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7:50

이라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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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구3. 고대
3.1.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성3.2. 통일 제국들의 등장3.3. 신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3.4. 페르시아 제국들의 통치
4. 중세
4.1. 이슬람 제국4.2. 이슬람 황금기4.3. 외세의 침략과 쇠퇴
5. 근세6. 근대7. 현대

1. 개요

이 문서는 이라크역사에 대해 다룬다.

2. 연구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은 고고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전에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영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대인들이 원래 살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고 아브라함 일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게 되고 이집트에서 머물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뒤로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한 강국들의 지배를 여러 번 받았다. 이 때문에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에도 고대 이라크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과 풍습에 대해 실리게되었으며, 유대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파생되면서 기독교 경전인 성경과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서도 같이 실리게 되어 기독교와 이슬람 신도들에게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와 문화가 각인되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역시 그리스·로마, 페르시아 등의 문명과 융합되었으며, 이후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아랍 문화권에 통합된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기록은 그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다.수메르 왕 명부에 기록된 대홍수가 바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나, 에덴 동산도 이라크 남부 일대로 추정하는 가설 등등 성경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교분석하는 연구는 근세부터 활발했다.

당시 사용된 쐐기 문자는 점토판 위에 얇은 갈대 줄기로 삼각뿔이나 쐐기꼴을 새기는 방식으로 표현된 설형 문자였다. 처음에는 그림과 기호로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쳤지만 이후 쐐기 문자는 발음까지 담아낼 만큼 압축된 형태로 발전하여 다양한 응용성을 갖추게 되었다. 쐐기 문자가 기록된 점토판들은 해당 지역의 건조한 기후로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었고 근대 고고학자들의 발견과 연구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3. 고대

3.1.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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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도시 국가 패권경쟁 아카드 제국 제국 해체 / 구티 족 수메르 르네상스
N 신석기 청동기 니네베 / 아르벨 / 앗수르 아카드 제국 네와르 / 우르케쉬 / 안다리크 수메르 제국
H 하란 에블라 하란 / 아붐 / 안다리크 하란 / 투툴 / 사가르툼
E 에블라 마리 아카드 제국 에블라 / 우그리트
M 마리 아카드 마리 우르 남무 제국
L 수메르 문명 우바이드 기 - 에리두 우루크 기 - 왕조 출현 라피쿰 키시 아카드 - 사르곤 아카드
A 우루크 우르 A A 구티 왕조 구티 우르 제3왕조
K 라가쉬 움마 우루크 우루크 구티 족
U 우르 우루크
G 라가쉬
L 라가쉬 라가쉬
H 금석병용기 수사 / 엘람 제1왕조 고대 엘람(아완 / 슈스타르 왕조)
제국 해체와 아모리 인 대 혼란기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아모리 인)
Y 수메르 얌하드(알레포)
H
N 고대 아시리아 왕국 에쉬누나 <colbgcolor=#003153> <colbgcolor=#003153> 시리아 바빌로니아 제국 - 함무라비 대왕 아시리아
E 에쉬누나 <colbgcolor=#20b2aa> 데르 에칼라툼 둘 - 카틀리무
M 제국 M 마리 시리아 마리 바빌로니아 제국 M 카시트/테르카
A 엘람 <colbgcolor=#8b0000>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의 침입
S 이신
왕조
니푸르 / 시파르 바빌론 바빌로니아
B 바빌론 바빌론 바빌로니아
I 이신
왕조
카잘루 I 시랜드
K I 라르사 우루크 라르사 U 시랜드
U 라르사 라르사 엘람 제국 L 시랜드
G 라르사 시랜드
L 라가쉬
H <colbgcolor=#00bfff> 고대 엘람 (시마쉬 왕조) 고대 엘람 (에파르티 왕조)
카시트 인 / 미탄니 히타이트 중기 아시리아 제국
Y 히타이트 제국 E 미탄니 미탄니 제국 이집트 히타이트 제국 히타이트 히타이트 바다 민족 이신 <colbgcolor=#003153> 아시리아 제국
H 미탄니 미탄니 히타이트 <colbgcolor=#003153> 아시리아 제국 <colbgcolor=#003153>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colbgcolor=#003153>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E 아시리아 아시리아 M
N 고 아시리아 왕국 시리아
M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
A
S 카시트 왕조
B 카시트 왕조 카시트 왕조 엘람 제국 이신
왕조
I 이신
K 시랜드 왕조
U
L
H 엘람 (암흑기) 중세 엘람(안자니트 왕조)
중기 아시리아 제국 암흑기 신 아시리아 제국(~ BC 607)
Y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 운키 / 비트 아구시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Y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아시리아 제국 - 아슈르바니팔
H 카르케미쉬 우라르투
D 나이리 아시리아 아시
리아
R 비트 바히니
E 아시리아 나시비나 /
비트 아디니
N
A 아시리아
S 아나토 아나토
M 라카 / 힌다누 / 수부 아나토
B 이신
왕조
이신
왕조
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
엘람 / 토착 왕조
제국 바빌로니아 - 칼데아 왕조 칼데아 B
I 제국 제국
K
U 바빌로니아
L
H 엘람 (중간기) 신 엘람 (안자니트 왕조)
오리엔트 제국 헬레니즘 로마 제국 vs 이란 제국 이슬람 제국 중세
신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 마케도니아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 아르메니아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 - 이란 제국 동로마 제국 정통 칼리프 - 라쉬둔 왕조 우마이야 칼리프 제국 압바시야 칼리프 제국 <colbgcolor=#008000> 함단 왕조 셀주크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
이란 제국
사산 왕조 부와이흐 왕조
| N: 북부 니네베 | B: 중부 바빌론 | I: 중남부 이신 |
| U: 남부 수메르(우르·우루크·라가쉬 등) |
}}}}}}}}} ||

인류는 동아프리카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북상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프리카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이라크 지방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먼저 인류가 정착한 지방들 중 하나로 이미 몇십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다. 자그로스 산맥 근처에 있는 '샤니다르 동굴'에서는 기원전 8만년 경에 매장된 네안데르탈인 10명의 유해가 발견됐는데, 이 매장지에서 시신 주위에 꽃잎을 뿌렸고 노인과 약자들이 치료받은 흔적들이 보이는 등 이때부터 이미 나름대로의 부족을 이루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격적인 '문명'은 기원전 1만년 경 이라크로 신석기 혁명이 전파되면서 시작된다.[1]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유명한 수메르 문명이 바로 이시기에 태동한 것이다. 기원전 6천년 중반 경 수메르인들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2] 우바이드 문화권이 일어났다. 이후 초기 청동기 시대인 우루크 시대[3]를 거치며 왕과 도시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수메르인들을 시작으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생겨난 국가와 문화들을 합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부른다.

3.2. 통일 제국들의 등장

파일:아카드 제국.png
파일:500px-Ur_III.svg.png
아카드 우르 제3왕조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4세기 아카드 제국의 침공으로 몰락했다. 세계 최초의 제국이기도 했던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처음으로 통일하며 번영했지만 유목민족 구티 왕조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다. 태생이 유목민족이라 행정능력이 부재하던 구티 왕조는 아카드를 멸망시켰지만 역시나 얼마 못가 무너졌고, 그 이후 우르를 중심으로 한 우르 제3왕조가 들어섰다.[4] 우르 제3왕조는 기원전 2000년 즈음에 약 100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합해 다스렸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들도 쇠퇴했고 아모리인, 엘람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야 만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다스리던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지자 메소포타미아는 도시국가들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이신라르사라는 2개의 대도시가 경쟁하는 이신-라르사 시대가 도래해 서로 패권을 겨루었던 것. 이 혼란기는 기원전 1700년대에 함무라비 대왕의 고바빌로니아가 등장해 메소포타미아를 재통일하면서 일단락된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했던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대왕 시절에 함무라비 법전 등을 남기며[5] 문화 발전을 이룩했지만, 함무라비 사후 시들시들해가더니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3.3. 신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

파일:1200px-Hammurabi's_Babylonia_1.svg.png
파일:kassite_dynasty.webp
고바빌로니아 고바빌로니아 멸망 후 혼란기
고바빌로니아가 무너지고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역대급 혼란기에 휩싸였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카시트 왕조가, 북부는 미탄니아시리아가 연이어 석권하며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다만 카시트 왕조를 포함해 바빌론 계열 왕조들은 경쟁에서 열세였다. 아시리아에게 공물을 바치는가 하면 저 옆의 엘람에게 공격받아 치명타를 입는 등 암흑기를 전전했다. 그렇게 몇 백여년이 지속되던 중, 기원전 12세기에 바다 민족이라는 최악의 재앙이 등장했다. 바다 민족은 히타이트, 미케네 문명 등 지중해권 국가들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고, 아시리아와 바빌론 왕조들은 살아남았지만 경제적 치명타를 입은건 마찬가지였다.

이 위기를 빠르게 극복해내고 기회를 잡은 것은 바로 아시리아였다. 기원전 911년 경 명군 아다드 니라리 2세는 아람인들을 몰아내고 바빌론 군대를 격퇴했으며, 아시리아를 메소포타미아 북서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돋움시켰다. 이때부터의 아시리아를 이전과의 아시리아와 구분해 '신아시리아 제국'이라고 부른다. 신아시리아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등 연달아 명군이 재위하며 국력을 만방에 떨쳤다. 시리아,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고 바빌론, 나중에는 고대 이집트마저도 점령하며 메소포타미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했다.[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Assyria.png
파일:Neo-Babylonian_Empire_under_Nabonidus_map.png
신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하지만 신아시리아 제국은 피정복민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7] 특히 점령지인 바빌론에서 반란이 끝없이 일어나자 질린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을 아예 작살내놓는 수준까지 파괴했는데, 오히려 이 것이 도화선이 되어 아시리아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던 것이다. 신아시리아가 민심을 잃자 칼데아인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26년 고토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새 왕국을 세우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신바빌로니아다. 신바빌로니아는 곧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하에서 엄청난 번영을 누렸는데, 에테멘앙키, 이슈타르의 문 같은 것들도 모두 이 시기의 건축물들이며 성경으로 유명한 바빌론 유수도 이 신바빌로니아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이자 부유한 메트로폴리스였다.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던 신바빌로니아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몰락했다. 가장 큰 원인은 동쪽에 자라나던 괴물 키루스 2세였다. 안샨 왕국의 왕이었던 키루스 2세는 천재적인 군재와 관용 정책으로 메디아를 집어삼키고 거대한 아케메네스 왕조를 건국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군대가 바빌론을 함락,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며 이라크 일대도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키루스 2세는 관용을 베풀어 기존의 종교와 귀족층을 인정해주었고, 이는 메소포타미아가 자연스레 페르시아 헤게모니 아래에 편입될 수 있게 만들었다.[8]

3.4. 페르시아 제국들의 통치

3.4.1. 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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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지도.png

신바빌로니아의 함락으로 인해 토착 메소포타미아계 왕조, 즉 이라크 원주민계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새롭게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차지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존의 종교 제례와 엘리트 계층들을 그대로 흡수했다. 옛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을 보고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물론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워낙 고유 세력이 강력해 반란이 자주 일어났지만 페르시아 황제들은 연달아 이를 진압하며 일대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 일대가 정복당했다지만 바빌론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바빌론의 지배자가 곧 세계의 지배자라 불릴 정도로 여전히 바빌론의 위상은 유효했다. 키루스 2세도 후계자 캄비세스 2세에게 가장 먼저 물려준 칭호가 '바빌론의 왕'이었다. 다른 칭호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갖고 있었지만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만큼은 미리 아들에게 승계해줘서 권력 기반을 다지도록 했던 것이다. '바빌론의 왕 = 서아시아의 왕'이라는 개념은 캄비세스 2세 사후까지도 쭉 이어졌고 바빌론이 정복당한지 시간이 한참 흐른 다리우스 1세 시절 가서야 어느 정도 약해졌다.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으로 잠시 제국이 흔들리자 바빌론은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토착 통치자 니딘타-벨이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는 칭호를 쓰고 반란을 일으켰고 아시리아 일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다리우스 1세는 즉각 반란을 진압했지만, 얼마 가지 않은 기원전 514년 네부카드네자르 4세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다리우스 1세도 바빌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반란을 강경진압했고 성벽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다만 벨 신전 등 핵심적인 건물들은 여전히 보수하며 종교제례를 치를 수 있도록 장려했다.

그렇게 페르시아 치하에서도 여전히 번성하던 바빌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쳐들어오면서 헬레니즘 제국 치하로 들어갔다.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며 그리스계 왕조 아래로 편입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단명하자 바빌론을 포함한 이라크 일대는 셀레우코스 왕조 아래로 들어갔다. 이라크 일대는 이때도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다만 정작 이라크의 기존 중심이던 바빌론은 그렇지 못했는데, 셀레우코스 왕조가 티그리스 강변에 새로운 수도 '셀레우키아'를 지었기에 바빌론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3.4.2. 파르티아사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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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나치게 방대한 영토와 민족 갈등으로 인해 점차 쇠락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몰락하자 새롭게 떠오른 패권국은 바로 파르티아였다. 기원전 2세기 중반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방 영토를 거의 모조리 먹어치웠고, 이로 인해 이라크 지방 역시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파르티아 제국 역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핵심 영토로 간주하고 이 곳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에게는 불행이었던 것이 바로 서쪽의 로마 제국의 존재였다. 로마 제국은 최대 경쟁국 파르티아를 꺾기 위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파르티아를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잠시간 로마 제국 아래에 편입된다.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공격, 점령한 뒤 메소포타미아 속주와 아시리아 속주를 개설했다. 물론 파르티아 역시 이를 가만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아서 여러 차례 이 곳을 공격해 이라크 땅을 뺏고 뺏기는 쟁탈전을 계속했다.

기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가 빠르게 씻겨나가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다. 서기 1세기 경에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가 전래됐고 특히 시리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세가 강해졌다. 수메르-아카드 전통의 기존 종교들은 급속히 소멸됐고 설형문자를 읽을 수 아는 사람들의 수도 크게 축소됐다. 물론 옛 아시리아 지방에서는 서기 4세기까지도 아슈르 신에게 공물을 바치긴 했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그 세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줄어들어버린 상태였다.
파일:1024px-Map_of_the_Parthian_Empire_under_Mithridates_II.svg.png
파일:1280px-SassanidEmpirebiggerbymae.png
파르티아 사산 왕조
파르티아는 로마 제국에게 연달아 얻어터지며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특히 오현제 시기를 지나며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던 로마 제국을 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파르티아는 1세기 안에 수도를 3번이나 털리는 굴욕을 겪었다. 결국 새롭게 등장한 사산 왕조에게 동방의 패권을 내주고 사라지고야 만다. 중동의 패권을 장악한 사산 왕조는 아르다시르 1세 제위 시기부터 고대 로마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사산 왕조 군주들은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의 관개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 개선하여 농업 생산량을 다시 끌어올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로마 제국을 기습하여 납치한 사람들의 노예 노동으로 조달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일대에서 유행하던 기독교는 상술한 이유 및 교역을 통해 이웃한 같은 시리아어를 공유하던 사산 왕조의 중심지에도 급속도로 전파된다. 이라크 일대의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파동로마 제국의 교리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신자들끼리는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하였다. 사산 왕조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이라크 일대이긴 했으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인들보다는 동쪽 시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같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주민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이라크 남부의 아랍 기독교 왕국 라흠 왕국을 속국으로 두는 아랍인들과도 교류가 적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저지대라는 의미의 네덜란드? 이라크라는 지명이 생긴다.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를 뜻하는 '알 자지라'로 불리기 시작했고,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절벽' 혹은 '저지대'를 의미하는 '이라크 이 아랍'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대 이라크라는 국명이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사산 왕조는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무려 500년에 걸쳐 이라크 땅을 지배했다. 6세기 중반에는 호스로 1세가 메소포타미아 땅을 미샨, 아시리아, 아디아베네, 크바르바르 이렇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개중 가장 서쪽에 있는 '크바르바르' 주가 현대 이라크와 거의 영역이 겹친다.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 역시 이 이라크에 위치해있었다.

사산 왕조는 590년 즉위한 호스로 2세 시절에 최절정기를 맞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하지만 호스로 2세가 동로마 군대에 뒤통수를 맞고 패배, 황제의 권위가 땅으로 떨어지며 사산 공위시대가 개막했다. 수많은 군벌들이 들고일어나 전쟁을 벌이며 이라크 일대도 혼란스러워졌는데, 이때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이슬람이었다. 수도가 이슬람이 발흥한 아라비아 반도와 가까웠던 점 때문에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 지역은 아랍인들에게 금세 정복되었고, 중심지를 상실한 사산 왕조는 급속히 몰락해 망했다.

4. 중세

4.1. 이슬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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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이야 왕조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사산 왕조와 이슬람 군대가 충돌한 건 634년에 일어난 '다리 전투'인데, 여기서는 5천의 이슬람 군대가 사산 군대에 패배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거대한 대군을 동원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로 쳐들어갔고,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성공적인 지휘 하에 1년도 안되어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제외한 이라크 전역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636년에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비가 이끄는 대규모 무슬림 군대가 카디시야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고 얼마 안가 수도 크테시폰을 쳐 떨어뜨렸다. 638년 말까지 무슬림들은 이라크 일대를 완전히 먹어치웠다. 사산 최후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페르시아 동부로 도망갔지만 결국 651년 살해당했다.

사산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온 세력은 정통 칼리파 시대이슬람 제국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아랍인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근거지로 삼는 대신에 히자즈 지역과 교통이 편리한 병영도시 두 곳(쿠파, 바스라)을 새로 건설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최후의 정통 칼리파이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사망하면서 정통 칼리파 시대는 종결된다. 이후 권력을 잡은 건 무아위야 1세가 세운 우마이야 왕조였다.[9] 아직 우마이야 왕조 당시에는 과거 사산조 페르시아의 인구 밀집지대의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대거 개종하지 않고 기존 종교[10]를 유지하던 상황이었고, 칼리파들은 아랍인들이 이들에 완전히 동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신도시 푸스타트(오늘날 카이로의 전신)를 세워 아랍인 군인들을 주둔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쿠파와 바스라는 우마이야 칼리파조 동부의 중심 기지 역할을 맡았다.

우마이야 왕조는 강력한 아랍인 중심 정책, 개중에서도 쿠라이시 씨족 중심 정책을 펼치며 타 민족들의 반감을 샀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인들을 1등 신민으로 여겼고, 페르시아인이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2등 신민으로 여기며 이들의 문화에 젖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우마이야 왕조가 우려했던 바대로 호라산 일대에 주둔했던 아랍인들은 문화적, 언어적으로 페르시아화되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대정책에 반감을 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아바스 왕조였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감을 교묘히 이용해 반란을 선동, 결국 다마스쿠스를 함락하고 새로운 칼리파로 즉위했다.

4.2. 이슬람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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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와 당시 바그다드의 모습
아바스 왕조가 중동의 패권을 잡으면서 이라크는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중심지가 지중해에 접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였다면, 아바스 칼리파의 중심지는 시리아 일대에서 좀 더 동쪽으로 이동한 이라크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바스 왕조의 신도시이자 수도 바그다드가 건설된 것을 계기로 이라크는 이슬람 제국의 중추 지역으로써 역대급 번영을 누리게 되는데, 이를 곧 이슬람 황금기라고 부른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은 그리스 철학과 과학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후원했고 바그다드는 한 때 세계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9세기 초 바그다드에 여러 번역본이 돌았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여러 저술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라크 출신 네스토리우스파 신도였던 이스하크 이븐 후나인은 갈레노스히포크라테스의 두루마리 150여 편을 혼자서 번역했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 초기 번성했던 이슬람 사변철학 학파 무타질라 학파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 바그다드에서 고대 그리스 학문만 연구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문명 초기에는 그리스보다 페르시아와 인도의 과학과 철학 영향력이 더 컸으며, 이후 아바스 왕조가 쇠퇴한 이후 셀주크 제국이 바그다드 칼리프를 보호하고 예속시키는 과정에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튀르크어족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아바스 왕조가 건설한 신도시였던 바그다드에는 정교회 성당과 유대교 시나고그가 들어섰다. 전성기 당시 바그다드에는 45,000여 명의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였을 정도였다. 바그다드에 시장에서는 중국산 자기, 중앙아시아산 비단, 러시아산 모피, 이란 쉬라즈에서 수입한 자두, 팔레스타인에서 재배한 모과, 시리아산 무화과, 이집트산 과자, 인도 말라바르산 후추가 유통되었으며 부하라에서 수박이 얼음과 함께 바그다드로 실려와 판매할 정도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바그다드의 부는 일부 부유층들에게만 집중된 것이 아니었으며 시민 상당수가 번영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하룬 알 라시드알 마문은 종종 서민으로 변장하고 바그다드 시장으로 내려가서 일반인들이 들리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먹곤 했는데,[11] 여기에는 일반인들의 생활상이나 소문 등을 듣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당시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이 칼리파에게 대접되는 음식과 다를 바 없이 맛있었다는 말이 된다. 보통 서구에서 요리의 역사는 왕족이 먹는 음식을 귀족이 따라하고, 귀족이 먹는 음식을 부르주아 계층이 따라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는데[12] 당시 이미 바그다드에서는 왕족들이 몰래 변장하고 서민들이 먹는 일반 식당 음식을 사먹을 정도로 요리 문화가 발달하였다는 말이 된다.
알 마문의 조카이자 아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파였던 알 무타와킬이 어느날 배를 타고 가는데 한 선원이 요리하고 있던 시크바자 수프가 끓는 냄새가 냈다. 시크바자 수프가 너무 먹고 싶어진 알 무타와킬은 당장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바그다드의 별미인 시크바자는 육고기나 생선을 재료로 식초, 꿀, 말린 과실, 향신료 등을 넣고 끓인 뒤 양념한 소시지를 곁들이는 달콤새콤한 국이었다. 그것은 가장 미천한 사람들과 가장 부유한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은 음식이었다. 알 무타와킬은 그 이름 모를 선원이 끓여준 시크바자 스프를 먹은 뒤 냄비에 돈을 잔뜩 넣어 돌려줬고, 평생 먹어본 시크바자 중 가장 맛있었다고 말했다.
메트로폴리스 / 5장 다채로운 식도락의 향연, 바그다드 537~1258년 / 벤 윌슨 저
그러나 바그다드의 이러한 번영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못했다. 칼리파 알 무타심이 데려온 투르크계 노예병들이 아랍인들과 유혈 충돌을 일으키면서 칼리파는 사실상 자신의 소재지를 사마라로 이동하였고 이후 바그다드는 마치 오늘날의 이라크 상황을 보는 것처럼 종파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무역 등이 차질을 빚고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4.3. 외세의 침략과 쇠퇴

아바스 왕조는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칼리파들은 세속 권력을 크게 잃어버렸고, 페르시아계 왕조들의 보호국화되어 속국처럼 비참하게 살았다. 페르시아에서는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 부와이 왕조 등이 연달아 등장했는데, 개중 특히 부와이 왕조의 군벌들은 이라크까지 진출해 아바스 칼리파를 사로잡기까지 했다. 부와이 왕조가 시아파 출신인걸 생각해보면 수니파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파가 시아파 왕조에게 점령당한 굴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페르시아계 왕조들의 시대가 끝나자 튀르크계 군벌 왕조들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10세기 경 남하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세운 셀주크 제국이 가장 강력한 패권국이었다. 셀주크 제국의 창립자 투그릴은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칼리파를 손아귀에 넣었다. 칼리파는 셀주크의 보호를 받아가며 바그다드에서 의례화된 생활만 하며 종교적인 문제에서만 권위를 연명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한 때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번역 사업도 지원이 감소하며 끝이 난다. 알 마문이 번역 사업을 후원하던 당시에도 바그다드의 보수적인 소상인들을 대표하던 한발리파의 시조 "이븐 한발"이 바그다드에서 무타질라파와 대립하다가 투옥되는 일도 일어났다. 외래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은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의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대규모 지원이 없는 이상 끊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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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를 공성하는 훌라구
다만 1200년대 들어서는 셀주크 제국도 왕위 계승자들끼리 내분이 나면서 쇠퇴가 가속화됐다. 특히 저 호라즘 왕조가 쳐들어와 페르시아의 패권을 잡았는데, 이때 아바스 칼리파 역시 간접적으로 호라즘 아래의 영향력에 놓였다. 이렇게 이라크 일대가 외세의 간섭에 휘둘리는 동안, 최악의 재앙이 찾아온다. 바로 몽골 제국의 침공이었다. 호라즘 왕조가 몽골의 사신을 죽인 일에 격노한 칭기즈 칸이 페르시아 일대를 침공하며 이라크도 이에 휩쓸린 것이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라크는 말그대로 초토화 됐고,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1258년 시해당했다. 어찌나 계획적으로 파괴했는지 이라크는 근대까지도 이때 입은 농수로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몽골 전통의 관습에 따라 제국은 4조각으로 나뉘었다. 개중 페르시아와 이라크 지방은 훌라구일 칸국이 가져갔다. 하지만 일 칸국은 페르시아 중심의 나라였고 훌라구는 서쪽 변방에 불과한 이라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칼리파직도 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로 옮겨갔기에 이젠 칼리파도 없고 초토화당해 경제력도 빈약한 이라크에 더이상 신경을 쓸 이유가 하등 없었던 탓이었다. 이라크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경제력과 중요성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수직추락했다.

일 칸국이 쇠퇴한 이후에도 수많은 외세들이 이라크 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몽골계 잘라이르 왕조, 튀르크계인 티무르 제국, 흑양 왕조백양 왕조가 이 지역을 차례로 지배했다. 1330년대에 일 칸국의 멸망 후 잘라이르 왕조가 이라크 땅 일부를 차지하고 다스렸다. 하지만 잘라이르 왕조도 고작 50년 밖에 못갔고 티무르티무르 제국에게 패권을 잃어버렸다. 티무르 제국도 티무르가 죽자 급속도로 붕괴했다. 이라크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어서, 1300년대 말과 1400년대 초에는 흑양 왕조가, 1466년부터는 백양 왕조가 각각 이라크의 패권을 쥐고 흔들었다.

5. 근세

5.1.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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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령 이라크 당시 바그다드의 정경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 구조에 불과했던 백양 왕조는 명군 우준 하산의 사망 이후 약화일로를 걸었다. 특히 저 캅카스 일대에서 발원한 사파비 왕조가 세력을 크게 키우면서 이라크 일대는 1508년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아래로 들어간다. 하지만 사파비 제국의 이라크 지배는 고작 30년도 못갔다. 사파비 왕조 서쪽에 역대급 거물이던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대제가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 사파비를 경계하던 쉴레이만은 1533년 페르시아로 쳐들어갔다.[13] 100여년에 걸친 영토다툼 끝에 결국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에게 이라크 일대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1639년 사파비-오스만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 일대는 모조리 오스만 제국령으로 편입됐다. 오스만 제국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바그다드 에얄레트', '모술 에얄레트', '바스라 에얄레트', '샤리조르 에얄레트[14]' 등 4개의 에얄레트로 나누고 다스렸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물론 칼리파직이 이스탄불의 오스만 술탄에게 넘어가고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경제력이 급감하며 이라크의 중요성은 전보다 훨씬 감소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 만으로 통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땅이었다. 그럼에도 성지와 이집트의 길목인 시리아에 비해서는 중앙 집권력이 약하게 미쳤다. 우선 모술 에얄레트는 시파히 기병대의 녹읍이라 할 수 있는 티마르로 주어졌고, 바그다드와 바스라 에얄레트의 세수 역시 총독들의 급여로 주어지는 살야네 제도가 적용되었다.

그러다 나디르 샤의 침공을 격퇴한 1747년부터 1831년까지는 조지아계의 맘루크들이 이라크에 맘루크 정권을 세우고 자기들끼리 총독을 선출하는 등 자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라크 맘루크 왕조예니체리들의 권력을 약화하고 부족 간 갈등을 억누르는 데에도 성공했지만 1831년 오스만 군대가 맘루크 왕조를 철폐하고 직할통치령으로 되돌리면서 무너졌다.

이라크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린 오스만 중앙정부는 기존의 4개 에얄레트에서 샤리조르 에얄레트를 없애고 3개의 에얄레트만을 남겼다. 바그다드 에얄레트는 이라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행정구역으로, 20세기 초 면적이 141,160km2에 달했고 인구는 대략 85만 명이었다. 모술 에얄레트는 1878년 바그다드 에얄레트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졌다. 면적은 약 75,700km2,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다. 바스라 에얄레트 역시 바그다드 에얄레트 남부에서 분리되어 창설된 행정구역으로 면적은 약 42,690km2,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다. 인구는 제일 적었지만 주도 바스라가 페르시아만 주둔 오스만 해군의 본거지이자 군사중심지였기에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6.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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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ude_in_Baghdad.jpg
파이살 1세 1917년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영국군
약 300년 가까이 이라크를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은 갈수록 약화됐다. 오스만 제국의 대이라크 영향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결정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오스만의 손을 영영 떠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동맹국의 편에 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협상국과 맞섰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라크에 상륙해 메소포타미아 전선을 열었다. 영국은 쿠트 공방전에서 대참패를 당하는 등 굴욕을 겪었지만 결국 1917년 3월 바그다드에 입성하며 이라크 전체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슬람교의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후손 가문인 하심 가문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메카의 지배계급이었다. 이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의 반란을 선언했다. 아랍 반란 직후 그는 통일 아랍왕국의 왕임을 선언했지만 협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1차 대전 후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통치하기로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에 항의해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후 협상국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1921년 요르단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만들었고, 이라크는 1922년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국왕 파이살 1세[15]로 하고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파이살 1세는 즉위와 동시에 국호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라크'로 바꾸고 왕으로 즉위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꼭두각시 왕이었고, 이라크는 영국이 위임통치를 끝내고 물러난 1932년에야 완전한 독립을 찾을 수 있었다.

7. 현대

이라크는 1932년 정식으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한다. 1933년에 파이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가지 1세는 6년 만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 손자 파이살 2세가 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런데 그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마침 영국의 내정간섭에 지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추축국에 가입하고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1달 만에 패배(...).[16] 영국은 그 후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라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이라크는 1948년에 와서 주권을 되찾는다.

1958년, 이라크와 요르단은 연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처럼 아랍 연방이라는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반란의 위기에 직면한 요르단후세인 1세 국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파이살 2세는 요르단을 돕기 위해 이라크군 최정예 부대인 19여단과 20여단에게 전투 파병 지시를 내렸다.[17]문제는 이미 19여단과 20여단은 반 왕정 세력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고,이를 기회로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압둘 카림 카심(1914~1963) 장군 중심의 자유장교위원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라크는 왕정이 폐지되고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압둘 카림 카심 장군과 무함마드 나지브 장군을 총리와 대통령으로 하는 제1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카심 총리와 나지브 대통령은 여성 차별을 금지하고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가 하면, 왕국 시대에 홀대받았던 아시리아인과 쿠르드족 등 이라크내 소수민족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처우개선을 취하는 등의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카심 총리의 제1공화국 정권도 내부 정치 분열을 조율, 수습하는데 실패하여 이라크의 국내 정세를 더욱 악화시켰고, 국내의 정정 불안이 극에 달하던 1963년 바트당과 이라크 군부내 카심 반대파 세력들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전복되고 말았다. 이후 쿠데타를 일으킨 바트당과 군부가 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불안은 지속되었고[18] 1968년에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바트주의 노선의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부터는 바트당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 뒤로 후세인에 의한 철권통치가 이루어진다.

1980, 90년대 당시 후세인의 군복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후세인은 비슷한 시기 이웃나라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나 모국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와 다르게 군 출신도 아닌 데다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19] 심지어 사담 후세인은 군 입대조차 하지 않았다. 후세인은 바트당의 말단으로 출발해서 자기 능력으로 내각 요직까지 오른 뒤, IPC국영화 과정에서 부통령에 취임하고 문맹퇴치 운동과 문화재 보호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바크르 대통령을 제치고 이라크의 최고 인기 정치인이 된다. 1970년대 후반 바크르 대통령이 뒤늦게 후세인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민심과 당심, 군부 지지까지 얻어버린 후세인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이 당시 후세인의 유능함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알수 있었던것이 1980년 당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은 3900달러로 스페인과 비슷하여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있던 상황이었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라크를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다.

대외적으론 바크르 대통령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건강을 이유로 합법적 절차로 정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바크르 대통령 주변 요직은 후세인 쪽 파벌들이 장악하여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훗날 나오는 여러 증언들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매형인 아드난 카이랄라 장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인 아드난 함다니, 이복동생 바르찬 후세인, 타리크 아지즈, 사촌 알리 알 마지드 장군 등의 정권 핵심층과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바크르 대통령을 퇴임하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고도 한다.[20]

사실 후세인 집권 초기만 해도 이라크는 미국과는 단교 상태(1967년)였고 소련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아랍 내 대표적 친소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시아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변했다. 혁명 전 이란의 팔라비 왕조 붕괴를 위해 암약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과 함께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하듯 이라크가 이란에 대한 무력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7.1.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이란에 대한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양국의 피폐만을 가져왔다. 이라크는 1984년,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21] 이후 4년 동안 297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7.2. 걸프 전쟁

1988년, 승리는커녕 쪽박만 깨진 형태로 이란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후세인은 약이 올랐다. 결국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고 유가상승 및 유전탈환을 통한 삥뜯기도 겸해서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인근 아랍 국가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완전히 밑천까지 거덜내고 말았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H. W. 부시.

걸프전 이후 UN은 안보리결의 687, 688을 통해 후세인 정권의 손발 묶기에 나섰다. 특히 안보리결의 688은 시아파나 쿠르드족 보호를 명목으로 다수의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선 이북과 33도선 이남)을 설정, 이를 기회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자주 했고 실제로 시아파나 쿠르드족 지역에서 봉기가 빈발했다. 하지만 막상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고 서방 국가들도 나 몰라라 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도 구경만 하는 판이었다. 정작 비행금지구역만 설정했을 뿐 지상군 이동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규제였던 것이다.[22] 그렇게 봉기는 압살되고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후일 일어나는 혼란의 불씨만을 남긴 채 후세인 정권은 건제하였다.[23][24]

UN과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 후세인 정권의 고사를 기도했지만 후세인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때 선진국 도달을 눈앞에 두던 나라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했지만 군대는 살찌고 아이들은 굶주리는 판이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경제난으로 물러난 독재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혁명들의 원인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사이비 교단급으로 통치를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하는 데다가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하는지라 도리어 체제가 공고해지는 독재자가 더 많았다.

7.3. 이라크 전쟁

이라크는 국제사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어필하여 UN으로부터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이라는, 군수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석유를 거래하는 유예를 얻었다. 이라크인의 생활고에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눈 먼 돈 폭발로 UN 내에서는 뇌물,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서방 각국은 서로를 질시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와중에 이라크가 핵 개발을 기도한다는 의혹이 국제사회에서 터져나왔다. 풍문 정도의 애매한 의혹이었지만 UN 사찰단은 이라크 영내에서 방해 받았고 의혹은 부풀려져 갔다. 미군은 제재를 목적으로 몇 번이고 공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조지 부시의 아들이자 미국 대통령)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병기를 만들고 있다" 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위험주자로 지목하고는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나라를 조져버린다. 후세인이 1차 걸프전 때도 대량 살상무기에 화학무기, 생물무기를 가지가지 만들면서 쫓아냈던 UN 시찰단을 무역 봉쇄에 경제 제재라는 명백한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 발발 때까지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의혹을 크게 살 만 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자존심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집 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든가)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이라크도 국제 외교무대에서 말도 안되는 국룰을 우기는 아마추어는 아닐 것이고, 끝까지 사찰을 거부한 이유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결국 전쟁 직전에서야 후세인은 사실상 사찰을 조건부 허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대놓고 허용이 아니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애매한 것으로는 미국도 전쟁 중지의 명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

여튼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정황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라크전이 일어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이야 테러에 대한 응징과 차후의 안보를 위해서라고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쳐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한 것에 대해 깔끔한 근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세인이 구린내를 슬슬 풍기고는 있었다지만 결국엔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수도인 바그다드가 이슬람이 형성된 이후 세 번째로 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25] 처음에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성조기를 휘두르고 '예스 부시' 를 외치면서 열광했으며 전국의 후세인 동상과 초상화를 때려부수고 신발로 때리며 분풀이를 했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계속 '오인 공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 를 내고 점령지의 문화와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일방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점령정책을 아주 개판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와서 미국 하면 이를 갈게 됐다.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라크 쪽에서 말하자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당하는 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저도 점령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라며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벌인 짓을 보면 신발이 아니라 총알세례를 받아도 모자란 지경.

이 때문인지 이라크 국내에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함으로써 좋아진 점은 언론의 자유밖에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 후세인의 통치 자체는 어떤 사이비 교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대체로 막장이었지만 해방자랍시고 들어온 미국과 그들이 이라크에 구현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혼란만 야기하자 그 반동으로 후세인이 차라리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웃나라인 시리아의 아사드나 리비아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알제리의 부테플리카,[26] 튀니지의 벤 알리가 말년에 반정부 시위와 혁명, 내전으로 정권이 붕괴되어 몰락하거나,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직면했던 것을 감안하면[27] 후세인이 설령 계속 정권을 유지했었어도 결국 반정부 시위가 터졌거나 다른 형태로 체제가 무너졌을 것이다. 실제로 사담 후세인 정권 시기에도 짧았지만 간혹 반정부 시위나 어느 정도의 저항이 있기도 했었다. 게다가 이미 후세인 본인도 당시에 60대로 접어든 상황이었기에 벤 알리나 무바라크, 카다피, 부테플리카처럼 노령기에 통제력을 상실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뒷수습이 매우 애매하게 된 덕택에 이라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옥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특히 이라크군 자체는 금방 무너졌는데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AP)에서 수니파=바트장 잔당[28]이라는 괴이한 공식을 들이대는 삽질을 해대는 통에 직장에서 죄다 쫓겨나고 영향력이 축소되어 장기적으로는 시아파들 손에 도륙나게 생긴 수니파 주민들이 "이대로 몰락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다 죽는다" 고 총칼을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CAP의 온갖 삽질[29]이 겹쳐 반쯤 내전이 되어가는 상황 덕분에 미군만 죽어라 고생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갈수록 악화되면서 이라크에 소모되는 비용이 급상승하자, 미군이 개발하려고 했던 무기들은 전부 개발취소 크리[EX:]. 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절정이었고[31] 2008년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수적으로도 압도적이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시아파[32][33]가 최종 승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2009년 경 대부분의 소요 사태가 종결됐다.

2010년 9월 1일 미군은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011년에는 전 병력이 철수하였다. 이라크에는 이행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를 거쳐 정식 정부[34]가 출범했고 군사, 경찰권도 정식 정부가 집행 중이다. 적어도 점령 기간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사회적 안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파괴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의 미흡한 복구[35], 높은 실업률 등 어려운 경제상황이 발목을 잡았고, 결국 사회 문제 해결 실패와 ISIS의 봉기로 인해 내전이 촉발되었다.

7.4. 이라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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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IS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2014 ~ 2018

7.6. ISIS 격퇴 이후 최근의 동향

2017년 말 이라크 정부군이 시리아-이라크 국경지대의 ISIS 세력들의 토벌을 끝마치면서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10여 년간 이어진 이라크의 춘추전국시대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2018년부터 이라크는 국내 정치 및 사회를 정리하는 쪽으로 정책 가닥을 잡았다.

2019년 10월 2일,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나타나고 있다. 자세한 부분은 이라크 반정부 시위 참조. 시민들은 정권에 치안 안정 및 개혁, 민생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

결국 2019년 11월 1일, 이라크의 총리는 결국 사의를 밝혔다. # 한편 이라크 시위의 주요 장소 중 하나인 타흐리르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은 예멘, 이집트, 시리아에도 있으며, 이집트 혁명, 예멘 혁명, 시리아 민주화운동 등 시위도 이들의 광장에서 각자 나타났다.

바스라에서도 반정부시위대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보안부대가 반정부시위대에게 총을 발포하면서 하루에만 최소 7명이 사망하는 등 사망자가 3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서 1명이 사망한데 이어# 바그다드에서 있던 반정부시위에서 5명이 사망했다.#

반정부시위가 2달 동안 이어지면서 압둘-마흐디 총리는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라크 남부의 유전지대인 나시리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유전 시설을 점거해 이틀째 원유 생산이 중단됐다고 이라크 언론들이 보도했다.#

2020년 1월 8일에 이라크 내의 미군 기지 두 곳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 후 바그다드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반정부 시위가 다시 격화되면서 최소 10명이 숨지고 140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민관 합동기구인 고등인권위원회는 2019년 10월 1일부터 넉 달 간 바그다드와 남부 지역 주요도시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54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2020년 4월 20일에 이라크에서 남편의 잔혹한 학대로 여성이 사망하자 이라크내에서 여성을 향한 가정폭력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5월 6일에 이라크 의회는 무스타파 알 카다미 전 국가정보원장을 신임 총리로 승인하면서 내각이 구성되었다.##

5월 20일에 이라크 당국이 IS 지도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카르다시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라크에서 IS가 다시 준동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6월 10일에 미군이 철수한 이라크 북부지역을 방문한 무스타파 알 카디미 총리는 IS가 두 번 다시 이라크를 점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2020년 8월 3일에 IS에 의한 야지디족 학살 사건 6주기를 맞아 유엔본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이라크 정부와 유엔의 대처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9월 6일에 바그다드에서 의대 재학생과 졸업생, 의료계 종사자들이 의료 시설·장비 확충과 예산 투입을 요구하면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2021년 1월 21일(현지시간) 바그다드 중심부의 밥 알샤르키 지역에서 연쇄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32명이 사망했으며 110명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군 당국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1 #2

#미국과 이라크 정부가 2021년 말까지 현지에 주둔하는 미 전투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라크는 미군이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IS)와 싸울 것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라크 내 미군의 공식 재배치는 이번 주 미 당국자들과의 회담 결과에 달려 있다고 무스타파 알-카드히미 이라크 총리가 밝혔다.

#이라크 전 당시 미국과 유럽으로 유출된 이라크의 문화재 1만7000여점이 이라크로 반환됐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28일 이란,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요르단, 터키 등 이라크와 인접한 중동 이웃국가들이 참여하는 이라크 인접국가회의가 열린다.

#이라크 국방장관이 터키제 무기 도입을 진행중이라고 자국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라크군이 시리아와 국경을 접한 서부 안바르 주에서 IS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 박물관에서 도난당해 미국으로 반입됐던 길가메시 점토판이 이라크에 반환되었다.

#2021년 10월에 이라크에서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36] 그리고 선거결과 미국과 이란 양측을 거부하는 반 외세 성향의 알사이룬 연합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라크 정부가 남은 IS 세력의 최고지도자를 체포했다. 이라크의 무스타파 알카디미 총리는 이날 트윗으로 이 소식을 전하면서 붙잡힌 남성이 IS 최고 지도자였었던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바로 밑 지휘관이었던 사미 야셈이라고 신원을 공개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2016년 323명이 사망한 바그다드 테러의 배후로 알려진 IS의 간부인 가즈완 알자바이가 이라크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라크에서 12세 소녀의 조혼에 반대하는 인권운동가들의 시위가 열렸다.

#이라크 총리가 미국 대사와 이라크내의 미국이 이끄는 모든 연합군의 전투 임무를 완전히 종결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미국이 올해 안으로 이라크에서의 미군 전투 임무를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이라크군에 대한 군사 고문 역할만을 맡게 된다고 더힐과 로이터통신 등이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국이 이라크 교육 시스템 재건을 목적으로 한 학교 시설 건축 사업 지원을 이라크 정부에게 약속했다.

#이라크 정부와 사우디 정부가 바그다드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이란과 사우디의 회담지연 문제를 논의했다.

#이라크가 월드컵 아시아 예선 경기를 자국에서 치를 수 있게 됐다.

#이라크 정부가 2일(현지시간) 유엔이 예멘에 대해 두 달 동안의 휴전안을 발표한 데 대해서 환영의 뜻을 밝히고, 예멘 내전의 해결을 위한 방책은 정치적 해결 밖에 없다는 내용의 외교부 성명을 발표했다.

#남아있는 IS 잔당들의 은신처들을 겨냥한 이라크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이라크 무스파타 알 카다미 총리가 아랍에미리트의 셰이크 할리파 대통령이 서거하자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라크 석유장관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수출 할당량을 이행하기 위해 2027년 말까지 원유 생산량을 일일 800만 배럴로 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라크에서 압둘 라티프 라시드와 모하메드 시아 알수다니가 각각 새 대통령과 새 총리로 선출,지명되었다.

#이라크 의회가 2003년에 폐지됐던 징병제에 대한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의 디나르화를 보호하고 달러화의 상승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환율을 낮추기로 결정했다고 7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라크와 요르단이 국경의 합동 경제도시를 신설하기 위한 공개입찰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라크가 레바논에 매년 수출해오던 석유의 양을 50%나 늘려 150만 톤으로 확정하는 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가 중동과 유럽 연결하는 170억 달러 규모의 운송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라크가 9월 한달간 원유 1억314만 배럴을 수출했다.

##202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하마스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반이스라엘 시위가 일어났다.

#모하메드 알수다니 이라크 총리는 1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가자지구 공습이 이라크 주민과 전 세계인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내 난민수용소들 중 144개를 폐쇄했다고 한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가 6년만에 지방 의회 선거를 실시하기로 발표했다.

#이라크 정부가 바스라공단의 국책 철강· 비료공장들 20년만에 재가동하기로 발표했다.

#이라크 정부가 서쪽 건너 편의 중동 아랍국가인 레바논과 함께 유엔 안보리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지구 전쟁 휴전 결의안에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라크와 미국이 2025년 9월까지 이라크내 주둔 미군들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IS의 잔당세력들이 테러와 폭동을 일으키고 원내 여야 정당들의 정치갈등이 극심한 것을 제외하면 반군과 정부군 간 내전이 진행 중인 옆나라 시리아후티 반군, 남예멘 분리주의자, 하디 정부군 등등이 서로 총탄을 갈기고 싸우며 중동판 삼국지, 오대십국, 센코쿠시대를 재현하고 있는 아랫 먼 나라 예멘보다는 다소 나아진 편이다.


[1] 오늘날의 터키 동남부 차탈 회위크에서 시작된 농경 문화는 인접한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부를 따라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하류 지류 일대까지 이어졌고, 이는 기원전 3500~2700년 해당 지역에서 문자가 발생되고 사용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자급자족 성격을 띤 촌락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2] 농경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서 시작되었지만 도시국가들이 왜 메소포타미아 남동부에서 먼저 발전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지리적 위치와 관련한 설명이다. 우루크페르시아 만과 연결된 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어업과 농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집트와 흡사하게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이용하는 농경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개농업은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지역 내 공동체 의식도 싹트게 되었다. 이집트 나일 강의 범람은 범람 수위와 시기가 대체적으로 일정했던 것에 비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은 상당히 불규칙적이었고, 강 유역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관개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다.[3] 도시 국가 우루크를 중심으로 했기에 붙여진 이름. 기원전 3000년경 당시 우루크는 5~8만여 명의 인구의 7.77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자랑하는 당대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였다.[4] 이 우르 제3왕조가 수메르인들의 왕조였기에 학계에서는 이를 '수메르 제국', 혹은 '수메르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류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도 이 시기에 제정됐다.[5] 아직 함무라비 법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법전의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쐐기 문자 기록을 검토해보면 함부라비 법전이 일관되게 결정적인 재판의 근거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관습법에 의해 판결이 이루어졌다. 아직 당시의 법전은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올바른 법 집행을 추구한다는 의미에 그쳤었다. 당시 왕은 권력을 쥔 통치자인 동시에 백성을 보호하는 수호자였고, 법에 따라 공평하게 다스린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6] 아시리아 왕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업적을 방대한 자료로 남겼다. 이들이 점령한 지역 중에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오늘날의 시리아 일대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은 피정복민들 아람인들의 언어 아람어를 제국 공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는 아마도 당시 아람 문자페니키아 문자의 영향으로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리아 일대의 언어였던 아람어는 신 아시리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면서 이후 천 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라크 일대에서도 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살만에셀 3세는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페니키아, 이스라엘에 조공을 받았는데 점령 과정은 검은 오벨리스크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오벨리스크에는 이스라엘 왕 예후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공물을 바치는 부조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 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 그림이나 부조로 남은 유일한 경우에 해당한다.[7] 아시리아 제국은 피정복민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수완 좋은 상인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전쟁에서 전면전을 가급적 피하려 노력하는 편이었으며, 아시리아 군대는 전투를 벌여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기보다는 대규모의 병력으로 적군을 위협하여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선호하였다. 적군이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방어가 허술한 마을을 쳐들어가 주민들을 갖가지 잔학무도한 방법으로 학살하고 땅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8] 보통 학계에서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군대의 바빌론 함락과 신바빌로니아의 멸망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종결로 본다.[9]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죽음으로 이슬람이 우마이야 왕조 반대파인 시아파와 찬성파인 수니파로 분열된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다.[10]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도, 마즈다크교, 유대교, 만다야교[11] 알 마문은 일반인들이 먹는 식당에서 장미수 시럽과 탄두리 화덕에 구운 닭고기와 오리고기, 양고기 등을 즐겨먹었다 한다.[12]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전근대 귀족들이 만드는 요리는 여러 명의 시종들이 한참동안 공을 들여 맛있고 호화로운 요리를 만들게 되는데, 귀족들의 문화를 모방하는 부르주아 계층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맛은 보존하되 조리 방법을 간략화하는 방법으로 조리법을 개량하게 된다.[13]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이 서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1천년 전 비슷한 구도의 영토를 지녔던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가 이라크와 캅카스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것과 이유는 동일했다. 이란 고원 자체는 생산력이나 인구 부양력이 그렇게 대단한 땅이 아니었고, 사파비 제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메소포타미아가 필요했다.[14] 술라이마니야 등 이라크 동북부[15]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알렉 기네스가 분한 파이살 왕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16] 사실 영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이라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라크의 석유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값싸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 이때 영국은 비시 프랑스시리아이란 제국까지 같이 조져버렸다.[17] 이때 파이살 2세는 큰 실수를 하나 하는데, 바로 19여단과 20여단의 이동경로를 바그다드를 경우해서 이동하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쿠데타군은 아무런 의심없이 바그다드에 진입할수있었다.[18] 정권 초기 내각제 체제의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연립정부와 비슷한 형태로 압둘 살람 아리프 등 군부 지도자들이 창당한 아랍 사회주의 연합당(이하 사련당)과 바트당의 두 세력이 국정을 운영했지만 이후 쿠데타에 앞장선 군부의 사련당이 바트당을 배척, 홀대하려고 하면서, 카심 정권의 전복을 주도한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증폭됐다. 여담으로 사련당은 1968년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내 정권을 완전히 잡고 나서 바트당 측에 의해 불법 정당으로 지정되어 해산당했다.[19] 아사드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양복을 입는 등 군부 독재자의 이미지를 희석하려고 노력을 했다.[20] 이 부분은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재연하고 있는 부분이다.[21] 이때 미국의 교섭역이 도널드 럼즈펠드. 이후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이 국교 회복 교섭 당시 후세인이 럼즈펠드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틀어줘서 전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22] 이라크군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하면 생각났다는 듯 찔끔찔끔 토마호크 공격을 해댔으나 봉기와는 무관한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전쟁놀음, 침략행위라는 욕을 먹어서 여의치 않았다.[23] 현재 이라크 시아파의 친이란 행보는 이때의 미국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원칙대로 시아파 주민들을 보호하고 이를 명분 삼아 후세인 정권을 엎어버렸다면 이란-이라크간 관계도 최악이고 미국 자신도 나름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이라크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24] 다만 미국 입장에서도 이라크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 베트남전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쿠웨이트의 회복까지는 주변국들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지만 이라크의 전복은 그렇지 않았으며 거기다 끝물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이 유럽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온 만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25] 첫 번째 점령자는 중세의 세계 깡패이던 몽골이고 두 번째는 영국에게.[26] 이 사람도 1937년생으로 이라크의 후세인 전 대통령과 동갑이다.[27] 그래도 시리아는 시리아 내전 당시 반군 세력들의 저항에도 아사드가 러시아의 지원으로 정권을 유지하는데는 성공했다.[28] 애시당초 바트당 세력은 수니파 내에서도 소수였고 민중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된 것이다. 반대로 시리아는 알라위파와 드루즈교, 콥트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아사드 정권의 지지 세력이기 때문에 저항에 투입되는 전력의 규모가 커서 개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29] 이라크군 죄다 (무기 환수 없이) 내쫓아 무장세력 만들기, 박살난 병원은 그대로 두고 애꿎은 처방전만 만지작거리기, 이라크 기업의 모든 예금과 부채를 무효로 하기 등등.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책 <그린존> 참고.[EX:] RAH-66 코만치, 줌왈트급 구축함[31] 2005년 이후 미군을 제외한 타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게릴라의 공격 대상은 미군으로 좁혀졌으나 미군을 공격하면 그 몇 배의 보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2006년부터 소프트 타겟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바뀐다. 결국 06년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32] 허나 미국도 시아파를 두고 고민해야 했는데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를 비롯한 이들은 반미 투쟁을 계속 벌였다. 미국으로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수백 만이 넘는 지지자와 민중들이 알 사드르를 지지하였고 알 사드르는 아버지가 사담 후세인의 독재 정치에 맞서다가 후세인 정권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한 인물이라 반후세인파 인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알 사드르와 그의 부하들에게 현상금을 걸었다가 되려 거리 곳곳에 알 사드르에 대한 상금을 취소하지 않으면 미군 장성과 일반병 목 하나하나에 상금을 걸거나 살생부를 적고 죽이겠다는 이라크내 시아파 성직자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결국 당시 미군 지도부들이 한발 물러나 현상금을 철회했을 정도였었다.[33] 본래 알 사드르는 이라크 전쟁 초기에 미국 등 서방 진영 국가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호의적이었으나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이라크에 대한 군정을 엉망으로 진행하고, 본인과 그의 추종자들을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제재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격분하여 반미 게릴라 전에 돌입했다.[34] 내각제 정부로 각료가 43명이다.[35] 수도 바그다드에서조차 하루에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지경이었다.[36] 본래는 2022년에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2019년 반정부 시위사태의 영향으로 총선일이 2021년으로 앞당겨지면서 조기총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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