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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즈란 시가지 |
1680년대에 세워진 알 아안 궁전 |
나즈란 구도심의 도로 |
1. 개요
아랍어: نجران영어: Najran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 나지란주의 주도. 압하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나지란으로도 불리고, 인구는 약 55만명이다. 예멘 국경에서 불과 7km 떨어져 있고, 1934년 이전까지는 예멘계 국가들의 영토였기에 지금도 예멘 문화가 짙게 남아 있다. 쿠란에도 언급될 만큼 유서가 깊은 도시이며, 향료 무역의 거점으로 발달하였다. 옛 지명은 알 우크두드(الأخدود)이며, 와디 나즈란 남안에 유적이 남아있다. 현대 도시는 강의 북안에 자리한다. 17-20세기 초에는 예멘계 나즈란 토후국의 수도로 번영하였고, 1934년 사우디아라비아에 병합되었다. 시가지가 해발고도 1200m에 자리하였기에 여름에도 40도 미만이고, 겨울에는 5도까지 떨어지는 등 압하나 타이프와 함께 사우디에서는 시원한 곳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나즈란은 남부 아라비아의 기독교 중심이었고, 6세기 초엽 힘야르 왕국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20세기 초까지는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다. 현재는 카티프, 호푸프와 함께 사우디에서 쉬아 무슬림이 다수인 몇 안되는 도시이다. 다만 전자와 달리 쉬아 중에서도 이스마일파가 다수를 이루고, 북부 예멘의 주류인 자이드파 공동체도 존재하며 수니파 역시 존재한다. 예멘식 직물업이 발달하였고, 카바에 씌우는 키스와가 바로 나즈란에서 제작된다. 시내에는 옛 진흙 건물들이 남아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낸다. 동부의 신도시 기준 동쪽 10km 지점에 나즈란 공항이 있고, 그 옆에는 나즈란 대학이 위치한다. 북쪽 60km 지점에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히마 암벽화가 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예멘 내전에 사우디가 개입한 결과, 이따금씩 후티 반군이 국경을 넘어 반격하고 미사일을 날리는 등 긴장이 고조되어 출국 권고 지역이 되었다.
2. 역사
알 우크두드 유적 |
지명 나즈란의 유래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첫 정착민인 나즈란 빈 자이단 빈 사바 빈 야흐줍 빈 야룹 빈 카흐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다만 상술했듯이 본래 지명은 알 우크두드 (الأخدود)였다. 고대 예멘에서 히자즈, 시리아, 이집트, 바레인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모두 이곳을 지났기에 도시는 번성하였다. 기원전 685년 마리브를 중심으로 한 사바 왕국의 카르빌 와타르 1세가 일대를 점령하였다. 사바 왕국 시기에 도시는 라그마트로 불렸고, 기원전 510년 국왕 이티아마르 바인에 의해 파괴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재건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25년, 로마의 이집트 총독 아엘리우스 갈루스는 예멘 (아라비아 펠릭스) 원정에 나서 나즈란에서 현지 군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갈루스는 로마인들에게 '네그라나'라 부른 나즈란을 거점으로 삼고 남하하였으나 마리브 함락에 실패하고 후퇴하였다. 이렇듯 나즈란은 예멘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275년에 사바 왕국 대신 그 방계 가문이 세운 힘야르 왕국이 예멘의 패권국으로 떠올랐고, 나즈란 역시 힘야르 군주 샴마르 야흐리쉬에게 점령되었다. 다만 독립성이 강했던 나즈란 주민들은 바다 건너 악숨 왕국에 복속하며 자립을 시도하였고, 이에 후자에선 총독 스클름클름을 파견하였다. 다만 샴마르의 후계자인 일샤라흐 야흐디브에게 진압되었다. 328년에는 라흠 왕국의 군주 이므르 알 카이스 빈 암쿠의 공격을 받기도 했던 나즈란은 5세기 초반에야 확실히 힘야르 왕국령이 되었다. 한편 악숨 왕국의 영향력은 여전하였고, 320년대 악숨이 기독교를 수용하자 나즈란에도 역시 기독교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354년에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파견된 소코트라 섬 출신의 아리우스파 주교 '인도인' 테오필로스가 남부 아라비아에 파견되어 기독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다만 일대의 패권국인 힘야르 왕국은 380년 유대교를 국교로 삼았고, 이는 향후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2.1. 기독교 도시
나즈란에서 출토된 비석의 십자가 | 나즈란의 성 아레타스 (알 하리트)의 순교를 묘사한 바실리오스 2세 시기의 성화 |
종교에 있어 나즈란 주민들은 본래 큰 대추야자수를 숭배하였다. 매년 축제 때면 야자수에 가장 좋은 옷과 장신구를 걸어 두고 다같이 모여 하루종일 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2.1.1. 나즈란 학살 (520년경)
알 아크두드의 신도들이 살해되었으니, 장작 위의 불에, 그들은 앉아있었으며, 저들이 신도들에게 저지른 것에 대한 증인들이노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그들을 박해했노라. (쿠란 85장 4장 ~ 8장)
박해를 겪은 나즈란 주민들은 6세기 들어 다시 같은 종교인 악숨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517년에 정변으로 집권한 유수프 야사르 (두 누와스)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성직자들과 결탁하였고, 나즈란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 시나고그 (유대 회당)를 세웠다. 518년 혹은 524년, 그는 기독교도들이 시나고그에 방화했다는 이유로 보복에 나서 나즈란을 포위하였다. 도시는 곧 항복했으나 두 누와스는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은 약 2천 (혹은 2만)을 카바트 나즈란 교회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러 성지 훼손과 학살을 동시에 자행하였다. 혹은 불타는 구덩이에 던졌다고도 한다. 이 사건은 쿠란에도 제84장 (알 부루즈)에 언급되었으며, 살해된 기독교도들을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측에서도 동방과 서방을 가리지 않고 이를 추모하며, 주교 알 하리트 (성 아레타스)를 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학살의 원인은 단순한 종교 갈등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후자의 편을 든 두 누와스가 동로마와 악숨에 우호적이던 기독교 세력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학살 후 두 누와스는 라흠 왕국과 사산 조에 사절을 파견해 자신과 같은 기독교도 숙청을 제안했는데, 같은 기독교도였던 라흠 국왕 알 문디르 3세가 당시 수도 알 히라에 와있던 동로마 사절에게 전말을 알려주어 동로마 전역에 나즈란의 참극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두스 두 탈라반 등의 주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맹인 악숨 왕국의 엘라 아스베하 (칼렙)에게 예멘 침공을 지시하였다. 당시 우미야가 이끄는 다른 피난민들이 악숨에 당도한 터라 사건을 알고 있던 칼렙은 장군 아브라하 알 아쉬람에게 7천 군대를 주어 파견하였다.
525년 아브라하는 예멘을 침공해 두 누와스를 전사시킨 후 기독교도 왕공 숨야파를 힘야르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다만 535년 예멘에 계속 주둔하던 아브라하가 반란을 일으켜 숨야파를 폐위시켜 감금하고 스스로 자립해버렸다. 이로써 힘야르 왕국은 멸망하였고, 아브라하는 악숨 본국의 원정을 격파하고 570년 사산 제국에게 축출될 때까지 예멘을 다스렸다. 그가 한때 카바의 순례객 유치를 시기하여 메카 원정에 나섰던 일화가 유명하다. 한편 아브라하에 의해 복구된 나즈란은 이후 카바에 버금가는 아라비아 반도의 순례지가 되었고, 아브라하는 사나와 함께 이곳에 큰 교회를 세웠다. 사산 제국의 정복 후에도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별탈 없이 유지되었고,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이 공존하는 교역 도시로 남았다.
2.1.2. 나즈란 협정 (631년)
하나님을 대신하여 내가 협약을 맺었기에,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를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지원이나 도움 없이 그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ㅡ 무함마드, 나즈란 협정을 맺으며
ㅡ 무함마드, 나즈란 협정을 맺으며
7세기 들어 히자즈에서 발흥한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무함마드는 통상적으로 군사 행동에 앞서 서신을 보내어 개종을 권유했는데,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 제국 외에 나즈란에도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서신을 전달하였다. 나즈란 주민들이 거부하자 무함마드는 이례적으로 알 무기라를 재차 파견해 이슬람을 더 설명하게 하였다. 그러자 나즈란측 역시 킨다 부족장 압둘 마시흐, 주교 압둘 하리스 등 45인의 학자들을 포함한 60인의 대표단을 메디나로 파견하였다. 무함마드는 일부 무슬림들의 반발에도 대표단이 모스크에서 기도할 수 있게 허가하였고, 그들은 동쪽을 보고 예배를 올렸다. 무함마드가 제공한 숙소에 머물며 대표단은 신학 토론을 벌였다. 무함마드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고, 이슬람이 참된 종교라고 결론내렸다. 양측은 서로를 설득하는데 실패했지만, 친선을 맺었다.
일명 나즈란 조약이라 불리는 평화 협정에서 기독교도들은 생명, 종교,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기독교 신앙과 관습은 침해되지 않고, 십자가 역시 파괴되지 않도록 합의되었다. 그 대가로 기독교도들은 지즈야를 납부해야 했지만 십일조 (우슈르)는 면제되었고, 세금은 그들의 재산을 초과하지 않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 사후 10여년이 흐르고 칼리파 우마르는 '아라비아 반도에는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없다'는 하디스를 근거로 들며 나즈란의 기독교도들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명하였다. 따라서 다수의 아랍계 기독교도들이 시리아나 이라크로 향하였다. 전자는 시리아 남부 하우란 지역에 고향의 이름과 같은 나즈란을 세웠고, 후자는 쿠파 주변에 앗 나즈라니야를 세워 정착하였다. 다만 나즈란의 기독교도가 전부 떠난 것은 아니었고, 9세기까지 상당수 남아있었다. 알 하디 야흐야가 897년 자이디 이맘국을 세울 때에도 나즈란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과 협력했다고 한다.
2.2. 중세
페르시아인 이븐 알 무자위르에 의하면 서기 1000년 경에도 나즈란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가 모두 인구의 1/3씩 구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13세기를 끝으로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소멸하였고, 유대인 공동체만 이어졌다. 기독교도 구역이던 알 우크두드는 자이디 이맘국과 라술 왕조 간의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고, 와디 건너편에 세워진 나즈란은 이슬람 문화가 깊게 배여든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중세 시기 나즈란은 무함마드 시대부터 철제 무기 제조로 유명했는데, 점차 유대인 수공업자들을 중심으로 한 직물업이 더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시기 나즈란은 함단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그 국교이던 쉬아 이스마일파가 유입되었다. 11-12세기 이스마일파가 분열되던 때에 함단 조는 파티마 왕조와 마찬가지로 하피지 계열을 택하였다. 1174년 아이유브 왕조가 함단 조를 멸한 후 나즈란은 대부분의 시기 서남쪽으로 60km 떨어진 사다를 기반으로 한 자이디 이맘국에 속하였다.2.3. 나즈란 토후국
자세한 내용은 나즈란 토후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680년대 나즈란 토후국의 왕궁으로 세워진 알 아안 궁전
2.4. 현대 : 이스마일파 봉기
1943년 압둘아지즈 국왕이 건설한 아마라 궁전 (قصر الأمارة )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는 앞서 언급된 셰이크 자비르 아부 사크를 통해 나즈란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로 합의하였다. 압둘아지즈는 1942년 나즈란에 아마라 궁전을 세우는 등 애정을 보였고, 이는 후에 총독궁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천년 이상 공존하던 유대인들은 사우디 지배 후 탄압이 심해지자 1949년 10월, 국경을 넘어 아덴으로 피신하였다. 압둘아지즈는 이들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예멘의 야흐야는 그들이 예멘계라며 거부하였다.[1] 그후 20세기 후반 들어 나즈란은 신도시 개발지로 선정되어 기존 시가지 동쪽에 현대식 도시가 세워졌다. 따라서 1974년 5만 이하이던 인구는 1992년 9만, 2004년 25만을 거쳐 현재 50만이 넘는다. 하지만 이로써 타지의 순니 주민들이 유입되며 기존 이스마일파 주민들과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6년 총독으로 부임한 미샤알 빈 수우드는 토착인의 주류인 이스마일파를 공직 임명과 재판 등의 영역에서 차별하여 반발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2000년 초엽 종교 행사일에 이스마일파 모스크가 폐쇄되며 폭발하였다. 4월 23일 경찰이 이스마일파 성직자를 체포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무장까지 갖춘 시위대는 미샤알 총독이 거처하던 홀리데이 인 (현 글로리아 인) 호텔에서 군경과 대치하였고, 몇시간의 요청에도 총독이 대면 협상을 거부하자 양측의 총격전이 이어졌다.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후 시위대는 이스마일파 구역인 쿠샤이와에서 농성하였고, 사우디 군이 일대를 포위하였다. 다만 몇 시간이 지난 후 시위대가 해산하며 더이상의 사상자 없이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수십명의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수감되었고, 21세기 들어서도 총독이 공개적으로 이스마일파를 모욕하고 와하비파를 비판한 이를 해고하는 등 부조리는 이어지고 있다.
2.5. 유적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계유산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문화유산 | 2008년 알 히즈르 고대유적 (마다인 살리흐) الحجر (مدائن صالح) | 2010년 앗 디리야의 앗 투라이프 구역 حي الطريف في الدرعية | 2014년 유서 깊은 제다, 메카로 향하는 관문 جدة التاريخية |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하일 지방 암각화 الفنون الصخرية في منطقة حائل (جبة والشويمس) | 2018년 알 아흐사 오아시스, 진화하는 문화 경관 واحة الأحساء، منظر ثقافي آخذ بالتغير | 2021년 히마 문화지구 منطقة حمى الثقافي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