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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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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로코 마라케쉬 8.jpg
시가지 전경과 멀리 보이는 아틀라스산맥
파일:모로코 마라케쉬 7 (2).jpg
전세계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제마 엘프나 시장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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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마라케시의 메디나
영어 Medina of Marrakesh
아랍어 مدينة مراكش
프랑스어 Médina de Marrakech
국가·위치 모로코 마라케시사피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5년
등재기준 (i)[1], (ii)[2], (iv)[3], (v)[4]
지정번호 331
마라케시 (모로코)

Marrakech, مراكش

1. 개요2. 역사3. 관광4. 교통5. 기타

[clearfix]

1. 개요

모로코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 현재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페스와 비슷한 수준이며 모로코 국내에서는 네 번째로 큰 도시다. 무라비트 왕조의 수도로 세워져 무와히드 왕조의 수도로 연이어 번영했고, 16-17세기 사드 왕조 역시 이곳을 수도로 삼았던 덕에 아직도 그 때의 번영상이 많이 남아있다. 주민들은 아랍계와 베르베르계가 거의 반반씩 공존하고 있다.

지명은 베르베르어로 "신의 땅"을 의미하고, 대다수 언어의 모로코 국명이 이 도시에서 유래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한국어 명칭은 당연히 영어를 따른 것.)[5] 등 거의 모든 언어의 통칭이 이 도시에서 따른 변형이다. 심지어 페르시아어에서는 모로코를 마라케시라고 칭하기에, 그냥 마라케시라 하면 국가와 도시가 혼동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2. 역사

본래 베르베르인 농부들이 살던 지역으로, 많은 석기가 발견되었다. 그러던 1072년 (혹은 1062 ~ 1078년), 무라비트 왕조의 전성기를 일군 유수프 빈 타슈핀의 6촌 겸 재상인 아부 바크르 빈 우마르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세웠다.

2.1. 무라비트 왕조

파일:카스바 모로코 마라케쉬 (2).jpg
무라비트 왕조 시기인 1126년에 세워진 성벽. 메디나(구도심)를 두르고 있다.

마라케쉬는 건설 직후 곧바로 무라비트 왕조의 수도가 되어 성장했다. 시내에는 모스크와 시장, 궁전인 라바트 알 카스르,(현 쿠투비야 모스크 인근에) 시타델인 카스르 알 핫자르 등이 들어섰다. 무라비트 시기의 건물 자체는 뒤이은 무와히드 왕조의 파괴로 성벽 정도만 현존하지만, 당시의 궁전 앞 광장이 오늘날 제마 알파나 시장이 되는 등 도시 구조에는 큰 흔적을 남겼다. 마라케쉬는 또한 마그레브서아프리카사헬 지방을 잇는 사하라 횡단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했고, 오랜 기간 일대의 중심이던 아그마트를 추월한 종교적 & 문화적 중심지로 거듭났다.

무라비트 왕조가 안달루스로도 팽창함에 따라 코르도바세비야 출신의 장인들이 마라케쉬에 여러 화려한 건축물을 남겼는데, 여러 장식 기법들 중에서도 코르도바-우마이야 양식의 다각형 돔과 말굽 아치가 유명했다. 여기에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건축술이 더해져 마라케쉬 시가지는 독특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군주들도 가세하여 유수프 빈 타슈핀은 여러 저택을 짓고, 동전을 주조하고, 카라반 (대상)을 통해 도시에 금과 은을 가져왔다. 그의 후계자 알리 빈 유수프는 1120-32년에 대사원으로 벤 유세프 모스크를 세웠고, 1126-27년에는 도시에 성벽을 둘렀으며 '케타라'라 불린 지하 수로를 통해 안정적으로 물을 보급했다.

2.2. 무와히드 왕조

파일:쿠투비아 모로코.jpg
무와히드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이 세운 쿠투비야 모스크. 시내 어디서든 보이는 77m 높이의 미나렛으로 유명하다.
파일:Pavillon_Menaragärten.jpg
아브드 알 무민이 세운 메나라 정원

이러한 인프라 구축으로 성장하던 마라케쉬는 1125년, 남쪽의 틴멜 산지에서 조직된 무와히드 왕조의 도전에 직면했다. 비록 1130년 무와히드 군의 포위는 격퇴되었으나, 잔당을 규합한 아브드 알 무민이 모로코 북부를 평정한 후 1146년 말엽 마라케쉬를 재차 포위하여 6개월이 넘는 공성전 끝에 함락하였다. 이때 3일에 걸쳐 무라비트 왕실과 그 추종 세력 3만여명이 학살되었고, 주요 건물들도 모두 파괴되었다. 1147년 아브드 알 무민은 파괴된 무라비트 시기 대사원 옆에 현재까지도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쿠투비야 모스크를 건립했고, 1157년에는 메라나 정원을 조성했다. 그의 후계자 아부 야쿱 유수프는 아그달 정원을 조성했고, 야쿱 알 만수르는 도시 남부에 시타델 및 궁전을 포함한 카스바를 세웠다. 또한 기존의 지하 수로도 보수되었고, 정원들의 관개를 위한 수로도 더해졌다. 압바스 왕조에 맞선 이슬람 서부의 무와히드 칼리파의 수도로써 마라케쉬는 매우 번영했고, 이븐 루시드 등 안달루스 출신 지식인들이 활약했다.

파일:모로코 마라케쉬 5 (2).jpg
야쿱 알 만수르에 의해 세워진 카스바 성벽
파일:모로코 아그나우.jpg
카스바의 정문인 밥 아그나우

1224년 유수프 2세의 사후 무와히드 왕조는 쇠퇴했고, 안달루스외 모로코 파발 간의 내전이 이어졌다. 우선 안달루스의 압둘라 알 아딜이 집권했지만, 모로코 파벌이 유수프 2세의 동생 야흐야를 옹립하며 맞섰다. 1227년 압둘라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이드리스 알 마문이 또다시 안달루스 파벌 및 카스타야측 용병과 함께 남하해 1229년 마라케쉬를 점령했다. 이드리스는 야흐야를 따르던 셰이크 (부족장)들을 학살하고 카스바 모스크에서 이븐 투마르트의 교리를 타파했다. 그는 또한 카스티야 용병들을 위해 마라케쉬에 교회 설립을 허가했다. 1232년, 이드리스의 사후 그의 아내는 군부 및 카스티야 용병대에게 도시 약탈을 허가하는 대가로 인기가 없던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군부 측에 50만 디나르를 바쳐 무마시켰고, 대립 칼리파를 세워 자립했다가 1236년에야 알 마문의 아들을 인정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안달루스는 3차 타이파 시대 및 기독교 세력의 남하로 무와히드 조의 영향력에서 이탈한 상태였기에 더 이상 두 파벌 간의 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듯 혼란은 있었지만, 1248년부터 가속화 된 제국의 붕괴 속에서도 개국 공신 세력인 아흘 앗 다르와 부족 셰이크들의 노력으로 마라케쉬만큼은 무와히드령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1262년, 마린 왕조아부 유수프 야쿱이 마라케쉬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그는 내분을 조장, 꼭두각시 칼리파 알 와시크를 세웠으나 그 역시 약속한 마라케쉬 할양을 거부했다. 이에 1268년, 마린 군대는 재차 마라케쉬를 포위했고 1년이 걸친 공성전 끝에 1269년 9월에 함락했다.[6] 이로써 마라케쉬는 123년간의 번영을 마감했다.

2.3. 쇠퇴기

마린 왕조 시기 모로코의 수도가 페스로 돌아가며 마라케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쇠락했다. 1374년, 내전을 틈타 페스의 술탄과는 별개로 마린 왕공 압둘 라흐만 빈 얄푸신이 마라케쉬에서 자립해 술탄이 되었으나 1383년에 살해되며 마린 왕조는 통합되었다. 15세기 말엽 와타스 왕조는 남부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고, 힌타타 부족이 마라케쉬에서 자립했다. 한편 1505년 아가디르를 점령한 포르투갈이 1515년 마라케쉬를 공격하자 수스의 사드 왕조가 격퇴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4. 사드 왕조

파일:모로코 영묘.jpg
1523-24년에 건설된 알 자줄리, 알 카임 영묘
파일:모로코 두칼라 사원.jpg
압둘라 알 갈립 1세가 건설한 두칼라 사원

1521년, 사드 조의 아흐마드 알 아라즈는 힌타타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나시르 부 샨투프의 딸과 결혼한 후 도시에 무혈입성하였다. 그리고 1524년, 아흐마드는 장인을 암살하고 카스바 (시타델)를 장악하며 마라케쉬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었다. 아흐마드는 부친 알 카임과 수피 성인 알 자줄리의 유해를 마라케쉬에 안장했다. 그는 또한 1527년과 1529년 두 차례에 걸친 와타스 왕조의 마라케쉬 공격을 격퇴했다. 한편 마라케쉬 천도 후 소외감을 느끼던 수스의 부족들을 규합한 그의 동생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1541년 아가디르를 점령해 마라케쉬의 안보를 확보, 명성을 얻었다. 이후 내전을 통해 형을 폐위하고 집권한 무함마드 앗 셰이크 역시 마라케쉬를 수도로 삼았고, 1549년에는 페스를 함락하며 마라케쉬는 무려 3세기 만에 모로코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무함마드 앗 셰이크를 계승한 아들 압둘라 알 갈립은 마라케쉬에 벤 유수프 마드라사와 사디 영묘를 세우고 카스바 궁전과 사원을 보수하는 등 여러 건설 활동을 벌였다.

파일:모로코 궁전.jpg
1578년에 세워진 엘 바디 궁전
파일:모로코 마라케쉬.jpg
1620년경 세워진 마드라사의 시디 벨 압베스 마드라사

1578년,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집권한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이탈리아산 대리석 등 값비싼 자재들로 엘바디 궁전을 건설했다. 그는 이 궁전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어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며 모로코의 국력을 과시했다. 이후로도 사드 술탄들은 말리의 황금 등 막대한 재물을 투자하여 마라케쉬를 재차 대도시로 부상시켰고, 도시는 사하라 이남과 지중해권을 잇는 무역 도시로써 번영했다. 다만 1603년 아흐마드의 사후 사드 왕조는 그 아들들이 내전을 벌이고, 페스와 마라케시에 두 술탄이 집권하여 20년 이상 분열되며 쇠퇴하였다. 1612년에는 마흐디를 칭한 아부 마할리가 마라케쉬를 장악했고, 기존의 술탄 지단 앗 나시르는 국외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그 직전에 아들라스 고원의 부족장 야흐야 이븐 아불라 알 하히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도시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27년, 지단의 아들이 사드 왕조를 재통합하나 이미 각지에 지방 정권들이 들어선 후였다. 1655년, 어린 술탄 아흐마드 알 압바스가 즉위할 무렵 그의 권위는 마라케쉬-사피 일대에 그쳤다. 그리고 1659년, 섭정이던 외척 아불 카림 아부 바크르 앗 샤바니가 외조카를 암살하고 스스로 집권하며 사드 왕조는 한세기 반만에 멸망했다.

2.5. 알라위 왕조

파일:바히아 모로코.jpg
19세기 알라위 왕조의 대재상 저택이던 바히아 궁전
파일:Ben_Youssef_Mosque_(52188886638).jpg
무라비트 시기에 세워져 사드-알라위 시기에 재건된 구도심 한복판의 벤 유세프 모스크

다만 앗 샤바니 역시 남부 일부만 통치했고, 페스의 딜라이야 정권과 시질마사의 알라위 왕조가 주도권을 놓고 대립했다. 그러던 16알라위 왕조의 물라이 알 라시드가 1666년 페스, 1668년 마라케쉬를 점령하며 모로코를 재차 통일했다. 근대 알라위 왕조 시기에 마라케쉬는 비록 수도는 아니었지만 술탄들이 종종 방문하였고 와지르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한편 몇세기간 모로코의 7 수호천사 (사바아 리즈젤)의 안장지로 여겨진 마라케쉬는 17세기 말엽 수피즘의 유행과 함께 종교적 성지가 되어 갔다. 특히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학자 아부 알리 알 하산 알 유시에게 성인들을 기리는 축제를 만들게 했고, 실제로 순례객 유치를 위해 몇몇 유명 성인들의 무덤을 마라케쉬로 이전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까지 여러 무덤들울 참배하는 절차 및 의례가 이어진다.[7] 따라서 1867년 전까지 유럽 기독교도들은 술탄의 특별 허가 시에만 마라케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다만 페스 엘 발리의 경우와는 달리 유대인에게는 제약이 없었다.

2.6. 근현대

파일:Thami_El_Glaoui.jpg
20세기 전반 내내 마라케쉬를 지배한 트하미 엘 갈루이

격동의 19세기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던 마라케쉬는 1900년 대재상 바 아흐메드가 요절한 후 모로코는 부족 반란, 외세의 간섭, 호족들의 분규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1907년, 마라케쉬에서 스파이로 의심받던 프랑스 의사 모샹이 암살되었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우지다를 점령, 카사블랑카에 파병했고 후자에서도 봉기가 일어나자 진압힌 후 역시 점령했다. 그러자 술탄 압델아지즈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마라케쉬의 울라마와 중부 아틀라스 부족장들은 그의 동생이자 현지 칼리파 (총독)이던 압델하피트를 술탄으로 추대했다. 이듬해 압델하피트는 페스를 점령하고 집권했지만, 그 역시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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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이후 조성된 신시가지

1912년 3월, 결국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자 남부에서 셰이크 마 알 아이나인의 아들 아흐메드 알 히바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 히바는 부족들의 지지외 함께 그해 8월, 마라케쉬에 입성했다. 하지만 곧바로 프랑스 군이 인근 시디 부 우스만 전투에서 알 히바를 격파하며 도시를 점령했고, 프랑스 측으로 전향한 임즈와른 부족의 갈루아 가문의 조력 하에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이후 친프랑스 부족장인 '아틀라스의 영주' 트하미 엘 갈루이가 마라케쉬의 파샤가 되어 1956년까지 무려 44년간 재임했다. 그는 독립을 요구한 모하메드 5세를 폐위하고 벤 아라파를 옹립하는 일에 적극 가담했고, 이로써 프랑스 당국에게 더욱 인정을 받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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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쿠투비야와 시가지 전경

하지만 그 역시 민족주의 여론을 막지 못했고, 알제리 독립전쟁과 함께 프랑스가 모로코 독립을 인정하자 수용했다. 1955년 11월, 모하메드 5세가 복위하자 얼마후 트하미 역시 축출되었고 1956년 3월 모로코는 독립했다. 그후 마라케쉬는 관광 도시로 발전했고, 그 독특한 분위기 덕에 60-70년대에 '히피들의 메카'로써 여러 락스타 / 예술가 / 가수 / 영화 감독 및 배우들이 찾는 등 유행을 탔다. 대표적으로 비틀즈, 롤링스톤즈 등이 장기 체류했고 1965년부터 마라케쉬는 모로코 최대의 관광 수입원이 되었다. 로랑 등의 프랑스 명사들은 시내의 궁전과 정원들에 투자했고 메디나의 옛 건물들은 보수되었으며 여러 새 주택들과 호텔 및 교외의 체류자 마을들이 생가났다.

2.7.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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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풍 고급 호텔 중 하나인 소피텔 호텔

1985년, 마라케시의 구도심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94년 4월, 마라케시 협정으로 세계 무역 기구가 발족하였다. 1997년 3월에는 1차 세계 물 포럼이 열렸고, 2000년대 들어 부동산 붐이 일었다.

2011년 4월,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 알카에다 연계 폭발 테러가 벌어져 15명이 죽었고 아르가나 카페가 소실되었다. 사망자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2016년 마라케쉬에서는 유엔 기후변화 회의가 열렸고, 2023년 9월에는 3천여명이 희생된 마라케시 대지진을 겪었음에도 이듬달 세계 금융 기구 및 세계 은행 회의가 열렸다. 지진으로 일부 훼손된 유적들은 빠르게 대부분 복구되었다.

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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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관광객이 많은 쿠투비야 모스크

모로코 관광에서 빠뜨리면 안 되는 도시로 손꼽힌다. 페스와 함께 모로코의 양대 고도 중 하나인 마라케쉬의 메디나(구도심)는 아예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호텔과 식당, 카페 등도 많고 관광객들도 매우 많다.

주요 관광지로는 자마 엘 프나 시장, 메디나, 쿠투비아 모스크, 야자나무 숲, 아르간 나무, 사디안 묘, 바히야 궁전, 엘 바디 궁전, 다르 시 사이드 박물관 등이 있다. 메디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으며, 자마 엘 프나 시장은 밤에 화려한 야경을 보여준다.

짧은 시간 체류한다면 주로 서로 인접한 쿠투비야 모스크와 자마 엘 프나 시장을 방문하는 편이다.
파일:1280px-Saadier-Gräber.jpg파일:Saadian_Tombs_(5038944236)_(cropped).jpg
사디 영묘 중 가장 두드러지는 아흐마드 알 만수르의 모친 랄라 마수다의 돔
한펀 이슬람 예술, 특히 안달루스 예술에 관심이 많다면 멀리 스페인까지 갈 필요 없이 사드 왕조 ~ 힌타타 토후국까지 16-17세기에 마라케쉬의 군주들이 묻힌 사디 영묘 방문을 추천한다. 포르투갈을 무찌르고 영토를 남쪽의 말리까지 넓힌 술탄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서아프리카 황금으로 아낌없이 지출하여 안달루스 양식으로 지은 영묘로, 이슬람권 영묘들 중 무함마드 일가 및 성인이 아닌 군주의 것으로는 타지마할 다음으로 화려하다 여겨진다. 지금도 순례객이 있어 모로코 당국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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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복잡한 골목을 누비며 전통시장을 경험하고 골동품을 쇼핑하는 것도 한가지 묘미이다.

하지만 바가지가 굉장히 심한데, 안 그래도 전체적으로 바가지가 심한 모로코에서도 악명이 높다. 오죽하면 현지인에게도 바가지를 씌우는 곳이라는 악명이 있을 정도. 그만큼 흥정은 필수. 만약 얼마에요[8], 너무 비싸요[9] 등 기초 아랍어 회화에 아랍어 숫자를 알고 간다면 호구당할 확률은 크게 줄어들긴 하다. 덧붙여 모로코 특유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유의해야 한다.

모로코에서 사막 투어를 시작하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페스에서 시작하거나, 사하라 사막 깊숙히 메르주가에서 바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마라케시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행사만 해도 수십 곳이 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여행사마다 가격과 질이 천지차이라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숙소에도 한번 아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고 잘 비교해야 한다.

4. 교통

모로코 내 철도간선의 남방 한계지이며, 시계외에 마라케시 메나라 국제공항 또한 위치해 있다. 도시 간 도로 또한 편리하다.

5. 기타

  • 유명 국제 영화제 중 하나인 마라케시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다. 모로코는 아랍, 아프리카 문화가 섞여 있으면서도 다른 아랍/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안정된 국가이기 때문에 관련 배경을 담은 영화 촬영지로 애용되기 때문. 거기에다 사막과 만년설 덮힌 산도 있어 자연환경을 담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모로코 정부도 이를 알고 홍보를 위해 외국 영화 스탭들에겐 20% 감세를 제공하고 숙달된 현지 스탭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 산업이 발달했고, 마라케시가 그 허브 역할을 하는 중.
  • 뜻밖에도 헌법과 행정법 수험생에게도 유명한 도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국제조약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GATT 체제 하의 마라케시 협정이 꼽히기 때문. 특정 지방자치단체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학교급식을 위해 위 지방자치단체에서 생산되는 우수 농수축산물과 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가공식품(이하 '우수농산물'이라고 한다)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그러한 우수농산물을 사용하는 자를 선별하여 식재료나 식재료 구입비의 일부를 지원하며 지원을 받은 학교는 지원금을 반드시 우수농산물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위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안이 내국민대우원칙을 규정한 '1994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1994)에 위반되어 그 효력이 없다고 한 사례.[10]

    위의 내용과 연장선상에서, 기존의 GATT가 현재의 세계무역기구(WTO)로 전환되는 협정을 확정지은 총회가 1994년 이곳에서 열렸다. 이 점에서 세계 경제, 무역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 히트맨 시즌 1 메인 에피소드 3의 배경이 된 도시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모로코 국민들의 예금을 횡령한 죄로 기소된 스웨덴 출신 은행가 클라우스 휴고 스트란드버그가 재판소로 이송되는 당일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에 의해 풀려나 스웨덴 영사관치외법권을 무기로 틀어박히자, 분노한 모로코 국민들이 영사관 앞에 몰려들어 시위를 하고 있으며, 이에 모로코군의 레자 자이단 장군이 마라케시에 계엄령을 선포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는 모로코 정부가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자이단 장군의 음모로 스트란드버그의 탈출에도 그가 개입해있다. 물론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창작일 뿐, 실제로 마라케시에는 스웨덴 영사관이 없다. 다만 배경으로 나오는 시장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마 엘 프나 시장과 매우 흡사하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페스타나 CR7(Pestana CR7)이라는 호텔 체인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도 체인을 가지고 있다. #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5] 다만 터키는 다른 수도였던 페스를 따라 파스라고 부른다.[6] 도주하던 알 와시크는 노예에게 죽으며 무와히드 조는 완전히 멸망했다[7] 나병 환자였던 시디 유수프 알리 산하지 (12세기 말), 무함마드 관련된 앗 쉬파의 저자인 세우타의 카디 이야드 (1083–1149), 도시의 수호 성인인 시디 벨 압바스 (1130–1204), 자줄리 수피 종단을 창건한 시디 무함마드 알 자줄리 (15세기 중반), 알 자줄리의 제자인 압델아지즈 앗 테바 (16세기 초반), 압둘라 알 가즈와니 혹은 물라이 알 크수르 (16세기 초중반), 시디 아불 카심 (이맘) 앗 수하일리 (12세기 말) 순으로 참배한다.[8] 캄 씨으르?[9] 카티르 가알리[10] 쉽게 말하면 전라북도 학교급식조례가 신토불이 마인드로 특정 식재료에 보조금을 주는 내용을 담았는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국제조약에 어긋나는 내용이라 위법 무효하다는 판결을 받은 사례이다.