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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사우디 중남부 카리야트 알 파우 유적의 옛 조각상과 벽화 |
사우디 북부 알 울라의 마다인 살레. 나바테아인들의 유적이다
기원전 시기에는 토후 부족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낙타 끌고 장사해 가며 하루 먹고 사는 헐벗은 동네였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예멘, 이집트의 영향을 받던 헤자즈 지역과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던 동부 아라비아를 제외하고는 도시화가 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아라비아 역사가 알려진 부분이 적은 것은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역사를 자힐리야, 즉 무지의 시기라 치부하며 연구에 소홀한 탓도 있다. 사우디 북부 지역은 나바테아의 지배를 받으며 그 영향을 받았고, 서남부 지방은 예멘과 가까웠기에 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나즈란은 천년 이상 예멘의 주요 도시였다.
현대 사우디의 중심인 네지드 지역은 주요 문명권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고 서부로는 산맥으로 막혀있어 유목민들만 있었으나 5세기경에 하드라마우트에서 유래된 킨다 왕국의 영향하에 들었고 6세기에 킨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 라흠 왕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냥 유목민만 있었다 오해하기 쉽지만 기원후 무렵부터는 나머지 중동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헬레니즘과 기독교 문화가 유입되어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 나타난다. 또한 세력이 점차 커져 사산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이 군사 원정에 나서기도 한다. 어쨋든 6세기 킨다 왕국이 멸망한 후로는 무주공산이 된다.
한편 헤자즈 지역은 유대교를 믿던 힘야르 왕국의 세력권이었는데, 무함마드가 출생하기 약 반세기 전에 악숨 왕국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한동안 악숨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악숨은 가혹한 통치로 인한 반발 등으로 영토를 유지하지 못하고 홍해 너머로 다시 쫓겨간다.[1] 이후는 힘의 공백지대가 되어 소규모 부족들과 도시들이 난립하는 각축장이었다. 아무튼 이 지역은 토착 신앙과 함께 유대교(힘야르 왕국), 콥트교(악숨 왕국), 네스토리우스교(로마로부터의 망명자) 등이 병존하고 있었으므로 아브라함계 종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이는 곧이어 등장하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일으키는 일종의 토대로 작용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2. 중세
628년 무함마드에 의해 점령되었던 카이바르 오아시스
그러다가 무함마드와 이슬람이 아랍 반도 및 전 중동의 역사를 바꾸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그나마 예멘과 바레인, 오만 해안 정도만이 찬란한 문명을 지녔던 것에 비해 현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은 이슬람 전까지 매우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덜컥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가 되며 히자즈 지방은 큰 번영을 누렸다. 다만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4대 칼리파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천도한 이래에 재차 종교적 명분을 제외하곤 소외되었다. 그후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페르시아, 남부 해안지대에 번성하던 토후국들, 오스만 제국 등등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은 있었으나 뭐가 나는 것도 아니고 별 쓸데가 없는 사막 땅이었기 때문에 메카와 메디나 빼고는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2] 그나마 종교적으로 중요한 히자즈 지방과 걸프의 무역 거점이던 동부의 알 하사 일대 (담맘, 카티프 등 바레인의 배후 지역)와 호푸프 오아시스 쪽만 외세의 관심을 끌었다. 호푸프는 10세기 메카의 카바를 공격한 것으로 유명한 중세 극단주의 쉬아 일곱이맘파 국가인 카르마트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아라비아 지방을 정복한 역대 왕조들은 그냥 토착 제후들이 원래 하는 것처럼 자기 마을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그나마 메카와 메디나는 신경썼다는 것도 이집트 맘루크 왕조든 오스만 제국이든 그냥 딱 형식적인 정복자들의 종교적 이데올로기 완충에게 도움이 될 만큼만 신경을 썼다지 실질적인 성스러운 도시 지방, 즉 헤자즈 지방의 행정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 아래 자치로 이루어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고향이지만 막상 이슬람 왕조들 입장에서도 정말 보탬이 되는 건 없는 주제에 사회 정치적으로는 악에 바친 베두인 씨족들이 꽉 잡고 있으며 한번 잘못 건드리는 벌집이 되는 골치아픈 지방이었다. 따라서 막상 역대 이슬람 제국들도 정통 칼리파 시대부터 훨씬 더 부유한 시리아, 이집트 일대를 점령하자마자 여기 있는 다마스쿠스, 알레포, 바그다드, 카이로 같은 유수의 대도시들이 이슬람 문화, 행정,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슬람 제국들의 역대 중심지는 종교, 정치 집단으로서 이슬람 자체가 팽창하면서 현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튀르크인들의 진주와 함께 아나톨리아, 나아가 오스만 제국때는 이스탄불, 동방으론 타브리즈, 이스파한 같은 페르시아나 인도의 델리 같은 다양한 장소로 확장했으나 아라비아 반도는 현대 예멘의 사나, 아덴 같은 무역 도시 몇개 빼곤 시종일관 이슬람의 성지란 허울좋은 타이틀 빼면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완전 뒷전이었다. 세금 바치는 사람만 달라질 뿐 이전까지 별다를 바 없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와하비즘의 열풍이 불면서 아라비아의 역사는 역동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3. 근대
1800년경 1차 사우디 국가의 영토
리야드 외곽에 위치한 디리야 궁전
- 디리야 토후국(사우디 제1왕국, 1744-1818)의 건국
1744년 종교학자 압둘 와하브와 토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동맹전선을 결성하고 디리야[3]에 국가를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 약 40년 동안 사우드의 영토는 디리야 근처의 아주 조그만 땅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우드는 그동안 칼을 갈며 병사들을 양성했고, 1780년대부터는포풍빠른 속도로 아라비아를 정복하여 1805년에는 메카와 메디나까지 정복한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 속주 군대를 보내 1814년 전쟁을 선포하고 1818년 디리야군은 패배하여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 네지드 토후국(사우디 제2왕국, 1824-1891)의 건국
그러나 사우드 가문은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투르키 이븐 압둘라가 다시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아라비아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맛이 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디리야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넓이의 영토를 거느릴 수 있었다. 하지만 투르키의 사후 사우드 가문은 내전으로 약화되었고, 본래 투르키의 집권을 도운 공신 세력으로 하일 지방에 봉해졌던 라시드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1년 망한다. 아라비아의 판도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의 자발 샴마르 토후국[4]에게 넘어갔다.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령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5]
- 리야드 토후국1902~1913-> 네지드-하사 토후국1913~1921 -> 네지드 토후국1921~1926 -> 네지드-헤자즈 왕국1926~1932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1932~(사우디 제3왕국)의 건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통일
1902년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하일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압둘 아지즈는 191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 하사 지역과 카티프를 빼앗아 영역을 확대했고, 1915년 영국과 다린 조약을 체결하여 보호령이 되고, 협상국에 가담하여 오스만에 맞선다.[6] 한참 티격태격하던 자발 샴마르 토후국(하일 토후국)을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7] 틈을 타서 공격하여 1921년에 완전히 병합한다. 그 이후 압둘 아지즈는 술탄을 자칭하며 국명을 네지드-하사 토후국에서 술탄을 선포하고 네지드 왕국으로 바꿨다.
한편 하심 가문의 샤리프 후세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에게서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 약속을 받아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의 왕으로, 삼남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후세인 본인은 메카와 메디나를 거점으로 한 헤자즈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아랍 통일 왕국을 세워주겠다던 영국의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24년 스스로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 선언했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같은 해 결국 네지드 왕국이 헤자즈 왕국을 공격했다. 후세인은 키프로스를 거쳐 차남이 다스리던 요르단으로 도망갔고, 헤자즈의 왕위는 그의 장남 알리가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압둘 아지즈에게 정복당하고 이라크로 추방되었다. 압둘 아지즈는 1926년 제다 함락 후에 성립한 네지드-헤자즈 이중 왕국을 다스리다가 1927년 제다 조약을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대영제국이 서명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을 인정 및 승인했고 1932년에 두 나라를 통합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1934년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아시르 지방을 합병하고 지금의 국경을 완성했다.
- 지금까지 나온 1-3차 사우디 국가, 히자즈 왕국, 하일 토후국 (자발 샴마르 / 라쉬드 왕조) 외에도 사우디의 북부와 동부와 남부에는 여러 군소 토후국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시르의 이드리스 왕조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해당 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4. 현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나서 6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사우디인들은 '근성의 사우드 왕가가 아니었다면 독립을 포기했을 것이고, 식민 상태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으면 지금의 국가가 아니라 헬게이트가 되었을 것이다' 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왕가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높다.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로또급 신세 역전을 한 계기는 누가 뭐래도 석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938년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동부 담맘 지역에서 처음으로 석유를 채굴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부터 이미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3년 세워진 사우디 최대의 석유회사인 '사우디 아람코'(SAUDI ARAMCO)의 이름이 '사우디 아라비아-미국 석유 회사)SAUDI ARabian-AMerica oil COmpany'에서 나왔다. 본인들 역시 석유 개발 기술력을 타국에만 의존하려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노하우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대 파이살 국왕(1964 ~ 1975 재위)은 석유를 무기로 이스라엘을 견제하며, 동시에 보수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여성학교를 세웠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고질적인 고민인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농장과 수도관 공사를 기획하며 국가 개혁을 이끌었으나, 1975년 3월 정신병을 앓던 조카 파이살 빈 무사드 왕자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이를 두고 미국 및 유대인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있고, 개혁을 반대한 와하브 보수파들도 파이살 국왕 제거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고 있으나, 그냥 미친 조카의 단독 범죄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무사드 왕자는 공개처형당했다.
1979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주하이만 알 우타이비(جهيمان العتيبي)의 주도로 수백 명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메카의 이슬람 성지인 카바를 점거하고 성지순례객들을 인질로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8] 이 사건의 결과로 종교세력을 의식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전국의 영화관을 폐쇄하는 등 극단적인 보수화 정책을 폈고, 2010년대 후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실권을 쥐기 전까지 이슬람권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보수적인 통치가 지속되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으나 이라크와 국경 분쟁으로 여러 번 사소한 전투가 있긴 했다. 그러나 21세기를 혼돈으로 몰고 가는 중동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가 와하비즘을 등에 업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탄생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성지를 가지고 있는 정통성과 엄청난 양의 석유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애증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의 탄생을 비롯한 중동의 문제는 대부분 석유 및 지중해와 인도양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지정학적 요소에서 나왔다. 석유 빼고는 자원이란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13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목금 주말제를 고수하다가 2013년 8월부터 목요일은 주중으로, 토요일은 주말로 해서 주말을 금토로 바꿨다.
2019년 9월 14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의 최대 석유 시설 두 곳이 예멘 반군의 무인기(드론) 공격을 받아 가동이 잠정 중단됐다. 이에 따라 국제유가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가동 중단 후 원자재 시장 개장과 동시에 10달러 넘게 가격이 폭등하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1 #2 #3 #4 그런 가운데 공격의 배후로 지목된 이란과 이라크는 9월 15일(현지시간) 각각 자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시설을 공격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1 #2 9월 20일(현지시간) 아람코의 책임자가 "9월 말까지 (원유) 생산량이 공격을 받기 전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
사우디 정부는 국책 관광사업과 관련해 공무원 여러 명을 비리 혐의로 해임했다.#
[1] 참고로 아라비아 부족이 악숨군을 물리친 그 해가 바로 '코끼리의 해', 즉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다.[2] 이슬람 왕국들이 갈라지고 난 뒤의 지도를 보면 대개 색칠이 되어 있지 않다.[3] 아라비아 정중앙에 있는 마을이다.[4] 하일이라는 도시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하일 토후국이라고도 한다.[5] 이때 하일 토후국에 병합되지 않은 동부의 소규모 토후국들이 훗날 아랍 에미리트가 된다.[6] 이후 1927년 제다 조약으로 영국에게 독립을 인정받았다.[7]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1차 대전 당시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8] 자세한 내용은 메카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