들어서는 가뭄과 반란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우르 제3왕조 역시 쇠퇴했고, 나중에 엘람인들에게 수도를 점령당하는 등 망하기 직전까지도 갔다. 수메르인들은 엘람인들을 몰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다시 지역 패권을 되찾지는 못했다. 수메르인들이 휘청이는 동안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세력을 키워갔고, 결국에는 약해진 수메르인들을 죄다 복속시키고 고바빌로니아를 건국하게 된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방의 아시리아다. 아시리아는 시대에 따라서 고아시리아-중아시리아-신아시리아로 구분하는데, 이때의 아시리아는 고아시리아로 부른다. 고아시리아 시대까지만 해도 아시리아인들은 별 볼일 없는 상인들에 불과했다. 최초의 왕은 푸주르-아슈르 1세라고 알려졌으며 이때 우르 제3왕조에게서 독립해 떨어져 나온 걸로 추정된다. 그 후에 여러 왕들이 연달아 즉위했지만 이때는 고아시리아가 약소국에 불과했기에 딱히 주목할만한 업적이나 특기를 남기진 못했다. 그나마 일루슈마 왕 시절에 힘을 길러 이신 같은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을 공격하고 아나톨리아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굳이 고아시리아를 설명하는 이유는 고아시리아가 나중에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합한 고바빌로니아와 끝없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한 직후부터 고바빌로니아가 세워질 때까지의 시대를 이신-라르사 시대라고 부른다. 두 대도시인 이신과 라르사가 서로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르 제3왕조의 마지막 왕 이비-신의 신하 이쉬비-에라는 반역을 일으키고 대도시 이신에서 새 왕조를 세웠다. 이쉬비-에라는 힘을 키워 역으로 우르 제3왕조를 꺾고 일대 패권을 쥐는 데 성공했는데, 혈연적 관계는 없었지만 사실상 우르 제3왕조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정통성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신은 핵심 대도시인 우르와 우루크, 종교 중심지 니푸르 등을 장악하고 100여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다. 그러던 중 라르사의 총독 군구눔이 이신에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갔다. 라르사가 페르시아 만의 핵심 대도시에 교역 중심지였던 터라 라르사의 반란은 이신에게 치명타였고, 라르사는 계속 이신의 목줄을 죄면서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노렸다.

라르사의 독립으로 기존 패권국 이신이 망해갔다지만 라르사도 특별히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라르사는 그 최전성기에도 고작 10~15개 정도의 도시국가들 밖에 거느리지 못했는데 기존 패권국들은 보통 수 백여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를 거느렸던 걸 생각해보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이신과 라르사는 서로 제살 깎아먹기 식으로 끝없는 경쟁구도를 펼쳤지만 그 누구도 한쪽을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혜성처럼 등장한 국가가 그 유명한 함무라비 대왕과 고바빌로니아였다.

5.4.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고(古)바빌로니아라는 국가 자체는 아모리인 수무아붐이 기원전 1894년에 세웠다. 하지만 왕좌 주인이 4번 바뀔때까지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는 도시는 아니었고 오히려 기존의 우르나 우루크에 치이고 사는 약소국에 가까웠다. 고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할 수 있도록 국력을 키워준 인물이 고바빌로니아의 6대 왕인 함무라비 대왕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한 함무라비는 기원전 1761년 북서쪽 핵심 도시 마리를 멸망시키며 옛 우르 제3왕조의 영토를 모두 회복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닿을 정도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특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조항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사후에도 150여 년을 더 갔지만 국력은 급속도로 약해져 이전의 약소국으로 금방 쪼그라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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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과 그의 궁정
고바빌로니아는 히타이트무르실리 1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아모리인들이 세운 고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이후에도 바빌론 지방에는 카시트 왕조를 포함한 여러 왕조들 즉, 바빌론 제2왕조에서 제10왕조까지 들어섰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고아시리아의 경우,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왕조가 뒤집히고 아모리인 샴쉬-아다드 1세가 즉위하며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샴쉬-아다드 1세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지역 패권국을 이루는 데 성공했고 그 후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도 함무라비 시절 최전성기의 고바빌로니아를 이길 수는 없었고, 잠시 동안은 고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살다가 함무라비 사후 바빌로니아가 약화되자 그제야 독립한다. 다만 고아시리아는 재독립 후에도 내부의 민족 갈등과 반란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암흑기를 맞았고 재전성기를 맞기 위해서는 상당히 더 기다려야만 했다.

함무라비 왕조가 망하고 들어선 카시트 왕조의 바빌로니아 역시 기존의 속국 고아시리아를 병합하려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바빌로니아가 고아시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평화를 맺으면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남쪽 바빌로니아, 북쪽 고아시리아가 차지하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렇게 고아시리아는 북부 지방을 다스리며 반짝 뜨는 듯 했지만... 신생 강대국 미탄니가 등장하며 기원전 1430년에 병합되어버리고야 만다. 고아시리아는 이후 70여 년 넘게 미탄니의 속국으로 살다가, 히타이트의 또다른 왕 수필룰리우마 1세가 미탄니를 공격하는 절호의 기회를 틈타 독립했다. 시리아 도시국가들을 놓고 미탄니와 히타이트가 다투는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한 것.[21] 이 전쟁에서 미탄니가 대패해 내분으로 쪼개지며 약화되자 고아시리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시기부터 기원전 912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기 전까지 중간기 시대의 아시리아를 따로 중아시리아라고 구분한다.[22]

이 시기에 일어난 대격변이 있었으니, 바로 청동기 시대의 붕괴다. 정체불명의 민족집단 바다 민족이 쳐들어와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등 기존의 강대국들을 끝장낸 사건이다. 바다 민족은 바다와 인접한 국가와 도시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약탈했고 이로 인해 웬만한 국가들은 싸그리 쓸려나갔다. 그나마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중아시리아는 살아남았지만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더이상 약탈할 게 없어지자 바다 민족은 등장했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고, 이후 새로운 민족들이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연달아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민족들이 페니키아인,[23] 유대인, 아람인 등이다.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아람인들은 시리아 지방에 자리잡고 바빌로니아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바빌로니아는 안그래도 동쪽의 라이벌 엘람과 전통적인 강대국 중아시리아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아람인들마저 나타나자 견딜 겨를이 없었고, 결국 기원전 1157년에는 카시트인들의 바빌로니아가 무너지고 엘람인들이 바빌론을 잠시나마 정복할 정도였다.[24] 주변의 압박을 받는 건 중아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아시리아는 전통적인 군사강국인 덕에 이를 버텨낼 역량이 충분했다. 특히 기원전 911년 경 명군 아다드 니라리 2세가 등장하면서 아시리아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다. 아다드 니라리 2세는 아람인들을 몰아내고 바빌로니아를 격퇴했으며, 아시리아를 메소포타미아 북서부를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이 시기의 아시리아, 곧 최전성기의 아시리아를 신아시리아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아시리아의 전성기는 아다드 니라리 2세 후에도 계속된다. 기원전 883년 경 잔혹한 성품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란을 일으킨 아람인들을 진압, 모조리 죽여버린 다음 산채로 가죽을 벗겨버리는 극악의 공포정치를 구사하며 탄압 정책을 펼쳤다.[25] 강력한 군주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죽자 신아시리아도 잠시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북쪽에서는 '우라르투 왕국'이 성장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신아시리아가 아니었다. 기원전 745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한 후 신아시리아는 시리아 북서부,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바빌론마저도 점령하며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26] 그의 뒤를 이은 사르곤 2세 역시 우라르투 왕국을 끝장냈으며 반란의 기미가 보이던 바빌론을 다시 한번 때려눕히는 데까지도 성공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인근 엘람 왕국의 도움을 받아 바빌론을 되찾기 위해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에서 하도 시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 데다가 제 아들마저도 반란 진압 도중 전사하자 질려버린 신아시리아의 센나케립 왕은 엄청난 초강수를 꺼내든다. 바로 바빌론을 완벽히 초토화시켜버린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반란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바빌로니아인들의 적개심을 불태우기만 했고 이때 실시한 혹독한 진압 정책은 훗날 신아시리아의 멸망 원인이 된다. 센나케립 왕은 유다 왕국을 공격해 히스기야 왕을 사로잡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돈은 아예 이집트를 공격해 기존의 파라오 타하르카를 쫒아내기도 했으며 그 후계자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에 이어 바빌론, 엘람까지도 정복하며 신아시리아 제국의 절정기를 달렸다. 또한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인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을 건립하여 방대한 양의 기록물을 수집하고 남겼다. 하지만 엘람이 멸망한 이후에도 그자리에 메디아페르시아 등 또 다른 세력들이 들어섰고 아슈르바니팔 이후 신아시리아는 후계자 분쟁으로 정세가 혼란스러워지고 계속해서 주변 세력과 대치해야 했는데다 끝없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점점 약해진다.

5.5. 신바빌로니아의 전성기와 멸망

신아시리아가 지나치게 혹독한 탄압으로 민심을 잃어 약해지자 남부의 칼데아인 출신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626년 고토 바빌론에 새 왕국을 세우고 100여년 만에 아시리아를 몰아내니 이것이 바로 신바빌로니아다. 신바빌로니아는 이란 고원에 생겨난 강대국 메디아와 손을 잡고 신아시리아를 공략했다. 이미 망조가 든 신아시리아는 무력하게 무너졌고, 기존 패권국 신아시리아를 무너뜨린 신바빌로니아는 그야말로 메소포타미아의 유일무이한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에 급성장했다. 그는 메디아와의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비 아미티스에게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지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레반트유다 왕국을 정벌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끌고 들어왔는데 이 과정이 그 유명한 바빌론 유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의 신바빌로니아는 명실상부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 엄청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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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왕궁의 복원도 바빌론을 흐르는 유프라테스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단순히 정복 활동 뿐만 아니라 문화나 건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43년이라는 오랜 재위기간 동안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물론 이슈타르의 문, 바빌론의 성벽, '행진의 거리', 에테멘앙키 같은 각종 지구라트 등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지었던 것.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그 웅장한 모습을 보고 바벨탑의 전설을 생각해냈을 정도였다. 이때의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사는 최대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그 문화적 영향력도 현대까지 매우 짙게 남아있어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하면 생각나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이 신바빌로니아의 것들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번영하던 신바빌로니아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쇠퇴했다. 왕들이 허구한날 갈아치워지고 그나마 아시리아계 귀족인 나보니두스가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내부 불안이 상당했다. 나보니두스는 기존의 마르두크 신앙 대신 자신이 믿는 난나 신앙을 강화했고,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아들 벨사자르에게 국정을 맡기고 10년 동안 대마 지역으로[27] 원정을 떠났다. 이때 자신의 아들인 벨사자르에게 왕권을 위임하고 대리를 맡기고 있었는데 바빌로니아의 불행은 저멀리 페르시아에서 키루스 2세라는 희대의 괴물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 키루스 2세는 종주국이었던 메디아를 역으로 무너뜨린 다음 엘람과 구티인, 부유한 리디아 왕국까지 집어삼키며 괴물 같은 전투력을 자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보니두스 역시 심각하게 여겨 직접 키루스 2세를 막으려 진군했지만 오피스 전투에서 아주 허망하게 패하며 완전히 몰락했다.

이렇게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30년도 못가서 망해버렸다. 바빌론을 점령한 키루스 2세는 특유의 관용정책을 펼쳐 기존의 신앙과 문화를 그대로 용인했고 이는 바빌론 사람들의 불만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키루스 2세가 창시한 아케메네스 왕조가 들어서 몇 백여년 가까이 바빌론과 인근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게 된다. 이로써 셈 계통 민족들이 주도하는 메소포타미아 국가는 막을 내렸고 이때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싸운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게 되었다가, 파르티아 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파르티아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한 크테시폰을 수도로 삼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번성하게 되며 파르티아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로마 제국의 각축장이 된다. 사산 왕조는 남부와 중부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점령했다. 다만 로마 제국은 얼마 가지 못해 사산 왕조에게 빼앗겼고 사산 왕조가 망한 후에는 이슬람의 터전이 되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아바스 왕조 아래에서 화려하게 번영했다. 하지만 기원후 651년 경 이슬람 전래 이후의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사실상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큰 연속성이 없다고 보며, 이걸 넓은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완전한 종결로 본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흔적도 없이 망한것은 아니고, 이란과 이집트, 그리스로마 문화와 융합이 되면서 이슬람 문명으로 융합된것이다.

6.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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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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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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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치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정치구조의 가장 독특한 점은 수많은 도시국가들의 난립이라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와 가장 비교되는 것이 고대 이집트다. 지도를 보면 바로 감이 오겠지만 이집트는 북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동쪽으로는 좁은 골란 고원이 가로막고 있으며 남쪽에는 위협이 될만한 강대하고 조직된 세력이 딱히 없다. 즉 완전히 고립된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자기들만의 세계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는게 가능했고 왕국이 최소 몇 백여년은 이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메소포타미아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탁 트인 평야 지대라 어디에서나 적들이 쳐들어왔고 외부의 적이 없어도 자기들끼리 죽을때까지 치고받고 싸웠다. 그래서 도시국가들이 수없이 나고 졌으며 여러 세력들이 싸우는 분투장이 되어버렸다. 하도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야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머리구조 자체가 '내가 살아있을 때 잘먹고 잘살아야한다'라는 현세적인 인식이 강했다고 한다. 내세의 평안한 삶을 바랐던 고대 이집트인과는 천지차이. 뒷 문단에도 언급하겠지만 점성술의 발상지가 이 메소포타미아다. 본래 점이라는 것이 내세의 평안보다는 현세 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와 권력, 명예를 예측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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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님루드의 알현실 상상화.
왕들은 위대한 엔릴, 혹은 도시 수호신의 후계자나 자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호루스의 현신 그자체로 여겨졌던 파라오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들의 '후계'에 머물렀을 뿐이고 절대 신까지 추앙받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왕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왕', '대왕'으로 높여불렀고 일부는 자신이 백성들을 이끄는 목자와 같다고 생각해 양치기라고 일컫기도 했다. 왕은 곧 정치지도자이자 최고 종교 지도자였으며 최고 군사령관이었다. 정교분리 따위는 아직 그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왕은 매 주기마다 정기적으로 제사를 집전했고 전쟁에 나갈 때는 스스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존 부족사회와 가장 달랐던 것은 성문법의 존재였다. 족장의 말이 곧 법이었고 제대로 된 규칙이 드물었던 단계에서 체계적인 법률의 단계로 진화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함무라비 법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가장 오래된 법전은 우르 제3왕조 시기에 만들어진 우르남무 법전이다.[28] 어쨌든 이 함무라비 법전의 의의는 개별 도시법들을 보편적이고 통일된 왕국법으로 대체했다는 것. 명시된 여성 인권은 전에 비해 소폭 줄어들었고 처벌의 폭력성이 증가하는 등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도 많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법률 조항 역시 존재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가장 유명하다. 용어로는 '동해 보복의 원칙'이라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마치 무시무시하고 엄벌주의에 입각한 대단히 딱딱한 법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이 법전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이 잔인해 보이는 성문법이 나온 시기는 인류가 유목이나 수렵과 같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사소한 실수만으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고 큰 싸움으로 번져 서로 죽이는 일도 흔히 일어났다. 이런 경우 서로의 악감정이 쌓이고 쌓여 결국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 집단 자체가 붕괴해버린다. 이걸 막기 위해 성문법을 정해 보복의 한도를 설정했던 것이다. 즉 '상대방이 내 팔을 부러뜨렸다면 똑같이 팔을 부러뜨려 복수를 해라'가 아니라 '똑같이 상대방 팔까지만 부러뜨릴 수 있고 그 이상 나가 다리까지 전부 부러뜨리거나, 죽일 수는 없다'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의의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형에 처할 때도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화형이나 거열형, 능지형처럼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았다. 현대의 법도 자신이 지은 죄보다 과도하게 벌을 받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함무라비 법전의 골자는 현대에도 유효하다.[29] 이 동해보복의 기준을 세우는 더 강력한 권위의 중재자를 자처한 것이 바로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이며 이것이 공권력의 시작, 그리고 형사법과 죄형법정주의, 법치주의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의 원칙에서 더 나아가 동해보복이 적용하기 힘든 상황에 대해서도 계급에 따라 대체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만들었다면 평민의 눈을 빼버리지만, 귀족이 평민의 눈을 빠지게 만들었다면 은 1미나만 지불하면 되었다. 노예는 재산 취급이므로 노예에 대한 폭행이나 상해는 돈으로 때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의료사고로 환자가 불구가 되면 의사의 손을 자르라고 되어 있지만 환자가 노예인 경우는 돈으로 때우도록 되어 있다. 반대로 노예가 저지른 범죄는 가중처벌 될 수 있었다. 계급구조 자체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불합리해 보이지만 상위계급의 행패와 폭력이 반쯤 용인되고 당연시되던 고대 시대에는 이 것이 최선이었다.

10.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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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계중심적인 사회로 변모했다. 수렵채집생활까지만 해도 여성과 남성의 권리가 어느 정도는 동등하게 인정되었으나,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접어들고 전쟁도 많아지자 신체적 근력이 강한 남성이 주도권을 얻었던 것이다. 수메르 문명 초기에는 남성 신들을 포함해 신들을 모시는 최고 사제에 여자들이 올라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집단을 주도하는 장로회의가 남녀 동수 비슷비슷하게 맞추어져 있는 경우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도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여성의 권리는 날로 하락했고 반대로 남성 주도의 질서가 새롭게 짜였다.

남자가 우월하게 대접받은 것은 신분고하가 따로 없었다. 서기, 신관, 행정관 등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건 고위층의 아들과 남자 자제들 뿐이었다. 여자들은 제아무리 능력이 있고 신분이 높아도 남자들만큼 사회 지도계급에 진출한다는 것이 선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중산층이나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데리고 나가 무역과 상업을 배우게 하고 제 가업을 잇도록 만들었지만 딸들은 집에 갇힌 채로 어머니에게 가사 교육을 받았다. 요리, 바느질, 아니면 더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게 전부였다. 그나마 밖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를 쫒고 곡물을 까부르는 정도. 다만 그 시대에는 걸맞지 않게 결혼 관련해서는 나름 권리가 동등했다. 여성은 스스로 재산 소유가 가능했고 원한다면 이혼도 가능했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부계중심사회일 뿐만 아니라 계급주의적인 사회였다. 수렵채집인들의 단계에서는 계급이랄게 딱히 없었지만 농경 사회에서 잉여생산물의 존재, 그리고 부의 편중이 일어나며 본격적인 계급 분화가 갈라진 것이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왕과 왕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들의 후계로 대접받으며 매우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 아래에는 신관 계급이었다. 사실상의 귀족이나 다름없었고 신전을 관리했다. 신관 계급은 신전에서 신을 모실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었고 당연히 대우는 엄청나게 좋았다. 왕과 왕족들이 대신관을 겸했던 것을 생각해보면[30] 사실상 왕족 계급이나 신관 계급이 하나였다고 보아도 좋다.

그 아래는 정부 관리와 서기들이었다. 이들은 행정을 담당했고 실질적인 업무를 처리했다.[31] 쐐기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기에 웬만한 노력이 아니라면 올라가기도 힘든 위치였다. 서기직과 행정관리직은 물려주는게 기본이었고 기본적으로 중산층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다. 물론 신관들과는 비교할 바도 못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사는 데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참고로 신관과 왕족들은 서기 업무를 겸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고대 서기들의 70%는 왕족과 귀족 출신이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왕족의 기본 소양이었다고 한다.

특히 서기들은 어린 나이부터 '에-두바'라고 불리는 학교를 다니며 문자와 업무를 배웠다. 서기인 부모가 자식들을 서기로 키우고 싶어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두바에 자식을 진학시키려면 막대한 학비를 지불하는 것은 물론, 교장과 선생들에게 뇌물이나 뒷돈을 찔러주기까지 해야만 했다. 선생에게 뒷돈을 주지 않는다면 무자비하게 학대하거나 구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울며 겨자먹기라도 돈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어려운 쐐기문자는 물론 과학, 수학도 배우는 서기를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서기 자격을 얻고만 나면 웬만해서 굶어죽을 일은 없었고 잘만하면 왕궁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32] 결과적으로 부모들은 자식을 서기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아래는 한 서기 아버지가 서기 학교를 다니는 아들더러 왜 열심히 공부하지 않느냐고 훈계하는 내용이다.
"어디에 갔다 왔느냐?"
"아무 데도 안 갔습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왜 수업이 끝나면 으로 오지 않고 밖을 배회하느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거라.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땔감을 잘라오게 하였느냐?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쟁기질을 하게 하고 나를 부양하라고 하였느냐?
도대체 왜 글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자식이 아비의 직업을 물려받는 것은 엔릴 신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운명이다.
글을 열심히 배워야 서기관의 직업을 물려받을 수 있다.
모름지기 모든 기예 중 최고의 기예는 글을 아는 것이다.
글을 알아야만 지식을 받고 지식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너의 형을 본받고 너의 동생을 본받아라."
기원전 1700년 경 수메르 점토판[33]
서기와 행정 관료 아래가 상인들이었다. 이집트, 인도, 그리스, 아나톨리아 등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상품들을 생산했다. 도시를 통과할 때마다 세금을 바쳤고 정부 관리들의 든든한 돈줄이기도 했다. 다만 공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사유재산 보호가 별로 지켜지지 않았던 고대 특성상 상인들의 위치가 생각만큼 높지는 못했다.

상인 아래로 가면 본격적으로 비참한 삶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농부들과 노예들이 여기에 쭉 깔려있었다. 그나마 평민 농부들은 사정이 나았다. 이들은 지주와 신전의 땅을 경작하고 일정 부분 세금을 납부했다. 농부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죽을둥살둥 농사만 지었다. 대부분의 세금도 여기서 걷혔고 수로, 운하 건설도 이들이 담당했다. 제일 최악은 사회 밑바닥의 노예 계급이었다. 주로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끌려온 사람들로, 귀족이나 신전에 소속되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이 농부들이 피땀흘려 수확한 곡물들 대부분은 엘리트층에게 빼앗겼고 농부들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다. 그리고 그 엘리트층들이 빼앗아간 곡물로 거대한 지구라트와 신전을 지었던 것이다.

10.1. 축제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농업 기반 사회였고 다산과 풍요는 곧 최고의 미덕이었다. 사람들은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알아야했고 이러한 날짜들을 공휴일과 축제로 기념했다. 일단 축제가 열릴 날짜를 정하려면 달력을 가장 먼저 확립해야했다. 그래서 초기 바빌로니아 달력은 의 위상변화를 달력으로 사용했다. 달의 차고 기울기를 통해서 날짜를 세었던 것. 1달에 6일씩 휴일을 두었다. 3일은 달을 기리는 축제였고 나머지 3일은 편히 쉬는 공휴일이었다. 달보다 더 큰 단위의 '계절'도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2개의 계절이 있었는데, 여름과 겨울만 있었다. 당시 '여름'이라고 불리던 시기는 현대의 봄과 여름을 말했고 '겨울'이라고 불리던 시기는 가을과 겨울이었다.

농사일과 관련된 가장 큰 두 축제가 있었으니 초여름의 새해 축제와 가을의 추수감사절, 혹은 한국의 추석과도 같은 수확 축제였다. 축제 때에는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거나 큰 장을 열어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특히 이때 모닥불에 오래된 곡물이나 썩은 야채들을 태우면서 새로운 작물과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수많은 곡예사들을 초청해서 공연을 벌이는 경우도 많아 눈요기할 거리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으로도 행사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경우 최고신 마르두크의 신상을 꺼내서 도시 한바퀴를 빙 도는 연례행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신이 도시의 안녕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르두크 뿐만 아니라 신전 깊은 곳에 고이 모셔져 있던 신상들을 꺼내서 퍼레이드를 벌였다.

2개의 대축제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떠들썩하게 보낸 축제는 신년 축제 '아키투(Akitu)'였다. 아키투는 최소 기원전 200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연혁이 오래된 축제였다. 핵심 일정은 신전에서 꺼낸 신상을 데리고 도시 거리와 성벽 주위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 빛이 암흑과 혼돈을 물리쳤다는 의미가 있었으며 동시에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신전에 못 들어가는 평민과 노예들이 신성한 신상을 직관할 수 있는 몇안되는 기회였기에 사람들은 퍼레이드에 구름몰리듯 몰렸다.

아키투 축제는 전통적으로 음력 4월 4일에 치렀다. 총 11일 동안이나 치러지는 어마어마한 대축제였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마르두크 신관이 슬픈 기도문을 낭송했고 주신 마르두크에게 사람들을 보호해달라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축제라기보다는 암흑의 도래를 슬퍼하는 애도의 분위기에 더 가까웠다. 특히 셋째 날에는 장인이 나무, 금, 보석 따위로 인형을 만들어 그 위에 붉은 옷을 입혔다. 이 인형은 나중에 여섯째 날에 쓸 것이었다. 넷째 날에는 대신관이 암흑이 물러가고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며 본격적인 축제를 열었다. 같은 날 국왕은 신전으로 가서 신관의 축복을 받은 다음, 바빌론에서 약 17km 떨어진 보르시파로 여행을 떠났다. 왕은 보르시파에서 밤을 지새웠고 바빌론에서는 신관들이 왕의 안녕을 비는 뜻으로 창조 서사시를 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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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투 축제'에서 신상을 모시고 도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습.
다섯번째 날에는 보르시파에 있던 왕이 바빌론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이때 보르시파에 모셔져 있던 신들의 신상을 함께 모시고 갔다. 바빌론에 도착하면 신상은 성문 앞에 놔두고 마르두크 대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때 왕은 반드시 왕관과 의복을 내려놓고 초라한 차림으로 들어가야했다. 왕이 신전에 도착해 대신관 앞에서 속죄하면 대신관이 왕의 뺨을 세게 한대 때렸다. 왕이 본의 아니게 지었을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마르두크의 신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탁을 받은 다음 왕관과 옷을 돌려받았다. 해가 지면 하얀 황소를 데리고 들어가 신에게 바쳤는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바쳤는지에 대해선 밝혀진게 별로 없다.

여섯번째 날에는 성문 앞에 있던 신상을 들였다. 신상들은 도시를 한바퀴 돌고 마르두크의 대신전으로 들어가 마르두크의 신상과 합류했다. 이날 미리 만들어둔 붉은 옷 인형들을 죄다 태웠다. 신들이 도착하기 전 미리 도시를 정화한다는 의미였다. 일곱 번째 날에는 신상들을 깨끗이 향유로 씻어내리고 새 옷을 입혔다. 여덟 번째 날, 신전에 고이 모셔져 있던 신상들을 전부 꺼낸 다음 한꺼번에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이 행사에서 신년 정책과 비전을 발표했고 보통 이 날이 축제의 클라이맥스였다. 이 날에 행사가 가장 많았고 각종 이벤트도 많이 벌였다. 장정들이 신상을 들쳐메고 도시를 걸어다녔는데 개중에서 가장 중요한 마르두크 신상의 경우 국왕이 직접 함께 다녔다. 사람들은 신상들이 퍼레이드 하는 곳마다 꽃잎을 뿌리거나 향신료를 뿌리곤 했다.

아홉 번째 날과 열 번째 날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다. 다만 왕이 암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의미로 전리품과 제물들을 바쳤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마지막 열한번째 날에는 모든 신상들이 신전으로 돌아와 다시 제사를 받았다. 그리고 신상들을 원래 있던 도시와 신전들로 돌려보낸 다음 축제의 폐막을 선언했다. 그러면 길고 길었던 아키투 축제가 끝난다. 아키투 축제는 바빌론 뿐만 아니라 팔미라 등 수많은 도시들에서 치러지는 보편적인 축제였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에서 아키투 축제를 이색 풍습으로 소개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동방 문화를 야만이라 생각하던 로마 시민들은 정색했다고.

11.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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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왕' 아슈르바니팔.
인간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부족 간의 싸움이나 다툼 정도는 구석기, 그전부터도 빈번히 일어났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규모 전투나 국가간 전쟁은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3700년 경에 시작된 우루크 시대에 거대한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고 서로 간의 영역다툼이 체계화되며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국가들은 도시를 높은 성벽으로 둘러치기 시작했고 우바이드 문명권의 수많은 도시, 마을들이 버려지거나 약탈당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700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원전 2500년 전까지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젬데트 나스르 시대를 거쳐 초기 왕조 시대 들어서는 전쟁 자체가 위대한 행위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전쟁 기록석판들이 등장한다.

수메르의 전쟁 관련 기록들 가운데 가장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초기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독수리 비석'이다. 라가쉬의 왕 에안나툼이 인근 도시 움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으로 이름은 비석에 새겨진 독수리 부조에서 따왔다. 석회암 한 판에 새겨졌지만 현대 남은 건 7개의 조각들 뿐이고 그마저도 19세기에 프랑스로 반출되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에안나툼 왕이 창을 꼬나쥔 팔랑크스를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들의 잘린 목이 바닥에서 나뒹굴며 위에는 독수리들이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배회한다. 또한 전차를 타고 창을 든 모습의 에안나툼 왕의 모습도 등장한다. 당대 수메르의 전쟁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물.

각종 도시들이 난립하던 초기 왕조 시대에는 전쟁이 곧 외교의 일부였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왕은 전쟁 영웅일뿐더러 곧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두 도시가 싸우면 그 사이에 있는 중립 도시가 중재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고 뒤통수를 치고 또 싸움을 벌이는 일의 끊임없는 반복이었던 것. 도시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아서 기껏해야 인근의 도시들과 치고받는 일이 고작이었다. 보통 출정 후 며칠 안에 전투를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났다. 대부분이 소규모 국지전에 그쳤고 몇천 ~ 몇만명이 부딪히는 전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초기 왕조 시대 이후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지속적으로 통합되며 제국이 들어서자 나중에는 도시간 전쟁보다는 외부세력 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아카드고바빌로니아, 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 등의 왕궁에는 전쟁의 영광을 기리는 벽화들이 곳곳에 가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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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군대의 모습 수메르 보병 수메르 전차병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상당수가 청동기철기 무기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도끼, 5피트에 달하는 기다란 , 주력용 철제 검, 보조용 단검,[34] 재블린, 슬링 따위로 무장했다. 갑옷도 입었다. 두드려 만든 동판을 망토나 옷에 붙여 몸을 보호했고 청동으로 만든 갑주를 쓰기도 했다.[35] 하지만 돈이 없거나 비싼 갑옷을 살 경제적 역량이 안되는 사람들은 그냥 가볍게 옷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반면 최고 지위를 누리던 왕은 황금을 얇게 두드려 펴서 만든 다음 그 안에 부드러운 리넨을 덧댄 투구를 썼다. 기동성이 생명이던 경기병의 경우 평범한 옷에 깃털 장식 정도를 더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기병들은 보통 궁을 써서 주력 군대를 지원했다. 사르곤아카드 제국 이전까지는 평범한 단궁을 사용했지만 사르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합성궁을 퍼뜨린 이후부터는 훨씬 더 강력한 성능의 합성궁이 주류가 되었다고. 아마 유목민들이 쓰던 합성궁을 사르곤이 그 위력을 깨닫고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거리는 약 250~650m.

전차를 사용하는 전차병들도 있었다. 전차라기에는 초기적인 형태에 그 성능도 조악했으나 어쨌든 전차는 전차였다. 하지만 당시 고대 전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빠르고 파괴력이 강해서 나름 엘리트 병종이었고, 말을 탄 기병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령 역할도 했다. 전차보다 훨씬 빠른 말이 등장한 후인 기원전 700년대에는, 전령에서는 아예 제외되고 전투 목적으로만 쓰이게되지만 그 파괴력은 여전했기에 4인승으로 개량되기까지 했다. 보통 기수 1명, 전사 1명이 타고 다니는 2인승 전차가 대부분으로 당나귀, 노새 등이 끌었다. 은 기원전 2000년대 들어서야 보급되었다. 하지만 말은 보급된 이후에도 전차에 많이 쓰이지는 못했는데, 그이유는 지나치게 비쌌기 때문. 말이 하도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전차에 쓰기보다는 왕족이나 장군들이 직접 타고다니거나 더 유용한 목적으로 많이 썼다.

신바빌로니아와 신아시리아 제국은 유난히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약탈을 하거나 아예 적대 도시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중에서도 신아시리아 제국은 전 메소포타미아에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악독한 짓거리를 벌이고 다녔다. 신아시리아는 피정복민들을 다루기 위해 일부러 기존 도시를 싸그리 불태운 다음 원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이주시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했다. 그나마 신바빌로니아 왕들이 웬만하면 도시를 불태우지는 않았고 피정복민들도 바빌론 지방의 부족한 인구를 채우거나 노역 작업을 제외하면 강제이주정책도 실시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신아시리아의 피정복민 정책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수 있는 부분.[36]
나는 그들의 전사 3,000명을 칼로 쓰러뜨렸다. 나는 그들에게서 포로와 소유물과 소와 가축을 빼앗아 왔다. 나는 사로잡은 수많은 포로들을 불태웠다. 나는 수많은 병사들을 산 채로 사로잡았고 어떤 자들은 팔과 손을 잘랐다. 나는 그들의 코, 귀, (그리고) 사지를 잘라내었다. 나는 많은 병사의 눈을 도려내었다. 나는 살아있는 자들의 더미, 그리고 잘린 머리들의 더미를 하나 만들었다. 나는 그들의 머리를 도시 주변의 나무에 매달았고 적들의 소년소녀들을 불태웠다. 나는 도시를 파괴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먹어치웠다.

신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메소포타미아의 너른 평원 일대는 농경에는 최적이었지만 반대로 방어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었고 아시리아는 그 누구보다 이 지혜를 유용하게 터득한 세력들 중 하나였다. 아시리아는 가혹한 전술로 사람들을 압박하는 심리전을 썼다. 일단 아시리아는 자신들에게 항복하면 어느 정도는 봐주었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아예 도시를 싸그리 불태웠다. 불태운 도시에서 도망쳐온 난민들은 외국 땅으로 강제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토록 만들었다. 한꺼번에 다 보내는게 아니라 조금씩조금씩 나누어 소규모로 보냈기에 그 곳에서 단합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기껏 새로 이주해간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해놔도 아시리아인 총독이 대부분의 생산물을 빼앗아갔기에 정말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744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이란에서 아시리아-바빌로니아 국경으로 65,000여 명을, 기원전 742년에는 동부 자그로스 산맥으로 30,000여 명을, 기원전 721년에는 사르곤 2세가 27,290여 명을, 기원전 707년에는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108,000여 명을, 기원전 703년에는 센나케립 왕이 바빌론에서 208,000여 명을 추방했다. 이외에도 소규모로 끊임없이 강제추방, 이주를 시켰던 걸 생각해보면 최소 수십만 명을 강제추방시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포로들을 자비없이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위의 기록을 봐도 알겠지만 이 인간은 포로들에게 관대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반군들의 껍질을 벗기고, 창에 찌르고, 참수시키고 산채로 화형시키는 일을 즐겨했다. 사람들을 절단해 죽이는 일은 예사였고 머리와 팔, 손, 입술 따위를 자르고 벗겨 성벽 아래에 널부러뜨리는 일도 많았다. 코를 잘라 흉측해진 모습의 머리를 잘라 망대에 꽂은 다음 성벽 위에 주렁주렁 전시해놓기도 했다. 남은 시체는 개에게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포로들의 눈을 빼서 풀어주었다. 당연히 좋은 뜻은 아니었고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아시리아 군대의 잔혹성과 위험함을 널리 알리라는(...) 의미.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시리아는 이런 과격한 탄압 정책 때문에 망했다. 반란을 일으켜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으니 피정복민들이 죽기살기로 아시리아에 저항하는 역효과를 낳았던 탓이 컸다.

공성전도 흔하게 일어났다. 가장 흔하고 가장 싸게 먹히는 건 사다리였다. 하지만 사다리는 성벽에서 넘어지기 쉬우므로 일부러 화살로 보조를 해주었다. 결사대가 방패를 위로 하고 죽을둥살둥 올라가면 멀리서 궁수들이 보조해주는 식이었다. 그 외에 성벽을 아예 무너뜨리기도 했다. 전투 도중 벽에서 흙을 긁어내서 벽이 아예 무너지도록 만들었던 것. 네 개의 바퀴에 목재로 만든 공성추도 썼는데, 끄트머리에 금속 징을 붙인 거대한 통나무를 사용했다. 통나무는 물에 적신 가죽으로 덮어 화공에 대비했다. 공성추는 성문 뿐만 아니라 성벽에도 쓸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성벽은 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른 진흙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에는 짚 끼워넣기처럼 성벽 보강 기술도 없었기에 공성추로 진흙 성벽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었던 것.

12. 경제

메소포타미아 경제의 핵심 동력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사회의 절대다수는 밀을 재배하는 농부였고 일부만이 사제, 상인 등 특수 직업을 가졌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농사 방법이 나뉘었다. 그나마 비가 자주 내리던 북부의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강우량이 충분해 밭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건조 농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반대로 남쪽의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다. 거대한 평야가 있어서 농사에 최적인 건 사실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키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하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거대한 수로와 운하들을 파서 담수를 끌여들였다. 이렇게 하면 운하를 파는데에는 조금 시간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동력 투입대비 어마어마한 수확량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운하를 팔 필요는 없었지만 생산량과 효율성은 남부에 비해서 약간 낮았다.[37]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농업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기후를 이해해야 한다. 현대에는 지속적인 사막화와 건조화로 인해 황량한 모래구덩이라는 인식만이 있지만 당시의 이라크, 시리아 지방은 세계적으로도 꽤나 풍요로운 지방에 속했다. 특히 시리아의 경우 기원전 10,000년에서 기원전 7000년까지는 참나무 같은 낙엽수 숲이 우거져 있는 등 현대보다 훨씬 습했으며 초목도 울창했다. 아직 인간에게 재배되지 않았던 야생 과 야생 보리 같은 작물들이 자생하던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수메르인들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양대산맥은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거대한 2개의 강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이었다. 유프라테스는 약 2,800km, 티그리스는 약 1,900km였다. 봄철에 눈이 녹고 비가 내리면 그 수량이 더욱 불어나는 구조였는데, 특히 자그로스 산맥에 쌓인 만년설의 영향을 크게 받는 티그리스 강의 경우가 더 변동이 심했다. 반면 유프라테스 강은 녹아내릴 만년설도 딱히 없을 뿐더러 시리아 일대의 평야 지대에서 크게 한번 휘어지며 흘렀기에 수량 변동이 약했다. 티그리스 강은 4월에, 유프라테스 강은 상대적으로 느린 5월에 범람이 일어났다. 하지만 범람 직후에는 더운 여름이 밀어닥쳤고, 여름의 무더운 기온이 물을 죄다 말려버리면저 여름에 가장 강의 수위가 낮았다. 봄에 가장 수위가 높고 여름에 가장 수위가 낮았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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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자연 제방. 농부들이 할일은 저 제방을 터서 물이 아래 평야지대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 뿐이었다.

두 강 모두 봄과 여름의 유속 차가 굉장히 심했다. 물이 많은 봄에는 매우 빨랐던 반면 여름에는 크게 느려졌는데 심할 때는 유속 비가 4:1이나 됐다. 그나마 유프라테스 강의 변동이 조금 덜해서 상대적으로 예측이 쉬웠던 터라 사람들은 일부러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농사를 많이 지었다.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강의 자연적 특성상 평야지대를 오래 지나다보면 강둑 양옆에 밀려온 토사물들이 쌓이며 강의 흐름 자체가 자연스레 평야지대보다 높아지게 된다. 그야말로 자연이 만든 흙 제방이 쌓아졌던 것. 사람들이 할 일은 그저 강둑 양옆에 높게 쌓인 자연 생성된 흙 제방을 터주는 것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면 홍수가 나서 제방 밖으로 물이 흘러넘칠 경우 지대가 낮은 평야에 사는 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농사에서 얻는 이익이 훨씬 컸기에 사람들은 계속 평야 지대를 고수하며 농사를 지었다.

의외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토양은 건조한 기후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흙이었다. 낮게 깔린 기반암 위에 얇은 토양이 얕게 얹혀져 있는 형태였다. 흙이 깊게까지 깔려있는 곳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계곡 일대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고원 지대와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훨씬 쌓인 흙의 두께가 얇았다. 심지어 흙들마저도 우크라이나흑토처럼 말그대로 뿌리기만 해도 알아서 쑥쑥 자랄 정도로 비옥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지방에서 엄청난 양의 작물을 생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압도적인 면적의 대평야였다. 흙의 두께가 얇아도 일단 애초부터 평야의 면적이 하도 넓으니 그걸 커버하는 게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흙들은 석고 성분과 석회암 성분을 함유했으며 이들을 오래 관개하면 침식과 토양염화를 가속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수천년의 농경 끝에 현대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염분이 높고 농사를 짓기 어려운 지방이 되어버렸다.

앞서 언급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수로를 파서 관개농업을 벌였다. 최소 기원전 6000년 전 사마라 문화권부터는 인공 수로를 파낼 생각을 해냈다고 한다. 기존에는 강둑 바로 양 옆의 좁은 제방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수로를 파내면서 인근 거대한 평야의 잠재력을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수로는 항해도 가능했고 연락을 하는 데에도 사용이 가능했다. 일부 왕들은 굳이 농사에는 필요하지 않아도 통신을 위해서 운하를 파기도했다. 어쨌든 옆의 제방을 트면 중력을 따라 미리 파놓은 경로로 물이 흘러내려 수로와 운하들이 만들어졌다. 이 운하들 옆에 또다시 소규모 운하들을 파고 또 파서 밭에 물을 댔다는 이야기다.

하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도시의 건설과 마을들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수로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강 양 옆의 융기된 자연 제방은 밀집된 공간이었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정원과 야자나무, 과수원 등은 모조리 제방을 따라서 지어졌고 마을 역시 수로나 강 바로 옆에 지어졌다. 마을에 가까울 수록 비옥하고 중요한 작물을 키우는 장소였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그 반대였다. 수로로 물을 대다보면 강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지대로 갈수록 수량이 자연스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즉 강에서 멀어질수록 생산량도 줄고 척박해진다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보통 이 곳에 가축을 방목했다. 강과 가까운 곳들에서는 습지가 많았다. 특히 하부 메소포타미아에 습지가 많았는데 이 곳에서 갈대를 채취하곤 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습지를 농토로 개발하는 일도 많았고 반대로 농토가 버려져 습지가 되어버리는 일도 많았다.

반면 수로와 관개 운하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던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도시 계획도 하부와는 약간 달랐다. 애초에 강과 수로의 위치에 크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서 원하는대로 마을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이쪽에서는 동심원 모습으로 마을을 지었다. 요새화된 마을이나 도시 주위에 풍요로운 경작지, 그리고 그 밖에 목초지로 사용하는 공간이 원형으로 빙빙 휘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수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강수량이 상대적으로는 많았다지만 매년 비가 내릴지도 안내릴지도 모르는 판에 하늘만 믿고 있기에는 불안해서, 상부 메소포타미아인들도 물이 부족한 일부 지대에는 수로를 파서 물을 대었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뭐니뭐니해도 보리였다. 건조하고 염분이 많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잘 적응하는 최적의 곡물이었기 때문이다. 도 당연히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고 보리에 준하거나 비슷할 정도로 많이 키웠다. 은 기원전 1000년 대에 들어는 왔지만 물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작물이라 키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래의 내용은 수메르어 토판 'Farmer's Almanac'에 등장하는 농경법이다. 당대인들이 보리를 키울 때 참고하던 지침서 정도로 보면 된다. 그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이 보리를 키울 때는 다음과 같이 키웠다.
첫째 : 여름이 끝나가는 8~9월 쯤에 바싹 마른 토양을 적시기 위해 밭에 관개를 했다. 가을 초에 토양을 미리 준비해놓아야만 했다. 4마리의 가 끄는 쟁기로 밭을 한번 갈아었는다. 이 쟁기는 땅 속 15~20cm 밖에 닿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 특유의 얇은 토양 특성상 이정도면 충분했다. 필요한 경우 괭이를 써서 사람이 직접 땅을 갈아엎는다.

둘째 : 파종은 가을, 주로 10~11월에 이루어졌다. 미리 파종해야할 곡물의 양을 계산한 다음, 씨앗과 짐나를 짐승을 준비하고 일꾼들을 조직한다. 쟁기 위에는 파종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흙을 뒤집을 때 쟁기 뒤에서 자연스레 씨앗이 떨어지도록 만든 깔때기 비슷한 도구로, 약 65~70cm 간격으로 낟알을 심었다.

셋째 :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밭에서 잡초를 뽑고 물을 끊임없이 대줘야 했다.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비료를 뿌리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간혹 동물들이 밭을 망치고 있으면 쫒아내는 정도가 전부였다.

넷째 : 4~5월의 봄이 오고 강 수위가 높아지기 직전 혹은 동시에 수확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1년 중 대부분의 노동력이 투입되는 시기였다. 도자기 조각, 돌조각 따위로 이삭을 하나하나 잘랐다. 밀과 보리 이삭들은 타작판[38]에 돌린 다음 키로 까불러 낟알과 쭉정이를 분리했다. 세금을 떼이고 토후들에게 바칠 걸 다 바치면 그제서야 겨우 남은 곡식들을 제 집 창고에 저장했다. 최소한 6~7월에는 수확이 끝나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8~9월부터는 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하부 메소포타미아의 특산물인 대추야자도 있었다. 대추야자는 물을 매우 많이 먹어치우는 작물이라 무조건 강과 제일 가까운 제방에서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물만 대준다면 건조하고 염분 많은 땅에서도 잘자라서 당분을 섭취하는데에는 최고였다. 사람들은 거대한 과수원에서 대추야자를 길렀다. 구획을 나누어 일괄적으로 야자수를 심은 다음 시간을 정해 관리했다. 보통 야자수의 수명이 60년 정도 되는 걸 생각하면 꽤나 시간이 들어가는 장기 투자였던 셈. 게다가 심어두기만 한다고 해서 수확이 되는게 아니라 죽은 나무는 뽑아버리고 새 나무를 심는 등 관리도 꾸준히 해줘야 했다. 특히 인공적으로 수분을 하기도 했는데, 인부들이 직접 수술에서 꽃가루를 묻혀와서 암술에 묻혀서 수분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밀과 보리 외에 다른 작물들도 키웠다. 아마는 주로 아마포를 제작할 때 썼지만 많이 키우지는 않았고, 참깨는 그나마 많이 키웠다. 주식곡물 다음으로 중요한 작물이었을 정도. 참기름을 짜내서 향유, 요리, 등불 용도로 쓰기도 했고 씨앗 역시 먹을 수 있었다. 완두콩, 렌즈콩, 양파 등 다양한 것들을 밭에서 길렀다. 정원과 과수밭에서 따로 키우는 것도 많았다. 다양한 채소들과 허브를 주로 키웠는데 대부분 부추, 오이, 마늘 등이었다. 돈이 많은 자들은 올리브목화를 재배했으며 왕족이나 귀족들은 아예 정원에서 사과, 무화과, 석류 같은 값비싼 과일들을 길러먹었다.[39]

포도 덩굴을 키우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건조한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못키웠고 그나마 물이 많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나 흔히 길렀다. 가장 대표적으로 성경에 나오기도 한다. 요나서에 쓰인 내용인데, 요나가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 니네베의 멸망을 예언하다가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이 벌을 거두었다. 실망한 요나가 주저앉아있던 도중 하나님이 그 위로 포도덩굴을 하나 키워 햇빛을 가리어주었다는 내용인데,[40]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에 포도덩굴이 흔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다. 상당한 규모의 포도 과수원과 양조장이 많았다. 다만 포도 자체가 꽤 비싼 음식이라 아무나 먹지 못했고 포도주는 왕족과 귀족에 한정된 사치식품이었다. 자그로스 산맥와 접경한 산악 지대에서 만든 포도주를 가장 고급으로 쳐줬지만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든 포도주 자체가 질이 썩 좋지는 않아서 별 차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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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가축을 함께 기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𒇻(UDU, 우두)'라고 불리던 은 아주 작은 식량만 섭취해도 오래 버틸 수 있어 대규모로 키우기에 용이했다. 양털을 깎아 쓸수도 있었고 고기와 양젖도 얻을 수 있었다. 는 양보다 기르기 어려웠지만 분명 가치는 더 높았다. 수메르어로는 '𒄞(GU4, GUD, 구)'라고 불렀는데, 농부들이 가축들 중 유일하게 개별적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던 동물이기 때문. 우유는 물론이고 노동력 제공의 가치도 있어 귀하게 여겨졌다. '𒍚(ÙZ, 우즈)'라고 부르던 염소는 썩 그닥이었고 고기도 가치가 낮았다. 그나마 염소젖 정도가 가치 있었다. '𒂄(ŠAḪ₂, 사)'라고 불리던 돼지고기지방을 얻기 위해 길렀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 가치가 없어 점점 사라졌다. 기원전 1000년 경에 이미 각종 행정문서 기록에서 사라진 걸 보면 돼지를 기르던 집이 많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𒀲(ANŠE, 안세)'라고 불리던 당나귀, '𒀲𒆳𒊏(ANŠE-KUR-RA, 안세쿠라)'라고 불리던 은 더 말할 것 없이 최고의 동물이었다. 당나귀는 빠르게 짐을 운송하기 위해 쓰인 필수품이었고 말은 그 속도와 훈련 가능성 덕분에 왕과 귀족이나 타는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탈것용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집이 대단한 부잣집이라는 의미였다. 기원전 1천년 경 '𒄞𒆳𒋛𒄮𒊏𒀭(AM.SI.ḪAR.RA.AN, 안세-아바)'라고 부르는 단봉낙타들이 도입되어 수송용 짐승으로 유용하게 써먹혔다. 낙타젖을 짜먹기도 했고 고기를 얻어먹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가축으로는 '𒌨𒂠(URGIR, 우르기)'라고 불리던 가 있었다. 사냥개로 썼는데 이 역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사냥 대상은 거위, 오리, 비둘기 따위. 을 포함한 가금류는 기원전 1000년 초에 인도에서 들여왔고 양봉업도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다.[41]

농부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농사 외에 시간이 날때 사냥과 수렵, 채집도 계속했다. 전문 사냥꾼과 어부들이 존재했지만 농부들도 이왕이면 다양한 일들을 해두는게 유용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을 즐겨했다. 가젤, 염소, 멧돼지, 여우, 산토끼, , 심지어 곤충까지 잡아들였고 강과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아 가정에 보탰다. 꼭 산 동물만 잡는 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갈대인데, 늪지대에서 잡초처럼 솟아나는 갈대를 채집했다. 갈대는 건물 벽돌 속에 넣어 보강할수도 있었고, 보트, 바구니, 문자를 새길 갈대 펜을 만들 수도 있어 매우 유용했다. 또한 포플러나무, 버드나무, 노간주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도 베어서 팔았다.[42] 멀리서 들여온 흑단, 삼나무, 사이프러스를 심어 기르기도 했다. 얘네들은 고급품목이라 보통 다 자라면 잘라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납품했다고 한다.

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그나마 신전들이 세계 최초의 대규모 대부업을 실시했다는 말이 있다. 단순히 빚을 지고 갚는게 아니라 대규모의 돈놀이 사업을 했다는 의미.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체계적인 대부업이라기보다는 땜질식으로 훨씬 엉성하게 운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그 외에 이미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저멀리 인더스 문명과 교역을 진행했고, 가까운 고대 이집트와는 이미 기원전 4000년 전부터 활발히 교류했다. 메소포타미아가 저멀리 중앙아시아인도, 지중해 세계와 이집트를 잇는 무역로의 교차지에 딱 자리하고 있는 덕에 수많은 물산들이 이동했던 덕을 많이 봤다.[43]

13.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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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의 문. 푸른 유약 벽돌이 눈에 띈다.
몇 천년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성상 메소포타미아의 건축이 이렇다 저렇다 딱 집어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세월동안에도 대략적인 특징과 건축 재료들은 나름 일관적인 면이 있기에, 이 문단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지은 건축물들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핵심 건축 재료는 진흙 벽돌이었다. 하지만 진흙 벽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었는데, 벽돌의 사이즈나 모양마저도 시대에 따라 천지차이였다. 고대 건축가들은 나무로 만든 틀에 진흙을 넣어 햇볕에 말린 다음 만들어진 진흙 벽돌을 사용했다. 초창기에는 예상 외로 둥글둥글한 모양의 벽돌을 선호했다고 한다. 둥근 모양의 벽돌들을 잘 엇물리게 쌓고 석회를 매끄럽게 발라주면 완공된 건물이 직육면체의 벽돌들보다도 더 내구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햇빛에 말린 진흙벽돌은 만드는 데 시간도 짧고 값도 거의 들지 않았지만 화덕이나 가마에 구워낸 벽돌에 비하면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햇빛에 말린 벽돌로 도시를 지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벽돌 건물들이 시간만 지나면 부스러지는 통에 일정한 주기마다 벽돌을 새로 갈아주거나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삭아진 벽돌 가루와 잔해들이 땅바닥에 쌓이며 도시의 지반이 인근 지반보다 점점더 높아졌다고 한다. 궁전이나 신전처럼 중요한 건물들은 일부러 가마에서 구워낸 벽돌이나 깎은 돌로 쌓거나, 아니면 테라코타 판넬을 겉면에 대어 풍화를 막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진흙에 불과한 벽돌이 삭는 걸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중동 지방의 고대 도시 유적에 가면 이 벽돌 건물들이 삭아내린 흙들이 쌓여 거대한 둔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고고학에서는 '텔'이라고 부른다.

수메르인들은 도시설계라는 개념을 창안한 첫 번째 민족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우루크의 곧게 뻗은 다리와 거리, 성벽과 시장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수메르인 본인들도 난잡한 타민족들의 도시와 정갈한 자신들의 도시들을 비교하며 뿌듯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도시를 주거공간, 복합공간, 상업공간, 공공공간 등으로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구획은 당연히 신전과 궁전 등이 있는 공공 공간이었다. 신전 같은 공공 공간은 보통 도시의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지고 지대가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성장 자체가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신전이 도시보다도 더 오래된 경우가 잦았다. 도시 주변에는 거대한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성벽의 문들에는 각각의 독특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으며 문과 인접한 거리들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신성한 취급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바빌론이슈타르의 문과 '행진의 거리'.

도시 주변에는 당연히 그 많은 도시민들을 먹여살릴 거대한 농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농로와 수로들이 그 사이로 거미줄처럼 지나갔다. 이 농지들 가운데에는 드문드문 조그마한 마을들이 점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소마을들에서 수확한 곡물들을 도시로 운송해 들여오는 방식이었다. 거대한 수송로를 통해 도시로 들어오면 시장 등에서 필수품을 판매하는 식이었다. 참고로 수메르의 도시에는 보통 3단계의 도로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거대한 대로들. 개선식을 열거나 군대가 행진하는 가장 널찍하고 중요한 도로였으며 아카드어로는 '수쿠 리아니 에 사리(sūqu ilāni u šarri)'라고 불렀다. 두 번째가 대로에서 갈라진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거리들. 아카드어로 '수쿠 니시(sūqu nišī)'라고 했다. 마지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한 좁은 뒷골목으로 아카드어로는 '무수(mūṣû)'라고 불렀다. 대로들은 거의 한번 만들어지면 변하지 않았지만 뒷골목들은 건물을 다시 올릴때마다 이리저리 변하는 게 보통이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수메르의 도시는 대략 건물이 90%의 공간을, 도로가 10%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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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평민들의 가옥
왕과 고위 신관, 귀족들이야 번쩍번쩍한 궁전에서 호화롭게 살았다지만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은 그만한 곳에서 살 재력이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흙과 흙벽돌, 포플러 나무로 만들었다. 일반인들은 거실처럼 쓰는 하나의 큰 방에 여러 방들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의 가옥에서 살았다. 하지만 재력이 좀 되는 사람들은 중국의 사합원처럼 중간에 '타바수'라고 부르는 작은 뚫린 공간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로 방들을 지어 둘러쳤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하나였고 그 입구에도 집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벽을 쌓거나 방을 하나 만들었다. 개인 사생활을 굉장히 중요시했기 때문. 수메르인들의 평균 가옥 면적은 90m2, 약 27평 수준이었다.

꼭 흙벽돌로 집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흔한 재료였던 갈대도 많이 썼다. 갈대 다발들을 단단히 묶어 땅에 박아 벽을 만들고 대충 살기도 했던 것이다. 나무, 자갈, 짚을 섞은 흙벽돌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잡재료들은 모조리 사용했다. 흙벽돌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에는 석회를 발라 매끄럽게 만든 다음 물감을 칠해 장식하기도 했다. 지붕은 야자나무 판자로 덮은 다음 갈대로 또다시 덮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문과 문틀은 보통 나무로 만들었으며 가끔씩 가죽을 대충 걸쳐놓고 문 대용으로 썼다. 집과 집 사이의 문은 너무나도 낮아서 통과하려면 몸을 한껏 수그려야 했다. 집바닥도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라면 그냥 기초만 다져놓은 흙바닥이라서 무너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최하층계급은 더 비참해서 그냥 갈대줄기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수준의 집에 살았으니 아무리 무너지기 쉽다지만 흙벽돌집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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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의 지구라트 복원도.
가난한 인간들은 힘들게 살았지만 반대로 왕과 고위층은 정말 호화롭게 살았다. 궁전과 신전들은 유약을 바른 벽돌로 장식에 태양이 비칠 때마다 빛났고 안도 널찍했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 지구라트가 이 신전에 속한다. 총 32개의 지구라트가 남아있는데,[44] 기원전 4천년 우바이드 문화권 시절부터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급격히 발전하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피라미드 구조로 쌓았으며 안은 말린 벽돌, 외면은 유약 바른 색색의 벽돌로 쌓았다. 층수는 2단에서 7단까지 다양했고 가장 위에는 사당이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도 어찌나 압도적일 정도로 화려했던지 당시로서는 촌구석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테멘앙키를 보고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바벨탑의 전설을 생각할 정도였다. 현존하는 지구라트 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우르의 지구라트인데, 총 7단의 지구라트였지만 남아있는 건 3단 밖에 없다.

지구라트를 제외한 사원들도 많았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을 때 자신들만의 우주론을 넣어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이 땅은 거대한 짠물 바다 위에 떠있고, 이 땅과 짠물 바다는 '아프수'라고 부르는 더 거대한 민물 바다 위에 떠있으며 그 위를 거대한 반구가 덮고 있는 형태라고 한다. 땅-짠물 바다-민물 바다로 이어지는 3단의 구성이라 지구라트나 신전도 3단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세계에서 흘러내리는 4개의 강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네 모서리를 가진 직육면체 모양으로 건물을 쌓았고, 바다에서 떠오른 태초의 땅 '두쿠그'를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지반을 약간 높여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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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지구라트 에테멘앙키를 3D로 재현한 모습.

사원들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신전 건물의 긴 장축은 신들을 위한 입구, 그리고 짧은 단축은 인간들을 위한 입구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신들을 위한 입구가 정면이었던터라 사람들이 들어갈 때에는 측면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 90도 돌아 신상을 경배해야 했다. 신전 최중심부에 있는 신상은 황금이나 각종 값비싼 장신구들로 가득 싸고 있어서 매우 호화로웠다. 이따금 축제 시기가 되면 정기적으로 신전에서 꺼내나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세계를 감싸는 거대한 바다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분수도 있었다. 심지어 기원전 3천년 경에 이미 최초의 분수가 만들어졌다고. 주변의 운하에서 물을 끌어와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될 정도로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신바빌로니아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향수병을 앓는 아내 아미티스 왕비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길이가 각 방향으로 123m,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지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였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 극장을 연상시켰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의하면 총 7층, 꼭대기 층은 바빌론 성벽보다도 20m가 더 높았으며 각 층에는 테라스를 설치해 테라스에 흙을 덮은 다음 온갖 나무와 과실수를 심었다. 각 테라스는 돌기둥으로 된 통로로 이어져 있었으며, 공중 정원 내부에는 방 100여 개가 있고 내부 한가운데에는 크기가 엄청난 광장이 있었으며, 이 광장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방수를 위해 두꺼운 납판 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두꺼운 갈대를 놓고 그 위에 다시 구운 벽돌과 석회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고대인들이 생각하던 천국의 이미지를 지상에 그대로 재현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원후 1세기 경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에는 그 터와 유구만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속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에테멘앙키도 있다. 마르두크 신을 모시는 95m x 95m의 거대한 규모의 지구라트로, 그 높이가 90m를 넘는,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크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지구라트의 건설 목적도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왕이나 신관들이 보다 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가로와 세로 30 cm, 높이 8 cm의 구운 흙 벽돌 최대 7,500만 개를 사용했다고 추정되며 특히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은 당대 최고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로 둘렀고, 신전 곳곳에 푸른 자기 벽돌을 활용해 울트라마린을 입혔다.

14.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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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메소포타미아 권력자들의 옷차림.[45]
메소포타미아의 의복 문화는 고대 그리스고대 이집트에 비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인들도 당대 기준으로 대단히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정말 극초기에는 단순히 양가죽을 벗긴 다음 부드러운 쪽이 안으로 오게 뒤집에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밖으로 나온 양모 부분을 빗으로 빗질해서 무늬를 냈다. 일반적으로 앞가슴을 드러낸 채 허리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게 대중적이었으나 재력가나 권력자들은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양모 옷을 지어입었다. 기원전 2500년 경 들어서야 본격적인 직조물이 등장하며 기존의 투박한 양가죽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양모 특유의 무늬를 본뜬 술을 꿰어 장식한다든가 천에 고리를 짜넣어 마치 양모처럼 복슬복슬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더운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위엄을 주는 효과를 노리기 위해 치렁치렁한 망토를 걸쳤다. 권력이 높고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걸치는 의복 겹의 수가 많아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고대 이집트처럼 남자나 여자나 큰 가발을 썼다. 가발에는 금이나 희귀 금속으로 장식물들을 주렁주렁 달았다. 브로치, 귀고리, 목걸이, 가발에 달 금테나 금속 세공물 등 다양한 악세사리들을 즐겨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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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70년 들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의복들이 등장했다. 리넨 천을 크게 자른 뒤 몸 주위에 둘둘 둘러 입기 시작했던 것. 물론 똑같지는 않지만 입는 방식이 마치 토가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천의 모서리 부분은 따로 줄무늬나 특유의 장식으로 장식했고 몸에 두른 다음 끝부분은 숄처럼 어깨나 팔 위에 얹고 다녔다. 특이한 점이라면 남성복의 경우 뒷쪽이나 오른쪽이 훤하게 트여서 칼을 쥔 손을 움직이기 수월했다는 것. 이러한 형식의 옷들은 사르곤 대왕 시절 아카드 제국기에 많이 입었고 나중에 수메르인들에게 다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보편적인 옷으로 자리잡는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에서 입었던 옷들은 앞서 언급한 아카드 시기의 옷을 더 개량한 버전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비슷비슷하게 입고 다녔다. 일단 원피스처럼 생긴 튜닉을 목부터 넣어 아래로 흘러내리게 걸쳤다. 이 튜닉은 소매가 짧았고 목선은 둥글었다. 하지만 속에 입는 튜닉이야 기본 옷차림에 가까웠고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 개성을 뽐낼 때 사용하던 건 튜닉이 아니라 그 위에 걸치던 숄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기하학적인 장식이 들어간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숄들을 이리저리 걸쳐서 멋을 냈다. 이 숄들에는 술들이 달려있어 움직일때마다 물결치는 듯한 효과를 냈다. 숄을 다 입고나면 흘러내리지 않도록 넓은 벨트를 차서 고정시켰다. 그 외에도 여자는 속옷으로 아래에 짧은 스커트를, 남자는 로인클로스를 받쳐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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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비 여왕의 금관 우르의 황금 투구 아시리아의 금관[46]
헤어스타일과 수염 관리는 대단히 중요했다. 메소포타미아 쪽 인물들을 묘사한 부조들을 보면 하나같이 올록볼록하게 땋아 길게 늘어뜨린 수염들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수염 관리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증거다. 사람들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게 길러 말린 다음 조심히 땋아 고리를 만들고 다시 땋아내렸다. 이렇게 하면 부조의 모습처럼 올록볼록한 헤어스타일과 수염이 만들어진다. 탈모 등의 이유로 털이 부족하다면 털을 붙이기까지 했다. 검은색의 털이 가장 완벽한 모습이라 생각해서 희게 센 머리카락이나 수염들도 검게 염색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향수를 털에 발라 관리했다는 말도 있다.

왕관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금관이라기보다는 천을 머리에 두른 다음 띠로 고정한 것에 더 가까웠다. 보통 모직이나 털로 만들었고 금속으로 장식해서 멋을 냈다. 하지만 금관이 아예 없었다는 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푸아비 여왕의 금관인데, 20개에 달하는 황금 잎사귀와 꽃들로 만들어졌다. 그 무게만 무려 6파운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한 청금석파키스탄에서 들여온 홍옥수를 두줄로 깎아 넣어 메소포타미아 금속 세공의 정수로 불린다.

15. 문학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는 멋진 수식어답게 문학 역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도시들에는 곳곳에 도서관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곧 권위의 상징이었다. 고위층 한정이었지만 여성들도 남성과 똑같이 읽고 쓰는 법을 알아야 했고 무식은 죄악이었다. '서기들의 학교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는 이는 새벽처럼 일어나야 한다'라는 수메르식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 메소포타미아 문학은 기본적으로는 수메르인들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훗날 아모리인고바빌로니아칼데아인신바빌로니아 등이 수메르 문학에 기초해 더 문학 장르들을 정교화하고 세분화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수메르 문학의 경우 세계 최초의 문학이다. 수메르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자 체계를 발명한 이래 기원전 30세기 경 초기 원시문자체계에서 탈피해 감정 등을 표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설형문자를 정립했다. 수메르인들은 기본적으로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 방향으로 썼다. 를 발명해내긴 했지만 운율의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발음의 유사성을 통해서 운율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 사용하긴 했지만 의도적으로 운율을 넣지는 못했던 것. 게다가 수메르인들의 쓰기 방식이 아직까지는 완전히 발음과 내용을 담아내기는 부족한 면이 많아서 리듬이나 운율, 두운이 있었다고 해도 현대 학자들이 알아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아니면 글을 기록했던 서기관이 글을 쓸 때 의도적으로 운율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학자들은 수메르 문학을 크게 '문학 모음집', '신화', '역사서와 찬양시', '편지와 법전', '찬송가', '잠언' 따위로 구분한다. 제일 먼저 '문학 모음집'은 수메르 서기들이 공부할 때 베껴쓰던 소설 모음집으로 약 10여 개의 고대 소설이 있다. 현존하는 수메르 소설들 중에서는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신화'는 그 유명한 길가메시의 모험,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루갈반다의 이야기, 사랑의 여신 이안나가 지하로 여행을 내려간 이야기, 엔릴의 창조신화, 수메르 신화 등 온갖 종류의 수메르 신화들을 총망라한다.

'역사서와 찬양시' 부문은 그냥 왕들을 위엄과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내용 자체야 왕이 어디가서 누굴 죽였고 어디를 정복했으며 어떻게 자비를 베풀었다 따위로 천편일률적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스스로에 대한 찬양시를 짓게 하는 건 모든 군주들이 다 마찬가지라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분야의 문학장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우르 제3왕조의 명군 슐기 왕, 고바빌로니아함무라비 대왕 등에 대한 찬양시가 많이 남아있다.

'편지와 법률' 장르는 상대적으로 재미가 떨어진다. 왕들이나 도시가 서로간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쓴 서한이나 편지, 공문서 따위가 대부분이기 때문. 하지만 그 중요도는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으니,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 바로 이 장르에 속한다.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유명한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 법전 역시 이 장르의 시초격 작품이다. 초창기의 성문법들이라는 역사적 의의와, 당시의 사회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분야다. 인지도 면에서는 위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께 수메르 문학의 투톱을 달릴 정도. 그 외에 우르이신, 라르사의 군주들이 서로에게 보냈던 편지 토판 파편 등이 일부 보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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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 토판 하늘의 황소를 죽이는 길가메시의 모습
그 외에 '찬송가'와 '잠언'이 있다. 찬송가는 종류가 크게 2개로 나뉜다. 하나는 엔릴엔키 등 개별 신들에게 바치는 찬송가, 나머지 하나는 '수메르 사원 찬가'처럼 특정 사원에 바치는 찬송가다. 이쪽 분야는 딱히 남아있는게 많지는 않다. '잠언' 분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괭이의 노래', '새와 물고기의 논쟁', '양과 곡식의 논쟁', '겨울과 여름의 논쟁', '인간과 신의 대화' 등이 대표작이다. '괭이의 노래'는 창조설화를 괭이에 빗대어 풀어낸 노래고, '새와 물고기의 논쟁'은 새와 물고기가 서로를 비난하며 신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내용, '양과 곡식의 논쟁'은 축산업농업의 시작을 설명하는 창조설화, '겨울과 여름의 논쟁'은 겨울여름 중 누가 더 나은 계절이냐에 대한 논쟁,[47], '인간과 신의 대화'는 세계 최초로 악의 문제에 관해 다루었다.[48]

후일 이 수메르 문학을 발전시킨 것이 아카드 문학과 바빌로니아 문학이다. 차이점이라면 이전보다 감정이 훨씬 풍부하게 표현되었고 그 표현법도 정교해진 것. 수메르인들의 국가는 사라졌지만 수메르어는 문어(文語)로 계속 남아서 공문서에 쓰거나 서기들이 사용했다. 이 당시의 문학 작품들은 살아남은 것도 상대적으로 많고 유쾌하고 풍자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 유머 문학도 새롭게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작품 '청소부'는 청소부와 수세미가 서로 비꼬면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담아냈고, 마치 봉산탈춤말뚝이처럼 주인이 명령하면 하인이 삐딱하게 받아치거나 서로 역할을 바꾸어 살아보는 이야기도 있었다.

길가메시라는 캐릭터와 그와 관련된 영웅담은 수메르 시대에 이미 정립되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거대한 대서사시로 통합된 것도 이 바빌로니아 시기였다.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처음 등장해 1,000여 줄에 달하는 아카드어로 쓰여졌다. 수많은 판본이 연달아 나오고 각색되었을 정도로 바빌로니아를 대표하는 최고 인기 소설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 외에도 '창조'라고 해서 주신 마르두크가 악신 티아마트를 꺾고 그 몸을 갈라 세계와 인간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역병의 악마 '남타르'의 설화 등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점성술과 미신과 관련된 내용도 많았다. 어찌나 당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미신을 좋아했던지 이 시대에 만들어진 문학작품들 중의 30%가 죄다 예언서나 미신서다. 동물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담은 텍스트도 나왔고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이나 지상의 징조를 읽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예언서만 잘 외우고 소각, 정화 작업만 잘 거치면 사악한 악마를 몰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물론 이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고차원적인 악마 뿐만 아니라 메뚜기, 참새 떼처럼 현실적인 적들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때에도 이 기도문들을 읊었다. 그 외에 '지혜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잠언 모음집, 공식 혹은 사적 편지를 담은 토판도 남아있다.

16. 장례

고대 이집트의 장례 문화가 사자의 서미라처럼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장례 문화는 의외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앞서 말했듯이 현세적인 면모가 강했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장례식이나 내세 신앙이 고대 이집트만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투탕카멘의 무덤처럼 온전히 발견된 무덤이 있어야 하는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제대로 남아있는 무덤이 거의 없다.[49] 안그래도 부장품도 많지 않고 고대 이집트만큼 내세, 장례 문화도 발달하지 못했는데 미라처럼 자극적인 소재도 없으니 당연히 관심을 가지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것.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사망한 이의 영혼을 내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고인을 적절히 매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제대로 매장하지 않으면 원귀가 되어서 산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봤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매장 방법이 달라졌다. 왕족은 호화로운 부장품과 제물과 함께 큼직한 무덤에 묻혔다. 음식, 음료, 생전 애용하던 도구도 함께 묻었다. 관을 만들긴 했지만 이집트처럼 사람 모양의 이 아니라 도자기로 만든 독특한 형태의 관에 묻었다. 따로 미라를 만들진 않았다.

왕족이 아닌 사람들은 그냥 집 밑에 묻혔다. 집 바로 밑에 사람을 묻으면 고인이 영원토록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부장품을 그득그득 묻어줄만큼 부유한 집이 아닌 집이 대다수라 부장품은커녕 자주 쓰던 물건 몇 개만 소박하게 묻어주는게 전부였다. 관을 짤 여력도 안되어서 그냥 시체를 카펫이나 천에 둘둘 감아서 묻었다. 일찍 사망한 어린이일 경우 가족 묘지에 있는 큰 항아리 속에 넣어 보관했다. 가끔씩은 고인이 묻힌 자리 위에 이름이 새겨진 돌로 비석을 세워 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은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믿어서 음식을 좀 넣어서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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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루드의 신아시리아 왕비들의 무덤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 세공품들
화장은 권장되는 장례법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불을 피울 목재가 부족한 지방이라 화장할만큼 많은 땔감도 없었을 뿐더러, 화장을 하면 고인이 불행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 시체를 태우면 고인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갈 것이라 믿었는데, 그러면 그 영혼이 신들과 함께 있게 된다고 믿었다. 신들과 함께 있게 된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제대로 된 내세에 가지 못하고 제 주제에 맞지 않는 곳에 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이렇게 된 영혼들은 영원토록 신들 주위에서 겉돌며 불행하게 지내야만 했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반드시 사람을 땅에 매장했다. 땅에 시체를 제대로 매장하고 장례의식을 치러주어야만 나중에 죽어서 그 영혼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후세계는 썩 달가운 곳이 아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웅 길가메시가 괜히 사후세계에 가기 싫어서 세상 끝까지 여정을 떠난게 아니다.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돌아올 수 없는 음울한 땅', '먼지가 가득한 어두컴컴한 곳'이라고 불렀다. 사후세계는 땅 아래, 지표면과 가까운 지하에 묻혀 있으며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우울한 곳이었다.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사후세계로 떠난 여행을 적은 기록을 보면 7개의 성벽과 7개의 성문이 세워진 거대한 도시가 있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지옥이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현세의 선행으로 천당지옥이 결정되는 일반적인 사후관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의 사후세계는 심판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냥 죽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갇혀 있는 장소였을 뿐 그다지 행복한 장소도, 끔찍한 장소도 아니었던 것. 현대 지상세계를 조금 더 어둡고 우울하고 조용한 버전으로 바꾸면 그게 곧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후세계였다.

현존하는 무덤들 중 가장 유명한 건 우르의 왕족 묘지와 님루드에서 발견된 '왕비들의 무덤'이다. 우르의 왕족 묘지는 기원전 3800년경부터 우르의 왕족들이 묻힌 공동 묘지이며 주로 우르 1왕조 시기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님루드의 왕릉은 1988년 님루드 유적에서 발굴되었고 4개의 신아시리아 왕비들의 무덤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왕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아내 야바 왕비, 살마네세르 5세의 아내 바니투 왕비, 사르곤 2세의 아내 아탈리아 왕비, 살메네세르 4세의 젊은 아내 하마 왕비가 그 주인공. 구운 벽돌로 만들어진 무덤들 속에서는 금과 보석들로 만든 수많은 부장품들이 쏟아졌다. 가장 유명한 유물은 야바 왕비의 금관, 정교한 형태의 황금 물병, 하마 여왕의 인장. 그 외에도 팔찌와 귀걸이 등 온갖 악세사리들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ISIS의 준동과 함께 님루드 유적이 이슬람 무장세력에게 점령당했고, 이후 IS의 폭탄 테러로 무덤이 남아있는지조차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IS가 이슬람이 아닌 유적들을 죄다 폭탄으로 터뜨리고 다니는 탓에 아마 멀쩡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만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라크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라크 전쟁에서도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겨우겨우 보존 중이라고 한다.

17. 식문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주식은 뭐니뭐니해도 보리였다. 사람들은 보리로 맥주를 만들어 먹고 마셨다. 먼저 빵의 경우 보리를 빻아 가루로 만든 다음[50] 물과 소금을 섞어 만들었다.[51] 역시 많이 재배했는데 기원전 23세기 아카드 시대 이후로 점차 토지 염화가 심화되자 밀에 비해 높은 염도를 상대적으로 잘 견디는 보리를 재배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메소포타미아인들도 무미건조한 빵에 나름 맛을 좀 내보겠다고 일부러 빵에 건포도대추야자, 호두를 넣어 먹었다. 당시에는 설탕이 없어서 단맛을 낼 때는 을 첨가해서 먹었다. 하지만 이정도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건 왕족이나 고위층에게 한정되었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인들은 그냥 아무 조미료도 들어가지 않은 텁텁하고 맛없는 빵을 꾸역꾸역 먹고 살았다. 전문적으로 빵을 파는 빵집도 있었다. 이들은 보리 뿐만 아니라 기장, 참깨 등 다양한 곡물을 써서 빵을 만들었고 생선 기름, 지방, 참기름 따위도 넣어서 향을 첨가했다. 그런데 우유나 지방을 사용할 경우 무더운 메소포타미아 기후 탓에 빵이 일찍 상하기 쉬웠는데, 그래서 일부 비양심적인 제빵사들은 빵이 상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 강한 향신료를 넣어 썩은 냄새를 가리기도 했다고 한다.

밀을 최초로 대량재배한 곳으로 여겨지는만큼 국수만두가 최초로 만들어진 곳으로도 추정되는데 특히 만두의 경우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고기를 넣어먹는 푀겔헨이라는 요리가 확인되어 설득력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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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로 항아리에 든 맥주를 마시는 고대인들의 모습 오대호 양조회사에서 재현한 고대 맥주[52]
빵과 함께 양대 주식으로 꼽혔던 것은 맥주였다.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53] 생존에 필수적인 영양분을 공급해준다는 점에서도 맥주는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식품이었다. 독특한 점은 빨대로 맥주를 빨아마시는 게 관습이었다는 것.[54] 왕과 귀족들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대롱을 써서 맥주를 마셨지만 일반인들은 그냥 갈대를 꺾어 썼다. 가장 중요한 맛의 경우, 아직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맥주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게 딱히 없다. 그나마 추측해보자면 이 없어서 특유의 쓴맛이 나지 않았고 현대의 맥주보다는 오히려 에 가까울 정도로 걸쭉하고 건더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55]

현대인들도 나름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맥주를 되살려보려고 시도는 해보았다. 시카고 대학교와 오대호 양조회사에서 합동으로 메소포타미아 맥주를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했는데, 고대 토판 기록과 벽화들을 참고해서 결국 '길가메시'와 '엔키브루'라고 해서 2개의 실험적 샘플 브랜드를 만들어냈다.[56] 엔키브루가 조금 더 원본에 가까운 맛이라고 평가받았는데 실제 마셔본 사람의 평에 따르면 김이 빠지고, 미지근하고 신 맛이 강하며 건더기도 많고 밍밍한 맛의 맥주라고 했다고 한다. 건더기가 엄청 많아서 밀알 껍데기가 잔 위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마디로 말하면 '고대인들이 이런 걸 먹었구나' 정도의 맛이지 현대의 공장식 맥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 참고로 색깔은 우윳빛에 가까운 연갈색이었다.

과일채소도 다양하게 먹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렌즈콩 및 병아리콩, 콩, 양파, 마늘, 부추, 멜론, 가지, 순무, 상추, 오이, 사과, 포도, 자두, 무화과, 배, 대추야자, 석류, 살구, 피스타치오 및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특히 개중에서 포도로는 와인을 담가 마실 수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맥주와는 다르게 이쪽은 조금 더 고급 음료라서 아무나 못먹었다. 또한 렌즈콩이나 병아리콩, 을 섞어 마치 죽처럼 갈아 끓인 다음 빵과 같이 부식으로 먹었을 수도 있다는 연구도 있다.

돈이 되는 사람들은 상당히 풍성하게 먹었다. 이 시기 들어서 염소가 가축화되기 시작했으며 , 돼지, 오리, , 비둘기 등 대부분의 가축들을 키웠으며 이들 모두 잡아먹었다. 염소나 소에게 짜낸 우유로는 치즈나 각종 유제품들을 만들어 먹었다. 기원전 1900년에 만들어진 한 조리법 석판에는 100개의 수프 조리법, 20가지의 치즈 제조법, 300개나 되는 빵 제조법이 적혀있기까지 했다. 생선조개도 먹었다. 농경지를 짓는 과정에서 만든 운하에 고기를 풀어놓고 길렀는데, 한 석판에는 50여 종이 넘는 물고기들에 대한 요리 목록이 나와있다. 특히 프랑스 학자 '장 보테로(Jean Bottero)'는 석판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여러 조리법들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매운 고기 스튜, 오리와 야채 스튜, 찐 순무, 구운 비둘기 파이 따위를 만드는 법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즉 부유하고 그만한 재력이 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식단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조리법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다. 기원전 2200년 경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죽, 맥주, 말린 자두를 섞어 끓이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동물 창자에 양념한 속을 채워넣는 기초적인 형태의 소시지 역시 신바빌로니아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며 기원전 2400년 전에 만들어진 기록에 이미 피클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구하기 어려웠던 동물성 지방과 기름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올리브 오일은 물론이고 라드나 동물성 기름, 버터 등은 어디가서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식품이었다. 기름으로 맛을 낸 수프는 특별한 진미였고 종종 왕도 즐겨 먹었다. 육류와 고기는 말할 것도 없이 귀한 식품이라서 예를 들어 양고기 뒷다리를 구운 다음 그 위에 귀한 허브, 올리브유을 뿌려 먹는 경우도 많았다. 그 외에 요구르트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18. 수학

메소포타미아 수학은 60진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1분을 60초, 1시간에 60분, 원에서 한바퀴가 360도라는 개념 자체는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인들의 60진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60진법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수학 발전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숫자 60 자체가 1, 2, 3, 4, 5, 6, 10, 12, 15, 20, 30 등등 다양한 수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합성수이기에 분수로 나타내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하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위치 표기법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왼쪽 열에 더 큰 숫자를 쓰는 등 제대로 된 위치 표기법을 사용해서 수를 표기했기에 더욱 수학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의 경우 계산을 빠르게 하기 위해 미리 표를 만들어놓았다. 예를 들어 기원전 2000년전 만들어진 한 토판에는 59까지의 수의 제곱, 그리고 32까지의 수의 세제곱을 써놓았다. 그렇게 써놓고서 고도의 계산이 필요할때마다 바로바로 표를 보고 썼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곱셈을 단순히 하기 위해 공식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a x b를 계산할 경우, a x b = {(a+b)2-a2-b2}/2로 계산하거나 {(a+b)2-(a-b)2}/4의 계산식을 썼다. 저렇게 보면 복잡해보이지만 큰 수를 계산할 경우에는 직접 계산하는 것보다는 공식을 사용하는 게 더 편했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장제법[57]의 개념이 없었다. 대신 a/b = a x 1/b이라는 개념을 활용했다. 2나 3, 5와 같은 소수들이 나올 때는 60진법에 잘 들어맞았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2나 3, 5로 나누어지지 않는 수가 나올 때는 상황이 복잡해졌다. 예를 들어 1/13을 계산할 경우, 1/13 = 7/91 =~= 7/90 = 7 x 40/3600 = 280/3600 = 4/60 + 40/3600으로 계산했다. 최대한 쪼개고 쪼개서 60진법에 들어맞는 분수로 표현해서 계산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1/7이나 1/11도 계산했다.

루트의 개념도 활용했다. 기원전 1800년 경에 만들어진 토판에 의하면 √2의 값이 상당히 자세히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1 + 24/60 + 51/602 + 10/603 = 30547/21600 = 1.41421296.. 정도가 나온다. 실제 √2의 값과 소숫점 여섯자리까지 비슷하니 고대라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정확한 수준이다. 바빌로니아 수학자들은 이차방정식을 푸는 방법도 따로 고안했다. 기본적으로 표준 방정식을 사용해서 문제를 풀었다. 예를 들어 x2 + bx = c라는 이차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b와 c가 반드시 정수일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c는 반드시 양수여야만 한다. 이 경우 x의 값은 x = -b/2 + √(2/b)2 + c라는 식으로 도출이 가능하다.

심지어 특정 형태의 삼차방정식을 푸는 방법도 있었다. 예를 들어 ax3 + bx2 = c라는 형태의 삼차식이 나왔을 경우, 방정식에 a2를 곱하고 b3으로 나누면 (ax/b)3 + (ax/b)2 = ca2/b3이라는 식이 나온다. ax/b를 y라는 기호로 대체할 시 y3 + y2 = ca2/b3이라는 식이 나오게 된다. 앞서 말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수들의 제곱, 그리고 세제곱을 미리 써놓은 판이 있었다. 이제 저 식이 나오면 그 판에서 일일이 수를 찾아서 넣어보면서 대조해보는 방식으로 답을 찾았던 것이다. 제대로 된 대수학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정도도 상당히 놀라운 수준의 수학 능력이었다. 다만 삼차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하는 공식 도출에는 실패했다.

기하학은 굉장히 발달된 수준이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부피와 겉넓이를 측정하는 일반적인 규칙을 알고 있었다. 원의 둘레를 지름의 3배로, 면적을 둘레 제곱의 12분의 1로 측정했다. 원주율을 대략 3정도로 생각했다는 뜻. 메소포타미아인들도 당연히 원주율이 3보다는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원전 19세기 경에 발견된 토판에는 원주율을 약 3.125 정도로 더 나은 근사치를 제공했다. 이는 실제보다 약 0.5% 낮은 수준이었다. 기하학이 발달했던 이유는 천문학을 연구할 때 기하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별의 뜨고 짐, 행성의 움직임, 일식과 월식 등을 보고 기록할 때에는 각거리와 도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기하학이 발전하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원기둥의 부피는 밑변과 높이의 곱으로 알아냈지만 원뿔이나 정사각뿔 등 절두체의 부피는 높이와 밑면의 합의 절반의 곱으로 잘못 계산했다. 또한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특정 삼각형의 변들 사이의 비율에 대해서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각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개별 삼각형의 변에 대한 연구 정도에 그쳤다.

19. 천문학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천문학은 시대가 몇천년 전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발달된 수준이었다. 특히 바빌로니아인들은 천문 현상이 주기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수학적으로 이를 파악, 예측하려 시도한 최초의 민족이었는데,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판에는 양력 1년 동안 낮의 길이에 대한 수학적 계산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단순히 하루나 며칠 단위가 아니라 몇십년 단위로 천문 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다. '에누마 엔누 엔릴' 문서의 63번 토판에는 무려 21년에 걸친 금성의 주기 변화에 대해 기록을 해놓았을 정도. 인간이 남긴 기록들 중 행성들의 움직임이 주기적이라는 것을 명시한 가장 오래된 문서로 여겨진다. 니네베에서 발견된 상아판에는 별자리행성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단위 변환표가 적혀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른 일반적인 바빌로니아 세계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꽤 되지만 정작 당대의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즉 바빌로니아의 우주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게 없다. 워낙 단편적인데다가 이때까지 밝혀진 것도 드물기 때문. 왜 세계관과 우주관을 다르게 이야기하냐만 당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일반인들의 세계관과 천문학자들의 우주관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알려진 것을 말해보자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하늘과 지구가 구형이라고 생각했으며 상호간의 통합성, 완전성을 중시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지구가 중심이라는 지동설은 아니었다.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구가 우주와 동일한 존재로서 함께 공존하는 존재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한 지구와 우주가 여러 개라고 믿었다는 증거도 있다. 7개의 우주와 7개의 지구가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8]

천문학의 발달은 점성술의 중요성과도 연관이 있었다. 이집트(당시 기준으로 말하자면 나일강 유역)는 북쪽으로는 지중해, 그 외의 지역은 사막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지역이래봤자 동쪽의 시나이 반도골란 고원뿐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폐쇄적인 지형이었다. 그러다 보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비해 정치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지역이었다. 그에 비해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이란 고원,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남쪽으로는 광활한 사막지역, 북쪽으로는 캅카스 지역과 연결된 개방적인 지형이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에 비해서 외적의 침입이 잦았고, 이러한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잘 살아야된다'라는 현세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지금은 비록 힘들지라도 파라오를 믿으면 죽어서는 편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라는 내세적인 면이 많았다고 한다. 본래 이라는 것이 내세의 평안보다는 현세 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와 권력, 명예를 예측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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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리 혜성을 기록한 토판 별을 관측하는 학자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하늘의 움직임이 곧 운명과 미래를 예측한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천문이 절대적이라고 보지는 않았고 사람이 어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도 믿었다. 하지만 애초에 하늘에서 미래를 읽지를 못하면 대처고 뭐고 할수가 없었기에 하늘에서 예언의 징조를 읽어내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는데, 그 대표적인 문서가 앞서 언급한 '에누마 엔누 엔릴'이다. 기원전 2700년 경에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 만든 일종의 예언 지침서다. 예를 들어 '첫째 날에 이 나타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아니면 '달이 왕관을 쓴 형태로 나오면 왕이 가장 높은 명예에 오를 것이다' 이런 식이다. 일식월식은 초특급으로 중요한 이벤트라 아예 지역별로 미칠 영향을 계산하는 내용을 써놓기도 했다.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쓰인 '아스트롤라베'[59]는 천문학에 관해 논한 가장 오래된 쐐기 문자 토판들 중 하나다. 총 36개의 별들을 수록해놓았고 별과 시간을 각각 연결해서 풀어썼다. 굳이 36개의 별을 언급한 건 기존 도시국가 엘람, 아카드, 아무루의 천문학을 합친 걸로 보이는데, 각각 12개의 별들을 대응시켜서 총 3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각각 12개의 별을 1년 12달에 대응시켜서 이걸로 천문도 보고 점도 치고 예언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던 것. 이렇게 3개씩 짝짓는 전통은 엔릴, 아누, 에아 3신의 전통과도 연관이 있는 걸로 보이지만 후대에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점차 사라진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에도 천문학은 여전히 중요한 학문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 학자들은 이론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은 그저 천문 현상의 예측과 관찰에 치중했지 기하학이나 수학을 이용한 특별한 우주론이나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무 업적도 남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칼데아인 천문학자들은 일식 주기 및 사로스 주기를 발견해냈다. 태양이 황도의 움직임과 100%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밝혀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60] 어쨌든 이후 메소포타미아 학자들이 남긴 풍부한 실측 자료와 우주관은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페르시아이슬람 천문학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류 역사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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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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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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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기타

  • 헤로도토스바빌론을 방문한 다음 남겨놓은 기록이 유명하다. 일명 성스러운 매춘이라고 불리는 내용이 개중 가장 잘 알려진 편인데, 내용인즉슨 이슈타르의 신전에서 여자들이 일생에 한번은 매춘을 하고 다녔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다른 문헌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학자들은 처녀성을 중시하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일반인이 매춘을 대놓고 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본다. 즉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61]
이제 바빌로니아의 가장 수치스러운 풍습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은 일생에 한번씩은 무조건 이슈타르[62] 거리 앞에 앉아 이방인에게 몸을 팔아야한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기를 원하는 여인들은 한쌍의 말이 끄는 막을 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일행들을 거느린 채 신전으로 향한다. 이슈타르의 성소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머리에 끈을 묶은 채로 앉아있다; 일부는 들어오고 일부는 나간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방향으로 줄을 서서 여자들 사이를 드나든다. 줄선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여자를 고른다.

여자가 한번 신전에 들어와 앉으면 남자가 무릎에 은화를 던져주고 신전 밖으로 나가 몸을 섞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자가 여자 무릎에 은화를 던질 때에는 '밀리타 여신의 이름으로 너를 원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밀리타는 아시리아인들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부르는 이름이다. 던져준 은화의 값어치는 높을수도 낮을수도 있지만 여인은 남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은화를 던지는 행동으로 이미 은화가 신성해졌기에 거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은화를 던진 남자를 따라가 관계를 맺은 뒤에야, 여신이 내린 신성한 의무를 완수한 채로 집으로 돌아간다. 의무를 끝낸 여인을 다시 사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지위를 갖춘 여인들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나, 못생긴 여인들은 의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일부는 3~4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키프로스 일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 헤로도토스 1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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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소포타미아 건축하면 흔히 등장하는 독특하게 생긴 조각상은 라마수라고 부른다. 인간의 머리와 날개달린 황소의 몸, 때로는 황소의 뿔과 꼬리를 가진 천상의 존재로,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파수꾼 역할을 했다.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여겼기에 궁궐 앞에 쌍으로 세우거나 집을 지을때 벽돌에 새겨 집 아래에 묻기도 했다. 독특하게 앞에서 보면 서있는 것처럼 보이고, 옆에서 보면 걷는 것처럼 보인다. 아시리아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지만 후일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세폴리스 '만국의 문'에 세워놓기도 했다. 여러 라마수 조각상들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박물관에나 전시중이다. 하필이면 아시리아의 본거지인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ISIS라는 최악의 테러단체가 날뛰면서 야외에 보존되어 있던 라마수 조각상들을 죄다 터뜨려버렸기 때문이다.
  • 이때까지 발견된 최초의 문명인만큼 인류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 곳이다. 특히 인류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바퀴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그 외에 농사 기법들의 발명, 야생동물의 가축화, 천문학, 시간의 개념, 글쓰기와 문학, 장거리 무역 등 사람들이 흔히 '문명의 기본조건'이라고 할만한 것들은 웬만하면 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했다. 심지어 세계 최초의 자장가마저도 여기에서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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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의 지구라트 복원 전과 후 모습
  • 현대에 남아있는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면 몇천년 전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썩 나쁘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우르 지구라트의 모습은 대대적으로 수리와 보수 작업을 거쳐서 새로 만들어놓다시피 한 건물이다. 수리작업을 하기 전에는 기단만 좀 남아있는 흙둔덕에 더 가까웠다. 그랬던 유적에 무너진 벽돌들을 다시 쌓고 일부는 새로 벽돌을 새로 추가하기도 하면서 이 모습으로 복원시킨 것.
  • 수메르인들이 남긴 조각상들 중에 기묘할 정도로 눈동자와 눈을 거대하게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 찬찬히 보고 있으면 기묘함을 넘어 무서울 수준.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칠한 경우가 많았다. 후술할 조각상들 처럼 사람에 따라 공포 주의. 이걸 보고 외계인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설득력 있는 가설은 '인간이 신과 합일하는 순간'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런 조각상들은 신전 내에 신을 직접 영접할 수 있는 기도실이나 경당 내부에 배치되었는데, 기도를 드리는 도중 신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환희를 과장해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수메르 조각상의 모습. 사람에 따라 공포감을 줄 수 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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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룰리우마 1세의 석상이 특유의 맹한 눈 때문인지 2023년 해외 유튜브에서 Hittite Jumpscare, Hittite Man이라는 이름으로 뜬금없이 밈이 되었고, 상술한 수메르 조각상들과 수메르어, 길가메시 서사시 영상 등이 밈에 합류하면서 'Bronze Age Shitpost'라는 이름으로 변모, 수메르 중심으로 기원전/청동기 문명 전반을 밈으로 다루는 일종의 밈적 유니버스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수필룰리우마 1세 석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요소가 수메르 출신이다.
  • 앞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세계 최초의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등장했다. 바로 사르곤 대왕이 세운 아카드 제국이 그 주인공. 이전부터도 수메르 도시가 인근 도시를 공격해 병합한 경우는 왕왕 있어왔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국지적 지배나 일시적 지배에 그쳤고 체계적인 제국의 형태를 띠지는 못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다른 지역까지 진출한 국가는 아카드 제국이며, 대부분의 경우 아카드 제국을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본다.
  • 아무래도 온갖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다 보니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차지한 이라크가 유난히 자국 역사에 자부심이 강하다. 물론 현재 이라크의 나라꼴이 혼란스럽다보니 찬란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아바스 왕조시절까지의 이라크에 대한 향수가 강해지는것은 당연할수밖에 없기는 하다. 다만 이게 안 좋은쪽으로 발현되기도 해서 심지어 이라크 교통부 장관 Kazem Finjan이 대놓고 수메르인들이 5,000년 전에 세계 최초의 공항을 건설했다거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명왕성을 방문했다고 헛소리를 한 적도 있을 정도.#
  • 바빌론의 상징이던 이슈타르의 문은 독일 베를린페르가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이 1900년대 초에 바빌론을 발굴하면서 몰래몰래 밀반입해서 들여온 것으로,[63] 이후에는 페르가몬에서 재조립해 전시 중이다. 원래는 이중문이었지만 뒤의 더 거대한 후문까지 복원하기에는 공간이 없어서 크기가 작은 앞문만 전시하고 있다. 이라크 정부에서는 당연히 수차례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독일 측에서는 꾸준히 무시하는 중. 그나마 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바빌론 유적에 복제품을 세웠지만 훨씬 크기도 작고 초라할 뿐더러, 이라크 전쟁 도중 훼손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발굴이 아니라 정권 홍보가 목적이던 후세인이 기존 유적 위에 그대로 자기가 만든 조잡한 복제품 건물들을 얹어놓으면서 유구 훼손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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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 대왕의 생전 모습 복원도
  • 메소포타미아 인물 부조들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건 곱슬곱슬하고 컬을 넣은 것 같은 수염과 헤어스타일이다. 수염이 턱 전체에 북실북실하고 길게 나는 중동계열 민족이었기에 가능한 스타일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도 이 수염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향유를 발라 관리하거나 조심스럽게 땋고 다녔다. 곱고 아름다운 수염은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고 웬만한 사람들은 수염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 물론 부조에 묘사된만큼은 올록볼록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고대인들은 굉장히 풍성한 수염을 길렀다. 위 사르곤 왕을 재현한 사진을 보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4. 관련 문서



[1] 아케메네스 왕조바빌론 함락. 좁은 의미로는 기원전 539년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종결로 보지만, 넓게 보면 기원후 651년 사산 왕조의 멸망과 이슬람의 도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완전한 종결로 본다.[2] 이란 남서부 일대에 걸쳐져 있고 수사(susa/shush)가 유명한 도시이다.[3] 여기서 말하는 '전쟁'이란 단순한 부족간 싸움 따위가 아니라 최소한 국가와 국가 수준에서 벌이는 전면전을 의미한다.[4] 사실 현대에도 강 유역 지점만큼은 제법 비옥한 땅이 있기는 하다. 물론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에 비하면 튀르키예의 댐 건설로 강의 유량도 줄어들고 토지 염화 등의 이유로 훨씬 나빠졌다.[5] 주로 호수가 많은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의 중류와 하류, 그리고 이들이 합류하는 샤트알아랍 강 부근. 그런데 사막화가 심해지면서 습지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6] 하마의 영어 표현인 'hippopotamus'의 'potamus' 역시 '강'이라는 뜻으로 어원이 같다.[7] 페르시아어아랍어로 낮은 땅이라는 의미이다. 네덜란드 아랍 정도는 아니지만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페르시아인들이 보기에는 평지인 이 지역은 낮은 땅이라고 생각했던 것.[8] 인류에게 있어서 아직 본격적인 문명이 출현하기 이전의 시대로, 이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별개의 부족들이 흩어져 각자의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고 살았다. 다음은 그중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던 부족들의 문화권과 그 문화권들이 위치했던 현대 이라크의 행정구역이다.[9]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수메르인들이다.[10]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의 활동 시기다.[11] 이 카시트인들이 바빌론을 다스렸던 시대를 중바빌로니아라고 통칭해서 부르며, 3번째로 바빌론 기반 왕조를 세웠다고 해서 '제3왕조'라고도 한다. 하지만 고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 사이에 카시트 왕조의 바빌로니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바빌론 지방은 수많은 왕조들이 갈아치워졌다. 카시트 왕조가 망한 후에도 '제4왕조'라고 불리는 이신 제2왕조, '제6왕조'라고 불리는 바즈 왕조, '제7왕조'였던 엘람 왕조 등 수많은 왕조들이 잠깐잠깐 바빌론을 지배했는데 이들 모두를 통칭해서 바빌로니아라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바빌론 제8왕조가 신아시리아에게 정복당했고, 이 아시리아의 정복기를 제9왕조라고 구분한다. 이후 신아시리아를 몰아낸 신바빌로니아를 '제10왕조'로 본다.[12] 사실 이전에도 석기로 그릇을 만들어 쓰기는 했다. 기원전 9,000년경에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흔한 화강암이나 설화석고를 그대로 깎은 다음 모래로 연마해 광을 내어 그릇으로 썼던 것.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마에 넣어 불에 구워 만드는 도자기는 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등장한다.[13] 가장 대표적으로 부장품들의 차이만 봐도 사회 계급화의 모습이 보인다. 이전까지는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평등한 공동체 단위였다면 우바이드 문화권에 들어서는 점차 엘리트 계급과 하위 일반 계급이 확연히 나뉘게 된다.[14] 나귀는 아라비아와 중동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운송 수단들 중 하나였다. 인간의 운송량보다 2배나 더 많은 양을 운반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15] 이 시대의 문자는 아직 상형문자의 단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쐐기문자의 모습을 갖춘 건 이후의 젬데트 나스르 시대다.[16] 이 시기에 발견된 실린더 인장 유물에는 바퀴 대신 썰매를 이용해 물건을 옮기는 모습들이 더 자주 나타난다.[17] 토판이 발견된 유적지 '젬데트 나스르'에서 이름을 따왔다. 독특한 색조의 도자기들이 주요 유물이다. 가장 핵심적인 건 이 시대에 상형문자 수준에 머물러 있던 문자가 더 정제되고 단순화되면서 익숙한 쐐기문자의 형태로 진화했다는 것이다.[18] 특히 이 라가시의 에안나툼 왕은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친 걸로 유명하다. 독수리 비석이 가장 대표적인 유물.[19] 정확히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타 왕국들을 정복하여 지배하는 제국의 형태를 갖춘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부 학계에선 아카드 제국을 정확히 인류가 세운 첫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논쟁이 있다. 이전에 수메르 문명에서도 인근의 도시들을 공격해서 병합한 경우는 몇번 있어왔기 때문.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다른 지역까지 진출한 국가는 아카드 제국이며, 대부분의 경우 아카드 제국을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본다.[20] 이 우르남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300년이나 앞선 법전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성문법이다.[21] 참고로 이과정에서 히타이트는 시리아를 놓고 미탄니 뿐만 아니라 이집트 신왕국과도 전쟁을 치렀다. 이때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치른 전투가 바로 카데시 전투다.[22] 아시리아는 중아시리아 시기 들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제국으로 성장했다. 중아시리아는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대립하면서 북부 지방의 패권국으로 자리할 수 있었는데, 팽창과 쇠퇴를 반복하면서 인근 국가들과 끝없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훗날 아다드 니라리 2세 시대부터 이전과 궤를 달리할 정도로 급격히 성장하는데 이때부터는 따로 '신아시리아'라고 구분하는 것이다.[23] 크레타인들의 공백을 메꾸고 해양 무역을 독점한 민족이다. 유명한 알파벳을 전파한 것도 이들이며 후일 로마와 겨루는 도시국가 카르타고도 이들이 세운 국가다.[24] '바빌론 제3왕조'였던 카시트 왕조는 이때 엘람인들에게 망했다. 다만 엘람인들은 본거지가 멀리 떨어진 이란 지방이라 오랫동안 바빌론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후 엘람인이 물러가자 이신 제2왕조라고도 불리는 '바빌론 제4왕조'가 세워진다. 하지만 제4왕조 역시 딱히 강력하진 못했고 '제5왕조', '제6왕조', '제7왕조', 제8왕조'가 연달아 들어섰지만 역시나 혼란스러웠다. 이후 아시리아가 바빌론을 정복하자 이를 '바빌론 제9왕조'라고 부른다. 아시리아를 몰아내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다.[25] 아시리아에 대한 타 민족들의 증오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게 성경요나서다. 성경에 의하면 요나는 아시리아 니네베의 주민들에게 회개하라 이르고 40일 후 니네베가 무너질 것이라 선포했다. 니네베의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자 하나님은 예고한 것과 달리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요나는 이에 분개해 하나님에게 따졌다. 이 대목에서만 봐도 유대인들이 아시리아를 상당히 증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6] 이때 망한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8왕조'고 훗날 나보폴라사르가 세운 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다.[27]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이다.[28] 다만 엄밀히 말하면 '세계 최초의 성문법'은 아닌데, 훨씬 이전인 초기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우루카기나 법전'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국가 라가쉬의 왕 우루카기나가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루카기나 법전은 원본이 아예 소실됐고 다른 유물에 언급되거나 인용되는 형식으로만 등장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성문법은 분명 우르남무 법전이 맞다.[29] 다르게 보면 사적제재를 금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만일 법에 불복해서 가해자를 죽였다고 가정하면 이번에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법에 의해 죽을테니까.[30] 예를 들어 우루크의 왕들은 도시의 최고 대신관 직을 겸직했고, 사르곤 왕은 자신의 딸 엔헤두안나 공주를 인안나 여신을 모시는 최고 여사제로 임명하기도 했다.[31] 서기들이 쓴 문서의 97%는 물건 계산 같은 행정문서와 영수증이었다. 압도적 다수의 서기들은 실질적인 업무만 다뤘고 이들이 문학작품을 쓰거나 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32] 참고로 당시 왕궁은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메소포타미아 버전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곳이었다.[33] "A Scribe and His Perverse Son"(어느 필경사와 그의 말썽꾸러기 아들)로 불리는 위 글의 전문은 The Sumerians: Their History, Culture, and Character 244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34] 적군이 가까이 오면 목을 베거나 찌르기 용도로 가지고 다니던 철제 단검이었다.[35] 재현한 결과 이런 갑옷은 거의 9kg에 달했다. 9kg에 달하는 무게의 갑옷을 만들 청동은 매우 값비쌌으므로 아무나 입고 다닐 수 없었다. 보병들을 묘사한 대부분의 부조를 봐도 보병이 이런 청동갑옷을 입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36]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604년 아쉬켈론을 불살랐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신바빌로니아가 아예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신아시리아에 비하면' 조금더 온건하다는 것 뿐이다.[37] 사실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토양이 오히려 하부 메소포타미아보다도 더 비옥했다. 하지만 조금씩 구릉이 있는 고원지대인 상부와는 달리 하부는 완전히 평평한 평야라 대규모로 구획을 나누어 농사를 짓기 훨씬 용이했고 결과적으로는 훨씬 생산량이 많았다.[38] 당나귀나 소 따위가 끄는 일종의 나무 판에 부싯돌을 붙인 도구로, 얘네가 움직이면서 곡식과 줄기를 분리하고 타작하는 역할을 했다.[39] 왕의 정원에 이색적이고 달콤한 과일이 많을수록 그 왕의 권력이 강대하는 것이었기에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왕들이 미친듯이 희귀과일들을 모았다고 한다.[40] 더 자세히 말하면 요나는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니네베가 망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위로 포도덩굴을 키워 햇빛을 가리자 참 좋아했는데, 다음날 덩굴이 시들어버리자 매우 슬퍼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너는 네 노력으로 키우지 않은 포도덩굴 하나마저도 그리 소중히 여기는데, 내 어찌 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41] 주로 밀랍을 수집하는 게 목적이었다.[42] 이때 메소포타미아 일대 대부분의 숲을 죄다 잘라낸 탓에 사막화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는 연구가 있다.[43] 참고로 메소포타미아 교역로는 실크 로드를 거쳐 이슬람 왕조 시대에도 번성했지만,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와 유럽 간의 직통 항로 발견, 그리고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이라는 치명타를 연쇄적으로 얻어맞으면서 거의 몰락해버린 상태다.[44] 이라크에 28개, 이란에 4개가 남아있다.[45] 온갖 모습의 숄과 천을 몸에 온통 둘둘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숄 끝이나 모서리에는 두툼한 술들이 달린 경우가 많았다.[46] 아시리아의 대도시 님루드에서 발굴된 하마 여왕의 금관이다.[47] 엔릴 신은 여름과 겨울의 다툼을 쭉 들어본 뒤, 겨울에 농부들이 작물을 뿌리고 한해 농사를 준비하기 때문에 겨울이 더 중요한 계절이라고 판결한다.[48]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내용도 한 젊은이가 왜 자신이 죄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따지다가 구원받는 내용이라 딱히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악의 문제 문서 참조.[49] 푸아비 여왕의 왕실 무덤이 발견되긴 했지만 그 장례 물품이 고대 이집트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덜해서 유명하지 않다.[50] 맷돌로 보리를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51] 다음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빵을 만드는 방법이니 집에서 따라해봐도 좋다. 먼저 보리 가루 400g, 물 1컵(대략 200ml), 소금 반 티스푼 정도를 준비한다. 다음 보리가루와 물, 소금을 모두 섞어 반죽을 만들고, 반죽을 치대서 넓게 둥글게 편다. 평평해진 반죽 위에 옷을 덮고 하룻밤 정도 서늘한 곳에 내버려두고 발효시킨다. 발효가 끝나면 오븐 온도를 160도 정도로 맞추고 30분 정도 굽는다. 이렇게 하면 메소포타미아인들이 4,000년 전에 먹었던 것과 거의 흡사한 빵이 만들어진다. 물론 맛이야 파는 건강식 크래커보다도 한참 못한 수준.[52] 정말 100% 완벽히 구현하고 싶었다면 아래에 갈색 건더기들이 가득 깔려 있어야 정상이지만 먹기 편하도록 위의 하얀 맑은 액체만 걸러내고 정제한 것이다.[53] 한 토판에는 남녀가 성관계를 하고 있는 도중 여자가 고개를 숙여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54] 물론 그냥 잔에 따라붓고 바로 마셔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일도 많았다는 뜻이다.[55] 증류 전의 위스키와 비슷하기에 원시 위스키라고 보아도 좋다.[56] 느낌이 오겠지만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두 영웅 길가메시와 엔키두에서 이름을 따왔다.[57] 장제법(長除法, Long division) 또는 긴 나눗셈은 산술에서 손으로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여러 자리의 수를 나누는 데에 적합한 표준 나눗셈 알고리즘을 의미한다.[58] 이는 일곱 세대의 신들이 있다는 신앙과도 연관이 있었다.[59] 후대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천문 계산기 아스트롤라베와는 다르다.[60] 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로 돌기 때문에 그렇다. 원일점 주위에서는 더 느리게 움직이고 근일점에서는 더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61]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잘못된 기록을 남겼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노예를 시켜 지었다거나, 나름 명군 축에 끼던 쿠푸카프레를 피에 미친 폭군으로 묘사했다거나...[62] 본문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이라고 쓰여있다.[63] 이라크에서 밀반출을 하기 위해 벽돌들을 석탄 통에 담고 짚을 덮어서 위장까지 해가며 싸그리 털어갔다. 이슈타르의 문만 가져간 게 아니라 그 앞에 있던 행진의 거리 부조도 털어갔는데, 120개의 도자기 사자 부조 중 118개를 몰래 가져갔을 정도로 싹싹 털어갔다. 하지만 만약 이때 반출되지 않았다면 이라크 전쟁과 각종 내전, 테러로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독일의 문화재 도둑질이 용서되는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