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0:17:19

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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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예후
יהוא[히]
𒅀𒌑𒀀[아]
출생 기원전 882년경
미상
사망 기원전 814년경
미상
소속 미상
재위년도 기원전 841년~기원전 814년
약 28년
국적 북이스라엘 왕국
아버지 여호사밧
자녀 여호아하즈
이전 국왕 여호람
다음 국왕 여호아하즈

1. 개요2. 초기 생애3. 역성혁명
3.1. 텔 단 비문
4. 국제외교5. 평가6. 이후

[clearfix]

1. 개요

성경의 등장인물. 북왕국 예후 왕조의 초대 국왕이며, 성경 이외의 기록에도 나오는 엄연한 실존인물이다.[3]

2. 초기 생애

예후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로, 군 사령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9대 왕 여호람(요람)이었는데, 그는 아합[4]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의 수련생을 보내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5] 그에게 아합 왕가를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후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언자(엘리사의 수련생)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말씀을 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야훼의 백성을 다스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 내가 이세벨의 손에 죽은 예언자들뿐 아니라 나의 모든 종들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러니 너는 네가 섬기던 아합의 가문을 쳐부수어라. 내가 아합 가문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리라. 그리하면 아합의 온 가문이 망하리라.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만들리라. 이세벨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즈르엘에 있는 제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열왕기하 9:6~9:10(공동번역성서)

3. 역성혁명

예후는 그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여호람 왕을 활로 쏘아 죽인다.[6][7] 그 후 아합 왕조의 사위가 되어 악을 행한 남유다 왕 아하시야를 처단한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이러 찾아갔다. 이세벨은 예후가 자기를 죽이러 찾아오는데 꽃단장을 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예후를 보자, 저주를 퍼붓는다.
예후가 문에 들어서자 소리쳤다. "상전을 죽인 역적 지므리 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8]
열왕기하 9:31(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자신이 포섭한 내시들을 시켜 그녀를 창문 밖으로 던지게 하였고, 떨어져 죽은 시신의 위로 마차를 몰고 지나가 확인사살을 했다. 그래도 이전 왕족이었으니, 시신이라도 장례를 치러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수습한 시신은 머리와 손, 발 외에는 모조리 곤죽이 된 것으로 모자라 엘리사의 예언대로 개들이 전부 뜯어먹은 뒤였다. 왕위에 오른 예후는 아합 왕가의 왕족들을 숙청한 뒤,[9]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는 철저한 혁명을 전개한다.[10][11][12] 열왕기에 따르면, 예후는 그의 자손이 북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낼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 신앙 대신에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가 퍼뜨린 금송아지 숭배를 다시 회복하였고, 결국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 영토가 아람에 의한 침공을 받는다. 예후는 죽은 후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즈가 11대 왕이 되었다.

3.1. 텔 단 비문

1993년에 발견된 '텔 단 비문'은 위에 나온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비문으로, 이 비문에는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예후의 쿠데타가 아람의 사주에 의한 반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텔 단 비문[13]

4. 국제외교

파일:640px-Jehu-Obelisk-cropped.jpg
살마누아사리두 3세 앞에 무릎꿇고 조공을 바치는 예후
성경 외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아시리아 비석 중 하나인 ‘블랙 오벨리스크’에서 아시리아 왕 샬마네셀[14] 3세 앞에 엎드려 은을 조공으로 바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즉 예후는 아시리아의 봉신국이 됨으로써 경쟁국 아람과 맞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오므리 왕가를 다 죽인 예후가 이 비문에서는 ‘오므리의 아들 예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게 눈여겨볼만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예후의 쿠데타와 상관 없이 '오므리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시리아에서는 이스라엘 왕실을 일컫는 말로 굳어져있었다는 것이다.[15] 두번째 설명은, '오므리의 아들'이라는 게 아시리아에서 예후의 정통성을 밀어주는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샬마네셀의 현무안 조각상에서는 이스라엘 바로 옆 아람 왕을 애비 없는 자 하자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쿠데타로 즉위한 두 왕 중 한쪽은 '오므리의 아들 예후'이고 한쪽은 '애비 없는 자 하자엘'이라면, 이건 아시리아쪽에서 봉신인 예후의 정통성을 밀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살만에세르 3세는 어째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 부르는가? 이에 관해서는 적어도 서로 상반되지 않은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몇몇 역사가는, '오므리 집안'이란 명칭이 아시리아의 외교적 언어표현법에서 '이스라엘 집안' 곧 북 왕국을 지배하는 왕가를 가리키는 통상적 명칭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언제나 북 왕국의 모든 임금에게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다른 임금들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살만에세르 3세는 아합 임금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후기에 이르러, 기원전 802년경에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III)는 '사마리아인 여호아스'라고 말하고 있고, 기원전 738년경 티글랏 필에세르 3세(Tiglat Pileser III)도 이스라엘 임금 므나헴을 가리키는 데 똑같은 명칭('사마리아인')을 사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원전 732년에 같은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이스라엘 임금들에게 여전히 '오므리 집안'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오므리 왕가가 사라진 뒤 한 세기가 지난 이후에 여전히 이 명칭이 아시리아 임금들의 공식 문서에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른 학자들은 이와 다른, 좀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설명을 선호한다. 살만에세르 3세는 다마스쿠스 왕국과 그 나라의 임금이었던 하자엘을 기원전 841년경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임금 예후는 그의 전임자들이 걸어왔던 정치적 노선에서 벗어나 아시리아에 복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살만에세르 3세의 문서는 아마도 위의 두 임금, 곧 '반역자' 다마스쿠스의 하자엘과 '충실한' 이스라엘의 예후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자엘은 반역자 곧 '아비 없는 자식(비합법적인 왕)'으로 표현하고 이와 반대로 예후를 충실한 임금 곧 '오므리의 아들'로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시리아인들의 입장에서 예후가 이스라엘 왕가(오므리의 나라)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장-루이 스카Jean-Louis Ska, 《인간의 이야기에 깃든 하느님의 말씀》La parola di Dio nei racconti degli uomini, 박문수 번역, 성서와함께, 2016, pp.179-182

5. 평가

<rowcolor=#000> 열왕기 하권 10장 30-31절
וַיֹּ֨אמֶר יְהוָ֜ה אֶל־יֵה֗וּא יַ֤עַן אֲשֶׁר־הֱטִיבֹ֨תָ֙ לַעֲשֹׂ֤ות הַיָּשָׁר֙ בְּעֵינַ֔י כְּכֹל֙ אֲשֶׁ֣ר בִּלְבָבִ֔י עָשִׂ֖יתָ לְבֵ֣ית אַחְאָ֑ב בְּנֵ֣י רְבִעִ֔ים יֵשְׁב֥וּ לְךָ֖ עַל־כִּסֵּ֥א יִשְׂרָאֵֽל׃

וְיֵה֗וּא לֹ֥א שָׁמַ֛ר לָלֶ֛כֶת בְּתֹֽורַת־יְהוָ֥ה אֱלֹהֵֽי־יִשְׂרָאֵ֖ל בְּכָל־לְבָבֹ֑ו לֹ֣א סָ֗ר מֵעַל֙ חַטֹּ֣אות יָֽרָבְעָ֔ם אֲשֶׁ֥ר הֶחֱטִ֖יא אֶת־יִשְׂרָאֵֽל׃
30주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니 참 잘하였다. 내가 마음에 품은 그대로 아합 집안의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너의 사 대 자손까지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31그러나 예후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걷는 일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예로보암의 죄에서는 돌아서지 않았던 것이다. 30주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보기에 일을 바르게 잘 하여, 내 마음에 들도록 아합의 가문을 잘 처리하였으니, 네 사 대 자손까지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지키게 될 것이다." 31그러나 예후는, 주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지는 못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열왕기에서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바로잡고 옳은 일을 했다는 찬사를 적는 동시에 금송아지 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야훼의 율법도 따르지 않았다는 타락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전체적으로 예후 왕조가 예후 다음으로 4대를 이어나간 것은 바알 신앙을 따르던 오므리 왕조를 멸했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역대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선 가장 나은 평을 남겼다.[16]

그러나 예후에게는 결정적인 실책이 있는데, 아합이제벨의 딸인 아달리야를 제거하지 못하고 다윗 왕가 대학살이 발생하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했다. 아달리야는 예후로 인해 아들 아하시야와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잃어 다윗 왕가를 숙청하는 여왕이 되었고,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적대 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외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비록 아시리아에 다소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의 체급에서 아시리아와 맞서는 건 무리가 있고, 설령 아합 시절의 카르카르 전투처럼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다 한들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원교근공의 논리로 아시리아에 머리를 숙이고 이스라엘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다마스쿠스을 견제하는 게 낫다. 결국 100여년 후 아시리아에게 북왕국이 멸망하긴 하지만, 100년 뒤 결과를 예후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너무 결과론적인 시선이다. 오히려 아시리아와 봉신 계약을 하면서도 야훼 신앙에선 내정 간섭을 안 당한 것에서 예후의 외교 감각을 엿볼 수 있다. 훗날의 유다인 역사가들 입장에서는, 다마스쿠스의 제1봉신이지만 종교로까지 종속된 아합보다는 아시리아의 작은 봉신으로 머리 숙이고 야훼 신앙을 간직한 예후가 훨씬 좋게 보였을 것이다.

6. 이후

<rowcolor=#000> 열왕기 하권 10장 32-33절
בַּיָּמִ֣ים הָהֵ֔ם הֵחֵ֣ל יְהוָ֔ה לְקַצֹּ֖ות בְּיִשְׂרָאֵ֑ל וַיַּכֵּ֥ם חֲזָאֵ֖ל בְּכָל־גְּב֥וּל יִשְׂרָאֵֽל׃

מִן־הַיַּרְדֵּן֙ מִזְרַ֣ח הַשֶּׁ֔מֶשׁ אֵ֚ת כָּל־אֶ֣רֶץ הַגִּלְעָ֔ד הַגָּדִ֥י וְהָרֻאובֵנִ֖י וְהַֽמְנַשִּׁ֑י מֵעֲרֹעֵר֙ אֲשֶׁ֣ר עַל־נַ֣חַל אַרְנֹ֔ן וְהַגִּלְעָ֖ד וְהַבָּשָֽׁן׃
32그때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금씩 찢어 내기 시작하셨다. 하자엘이 이스라엘의 온 영토를 공격하였다. 33그는 요르단 강 동쪽, 갓 사람들과 르우벤 사람들과 므나쎄 사람들이 사는 길앗의 모든 땅, 곧 아르논 강 곁에 있는 아로에르에서 길앗과 바산에 이르는 지역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32이 때부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금씩 찢어 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국경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33그는 요단 강 동쪽 지역인,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이 있는 길르앗의 모든 땅 곧 아르논 강에 맞붙어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공격하였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예후 사후 하자엘에 의해서 아람의 공격을 받아 많은 땅을 잃었고 이는 그의 손자인 요아스 대에야 수복할 수 있었다.


[히] 히브리어[아] 아카드어[3]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성경 기록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다들 실존인물이었다.[4] 구약성경 열왕기에 따르면, 아합은 야훼가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전국에 퍼뜨린 악한 왕이었다.[5] 당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운다는 의미였다. 당장 이스라엘 왕국의 사울과 다윗이 이런 방식으로 왕권을 인정받았다.[6]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죄로 엘리야에게서 신이 저주를 내릴 것이라 예언 받았는데, 이 때 아합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아내 이세벨이 벌인 짓이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엘리야도 한 발 물러서서 왕조의 멸망은 그의 아들 대에 닥쳐올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대로 아들이었던 여호람 대(代)에 이르러 그의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고, 여호람의 시체는 아합이 나봇에게서 빼앗은 바로 그 포도원에 던져진다.[7] 이때 잘 지냈냐는 여호람에게 "당신 어미이자 이교를 몰고 온 이세벨이 살아있는데 퍽이나 그렇겠소?"라고 비꼬았다고 한다.[8] 이세벨이 이야기한 지므리, 즉 시므리는 바아사 왕조를 멸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된지 불과 7일 만에 아합의 아버지(즉 이세벨의 시아버지)인 오므리에게 찬탈당하고 죽었다. 즉 찬탈했다가 1주일 만에 죽은 시므리 꼴이나 나라고 예후를 저주한 것. 물론 예후 왕조는 4대를 이어간 오므리 왕조보다 조금 더 많은 5대를 이어가 북이스라엘 최장수 왕조가 되었으니 완벽하게 빗나갔다. 게다가 오므리 왕조는 아합 사후 단 십수년 만에 몰락한 반면 예후 왕조는 즈가리야 빼고 안정적으로 재위해서 왕은 한 명만 더 즉위했는데 존속기간은 2배나 차이가 난다.[9] 이 숙청에서 아합의 딸인 아달리야는 유일한 왕가의 생존자가 되었다. 당시 아달리야는 남유다의 왕비였기에 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예후처럼 남유다 왕가를 학살하고 자신이 왕위를 찬탈해 6~7년간 재위하지만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반격에 의해 폐위외 함께 처형당한다.[10] 그 방법이 꽤나 무시무시한 것이 바알 숭배자들에게 바알을 모시는 제사를 크게 지낼 것이니 바알 숭배자와 바알의 선지자며 바알을 섬기는 성직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신전에 모이고, 안 오는 자는 죽인다고 공고를 냈고 바알 숭배자들은 예후가 자신들을 잘 대접할 거라 여겼는지 좋아라 하면서 바알 신전에 모였다고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예후의 부하들이 정문을 틀어막고 병사들이 들이닥쳐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후 신전 장식 등을 모두 부숴버리고 공중 변소로 바꿨다고 한다. 사실상 바알 신앙을 뿌리채로 뽑아버린 셈이다.[11] 다만 바알 신앙은 이미 전대인 여호람 대부터 쇠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호람은 아버지인 아합이 세운 바알의 기념 기둥을 치웠고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에 비해서는 그리 큰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금송아지 숭배가 우상숭배기는 해도 야훼=금송아지라는 왜곡된 야훼 신앙이니 일단은 야훼를 대상으로 한 신앙이고 또 여로보암 1세 때부터 해온 일인 것과는 달리 바알은 아예 이방인 신이라 거부감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합 시절에도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죽였는데 이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을지도[12] 참고로 이후 바알 신전은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 뒷간, 그러니까 화장실이 되었다고 한다. 이 뒷간으로 개조된 바알 신전은 열왕기가 쓰여진 시점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13]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봐도 나름 일리가 있는데 예후에게 기름부음을 준 엘리야는 먼저 아람의 하자엘에게 기름부음을 주었고 엘리사는 아람 장군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바 있다. 즉 두 사람이 아람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고 예후와 아람간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거기다가 엘리사 자신도 엘리야로부터 직접적으로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기도 하다.[14] 공동번역-샬마네셀; 가톨릭-살만에세르; 개신교-살만에셀 .[15] 시공간적으로 먼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국사만 하더라도 조선은 명나라에서 고려라고 통칭되었다. 당연히 조선측은 이 통칭을 싫어했다.[16] 실제로 이 부분에서 야훼가 예후에게 칭찬하며 4대까지 보존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